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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04. 2021

크리스티 푸이유, <말름크로그>

기만 너머로

크리스티 푸이유(Cristi Puiu), <말름크로그>(Malmkrog) - 기만 너머로     

"인간적 조건 하에서 진리란 그 자체가 기만적인 것이다." -질 들뢰즈-

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일단 허무맹랑함과 무지가 악일 수 있다. 어떤 천치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모르고, 그것을 반복하여 자멸했다면, 그 바보는 자신에게 매우 악한 자다. 한편 무지가 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또 진실을 곡해하지 않는다면 마냥 악은 아닐 수 있다. 바보가 갖는 믿음이 허무맹랑하더라도, 그 허무맹랑한 것이 솔직한 진실이랄지, 또 타인에게 설파하여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면 마냥 악으로 볼 수 없으리. 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허무맹랑한 소리를 함과 동시에, 농가를 농가라 부르지도 않고, 구멍을 구멍이라 부르지도 않으며, 설파하는 진리에 내용도 없고 논리적 모순이 가득하다고 러시아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저서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에서 논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악과 선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종교의 시대에 사람들은 특정 직업인다운 직업인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가 보기에 좋은 직업인이 되기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직업인이란 무엇인가. 또 군대가 군인다움을 추구하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군인이 된다면 과연 그것은 본분에 부합하는 것인가. 더욱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군인이란 가능한 것일까. 사랑과 살해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는 왜 폭력을 장려하는 군의 소명을 특별히 존중했을까. 어떤 군대는 망자를 두고 퇴각하는 것이 본인들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퇴각하여 이교도를 충만하게 감화시키지 못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 군인은 기독교에 따른다면 선하지 않은 것인가.

또 망자를 모욕하여 악으로 치부되지만, 반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유익할 수 있는 행위는 어떻게 여겨져야 할까. 더욱이 선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악한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가 자신의 건강은 해할지언정 행복했다면, 그래서 본인의 영혼이나 감정에 좋았다면 선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은가. 선의 좋음은 감정, 이성, 건강 중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런데 이 중 특정한 무엇만을 가리켜서 내게 좋지 않게 된다면, 그것조차 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우리가 논하는 선과 악의 본성은 무엇일까. 또 우리는 과연 무언가를 운운하면서, 그 '무언가다움'을 진정으로 알고 추구하고는 있는 것일까. 그래서 지나친 단순함, 그 함의를 알지도 못한 채, 맹목적으로 어떤 개념이나 단어를 되뇌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다. 단순함이 과하면 왜곡되기 쉽다, 알맹이가 없어 무엇이든 덧붙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비요프는 그간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순하게 진행되어온 바로 그 선과 악에 대한 고찰을 본 저서에서 수행하고 있다. 악이 죽음이라면 선은 생이므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선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달려가는 이 죽음의 왕국에서 과연 선의 승리란 가능한 것일까. 과연 우리는 어떤 선의 승리를 추구해야 할까…     


이러한 솔로비요프의 원전에서 영감을 받은, 길고 긴 장광설을 루마니아의 감독 크리스티 푸이유가 스크린에 옮겨온다. 그는 루마니아와 몰도바에 걸쳐진, 또 그 이전에는 불가리아와 헝가리의 영토였고, 한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일부로 여러 민족의 상대적 진리가 교차하는 트란실바니아의 말름크로그에서 각계각층 간의 토론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1967년 태생의 크리스티 푸이유는 사실상 가장 처음으로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정체성을 국제적으로 선보인 감독이다. 그는 에릭 로메르의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에서 영감받은 연작 구성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외곽으로 옮겨오고자 하는 시도를 여전히 펼쳐내고 있다. 그는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인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을 2005년 내놓았다. 본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차갑게 관통하는 중립적이고도 객관적인 날이 선 카메라의 태도와, 이를 현실과 밀착시키려는 핸드헬드, 대단히 집요하게 느껴지는 길고 긴 롱테이크가 강조되었고, 이는 당대 평론가들에게 루마니아 및 동유럽의 새로운 영화라 평가되었다. 이후 포룸보이우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와 문쥬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연이어 공개되고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으며 서서히 규정되는 루마니아 뉴웨이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령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평가받는다. 한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명으로 여겨진 희망 및 이상을 제시하는 양식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니라, 다른 이념에 대항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고 외면하는 선전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선전 영화에 반하여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기수들은 대부분 모두가 동일하게 현실과 역사의 진실에 관심을 둔다. 이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회복을 선도하는 그들의 연출은 부쿠레슈티의 유일한 영화학교에서 고안된 것이기에 비교적 공통점을 띤다. 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문쥬의 관심은 과거·역사이며, 포룸보이우는 최근 리얼리즘에 장르성을 섞어내고, 푸이유는 철저히 동시대를 포착하며 차이를 띠었다. 또한 현실에 밀착하고자 하는 태도는 푸이유가 가장 집요하여 신작 <시에라네바다>에서 그의 롱테이크는 30분을 가벼이 뛰어넘는다.     


