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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7. 2021

차이밍량, <데이즈>

보색의 하루

차이밍량(Tsai Ming-liang), <데이즈>(Days) - 보색의 하루     

“소설의 등장인물들 위에 쪽수가 마치 인생의 시계처럼 걸려있다. 물론 이 인생의 시계에서 초침은 마냥 달려 나갈 뿐이다. 불안한 심정으로 그 쪽수를 힐끔 올려다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독자가 있을까?”

-발터 벤야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탄생의 순간부터 우연으로 결정되는 불공평한 부의 배분, 선택된 계층과 세대 등은 차별과 혐오를 낳고, 우리를 평등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고단한 우리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불평등 속에서도 ‘시간’만큼은 동등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쓴달지, 아니면 누군가와 여가를 보내는 그 시간은 만인에게, 또한 생물·무생물 가릴 것 없이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시간은 몇십여 년 동안 잠을 자다가 변태하여 약 2주간의 생을 살아가는 매미에게도, 백 살 가까이 사는 우리에게도, 또한 천년을 버티는 은행나무에게도 동일하다. 그렇기에 의미는 제각각이리라. 10여 일을 살아가는 매미에게 새겨질 하루는 그 주름이 대단히 깊을 것이다. 그들에게 하루는 1분 1초가 절박한 억겁의 시간이다. 다른 한편 인간에게 하루는 어쩌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리라. 그리고 천년을 살아가는 나무에게 하루란 억겁의 시간이 새겨진 나이테의 주름들 속에서, 그저 해변의 모래알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생물 종 내에서도 하루는 언제나 다를 것이지만, 인간 내 개개의 삶에서도 하루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대상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으로서 하루, 결별한 이후에 맞닥뜨린 지독한 하루, 시한부 선고가 떨어진 환자에게의 하루는, 그 수렁의 결이 결코 같지 않다. 에드워드 양, 허우 샤오시엔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선도한 감독인 차이밍량도 이 하루에 대해서 고찰한다. 사적 영역에서도, 그리고 영화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일부와 같았던 연인이자 뮤즈 이강생과 여전히 함께, 무엇보다 현재 이강생이 투병하고 있음에 차이밍량과 그의 하루는 우리의 하루와 많이 다를 것이다.     


1957년 말레이시아 태생의 차이밍량은 1980년대 새로운 아시아 영화의 흐름을 선도한 대만 뉴웨이브의 일원으로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정초하였다. 그가 새롭게 고안한 문법이란 20세기 중반 네오리얼리즘 및 누벨바그 세대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언제나 동시대로 눈 돌리며, 그렇게 오늘날에서 주목하는 것은 관계와 고독이다. 그것은 대만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비극이나 삶 그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행하는 허우 샤오시엔 및 에드워드 양의 관심과 궤를 많이 튼다. 또한 포착하는 모든 시간에 있어 비교적 동등하고 어떠한 강조도 시도하지 않는 둘의 리얼리즘에 비해, 차이밍량은 숏의 배치나 메타포 등이 알레고리화 되어있다. 그의 대표작 <애정만세> 속 결말의 롱테이크는 현대인들의 고립을 손실 없이 보여주는 리얼리즘보다도, 주인공의 비애를 극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자아내는데, 이 경향은 이미지 그 자체에 몰입하는 최근 작품들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러한 집중에서 느껴지는 것은 서구 개인주의의 이식에 따라서 겪게 된 일련의 부작용인, 단절과 고립의 아픔이다. 이 같은 고립은 서로 간의 유기성이 전무한 숏을 이어내는 편집으로 표현 및 구성된다. 그것은 <청소년 나타>에서처럼 계층별로의 단절이기도 하며, <하류>에서처럼 가족 구성원들이 각각의 생활 세계로 파편화된 고립이기도 하다. 이 같은 각자의 세계는 차이밍량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한 지점을 넘어서기 위한 유일한 길목인 ‘다리’라는 상징에서 교차하고 맞물리곤 한다. 하지만 거기서조차 서로는 무심히 그저 흘러가고 지나갈 뿐이며, 그들은 단지 각자의 목표나 의도를 위해 그 다리를 택했을 뿐이다. 그래서 같은 다리에 놓이지만 그들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으며 서로에게 관심도 없고, 설령 서로에게 침투하더라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후기작에서도 이 같은 색채는 드러나고 있지만 <하류>에서 느슨하게 비쳤던 성적 지향성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적인 동성애를 전면에서 탐구한다. 또한 사람들의 의식에 따른 고유한 다수의 생활 세계를 교차시키던 구성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영역,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 등 여러 차원을 넘나들기도 하며, 그것을 분간할 수 없게끔 경계를 모호하게 뭉개 놓는다. 


