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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8. 2021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첫눈이 사라졌다>

무거운 마음, 억눌린 기억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Malgorzata Szumowska)&마셀 엔그레르트(Michal Englert),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 무거운 마음, 억눌린 기억

"우리의 지각은 아닌 게 아니라 기억에 젖어 있고, 역으로 기억은 우리가 나중에 보여줄 것처럼 그것이 삽입되는 어떤 지각의 몸체를 빌림으로써만 다시 현재가 된다." -앙리 베르그송-

난민: 박해, 전쟁, 테러, 극도의 빈곤, 기근, 자연재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람. 조국을 떠난 대다수의 난민은 인접 국가에 망명을 신청한다…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줄곧 난민을 수출하는 역사였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줄곧 독립했다가, 다시금 흡수되어가는 수모와 비극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때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지만,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한편 그렇게 독립하자마자 다시금 소련에 잠식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오늘날에 다시금 주체적인 국가로 우뚝 서나 싶었지만, 크림반도에 영향력을 넓히는 러시아의 매서운 확장에 의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입지는 풍전등화라 할 수 있다. 더욱이 2014년 시작되어 결코 적지 않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케 한 돈바스 전쟁 때문에, 약 100만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발생했다. 동쪽에 거주하는지, 서쪽에 거주하는지에 따라, 친러와 친 EU로 엇갈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정치 성향상, 서쪽에서 발생한 난민들은 국경을 인접한 폴란드로 향한다. 동쪽이 줄곧 우크라이나를 동화하고 흡수하려는 야욕이 있지만, 사실 서쪽도 크게 좋지만은 않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또한 서로의 영토를 차지하고자 경쟁한 악연이 있음에 앙금은 남아있다. 더욱이 난민에 대한 폴란드의 태도는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동쪽으로는 홀로도모르와 체르노빌 사태 등으로 착취했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러시아의 야욕이 뻗치고 있다면, 서쪽으로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리고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의 신작, <첫눈이 사라졌다>는 우크라이나에서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폴란드로 향한 어느 신묘한 안마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의 눈은 묘한 민족갈등과 계층 간의 차별을 목격한다.      