그래서 본 <말름크로그>는 이 같은 기존 푸이유의 관심과는 조금 달라 보일지 모른다. 부쿠레슈티도 아니고 동시대도 아닌 과거의 말름크로그다. 하지만 형식에 있어서 가족들 간의 절충될 수 없이 충돌하던 신념, 사상 등을 포착하던 <시에라네바다>의 형식은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영화는 2.35:1의 화면비에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를 옮겨온다. 원전의 대사와 주제에 매우 충실한 편이기에, 대화가 중심이 되는 본 극은 <시에라네바다>의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대체로 롱테이크를 토대로 롱숏, 풀숏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인물 군상 전체를 비추며, 하나의 시공간에 놓여있어도 각각의 다른 표상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의 타협할 수 없는 삶의 철학과 이로 인한 어긋남을 포착한다. 대체로 <시에라네바다>의 연출을 20세기로 옮겨온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식사 장면에서 포착되는 대화를 리버스 숏으로 포착하기도 하는 등 <시에라네바다>에 비한다면 숏의 분절이 보다 탄력적으로 일어나, 조금은 대중 친화적이다. 한편으로 영화 말미에 대두되는 이 같은 리버스 숏은, 무수한 토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로의 숏, 세계로 편입되지 못한 채, 각자의 숏에 갇혀있는, 극복될 수 없는 '개인'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시에라네바다>에서는 대단히 일상적인, 그래서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하는 즉흥적이고 투박한 리얼리즘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본 작품은 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들도 즐비해 있는데, 구도나 배우들의 동선, 시선을 정교히 이용하여 하나의 세계에 놓여 있어도 서로의 문턱을 넘을 수 없거나, 카메라 및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개인의 움직임을 통해 나의 신념을 수호하려는 인물들의 고집을 보여준다. 1막과 6막의 끝자락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는 군상의 태도도 그렇다. 이러한 문턱은 같은 계급 내에서도 쉽게 넘을 수 없었지만, 계급의 차이에 따라 더더욱 출입이 제한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하인들로 추정되는 이들은 살을 에는 혹한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놓여있다. 이후 내부에 놓인 귀족들이 문을 걸어 잠그는 장면이 포착된다. 그리고 귀족들보다 낮은 계급의 하인들은 모시는 주인을 방해하지 않고자 엄히 출입을 제한한다.      


