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향해 도망치다
“우정 속에서는 모든 생각, 모든 욕망, 모든 기대가 갈채 받지 않아도 말없이 기쁨으로 태어나고 나누어지는 것.” -칼릴 지브란-
동시대에도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보존되어 있는 미국의 북서부 오리건주, 물론 백인들이 첫발을 내디딘 그 순간에 비한다면 개발이 진척되었지만, 그럼에도 비교적 개척 시기의 생태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유실된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원주민들이리라. 다양한 원주민들은 오리건주 전역에 거쳐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북쪽으로 진군하던 백인들의 발걸음을 눈치 채지 못한 그들은, 멈출 줄 모르는 하얀 발들에 의해 짓밟히고 내쫓길 걸 감히 예측하지 못했다. 그 하얀 발들은 당연히 오리건주의 풍요로움에 매료되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포유동물들은 그들의 눈에 돈다발이었고, 이내 곧 대지에선 금까지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이 딛고 있는 자연을 자본으로 환원하여 짓밟았다. 그곳을 요람으로 삼고 살아가던 생명은 생기 없는 가죽으로 뒤바뀌었다. 서서히 그들의 반경을 넓혀감에, 이윽고 원주민들과의 충돌도 사실상 필연이었다. 그것을 절충하고자 조약이 행해졌지만, 당대에 그것이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이뤄졌을 리 만무하다. 원주민들은 사실상 백인들에게 불필요한 땅으로 내쫓겼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취하고자 하는 땅에 무력으로 우뚝 서게 되었으나, 오리건주의 거대한 산맥들과 강줄기 모두를 백인들은 정복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작금에 남아있는 자연은 정복이 유예된 것과 생활반경에서 내쫓긴 존재들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한때 20세기 초중반의 서부극들은 이 같은 오리건주를 비롯한 서부의 역사를 철저히 두둔했다. 용맹하고 명예로운 개척자들과 이에 반하는 야만적인 원주민들, 당대의 서부극들은 하나의 선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에 객관적으로, 그리고 피해자인 원주민의 시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동시대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이뤄진다. 또한 아예 가상을 그려내거나 과감한 재해석으로, 하나의 허구적 역사를 서술하여 동시대의 방향성을 비추는 수정주의 서부극도 펼쳐진다.
<믹의 지름길>을 통해 언어를 도구로 활용하는 수정주의 서부극을 펼쳐냈던 켈리 레이카트는 작가 조너선 레이먼드가 오리건주를 배경으로 펼쳐낸 『하프 라이프』를 원전으로 한 <퍼스트 카우>를 선보인다. 백인들의 탐욕의 땅으로 전락한 오리건주, 하지만 서두에 언급한 백인, 자본주의의 손아귀가 뻗치지 않은 땅으로 레이카트는 향한다. 이에 자본에 환원되지 않은 순수한 우정과 마찬가지로 순일한 자연이 보존된 풍경·역사를 레이카트는 소박하지만 황홀한 연출로 포착한다. 1964년 미국 태생의 켈리 레이카트 감독은 동시대 미국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녀의 관심은 미국의 몇 안 되는 여성 감독으로서 그간 남성이 다루지 않은 새로운 시선으로 영화를 펼쳐냈으며, 그러한 시선에서 주로 다뤄진 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탐구다. <믹의 지름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도 서부극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것과 대단히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섹스에서 멀어진 젠더를 포착한다는 바다. 그리고 레이카트는 철학적 관심이라 할 수 있는 나와 타인에 대한 관계에 언제나 집중한다. 우리는 상대방과 친밀, 가까워지기를 바라지만, 타인은 우리에게서 항상 멀어진다. <올드 조이>에서 두 친구는 좀 더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그 유희가 가능했던 과거는 끝났고, 현재는 다른 국면을 맞았으니, 이제 두 친구는 헤어져서 제 할 일을 하러 가야만 한다. 이별은 극복할 수 없는 서로 간의 간극 및 개개의 다른 인생에서 비롯함과 더불어 이데올로기의 개입으로 발생한다. 레이카트에게서 밀착과 교감은 인간을 넘어서 동물, 자연과도 가능한 것이나, 언제나 우리의 관계란 ‘멀어지기 싫지만 그럴 수밖에 없음’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그녀의 연출은 비교적 리얼리즘을 고수하며, 특유의 형식 내에서 느슨한 여백과 간극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레이카트는 이 같은 느슨함, 거리감의 극복을 시도한다. 물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서로 결별하는 서사인 <웬디와 루시>와 같은 작품에서는 불발된다. <어떤 여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믹의 지름길>에서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언어나 이념, 사상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 진단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한 이성의 사용, 지배적인 가부장적 원리를 극복하여 이후의 이념이 띠어야 할 원리를 열어젖힌다.
