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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8. 2021

기욤 브락, <다함께 여름!>

모험의 맛

기욤 브락(Guillaume Brac), <다함께 여름!>(All Hands on Deck) 

- 모험의 맛     

“나는 삶의 게임을 위한 수십만 개에 달하는 모든 체스 말이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충격을 받고 어렴풋이나마 게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다시 한 번 게임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고통을 다시 한 번 맛보고, 그 무의미함에 다시 한 번 전율하며, 내면의 지옥을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고 자주 통과하는 여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헤르만 헤세-

싱그러운 에메랄드빛이 도처에 만연한 계절 여름, 그날의 뜨거운 뙤약볕과 열기를 만끽하고자 사람들은 야외로 향한다. 사람들은 다들 실내에 놓였었고, 타인에 의해 몸은 갇혔었다. 갑갑한 실내에서 누군가가 내 몸을 심사하며, 이에 나의 몸은 스스로 반짝이지 못했다. 하지만 여름의 사람들은 이러한 구속에서 벗어난다. 여름의 화사한 황금빛은 바깥으로 자신을 분출, 뻗어 나가는 법이니, 이러한 계절에 맞춰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역’으로 향한다. 기존의 약속, 계획, 관계를 파기하고 즉흥적인 여정, 새로운 만남을 향해 모험을 떠난다. 평소에 먹던 음식이 아닌 친구가 만들어온 색다른 음식을 공유하고, 지상에서 강으로 향하며 다른 감촉과 온도를 느끼며, 수상스키에 도전하며 기존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와 마주한다. 그간의 나는 스스로의 육체임에도 권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내 육체를 보고 자위하거나, 내 육체를 이성적인 판단에 들어맞지 않는다며 부정하였다. 하지만 한여름의 열기에 뜨거워진 나의 몸을 느끼며 주체성을 회복한다. 한편 그렇게 뜨거워진 육체는 애욕에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달아오른 육체에 의해, 이지적이고 냉정하던 이성이 마비되고, 오직 이기적인 욕망과 감성이 내 몸을 뜨겁게 달굼에, 여름은 대소동이 펼쳐진 광장이다. 이기적인 서로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피, 폭력, 다툼이 만연하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저 멀리서 신비로이 포착되는 모호한 대상에 맹목적으로 이끌린다. 하지만 여름은 필연적으로 가을로 향한다. 또 신비로운 대상은 필연적으로 신비롭기 때문에 나에게서 떠나간다. 더욱이 한여름이라 한들 온도가 내려가는 밤은 거부할 수 없이 도래하고, 서서히 이성이 회복되어가며 뜨거운 나의 육체만을 바라보던 시선이 서서히 타인에게 확장되어가니, 이렇게 나의 여름은 모두의 여름이 되어가며 그렇게 휴가는 막을 내린다. 이는 기욤 브락이 두 개의 옴니버스를 이어낸 <7월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이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본 글에서 다룰 <다함께, 여름!>도 이와 같은 여름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 파리 태생의 기욤 브락은 현재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프랑스의 청년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흡사 에릭 로메르를 연상케 하는 구석도 있어, 마찬가지로 로메르가 연상된다는 평을 듣는 청년 감독 다미앙 매니블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감독이다. 그가 로메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일상을 담담히 포착하는 건조한 카메라, 대화 중심의 구성, 기교가 강조되지 않는 무심한 디렉팅에서 찾을 수 있다. 더불어 로메르가 휴가철에 발생하는 새로운 만남과 욕망에 초점을 둔 것처럼, 브락의 작품 세계도 여행 및 휴가가 관통하고 있다. 그의 중편 <어 월드 위드아웃 우먼>은 바다로 휴가를 떠난 여성들이 등장하였고, 굳게 잠긴 문을 열어젖히며 여행을 시작하는 도입부는 로메르의 직접적인 오마주다. <토네르>는 직접적인 휴가나 여행은 아니지만, 자신의 공간이 아닌 아버지가 거주하는 지역 토네르에서 발생하는, 즉 비보편적인 공간에서 생겨나는 관계와 사건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여행의 속성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보물섬>은 일상을 뛰어넘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위반하는, 용감하게 낯선 감각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휴가철의 여러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포착한 다큐멘터리다. 