이렇게 계급에 따라서 문턱을 넘을 수 없는 것처럼, 영화는 원전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에서 도드라지지 않던 계급론을 원전과 차별화되는 요소로 본 작품 고유의 차원으로 탐구하고, 또 이들 계급에 따라서 연출을 달리한다. 영화는 텍스트에서는 보이지 않은, 하지만 귀족들의 수발을 들며 분명 존재했었을 프롤레타리아의 얼굴을 상상한다. 귀족층을 포착하는 카메라가 대단히 수동적이고 정적인, 그들의 작위적이고 만들어진 태도와 억양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프롤레타리아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이보다 능동적이다. 2막에서 하인들의 노동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핸드헬드를 통해 이전과 달리 격렬하고, 더욱 적극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이러한 2막을 제외하면 하인들은 롱숏 내지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되어 대단히 작은 초상으로 포착되곤 하지만, 귀족층은 바스트숏 내지는 풀숏으로 포착되어 관객과 더욱 친밀하고 밀접한 거리를 형성한다. 이런 거리감도 계급론에 적절히 와닿는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오직 귀족을 위해 노동하며, 그들의 행위에 자신이 빠져 있다면, 그래서 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카메라로 재현된다면,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는 귀족층은 항상 제 자신과 밀접히 달라붙어 있으며, 이에 나를 적확히 드러낼 수 있는 가까운 카메라로 재현되는 것이리라. 이러한 연출로 포착되는 그들의 토론 중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은 바로 군대다. 원전에서처럼 교회가 군대를 신성시했다고 말한다. 군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군인이 되어야만 했지만, 어째서 교회가 군대에 신성한 대의를 부여했는지, 왜 군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 그 덕목은 무엇인지에 물음이 제기된다. 그 신성함은 맹목적이다. 기독교의 권위가 줄어듦에 따라서, 만약 교회가 몰락한다면 군대는 이제 사악하게 여겨지지 않겠느냐고 반문이 오간다. 살인은 사악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는 살인이 일어나고, 군인은 전쟁에서 살인을 일삼는 자다. 그렇기에 교회가 맹목적으로 군대를 신성시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살인과 전쟁의 악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부에서 다른 선함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군인은 그대로 악하게 여겨진다. 물론 예외는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내게 선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고, 전쟁도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하는 역사가 있었다고 혹자는 주장한다. 전쟁이 언제나 악하지 않고, 평화가 언제나 선이 아닌, 그런 예외가 있다.   


하지만 군대는 자신들이 선할 수 있는 예외를 스스로의 내부에서 탐구하지 않았다. 영화 속 작금에 기독교 신도들은 오직 사제와 군인밖에 없다고 언급된다.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초반으로 모더니즘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 더 이상 '그리스도를 위한 직업'은 사라지고, 대신 '직업을 위한 직업'을 추구하는 풍조가 사회 전반에 가득했다. 하지만 군대는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여전히 현대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에 혹자는 군인의 종말을 예고한다. 이는 영화 속 인용과도 관련된다. 니콜라이가 저명한 문호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면 인용을 멈추라고 타인이 요구한다. 문호 그 자신을 온당 대변할 수 없다면, 자기주장을 말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귀족들의 대화에서 자기주장은 있을지언정, 그 주장의 대상이 언제나 자신이 아니다. 군인인 남편의 편지, 부재한 올가의 변호 등 나의 외부에서 선과 악을 탐구한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행위가 내게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물을 수 있지만, 타인의 행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영화에선 인간은 양심의 승리에 의해 선한 선택을 내리거나, 외부에 휩쓸려 악행에 휘말린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외부에 대한 관점도 다르다. 기독교를 믿는 올가는 개인의 외부에 다름 아닌 세계가 그리스도의 섭리로 흘러가기 때문에 마땅히 선한 것이라 여기지만, 니콜라이는 인간은 양심을 통해서 선하고 외부는 악하며, 그리스도는 이러한 악을 이겨낼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무관심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 개인이 진정 선한 선택을 내렸는지는 그 사람이 양심에 따라 선택했는지, 만약 외부에 휩쓸렸다면 종교를 믿는지 아닌지, 이에 따라서 그의 행위가 선하다는 믿음에 따른 것인지, 몽매한 악덕을 따른 것인지를 여러모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오직 외부만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시선으론 불가능한 것이다. 크리스티 푸이유의 디렉팅은 전문 배우의 기교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담담하고 건조했지만, 일상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드러냈다는 점에 있어선 생동감이 있었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이러한 디렉팅에 변주를 가해, 귀족들의 얼굴에서 감정이나 표정을 읽어보기 어렵다. 이에 그들이 무엇에 따라서, 진정 자신을 따라서 아니면 타인에게 휩쓸려서 어떤 말을 하고 선택을 내리는지, 이에 대한 판단이 더욱 어려운 얼굴로 펼쳐진다.      