또한 그의 영화 경향은 초기시절부터 서사가 느슨한 편이긴 하지만, 근작으로 넘어올 수록 점점 더 탈서사적이고 해체적인 성격이 강해진다. 또한 극을 비추는 카메라는 더욱더 멀어져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대상을 관조하며, 이질적이거나 괴이한 연출은 관객의 비판적 태도를 환기하며, 이미지 그 자체의 형식과 실험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차이밍량의 이 같은 일대기는 언제나 배우 이강생이 함께했는데, <데이즈>는 점점 더 서사를 급진적으로 해체하는 차이밍량의 현재 경향과 자신의 뮤즈 이강생에 대한 감정이 집대성된, 21세기의 사적인 경향이 한데 모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후기 차이밍량의 작품에서는 항상 연출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작품에서도 연출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일단 바로 전작 <너의 얼굴>에서부터 잃어버릴 것만 같은, 유실될 것만 같은 피사체를 두고 카메라는 곁을 떠나기 싫어했다. 10분도 넘게 진행되는 길고 긴 롱테이크를 통해 피사체의 세부와 행동의 처음과 끝을 기록했다. 본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강생의 모든 시간을 롱테이크를 통해 보존한다. 그의 연기는 현실인지 허구인지, 배역인지 그 자신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특히나 이러한 애매한 차원의 경계가 도드라지는 장면은, 반복되는 일상과 절망적으로 굳어버린 육체의 권태에 의해 마찬가지로 멈춰버린 카메라로부터, 비로소 달리 숏이 활용되는 영화의 중반부다. 오직 이강생과 논, 둘만 놓였던 숏들과 달리, 중반부의 달리 숏에서는 행인들이 포착되는데, 그들은 카메라를 줄곧 의식하며 쳐다본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는 현실인지,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실제로도 그렇다. 영화는 2014년부터 작품에 활용되는 푸티지들이 촬영되었고, 그것은 그저 일상의 기록이었을 뿐 픽션임을 바라지 않았다. 이후 픽션으로 기획되어 의도한 숏들과 의도하지 않은 숏들이 한데 편집으로 뒤엉켜 2020년 공개된 본 작품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리얼리틱한 <보이후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차이밍량은 실제의 숏들을 이어 붙여 허구를 구성하고, 또 실제의 시간을 보존하여 허구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본 작품은 '정물화' 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여기에서 정물이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정물, 순수하고도 객관적인 직관으로 대상의 정신적 평안의 영원한 기념비를 담아내고, 이에 의욕을 떠나 의지가 없는 '순수한 인식'에의 몰입이다. 본 작품에서 포착되는 고체가 용해되는 장면이나 음식을 먹는 장면들은, 다른 작품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사를 위한 곁가지로 활용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이러한 숏들은 서사나 영화 전체를 위한 목적, 도구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 자체'의 순수한 감각성, 행위 자체의 인식에 도달한다. 그 숏들은 앞과 뒤에 이어오는 숏들과 매치 컷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상충하여 감각의 대비를 일으키지만, 이는 각각의 숏이 가진 감각성을 더욱 강조할 뿐, 다른 숏이나 시퀀스를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다. 숏은 오직 숏 자신을 말한다. 특히나 감각으로는 유기적일 수 있지만, 인물의 행위에 있어선 전혀 유기적이지 않은 숏의 이어짐에, 각각의 숏이 갖는 독립성은 더욱 심화한다. 이러한 숏들이 간직한 순수한 시각적 인식을 위해 영화는 자막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특히 본 작품의 인물 구성은 자막이 필요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매우 과감한 선택이다. 이강생은 대만의 배우로 중국어를 사용하지만, 논을 연기하는 Anong Houngheuangsy는 태국의 배우로 태국어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간에는 언어의 단절이 있겠지만, 애초에 우리에게 먼저 존재했던 것은 감각이지 언어가 아니다. 언어보다, 그리고 자막보다 먼저 펼쳐져 있는 것은 감각과 시각이다. 언어는 그 이해와 교감을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일 뿐이지, 우리는 감각 자체로도 일련의 소통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숏에 둥둥 떠 있는 자막이 역으로 감각과 시각을 규정할지 모른다. 이에 순수한 인식을 방해한다. 그래서 차이밍량은 <떠돌이 개>에서도 그랬고 <너의 얼굴>에서도 그랬듯, 순수한 이미지와 인식에의 집중을 위하여 자막을 의도적으로 삭제한다. 흡사 많은 대사가 생략되고 축약된, 이에 배우들의 연기와 미장센에 오롯이 몰입 가능한 무성영화처럼 말이다. 그렇게 비게 된 텍스트의 자리는 오르골의 순수한 감각성, 해석할 순 없지만 어조에서 느껴지는 친밀하고도 부드러운 온도, 즉 본원적 감각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본 작품이 처음 전달하는 감각성은 극단적인 부동, 바로 비운동성이다. 영화의 시작, 이제 50대의 문턱을 넘어섰고 지병을 앓고 있는 이강생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그는 실내에서 창밖을 통해 실외를 보고 있다.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하릴없이 비가 추적추적 내려오고, 영화는 물방울들이 충돌하는 소리를 아주 풍부하게 담아낸다. 밑으로 떨어지는 운동성, 그래서 침울할지 모르지만 그런데도 물방울에서 하강의 운동성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강생에게서 운동성은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고, 위로 올라가지도 않는 절망적인 부동이다. 그는 가만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며, 능동적이지 못한 수동성에 상응하듯, 그의 머리는 외부에서 비쳐오는 광선 하나가 관통하고 있다. 그는 광선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저 관통하게끔 놔두고 있다. 이윽고 영화는 이강생이 관조하는 숏으로부터, 그가 목욕하는 숏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어떤 이어짐이 있다.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목욕하는 이강생의 행위에는 유기적인 연결이 없다. 하지만 하늘에서 무수한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그것이 욕조에 모인다면 이는 자연스레 목욕으로 연결될 수 있으리. 그리고 이강생의 행위는 그가 아닌 외부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무기력하다.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만들어내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운동성과 행위를 수동적으로 모방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일상으로서 무기력이다. 이렇게 자연이 만들어놓은 고인 물에 이강생은 몸을 담근다. 몸은 수면 아래에 푹 가라앉아 있고, 얼굴만이 유일하게 바깥에 나와 있다. 물은 육체를 가두어 잠들게 만든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듯 육체의 의지가 잠들어 금욕의 상태에 이르면, 진정 정신은 자유를 누린다. 그래서 이후 영화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산과 하늘을 포착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대지에 떨어져서 고이고, 그것이 다시 승화되어 기체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리. 그리고 이러한 승화에 맞추어 그의 평안한 정신, 의지에서 해방된 평온이 지속하리.      


