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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23. 2021

다시 보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피닉스>

연극: 가해자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다시 보는 크리스티안 펫졸드(Christian Petzold)의 <피닉스>(Phoenix) 

- 연극: 가해자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유대인과 여자에게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그들이 수천 년 동안 굴복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제거하고 싶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고 있는데, 오랜 억압이 초래한 그들의 불안, 허약함, 자연에의 좀 더 큰 유사성은 바로 그들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요소들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르 아도르노-

선과 악,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또 삶과 죽음과 관련된다.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생존, 삶의 연장과 관련된다. 적절한 노동이 선하다는 것은, 노동을 수단으로 우리가 생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개하는 것은 마땅히 좋기 위해서 참여한 노동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당하여 되레 죽음에 근접하는 상황이다. 한 인간의 탄생은 분명 선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시작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생전 수많은 고비 속에서 선의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생의 끝자락에서 악에 굴복한다. 악은 곧 죽음과 관련되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최후에는 필연적으로 악에 패배한다.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이란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왕국이란 곧 선한 왕국을 의미할 지다.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어 악에 무릎 꿇는데,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부활한다. 궁극적인 악에 굴하지 않는, 선의 승리를 몸소 증명한 것이다. 성경의 부활은 곧 죽음이라는 궁극적 악에도 선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하지만 악의 최종적 단계에서도 승리한 것은 절대자였지, 결코 우리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 살육, 인종청소는 끊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맹목적으로 신성시하거나 선이라고 생각하며, 악하지만 선한 기만적 왕국을 건립하려 하지는 않았던가. 2차 대전은 바로 이 같은 죽음의 왕국의 적절한 선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악의 승리 속에서도 희생자들은 불사조가 되어 부활해야만 한다. 생존함으로써, 그럼으로 몸을 증거로 자신들의 진실을 바로잡으며 스스로의 선을 실현해야 할 지다. 최근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구작까지 연달아 수입하여 배급하는 엠앤엠 필름의 노고 덕에, 느직하게 국내에 소개되는 <피닉스>가 바로 유대인의 부활, 선의 승리를 담고 있다.     


확실하게 부활한다면 그것은 선의 승리지만, 생명과 죽음의 경계, 선과 악의 어정쩡한 고성소에 속해있다면, 이는 아직 유령의 상태다. <피닉스>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령의 상태로부터, 진정으로 실존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일대기다. 이러한 유령의 탐구를 베를린파를 이끌며 독일 작가주의의 계보를 동시대까지 이어오고 있는, 1960년대 태생의 크리스티안 펫졸드는 줄곧 지속하고 있다. 2005년 작품 <유령>에서 그가 탐구하는 '유령성'이 극의 전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보육원, 경찰 등, 제도, 공권력에 승인받거나 소속되지 않고 줄곧 떠도는 존재, 그들이 미처 도달하기 전에 떠나가서, 그 존재를 입증하거나 승인받을 수 없는 존재다. 펫졸드는 감상자의 시야도 그들을 유령으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연출을 시도한다. 2000년대 펫졸드의 초기작에서는 운전이라는 테마와 CCTV라는 새로운 매체의 활용이 도드라지는데, 후자의 감시와 추적을 줄곧 벗어나는, 그래서 분명 존재하였지만 생사를 입증할 수 없는 유령성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확신할 수 없다. 영화 내에서 죽었다고 선언되는 마리,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지, 아니면 실종이 죽음으로 둔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니나가 마리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열린 결말로 남게 된다. 니나도 마리도 아니게 되었고, 어떤 경계 내에도 속할 수 없게 된 그녀, 그 최후까지도 카메라에서 저 멀리 사라져가는 그녀가 곧 펫졸드가 탐구하는 유령성의 집약이다. 이렇게 자명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로서 유령은 펫졸드의 작품에서 줄곧 반복되고 있다. 초기 대표작 <내가 속한 나라>에서 주인공의 부모는 극단적인 테러를 일삼는 적군파다. 그들에 의해 주인공은 분명 존재하지만, 제 존재를 은폐하고 숨겨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타인, 이념에 의해 나로 존재할 수 없는, 현존을 줄곧 숨겨야만 하는 인간은 유령이 된다. <볼프스부르크>에서의 유령성은 시선, 둔갑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내 기대에 가득 찬 상대방을 보지, 실제 상대방의 모든 치부가 드러난 총체를 바라보지 않는다. 유령성은 바로 거기서 기인한다. 자기 아들을 뺑소니하고 달아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조력자의 모습을 하고 다가옴에 의심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본 대상은 내가 바란 대상, 그리고 상대방이 꾸민 헛것이었기 때문에, 곧 유령은 사라지고 잔혹한 진실이 다가온다. 펫졸드에게서 유령은 곧 거짓에도 상응한다.      