이렇게 모호한 얼굴과 더불어 편지의 주체인 잉그리다의 남편은 포착되지 않고, 그것을 읊는 잉그리다 또한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사람의 선과 악에 대해 판별할 수 있는 증거들은 이처럼 제한적인데 과연 이에 대해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도 영화의 공백처럼, 그 구멍에 무언가를 채워 넣은 우리의 상상이지, 진실하고 명백한 대상의 총체가 아니다. 내가 유일하게 진실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대상에 대한 내 의견은 있을지언정, 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부재한다. 타인의 선과 악에 심판은 내리려 하지만, 진정 내가 선하고 악한지를 모른다. 어쩌면 영화 속 귀족들은 제 자신에게 악하다. 언제나 하인들이 의자를 뒤로 빼주고, 식사와 음료를 제공한다. 또 거동이 불가능한 귀족 노인은 하인들의 손에 의해서만 겨우 연명할 수 있는 처지다. 인류가 스스로를 해방하여라, 하지만 귀족들은 저 자신이 스스로를 해방할 수 없다. 이러한 와중에 올가만 하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로 의자를 스스로 빼고 일어선다. 하지만 토론에 지친 것인가, 식사에 참석하기 이전 올가는 쓰러지고 만다. 대화를 지속하여 여러 상충하는 의견이 오가는 와중에 나를 지켜야 한다는 그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운, 하지만 홀로 서 있고자 하는 올가는 유일하게 주체적일지 모른다. 그 이외에 제 스스로의 양심과 홀로서기를 바라지만 절대 혼자 서있을 수 없는 귀족들은 실로 제 자신에 대해 모순적이다. 그들의 모순적 발화는, 이들이 말하는 자신을 악하게 하는 바보의 몽매하고도 무지한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군대가 자신의 내부에서 목적과 본령을 찾아야 한다는 것처럼, 그들 자신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를 밝히고 증명할 수 있는가. 에두아르드는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각각은 분명 다르지만, 유럽 내의 무수한 민족들은 유럽인으로서 공통성이 있기에 연합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이 다투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도 의견이 맞지 않는다며, 즉 그들 간의 공통성이 없다며 누군가는 반문한다. 그리고 이 공통성에 대하여 그는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사전적 의미를 열거하지만, 그것만으로 공통성과 연합을 논하기에는 너무 넓고 모호하다.     


또 그들은 동로마가 자신의 본성을 결여하여 아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며, 본성의 부재에 자신은 침탈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적이 전부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단 하나의 언어인 불어로 대화하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본성은 드러나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언어가 아닌 말로, 자신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이르게 할 발화를 내뱉는다. 이러한 영화의 배경이 루마니아와 헝가리에 껴있고, 더 세분화한다면 세르비아와 우크라이나까지도 얽혀있는 트란실바니아인 점이 이와 잘 맞물린다. 트란실바니아에서 유일하게 그 지역의 본성을 드러내고, 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각한 이들은 헝가리어를 쓰는 하인들밖에 없다. 귀족들이 제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모른다면, 하인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그들에게 고용되었는지, 선택받은 제 능력에 대해 명확히 자각하고 이에 엄격한 태도를 고수한다. 선함이 곧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라면, 악함이 곧 죽음과 위해라면, 하인은 생존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제 능력과 임무를 엄격하게 수행한다. 한편 귀족층은 영화의 말미에서 스스로를 기쁘게 하며 자라나는 버섯과 조물주의 의도대로 살아간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주체적이고 타율적인 두 스탠스에 서서 격돌한다. 기독교도인 올가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지만, 니콜라이의 태도는 전자에 가깝다. 하지만 스스로 저택을 다듬고 음식을 만들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달리, 그들 없이는 사건을 해결할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는 부르주아지들이 진정 '버섯'처럼 자율적으로 살 수 있는지는 의심의 대상이다. 영화의 3막에서는 갑작스레 조명이 꺼지고, 몇몇 귀족들은 그 파편에 튀거나 총격을 맞은 듯 쓰러지며, 생존한 귀족들은 바깥으로 쫓겨나는, 그리고 4막으로 사건이 이어지지 않는, 흡사 환상 같은 기묘한 숏이 삽입된다. 어쩌면 이것이 식자층의 대화만 가득하던 원전과 궤를 달리하여, 텍스트에서 나타나지 않은 귀족들을 보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노동을 포착한 이유일 테다.      


