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0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Dec 11. 2020

셀린 시아마 감독 ①

예술론과 <워터 릴리스>

셀린 시아마(Celine Sciamma) 감독 ① - 예술론과 <워터 릴리스>(Water Lilies)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우리는 타인이 내게 부과하는 숙명을 넘어서야지만, 진정한 자유를 향해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묶어둔 가장 대표적인 숙명 중 하나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오직 타고나게 되는 생물학적인 성별인 섹스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운명만으로도 충분히 부당하지만,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는 이 같은 생물학적인 성별에 더 육중한 책무들을 강요했다. 남자는 외부로 향하고 가장이 될 것을 요구하였고, 여성은 내부에 머물며 순응할 것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이 같은 섹스에 의해서 우리 삶의 전반이 규정되는 것은 너무도 부당하거니와, 더욱이 섹스가 나의 모든 주체성, 정체성을 지배하지도 않는다. 이 같은 일반적인 섹스와 사회학적인 성별 젠더는 일치할 수도 어긋날 수도 있다. 나는 사회가 성별에 따라서 요구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긍정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능동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같은 개개인들의 무수한 거부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젠더는 무한히 증식된다. 이 같은 젠더의 해방이 곧 동시대가 향해야 할 해방과 자유의 가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 우리는 특정한 사랑의 형태만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어리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그 선택을 우리가 묵살하고 짓밟아버리는 폭력을 우리는 지양해야 하리라. 아무리 그들이 어리다고 한들,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응시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고, 우리는 한낱 외부의 관찰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된 젠더는 가족과 공동체 및 사회와 깊이 관련을 맺고 있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젠더로의 발 돋음은 절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셀린 시아마는 낙담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그 현실을 비춰내고, 그 현실 속에서 대안과 이상, 내일의 자리를 찾고자 치열하게 고군분투한다.  