또 <옐라>에서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세계, 이에 반하여 명백히 존재하는 남성들에 얽매인 삶과 죽음의 세계가 교차하였다. 그 경계에서 삶으로 돌아올 수 없는, 오히려 후자의 영역에서 전자를 계속 침범해오고 끝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가부장제에서 주체의 꿈은 유령일 수밖에 없는 여성을 고찰하였다. 이는 근작 <트랜짓>에서 헛것, 거짓된 신분으로 떠도는 존재들, 그래서 실재와 괴리를 줄곧 일으키는 유령의 도시 마르세유를 포착하면서 수행되거나, 줄곧 내 기억과 시야에서 빠져나가 자유로이 변이하는 <운디네>의 물의 속성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펫졸드는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의 독일로 향해 유령을 비춘다. 펫졸드의 첫 번째 뮤즈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니나 호스와 현재까지의 마지막 작품, 그리고 삶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민족성을 드러낼 수 없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에 의해 유령이 되어야만 하는, 정치적 드라마를 펼쳐낸다. 본 작품에서 펫졸드는 여전히 비교적 느린 호흡, 긴 리듬의 롱테이크를 지향하고 기교적인 연기 디렉팅보다는 일상적인, 무기교의 기교를 추구하는 기조를 유지한다. 여기에 펫졸드는 2000년대의 대표작, <옐라>에서 사용되었던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편집을 사용한다. <옐라>에서는 여성으로서옐라의 불발된 꿈과 현실의 괴리가 본 연출로 나타났다면, 본 작품에서는 그녀의 뇌리에만 존재하는 허상의 조니를 드러내기 위한, 실재와 유령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연출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확고한 믿음, 흔들림 없는 이미지로부터, 서서히 진실이 폭로되는 구성을 취한다. 마찬가지의 정치적 드라마였던 <열망>에서 사용되었던 구성을 취하는 것인데, 역사와 사회에 대한 펫졸드의 태도는 단순히 보이는 것을 단정하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차근차근 뒤따라가 까발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또 본 작품에서 펫졸드의 일상적 디렉팅은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펫졸드의 이전 작품을 본 감상자라면 조니가 넬리를 배신했을 거라 쉽게 단정하지 않고, 레네가 그를 오해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펫졸드의 전작 <바바라>에서 조니를 연기한 로널드 제르펠트는 누군가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구원하고 치료하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한 얼굴이 아내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며 유산을 갈취하려는 악을 얼마든지 품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외에도 영어를 사용하여 연합군 측 군인임이 암시되지만, 유대인 피해자들에게 마냥 선인, 구원자가 아닌 군인들과 조니의 배신을 알고 있을 것이 자명하지만, 넬리에게 천연덕스럽게 ‘선한 게르만인’을 연기하는 지인들의 얼굴과 표현도 특별하게 악하거나 유별나지 않고, 되레 지극히 평범하다. 즉 악덕과 악인은 특별하게 이질적인 얼굴과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들의 용모와 태도는 지극하게 평범하고, 또 특정 시공간에서 보편적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에 의심하기 어려운 안일한 태도가 끔찍한 악을 자아낼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평범한 어둠에 빛을 쏘아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영화의 초반부, ‘피닉스’라는 클럽에서 공연하는 두 여인이 분장한 서로의 얼굴에 조명을 쐬며, '불을 밝히라'는 가사를 읊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도 어둠을 걷는 유대인의 얼굴, 거기에 빛을 쏘면서 이뤄진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생존자 넬리는 아직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 자신이 바란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둠에 빛을 쐬며 얼굴을 밝히는 영화, 본 작품은 세계 대전 당시에 얼굴이 갖는 의미를 탐구한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의 얼굴은 나치에 의해 악마화되었다. 비열하고 누군가의 돈을 갈취하는 고리대금업자, 사탄의 이미지, 그 상이 실재 유대인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굴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수용소에 끌려갔고, 그 후 넬리처럼 나치의 손에 의해 얼굴은 더럽혀지고 훼손되었다. 넬리가 바라지 않은 지금 그녀의 얼굴은 허구의 이미지로 왜곡되어 변형까지 이르게 한 폭압적인 고통과 고문을 떠오르게 만든다. 또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랴. 유대인이라는 얼굴이 드러난다면 생존이 위태로워지던 기억이 잔존한다. 그래서 아무리 연합군이라 할지라도 유대인의 얼굴을 밝히라는 위협적인 목소리는 그들이 얼굴을 오히려 은닉하고 싶게 만들기 충분하리.      


