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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7. 2021

블레타 바스홀리, <하이브>

딸이 어머니께 바치는 거룩한 초상화

블레타 바스홀리(Blerta Basholli), <하이브>(Hive) 

- 딸이 어머니께 바치는 거룩한 초상화    

“저들이 부르는 노래는 또 어떻고요? 듣다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한 기분이 듭니다. 이 나라의 운명과도 관계가 있어요. 수세기에 걸쳐 이들만큼 슬픈 운명을 감수해야 했던 국민도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이렇게 거칠고 무뚝뚝한 것도 그 때문이죠.” -이스마일 카다레-

20세기 중유럽과 동유럽의 슬라브족들은 범슬라브주의라는 하나의 사상을 공유했다. 범슬라브주의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중심이었던 게르만족과의 민족적 차별성을 확립하고, 본인들의 목소리를 명확히 내고자 하였다. 이윽고 1차 대전 당시에는 대표적 슬라브 국가인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손을 잡았고, 이후 세르비아가 주축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립한다.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모인 연합 국가였던 유고 왕국, 이후 유고 연방은 티토의 강력한 리더쉽 하에 끈끈한 결속력을 유지하며 동구권의 맹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1980년 티토 사후 이후 집권한 지도자들은 다양한 종교를 믿고,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슬라브 국가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했으며, 이에 1991년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에서 탈퇴 선언한다. 이윽고 세르비아가 이를 막고자 무력을 동원한 것이 유고 전쟁의 서막이다. 이윽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또한 독립을 선포하며 전쟁은 매우 복잡한 국면으로 치달았고, 이는 1995년 12월까지 지속됐다. 그렇게 유고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세르비아에는 가장 이질적인 자치주 코소보가 남아있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로 이뤄진 자치주가 아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지역이다. 이에 코소보 전쟁 이전부터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의 긴장감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유고 전쟁 전부터 코소보는 독립을 촉구하는 봉기가 있었고, 모든 민족의 평등함을 주창하는 티토 치하에서 독립 열망이 비교적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알바니아 통일을 위한 정치적 움직임 때문에, 티토 치하에서도 코소보에선 시위가 이따금 발생하였다. 그리고 티토 사후, 세르비아인들이 중심이 된 유고에서 코소보의 독립 열망은 다시 하늘을 찔렀고, 특히나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의 코소보 이슬람 문화유적 훼손, 무슬림 박해는 갈등의 화두였다. 이러한 갈등이 전혀 종식되지 않고, 오히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의 이탈에 더욱 강력한 결속 정책을 추진했던 세르비아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가, 이윽고 1998년 코소보 전쟁이 발발한다.     