1980년 태생의 셀린 시아마는 동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청년 감독 중 한 명이자, 서두에서 언급한 여성과 젠더에 대해 심층적인 접근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셀린 시아마는 감독임과 동시에 각본가로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2세대 평론가이자 감독인 앙드레 테시네의 <비잉 17> 및 2016년 프랑스 극장가에서 가장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내 이름은 꾸제트> 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감독일 때의 그녀는 젠더와 성 지향성을 탐구하고, 이들과 함께 협업할 때도 그녀의 작가적 색채를 온당 배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녀가 참여한 다른 감독들의 각본에서도 드러나는 작가적 색채 중 하나는 바로 ‘성장’에 다름 아니다. 그 성장은 유년기, 청소년기에 놓인 존재들이 성년으로 향하며, 주체성 및 정체성, 젠더 등을 명확히 자각해가는 발돋움이라 할 수 있다. 성에 대한 탐구는 배제되어있긴 하지만, <내 이름은 꾸제트>에서 시아마의 관심은 부모 세대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적이고도 자유로워야 마땅한 아이들의 권리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워터 릴리스>에서도 아이와 성년 사이에 놓여 있는 청소년을 탐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육체는 조숙해졌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아동에 다름 아니거나, 육체는 여전히 아이일지언정 정신은 성숙한, 양자 사이의 불일치를 겪는 불완전한 존재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뚜렷이 알아가는 성장을 다룬다. <톰보이>에서 이 성장 이야기는 남근기와 잠복기의 모호한 사이에 놓인 로레라는 존재를 다루고 있으며, 그녀는 주변 어른들과 함께 '운전'을 같이 하며 성장해가는 동시에, 어른들의 규정과는 다른 존재로 나아가곤 한다. 마지막 <걸후드>에서의 성장은 '나'를 자각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성장 이전이 더욱 조숙하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작품이다. 어른들의 요구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장면에는 주인공 마리엠 자신의 자아가 부재한다. 영화는 이 같은 가족, 공동체, 사회 내에서 나를 명확하게 자각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제시한다. 이는 그녀의 근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아마의 작품 속에서는 가장 먼저 떠돎이 강조되곤 한다. 이 같은 떠돎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백작 부인과도 같은 인물들이 섹스에 특정 젠더를 입히고자 하는 야욕에서 벗어나고자 택하는 떠돎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떠돎 속에서 자유로운 젠더와 퀴어들은 사회의 보편율에 균열을 일으키곤 한다. 그녀의 데뷔작인 <워터 릴리스>에서 떠돎은 약소하게 드러난다. 주인공 마리가 플로리안에게 품은 연정을 전달하지 못함에, 성 소수자로서 그녀는 플로리안 주변을 위성처럼 떠돌고 또 떠돈다. 그리고 <워터 릴리스>에서 떠도는 사랑은 어쩌면 필연이다. 지배적인 사랑, 타자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적인 속성으로서의 떠돎은 사랑에 대한 신화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랑을 통찰하게 해준다. 그리고 <톰보이>에서의 시작은 ‘이사’다. 이사를 간 로레가 서 있는 그 공간은 낯설지만, 한편 다른 아이들은 로레의 섹스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기에, 아이는 이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젠더의 표출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 익숙하게 소속되고 규정된 곳으로부터 떠돌아야지만 이 같은 젠더의 권리가 가능해짐을 영화는 꼬집는다. 이는 다시금 그 공간이 익숙해지고 폭력적인 보편율에 귀속됨에 또 한 번 이사를 바라게 되는 로레의 열망을 비추며, 떠돌 수밖에 없는 퀴어의 인생이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됨을 보여준다. 그리고 <걸후드>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프랑스 내의 흑인 게토화와 공고한 구조와 관련된다. 마리엠이 속한 가족, 흑인 공동체에서 개인이 불가능한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이 같은 과정에서 개인을 찾기 위해 마리엠은 고군분투하며 일탈하지만, 더욱 거대한 구조로서 벗어날 수 없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도 시아마는 이 갑갑한 구조 속에서 개인을 찾고자 하는, 마리엠의 고독과 떠돎을 결말을 통해서 긍정하고 응원한다.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도 여행에 의해 엘로이즈와 만나며, 당대에 불가능했던 동성애의 실현과 여류화가로서 주체적 표현이 가능했다. 특히 전근대의 역사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떠돎을 비추며, 시아마는 가장 최근 작품까지도 이데올로기를 거부해야 만이 자유로운 떠돌이 젠더들의 삶을 포착한다. 어쩌면 이 같은 현상은 작금에도 시아마가 바라보는 퀴어, 젠더들의 삶에 있어서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20

그리고 시아마는 주로 젊은 존재들을 다루곤 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젊은이들은 거의 언제나 필연적으로 기성세대와의 충돌을 겪는다. 시아마의 세계에서 청년들이란 언제나 기성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가장 먼저 <워터 릴리스>에서 젊은 존재들은 처음에는 기성의 이데올로기를 선망한다. 어른들이 말하는 일찍이 키스하고 경험을 나누며 결혼하는 이른 조숙함을 선망한다. 하지만 이를 추구하던 마리는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그 욕망이 덧없는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으며, 이를 거부하고 안느와 연대를 행하는 새로운 원리에 몸을 맡긴다. 또 <톰보이>에서는 섹스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되어온 개인의 주체성, 정체성에 젊은 존재는 급진적인 반기를 든다. 로레가 반기를 드는 대상인 부모님을 위시한 어른들에게서 남과 여의 통념적인 속성은 비교적 고착되어 있다. 그리고 <걸후드>에서 청년들의 가능성은 본 작품에서 묘사되는 보편적 흑인의 정체성을 거부함에 있다. 청소년기부터 무겁게 얹힌 가사 및 노동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고, 특히 흑인 여성으로서 처하게 되는 현실에 깊은 반감을 느낀다. <걸후드>의 청년 존재들은 부조리함을 목도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지 않고자 반성하고 행동하는 존재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이 같은 기성 이데올로기는 성별보다도 계급에 우선한다. 백작부인은 분명 자유로웠던 여성으로서의 향수가 있지만 높은 위치에 속한 백작으로서, 여인들이 따라야만 하는 ‘새장 속의 새’에 다름 아닌 요구를 후대에게 행하며, 도구로서 소비되는 여성의 위치를 재생산한다. 즉 본원적인 여성성보다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성을 기성세대와 지도층은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바로크 무렵을 배경으로 하는 본 작품의 마리안느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함께 여류화가로서 미술사에 그 이름을 당당히 기록하고자, 즉 새로운 역사를 집필하고자 하는 자로 당대의 이념과 역사에 대적한다. 


