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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26. 2020

레반 아킨,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밤에 피는 꽃

레반 아킨(Levan Akin),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And Then We Danced) 

- 밤에 피는 꽃

“춤추는 자의 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몸, 그것의 비유와 정수가 바로 자기-희열적 영혼이다 그리고 이러한 몸과 영혼의 자기-희열이 스스로를 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때로는 사뿐히,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거칠게 춤을 추는 우리, 춤추고자 하는 우리는 도움닫기를 하며 도약을 준비하고, 이내 곧 나의 발은 대지와 찰나적으로 멀어진다. 발뿐만 아니라 움츠러들었던 손과 팔도 사방을 향해 널리 쭉쭉 뻗어 나가며, 우리의 머리는 햇볕과 달빛을 받고자 머나먼 하늘 위로 고개를 쳐든다. 그렇게 우리의 온 육체가 창공을 향해 일순간 날아든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러한 자유 및 해방과 관련된 춤의 속성을 논한 바 있다. 그는 정신과 영혼이 열등한 육체에 갇힌 것이라는 서구의 전통적 패러다임에 반대한다. 니체에게 육체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기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우리가 갖게 되는, 날 것의 ‘몸’ 그것 자체를 긍정한다. 이러한 몸의 예술에 다름 아닌 춤을 두고, 중력의 악령으로부터 일순간 해방되고 멀어지는 것이라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에게서 악령에 다름 아니라 규정되는 중력, 이 영에 깃든 악마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그리고 니체의 초인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또 뛰어넘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다. 인간이 향하는 길목을 높다랗게 가로막는 한계령과 같은 장애물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더라도, 인간은 이를 뛰어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해를 극복하는 우리의 길, 절대 순응하지 않고 나의 뜻을 펼치는 그 길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와 마주한다. 이렇게 우리가 가는 길에 벗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향하고자 하는 길목에 동의하여 동행하고 마찬가지로 주체적인 벗인 그들은, 이 길로 향하는 방법에 대해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한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태도를 일깨우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도 친밀한 친구란 오히려 나의 한계를 긍정하며, 무던히 뛰어넘어야 하는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독에 불과하다.     


니체에게서 이러한 친밀한 친구는 이웃이나 지인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국가나 제도 및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국가의 길은 개개인의 길과 반대 방향을 향하기가 부지기수고, 종교는 인류가 걸어가야 할 지상의 길이 아닌, 허황한 창공 저 너머의 길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에 우리의 삶에 집중하지 못한다. 니체는 이 친밀하고도 거대한 것들을 적대시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인류로서 초인을, 그들이 자유로워 지고자 현실에서 지금 여기를 초탈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춤’으로 본 것이리라. 그리고 본 글에서 다룰 작품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에서의 무용수들도 해방을 꿈꾼다. 나를 구속하는 '친구'들의 무수한 시선들로부터, 종교 및 제도적 굴레로부터 해방된 춤사위를 말이다. 이러한 춤사위를 1979년 스웨덴 태생의 감독, 레반 아킨이 스크린에 옮겨 담고자 한다. 2011년 <카틴카스 카라스>로 장편 데뷔를 한 그는 줄곧 보편적인 집단 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선보이곤 한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 속 타자들은 우리의 시선이 긍정적이라면 자유분방하였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낯설고 위협적인 인물로 여겨질 것이다. <카틴카스 카라스>에서 그 파장을 일으키는 주인공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규칙이나 한껏 정제된 예법을 따르지 않는 자유인이다. 부르주아지들은 처음에는 그가 신선하게 여겨졌지만, 이내 곧 틀에 얽매이지 않는 가치를 경멸하고 배타하는 위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킨의 두 번째 작품인 <서클> 역시 마찬가지다. 본 작품의 배경은 동시대의 기술진보를 드러내는 대도시가 아니라, 여전히 미지의 요소들로 가득한 산골의 한적하고도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지의 자연 속에서 마녀라는 소재를 동시대로 옮겨온다. 인류에게 여전히 자연에 대한 신비가 남아있는 것처럼, 그 자연으로부터 비롯하고 속하는 마녀 역시 우리가 잘 모르는 미지의 존재이다. 그러나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마녀에 대한 편견이 그들에 대한 앎을 대체한다.      


