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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10. 2021

셀린 시아마, <쁘띠 마망>

누군가의 딸과 그녀의 딸

셀린 시아마(Celine Sciamma), <쁘띠 마망>(Petite Maman) 

- 누군가의 딸과 그녀의 딸     

"아이들은 어머니의 축소판과 같다. 다만 몸집이 작을 뿐이다." -빅토르 위고- 

한 여인이 아기와 함께 병원에서 퇴원한다. 그 아기는 홀로 세상에 태어나거나, 어머니에 의해서만 탄생하지 않았다. 하나의 생명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기의 곁에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윽고 아버지로 추정되는 한 남성이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사진을 불태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버림당했다. 그의 책임까지 그녀에게 홀로 떠넘겨짐에, 어머니는 아기를 저버리는 비정한 선택을 내린다. 아이를 저버리고 홀로 길을 떠난다. 이윽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이후 그 아기는 한 보잘것없는 남성의 손에 길러진다. 처음에는 그도 아기를 외면하려 했지만, 무수한 눈총이 따가워 아기를 떠안게 된다. 이렇게 아기를 키우게 된 지 5년이 지나고,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결핍을 충족하고,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훌륭한 콤비가 된다. 이는 세대 간 '버려짐'의 대물림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인간성의 회복을 역설한 영화, 바로 찰리 채플린의 명작 <키드>다. 그리고 제목의 ‘키드’는 '버려진 아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키드는 곧 채플린 본인이기도 하다. 성인이지만 아이를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다. 그도 여전히 어린아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인 소년과 많은 것을 상호 보완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마냥 일방적이지 않다. 부성은 없고, 모성은 저버릴 수밖에 없는 시대, 더욱이 가녀린 생명을 외면하는 일말의 인간성도 없던 시대, 이렇게 어려서부터 사랑을 모르고 '버림'을 학습 받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충실한 사랑 교사다. 아들은 곧 아버지를 닮아 가겠지만,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아들인 아버지에게 부여된 무거운 짐을 아들이 함께 공유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누군가의 아들인 존재와 아버지가 될 존재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관계다.     