이 같은 기성세대에 의해 기성의 이데올로기는 공동체에 팽배해있다. 이 같은 공동체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속할 수밖에 없는 지상임과 동시에, 하루의 절반을 살아가야만 하는 오후이다. 그리고 시아마가 다루는 존재들은 이 같은 시공간이 불편하기만 하다. <워터 릴리스>에서도 이 같은 공간성은 대두된다. 사람들에게 잔뜩 둘러싸여 그들의 시선과 눈총이 따가운 공간에서 그들의 열망은 좌절된다. 그들의 욕망과 바람이 실현되는 것은 오직 그들만이 놓일 수 있는 사적인 방, 공터, 텅 빈 샤워실 등으로 이들은 양지에서 그들 자신의 진실을 승인받을 수 없다. 또 <톰보이>에서 로레는 태양을 바라볼 수 없고 공동체에 속할 수 없으며, <걸후드>에서도 그녀들의 꿈을 실현 가능한 것은 일상적 공간으로부터 단절된 경기장이나 호텔에서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그들에게 찰나적으로 이상의 순간이 가능한 공간이 있다. 이는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만들고 형체를 변형시키는 물의 속성,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항구의 속성이 있는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일단 <워터 릴리스>의 경우 배경 자체가 물로 가득한 수영장이다. 대지에서 자전거를 타는 마리는 물속에서 유영하는 플로리안에게 욕망을 느끼거나, 또 대지 위에서 움츠러들었던 자신의 눈동자를 수중에서는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물을 바라보며, 그리고 물속에서 마리의 욕망은 더욱 자명해진다. 그리고 <톰보이>에서 로레가 대지로부터 숨어들며 리사와 키스하는 그 으슥한 숲은 강을 끼고 있다. 이와 함께 문명에서 상처받은 로레가 향하는 것은, 호수와 강을 품은 대자연에 다름 아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이상이 실현되는 시작점은 바다였다. 바다를 헤치고 나타난 마리안느, 해변에서 그 존재가 드러난 엘로이스, 이와 동시에 여성의 세계가 실현될 수 있는 시간은 밤이었다. 황홀한 합창이 이뤄지던 그 시간은 기성이 모두 잠든 밤에서야, 비로소 대지에서 쟁취되었다. 아니면 태양과도 같은 권위자의 시선이 가신, 단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가능하거나 말이다. 그들의 시간이 길게 지속할 수 없는 이유는 시아마가 언제나 현실과 맞닿은 영화를 만들어갔기에, 즉 현실 속에서 이들이 가진 소망의 실현은 언제나 찰나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셀린 시아마의 이름이 국내에 처음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본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두 여성의 사랑과 주체성을 기리는 새로운 역사를 화폭 속에 써 내려갔다. 그녀는 전근대의 화가들이 이상성을 화폭에 그려나간 것처럼, 8k 출력의 경이로운 색감과 화질을 통해 여성들의 삶을 스크린이라는 화폭 속에 ‘그려’냈다. 한편 과거의 남성 화가들이 아름다움의 이상성을 추구한 대가로 현실의 진리를 희생시킨 것을 반면교사 삼아, 그녀는 스크린이라는 화폭 속에 문명과 삶, 특히 여성의 주체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회화를 그려간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리기'가 과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단 한 작품에 국한되어 있을까. <톰보이>에서도 이 같은 그리기가 언급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아이들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성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아이들의 자유로운 시선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동생 잔은 언니 로레를 스케치북에 그려준다. 아이는 대외적으로 규정된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자유분방하게 로레를 담아낸다. 이 즉흥적인 그림이 곧 로레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인생일 것이다. <워터 릴리스>에서는 직접적인 그리기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눈과 입을 통해 '소문'이란 이름으로 뒤바뀐 그려짐, 재현이 사용된다. 그리고 타인에 의해 그려진 그 기대감에 부응해야만 하며, 가상이 현실을 지배하는 역전된 관계가 나타난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엘로이스의 현실 속 진실을 고스란히 화폭 속에 담으려 했던 것처럼, 그녀의 그림이란 결코 가상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톰보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레가 잔에게 행한 약속의 징표가 바로 동생의 팔목에 그려진 시계로서, 가상을 넘어서 현실과 매개된다. 그리기는 가상과 더불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기와 더불어 조각 빚기와 같은 창조적 활동 또한 규정된 자신이 아닌, 자신이 갖고자 하는 남근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써, 시아마의 작품 속 예술은 언제나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현실과 깊은 영향 관계를 맺는다. 이는 시아마가 영화를 찍는 예술론과도 관련되어 가상이 아닌 현실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현실을 뒤바꾸어가는 그녀의 의도나 목적과도 관련될 것이리라.     