타자들을 향한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시선의 물결, 그러나 아킨은 이 같은 시선에 동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간의 공동체에서 '통상적'으로 그래왔기 때문에 묵인되던 부조리들은 타자의 눈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맘껏 드러내는 자유인과 마녀라는 존재로부터 적발되기 때문이다. 자유인의 시선에 의해 현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동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쇠락한 마을은 마녀에 의해서 일련의 쇄신을 겪는다. 이렇게 타자를 긍정하는 아킨의 색채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인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에서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조지아의 전통을 중시하는 국립무용단이라는 공간성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개인의 주체성 및 정체성은 격렬히 충돌한다. 이 충돌을 감각적인 춤이라는 소재로 풀어내는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일단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조지아 국립무용단이 추구하는 전통적인 무용이 무성영화로 기록된 푸티지가 인서트된다. 소리도 없고, 흑백이라서 색채도 존재하지 않으며, 화면비와 프레임은 대단히 좁다랗다. 과거에는 번쩍거렸고 찬란했을 그 감각성을 동시대에 마주하기엔 다소 희미하다. 그 전통의 진위를 온당 확인하기 어려운, 하나의 어렴풋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윽고 현재의 풍경이 펼쳐진다. 1.78:1의 널따란 화면비에서 춤을 위해 연주되는 곡이 들려오고, 공간과 인물의 색채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푸티지에서 롱숏으로 포착되던 무용수들이, 현대에는 클로즈업을 통해 더욱더 감각적이고 밀접하게 포착된다.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도 역동적인 무빙을 동반하며, 무용수들의 손짓, 발짓, 눈빛을 필사적으로 포착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는 분명 다르게 포착되고 있다. 현재는 기록되어 붙잡힌 과거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질주하는 시간임이 치열한 연출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무용단이 추구하는 춤에서도 이러한 현재성은 이어지고 있는가?     


이러한 현재성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영화는 핸드헬드와 롱테이크의 조합을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현재적이지 않은 현실을 비춰낸다. 격정적으로 요동치는 핸드헬드는 흔들리지 않는 무용수들이 무대에 서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거친다는, 화려한 배경 이면에 자리한 현실을 포착하기에 적합하다. 이러한 현실은 앞서 언급했듯 클로즈업을 통해 밀착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오버 숄더 숏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단순히 대화의 몰입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뒤통수가 어렴풋이 비치며, 영화 속 주인공들이 실재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일련의 시점 숏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연출을 통해 드러나듯 화려한 별들의 이면과 현실을 비추는 작품, 과연 무대에 나와 황홀한 연기를 펼쳐내는 무용수들의 삶이 그들의 춤과 동일할까. 관객들은 때때로 무용수들이 연기하는 퍼포먼스가 그들의 삶 그 자체와 같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무용단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는 메라비,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그렇게 황홀할 순 없다. 그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무용수가 아닌 다른 메라비로거듭난다. 이윽고 식당의 웨이터를 겸하는 그의 이중생활이 포착된다. 메라비의 가족은 부유하지 못하다. 허구한 날 전기가 끊겨 정전되기 일쑤이며, 메라비가벌어오는 돈과 식당에서 남은 음식들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형 데이빗 또한 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밤에 가족들이 알지 못 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온다. 약을 거래했다는 정황과 단장이 그를 '범죄자'라고 지칭하며 내쫓은 것을 보면, 불법적인 행위인 것으로 유추된다. 이 같은 경제적 열악함은 영화 속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마리는 과거에는 부유하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가정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라클리는 상경하여 자신의 모든 수입을 가족에게 보내는 소년가장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무용수들은 이 같은 사실을 숨기고 살아간다. 메라비의 할머니가 보이는 태도를 보면 무용수라는 것은 집안 자체의 영광이자 명예이며, 그들이 연기하는 기품과 삶은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는 현재의 궁핍한 삶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세간의 인식과 더불어 영화 속 단장의 평가에 있어 집안 배경이 결코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과거의 영광을 끌어와 현재를 은닉하려는 무용수들의 태도가 이해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같은 무용수들에 대한 진실과 현실의 외면은 곧 국립무용단이 가진 한계와도 상응한다. 무용수들은 결코 개인의 영예를 위해서만 무대에 설 수 없다. 그들은 정교회의 종교관에 따른 조지아의 얼굴로서 여성들은 순결함과 순수성을, 남성들은 강인한 기백을 대표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연기는 실재의 삶과 일치할 것을 요구받는다. 무용수들의 입을 빌려 퇴출당한 어느 한 여성 무용가의 일화를 얘기한다. 남성과 혼외정사를 나눴고 이에 무용단은 그녀를 내쫓았으며, 집안에서도 그녀를 수도원으로 보내 사회로부터 고립시켰다고 전해진다. 즉 무용단은 단순히 무용수만을 뽑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성녀를 뽑는 것이다. 그리고 조지아의 얼굴로서 무용단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조지아의 전통춤을 선보이며, 조지아의 문화와 조지아인의 모습을 '선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선전되는 조지아인들은, 실제 조지아인들의 진실을 드러내는가? 또한 이러한 무용은 과거보다 더욱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50여 년 전에는 남성성의 표현에 있어 더욱 자유로웠다는 사실과 현재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보수화가 지적된다. 이는 국경을 맞댄 러시아로부터 끊임없이 국가의 존립과 문화를 위협받는 조지아가 보수적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는 국제적 정세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조지아의 반러성향은 메리의 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산맥이 많아 외부로부터 단절되어 있어 더욱 변화가 느린 조지아의 지리적 특성과 보수성 또한 서로 관련이 있으며, 여전히 조지아에 남아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여파일 수도 있다. 20세기 당시 현실을 반영하고 혁명에 도움을 주는 예술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 고안되었지만, 2차 대전 및 냉전을 거치며 현실과 유리된 환상을 서방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용도로 왜곡되었다. 그러한 시기를 거치고 또 소련 붕괴 이후 경제가 낙후된 조지아는, 현실은 퇴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저히 외면하는 가상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는 것이요, 예술은 여전히 국가를 위해서 봉사한다.     