본 작품을 서두에서 언급한 이유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기점으로 전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셀린 시아마의 새로운 작품, <쁘띠 마망>이 바로 상실이라는 사건을 두고 모녀가 서로를 헤아리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냥 어머니가 딸아이를 이해하는 관계가 아니다. 누군가의 딸이기도 한 어머니의 상실과 불안을, 딸이 이해하는 관계다. 일단 1980년 프랑스 태생의 영화감독, 셀린 시아마의 아이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쭉 이어지고 있었다. <쁘띠 마망>과 유사한 연령대를 다룬 작품으론 <톰보이>와 그녀가 각본을 쓴 <내 이름은 꾸제트>가 있다. 먼저 <톰보이>의 경우 정신분석학과 그녀의 관심을 뒤섞은 작품으로,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름과 성 정체성,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고자 하는 자아와 젠더의 균열을 포착한 작품이다. '로레'라는 이름 대신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찰흙으로 남근을 빚어내는 아이는 스스로 남성이길 선언한다. 하지만 부모님도, 그리고 이를 모방하는 아이들도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그리고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나뉘는 남성과 여성만을 용인하고, 거기에 따르는 역할만을 인정한다.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고자 하는 로레는 사회에서 줄곧 배척된다. 이러한 몰이해에 숲으로 숨어든다. 숲은 시아마의 작품에서 줄곧 반복되는, 이질적인 타자들을 품어주는 자애로운 자연인데, 그곳에서 진실한 자신을 이해해주는 진정한 우정을 이룩한다. 시아마는 이처럼 아이 영화에서 아직 보편에 물들지 않은 타자로서 아이를 이해해가는 과정, 특히나 그들 간에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와 역사를 극복하는 입장을 취하는데, 이는 <내 이름은 꾸제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육원을 배경으로 하는 본 작품은 맡겨진 아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조명하는 따스한 작품이다. 무수한 아이들이 모인 그곳에서 불화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각자가 다른 사정과 아픔으로 보육원에 모여들었음을 이해하고, 서로를 서서히 존중해간다. 그리고 미숙함이라는 이유로 줄곧 침탈되는 아이들의 주체성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 복권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시아마의 작품에서는 줄곧 '어린 존재'들이 도드라진다.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아이와도 같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그렇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도 몰이해와 이해는 이어진다. <톰보이>, <걸후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모두 어머니는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들이 옳았던 삶을 자녀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시아마는 언제나 자녀 세대가 이를 극복하는 서사를 중시한다. 본인들이 원하는 삶, 그리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떠나가고 다른 길로 향하는 상대방을 그저 긍정하는 것처럼, 이해와 성장을 독려한다. 어머니가 딸을 바라보는 시선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나만의 헛것, 곧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본 작품 <쁘띠 마망>에서도 모녀지간의 이해라는 그녀의 탐구는 이어진다. 일단 연출부터 살펴보자. 형식 자체는 리얼리즘을 고수한다. 영화의 도입부, 주인공 넬리가 병원을 누빈다. 영화는 넬리의 뒷모습을 롱테이크와 은은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포착한다. 흡사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조용히 뒤따라간다. 이후 아이의 비교적 낮은 시선에서 로우 앵글에 가까운 아이 레벨 뷰를 구현한다. 영화는 넬리가 바라보는 병실, 할머니 등을 비춘다. 이러한 영화는 거리감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넬리는 바스트숏, 클로즈업 등 매우 친밀한 구도로 포착된다. 하지만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감이 더욱 가까워지는 것은 마리옹을 만나고, 서로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다. 이에 넬리와 마리옹의 얼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프레임에 꽉 차게 된다. 서로를 이해해주는 존재를 만남에 저 자신과 더욱 친밀, 밀접해지는 것이랴. 하지만 마리옹과 있었을 때와 달리, 초반부 넬리의 거리감이 비교적 멀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과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투병을 겪다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타계하심에, 엄마는 넬리에게 집중하지 못한다. 그녀는 넬리로부터 옆모습, 뒷모습을 보이며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서 풀숏, 롱숏으로 포착되는 등 비교적 멀리 있다. 그녀는 외할머니의 주검이 안치된 운구차와 가까이 있고, 넬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넬리 어머니는 딸로서의 도의가 우선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서히 정리되자 어머니는 다시 넬리에게 되돌아온다. 운전하며 그녀에게 간식을 먹으라 하고, 딸은 비로소 어머니에게 이해받는다. 외할머니의 딸로서 엄마, 그리고 그녀의 딸로서 넬리는 변화한 국면에서 서로가 낯설게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다시금 제 자리를 회복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딸로서 어머니를 넬리가 이해해줄 차례다. <쁘띠 마망>의 성장이란 이해받는 나로부터, 이해하는 나로의 나아감이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 상대방이 곧 나와 같아지리. 그래서 시아마의 데뷔작 <워터 릴리스>에서처럼 서로 똑 닮은 배우를 캐스팅한 점도 흥미롭다. 배우가 실제로 쌍둥이인 넬리와 마리옹이 그렇고, 또 어머니와 젊은 날의 외할머니가 풍기는 분위기도 서로 유사하다. 이는 어머니와 딸, 즉 분신과 거울의 관계를 캐스팅으로 반영한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에서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도 흥미롭다. 앞으로 향해도, 또 뒤로 향해도 그 소리는 똑같이 들릴 텐데, 본 작품에서 시계 초침 소리는 마치 반대로 향하는 것만 같다. 이제 막 넬리의 외할머니, 마리옹의 어머니가 세상과 작별했다. 그리고 현재의 마리옹은 넬리가 곁에 있는 엄마다. 하지만 그녀 어머니의 상실이 느껴지자 딸로서 자신이 그리워 애착하며 슬퍼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리옹은 딸이 되어 간다. 차 안에서 넬리에게 간식을 먹으라고 허용한다. 넬리는 이를 맛있게 먹지만, 마리옹은 먹지 못한다. 운전하느라 손을 쓸 수 없는, 그래서 어머니가 간식을 먹여줘야만 하는 딸의 위치에 마리옹이 놓여있다. 그래서 마리옹에게 넬리가 간식을 먹여준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마리옹의 머리맡에 넬리는 물 한잔을 놓아준다. 어머니는 누군가의 딸이고, 그녀의 딸은 어머니를 모방하고 흉내 낼 수 있다. 아빠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제일 무서웠다는 비밀을 들어주고, 그의 면도를 도와준다.      