그리고 시아마의 작품에서 옷은 하나의 폭력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서로와 사실상 처음 대면하는 해변에서 그녀들은 온몸과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갑갑한 복식으로 자신을 칭칭 둘러싸 자신을 은폐한다. 이는 여성의 은폐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갑갑한 옷 입기로 발현되며 여성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녀들이 바라는 욕망이나 주체적인 진실이란 모든 옷을 벗었을 때, 그럼으로써 서로 간의 욕망의 실현 가능해질 때에 수면 위로 떠오른다. <워터 릴리스>에서의 옷 입기도 마찬가지다. 화장하고 무대의상을 입은 플로리안과 평범한 의상을 입은 그녀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입혀지는 옷과 스스로 입고자 하는 옷에 따라서 플로리안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며 그중 하나는 거짓일 수 있으리라. 진실이란 평범한 옷을 입고 시니컬한 플로리안, 마리가 속옷을 입고 있을 때 뚜렷해지는 욕망 등으로, 스스로가 입고자 하는 옷을 입으며 나는 선명해진다. 또 플로리안과 마리는 옷을 바꿔 입으며 서로가 바라는 바를 추구한다. <톰보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본 작품에서 미카엘로서 자신이 선택한 간편한 티셔츠와 반바지 및 콧수염이나, 축구나 수영을 하며 옷을 벗었을 때 스스로가 추구하는 자유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이가 로레이자 소녀이기를 바라는 어머니에게서 입혀진 그 파란 원피스는 하나의 폭력이다. 또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지만, 미카엘이 집착하는 남근 모형도 젠더로서의 남성이 아닌, 섹스로서의 남성만을 허용하는 이념 속에서 발현되는 인정욕구로서의 옷 입기 일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걸후드>에서의 옷 입기는 이중적이다. 흑인 공동체 내에서 승인에 상응하는 브래지어이자, 남성들에게 소유됨으로써 흑인이자 흑발인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는 옷 입기로서, 그 폭력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옷들은 타인의 손에 의해 입혀지고 벗겨진다. 또한 이러한 옷을 두고 백인과 흑인, 계급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아마는 남성적인 취향과 시선 그리고 유행에 의해 좌우되는 옷이 아닌, 그녀들이 스스로 옷을 선택하고 갈아입는 그 주체성을 긍정한다. 다만 이러한 옷 입기는 그녀들의 온 현실 속에서는 불발되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내가 더불어 그 사람을 공유해야만 하는 염치없는 이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란 ‘공유의 구속’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내 적수이다.” -롤랑 바르트-

