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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10. 2021

디 쿨룸비가쉴리, <비기닝>

억압의 기록

디 쿨룸비가쉴리(Dea Kulumbegashvili), <비기닝>(Beginning) - 억압의 기록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가상의 태양일뿐이다.” -칼 마르크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여겨지는 나라 조지아. 북쪽으론 러시아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 남서쪽으로는 터키와 국경을 맞댄 지리에 있다. 종교적으로는 국민의 83%가 동방 정교, 그중에서도 조지아 정교회를 믿고 있다. 기독교 자체는 4세기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지아 정교회로는 467~491년에 거쳐 독립하였다. 이후 조지아 정교회는 조지아 왕국의 통합과 전성기를 이룩하고, 문화의 원천이 되는 등, 조지아라는 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거대한 축으로 자리매김한다. 더욱이 조지아의 역사 자체가 조지아 정교회를 지켜내는, 처절한 투쟁의 역사로 요약할 수 있다. 13세기 동쪽에서 들이 닥쳐온 몽골에 의해 조지아 정교회는 위협받았으며, 근세에 서아시아의 맹주로 자리 잡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계 국가들에 의해 정교회는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더욱이 19세기부터 지금까지도 악연으로 이어져 온 러시아는 정교회라는 종교 자체는 동일하지만, 러시아 정교회와 조지아 정교회는 분명 다른 종교이며, 러시아는 자국의 종교로 조지아를 개종시키려 하였다. 즉 조지아는 북쪽으로는 슬라브계 정교회, 남쪽으로는 이슬람을 맞대고 있으며, 이들의 팽창에 따라서 국가의 얼굴에 다름 아닌 조지아 정교회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고군분투하였다. 조지아의 위기 속에서 정교회는 '조지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침략자들로부터 구별 지어주는 문화적, 종교적 색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작금에도 조지아인들이 자국의 정교회에 갖는 자부심은 거대하며, 조지아 정교회가 국교는 아니지만 헌법에 명시될 정도로 영향력은 지대하다. 조지아 정교회가 국교가 아니기에, 조지아 내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이단, 특히 전통적이지 않은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바라보는 조지아 정교도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오랜 역사를 거쳐서 지켜온 전통적인 조지아 정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비전통적인 종교인들은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전통을 추구하는 문화적 색채와 더불어, 산맥이 많아 고립되어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국민성, 특히 러시아의 위협에 의해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화하는 정책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조지아 정교회의 득세와 신생 종교의 차별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종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조지아 내에서 비교적 역사가 짧은,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신도가 당한 테러를 담아낸 <비기닝>을 조지아의 신예 감독, 디 쿨룸비가쉴리가 연출한다. 198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조지아에서 자란 그녀는 이 같은 두 개의 시선에서 오직 '하나'만을 강조하는 일신론 종교의 문제를 꼬집는다. 쿨룸비가쉴리는 본 이야기를 1.33:1의 화면비에 담아낸다. 영화의 여러 화면비 중 가장 좁은 화면비 중 하나로 여겨지는, 갑갑한 효과를 자아내는 이 같은 화면비는 곧 종교에 갇힌 그들의 시야를 의미할지다. 쿨룸비가쉴리는 피해를 당하였지만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되는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테러를 일으킨 공포분자, 양자 모두를 긍정하지 않는다. 특히나 영화의 1.33:1의 화면비는 오랜 세월 유지해온 그들의 전통만이 참이라고 믿는, 후자의 좁고 편협한 시야를 형식으로 구현된 것이리라. 이들은 이단으로 여겨지는 종파들을 테러하고, 본인들의 힘과 우월적 위치를 바탕으로 소수자들을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일을 영화 내에서 서슴지 않는다. 한편 여호와의 증인도 별반 다르지 않다. 테러 이후 트라우마에 벌벌 떨고 있는 야나를 남겨두고, 데이빗은 교회의 재건과 이전을 위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향한다. 그는 책임져야 할 가족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하겠지만, 종교라는 좁다랗고 편협한 시선에 의식에 갇혀있어, 오직 그것을 위한 삶밖에 모른다. 이윽고 그가 없는 동안 야나는 테러범으로 추측되는 인물에게 강간을 당하는데, 그녀를 마땅히 피해자로 바라보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할 남편의 시선은, 엄격하고 정숙한 성적 보수성이 특징적인 여호화의 증인의 시선에 의해 간음을 저지른 방탕한 여인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좁은 시야는 있는 그대로의 야나가 아닌, 종교적인 필터에 덧씌워져 왜곡된 야나를 데이빗의 의식에 매개한다.      