이후에도 넬리는 얼굴을 외면한다. 자신이 바라지 않은, 나치에 의해 구성된 바로 그 얼굴을, 예전 자신이 살던 집의 터에 덩그러니 놓인 유리 조각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등진다. 그녀는 진정 자유롭게 저 자신이 선택했던 옛날의 얼굴로 되돌리고 싶다. 하지만 전후에도 유대인의 얼굴은 독일에 의해 구성된다. 넬리는 수용소에서 남편 조니와의 재회를 염원하며 겨우 버텼다. 그래서 레네에 의해 독일로 돌아가서도 조니를 찾아 폐허가 된 골목을 헤매고 또 헤맨다. 이윽고 조니를 발견하지만, 그는 넬리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녀의 얼굴은 전쟁을 겪으며 변했고, 또 그는 넬리가 죽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아내를 배신한 그의 죄책감을 쿡쿡 찌르게 되리, 그렇기 때문에 넬리가 조니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한갓 환청인 듯, 죽었다는 믿음을 뒤바꾸고 싶지 않은 듯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조니에게 그녀는 살아 돌아와선 안 됨과 동시에, 생존해야만 한다. 그녀가 살아있어야 넬리에게 할당된 유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었다면 막대한 유산은 그저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유대인 넬리가 유산을 받는 것이 아닌, 독일인 조니 자신이 유산을 가로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래서 유산을 수령할 수 있는, 하지만 진짜 넬리로서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지 않는, 가짜 넬리의 얼굴을 구성한다. 이에 유대인에게 돌아가 마땅한 그 몫은 나치에 협력한 독일인이 가로채리라. 전쟁 이전부터 계속되던 유대인 얼굴 구성은 전후에도 이어진다. 이에 전쟁 중 지속된 유대인 재산몰수도 전후에도 지속되리. 또 나치 독일의 면피를 위해 유대인의 얼굴은 구성되어야 한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측의 입장은 ‘학살의 증거 없음’, ‘희생자가 살아남았다면 그들이 묘사하는 고통보단 학살이 심각하지 않았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 자체가 학살의 증거가 되는 넬리의 얼굴에서 흉터는 지워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유대인의 얼굴을 독일인이 바랐다. 영화에서도 보기 괴로운 얼굴로 귀환하는 유대인의 얼굴을 독일인들이 바라지 않는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들의 얼굴이 곧 홀로코스트가 그토록 심각했음을, 이를 증언할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자 유대인의 멀쩡한 얼굴을 연출한다.     


영화에서 레네가 얼굴을 수술하는 넬리를 두고 '복원'과 '재건'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 이후 넬리가 불쾌해 할까 봐 복원이라는 단어로 바꾼다. 재건은 ‘없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면, 복원은 ‘원래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학살로 존재하지 않게 된 유대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재건이 조니가 바라는 것, 자신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복원이 그녀의 바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넬리가 바라는 복원이 불발되고, 조니가 바라는 재건이 진행된다. 이에 분명 자신이 넬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넬리일 수 없고 에스더로 여겨지는, 생존하였지만 생존한 것이 아닌 넬리, 즉 유령의 상태가 발생한다. 영화 속 유령은 일단 나의 기대와 실재 상대방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넬리는 조니가 여전히 음악가일 거라, 그리고 각별하게 자신을 사랑해준 남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니를 찾아 곡이 연주될만한 클럽으로 향했고,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레네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진술 또한 레네의 입을 거친 조니의 모습이기 때문에, 유령으로 생각하기에 충분하랴. 여하튼 그래서 넬리는 자신이 바라는 조니, 레네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해줄 실재의 조니를 바라리라. 하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의 가사처럼 이미 식어버린 사랑을 직면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여전히 불타고 있는 사랑의 불씨를, 이에 따른 허상을 믿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조니가 실제로 존재치 않는 유령임을 확인한다. 어쩔 수 없이 나치에게 자신의 위치를 폭로했을 거란 넬리의 기대가 실망으로 뒤바뀐다. 또 조니는 요하네스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이는 나치와 공조했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인 듯하다. 그 당시 대다수 독일인의 얼굴도 이 같은 유령이었으리라. 분명 가해자가 존재하는데, 전쟁 당시의 가해자들이 모두 부재하고 있다. 이름이 뒤바뀌었고, 조니의 친구들은 그의 연극에 동조하여, 넬리를 걱정하는 시늉을 한다. 분명 가해자 조니지만 그걸 은닉하여 가해자임을 부정하는, 유대인 아내에게 헌신적인 유령 요하네스들이 둥둥 떠다닌다.      