1973년 크라쿠프 태생의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는 동시대 폴란드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이다. 20세기의 폴란드 감독들이 주로 정치적인 소재에 집중해온 반면, 슈모프스카의 관심은 역사적, 사회적 주제 대신에, 우리의 육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기한다. 슈모프스카는 이성이나 합리성이 육체와 본능에 굴복하는 상황을 줄곧 탐구한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정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인 <엘르>의 경우 이지적인 잡지 에디터 안느가, 욕망과 본능에 천착하는 두 명의 취재 대상을 만난 이후로, 그간 지속해왔던 신념에 파란을 맞게 되는 작품이다. 본 작품은 단지 들춰지지 않았을 뿐인 음지에서의 욕망이 얼마나 지배적인지를 고찰하며, 이 같은 육체, 본능과의 접촉이 하나의 전염처럼 옮겨붙는 현상에 대해 고찰한다. <인 더 네임 오브>의 경우에도 <엘르>와 유사한 욕망을 다룬다. 동성애를 지향하나 그것을 은닉하고 살아온 신부의 이야기를 담아낸 본 작품은, 육체를 강인하게 만들어 이를 통제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바라는 욕망의 손길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논지를 설파한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이 같은 은폐와 억압에서 비롯한다는 진단을 내놓고, 이를 통해 본 사회를 지배하는 가톨릭의 쇄신과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영매를 소재로 한 <바디> 또한 영혼, 정신보다 우선하는 육체를 논하는 작품으로, 육체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정신 내지는 영혼의 상태를 고찰한다. 그 과정에 있어 의식이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과 그것의 치유를 영화는 강조한다. 한편 이러한 육체나 성 지향성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 더 네임 오브>와 같은 작품에서는 타고나는 것에 뒤따르는 부조리한 편견, 통념을 포착하고, 이에 의한 사회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는 그녀의 최신작 <얼굴>에서도 도드라지는데, 야첵이라는 한 청년의 '얼굴'을 중심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고찰한다. 사고로 인해 얼굴이 함몰되고 변화된 기점으로, 보편적인 얼굴을 갖고 전체주의적 물결에 참여하다가, 타자의 얼굴을 갖고 전체주의의 놀림감, 전시품이 되어버린 상황을 고찰하고, 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를 통해서 야첵의 영혼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변화한 육체와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서 더 이상 이전의 야첵과 같을 수 없는, 반강제적인 딜레마를 고찰한다. 또한 <인 더 네임 오브>와 마찬가지로 이를 종교와 엮어내어, 종교는 타자를 돌보는 인간성, 자애로움을 포기하였고, 이에 대한 대가로 거대한 선전만을 쌓아 올리는 부패를 적대시하고 고발한다. 이러한 그녀와 함께 그간 촬영, 각본을 도맡던 마셀 엔그레르트와 공동감독으로 신작 <첫눈이 사라졌다>를 선보인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안마사가 타인의 육체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소재이기에, 영매를 통해 육체로부터 정신의 정화를 시도하던 <바디>의 기조를 이어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우리의 의식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기억하는 잠재된 영역, 무의식을 향해 파고들어 간다. 영화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과거의 기조를 이어가듯 영화는 의식과 무의식, 현재와 그림을 통해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차원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영화에서 올림피아드, 화학식을 통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언급되곤 하지만, 이들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 영성, 정신적인 영역으로 파고들며 현재의 육신, 이들이 모인 동시대의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들을 진단한다. 이렇게 비가시적인 무의식, 영성, 정신의 차원과 비합리적인 육체의 영역으로 줄곧 파고들기에, 감독 특유의 불명료함, 신비로움이 도드라진다. 또 육체의 반응과 자극에 집중하듯, 무의미하지만 우리의 정서에 쾌를 불러일으키는 코믹 코드, 춤, 음악을 감각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도입부를 살펴보며 연출을 더욱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자. 우크라이나 출신의 마사지 전문가 제니아가 폴란드에 도착한다. 그는 으슥한 밤의 숲에 감춰져 있다가, 서서히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영화 속 숲은 개개인이 가진 무의식을 가시화한 미장센에 다름 아닌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보이는 영역으로 제니아는 나오고 있다. 이러한 드러남은 영화에서 카메라의 상승하는 운동감에 상응한다. 이후에도 제니아의 고객들이 만족스러운 마사지를 받을 때 사용되는 상승하는 운동감은 삶의 회복, 육체의 해방 등에 상응한다. 이후 영화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제니아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영화 속 엘리베이터의 상승하는 운동은 단 두 번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양지로 향해가는 제니아를 포착할 때, 비로소 타인의 눈에 노출될 수 있을 때다. 그의 형체가 미약하게 보이던 어둠에서 서서히 빛으로 향해가지만, 또 그는 체르노빌을 연상케 하는 음습한 숲에서 사람이 사는 도시로 진입하지만, 도시에 도착한 제니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고 그는 출입국 사무소에 도달한다. 무수한 인파가 있고 제니아도 그중 한 명이다. 그리고 사무장은 그의 허가를 불허할 것만 같다. 그가 도시에 도착하자 다시금 카메라에서 멀어진 거리감도, 또 영화의 도입부를 고정된 카메라를 이용하여 수동적이고도 딱딱하게 포착한 것도, 승인 없이는 자유로울 수 없고 머물 수 없는 제니아의 위치를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랴. 하지만 제니아는 자신의 마사지, 최면 능력을 절륜하게 활용하여 서류를 능동적으로 승인한다. 그리고 이후 영화는 트래킹이 활용되며, 일련의 자유를 얻게 된 제니아의 여정을 능수능란하게 뒤따라간다. 또한 영화 전체에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충만하다.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온 제니아는 빛이란 삶을 좇아 나선다. 이외에 영화는 필터를 이용하여 차갑고 따뜻한 채도를 섬세하게 조절한 미장센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제니아가 놓이는 상황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승인되어 폴란드에 머물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제니아이지만, 생활은 마냥 쉽지 않다. 영화 속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폴란드에서 존재하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편견, 체르노빌 사태와 관련한 판단 등으로, 이것이 제니아를 구속한다.      