이제 개개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셀린 시아마의 데뷔작이자 아델 하에넬과의 협업작인 <워터 릴리스>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이제는 동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아델 하에넬과 떠오르는 신예 노에미 메를랑, 그리고 이탈리아의 대배우 발레리아 골리노 등 기성 배우들을 기용하며 보다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의 셀린 시아마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며 거친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는데, 폴린 아콰르나 루이즈 블라쉬르는 본 작품으로 데뷔하였고, 이후에도 배우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았다. 아델 하에넬조차 아역으로 데뷔하긴 했지만 본 작품 이전에는 작품 활동이 단 한 건에 불과하여, 사실상 무명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고 거친 핸드헬드를 통해 그들을 스크린에 담아내며 현실과 밀착된 듯한 효과를 구현하곤 하였다. 기성 배우임이 자명하고 일련의 이상성을 간직한 배우들의 이미지를 이용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비추고 부당한 역사를 다시 쓰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경향과는 다른 것이다. 이 같은 초기의 경향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워터 릴리스>의 다른 주목할 만한 연출로서 가장 먼저 클로즈업을 꼽을 수 있다. 영화는 마리나 플로리안, 안느의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곤 한다. 보통 그들의 얼굴만을 스크린에 꽉 채워 확실하게 담아내지만, 한편 그것이 이들이 간직한 정보의 명확성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심리, 내면을 모른다. 이는 나와 세상, 욕망을 판단하기에 아직 어린 소녀들의 모호한 상태에 상응하거나, 아니면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겉을 넘어설 수 없는 내면의 모호함일 것이다. 이 같은 모호한 클로즈업과 함께 영화는 측면이, 특히 마리를 포착할 때 강조되곤 한다. 보통 대화하는 구도로 자주 사용되지만, 본 작품의 측면에서 보통 상대방은 부재한다. 타인을 바라보지만 상대방은 나를 바라보지 않으며, 애타는 눈빛으로 상대방을 좇지만 그들은 멀리 달아나는, 레즈비언으로서의 비애나 사랑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고독한 연출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두 연출은 서로 절묘하게 뒤엉킨다. 상대방을 밀착해서 바라봐도 그 속내를 알 수 없고 이에 다가갈 수 없기에, 그래서 나는 고독하게 홀로 포착될 수밖에 없으리라. 무엇보다 그렇게 홀로 포착되는 대상도 관객의 관점에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타자이기에 미스터리함을 간직한 모호한 얼굴로 여겨진다. 이렇게 우리가 연출을 통해서 그들의 얼굴을 주로 살펴봤다면, 이제는 공간으로 눈을 돌려보자. 본 작품에서 강조되는 공간성은 통로나 문이라 할 수 있다. 안느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관객석에 앉은 마리이지만, 그 이후 펼쳐진 플로리안의 수중발레에 매혹을 느끼며 통로를 거쳐 그녀를 더욱 근접하여 마주하고자 한다. 이후 호기심에 찬 플로리안이 탈의실과 샤워장의 통로를 지나서 그녀의 공간에 더욱 근접한다. 하지만 이제는 문이 가로막는다. 그 문 너머에는 비밀이 있다. 그래서 문 너머를 궁금해하는 마리에게 플로리안은 시니컬하게 대하기도 하고, 프랑수아가 다른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한 안느가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을 넘어서는 행위에는 승인이 필요하다. 마리가 수영부에 가입하기 위해 그 조건을 충족하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그 문은 마리가 플로리안을 욕망하는, 양지로 뛰어넘을 수 없음을 일깨우는 보편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리는 플로리안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녀의 립스틱 흔적이 묻은 문과 가상적으로 입맞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념의 문턱은 넘어서기가 어려울지언정, 타인의 문턱은 그들과의 교감과 승인에 따라 넘어설 수 있다. 플로리안이 마리의 손등에 적어준 자신의 집 주소, 이윽고 그것을 넘어선 진입에 마리는 플로리안의 소문과 다른 진실에 근접한다. 그리고 클럽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옷을 갈아입는 플로리안의 태도처럼, 문턱을 넘어선다는 것은 일련의 변신일지 모른다. 그것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플로리안이 지하철에서 옷을 갈아입는 행위는 클럽에서 남성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일련의 수동적인 변신이다.      