이 같은 영화는 이강생과 자연만을 이어내지 않는다. 이윽고 논이 포착된다. 이강생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논은 계속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강생이 자연의 변화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일상이 규정되는 사람이라면, 논은 능동적으로 자신이 뒤바꾸는 사람이다. 그는 첫 등장에서 어떤 고체를 용해하고 있었다. 딱딱하던 고체는 흐물흐물해지다 이윽고 액체가 되어 새로운 형체를 갖게 되고, 이내 곧 다시 굳게 되리.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고체에 수동적이고, 이를 주도하는 논이 능동적이다. 이후에는 논과 이강생의 얼굴, 삶이 지속하여 교차한다. 논이 거주하는 집은 흡사 창살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강생은 광활한 초원에서 스트레칭하고 있다. 또 논은 그 안에서 땔감을 태우고 요리를 만드는 등 세계에 참여하여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반면, 이강생은 그저 세계에서 아무 것도 손대지 않은 채로 머물고 있다. 이강생과 논의 감각성은 아주 극단적으로 다르다. 어쩌면 서로는 이러한 변화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비가 내리고 대지에 고여 있다가 다시금 승화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은 그대로 머물러있길 바라지 않고, 지금 내게 부재한 형태, 공간을 줄곧 갈망한다. 이강생과 논에게 부재한 것들이 바로 서로가 가진 것이다. 부동과 능동, 갇힘과 열림, 서로는 이러한 감각으로 나아가고 싶을지 모른다. 이렇게 영화가 처음 보여주는 것은 일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에서 포착되는 것은 충만함이 아니다. 오히려 결손이다. 이후 이강생이 전통치료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2014년에 홍콩에서 촬영된 숏이다. 그는 불태워지는 자요, 두들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다. 하지만 논은 이와 반대로 불을 피우고, 두드리는 사람이다. 논은 요리를 위해서 야채를 빡빡 문지르고, 생선을 열심히 세척한다. 그것들을 다른 국면으로 뒤바꾼다. 그리고 이강생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논은 제작자요, 이강생은 질료다. 그리고 논에게서 부재한 것이 질료요, 이강생에게 부재한 것이 제작자다. 그가 홍콩에서 받는 치료는 영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후 논과의 만남 이후, 청년에게 받게 되는 마사지는 매우 만족스럽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서로는 보색이다. 보색은 서로가 갖지 않은 속성을 갖고 있는, 서로 반대되는 색채다. 밝고 따뜻한 노랑이 어둡고 차가운 파랑을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보색과도 같은 이끌림이 곧 사랑이라고 차이밍량은 본 작품에서 말한다. 서로 갖지 못한 감각에의 이끌림을 보여준다. 주체적인 논은 직접 자신의 생활 세계를 쥐락펴락한다. 타인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깨어있다면, 그의 의식에 상응하는 영화의 연출은 잘려 나가지 않는 완전한 롱테이크다. 하지만 이강생의 세계는 혼자 머물러있다면 롱테이크지만, 질료로서 타인에 의해 변해야 한다면 논에 비해서 숏이 짧고 분절이 잦다. 타인, 세계에 의해 자신의 의식은 줄곧 다른 국면으로 변하고 이전과 단절되는 것이랴. 극단적 롱테이크와 여러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는 비로소 결합 하에 조화를 이루리. 그리고 젊은 나이와 태국의 경제력을 생각했을 때 빈곤한 논, 반면 중년의 대만인인 이강생은 서로의 경제적 입지도 다르다. 누구는 그저 창살이 있는 세계에 머물러야만 한다면, 누구는 여러 호텔을 전전하는 데 부담이 없는 위치,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가 필요하다. 이에 절대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 논과 극단적인 핸드헬드와 달리가 함께 활용되는 이강생의 운동성도 서로 만족을 이루리. 그래서 바라던 두 세계가 줄곧 교차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은 직접 움직인다. 양자 모두 목욕을 한다. 목욕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기존의 얼룩, 나의 요소들을 씻어내는 것이요, 새롭게 옷을 입고 또 그려지거나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씻고 다시 채워질 준비를 하며 바깥으로 나설 채비한다. 논은 자신만의 세계에 셔터를 내리고, 외부 세계를 향해 참여한다. 이윽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길을 누비는 이강생이 핸드헬드로 포착된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리를 지나며 시장을 통과한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나는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첫날의 만남은 실패다. 내가 갖지 못해서 갈망하는 것과 상대방과 절충할 수 없을 듯이 너무나도 다른 것은, 분명 다른 영역이다. 이강생은 거리를 거닌 이후 다시 호텔에 틀어박힌다. 그는 세계가 펼쳐진 창을 등진다. 하지만 논은 시장에 물건을 팔러 나온 모양일까, 아니면 무엇을 사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세계에 얼굴을 맞대고 있다. 이강생은 외면하고, 논은 바라본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기에 그들은 만날 수 없으리라.      