1999년까지 지속한 전쟁은 약 3,600명가량의 코소보 군인이 희생되었고, 세르비아군도 약 1,200명가량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종청소에 의해 약 8,600명가량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약 220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코소보 인구 중 절대 적지 않은 수가 희생된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 희생자의 다수는 인종청소에 의해 사망했기 때문에,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처럼 남자들이 희생의 중심이 되었다. 이에 많은 어머니는 홀로 남아 가정을 꾸리고 지켜나가야 했는데, 본 <하이브>는 이러한 코소보 전쟁 이후 가장이 된 여성들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다. 어머니의 강인하고도 숭고한 삶을 1983년 코소보 태생의 블레타 바스홀리 감독이 영화화하며, 본 작품으로 데뷔한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최근 8월 말에 <아담>이라는 작품이 개봉했다. 그 작품은 주인공 아블라나 사미아의 수심 가득한 얼굴과 역경이 새겨진 주름을 포착하는 것만으로, 그녀들의 삶을 효과적이고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는데, 본 작품의 연출도 이와 유사하다. <하이브> 또한 영화의 주인공 파흐리의 얼굴을 그저 클로즈업 할 뿐, 그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얼굴의 영화’다. 그녀의 표정은 흡사 전쟁이 다채로운 감정을 씻겨 내려가 버린 듯한 차가운 무표정, 그저 많은 것을 묵묵히 참고 있는 무표정이다. 무표정을 띠고 있는 입 또한 대체로 꾹 닫고 있어 영화는 침묵이 자욱하다. 그녀는 말할 수 없다. 전쟁에서 실종된 남편의 양봉을 이어서 하게 된 그녀는, 아직은 양봉이 서툴러 벌들에게 쏘이는 등, 몸에는 부어오른 벌침 자국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내색할 수도 없고, 이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고 떠나간 남편을 그리워할 겨를이 없다. 그저 침묵하고 묵묵히 참으며 가정을 꾸리는 수밖에, 그런데도 얼굴에 아로새겨진 침울함과 수심은 감춰지지 않고, 이는 그녀가 무표정의 이면에 숨겨두었을 억겁의 비극을 짐작게 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리얼리틱한 연출이 주를 이룬다. 바로 저번 주에 개봉한 인접한 문화권, 한때 코소보와 한나라였던 세르비아의 영화, <아버지의 길>과 유사한 연출이 눈에 띈다. 일단 도입부에서 롱테이크가 도드라진다. 그리고 본 작품은 코소보의 여성들이 사업체를 꾸려 아이바르(발칸 반도의 요리에 사용되는 조미료. 붉은 피망과 후추를 섞어서 만든 소스로 빵에 찍어 먹거나 스튜에 활용한다)를 팔며, 가정과 마을을 꾸려가는 공동체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다.     


이러한 실재의 잘려 나가지 않은 생생한 시간을 보존하고, 특히 파흐리의 뒤를 조용히 뒤따라가며 그녀의 삶과 시간을 고스란히 옮겨온다. 특히나 이는 도입부에서, 전쟁은 끝났지만 상흔의 여파가 아직 단절되거나 잘리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는 시간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롱테이크는 급박하고도 격렬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를 통해 포착된다. 오직 여성들만이 남게 되어, 사적인 가정과 공적인 경제활동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험난한 상황, 그 처절한 삶을 운동감으로 가시화하기에 핸드헬드는 매우 효과적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남편,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전쟁의 원인이 된 이데올로기 또한 마을에 생존해있는 노인들의 정신에 박혀있으니, 살아남은 여성들은 아직까지도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에 의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운동감을 표현하기에 핸드헬드는 효과적이다. 이러한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연출 스타일과 결이 비슷하다. 그리고 본 작품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과거를 회고하며 알량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사실 그녀들은 감상주의에 빠지고 싶은, 나약함의 유혹이 있다. 파흐리의 꿈에선 과거에 강에서 함께 수영하던 남편이 등장한다. 하지만 너무나도 짧게 포착되고, 이윽고 편집으로 거칠게 잘려 나간다. 흡사 그녀의 의식이 이를 ‘플래시백’ 할 겨를 없다는 듯이, 파흐리는 남편과의 추억에 머물러있을 여유가 없다. 현재의 그녀에게 전쟁은 진행형이므로. 이러한 본 작품의 제목은 <하이브>, 즉 벌집이다. 그리고 벌집에서 알을 낳는 것은 여왕벌이고, 애벌레를 키우고 꿀을 모으며 노동하는 일벌들도 모두 암컷이다. 영화는 코소보의 살아남은 여성들을 벌에 비유하여, 그녀들의 거룩하고도 숭고한 희생정신에 예우를 표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도입부에선 양봉하는 파흐리가 포착되지만 이는 익숙하지 않고, 영화의 전개에 따라 양봉은 남편이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하지만 그녀는 서툴러도 양봉을 도맡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딸과 아들을 길러야 하고, 또 휠체어를 타며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 또한 책임져야 한다. 그녀는 사적 영역만으로도 버겁지만, 공적 영역까지도 자신의 어깨에 메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 영역에서의 일은 매우 느리게 진전된다. 흡사 한 마리의 벌이 아주 소량의 꿀과 꽃가루를 쥐고 벌집에 돌아오는 것처럼, 그 행위가 수백, 수천 번 반복되어야지만 비로소 꿀과 벌집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단 한 번의 그녀들의 행위는 매우 미약하다. 그리고 노동의 결과인 꿀의 달콤함과는 상반되게, 노동 그 자체는 너무나도 고되다. 누군가의 달콤함은, 누군가의 따끔함과 씁쓸함, 고통의 대가다. 하지만 파흐리는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집을 짓는다. 덤덤하게 일을 반복하는 벌들처럼, 가시화될 때까지 노동을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양봉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정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운전을 시도한다. 마을 여성들의 리더인 파흐리는 아낙네들에게 운전 면허증을 따라고 독려한다. 남편들이 남기고 간 것 중 하나는 바로 차다. 그리고 이 차를 이용해야지만 바깥으로 나가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기사가 되고, 트랙터를 몰고자 하는 여성들의 여정을 포착하는 데서, 이슬람 문화권인 코소보의 현대화 가능성이 포착된다. 영화의 초반부, 여성들은 언제나 실내에만 놓여있었다. 아주 간헐적으로 바깥에 나왔고, 또 여성들만이 놓여있는 공간으로만 향할 때만 외부가 허용됐다. 야외에서도 골목길 같은 곳에서, 즉 남성들의 시선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녀들끼리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아무리 코소보가 타 이슬람 국가에 비해 세속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들, 남/여의 분리와 구별은 엄격하다. 그래서 운전을 배우고, 직접 차를 모는 파흐리의 여정을 포착하면서 비로소 영화는 광활해진다. 그간의 여성은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고, 시골에 사는 구성원 중에 도시로 향할 수 있는 특권은 차를 몰 수 있는 남성에게만 허용되었으랴. 하지만 파흐리도 이제 높게 올라가는 현대화된 아파트를 구경하고, 세련된 도시의 풍경을 목도한다. 그녀들은 운전을 배워 건설공사 차량을 몰며 경제활동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떠나간 남편들이 해왔던 노동이 그랬으랴.     