그들도 누군가의 딸이자 아들이다. 다만 장성해버렸고 그들의 부모님이 부재함에 더 이상 자녀일 수 없다. 하지만 편견 없는 아이, 그리고 충분히 성장한 아이는 딸과 아들로서 부모를 이해해줄 수 있다. 어른들은 잘 들어주지 않는다. 시아마의 전작에서처럼 강요하기 바쁘다. 하지만 아이들은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발생하는 '비밀'을 언제든지 귀기울여줄 청자다. 그런 점에서 아이는 어른이다. 아이인 어른을 위로한다. 병원에서 나온 이후 도착한 외할머니의 집은 오랜 시간 방치된 것처럼 보이고, 또 어둠이 자욱하다. 그곳에서 마리옹은 어머니의 딸이었으리. 그리고 이러한 어둠이 덮고 있는 ‘딸의 방’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딸의 얼굴’에 넬리가 조명을 비춘다. 비애에 잠긴 얼굴, 그것은 딸로서 어머니에게 느끼는 애착이랴. 그렇게 마리옹 자신이 딸이었던 기억과 정체성이 떠오른다. 그 집에서 부모와 딸은, 딸과 아들로서 자신의 기억을 많이 얘기한 모양이다. 어렸을 때 접했던 교과서, 책들을 마주하고, 또 일기, 사진첩 등을 펼쳐보며 어머니의 추억을 공유한다. 무릎 수술 이야기와 숲에서 만들었다는 오두막 이야기 등을 말이다. 처음에 넬리는 숲에서 혼자 놀았다. 엄마 유년기의 모습을 잘 몰랐기에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차 할머니의 딸인 엄마의 기억을 쌓아가자, 이윽고 넬리는 어머니와 동명이인인 소녀 마리옹과 만나게 된다. 이는 아마도 넬리의 꿈이나 상상이리라. 아이들은 환상을 꿈꾼다. 잠자리에서 어머니의 흑표범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자로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흡사 <이웃집 토토로>에서 아이들의 꿈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는 것처럼, 넬리도 외할머니의 집에서 마주한 마리옹의 유년 기억을 풍부하게 접하며,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고 현실처럼 여기는 것이랴. 유년 기억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나눴던, 달빛이 비쳤던 머리맡의 대화와 이야기, 병실에서 등 돌리고 있던 어머니의 초상도 마리옹에게 반복된다. 이제는 넬리가 마리옹을 위로하며 말이다.      


이러한 마리옹이 처음 나타난 장소는 바로 숲이다. 셀린 시아마의 세계에서 숲은 매우 자애로운 공간이다. <톰보이>에서 어른들의 편견과 그것을 모방하는 아이들의 폭력적인 태도에 의해, 자신이 추구하는 육신이 타율적으로 변화할 위기에 놓인 로레, 그 아이가 도망친 곳이 바로 숲이다. 자신이 바라는 관념이든 육체든, 숲은 그것에 타박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그저 얼싸안고 긍정한다. <쁘띠 마망>에서 마리옹의 상상이 실현되는 숲도 이와 마찬가지이랴. 모든 것이 빼곡한 외할머니의 집과 달리, 많은 것이 채워지지 않고 흡사 질료의 상태로 창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숲에서 넬리는 유년 시절의 마리옹을 상상하고 불러낸다. 이후 상상할 수 없을 것만 같이 빼곡히 외할머니의 유품들로 채워져 있던 집도 서서히 비워지며, 숲과 자신의 집에만 놓였던 마리옹은 이제 넬리의 집에도 당도한다. 존재하면 상상할 수 없다. 마리옹과 넬리의 역할극에서 여러 역할을 맡으며 상상력을 무한하게 펼칠 수 있지만, 한 장면에 역할이 겹칠 수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이 규정되지 않은 숲, 비워진 공백의 상태에서 아이들은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력에는 아이들의 육신만으로 충분하다. 마리옹이 어린 시절 자신의 심장소리를 재료로 흑표범 울음소리를 느꼈다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의 육신은 무엇이든 변해갈 준비가 되어있다. 이러한 넬리의 상상은 그녀의 꿈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단초 중 하나는 영화의 편집에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숏의 분절은 적었다. 하지만 외할머니 집에 당도한 이후 컷이 이전보단 잦아지는데, 숏을 나누는 경계선은 바로 침대나 소파다. 그리고 행위는 주로 넬리의 깨어남, 일어남이다. 이를 기준으로 숏의 전과 후가 나뉘고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깨어났다는 것은, 이전 장면에서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에 아빠는 넬리에게 내일을 향해 순간이동을 하자며 불을 끈다. 불을 끈다는 것, 그리고 내일로 향한다는 것은 결국 잠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을 끈 이후에 이어지는 숏이 넬리와 마리옹의 만남이다.      