또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탐구, 특히 여성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남성성을 폭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홍상수의 작품 경향과도 닮아있다. <어 월드 위드아웃 우먼>에서 남성은 여성에 의해 옷차림이 좌우되고, 그녀들의 시선에서 육체를 평가 및 인정받고자 한다. 또 그녀들 주위를 서성이는 다른 남성들이 불안하고, 이에 질투를 느끼는 남성의 시선을 탐구했다. <토네르>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역이 아닌 토네르에서 주인공의 존재의의는 첫눈에 홀딱 빠진 여인에게서 발생한다. <보물섬>에서도 여성 매표소 직원을 있는 그대로 대하지 않고, 추파나 던지는 남성성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어 월드 위드아웃 우먼>에서처럼 여성도 남성이 필요하다거나 <토네르>에서 주인공의 집착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등, 마냥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입장에서 낭만화하고 옹호하는 태도가 썩 달갑게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대체로 로메르와 닮아있긴 하지만, 마냥 로메르의 탐구나 연출을 답습하는 감독은 아니다. <토네르>에서는 공간은 분절되어 있지만, 인물의 행위로 이질적인 두 공간을 이어내는, 절묘한 매치컷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어떤 공간에 가더라도, 서로 다른 공간의 특유성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에만 집중하는 인물의 태도가 편집으로 가시화됐다. 또 <보물섬>에서는 흡사 로코코 시대 화가인 와토의 <키테라섬으로의 순례>를 연상케 하는 태도로, 아무리 휴가를 떠나고 도전하고 위반해도, 결국 다시 붙잡히고 끝나는 순간으로서 휴가, 그렇기 때문에 찬란한 순간을 회고하고, 지나가 버릴 순간과 오늘을 각별하게 여기게 되는 '보물' 같은 유한한 시간을 탐구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경험을 가능케 하는 구조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비추며, 과연 우리는 이들로부터 자유로운 경험을 쌓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계측한 경험을 따르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도 내던진다. 이후 공개된 본 작품은 흡사 <보물섬>과 초기작들이 겹쳐지는 듯하다. 그 이유는 영어를 사용하는 관광객들의 솔직한 반응이나, 펠릭스와 알마가 함께 놓인 카페에서 행인들이 카메라를 의식하는 듯한 시선, 그리고 배우와 배역의 이름이 서로 일치하는 데서, 흡사 다큐멘터리와 같은 환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로메르와 닮았다고 평가받는 기욤 브락이지만, 로메르의 시기별 작품 중에서도 현실의 다큐멘터리 푸티지를 인서트하고, 행인이나 관광객의 즉흥적인 반응,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카메라에 눈을 마주치는 것을 통제하지 않던 초기 로메르의 리얼리즘이 본 작품에선 연상된다. 감독이 통제하지 않은 우연한 개입에 의해, 그의 각본과 촬영은 불확정성, 우연성을 띤다. 영화의 우연성은 이 같은 현실의 즉흥, 불확정의 상태에 놓인 타인의 개입으로 발생하며, 이에 영화의 서사는 예측하지 못한 소동의 연속이다. 흡사 로메르의 스타일에, 타인과 현실의 예기치 않은 개입으로 발생하는 소동, 부조리를 포착한 코엔 형제의 색채를 뒤섞은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러한 영화 속 즉흥적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에두아르는 두 여성에게 카풀을 신청 받았다며 기대했지만, 그들이 여성이라는 것은 이름으로 추측한바, 결코 확정된 요소가 아니었다. 흑인 남성인 펠릭스와 셰리프가 아이디를 속여서 결제했기 때문이요, 이 같은 타자의 우연성은 에두아르가 예측한 것이 아니었다. 에두아르가 흡사 감독이라면, 그의 통제에서 벗어난 현실 속 타인인 펠릭스와 셰리프의 개입에 의해 기대가 빗겨간 소동이 시작된다. 이후 에두아르는 그냥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하길 바란다. 