이런 관점에서 백인 너머의 역사극을 선보이며 당대의 우정을 조명하는 본 작품은 <믹의 지름길>이 연상되기도 하고, 또 우정에 주안점을 뒀다는 점에선 <올드 조이>가 연상되며 그녀의 탐구를 이어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1.33:1의 화면비를 선택하여, 동시대와 과거를 담아낸다. 이러한 아카데미 비율은 1.88:1의 화면비나 2.35:1의 화면비와 달리, 초기 영화시기에 활용되던 매체이기 때문에 과거를 지칭하는데 탁월하다. 하지만 레이카트는 단순히 과거만을 가리키기 위해서 본 연출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레이카트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본 화면비의 중앙에 그녀가 포착하고자 하는 자연물, 사물, 인물의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에 배경과 외부의 요소는 최소화되고, 오직 그녀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에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구도를 화면비로 형성한다. 영화는 구도에 적확히 담긴 대상의 몰입을 요구한다. 이러한 화면비와 더불어 영화는 35mm 필름을 사용한다. 디지털에 비하면 형체는 비교적 흐릿할지 모른다. 이는 이미 유실되어 버린 과거에 상응할 수 있으랴. 특히나 영화의 도입부에선 동시대가 포착된다. 오늘날에 한 소녀가 영화의 주인공 킹 루와 쿠키로 추정되는 두 구의 백골을 발굴한다. 그 소녀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알고 백골을 찾아 헤맨 것일까, 아니면 백골을 발견하고 본 이야기를 상상한 것일까. 기록된 과거를 찾아간 것이든, 그녀가 과거를 상상한 것이든, 이러나저러나 동시대에 그 과거는 당대의 진실과 사실을 온당 보존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이러한 기억의 필연적인 왜곡과 유실에 35mm 필름의 불안정성은 잘 어울린다. 한편 35mm 필름은 형체는 불명확할지언정, 색채는 디지털보다 더욱 풍부하고 세밀하게 구현된다. 갈색의 땅에 아직 녹색을 간직한 나뭇잎과 붉은 기를 띠며 줄기에서 떨어진 단풍들, 땅에서 자라나는 버섯과 풀들이 한데 뒤엉켜 색채는 아스라하게 퍼져 나가기도 하고, 생명의 온기를 흠뻑 머금은 것처럼도 느껴진다. 레이카트가 본 작품에서 포착하는 것은 이러한 땅바닥, 사람들의 얼굴 등으로 대단히 소박한 대상이지만, 그들의 시각적 풍부함을 담아내기에, 색상을 강조하는 필름은 대단히 탁월하다.
