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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9. 2021

합시아 헤지, <세상의 어머니는 행복해야 마땅하다>

자식의 빚, 서로의 빛

합시아 헤지(Hafsia Herzi), 

<세상의 어머니는 행복해야 마땅하다>(Good Mother- 자식의 빚, 서로의 빛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우리의 삶에서 나 자신이 모든 책임을 수행하리란, 또한 모든 영역에 걸쳐서 균형을 이루고 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어떤 측면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영역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그간의 역사에서 개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감히 선택할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타고난 채로 태어난다. 바로 성별에 의해서다. 남자로 태어난 아들들은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이성과 지배력을 갈고닦는 궤도에 자연스레 올라탄다. 반면 여성으로 태어난 딸들은 언제나 사적 영역으로 향할 것이 강제되어 있었다.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교육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들은 단지 남성들이 맡을 필요가 없는 일들을 도맡았고, 남성의 그늘서 언제나 인내하는 존재였다. 이렇게 어떤 성별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안과 밖이 뒤바뀌었다. 누군가는 바깥을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지만, 누군가는 안에서 아이들을 길러내고 기다리는 역할이었다. 공적 영역을 누비는 아버지에게 부성이란 차가운 지배력이었다면, 사적 영역에서 보살피는 어머니에게 모성이란 따스한 인내였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뒤바뀌었다. 부성은 따뜻해야만하고, 여성은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여성들도 야외로 향한다. 그러나 왜 아직까지도 아이들은 어머니의 곁에만 놓여 있을까. 아이들을 직접적으로 낳는 존재 어머니, 행위의 책임이 직접적으로 새겨지는 존재 어머니, 그렇게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존재를 외면할 수 없는 존재 어머니. 어쩌면 이는 보다 다양한 젠더로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더라도, 포기해선 안 될 책임의 무게요, 숭고한 가치다. 이러한 경이로운 어머니의 초상을 프랑스의 배우이자 감독인 합시아 헤지가 <세상의 어머니는 행복해야 마땅하다>라는 신작에서 그려낸다.     