더욱이 논의 청각은 시장과 도시의 소란이다. 하지만 이강생이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청각은 절망적인 침묵, 진공 상태에 가까운 정적이다. 이는 관객에게 아주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며, 이러한 침묵은 무언가가 채워지길 바라는 상태가 아닌, 무가 가득 채워진 유로서 다른 소음의 개입을 불허하듯 꽉 찬 느낌을 준다. 이렇게 범접하지 않길 바라는 자가 고개를 외면함에 첫날의 조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튿날 이강생과 논은 비로소 만난다. 이강생은 더는 세계를 등지거나, 또 마냥 수동적으로 세계가 내놓은 것에 순응하지 않는다. 호텔이 제공한 매트릭스와 침구를 몸소 뒤바꾸며, 자기가 원하는 데로 세계를 뒤바꾼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데로 세계에 참여를 시도하자, 비로소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인 논이 응답한다. 이강생은 마사지사인 논에게 자신의 몸을 질료로서 내어준다. 논은 마사지가 필요하고 불태워지길 바라는 육체인 이강생을 마음껏 두드린다. 이윽고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강생은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또 논은 목욕하는 도중 이강생의 손이 닿지 않을 ‘등’을 대신 닦아 준다. 이렇게 서로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달라붙어, 서로의 결핍을 완전무결하게 충족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이를 차가운 언어로 환원하지 않는다. 이강생의 젖꼭지를 어루만지는 애무, 미끈거리는 두 피부가 착 달라붙은 촉각, 어떤 것도 재현하거나 가리키지 않고 순수하게 표현하는 오르골의 추상적인 연주, 혀에 닿는 음식의 맛만을 보여준다. 언어도 설명도 없이, 그저 육체의 순수한 갈망을 제시하고, 이에 의해 하나 된 두 육신의 결합을 감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정사 이후의 필연은 필연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애달픔이다. 둘의 세계는 또다시 나뉜다. 이강생의 절망적인 부동과 논이 무언가를 만들고 먹는 세계, 하지만 그 세계는 이전과 같지 않다. 이전의 이강생 외부의 세계는 그를 규정하는 세계다. 그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논과의 헤어짐, 원치 않는 세계로의 추락 이후, 그는 더 이상 세계에 참여를 바라지 않는다. 외부에서 울려 퍼지는 소란스러운 소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자연물들이 활동을 이어가는 아침의 소리,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이강생을 규정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육체가 진정 바라는 것은 꿈으로 추정되는 야경이다. 밤의 거리를 걸으며 논에게 되돌아가기, 그것이 육체가 바라는 능동적인 움직임이랴.  