하지만 펠릭스는 줄곧 다른 마을로, 다른 길로 일탈을 요구하니, 그의 개입에 따라 에두아르의 계획에서 벗어난 현실이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차가 파손되고, 정비소에서는 약 일주일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계측은 결코 완결되지 않았고, 우연히 펼쳐진 불확실한 현실에 일주일간 발이 묶인다. 그리고 알마에게 펠릭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녀에게 갑작스레 깜짝 방문했다. 이에 계획한 삶을 추구하는 그녀의 일상이 흐트러지고 불쾌감을 표명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마땅히 제 기대에 따라와 주리라 예측한 펠릭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이 곧 현실이다. 내 생각, 판단과 다른 현실, 타인의 개입에 의해 줄곧 흐트러지고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이에 예측 불허한 반응을 내비치는 것이 현실 그 자체이다. 브락의 리얼리즘은 이렇게 즉흥적인 외지인이 카메라의 렌즈에 반응하는 것을, ‘각본’에도 인위적으로 적용하며 구현한다. 이렇게 배역과 배우명의 일치, 수영장에서 아이들의 생경한 반응이나, 즉흥적인 휴양객들의 캐스팅을 통해 리얼리즘을 구현하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픽션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도 꾸며낸 이야기, 거짓말로서 ‘픽션’이 주인공들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셰리프는 직장에서 휴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이야기를 꾸며 휴가를 겨우 얻어낸다. 그리고 에두아르의 카풀 서비스를 구매한 것도 남성들이 여성인 척 자신들의 신분을 꾸며낸 이야기요, 에두아르도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기에 진실을 왜곡한다.      


하지만 거짓은 언제나 현실에서 멀어진다. 이야기를 꾸며냄에 카풀 서비스는 불발될 수도 있었고, 의심하는 사장이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면 휴가는 취소될 수 있었다. 오히려 현실을 모면하고자 꾸며낸 이야기가, 현실에의 참여를 방해한다. 거짓말을 눈치 챈 사장은 이후 진짜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기회가 없을 거라며 경고한다. 거짓으로 얻은 기회는 향후의 진실을 담보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진실을 은닉하여 거짓을 꾸며내서는 안 되리라. 그런 점에서 본 작품은 굳이 현실의 여러 요소를 숨기지 않는다. 브락은 일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프랑스 내의 정치적 요소들을 굳이 숨기지 않고, 추하다면 추할 그 사실들을 자연스레 녹여내고 보여준다. 몽텔리마르로 향한 3인방, 그렇게 휴양지에 도착하고 보니 구성원은 모두 백인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미권 백인, 그리고 라틴계 프랑스인들이 절대다수를 이룬다. 흑인은 오직 셰리프와 펠릭스뿐이다. 셰리프는 일터에서 휴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흑인과 백인의 근무환경과 경제적 차이가 휴가지의 백색 풍경을 이루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백색 풍경에서 펠릭스가 강으로 향하자, 백인 관광객들은 그를 이질적으로 바라보고, 스멀스멀 그에게서 멀어진다. 알마와 펠릭스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는 바는 몽텔리마르가 유색인종에게 배타적인, 백인 중심적인 마을이라는 것이다. 이후에도 에두아르와 두 친구의 갈등은 피부색으로 발생한다. 펠릭스가 '백인 셔츠'를 입으려 하자 셰리프는 ‘흑인이 백인의 행동 양식을 모방함’을 의미하는 용어인 '오레오'를 운운한다. 또 백인 부르주아지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펠릭스는 에두아르를 야옹이라며 애송이 취급한다. 특히 셰리프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었는데 장학금을 받더라도, 흑인들의 열악한 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랑제콜에 진학을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후 엘리트가 된 백인 부르주아들은 경제적 취약계층을 착취하는 경제정책을 만들었을 것이라며 씁쓸해한다. 하지만 에두아르도 펠릭스의 무례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펠릭스의 경박함에 '못 배워먹었다'며 흑인에 대한 편견어린 모욕을 내뱉는다. 이외에도 흑인에게 당연하게 마약을 요구하는 마르탱과 니콜라스, 네덜란드인이 불결하고 난잡하다는 편견 등, 프랑스 내에 자리한 불편한 정치성이 영화에서 모조리 드러난다.      