1987년 마노스끄 태생의 합시아 헤지는 튀니지, 알제리계 프랑스인 배우이자 감독이다. 그녀는 압델라티프 케시시, 베르트랑 보넬로 등 프랑스의 걸출한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아 세자르와 베니스에서 수상하는 등 프랑스에서 유망 받는 배우로 우뚝 자리매김하였으나, 배우 활동에만 만족하지 않고 2019년 <유 디저브 어 러버>로 감독 데뷔한다. 본 작품은 프랑스 청년 감독들이 여전히 계승하고 있는, 누벨바그 로맨티즘의 명맥을 잇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계보의 작품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청년 감독들이 누비고 다니는 파리라는 배경도 상투적이고, 사랑의 절정을 맛본 이들이 다른 사랑으로 눈 돌리게 되는 위기와 갈등 또한 예측 가능한, 통속의 경계로 포섭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 디저브 어 러버>는 신선한 구석이 있었다. 일단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보통 누벨바그 로맨티즘을 계승하는 감독들은 남성이다. 엠마누엘 무레, 루이 가렐, 기욤 브락 등으로 말이다. 특히나 기욤 브락이 여성을 꿈과 환상의 대상, 남성을 마냥 품어주는 존재로 그리는 등,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여성은 언제나 그들 욕망의 대상이었지, 욕망의 주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합시아 헤지는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세우고, 이에 남성 감독들이 묘사하지 못한 여성의 욕망을 탐구한다. 더욱이 합시아 헤지가 중동계라는 점에서, 백인의 연애를 넘어선 시선의 확장이 가능한 점도 흥미롭다. 일단 본 작품 속 여성의 눈으로 남성은 찾을 수 없다. 남성은 그녀들의 눈에 비치지 않고, 언제나 제 마음대로 나타나는 존재다. 그리고 연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주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뒤로 빠져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의 발걸음은 자아가 규정하지, 결코 타인을 헤아리며 결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욕망은 때로 자기 파괴적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내 안에 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에 따르는 페널티를 그리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편 여성은 다르다. 감독이 연기하는 릴리는 언제나 남성에게서 떠나간다. 정사 이후 나타나지 않는 남성 세르지오와는 다르다. 남자가 욕망을 성취하고 금세 싫증이 나서 떠난 것이라면, 욕망의 결과가 몸에 새겨지는 여성은 깊은 관계가 두렵다. 그래서 깊은 국면으로 파고들기 이전 남성들의 시선, 곁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더욱이 그녀들은 바라볼 수 없고, 언제나 시선을 받는 존재다. 남성 감독들의 작품에서도 남성들이 직접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두되었다면, 헤지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시선에 주목한다. 릴리의 사랑은 언제나 시선을 받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욕망의 투쟁도 매우 수동적이다. 나를 바라보지 않은 남성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시선을 준 다른 여성을 ‘연적’으로 여기고 질투하며 다툰다. 이러한 그녀들은 대체로 이타적이다. 영화에선 남성이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여성들은 사랑하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연적과 다툰다. 하지만 여성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사랑을 주고만 있다. 그래서 릴리는 영화의 중반부부터는 시선을 받은 것인지, 그녀가 직접 바라본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 남자친구임을 본인의 입으로 선언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 끌려다니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본 작품은 백인이 주류인 프랑스에서 아랍계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가 포착된다. 그리고 박해와 놀림을 받아 이타적일 수 있는 유색인종과의 사랑이, 모든 특권과 누림이 너무나도 당연한 백인과의 사랑과 다르게 표현된다. 또 연출 자체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나, 인물의 머리 위에서 온유하고도 쨍하게 내리쬐는 자연광이 인상적이었는데, 과연 본 작품에서는 어떤 요소들이 이어지고 있을까. 본 작품의 연출은 전작과 매우 흡사하다. <유 디저브 어 러버>에서 주로 활용되던 클로즈업은 본 작품에 이르러 노라의 얼굴을 포착하며 이어진다. 영화는 2.35:1의 널따란 화면비의 중앙에 노라의 얼굴을 놓고 이를 포착한다. 또 우연적이고도 격정적으로 욕망을 좇던 릴리의 ‘핸드헬드’ 일대기도, 이타적이고도 헌신적인 삶을 위해 자신을 혹사하는 노라의 거룩한 희생, 그 척박함을 가시화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이러한 삶을 위해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줄곧 걷고 이동해야 한다. 이러한 걸음, 그 험준함에 의해 흔들리는 시선이 핸드헬드로 반영된다.     


그래도 이전 작품과 차별화되는 본 작품의 다른 형식들을 꼽자면 얼굴 중에서도, 넘어서지 못할 창문이나 닿지 못할 바다 등을 쳐다보는 '측면'을 주로 포착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체에 거쳐 노라의 얼굴이 측면으로 포착되고, 영화의 후반부에는 면회를 다녀온 며느리와 손자의 얼굴이 측면으로 포착된다. 이들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저 혼자 그럴 순 없다. 서로에 대한 책임에 발이 묶여 있다. 그저 아스라하게, 또 허망하게 쳐다만 볼뿐. 그래서 카메라도 묶여 있는 느낌이다. 영화는 능동적으로 인물들을 따라가기보단,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수동적 숏들이 편집으로 이어지며, 그들의 행선지를 추적한다. 이에 트래킹보다는 제한적인 패닝이나 틸트가 도드라지는데, 이는 자식이라는 책임, 그리고 주체적인 노동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노동에 의해 발이 묶인 상황을 가시화하는 연출이랴. 이러한 본 작품은 문을 넘는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 노라는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그녀의 삶이 너무도 답답하기 때문이랴. 새벽에 출근하기 직전 창문을 바라보고 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다. 추상적인 풍경, 하지만 역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왜냐면 그녀가 넘어서야 하는 문은 창문이 아니라, 목적지와 해야 할 일이 명확하고 빼곡하게 정해진 반대편의 문이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현관문을 나서고, 이후에도 여러 문턱을 넘어서 그녀가 일하는 공항에 도착한다. 항공기 청소가 끝난 이후에는, 그녀가 돌보는 어느 노파의 '문턱'을 마찬가지로 넘어, 거동이 불편한 그녀를 보필한다. 이후에는 교도소에 수감된 아들을 보러 또 한 번 다른 문턱을 넘어선다. 그를 위해서 마약을 사러, 음지의 문을 몰래 넘기도 한다. 이렇게 문턱을 넘어서서 제시되는 일들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노라가 향하는 장소에는 언제나 타인이 거주하고 있고, 그녀는 타인이 불러서 방문한다. 그곳에서 노라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항공기에 탑승할 다른 고객들을 위해 청소하고, 할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주며, 교도소에 수감된 아들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타인을 위해서 문지방을 수십 번 넘고, 이윽고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오직 그녀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는 찰나는 매우 드물다. 그녀가 홀로 놓여 무언가를 감상하고 관조할 때, 영화는 이를 아주 짧고 거칠게 잘라낸다. 흡사 그녀에겐 이러한 여유도, 오직 그녀만을 위한 방문을 넘어설 시간도 없다는 듯이…     