유대인의 입지도 여전히 유령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학살의 흔적을 은닉하는 얼굴과 진술이 구성되며 나치의 만행을 약화시키는 유령, 죽었지만 살아있어야 하는 유령의 모습으로 떠다닌다. 더욱이 전후에 생존한 넬리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팔레스타인에 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내가 분명 생존했지만 나의 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스스로가 자신이 아닌 유령의 상태로 부유한다. 펫졸드는 이렇게 유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출된 무대의 이면을 본 작품을 통해 까발린다. 이러한 영화 속 어둠은 유령이 아닌, 진실한 존재가 드러나는 유일한 장이다. 빛이 가득한 거리에선 연극을 위해 진실을 은닉해야 한다. 오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에 넬리는 조니의 기억을 더듬으며 진실을 밟아갈 수 있다. 빛이 가득한 낮, 무수한 시선이 넬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오후에 그녀는 오직 조니가 연출한 용모와 행동으로만 존재한다. 조니는 자신이 건네주는 취합된 넬리의 물품만을 허용하지, 그녀가 능동적으로 넬리의 물품을 뒤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조니의 손에 의해 연출된 상태로만 허용되는 넬리, 이에 수용의 경험을 얘기하고,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넬리는 어둠 속에 얼굴이 파묻힌 상태에서, 오직 레네에게만 가능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밤 운전을 하던 레네처럼, 유대인의 입지는 이후에도 어둠을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나락을 헤맨다. 검문소에서 그녀들에게 내리쬐는 날카로운 빛처럼, 드러나는 것은 고통이다. 전후의 유대인들이 양지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랴. 독일인들은 앞서 언급한 그들이 바라는 얼굴, 유령의 모습으로 양지에 나타나는 유대인을 바라지, 실재 유대인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레네에게 고용된 가사노동자 엘리자베트는 그녀가 집의 불을 켜지 않는다고 말한다. 벌레가 많이 꼬인다는 이유를 대지만, 어쩌면 이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가 가장 진실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삶 자체가 어둠이기에 굳이 빛을 밝히며 위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랴. 어둠 그 자체가 삶이던 레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무한한 어둠에 빠지게 되지 않던가.     