이에 영화는 프랑스라는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진실에 충실한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인종, 계층 간의 갈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에, 영화의 연출은 이를 가시화하는 장치가 주를 이룬다. 이는 특별한 장치가 아니라 매우 기본적인, 숏의 분절을 통해 보여준다. 초반부, 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모두 불편하다. 그들은 각각의 숏에 단절되어 제시된다. 속았다는 것과 펠릭스의 무례함이 불쾌한 에두아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펠릭스의 무례하고도 솔직한 태도, 둘 사이에 끼여 눈치 보는 셰리프, 셋은 모두 각각의 숏에 놓인다. 이윽고 강어귀에 도착하여 차에서 하차한다. 이후 셰리프와 펠릭스는 하나의 숏에 놓이고, 에두아르는 따로 놓인다.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었다. 서로는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마냥 불쾌할 따름이다. 에두아르의 숏에는 휴가지에 가득한 다른 백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에두아르와 셰리프가 친해지지만, 펠릭스는 휴가의 목적이 좌초되어 침울하다. 이에 즐겁게 대화하고 새롭게 친구가 된 에두아르와 셰리프는 하나의 숏에 놓이지만, 여기에 관심이 없는 펠릭스는 오직 혼자 놓인 숏에 단절, 고립된다. 펠릭스가 그토록 바라던 알마는 자신의 숏으로부터 줄곧 멀어진다. 그와 함께 놓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숏에 놓여 마르탱과 함께 머무르려 한다. 이는 숏뿐만 아니라 길, 걸음이라는 상징으로도 나타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도 주목할 것이 길이었다. 저녁 무렵 거리를 혼자 걷는 펠릭스, 이윽고 광장의 무수한 인파 중 오직 알마와 시선을 교환하여 둘이 걷게 된 펠릭스, 휴가는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함께 걷는 펠릭스 등 각자는 자신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걷는다. 이에 따라 발걸음을 구현한 연출도 차이가 있다. 청춘들은 재빠른 핸드헬드, 할머니는 스테디캠을 방불케 하는 안정적이고도 느린 움직임으로 말이다. 마음이 맞는 서로는 각자의 발걸음에 자신을 맞춰준다.      


하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의 초반부에 3인방은 모두 제 갈 길을 가려고 했고, 알마가 펠릭스를 냉대하는 것이 불쾌한 뤼시는, 함께 향하던 자매의 길로부터 멀어지려 하였다. 그리고 자매라 할지라도 영화의 후반부에 알마는 펠릭스에게 향하고, 뤼시는 마르탱의 차에 타는 등 각자의 마음이 다르기에 길은 엇갈린다. 하지만 마음이 맞는다면 하나의 길에 동행할 수 있다. 세 친구는 서서히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펠릭스와 에두아르는 서로 엎치락뒤치락 선두가 바뀌며 함께 도로를 주행한다. 셰리프는 여행지에서 만난 헬레나와 그녀의 딸 니나와 마음이 맞아 그들과 걷는다. 한때 불화로 다투었지만, 이윽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 에두아르는 자신이 폐를 끼친 니콜라스의 길을 대신 걸어가 준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길을 걷는 이들의 숏은 서로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숏, 테이크에 포착된다. 이는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딴 데 정신이 팔려있고 텐트를 홀로 사용하는 펠릭스와 달리, 셰리프와 에두아르는 하나의 텐트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물론 둘 사이에는 천을 지탱하는 얇은 버팀목이 놓여있어, 서로는 소외된 것처럼 보인다. 불쾌한 첫 만남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지만, 이들은 코골이나 바깥에서 나는 냄새 등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자신을 수그린다. 셰리프는 자신의 코골이에 신경을 쓰려 하고, 그가 말을 건넴에 에두아르는 계속 교정기를 빼 대화에 참여한다. 그렇게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에 놓인다. 나를 일부 양보하고, 타인을 그 품에 보듬어서, 그렇게 우리는 ‘함께’가 된다. 