원전 자체가 솔로비요프가 세상을 떠난 1900년에 발간되었고, 그 시기 자체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조직되는 등, 노동계층이 본인들의 권리와 능력을 자각하던, 사회주의 혁명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격동의 시기에 다름 아니었다. 영화는 원전에서 드러나지 않은, 하지만 원전을 둘러싼 이런 시대적 맥락까지 녹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노동계층인 하인들이 본인들은 버섯일 수 있음을 자각한 시퀀스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악이 곧 죽음이요 선이 생명이라면, 죽음을 이겨내고 생명을 피워낸 기독교의 '부활'은 궁극적인 선의 승리에 상응할 지다. 본 부활을 운운하는 귀족층들이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 없이 제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제 자신의 삶을 외부에서 끌어오는 무능력한 자들이라면, 노동계층은 자신을 압제하는 부르주아지를 실제로 이겨내고 그들에게 소유된 삶을 되찾을 수 있는, 부활의 실현이 가능한 자들이다. 더욱이 조물주의 의도대로 산다는 목적론적 관점을 비판하는 토론에서, 주인은 종에게 요구하지만 실제로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그렇지 않던가. 타인의 선과 악은 엄격하고, 선과 악의 근본적 개념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사투하지만, 정작 이러한 선과 악을 본인이 실천하려는 의지는 결여되어 있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좋으려면 혼란스러운 소동을 달래야만 하지만, 그렇게 선한 선택을 내리기에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에게 좋은 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영화의 말미에 부활이라는 단어와 노쇠, 적그리스도 등 쇠락을 뜻하는 단어가 교차한다. 진정 늙고 병들어서 저물어가는 이들이 귀족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언제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던 영화의 페이드 아웃, 하지만 늙어감과 몰락을 얘기하는 6막의 마지막에 사용된 페이드아웃은 새로운 무언가를 열어젖혀 지지 않는다. 3막의 초현실적 숏과 6막의 끝자락은 제 자신에게 무지하여 서서히 역사의 저편으로 퇴장해갈 그들의 미래를 예언하리.   


이렇게 영화는 솔로비요프의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를 스크린에 옮겨온다. 영화의 골격이나 대사의 많은 부분은 원전에 충실하지만, 원전의 텍스트에서 여백으로 남은 식자층들의 '얼굴'과 본성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선과 악에 대해 아무리 치열하게 토론하더라도, 진정 제 자신에게 필요한 선과 악에 무지한, 스스로에 대한 몽매를 고발한다. 더욱이 원전의 대화에 감히 참여할 수도 없었던, 하지만 원전에서도 부르주아지를 마찬가지로 보필하고 있었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을 섞어낸다.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자각은 없더라도, 진정 자신에게 선한 일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그들의 노동을 포착하며, '노동자의 부활'을 꿈꾼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사회상을 함께 엮어낸다. 이렇게 계급론이 섞인 본 작품은 부르주아지의 무능력을 꼬집어낸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를 연상케도 한다.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것을 적용할 자신에 대해선 무지하며, 반면 이를 깨우치진 못하지만 실로 자신에게 선할 수 있는 행위에 엄격하여 부활의 가능성이 목도되는, 원전의 토의에 진정한 선이란 '나에 대한 앎'이라는 푸이유의 전언을 덧붙인다. 다만 원전의 대사와 함의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계급론을 덧붙이고 텍스트로 드러나지 않고 생략된 노동자와 식자층의 얼굴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영화의 특유성이 모자라다. <시에라네바다>와 유사함과 동시에 그 기조를 이어가지 못해 통일성이 결여된 연출도, 여러 세대가 생각하는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첨예하게 충돌시킨 <시에라네바다>의 토론보다 치열함이 덜하다. 타인인 푸이유가 그의 저작을 충실하게 판단하고 옮겼기에 영화에 솔로비요프는 남았지만, 진정 자신에게 좋을 영화로 이를 승화시켰을까. 본 작품에 푸이유는 남아있는가. 타인의 사유는 치열하지만 푸이유의 시선과 의식은 무뎌진, 다만 원전과 시대상의 충실함과 텍스트에서 생략되었을 이미지를 상상하고 구현하는 영화다운 절충은 분명 미덕으로 꼽을 수 있을, 살짝 아쉬운 푸이유의 범작 시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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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0804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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