이는 기억이 그를 붙잡는 형국이다. 과거의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상이 제니아에게도 덧씌워져 그를 괴롭히는 하나의 덫으로 작용한다. 이 같은 기억은 요철과도 같아 감촉은 까끌까끌하고 따갑다. 일상에서도 이러한 기억이 곳곳에 널려 있다. 제니아가 처음 방문한 가정은 어젯밤에 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는지 난장판이고, 구성원 모두는 피곤해한다. 어제의 파티가 곧 오늘의 아침을 규정한다. 그리고 파티 이후 치우지 못한 사물들이 제니아의 발에 밟히며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어제가 남긴 것들이 오늘에 영향을 준다. 그 집의 냉장고엔 딸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찍은 무수한 사진들이 붙어있다. 어느 하나도 빼먹을 수 없는 기억의 총체가 무겁고 복잡한 현재의 개인을 이룬다. 이러한 과거는 쉬이 잊히지 않는 것으로, 그래서 현재를 괴롭게 만든다. 그것은 곧 책임이자, 등에 인 멍에다. 투병 중인 카츠페르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는 죽어가는 자신을 직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그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자 제니아에게 최면을 요청하는 장면은 할로윈 축제날이다. 그에게선 떠나가야 마땅한 망령, 기억들이 여전히 아른거리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시간적 장치이랴. 또는 아픈 진실을 감추고 멀쩡한 척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시간이리라. 또 기억은 하나의 소유다. 과부가 된 어느 한 여인은 떠나간 남편을 잊지 못하고 기억 속에 살아있거나, 비료가 되어 나무로 자라난 것으로 여겨지는 연인을 놓지 못한다. 그와 함께한 순간들이 그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불독이 자신을 구성하거나, 또 제니아를 쟁취하여 자신을 구성하려는 욕망, 이들에 대한 경험과 기억으로 나를 구성하고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소유욕이 불타오른다. 잊을 수 없는 기억에 의해 제니아에게 치료받는 사람들은 신경증을 겪기도 하지만, 잊어야 하는 기억을 붙잡고 소유하려 듦에 괴로운 것이기도 하다. 제니아의 마사지는 무겁고 육중한 그들의 머리를 가볍게 만든다. 여러 기억이 부상하여 머릿속이 어지러운 이들은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쉽게 잠을 청할 수도 없다.      