하나의 테이크에 놓이게 된 니나와 셰리프, 니나는 자신과 마음이 맞고 잘 돌봐주는 셰리프가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지는 게 두렵다. 엄마 헬레나가 멀어지는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말 못하는 아이지만 셰리프도 니나와 있는 것이 편하다. 외이염에 걸려 물에 들어갈 수 없는 셰리프, 아기라서 물에서 놀 수 없는 니나는 지루했을 서로의 시간에 활력소가 된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나'로 여겨지는 대상들과 함께 있음에 우리는 각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개개의 숏으로부터, 하나의 동일한 숏으로서 공동세계를 이룩한다. 거기선 상대방의 당혹스러운 처지가 곧 자신으로 여겨져 에두아르는 펠릭스를 위해 대신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상대방을 여실히 이해하면서 개입해야지, 나의 주관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며 침투해선 안 된다. 펠릭스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었다. 휴가의 시작과 끝도, 그리고 알마가 놀라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로, 제 멋대로 계획을 짠다. 셰리프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여, 헬레나와 불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이는 셰리프의 뜻이 아니었지만, 잘 구분되지 않는 두 친구의 마음이 자기 뜻에 오해를 불러 헬레나와 불화가 발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여실히 이해하며 하나의 숏에 놓여야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순간은 찰나요, 개개인은 근본적으로 각자의 숏에 놓인다. 영화의 결말에서 모두 각자의 주체성을 향해 흩어진 3인방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면서, 함께 놓여 있을 때는 이해하며 하나로 모여야 하리라. 이러한 세 친구가 여행에서 바라는 것은 모두 욕망으로 공통되었다. 다만 셰리프와 에두아르에겐 추상적이었고, 펠릭스에게는 구체적이었다. 펠릭스는 시간에서부터 공간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결정해놓았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던 셰리프와 에두아르는 더더욱 묶일 수 있었다. 펠릭스는 도입부의 황홀한 추억을 되풀이하고 싶었다. 어느 한 여름날의 밤, 도심의 열기는 식어 차가운 그늘이 건물과 도로 위에 살포시 덮인다. 하지만 여름은 여름이다. 이윽고 작은 광장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어두운 밤길을 뜨겁고도 정열적인 불빛이 밝힌다. 펠릭스는 그곳에서 알마를 만났고, 함께 춤을 춘다. 춤은 내 몸의 진솔하고도 솔직한 언어이자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알마와 펠릭스는 춤으로 몸과 마음이 이끌리는 순수한 사랑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도 짧다. 영화의 편집으로 너무나도 거칠게, 그리고 빠르게 잘려 나간다. 사랑은 완결되지도 않은 채, 그렇게 아침이 되어 황홀경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알마를 위해 그들은 카메라에서 서서히 멀어진다. 이후 일상으로 되돌아왔고 알마는 없다. 이제 휴가에서 알마와 재회하고자 한다. 펠릭스가 알마에게 '깜짝 방문'하려는 이유도, 이들의 만남이 대단히 우연적이고 즉흥적이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되살리고 싶은 것이랴.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결코 같지 않다. 당시에는 서로가 사랑할 수 있을까 망설이던 사이, 가능에 확신이 없었던 사이였다면,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서로에게 이미 가능한 존재다. 아무리 깜짝 방문하더라도, 과거에 가졌던 신비는 이미 밝혀져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펠릭스의 기대와 달리 알마는 그가 달갑지 않고, 이에 서로가 통화하는 동안 작열하던 뙤약볕은 차갑게 식어만 간다. 첫 만남과 반대로 말이다. 그래서 알마는 마르탱에게 이끌리는 것이리라. 