또 <퍼스트 카우>는 대단히 느린 서부극이다. 레이카트의 그간 작품들이 느렸기에 그녀의 작품과 비교를 하면 별 차이가 없지만, 서부극과 비교하면 이는 매우 큰 차이다. 최근 동시대에 서부를 다룬 작품들도 대체로 리듬감, 서사의 전개는 매우 빠른 편에 속했다. 코엔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에서 각각의 이야기는 결코 유유자적하지 않다. 최대한 빨리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당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재빠르다. 수정주의 서부극이라 할 수 있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도 그렇다. 복수라는 목적을 향해서 진군할 뿐, 그리고 겨우 목적지에 다다라서 백인 남성들의 행위를 철회하고 이를 반성할 뿐, 리듬감은 대체로 20세기의 서부극과 유사하다. 하지만 본 작품은 다르다. 소설 원전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라는 목적만을 바라보고 카메라와 편집은 달리지 않는다. 킹 루는 극 내내 쿠키의 말은 대강 흘려듣고 호텔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진군하지만, 그런데도 레이카트는 서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쿠키의 발화를 주의 깊게 청취한다. 또 서사라는 목적을 위해 도구화되었을, 주인공들만 주목하느라 무시됐을 무수한 초상화, 풍경화를 되살린다. 서사와 무관한 행위더라도 그 시작과 끝을 사려 깊게 보존한다. 레이카트는 그간의 빠른 서부극, 흡사 황금과 개척을 위해 질주하던 서부 시대의 리듬감을 ‘느린 형식’으로 반성한다. 영화에서도 포착되지만 개척 시대의 목적에 참여한 원주민들은 백인의 마을, 집에 소속, 고용될 수 있으나, 거절한 원주민들은 변두리로 밀려난다. 하지만 외곽의 원주민들 또한, 즉 백인의 목적에서 벗어난 존재, 자연도 모두 포착한다. 그렇게 개척 시대에 고려되지 않은 곁가지들을 주목하는 수정주의 서부극을 레이카트는 선보인다. 이러한 시선은 매우 회화적이다. 서사라는 목적에 희생되지 않는 시각, 그저 대상의 순수한 시각성에 주목하는 회화적 성질로 그들에게 접근한다. 레이카트는 서사라는 목적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순수한 대상의 시각 그 자체에 주목하며, 그것 이상의 야욕을 주입하지 않는다. 또 이는 과거를 재현하는 방법론과도 관련이 있으랴. 과거는 우리의 목적에 따라서 재구성되기 일쑤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배제되고 삭제된다. 하지만 과거의 어느 특정한 시공간을 진정 구현하기 위해선, 맥락에 포함된 얼굴들, 사물들을 빼곡히 알아야 하리라.
레이카트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자신의 첫 번째 대작이라 할 수 있을 본 작품에서 상세히 과거의 세부를 구축한다. 특히나 거대 자본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히려 거대 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자연의 세부, 무수한 초상을 스크린에 수놓으며, 자신의 작품 색채를 이어가는 데 활용한다. 이러한 연출을 바탕으로, 앞서 언급한 데로 영화는 동시대에서 시작된다. 화물선이 지나간다, 이윽고 배가 지나가서 황망하게 남은 빈 곳의 중앙을, 흡사 강아지 한 마리가 채우는 듯한 숏이 이어진다. 풀이 높게 자라 많은 것이 가려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자라나고 쌓여가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눈에서 달아나고 있을까. 이렇게 많은 것들이 은폐되는 땅에서 강아지는 백골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강아지의 주인인 소녀는 이를 발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이 우정이다. 후각으로 발견하고, 손으로 파헤치는 사람과 강아지의 관계는 <웬디와 루시>에서처럼, 레이카트의 작품 세계에서 서로의 다름으로 삶을 풍요로이 만드는 우정의 전형이다. 더욱이 레이카트는 교역을 위한 화물선이 지나간 자리에 강아지를 위치시키지 않던가. 그녀는 자본으로 환원된 대상이 아닌, 순수한 존재 그 자체와의 우정을 강조한다. 혼자서는 발굴하지 못했을 두 구의 백골, 우정은 각자가 결핍한 것을 충족 시켜 주리라. 소녀는 두 유골이 발굴된 것을 기뻐하며, 이윽고 영화는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한편 과거로 거슬러 내려가며 영화의 연출은 변모한다. 동시대에 소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과거에 카메라는 더욱 능동적으로 뒤바뀌어, 쿠키의 뒷모습이나 손을 따라간다. 동시대에 과거는 회화랄지 텍스트랄지, 멈춰서 굳어버린, 그저 발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과거는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동시대를 향해 다가올 수 없다. 