그래서 숏이 잘린 이후 마리옹과 만나는 넬리는 꿈꾸는 것이 아닐까. 집에서 숲으로, 그리고 숲에서 집으로 향하는 숏들은 잘리지 않은 하나의 테이크로 이어지지 않는다. 잠들었다면 깨어나서 집으로 향한다. 현실이었다면 잠들어서 마리옹과 만난다. 그리고 꿈이나 상상에 놓인 넬리와 현실에 놓인 넬리는 서로 겹쳐진다. 영화의 초반부에 넬리는 마리옹과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녀와 여전히 게임을 하는 듯한 얼굴이 담긴 숏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얼굴은 아버지가 밥을 차려주는, 즉 마리옹의 세계에서 완전히 깨어난 장면이었다. 그리고 앞선 장면에서 마리옹의 수술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이어진다. 넬리에게서 이렇게 상상과 꿈은 현실과 자연스레 겹쳐지고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으로 현실을 엿본다. 마리옹과 허구의 게임을 하며 그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영화의 중반까지는 마리옹의 세계와 넬리의 세계는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집이 서서히 비워져 마리옹이 넬리의 집에 방문하고, 거기에 아버지가 들이닥친다. 그것은 꿈이 아니다. 흡사 아버지가 넬리를 부르는 소리는 그녀의 잠을 깨우는 외침과도 같다. 그렇다면 마리옹과 함께 놓였던 넬리는 깨어난 것이지만, 그런데도 마리옹은 남아있다. 하지만 어린 마리옹이 현실의 마리옹에 투영된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어머니는 슬픔으로 잠시 종적을 감춘 상황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비밀을 파헤치기는 어렵다. <이웃집 토토로>처럼 혼자 놀았든, 어머니와 함께 놀았든, 그 사실보다도 넬리가 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이 아이에겐 진실이다. 이러한 영화에서 중요한 테마는 바로 작별이다. 넬리는 외할머니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다른 병실의 할머니들과는 모두 작별을 나눴다. 작별하면 멀어진다, 단어퀴즈를 끝내야 한다, 병실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포착되지 않는다. 작별한다는 것은 다시 볼 수 없게 떠나보냈다는 것, 나도 대상에게 단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별하지 못한 마리옹은 내심 아쉬운 눈치다. 이에 어머니는 할머니, 즉 자신의 어머니를 맡아 작별을 연기한다. 넬리는 할머니와의 작별을 연기한 것이라면, 마리옹은 넬리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그녀와 포옹하고 사랑을 확인하며 편히 작별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작별하지 않았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어느 순간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집에서 종적을 감추고, 아버지가 남아서 넬리를 보살피고 있지만, 넬리는 마리옹과 작별하지 않았기에 어린 날의 마리옹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인 외할머니도 소환된다. 외할머니는 손녀와 병원에서 함께 단어 퍼즐을 맞췄던 기억을 공유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넬리는 다른 병실의 할머니와 단어 퍼즐을 즐기고 있었는데, 아마 외할머니와도 이를 즐기지 않았을까. 여하간 작별한다는 것은 대상의 기억조차도 떨쳐낸다는 것일까, 하지만 작별하지 않았기에 기억은 되돌아온다. 넬리는 마리옹을 소환할 수 있고, 마리옹은 어머니와 함께했던 수술의 불안과 수프, 파티의 기억을 되새길 수 있다. 그렇게 작별하지 않음에, 여전히 우리는 기억 속에서 상상하며 망자와 산자가 함께 생일을 축하할 수 있다. 그리고 작별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넬리는 딸로서 마리옹의 가장 중추적인 기억인 무릎 수술을 공유한다. 그리고 마리옹이 수술하러 가기 바로 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어 준다. 이윽고 수술을 위해 마리옹은 떠나지만, 넬리와 마리옹은 재회할 거라 약속한다. 이에 마리옹은 되돌아왔다. 어머니이자 딸로서, 그래서 넬리는 그녀를 마리옹이라 부르며 재회한다. 하지만 마리옹의 어머니와 넬리는 비로소 현실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작별을 마친다. 외할머니의 집은 이제 텅 비었고, 그녀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채, 서로가 가야 할 길로 돌아섰다. 이러한 딸과 어머니는 줄곧 겹쳐진다. 영화의 초반에서도 넬리가 어머니가 되어가고, 마리옹이 딸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간식을 통해 드러났다. 이후에도 딸이 누운 침대에 마리옹이 함께 가서 눕기도 하고, 어머니가 누워 있는 소파에 넬리가 동침하기도 한다. 딸과 어머니의 자리는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많은 부분 어머니와 딸은 서로를 닮았다. 마리옹과 외할머니는 지팡이를 짚어야만 하는, 유전적으로 경미한 장애가 있는 서로의 관절이 유사하다. 그래서 넬리도 외할머니의 지팡이를 챙겼을까. 그리고 넬리라는 이름은 마리옹 어머니의 어머니, 즉 넬리 증조할머니의 이름이었다. 증손녀와 증조할머니의 이름은 서로 일치했고, 또 용모와 삶이 닮아있지는 않을까. 어머니와 딸의 닮음은 그렇게 몇 세대를 거쳐서 줄곧 겹쳐진다. 이렇게 모녀는 분신이지만, 이는 언제나 서로를 이해하면서 가능한 것이다. 용모는 닮아있지만 살아온 삶은 마냥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넬리는 마리옹을 더 잘 알고 싶다. 그녀의 수술에 대한 기억과 숲속에 지은 오두막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래서 넬리는 언제나 거리낌 없이 마리옹의 유년 시절에 참여한다. 상상하는 것은 넬리지만, 핫초코를 만들고 게임을 주도하고, 크레이프를 굽자고 제안하는 것은 언제나 마리옹, 즉 어머니의 기억이다. 오두막을 짓는 넬리는 마리옹의 추억을 듣고 이를 재현한 것뿐이다. 그리고 마리옹의 집에 방문한 넬리는 그녀가 주도하는 보드게임이나 경찰 놀이에 참여하지, 넬리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제안하지 않는다. 넬리는 부모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 한다. 넬리는 그들에 대한 호기심을 풀고자 한다, 그 이후 후속되는 것이 바로 이해다. 그리고 이러한 교감에서 많은 것을 깨달아간다. 두려울 것 없는 어머니도 누군가의 어린 딸로서 수술에 대한 불안이 있다. 또 어린 나이에 넬리를 낳았지만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고, 그렇게 태어난 존재에 의한 삶이 전혀 슬프지 않았고, 자신의 삶에 행복을 뿌리내리게 해주었음을 확인한다. 이렇게 알아야지만 분신으로 닮을 수 있다. 아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마리옹의 헌신은 곧 그녀의 수술을 위로하는 넬리의 이타심으로 이어진다. 또 슬프지 않았고 행복했다는 그녀의 기억처럼, 마리옹과 넬리는 함께 뛰놀고 배를 타며 행복한 순간들을 공유한다.      