하지만 이는 불발된다. 여전히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건설업에서 여성들의 진출은 못마땅하게 여겨진다. 더욱이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여성은 파흐리 단 한 명뿐이었으며, 마을의 다른 여성들은 운전하려다가 남편, 아버지, 아들 등에 가로막혀 좌절하고야 만다. 하지만 파흐리는 남성 우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힐 수 없다. 운전해야지만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기에, 어떻게든 운전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가장인 그녀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남편의 주검을 찾기 위해 접근금지선을 넘은 것처럼, 그녀는 금지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들이 생산한 아이바르를 유통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전쟁이 이어진다. 그녀들은 무형의 남성들과 실재 남성들, 각각과 싸운다. 무형의 남성들은 바로 전쟁에서 사망한 아들, 남편들이다. 그들과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을 배워나가느라 그녀들은 투쟁한다. 그래서 전쟁은 이어진다. 그들이 남긴 것은 매우 파편적이다. 벌들을 남겼고, 절단 테이블을 남겼으며, 차를 남겼다. 하지만 강 속으로 떠나간 그들은 여성들에게 남긴 것에 대해 답해줄 수 없다. 파흐리의 아들이 아빠에게 질문하고 싶지만, 그 질문은 강 속으로 영영 파묻혀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주검이 되돌아온다 한들, 도입부에서 모두 똑같은 흰 천에 싸인 시체들처럼, 그들은 고유한 답을 말할 수 없고, 대신 참혹한 보편만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들은 남성 무슬림들에 의해, 남자의 일을 배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타인의 시선이 개입하지 않는 곳에선 파흐리가 양봉을 하지만, 타인의 시선이 노출되어 물건을 납품하고 팔아야 하는 시장에선 시아버지가 경제활동에 참여한다. 남성들의 죽음과 성비의 불균형, 이에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들은 부랴부랴 면허증을 따고, 살아생전 남편의 행동들을 어설프게 모방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수는 제대로 잡을 수도 없고, 벌들은 파흐리에게 적대적이다.      