또 동시대에 맞닥뜨린 과거도 변화시킬 수 없는, 고정된 하나의 사실이다. 이러한 동시대와 과거의 관계가 도입부 카메라의 비운동성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아예 과거로 거슬러 내려간 카메라는 당대의 현재를 다루며 운동이 뒤바뀐다. 오늘날에는 과거이지만 당대에는 살아 숨 쉬었을, 그 능동성과 활기, 가능성을 구현한다. 더욱이 소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을 회고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상상으로 두 백골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것일까. 어쩌면 후자일지 모른다. 백골은 멈춰서 고정된 불변하는 사실이지만, 그 백골이 살아생전에 어땠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무한하게 움직이는 영역이므로…
그간 레이카트가 관계를 다룬 작품들에서 개인은 언제나 그 자신이기 어려웠다. <올드 조이>에서 개인의 뜻은 친구와 우애를 좀 더 나누고 시간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들은 타인이 바라는 기대와 자신의 책임인 아버지, 남편,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되돌아가야만 한다. <어떤 여자들>에서도 유사하다. 관계가 느슨하게 이어지고, 다시 해이해지는 것은 나의 뜻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쿠키는 마을로 향하는 사냥꾼 무리의 음식, 보급 담당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사' 너머의 쿠키와 사람들은 관계를 쌓지 않는다. 킹 루 같은 경우, 그를 처음 대면한 쿠키가 '인디언'이라는 말을 한 것에서부터, 피부색 너머의 킹 루를 마주할 사람들이 얼마나 드물었을지 가늠할 수 있다. 마을에 처음으로 도착한 소도 마찬가지다. 암소는 숲을 자유롭게 거닌다. 하지만 소는 사람들에게 젖을 내주는 목적으로만 전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숲을 거닐다가도, 그들은 타인의 기대에 따라 목적을 이행하러 되돌아가야 한다. 이에 영화 속 개개인들은 하나의 숏에 한 인물만이 놓이기가 부지기수다. 서로는 단절되어 있고, 계산의 대상이며, 이해하기보다는 시기, 질투, 능멸, 모욕의 대상이다. 소란이 발생하자 이를 틈 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것처럼 타인, 특히 탐욕과 출세가 인생의 전부이던 서부개척 시기의 인류는 서로가 도구이자 목적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레이카트는 이를 극복한다. 어쩌면 이는 보이는 것이 문제일지 모른다. 타인에게 적발되면 요리를 해야 하고, 젖을 짜야만 하며, 인디언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발각돼선 안 된다. 나 또한 내가 아는 것을 보려하지 않고, 알기 이전의 대상, 아는 것 너머의 대상을 여실히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쿠키와 킹 루가 처음으로 우정을 쌓는 시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저 흔적만을 가늠할 수 있는 어둠만이 자욱한 밤이다. 영화는 밤에서 시작되어 밤으로 향하는 일대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에 생김새에 대한 편견을 모두 내려놓은 채, 보이는 것 이상의 사건을 겪은 킹 루의 이야기를 그저 묵묵히 듣는다. 오히려 영화는 밤임에 그들의 시각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한다. 레이카트는 색채는 유실되었을지언정, 밤의 자연, 피사체의 윤곽은 비교적 정확히 스크린에 옮겨온다. 오히려 보이지 않기에, 대상을 정확히 보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또 밤은 위협적인 시간이다. 자신이 걸터앉은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있다는 것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시간, 언제나 타인과 짐승은 침입자로 여겨지는 두려움의 시간, 그래서 쫓기게 되는 시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정이 필요하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연민 어린 대상을 어루만지고 동행하는, 그런 우정 말이다. 이러한 우정은 피부색과 종을 뛰어넘어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처지를 이해하는 일이자, 대상의 삶을 걱정하고 질문해주는 관심이다. 