또 기억이 오늘을 구성하고, 그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은 이들도 진정 내가 바라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제니아는 사람들의 머리에 가득한 모든 번뇌를 개운하게 만들어, 진정 현재에 그들이 필요한 수면을 선물한다. 아이와의 불화, 진학 스트레스, 복무 시절의 괴로움, 소유한 대상의 집착을 일부 지워준다. 그렇게 악몽에서 해방된 이들은 매우 행복하다. 진정으로 내게 필요한 휴식을 취하며, 단지 나의 아집이었던 기억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워지면 다시금 채워져야만 한다. 제니아의 첫 번째 고객은 그에 의해 잠들고 깨어나자마자 갈증을 느끼며 허겁지겁 물을 마신다. 우리는 마냥 비워진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비워진 뇌리는 흡사 갈증과도 같아 금세 물을 갈구한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아 제니아를 통해 기억을 통제한 그들은 주체적으로 기억을 채우지 못한다. 영화 속 중년 여성들은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제니아와의 정사를 열망하며, 그와의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을 채우길 원한다. 이는 기억의 강박에서 벗어난 대가로 나의 일부를 잃기 때문이다. 영화는 부촌의 주민들이 사용하는 폴란드어와 제니아나 경비원이 사용하는 러시아어가 교차 사용된다. 평소에는 제니아가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고객에게 자신을 맞춰준다. 하지만 마사지, 최면에 깊이 몰입한 고객들은 이내 곧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제니아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그의 손짓이나 말에 전적으로 수긍한다. 기억이 없는 상태의 나는 곧 주체적인 요소도 일부 잃어버린 상태이기에 타인에게 지배되는 나약한 상태로 전락한다. 또 제니아의 마사지가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그에게 의존한다. 스스로는 행복할 수도, 개운할 수도 없다. 강인한 의지로 자신이 직접 결단해야 할 금연도 제니아가 도와줄 수 없겠냐며 의존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기에 스스로 기억을 제어해야 한다. 제니아에 의해 통제되고 취합되는 기억이 아니라, 또 타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주체적으로 이룬 기억을 바탕으로 나를 구성해야 독립적으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나약하다. 제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이 가진 힘을 빌리는 것이지, 제 자신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실로 드물다. 영화 속 부촌이 그렇다. 금권은 이들이 으리으리한 부촌에 입주하게 만들고, 또 호화로운 집에서 거주하게 해준다. 하지만 물질은 풍요롭더라도 개개인은 건설적인 삶과 거리가 멀다. 제 자신이 풍요롭지 못한 부자들은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집,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없는 집에서 거주한다. 물질은 풍요롭지만, 나만의 것에 있어선 빈자다. 또 제니아 없이는 불안해하는 사람들로 한가득이다. 부자라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 필연적인 나약함을 갖고 태어난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손을, 상호공존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영화는 상호공존을 고려하지 않는, 점점 더 이기주의가 극심해져 가는 폴란드의 오늘날을 꼬집는다. 제니아가 눈앞에 있음에도,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편견과 다른 그가 서 있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우선이라는 듯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낸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하는 것이리라. 딸은 어머니의 우크라이나 및 파키스탄에 대한 편견을 따라하고, 또 밖에서 퇴역군인이 베트남인 여성에게 과격하게 행패부리는 것을 거울처럼 따라하는 것이랴. 아이들과 대화가 불가능한, 서로가 독백처럼 이기적으로 쏟아내는 발화도 그렇다. 어른들이 타인을 헤아리지 않기에, 아이들도 타인을 헤아릴 줄 모른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프랑스 학교로 유학가라며 언어도 모른 채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고, 암 투병 중인 남편이 부탁하는데도 아내는 옆에서 담배를 피운다. 또 부촌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불륜을 한다는 것이 암시된다. 제니아의 고객들도 그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제니아의 첫 번째 고객의 남편도 자전거를 통해 불륜이 암시되고, 그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고 다른 집으로 향하며 가정에 소홀했다는 것이 최면에서 드러난다. 작금의 세태는 이렇게 이전 세대를 다음 세대가 모방하며 이어진 것이랴. 어른들이 오직 육체의 쾌락만을 중시함에, 아이들은 마약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폴란드의 부촌에서 우크라이나인으로서 지위가 낮고 이방인인 제니아는 철저히 그들의 욕망을 위한 존재로 전락한다.      


영화의 중반에 과부의 집에서 점과 원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이는 중앙에 점이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무수한 원들이 돌아가는 한 회화를 보며 이뤄진다. 영화 속 무수한 부르주아들은 중앙의 점임을 자처하고, 제니아는 언제나 원이어야만 한다. 물론 제니아는 마냥 원임을 자처하지 않는다. 원치 않는 요구를 하는 고객에게 최면을 걸며, 점으로서 불편한 상황을 빠져나오기도 한다. 여하간 상대방 앞에 선 나 또한 원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상호공존이 가능하다. 그러나 영화 속 집들은 오직 제니아에 의해서만 교류되고, 또 불륜 등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만 오가는, 무수한 점들의 이합집산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인사를 원하는 개의 난폭한 울음이나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를 교차 사용하는 것은 이기적인 점의 시선에서, 서로를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원의 시선으로 확장하라는 이유이랴. 군인이라 한들 나약하여 마약에 빠져 있는, 필연적으로 결핍 가득한 인류는 나를 중심으로 도는 원이 아닌, 중심이자 점으로서 타인을 인정할 때 비로소 교류하고 공생할 수 있다. 점과 원을 오가는 여정에서 누군가는 항상 점이었고, 제니아는 항상 원이었다. 제니아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다. 원으로서 억눌려있다. 제니아는 수시 때때로 운동을 하며 몸을 단련한다. 결코 감상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부르주아들처럼 육체의 쾌락, 방탕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감정이 배제된 채로 홀로 놓인 그의 모습은 쓸쓸하고 권태로워 보인다. 그는 어렸을 적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 한 그림을 보고 제니아의 플래시백이 펼쳐진다. 보이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뒷모습, 더 이상 소통할 수 없고 마주할 수 없는 단절된 초상이다. 제니아도 마찬가지로 뒷모습이 때때로 포착된다. 누구한테도 초능력자로서의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이 등을 돌린다. 그래서 슬퍼질 수밖에 없는 과거를 외면하고, 강인하게 육체를 단련하는 것이랴.      