이러한 좁은 화면비 내에서 영화는 열림과 닫힘이 강조된다. 본 작품의 도입부, 교회의 문과 창문이 열려있어 신도들이 진입한다. 그들이 진입하는 순간 영화는 빛이 가득하다. 이윽고 신도들이 다 도착하자 문을 닫고, 교회는 어둠이 빛 대신 자리한다. 빛이 사방에 충만하여 모든 신도를 균일하게 포착하던 영화의 조명은, 오직 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만을 강조하는 편협하고 희소한 조명으로 뒤바뀐다. 그리고 이렇게 닫힌 공간에 테러리스트가 화염병을 투척하며 ‘닫힘’에 오히려 위기는 증폭되고, 닫혀있는 모든 문을 부숴야지만 이들은 탈출하여 생존할 수 있다. 테러 이전, 이렇게 닫힌 교회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설교 되는데, 오직 하나님의 시험에 따라 자유의지의 실현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읊는다. 테러와 오직 절대자만을 강조하는 폐쇄성은 서로 연결되어, 닫힘 속에서 특정한 절대자의 임무만을 조달받아 그것만을 추구하는 폐쇄적인 삶이 곧 자멸임을 강조한다. 데이빗도 자신의 판단을 확고하게 걸어 잠가, 피해자인 야나를 냉대하지 않던가. 우리는 열고, 빛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는 이처럼 좁은 화면비와 폐쇄적인 미장센 내에, 종교에 따라 기계적이고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듯한 인물들의 수동성이 강조되기에 아주 건조한 느낌을 준다. 천진한 아이들의 움직임을 제외하면 영화의 디렉팅은 로베르 브레송의 대단히 무감한 표현법을 연상케 하며, 본 작품의 프로듀서인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차가운 디렉팅과도 유사하다. 더욱이 이러한 디렉팅과 대상이 선명하지 않게 포착되는 35mm 필름의 희미하고도 아스라한 질감은 감상자에게 흡사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곧 영화 속 ‘나’의 삶일 것이다. 영화 속 세례를 받기 이전의 아이들은 생기가 넘친다.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아이들은 살아 숨 쉰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성인, 특히 여성들은 살아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자신을 위한 삶이 결여되어 있다. 남편은 자기 뜻대로 야나를 좌우하려 하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테러범이 그녀를 지배하려 든다. 야나가 남편에게 바라는 보호나, 강간 이후 친정에 찾아간 그녀가 하고 싶었을 고백, 안식 등은 모두 불발된다. 그녀는 강간을 당한 피해자일 수 없다.     