쿠키가 암소에게 남편과 자식을 잃어서 슬플 것이라고 어루만지는 것처럼, 이러한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고 결핍을 어루만져 줄 때, 그 상대방도 내게 결핍해 있는 젖을 내어주며 고된 세상에서 함께 생존해나갈 양분을 제공한다. 또 초반에는 처음 보는 킹 루에게 옷과 먹을 것을 기꺼이 내어주며 우정의 본령을 보여주던 쿠키가, 영화 말미에는 부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간다. 그를 위하고자 킹 루는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어둠으로 진입한다. 우정은 죽음을 이겨내는 저항이다. 다만 영화는 전형적인 서부극은 아니지만 일련의 서부극,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을 개척하고자 하는 백인들의 야욕과 폭력이 들끓던 시대다. 그리고 서부로 향하며 꿈을 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허기지다. 그 허기를 항상 타인에게 갈망한다. 사냥꾼 무리는 버팔로 고기와 소다 브레드를 흥청망청 낭비한 모양이다. 그래서 쿠키에게 탐욕스럽게 음식을 요구한다. 반나절만 버티면 도착할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게걸스럽게 협박한다. 영화 속 카메라에 주어진, 이미 풍요로이 차고 넘치는 강과 대지의 산물들, 그 이상의 것들을 인류는 바란다. 자연은 그 너머의 황금과 호텔을 세울 목적으로 기인하고, 인류와 자연과의 우정은 불발한다. 이러한 인간-자연의 관계가 곧 인간에게 이어진다. 한 우락부락한 사냥꾼은 쿠키가 은화를 받으면 이를 갈취하고 그를 해할 것이라며 괴롭힌다. 백인들의 경제원리에 참여한 원주민들만이 마을에 남을 수 있다. 쿠키와 달리 킹 루도 서부 시대의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탐욕에 취해있다.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달콤한 것이나 그리운 것들을 갈망한다는 심리를 파고들어, 호텔을 짓고자 하는 자신의 야욕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우정은 그들이 선물한 것을 그저 받고, 나 또한 내어주는 관계다. 쿠키는 자연이 내어준 버섯을 따고, 자연의 일부인 도마뱀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를 뒤집어줘, 그 또한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준다. 하지만 킹 루는 서서히 쿠키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기 시작한다. 이에 둘은 다른 길로 향한다. 파리에서 패션 유행이 뒤바뀌자, 오리건의 비버가 잔뜩 착취당했다가 다시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언급되는 것은, 킹 루의 야욕에서 비롯할 친구의 결별을 예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시각을 약화하는 밤에 그들의 우정이 시작된 이유가, 바로 순수하게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각이 차단되는 여건이 마련돼서라 추측할 수 있다. 낮에 모든 것이 노출되자 보이는 것은 빵이 중심이 된 교환 현장, 원주민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처벌에 관한 논의다. 또 행인들은 쿠키를 그가 소유한 '부츠'로 대신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오직 화폐뿐이다. 번역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주민의 언어가 백인에게 번역되는 것은 오직 무역과 관련해서다. 그래서 쿠키는 밤에 킹 루, 그리고 암소와 우정을 나눈다. 또 거래에서 벗어난 대화를 나누는 통역가와 원주민 여성이 실로 기쁘다. 우리는 이처럼 우정의 대화를 나눠, 서로의 언어를 해석해야 한다. 언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서로의 능력을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결과물이 탄생한다. 소가 젖을 내어주고, 쿠키가 요리하며, 킹 루가 이를 능숙한 말솜씨로 판매한다. <믹의 지름길>에서처럼 나와 다른, 내게 부재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면, 이처럼 빵과 케이크가 불가능할 것만 같은 공간에 이를 틔울 수 있다. 다만 영화에서 벽으로 가려지고, 빗장으로 비치며, 문틈 사이로 간접적인 시각이 매개되는 것처럼, 우리는 과연 구도 중앙에 자리한 대상 전부를 모두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모든 말을 다 할까. 쿠키와 킹 루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생각보다 양자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많지 않다. 킹 루가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을, 쿠키는 만족했다는 것을 서로는 몰랐으리라.