그리고 타인의 문을 넘어서며 우리에게 이뤄지는 변신이란, 나와 타인이 뒤섞이는 변화라 할 수 있다. 플로리안과 마리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는 것처럼 말이다. 서로의 옷을 바꿔 입는다는 것, 이는 본 작품에서 탐구하는 사랑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본 작품은 사랑의 여러 속성을 다루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나와 상대방의 ‘다름’에서 매혹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리와 안느는 서로를 공통된 취향을 잘 알지만 그런데도 분명 다르고, 마리와 플로리안은 용모는 닮았지만 서로의 자아는 분명히 다르다. 마리와 안느는 한쪽은 마르고 다른 한쪽은 통통한, 체형에서 차이가 있고 서로는 그 차이를 열망한다. 또 마리는 아직 성징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안느는 성징이 조숙하게 일어나고 있다. 마리는 그것을 부러워하지만, 한편 정신적으로는 마리가 더 성숙하기에 안느는 그녀에게 의존하는 듯하다. 그래서 일부는 닮은 서로는 자신이 나아가고 싶은 미래에 다름 아니고, 이에 서서히 닮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는 장면에서 서로가 역할을 고정하지 않고 뒤바꾸는 것처럼, 그렇게 닮아감에 상대방과 나는 뒤섞여가는 것이랴. 플로리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마리에게 플로리안은 안느 보다 더욱 육체적으로 조숙하고, 또 사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닮아있다. 그래서 서로가 가진 긍정적인 다름은 곧 자신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자 이상처럼 보이리라. 또 마리가 지상에서 자전거를 탄다면, 플로리안은 수중에서 움직이기에 서로가 달리 놓인 그 공간에서도 매혹을 느낀 것이랴. 그리고 플로리안이 마리를 선호하는 이유도 안느와 유사하다. 육체적으로는 성년에 가깝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체적인 판단이 가능한 마리의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랴. 그래서 플로리안은 마리가 열망하는 자신의 메달을 내어주기도 하고, 마리는 플로리안에게 선택의 대리인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하는 다름은 내가 가진 결함과 관련된다. 내가 그 결함이 극복되거나, 아니면 그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더 나은 상대방이 나타난다면 내가 한때 열망한 ‘다름’의 갈증은 사그라들리라.     


이는 플로리안을 만난 이후의 마리가 안느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고, 또 결말에서 플로리안 대신 안느에게 향한 마리의 선택이 그렇다. 육체적으로 더 나은 플로리안이 있는 상태에서 정신적으로는 너무도 미숙한 안느에게 마리는 싫증을 내지만, 오히려 극의 결말에 안느는 정신적으로 도약하였고 플로리안은 퇴보하였다. 그리고 마리는 그 퇴보한 플로리안의 다름을 더는 긍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그들의 관계망이 사랑의 시작에 관한 연유를 보여준다면, 그 이후에는 사랑의 과정에 따른 속성이 나타난다. 프랑스의 사상가 바타이유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욕망의 본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선보였다.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욕망에는 폭력이나 추가 필연적이라는 것, 인류사에서 문명을 건립함에 따라서 욕망은 악덕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본 작품에서 포착되는 사랑 속에서 이 같은 바타이유가 밝혀낸 사랑의 속성들이 녹아있다. 플로리안과 마리가 제대로 대면한 것이, 플로리안이 구토하던 화장실이었던 것처럼, 또 마리가 플로리안과 나눈 시간이 담긴 쓰레기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더불어 프랑수아를 사랑하는 안느가 절도라는 악덕을 서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추가 수반된다. 그리고 바타이유는 아름다움을 욕망과 관련지어 논하며 우리가 극한의 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추에서 멀어진 미적 상태로부터 욕망에 다름 아닌 추로 실추할 때의 쾌감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리와 안느가 입안에 물을 담고 참다가 그것을 뿜어내는 과정도, 이 같은 제어를 지키다가 흐트러지는 쾌감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프랑수아를 욕망하는 플로리안과 안느 중에서 전자가 승리한 이유는, 플로리안의 경우에는 입 냄새를 감추어 미를 강조하였지만, 후자는 자신의 옷에 묻은 땀을 숨기지 못했기 때문이랴. 인간은 적나라함보다 인간적인 욕망으로서 은밀하고도 미적인 에로티시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인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다리는 자이자 손해 보는 자라면, 사랑받는 사람은 그들을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 그래서 마리는 플로리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존재가 되고, 또 그녀의 처분과 결정을 기다려야만 한다. 프랑수아를 사랑하는 안느도 그의 선택과 결정을 무작정 기다리지 않던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사랑함에 닮아가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마리와 플로리안의 관계에서 보이는데, 마리는 플로리안의 과감하고도 당돌한 사랑하는 자의 면모를 바꿔 입지만, 플로리안은 사랑받는 자로 변모하여 자신에게 결핍된 마리의 선택을 기다린다. 한편 이러한 서로는 결코 같은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 플로리안과 마리의 첫 대면을 생각해보라. 마리는 플로리안의 얼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플로리안은 마리를 이중 거울에 투과하여 간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즉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달랐으며, 이후 플로리안은 마리와 친해지기 이전까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그녀를 소비한다. 극의 후반부에 프랑수아와 관계를 맺는 안느 또한 마찬가지다. 안느는 오직 그만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플로리안에게 차인 프랑수아는 그녀의 대체품으로서 안느를 택한 것이다. 그들의 몸은 하나로 뒤섞였지만, 목적과 의도는 두개로 나뉘었다. 물론 서로가 분명 일치할 수 있다. 마리와 플로리안은 천장이라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진솔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 특정 상황 속에선 오직 둘만 놓인 듯한 진공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다. 마리의 바람이 거의 다 실현되었다가 불발된 클럽에서처럼, 선생 및 프랑수아와 같은 타인들에게 우리는 필연적으로 둘러싸임에, 둘만의 관계는 오직 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 타인들에 의해서 상대방과의 관계도, 그리고 나 자신도 내가 아니게 된다. 플로리안은 그 무수한 타인들이 떠들어대는 소문을 실현하기 위해 성관계를 염원한다. 즉 서로의 진실에 근접하지 않고 자신의 왜곡된 목적을 투영하기도 하며, 그렇게 개입하는 타인들에 의해 우리의 관계나 스스로의 주체성이 훼손된다. 