또 그녀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강간을 당하기 이전 가해자의 미끼에 걸려 밖에 나간 것처럼, 외부, 남성, 종교에 의해 움직이는 삶을 살아간다. 특히 성에 있어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조지아의 여성차별은 본 작품 내에서 역사적이고 단절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나의 어머니는 자녀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의지가 아닌, 딸을 위한 재혼을 선택했다. 이후 재혼한 남편과 불화를 겪었지만, 그녀 자신보다 가족을 우선하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풍조에 의해 이혼할 수 없었다. 과거의 여성이 이랬다면, 미래를 짊어질 여성이라 할 수 있는 야나의 여동생은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아 경력이 단절되었으며, 더욱이 그녀는 아이를 혼자 낳은 모양이다. 아이는 분명 양자 모두의 책임이나, 성교 이후 흔적을 배게 되는 오직 여성에게만 부여된다. 야나의 강간 또한 마찬가지다. 가해자를 물색하고 엄벌하려는 데이빗의 시선은 부재하고, 오직 그녀를 문책하는 잔혹한 시선이 대신 자리한다. 더욱이 이처럼 남성이 부재했을 때 여성들이 위기에 처하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줄곧 바깥으로 나돈다. 과거-어머니, 현재-야나, 미래-여동생 모두의 곁에 그녀들을 지켜줄 남성들은 부재한다. 이에 대해 쿨룸비가쉴리는 일련의 모순과 불공평함을 고발한다. 성적 보수성이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남성에게는 관대한 양측의 종교와 조지아의 문화적 색채에 대해서 말이다. 여성을 그들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음에 그녀들의 색채는 더더욱 빛바래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감내해야 한다.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게 사용되는 패닝이 움직임의 전부다.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로 형성한 회화적 프레임의 안과 밖을 오가는 인물들을 탐구한다. 인물들은 언제나 종교적 프레임 내부로 진입해오는 자다. 하지만 카메라의 관심은 인물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의 관심은 교인의 시선을 구현해놓듯, 오직 교회, 종교적 세계 그 자체에 집중한다. 세계를 굽어보는 시선이 오직 종교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포착되고 보장받으려면 종교가 포착되는 프레임 내부로 편입해 와야 한다.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일례로 버스 안에서, 야나의 뒤에 앉은 승객의 손이 포착된다. 그 손은 가해자의 손일까, 그녀에게 무언가 용건이 있는 듯한 꺼림칙한 손은 야나에게 불쾌감과 불안을 남긴다. 프레임 바깥에 놓여있어 위협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 그 인물의 신원, 표정, 시선 등을 말이다. 무엇보다 카메라가 그 인물의 정체에 관심이 없다. 오직 카메라는 불타고 있는 교회나 교인의 삶에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카메라는 종교적인 공간과 교인들만을 수동적이고도 맹목적으로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들은 프레임의 안과 밖, 카메라와의 거리에서 대단히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바로 아이들의 발걸음이 그렇다. 아이들은 어른에 의해 본 종교적인 공간과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에 담길 수 있게끔 자세나 구도가 강제되었다. 도입부에서 야나에 의해 특정 아이들은 창문만을 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에 불이 난 이후 아이들은 이러한 종교의 요구, 강제된 예배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된다. 화재 이후 아이들은 프레임 안과 밖을 오가며 자유로이 뛰논다. 그리고 아직 교리로부터 많은 부분 자유로운 아이들은, 신앙 수업에서 자유로이 이탈하고 어긋내며 웃음을 띤다. 러시아와 조지아라는, 각자의 '참'을 강조하던 나라에서 살아온 쿨룸비가쉴리는 어느 양자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들의 자유분방함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삼는다. 오히려 화재 이후 아이들은 즐겁다. 아이들은 천국과 지옥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맹목적으로 천국과 지옥 개념을 읊는다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기에 천국과 지옥, 선함과 악함은 그리 쉽게 나눌 수,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천진한 태도를 무감한 디렉팅에 대비되는 진정한 삶으로 포착함과 동시에, 감독은 아이들에게 덧씌워지는 종교의 영향력을 고찰한다. 아브라함 이야기, 거기서 부모의 선택은 아이의 자유의지를 좌절시킨다. 불발된 자유를 내면화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시험이나 천사의 전언 등 누군가의 말에 의해 좌우되는 삶을 체화하게 된다. 또 종교 갈등에 의해 야나의 아들 게오르기는 밖에 나가 놀 수 없다. 아들이 선택하지 않은, 부모가 바란 종교에 의해 아들은 집의 내부에 갇힌다. 또 아들이 진정 도움이 필요할 때에 보호자는 그에게 '홀로서기'를 외친다. 여성의 운명처럼 필요할 때는 홀로 설 수 없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홀로서야 하는, 오히려 신도들을 어둠으로 인도하는 종교란 야나와 게오르기를 통해 현재와 미래로 계승되어 간다.     