그렇게 넬리는 주체적으로 마리옹의 ‘옷’을 입어간다. 마리옹은 종종 불안했다. 수술 후 돌아올 수 없을 거란 불안감이 샘솟았다. 그것은 넬리가 상상한 어린 마리옹의 수술에 대한 불안일까, 아니면 딸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어머니 마리옹의 불안일까. 하지만 작별하지 않았으니 전자의 마리옹은 되돌아왔고, 후자의 마리옹도 되돌아올 수 있다. 외할머니 집에서 떠나는 날 아침, 넬리는 어린 마리옹과의 추억 여행이 끝났고, 엄마는 돌아왔다. 넬리와 엄마가 같이 소파에서 자던 날, 그녀들은 할머니의 작별을 위해 연기를 한 것이지, 서로 작별한 것이 아니기에 돌아왔다. 그리고 외할머니와는 비로소 작별을 마쳤기에 더 이상 그 집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딸인 마리옹과는 작별하지 않았기에 '마리옹'도 되돌아온다. 딸로서 자기 존재가 슬펐지만 이해받을 수 없는 어른은 종적을 감췄다. 어머니 없는 마리옹은 더 이상 딸일 수 없다. 하지만 넬리가 누군가의 딸, 마리옹을 이해한다. 외할머니의 딸인 마리옹에게 작별할 날짜를 미리 알려주고 싶었을 정도로, 자신과 똑같은 딸로서 마리옹을 이해했다. 그렇게 이해받은 존재는 '엄마'가 아닌 딸, '마리옹'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서론에서 언급한 <키드>처럼 아이는 이미 어른으로서 성숙함과 이타심을 지닐 수 있고, 모든 것이 단단하고 거대해 보이는 어른은 내면의 어린아이를 품고 있다. 그래서 서로가 '키드'로서 나약함을 매만진다. 이에 서로는 더욱 성숙한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으리. 이렇게 시아마는 전작들에서 도드라진 '아이의 이해'라는 주제를 이어온다. 또 이전 작품에서 아이에게 마냥 어른의 옷을 입히고자 하는 폭력적인 세태를 비판했다면, 본 작품은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 주체적으로 누군가를 이해하여, 그 복식을 입고자 하는 능동적인 아이의 심리와 태도를 존중한다.      