이러한 타인들이 더 구체화 되고 체계적으로 변모한다면, 그것이 곧 시아마의 작품세계에서 주를 이루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본 작품에서는 일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녹아있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고발되곤 한다. 일단 예술을 둘러싼 전근대의 아름다움이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한, 남성의 입장에서 형성된 미의식이자 규정임이, 학생과 교사 사이의 제모 실랑이에서 포착된다. 또 어린 여성 플로리안은 마사지를 해주겠다는 남성 교사를 뿌리치지 못하며, 또 마리가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선 그 남성 교사의 승인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남성들이 주도하는 정사는 프랑수아와 안느의 관계처럼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이기적으로 침입하는, 권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후에도 안느가 주도하려는 것을 프랑수아가 막아서지 않던가. 그리고 이성애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성을 열망하는 마리는 언제나 하위에 놓인다.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플로리안에 의해 마리는 소외되거나, 프랑수아와 함께 지나가는 플로리안의 발밑에 마리가 위치해 있다. 그렇게 언제나 위에 있는 이성애에 의해서 마리의 욕망은 불발되고, 또 그들을 위한 하위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데올로기의 승인을 위해서 서로가 다른 곳을 보고 관계를 나누는 플로리안과 마리를 보라. 하지만 시아마는 결코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려 하지 않는다. 플로리안은 여전히 본 구조 내에서 승인받기 위한 춤사위를 춘다. 플로리안은 누군가가 그 춤사위를 보고 다가올 때까지 고독할 것이며, 또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으리라. 그녀는 구조에 의해서 그려져야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을 회복하는 마리와 안느는 서로 연대한다. 물 위에 자유로이 떠서 서로를 교감하는 그 연대, 물론 그 순간은 너무도 짧게 끝나 지나가 버리며, 이윽고 크레딧이 올라간다.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로서 그것이 곧 연대가 어려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불과할지 모른다. 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몰이해나 왜곡은 일련의 한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기성의 제도를 거부하고 서로가 있는 그대로 연대해야 만이, 우리는 나를 회복하고 누군가를 진실히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가능성을 도래시킬 수 있으리라.

---------

2부로 이어짐

감상일 : 200814(<워터 릴리스>)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레반 아킨,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