이를 포착하는 영화는 롱숏과 풀숏이 주로 활용된다. 대체로 종교적인 공간, 세계 그 자체를 완전하게 포착하는 구도인 롱숏이 활용되고, 서서히 인물들의 ‘입’에 주목하며 풀숏으로 좁혀진다. 이러한 구도 내에서 롱테이크, 원쇼트원씬을 주로 활용하여 영화 속 시간은 거의 잘려 나가지 않고 여실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영화는 흡사 CCTV의 역할을 수행한다. 데이빗이 녹음 파일만 믿고 야나를 곡해하고, 또 경찰이나 가해자가 CCTV 영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이해 및 화해를 강제하고 사실을 왜곡한다면, 그 왜곡 이전을 감독은 냉철하게 기록한다. 때때로 하이앵글로 내려다보는 그 차가운 시선, 특히나 가해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야나를 높은 구조물에 매달린 카메라로 차갑게 포착한 하이앵글숏이 감독의 태도를 보여준다. 움직이지 않는, 객관적으로 모든 사실을 기록하는 카메라가 고정이라면, 드물게 사용되는 패닝은 감독의 주관성이 개입된다. 패닝은 아들이 야나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할 때, 경찰로 둔갑한 가해자가 야나에게 성적 접촉을 요구할 때, 가해자와의 녹음 파일을 접한 데이빗이 야나를 호출할 때 사용된다. 남성이 여성의 발걸음을 규정하고 인도할 때, 이러한 수동적인 여성의 이동을 표현하고자 감독은 패닝을 택한다. 그리고 이 같은 남성의 의중은 여성을 성적으로 더럽히고, 피해자인 여성을 간음한 여성으로 둔갑시키는 왜곡에 상응한다. 이러한 남성들의 악의에 여성들은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처지다. 한편 유일하게 여성이 남성을 이끈다고 할 수 있는 패닝이 활용되는데, 바로 숲에서 누워있는 야나를 게오르기가 바라보고 그 옆에 가서 똑같이 눕는 장면에서다. 게오르기는 야나를 죽었다고 오해한 걸까, 오랜 시간 미동도 않고 누워있던 야나는 아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아들을 오해하게 만들려고 누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가장 긴 롱테이크로 포착된 야나의 휴식, 그 풀숲만이 야나에게 허용된 유일한 안식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녀는 다만 종교와 남성들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려고 그렇게 누운 것이랴.      


영화 속 사람들로 구성된 공간은 오히려 차갑고 소리도 없다. 딱딱하고 직각적인 공간, 일말의 소음도 없는 절대적 부동의 공간이 집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집에서 야나는 쉴 수 없다. 집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각은 보호받을 수 없는, 남성들의 침입에 벌벌 떠는 그녀의 두려움을 가시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반면 자연은 온갖 벌레, 새들의 소리가 가득하여 생명력이 피어나고, 또 그녀가 누워있는 이끼, 풀, 꽃이 뒤덮인 대지는 포근하다. 어떠한 목적 없이 피어나는 생명력 가득한 자연에서 야나는 문명이 자신에게 부여한 ‘인내하고 참아야 하는 여성’, 어머니의 번뇌를 모두 벗어던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게오르기는 이렇게 자연과 물아일체 된 어미 없이는 살 수 없으리라. 야나가 깨어났을 때 게오르기는 깨어나지 않는다. 야나가 죽은 것으로 여겨지면, 게오르기는 깨어날 수 없고, 살 수 없다. 남성에 의해 불려가는 여성, 어미에 의해 좌우되는 자식, 강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과 지배는 또 다른 약자를 향해 계승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세례, 영화의 결말에 어미의 손에 의해 살해되는 게오르기처럼 말이다. 왜 그녀는 아들을 죽였을까. 또 대단히 초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가해자, 알렉스의 죽음에 그녀는 연관되어 있었을까. 우리는 이를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그를 닮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천국 개념에 빗대어 바라봐야 할 것이다. 정교회에 대한 믿음,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교인들 모두가 절대자가 보기 좋은 모습을 추구하며 살아가리라. 하지만 교회가 불타고 있는데도 늦장을 부리며 해가 지고 나서야 도착한 경찰차, 경찰로 둔갑한 공포분자가 화해와 이해를 종용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데이빗에게 영상을 요구했던 경찰 등은, 진정 신이 보기에 좋은 삶, 신이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든다. 어쩌면 누가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께서 보기 좋다고 착각하는 악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약자가 죽는다는 것, 생명이 저물어가 쩍쩍 갈라진 대지에서 인류가 최후를 맞는다는 지옥은 어쩌면 필연이다.     