자연의 수동성을 거부하는 능동성, 하지만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에 비참여적인 수동성, 사랑이 우리에게 남기는 필연적인 상흔, 이는 논에게도 이어진다. 오르골을 들으며 내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한다. 논 또한 잠을 청하며 현실에서 만나지 못할 이강생을 그리워한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영화, 여전히 차이밍량은 욕망과 사랑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제도가 좌우한다. <애정만세>에서의 단절, <하류>에서 원치 않은 부자간의 근친은 결국 개개인의 욕망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제도가 낳은 파국이었다. 특히나 동성애자인 차이밍량에게 세계의 개입은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으리라. 순수한 사랑이란 두 육체의 능동적이고도 순수한 갈망, 이에 의한 접촉, 하지만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할 꿈, 우리는 다시 세계로 돌아와야 할 운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곧 영화 초반부에 이강생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지 않았던가. 세계는 이강생에게 사랑을 부여하지 않지 않았던가. 이에 사랑은 타율에 좌절되리. 또 질료 잃은 논에게서도 사랑은 제작될 수 없으니, 이에 그들은 능동적으로 현재를 거부하는 반면, 수동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향수에 젖어 살리라. 이러한 사랑을 차이밍량은 곧 적나라한 현실에서 포착한다. 본 작품은 그저 현실을 기록하는 숏과 픽션임을 의도한 숏이 교차하기에, 전자에 의해서 현실에서 길어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와 더불어 후자의 촬영 자체도 허구성을 명시하지 않는다. 적나라하게 펼쳐진 구도, 어떠한 보정도 없는, 그래서 심지어는 추하게도 느껴지는 조악한 색감, 이에 우리는 현실임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영화라는 환상에 빠져들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탐미성을 벗겨낸 현실의 대상, 행위 그 자체에 골똘히 몰입할 수 있다. 이렇게 적나라한 현실에서 차이밍량은 사랑을 탐구하며 세계의 무수한 알력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을 피워낸 거대한 숭고와 그 이후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서정성이란 순수 감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이란 곧 자신의 뮤즈이자 연인에게 바치는 순일한 그의 마음이기도 하리. 연인의 시간, 연인의 나날을 빼곡하게 담아내려는 차이밍량의 멈춰있지만 치열한 카메라, 거기서 우리는 이강생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자 하는 차이밍량의 시선, 그 길고도 느린 시간의 감각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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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27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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