노라의 현관문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딸과 아들들은 아직 독립하지 않았거나 못했고, 이에 손자 손녀까지 그녀 집에 함께 산다. 자식들은 언제나 현관문을 세차게 열고 들어온다. 가족이 아니라면 침입과도 같으리라.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집임에도, 샤워하고 있는 딸을 위해서 노크해준다. 그리고 집세에 대한 얘기와 손녀를 돌보는 것, 그리고 샤워 시간을 단축하라는 등,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따라야 할 규칙을 훈계하지만, 딸은 어머니의 규칙을 따를 생각 없이 불만만을 토로한다. 이렇게 그녀는 언제나 타인을 위해 문턱을 넘어서지만 다른 타인, 특히 가족은 오직 그들 자신을 위해 타인의 문을 덜컥덜컥 열어젖힌다. 더욱이 영화 내내 노라의 남편은 부재하고 있고, 또 손녀 마리아의 친부는 단 한 번 아파트 입구에서 포착될 뿐이며, 또 다른 아버지인 노라의 장남은 현재 수감되어 있다.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있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존재가 아니다. 마리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건물의 윤곽선을 경계로 서로의 공간이 나뉘어있고, 아버지는 딸의 공간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자식들이 놓여있는 문을 넘어서지 않는 아버지들에 의해 어머니는 더욱 고되다. 하지만 그런데도 노라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물론 맨 처음 그녀가 포착되었을 땐, 매우 노곤해 보이고 우울해 보이는 무표정으로 포착되었다. 입꼬리는 내려가 있었고,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녀 얼굴에 내려앉은 어둠은 곧 노라를 고통의 수렁으로 집어삼킬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러한 무표정 또한 지극히 찰나다. 노라는 무수한 문지방을 넘어서면서 미소를 되찾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즐거움일까. 영화 후반부에 며느리와 손자는 노라와 함께 면회를 하러 갔다. 장남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즐겁게 하하 호호 떠들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각자의 공간에 놓인다. 미소는 단지 생일을 맞은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다. 그들 또한 머나먼 곳을 바라보며 떠나고 싶을지 모르지만, 마냥 나만을 생각할 수 없는 위치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기쁜 척한다.   