이렇게 쿨룸비가쉴리는 조지아의 종교 갈등과 여성 혐오를 정교한 형식미로 선보인다. 남성에 의해 여성은 갇혀있다. 좁다랗고 갑갑하여 자유가 박탈되고 편협한 느낌을 주는 1.33:1의 화면비 내에서, 순종적인 특정 여성의 상만을 요구받는다. 주인공 야나가 왜 배우라는 직업으로 설정되었을까. 감독 남편에게서 특정 배역만을 요구받는 그런 여성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함은 아닐까. 배우에게 요구된 정상적인 여성 배역이란 순종적이고 순결한, 남성이 바라는 여성의 이상적 모습이다. 그리고 이는 길고 긴 역사를 함축한다. 어머니가 그랬고, 여동생이 뒤따라온다. 이러한 여성은 빛이 바랜 듯한 35mm 필름의 희미한 질감으로밖에 재현될 수 없다. 이들과 달리 조지아에서 지배적인 남성과 극단적 민족주의자는 영화의 말미에 사냥개를 몰고 먹잇감을 추적하는 사냥꾼 알렉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에 다른 종교를 믿는 그들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유일하게 허용된 좁다란 공간 내에서도 궁지에 몰린다. 조지아의 보수적인 성 통념과 그들이 믿는 여호와의 증인 교리의 성적 폐쇄성이 그녀를 더욱 옭아맨다. 더욱이 절대자, 국가가 바라는 일이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악덕을 범람하는 일이라면 그들이 보기 좋아할 살해를 기꺼이 약자에게 실현한다. 야나가 자기 아들을 살해한 것은 보기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테러리스트의 답습 내지는 남성에 대한 극단적 증오가 아니겠는가. 천국에는 모두가 그런 사람들만 있다. 하지만 모두 그런 사람들만 있기에 그들과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여겨질지어다. 우리는 그것에 순응한다. 모두가 그렇다면 야나도 그들처럼 살해하고 지배할 수밖에 없으리. 이렇게 감독은 조지아의 사회문제도 더불어 꼬집는다. 신생 종교 및 다른 종교를 대상으로 한 조지아의 척결되지 않는 갈등을 꼬집고, 오히려 이를 방관하거나 축소하려는 경찰의 편협한 태도를 비판한다. 또한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 내에서 여성이 처하는 수모와 그것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항하여, 이를 세세히 기록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프로듀서로 참여한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침묵의 빛>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느리고도 객관적인 태도로 종교적 세계를 포착하고, 예측 불가능했던 결말부의 우발적 사건과 하나의 주검이 백골화되고 대지와 일체 되는 긴 시간을 축약해낸 초현실적 롱테이크가 그와 유사하다. 또 건조한 롱테이크로 실내에 주로 놓인 여성의 삶을 좇아나갔다는 점에선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도 연상케 한다. 물론 그 형식미에 비해서 탐구가 과연 투철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다만 소재에서 기인한 감각성을 형식미로 이어내고, 영화가 비판하는 사회가 수행하지 않는 작업을 여실히 기록하며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바를 위한 형식을 직조하는 감독의 연출력을 입증한 데뷔작이라 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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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0810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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