이미 맛본 감각, 가능해져 버려서 불가능을 실현하고, 금기를 위반한다는 짜릿한 감각이 없는 펠릭스보다는, 관계를 예측할 수 없고 실현도 장담할 수 없는 베일에 싸인 마르탱이 더욱 흥미롭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내게서 멀어지는 대상에게 이끌린다. 알마가 자신으로부터 줄곧 달아나기에 펠릭스는 그녀에게 이끌리지만, 알마는 이제 자신을 따라오는, 이에 충분히 가능한 펠릭스에겐 관심이 없고, 멀리 놓인 마르탱을 사랑한다. 사랑은 에두아르와 셰리프가 철조망 너머에 놓인 펠릭스와 알마를 바라보는 것처럼, 넘어설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순식간에 끝나버려 달아나는 연인을 애염하는 것이다. 여행의 감각도 이와 유사하다. 여행을 더 잘 즐기는 쪽은, 욕망이나 일정이 훨씬 느슨하고 추상적이었던 에두아르와 셰리프다. 셰리프는 예기치 않게 니나를 통해 헬레나와 이어진다. 이에 육체적인 접촉이 없더라도, 또 불가사의하지만 타인의 아이를 돌보며 사심 없는 관계를 피워나가는, 난생처음 맛본 관계를 경험한다. 헬레나 또한 마찬가지로 휴가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의 우정을 거부하지 않음에, 니나를 홀로 돌보고 있는 그녀 자신이 감히 바라지도 못했을 휴가를 어느 정도 만끽한다. 휴가는 이처럼 나의 상상을 줄곧 깨뜨린다. 알마는 다이빙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니콜라스는 디스토피아가 될지도 모르는 미래에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는 그들이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가지의 짧은 절벽에서 다이빙해보고, 즉흥적으로 니나의 보모가 되어보며, 망설이던 자신을 성장시킨다.      


여행의 낯섦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마찬가지로 낯선 나,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나를 깨우쳐주는 경험이다. 우리는 충분히 그것이 가능했음에도, 해보지도 않은 우리의 상상으로 인해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으니, 생경한 휴양지는 그 상상을 넘어선 실제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것이 바로 도입부에서 할머니가 펠릭스에게 후회하지 말고 ‘도전’하라던 이유인 여행의 맛이다. 여행의 맛을 감히 생각지도 못한 우리의 우발적인 반응과 우연한 시선, 타인과 상상하지 못한 현실의 개입을 통해 연출하는 본 작품은 바로 그 낯섦을 긍정한다. 기대와 계획에 지나치게 의존한 휴가는 우리에게 되레 실망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우연과 즉흥성에 몸을 맡긴다면, 여행은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기쁨과 즐거움, 감각을 선물하리니, 그것이 바로 여행의 미덕이다. 그 생경한 여행과 유사한 것이 바로 욕망, 특히 한 여름날에 들끓는 뜨거운 정열이다. 모두가 정욕에 미쳐있으니, 브락의 여름 이야기는 역시나 이번에도 거대한 소동극이다. 이러한 소동을 이끄는 욕망, 한때 신비로웠던 대상의 과거는 결코 현재와 같지 않으니, 추억은 다만 추억으로 아름답고, 재현되면 추하여 실망을 우리에게 안긴다. 그래서 처음이기에 황홀한 다른 만남을 긍정하고, 마찬가지로 타인을 향한 미지의 만남을 우리는 긍정해야 하리라. 시내에선 광대였던 한 여인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만나며,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긍정하는 영화의 결말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은 쨍하도록 빨간 크레딧이고, 결말은 어두운 파랑 크레딧이다. 사랑과 여행의 정열이 들끓었고, 이제 그 경험은 식어버렸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식어야지만 다른 것을 왕성하게 욕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낭만적인 프랑스가 아니라, 불쾌나 추가 드러난 살짝 낯선 실제 프랑스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감상자들도 브락이 선사하는 스크린으로의 캐니어링에 승차하여 충분한 즐거움과 생경함을 누리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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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08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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