인류라는 종은 필연적으로 과거나 동시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입부에 오늘날을 사는 소녀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유사함이 드러난다. 과거나 지금이나 배의 용모가 뒤바뀌었을 뿐, 여전히 프레임 내부로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유유자적 시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똑같다. 19세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의 욕망과 동시대에 교역을 위해 여러 항구를 드나드는 욕심, 잠시 들렀다가 떠나가는 타인이 동일하다. 내가 바라보는, 무언가가 들어와 있기를 열망하는 빈 옆자리는 외롭고 황망하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타인과 나의 뜻은 다르므로, 아무리 언어로 해석을 해도, 그 타인이 제 갈 길을 가는 것을 이해해줘야 한다. 원주민 언어를 통해 한 행인과 킹 루는 서로를 잠시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 이해의 결과는 각자가 내어줄 수 있는 것, 가야 할 곳을 더욱 정확히 아는 계기로만 작용한다. 잠깐 하나의 세계로 모여든 그들은 이내 곧 킹 루가 유유히 사라져감에 다시금 두 개의 섬으로 고립된다. 이러한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일까, 소녀의 중앙에는 강아지가 있다. 과거에도 한 강아지가 킹 루와 쿠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우월한 품종이자 젖소라는 목적으로만 바라봄에 외로웠던 암소도 쿠키가 방문함에 친근함을 감출 줄 모른다. 또 쿠키는 부모님이 요절하여 일찍 혼자되고, 일을 시작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마을의 한 소녀가 계속 눈에 밟힌다. 그 소녀도 혼자 남겨진 것일까. 하지만 쿠키는 아이를 돕지 않는다. 그 아이도 쿠키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다른 길로 걸어간다. 인생이란 필연적으로 홀로 짊어져야 할 것, 언제나 타인과 고립된 것에 다름 아니랴. 어쩌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조차도 보이지 않게 됨에 따라서, 진정 타인을 나처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나와 타인이 분간되지 않는 밤으로 그들은 되돌아간다. 밤은 영화의 결말에서 죽음이기도 하다. 꿈을 좇다, 또 누군가의 꿈에 의해 쫓기는 운명, 그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자는 필연적으로 생명에 왜곡과 변화를 겪게 될 지다. 또 어쩌면 죽음만이 진정한 이해이자 우정일지 모른다. 모든 걸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유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오직 우정만을 보존하리.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가 줄곧 교차하며 그 속에서 반복을 포착하는 이유는 왜일까. 필연적으로 동시대의 우리도 빗장으로, 기둥 사이로 타인을 훔쳐보는 입장이므로, 그 이상을 알지 못해 고립되어 고통스럽고, 여전히 주어진 것 이상을 바라는 인간은 타인을 우정 너머의 목적으로 바라보기에… 하지만 그렇게 엇갈리는 과정에서도 끝끝내 지켜낸, 돈 자루 대신 선택한 우정의 시작과 끝을 영화는 보존한다.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정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정을 방해하는 외부의 개입을 불허한다면 우정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그래서 <믹의 지름길>이 역사를 전면 재구성하는 관점이라면, 오히려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가늠하는 서부극이라면, 본 작품은 과거를 비추고 동시대로 이어내며, 불변하는 우정을 길어낸 서부극이다. 그렇게 돈을 내려놓고 건져온 우정, 길고 긴 인간의 수단 내지는 목적화는 곧 <올드 조이>의 연장선에 가깝다. 다만 <올드 조이>나 <웬디와 루시>처럼 마냥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두 친구는 끝내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서로 같이 누워있는 상태로, 삶의 끝자락까지 우정을 유지하며 생을 마쳤다. 최후의 우정은 백골로 보존되었고, 킹 루와 쿠키의 관계는 도입부에서 포착된 소녀와 강아지의 순수한 우정, 조력 관계로 이어지니, 과거에도 존재했던 우정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더욱이 과거가 결말이요, 오늘날이 도입부로서 영화의 시간과 구조는 선형적이지 않고 일련의 순환을 이룬다. 우정, 그것은 인류에게 끝나지 않을 하나의 순환과 같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레이카트는 서부극의 불가능하고 끝없는 탐욕이 아니라, 수정주의 서부극으로서 가능한 우정을 대신 자리한다. 서사나 전개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무의미한 정물, 초상들, 그리고 효율에 맞지 않는 영화의 느린 호흡도 모두 특정한 목적에서 빗겨간 것이 아니겠는가. 대상 자체와 관계 맺는 우정의 참뜻처럼, ‘그것 자체’를 비추는 영화, 원전이 가진 미덕과 영화라는 매체, 양자의 그것 자체를 옮겨놓은 영화, 소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읽으며 연상되는 적확한 이미지를 스크린에 구현하고, 자연과 얼굴을 기록하고자 한 의지로 <퍼스트 카우>를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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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16 광주극장 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