노라는 부드럽고도 온화한 미소를 영화 전체에 거쳐 짓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적극 피력하지 않고, 오히려 동료들의 언쟁을 부드럽게 말리는 중재자다. 또 노파와 함께 미소 지으며 춤을 추고, 손자 손녀에겐 자애로운 할머니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기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들의 기분을 위한 이타적인 헌신이다. 마리아의 생일파티에서 그녀는 하나도 기쁘지 않다. 딸은 과시하기에 바쁘고, 모든 요리와 준비는 노라가 다한 모양이다. 노라는 참여할 기운도 없어 보여, 피곤한 표정으로 부엌에서 혼자 케이크를 먹는다. 이후에도 그녀가 우울할 때의 표정은 언제나 커튼 등으로 가려진다. 어머니란 자신의 책임을 위해, 표정조차도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숨기는 존재다. 영화에서 노라가 노파의 집에서 돌봐주는,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노파의 사망으로 인해 집에 데려오는 애완조는 바로 ‘금화조’란 종이다. 금화조는 스스로 알을 품지 않고, 다른 새에게 탁란하는 종이다. 노라는 이러한 탁란을 도맡은 어머니다. 남편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심지어 그 자신을 악마라고 묘사하는 어느 한 늙은 부랑자에게도 물과 빵을 내어준다. 흡사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이러한 노라의 이동은 대체로 결정되어 있다. 그녀는 목적지까지 스스로 걷거나 운전하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이윽고 버스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서, 타인이나 기계가 노라를 어딘가로 데려다준다. 그녀가 너무 피곤하여 쪽잠을 청하더라도, 기사는 그녀를 교도소 앞까지 데려다준다. 즉 그녀는 주체적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항상 데려다준다. 이는 그렇게 이동하여 참여하는 노라의 노동 자체가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노라의 딸도 남성의 수요에 의존적인,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하는 외설적인 일에 참여한다. 그녀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수동적인데, 이윽고 타인의 규칙을 어기게 되자 그룹에서 쫓겨나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즉 언제나 타인에 의해서, 타인을 위한 수동적인 노동은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또 그녀가 걷더라도 목적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노파를 만나고, 이후에는 손자와 함께 귀가하는 등 말이다. 즉 이타적인 그녀의 발걸음 또한 타인에 의해서 좌우된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아파트의 한 주민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며 짜증을 낸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면 이제 스스로 능동적으로 걸어야 한다. 노라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일까. 또 후반부에 노라가 돌보는 노파가 갑작스레 쓰러진 이후, 노파의 가족은 노라에게 택시를 타고 가라며 돈을 쥐여 준다. 노라가 기사에게 목적지를 지시할 수 있기에, 버스 기사의 수동적인 이동 루트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아도 되리. 또 덜 기다려도 되리라. 노라는 과연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헤지가 전작에서는 비교적 중산층에 가까운 아랍계 커뮤니티의 삶을 포착했다면, 본 작품은 올해 초 개봉한 <레 미제라블>처럼 극빈층에 가까운 아랍계의 삶을 다룬 영화다. 그리고 노라 딸의 친구의 래핑 대사처럼, 그들 삶은 끝없이 밤이 이어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지지 않는 형국이다. 노라의 삶도, 그리고 자식들의 삶도 태어났을 당시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랴. 이에 노라는 언제나 자식들에 의해 발이 묶였다. 노라의 둘째 아들은 언제나 TV를 보며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다. 타이슨이랑 대화했다며 헛소리하고, 항상 집에서 조카와 함께 TV보고 게임을 하는 게 생활의 전부다. 취업 교육을 다니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가 일하는 모습은 영화 내내 포착할 수 없다. 노라의 딸은 허영이 많고 과시를 좋아한다. 이를 위한 파티에 어머니가 희생한다. 또 일확천금을 꿈꾼다. 그들은 언제나 쉬운 삶을 살아왔다. 타인을 위해서 일하는 노라는 그렇게 번 돈을 마찬가지로 가족이란 타인을 위해서 쓴다. 그렇게 어머니의 돈을 쉽게 쓰는 가족들은 고통을 모른다. 어머니가 자신의 보석을 몽땅 다 처분하고, 또 15년간 미뤄온 임플란트까지 유예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쉬운 삶을 거부하고 발버둥 치더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없다. 며느리가 일하는 여건도 노라처럼 매우 열악하다. 그리고 불법에 노출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외면하고 가상에 빠져드는 둘째 아들처럼 되거나, 아니면 불법에 가담하여 복역하는 장남처럼 되지 않겠는가. 영화의 피날레에서 포착되는 그들이 사는 동네와 아파트,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악순환이 세계의 실체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어머니인 딸도 일을 시작한다. 물론 그 일 또한 불법적이고, 수동적이기에 불안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제 몸 밖에 모르는 아들들에 비한다면, 자식이 딸린 어머니들은 제 몸을 희생하여 분신을 키워내고자 한다. 그렇게 딸들이 탁란을 거둠에 노라에게도 주체적인 이동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지만, 노라는 마냥 강인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미래와 자신의 선택이 불안하기에, 타로점을 보며 아들의 운명, 미래를 예언 받고자 한다. 헤지의 전작에서도 무당이 주인공의 욕망을 미신으로 대신 결정해주는 장면이 나타났다. 욕망에 흔들리는 젊은 존재도, 그리고 많은 책임이 있는 늙은 어머니도, 여전히 삶은 오리무중이요 혼자 짊어지기 어렵다. 그래서 운명을 묻는다. 강인해 보이지만 연약한 어머니, 그들의 짐을 이제는 덜어야 하리.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노라의 삶이 즐거운 이유는 바로 아이들 때문이다. 그녀는 자식이 보물이라 표현한다. 물론 그녀는 거리의 버스킹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언제나 타율적으로 살아온 그녀의 몸에 직접적으로 귀에 꽂히는 리듬과 이에 흥얼거리게 되는 몸의 전율은 비로소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리. 하지만 그녀는 몸의 감각보다 타인, 특히 분신의 살아있음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모든 것이 어둡고 둔탁하여 밑으로 가라앉는 나락이자 폐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부드러운 살갗의 자손들은 연이어서 피어나고 성장한다. 이러한 과정에 있는 손녀 마리아는 노라의 딸보다 더욱 성숙하다. 엄마와 삼촌의 싸움을 말리기도 하고, 노라와 성숙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손자 또한 커가면서 연애를 하기도 하고, 성적도 매우 훌륭하며, 제 아버지보다 의젓한 태도를 갖고 있다.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와중에 피어나는 분신들은 이전의 자식들보다 더욱 발전하고 변화한 모습을 띠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노라의 즐거움, 희망의 원천이다. 헤지의 전작에서처럼 본 작품도 따스한 태양이 인물들의 얼굴과 배경을 찬란하게 감싼다. 차갑고 어두운 진창이라 할지라도, 노라가 온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희생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분신들의 성장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노라는 언제나 누군가의 빛이었다. 가족, 동료, 그리고 잘 모르는 행인들까지, 하지만 그들 또한 이젠 노라에게 빛이 되어준다. 장남의 석방을 위해 자금을 십시일반 모아주는 등 말이다.      