넬리의 새어버린 잿빛 머리, 얼굴에 가득한 흉터와 멍, 상복은 어둠 속에 자리한 유대인의 입지를 드러내고, 그들이 한때 거주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폐허들은 여전히 어둠에 파묻혀야 할 유대인의 삶을 드러낸다. 빛을 밝혀야 한다면 이 같은 어둠 그 자체를 볼 수 있는 빛이어야 하지만, 조니는 이를 바라지 않는다. 어둠 그 자체를 드러내는 빛을 바라지 않고, 나치의 만행이 그들을 어둠으로 인도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빛으로 그들을 뒤바꾸고자 한다. 레네는 전후에도 나치에 의해 범람하는 거짓에 의해, 왜곡할 수 없는 어둠, 죽음 그 자체로 고통에 파묻혀 있는 유대인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을까. 어둠속에 파묻힌 유대인들, 이는 불사조로서 다시 날아올라야 할 그들이 결코 주체적으로 부활할 수 없는 입지이기 때문이다. 일단 영화 속 넬리의 부활은 감각의 자극으로 상징된다. 삶에 의지가 없던 넬리, 하지만 서서히 음식을 맛보며 미각을 깨우고, 음악을 들으며 청각을 자극한다. 이러한 식사 장면에서 레네가 입고 있던 의상, 영화의 끝자락에서 넬리가 입고 있던 의상은 빨강, 삶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피를 연상케 한다. 즉 감각을 강조하며 이를 느끼는 육신이 살아있고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또 특별하게 의미도 없고 그저 즐거울 따름이지만, 그렇게 효용이 없음에도 존재해야만 하는 감각을 바로 삶과 동일시한다. 이는 감각을 자극하는 예술과도 연관되리라. 아름다움은 지극히 무목적 해서, 그것 자체로는 대단히 무의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미를 추구하고 지속하고자 한다. 이러한 미, 예술과 삶을 영화는 이어낸다. 넬리가 삶의 의지를 깨울 때마다, 그 도처에는 연주와 악기가 자리해 있다. 우월한 인간을 개량하고자 했던 우생학의 목적하에 삶을 지배하려던 2차 대전, 이에 유대인의 삶은 핍박당하지만, 특정한 목적이 없더라도 인생은 그저 피어나야만 한다.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무목적하고 합리적으로 별 효용도 없는, 다만 즐거울 뿐인 감각과도 같다. 하지만 조니는 다시금 그의 목적대로 넬리를 부활시키려 한다. 넬리의 첫 번째 부활은 조니에 의해 구성된 태어남이다. 그는 전후에 달라진 그녀의 용모, 취향, 걸음걸이를 모두 규정한다. 넬리가 말하고자 하는 수용소의 경험을 통제한다. 그렇게 보기 좋은 용모로 부활하자, 멀쩡한 유대인의 귀환에 환호하며 인간성을 연기하고, 또 가해자가 아니라 가족을 잃은 희생자임을 자처하는 독일인들이 죄책감을 덜어낸다.      


하지만 독일에 의해 구성된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 그들 자신이 주체적으로 부활해야 한다. 그것이 넬리의 두 번째 부활이다. 의 가사 중 '커튼이 내려간다'는 구절처럼, 거짓된 연극, 구성된 연출을 끝마치고 진실을 드러내는, 넬리 스스로가 자신의 사진과 물품을 찾아 나를 복원하는 주체적인 부활이 말이다. 그 부활의 끝은 조니와 친구들에 의해 구성된 무대를 떠나간다. 독일인에 의해 구성되는 유대인이 아닌, 자유분방하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유대인, 부활의 끝은 그 어느 무대와 시선에도 귀속되지 않는 자유요, 나를 구속하려는 상대방의 눈에 남은 공백과 기대와 일치하지 않는 흐릿한 아웃 포커싱이어야 한다. 이렇게 펫졸드는 전쟁 이후에도 유령의 삶이 지속되던 독일의 풍광을, 그간 보여준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넬리가 마주하는 대상이 상대방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환각인지 구분 되지 않는, 나치에 의해 얼굴에 붕대가 감겨 획일화되어버린 내가 아닌 유령의 상태로부터, 진정 나 자신이 염원하는 나의 얼굴을 되찾는 일이다. 또 언뜻 보기에 조니와 넬리는 연인처럼 보이고, 그와 친구들은 나치에 반대한 선량한 시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은 다르다. 펫졸드는 의심하기 어려운 확고한 피상을 의심하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연출을 연출하며 이를 폭로한다. 이에 남성성을 강조하던 전쟁 그 이후에도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구속되는 여성의 운명을 보여주고, 유대인을 향한 이미지 구성, 재산몰수가 끝나지 않았음을 까발리며, 종전이라는 위장을 위해 지속되었던 연출과 지속된 전쟁을 폭로한다. 한때 유대인을 강제로 실어 날랐을 밤의 기차는 홀로 놓인 유대인 넬리를 향해선 서지 않고, 오직 독일인들이 도착을 기다리는 아침에만 넬리를 태우지 않던가, 그렇게 넬리의 발걸음은 아직도 독일에 의해서 출발과 도착이 규정되는가. 하지만 그렇게 넬리가 넬리가 아닌, 살아있지만 내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 아닌 유령의 상태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니의 사랑에 의해 자기 죽음을 결정하거나, 자살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다. 모든 선택은 넬리, 그녀 자신의 것이어야만 하며, 그녀의 삶은 연인이라 한들 상대방이 쥐고 있어서도 안 된다. 펫졸드가 말하는 불사조, 그것은 나의 자유와 억압당하지 않는 진실을 되찾는 것으로, 단순히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다. 어설프게 그들에게 맞춰주는 노래, 연극이 아니라, 떳떳한 나의 노래와 목소리를 되찾는 것, 오직 그것만이 신실한 선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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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0723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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