하지만 이 같은 국가를 위한 움직임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개인, 귀걸이를 찬 개인, 조지아인스러운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추지 못한 개인들은 모조리 은폐된다. 무엇보다 사회 내의 문제들도 외면되니, 사회로부터 축출되었다는 무용수가 향한 수도원의 신부가 성범죄를 일삼는다는 바는, 무용수들의 뒷얘기로만 전해질 뿐이다. 국민들에게 조지아다운 양식을 강요하며 개개인의 자유는 묵살되고, 현실을 외면함에 실제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조지아의 청년들은 이러한 자국의 환상에 도취하지 않는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그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기에, 더 자유로운 문화를 동경한다. 서유럽이 동유럽에 잉여로서 남긴 것들을 취하지 아니하고, 런던에서 유통되는 것과 동일한 담배를 피우며, 그들과 동등해지려는 메라비와 메리의 태도가 그렇다. 이제 과거는 현재에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이다. 치매에 걸린 이라칼리 할머니가 메라비의 이름을 되묻는 장면은, 이라칼리가 처한 수난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 상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정된 이름으로 기억된 메라비가 아니라, 현재에 늘 새롭게 메라비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국가의 태도는 그래야만 할 것이며 춤도 그렇게 흘러가야만 하리라. 그러나 국가라는 장애물에 의해 영화 속 개인의 몸은 자유로움 및 주체성과 차단된다. 국가가 요구하는 인류의 기상이 몸에 가상적으로 새겨진다. 하지만 나의 솔직한 시선이 외면하지 못하는 욕망의 대상, 그 대상이 나의 육체를 접촉함에 깨어나는 감각과 성 지향성은 결코 국가가 결코 막아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메라비는 메리라는 '여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국가적 남성성과 법에서 벗어난, ‘남성’ 이라클리를 욕망하는 자신의 성 지향성과 마주하게 된다. 국가적인 요구나 사회적인 관습, 희생은 꽁꽁 묶이고 은폐된 몸을 생산한다.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불일치하는 결혼과 약혼을 하는 데이빗과 이라칼리는 이 같은 거짓된 몸에 불과하다. 하지만 메라비처럼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게 되면, 내가 닮고 싶고 하나 되고 싶은 주체적인 꿈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메라비가 이라칼리와 나누는 사랑은 하이데거의 공동존재라는 개념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 그를 독립된 타인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그 대상을 배려하는 이유는, 내가 상대방에게 나의 감정을 이입하고 투영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독립적인 타인을 배려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일부 투영된 나를 배려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메라비의 시선에 투영한다면, 이라칼리가 떨어뜨린 귀걸이나 그가 피우는 담배는 온당 그의 것이 아니다. 그처럼 되고 싶고, 그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내가 피울 수 있는 것’,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영화 속 처음으로 관계를 나누는 그들은 오직 상반신만이 포착되어, 그들의 손이 어느 하반신에 맞닿아있는지가 포착되지 않는다. 그들 손의 구분은 무용할 것이다. 메라비는 이라칼리의 손이 곧 나의 것이기를 바랄 것이요, 메라비 또한 이라칼리에게 투영하는 이 같은 마음은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렇게 메라비와 이라칼리의 육체가 구분되지 않는, 합일된 사랑이 펼쳐진다. 이후 이라칼리가 떠나고 겪는 메라비의 진통 또한 나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함께 세계를 점유하던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에 다름 아니기에, 그리도 걱정스러웠고 가슴 시렸던 것이랴.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공동존재로서 닮고 싶은 대상을 선택하고, 함께 하고 싶은 대상을 바라볼 수 있음에 개인의 육체는 국가의 구속이라는 중력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라칼리와 시간을 함께 보낼 때마다 그의 발은 한층 더 가벼워지고, 그의 표정은 숨기지 못할 기쁨, 행복을 띠곤 한다. 이러한 공동존재는 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과거를 지향하며 전통을 추구할지, 아니면 대중문화와  팝에 춤사위를 맞출지, 즉 내가 어떤 대상과 공동존재가 되어 춤을 출지는 자신의 선택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공동존재로서 국립무용단의 포스터를 모조리 떼어버리는 메라비의 모습이 포착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센과 가오나시가 함께한 엽서는 남겨둔다.   