그리고 여성은 경력을 쌓을 수 없던 만큼, 현재의 여성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과 경험을 꾸미고 거짓말한다. 더욱이 남성들의 모든 것을 여성이 도맡을 수 없다. 운전, 건설업에 그녀들의 참여가 터부시되는 것처럼 목공업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파흐리는 남편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절단 테이블을 처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억과 그늘을 붙잡고 싶어 하는, 과거에 파묻힌 딸은 어머니를 책망한다. 그녀들은 과거, 기억과 투쟁하는 전쟁을 지속한다. 이러한 와중에 그녀들의 두 번째 전쟁은 살아남은 남성들과의 전쟁이다. 젊은 남성들은 다수가 전쟁과 인종청소로 사망했다. 하지만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노인들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그들은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투쟁을 방해하며, 이에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한다. 운전하는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방해, 모욕, 테러하는 등, 남성의 일에 여성이 참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업장이 생긴 이후에도 노인들은 여성들의 생산품과 공간을 훼손한다. 코소보 전쟁의 주체를 찾는다면 바로 이러한 노인들이라 할 수 있으랴. 분리주의와 민족주의, 남성 우월적인 이슬람을 믿으며 비타협적이고 교조적인 이들이기에 말이다. 또한 이들은 비생산적이다. 더 이상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 여건이 안 되는 그들은 영화 내내 카페 같은 곳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다. 하지만 비생산적인 그들이, 생산적이고자 하는 여성들을 방해한다. 전쟁 이후 마을의 재건을 가로막는다. 더욱이 유전자 검사를 거부하는 아버지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파흐리는 그들의 돌팔매에 무너질 겨를이 없다. 마찬가지로 돌을 던진다. 고루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깨부수고자 한다. 거룩한 사명이나 이상에서 비롯한 행위가 아니다. 다만 생계, 모두의 삶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쟁 이후에도 그것의 원인, 불씨가 지속되어 여성들을 옥죄는 상황이 재현된다. 더욱이 농산물 시장의 사장은 혼자 남은 파흐리를 강간 시도한다. 이는 전쟁 당시 군인, 남성들에게 당했던 수모가 반복되는 것이랴. 남성이 부재하고, 여성들만 남은 마을에서 전쟁의 나쁜 기억도 오버랩된다.     


이러한 거대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덤덤히 삶을 꾸려나가는 여성들은, 많은 주검과 피로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유하고도 담대하게 흘러가는 강과 같다. 모든 것을 침묵하고 그저 인내하며 품어주는 강의 잔잔한 물결과 담대한 무표정으로 삶을 이어가는 어머니들은 서로 닮아있다. 신화에서부터 어머니와 강은 언제나 한 쌍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파흐리의 곁에 물은 줄곧 산재해있다. 물로 시아버지를 씻는 등, 그녀는 물처럼 삶을 이어나가는 자다. 코소보 전쟁 당시에는 강에 물고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시아버지가 언급한다. 하지만 파흐리의 아들은 물고기, 그것도 빨간 물고기를 봤다고 말한다. 그 강은 전쟁과 인종청소에 의해 희생된 주검에서 흘러나온 피를 흠뻑 마신 강이다. 하지만 그 죽음의 공간에서도 강은 다시금 생명을 피워낸다. 강은 차에 테러를 당한 파흐리가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러 가는 곳이요, 여러 방면으로 난항을 겪지만 이를 표출할 수 없는 파흐리를 그저 잠잠히 위로해주는 공간이다. 더욱이 전쟁이라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또 죽음에 낙담하지 않고 그것으로 적셔진 새로운 물고기를 탄생시키는 것처럼, 강과 같은 어머니들도 좌절하지 않고 무언가를 생산한다. 빈 병, 빈 진열장에 붉은 아이바르를 가득 채우며, 죽음의 핏빛을 생명력 넘치는 빨강으로 뒤바꾼다. 강은 파흐리의 남편을 집어삼켰다. 파흐리는 남편이 강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의 결혼반지가 스르르 손에서 벗겨져 강이 이를 빼앗아가는 악몽을 꾼다. 이후 잠에서 깨어나니 폭우가 쏟아진다. 부랴부랴 아이바르를 치우고, 그다음 날 딸은 두 번째 생리를 경험한다. 강은 모든 것을 흠뻑 삼키고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는다. 이를 되돌려주기 위해 대기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이윽고 대지를 흠뻑 적신다. 흠뻑 젖은 생명은 피어나고 성장한다. 인생의 다른 국면을 맞은 딸처럼, 더 이상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라는 아들의 너스레처럼, 전쟁과 그 이후의 강, 그리고 여성은 그렇게 생명을 틔워내고 길러낸다.      