폭력적인 옷 입히기, 그것은 바로 <톰보이>, <걸후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딸에게 마냥 주입되는 어머니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시아마는 이를 거부하고, 양자가 주체적으로 교감하며 실로 이해해가는, 이에 동등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긍정한다. 이를 <이웃집 토토로>를 연상케 하는 꿈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는, 오히려 경계가 흐릿하게 겹쳐져 있는 아이들의 의식을 구현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시아마가 이전 작품들에서부터 예찬하는, 타자성의 무한한 여지가 가능한 넓은 그릇의 자연에서 가능하다. 이를 구현하는 연출은 영화의 기본 요소인 편집을 통해 발생하며, 이를 통해 작은 규모의 소품에서도 마법 같은 효과를 자아낼 수 있는, 시아마의 탁월한 연출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더욱이 소품으로서 본 작품은 훗날 코로나 펜데믹이 영화에 미친 한 사례가 될 수 있으랴. 현실에 언제나 빚이 있는 영화, 현실에서 재료를 찾고 제작하여 이를 촬영해야 하는 영화, 그렇기에 코로나 펜데믹으로 축소된 소품으로서 본 작품은 현실 또한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처럼 시간을 되돌아가는 작품, 하지만 되돌아가서 낙관적으로 재구성하여 희망을 품는 것 대신, 되돌아간 시간을 사려 깊게 이해하는 작품이다. 전작에서 불가능한 바람을 아스라하게 붙잡던 시아마는, 본 작품에서는 가능한 희망을 말한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그리는 예술의 역할을 '낮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낮에 꾸는 꿈, 의식하는 상태로 이성이 활용되는 꿈으로, 이는 본능과 감성, 비이성으로 작용하는 마냥 낙관적인 ‘밤꿈’과 다르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낮꿈 꾸는 존재다. 꿈과 현실이 밤이고 낮이고 구분되지 않는 존재, 이러한 오묘한 경계에서 이성과 감성을 고루 사용하여 편견 없이 이해해주는 존재, 어른들은 시아마가 그려내는 아이들의 낮꿈에서 진정으로 가능한 희망, 바로 ‘이해’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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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10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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