하야오의 걸작인 위 작품 속 가오나시는 사금을 타인에게 뱉어내며 유혹하고, 이에 걸려든 타인과 관계를 맺고 끝끝내 그들을 잡아먹어 버린다. 이러한 가오나시는 타인에게 사금을 내뱉어야만 가치가 있는 존재다. 하지만 센은 가오나시가 사금을 내뱉지 않아도, 그의 존재를 긍정해준 인물이다. 영화는 이러한 센과 가오나시의 우정에서 착안한, 오직 서로의 몸과 몸 그 자체를 존중하는 우정을 찬미한다. 그 몸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서고 음해하는 자들은 벗이 아니라 하나의 악령이다. 이에 반하여 메라비가 어떤 성 지향성을 갖든, 그것이 국가가 바라는 남성상에 반하더라도 메라비의 육체를 긍정하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대치시킨다. 형제의 그 자유로운 몸을 응원해주는 데이빗, 그리고 메라비의 드러난 지향성에 의해서 그와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중하는 메리의 태도를 통해서 말이다. 자유를 바라는 개인들은 자연히 자유로운 몸과 공동존재를 맺고 싶어 하는 법이니. 다만 진정한 자유는 나를 바로 알고, 또 그 선택을 책임질 수 있어야만 한다. 영화는 조지아 국립 무용단의 폐쇄적인 억압과 그와 정반대의 방종, 무질서를 대비시키며, 양극단 속에서 자신의 정도를 찾아가는 메라비의 여정을 포착한다. 이라칼리가 사라지자 메라비는 몸을 파는 남자들과 드랙퀸, 트랜스젠더 집단과 어울린다. 그리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방탕해진다. 하지만 메라비가 사랑하는 것은 이라칼리요, 또 메라비는 자신의 몸을 바로잡고 그것을 바탕으로 춤을 추고 싶다. 발목을 다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는 것은 제 뜻이 아니다. 영화는 이러한 극도의 방종을 경계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타자들이 취한 환경에는 연민을 표한다. 메라비가 이들과 이끌리게 된 것은 데이빗과의 다툼 이후, 특히 식당에서 해고당한 이후다. 그 후 메라비는 구걸하기도 하다가, 이윽고 그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을 데이빗도 겪은 것으로 유추된다. 즉 사회적 지원이 없는 빈곤한 이들은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굴종하고 헌납해야만 한다. 데이빗과 이라클리의 자기 뜻과 상반되는 결혼은 왜 길거리에서 몸을 팔던 그 무리와 동일해 보일까. 또 조지아의 전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야만 하는, 국립무용단과의 관계와도 과연 이와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메라비는 절대 원치 않는 타인과 무용단에게 자신의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은 오직 자신의 것으로서 무용단에서 요구되는 남성성에서 벗어난, 우아하고 유려한 몸짓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비정형의 춤사위를 선보인다. 또한 그가 오디션장에서 입는 것은 이라클리가 갖고 있던 옷으로서, 그가 떠나가도 메라비는 스스로가 선택한 공동존재를 간직하고 이를 지향한다. 그리고 더는 선전의 환상에 빠져들어 자국에만 헌사하지 않는 청년들은, 이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조지아 바깥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가선다. 영화는 남아서 저항하고 뒤바꾸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허용하는 구조를 향해 나아가기를 긍정한다. 구조란 개인 혼자 뒤바꾸기에는 너무 탄탄하고 거대하여 거스르기 어려운 중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메라비는 중력의 악령에 저항한다. 그것은 국가가 전 세계를 향해 선전하기 위한 조지아적인 문화와 정교회로부터 비롯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또 내가 오인한 자신의 이미지,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할 방종도 하나의 악령이다. 진정한 도약은 이 모든 극단을 벗어나서 스스로가 자유로이 창공을 향해 뜀박질하는 것이요, 그 자유로운 몸을 바탕으로 내가 함께하고 싶은 대상을 벗으로 삼는 일이다. 영화는 이를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담아낸다. 이는 스웨덴 출신으로서 조지아의 외지인에 다름 아닌 감독이, 조지아의 현실에 최대한 밀착했다는 의지이자, 여전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이 남아서 선전으로 활용되는 예술에 대한 안티테제이리라. 이렇게 몸의 자유와 스스로의 성장을 얽혀낸 서사는 분명 탄탄하지만, 한편 구성과 전개가 2010년대 후반 공개된 퀴어 영화들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다소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생생한 조지아의 풍경, 오직 그것으로만 국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고 매혹적인 성장 이야기로 불리기에는 틀림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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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 20112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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