죽음은 그것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생명으로 순환해야 한다. 정치는 그저 죽음을 죽음으로 머물게 하며 주검을 찾는데 태만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위한다. 하지만 강은 절망스럽고 슬픈 죽음이라도 그 위에서 다시금 무언가를 탄생시키며 그렇게 순환을 이룬다. 강은 분열을 얼싸안고 메운다. 딸과 어머니의 불화, 시아버지와 딸들의 심화된 갈등은 강이 차갑게 식힌다. 시아버지는 손녀에게 운전하라 종용하며, 그렇게 남성과 여성은 화해한다. 그리고 강은 머물지 않고, 앞으로 향한다. 한때 마을의 다른 여성들은 파흐리의 사업에 미적지근했다. 남성들이 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외면하던 여성들도 이젠 참여하며, 역경을 함께 이겨낸다. 남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인 대형매장에 여성들의 생산품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남과 여의 우열이 없는 평등한 노동은 곧 공산권에 놓였던 코소보의 역사를 반성하는 것이랴. 평등한 삶과 노동을 강조하던 이념은 인간의 극복하지 못한 탐욕과 이기심에 의해 변질되었고, 누군가를 착취하는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평등한 이념을 복권하고, 아들과 딸, 할아버지 모두 함께 전 세대가 아울러 창조력을 꽃피우며 가정과 마을을 재건한다. 그렇게 복원된 마을과 일상은 특별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이를 내색할 수 있는 여건, 즉 전쟁이 앗아가 버린 표정을 되찾을 뿐이다. 비로소 무표정의 그녀들은 활짝 표정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삶, 육체의 표현을 숨기지 않고 그저 서로의 손을 다잡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간다. 물론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는 발굴이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담대하게, 벌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파흐리가 되었으니, 그렇게 여성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지다. 이렇게 본 작품은 코소보 전쟁 이후의 삶을 비춘다. 야스밀라 즈바니치의 <그르바비차>, <쿠오바디스, 아이다>처럼 유고 전쟁 이후의 여성의 삶을 비추는 영화이자, 슬로단 고르보비치의 <써클즈>처럼 유고 전쟁 이후 아버지들, 즉 부모들의 책임과 생명력을 예찬하는 계보의 영화다. 영화의 중심은 여성으로, 종전 이후에도 그녀들이 처한 두 갈래의 전쟁을, 실화에 걸맞은 리얼리즘으로 세밀히 스크린에 옮겨온다. 전쟁의 잔상은 여전한 삶의 방해요소, 하지만 강과 같은 생존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흘러간다. 그저 묵묵히 현재를 밟아나가는 발걸음, 그저 담대히 앞으로 흐르는 물결, 이에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새로운 삶과 생명을 피우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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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07 부산국제영화제 프레스 스크리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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