자식은 어머니에게 희생이란 빚을 진다. 하지만 이에 따른 더 나은 결과가 어머니를 즐겁게 하리. 그리고 누군가의 빛이었던 존재도 결국 인간인지라, 그 빛이 꺼지는 순간이 있다. 영화 속 타인들은 볼 수 없지만, 영화 외부의 우리는 볼 수 있는, 노라의 빛이 꺼져가는 순간들을 감독은 순식간에 포착한다. 어머니 또한 나약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도 다른 빛이 필요하다. 그저 서로의 작고 고귀한 이타심이 바로 그 빛이 될 수 있다.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영화 피날레의 진창과도 같은 공간에 아이가 혼자 놓여있었다면, 이후 포착되는 마리아의 연약하고도 부드러운 살갗에는 상처가 새겨져 거칠고 투박해지리. 하지만 아이가 부드러움과 순수함을 보존하면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 특히 어머니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영화는 그 거룩한 희생을 포착한다. 그리고 마냥 어머니의 희생이 되풀이돼선 안 됨을 역설한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사소하지만 숭고한 이타심을 조명한다. 그렇게 어머니의 책임은 서로의 빛으로 서서히 옮겨가야 할지다. 그리고 부재한 아버지들은 다시금 가족의 문턱을 넘어 돌아와야 하리라. 장남을 석방하려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랴. 그래야만 나락에서도 생명을 피워낼 수 있으니. 이렇게 합시아 헤지는 젊은 여성의 욕망을 다루던 비교적 경쾌한 전작으로부터, 어머니가 되어 책임으로 무거워진 본 작품을 이어오며, 여성의 또 다른 삶을 그린다. 그리고 파리와 백인을 넘어서서, 마찬가지로 그들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 다른 지역의 다른 계층, 인종의 삶을 포착한다. 앞서 언급한 <레 미제라블>과 유사한 배경이며, 또 셀린 시아마의 <걸후드>에서 딸이 아닌 어머니의 삶에 집중하면 본 작품의 모습이 되리. 매우 현실적이고, 또 매우 절망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전작처럼 태양이 곁에 있는 작품, 낙관적이진 않지만 현실적인 희망이 곁에 있는 작품이다. 그간 어머니의 행복함은 생명이 피어나는 성장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문지방으로 넘어서는 행복이 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한 이타심, 딸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책임의 분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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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09 부산국제영화제 프레스 스크리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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