하지만 진정 강하다는 것은 나의 실책, 후회, 고통 등, 마주하기 어려운 기억조차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포착한 어둑한 숲을 가시화된 무의식의 세계로 설정한다. 그리고 제니아가 고객들을 치료해주는 마지막 단계는 바로 본 무의식의 숲에 침잠하여 회피해온 기억을 맞닥뜨리고 이겨내는 것이다. 누군가의 부재를, 고통을,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괴롭기 때문에, 그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상 없이도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 제니아도 마찬가지다. 고객들과 달리 제니아는 숲을 떠나온 존재다. 하지만 흡사 그 숲에서 비롯된 듯한 무의식이 제니아가 사는 집의 문을 줄곧 두드린다. 그는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이에 영화에서 포착되는 두 번째 엘리베이터 씬, 제니아의 두 번째 상승이 바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비로소 슬픈 어머니의 정면과 대면한다. 자신이 초능력을 지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이상 반복해선 안 되는 후회가 무엇인지, 체르노빌이라는 떨쳐내야만 하는 악몽이 무엇인지를 마주하는 일이 바로 성장이다. 비록 그 이전이긴 하지만 제니아는 자신과 성관계를 나누자는 한 고객의 요청을 거절하고, 자유로이 몸을 놀리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제니아가 진정 원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초능력을 무익하게 여기고 자유가 위축된 제니아지만, 서서히 능동적으로 일탈도 하고 음주도 즐기는 등 나를 회복해간다. 그간의 제니아는 타율적으로 존재했다.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로서, 맹목적으로 그는 일해 왔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행위에 실패하자, 더 이상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다만 제시받아 수행할 뿐이다. 하지만 억눌린 기억을 해소하고 그는 자신의 초능력을 타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데 활용한다. 카츠페르의 아버지가 사라지는 것처럼, 진정한 해방이란 더 이상 타인의 시선 하에 놓이지 않는 것이리라. 위축된 그의 욕망은 해소되어, 자유로이 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정사를 나눈다.      


더 이상 타인의 요구, 관객의 시선을 위해 무대에 서지 않는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계획, 프레임에 속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 바라던 꿈이란 어떤 구속에도 얽매지 않는 해방이었으랴. 타인의 고용, 시선 앞에서만 유의미했던 마사지사는 이제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면서도 매우 유의미하다. 이는 20세기 우크라이나의 아픈 역사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 눈은 제니아를 초능력자로 만든, 체르노빌 사태 직후 눈처럼 내린 먼지 더미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눈은 영화 속 대사처럼 내려선 안 되리라. 소련 일부의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가 희생되고, 또 부촌의 고객들을 위해 여전히 우크라이나 노동자가 희생되는, 잿빛 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다시 내린다. 제니아를 잡으러 온 출입국 사무소의 직원들이 도래하면서 말이다. 그간 제니아의 마사지와 최면에 의해 부르주아의 문제들은 일련 은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재에 따라 다시금 불독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기르기 시작하고, 트라우마에 휩싸인 퇴역군인은 마약에 의존하니, 이에 따라 눈은 내리기 시작하는가. 체르노빌의 먼지 더미도 그토록 아름다웠다고 회고되니, 황홀하게 보여도 절대 내려선 안 될 눈이 하릴없이 쏟아진다. 제니아에게 어머니를 빼앗아가고 초능력을 부여한 바로 그 눈, 다시금 우크라이나의 위기를 예언하는 듯한 암울한 눈이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인종차별과 민족, 국가 간 갈등을, 아름답게 포장한 차가운 눈 더미로 경고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체르노빌의 먼지 더미, 인종차별에만 국한된 눈으로만 축소될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실제로 2025년 이후에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 기상 예측을 크레딧에 삽입한다. 그리고 2025년 이후에는 언제나 첫눈이 내리며 겨울이 시작되었던 우리의 기억을 배반하는 겨울이 닥쳐올지 모른다. 우리는 눈이 내렸던 기억을 잊지 못하며 어제와 오늘을 끝없이 비교하리. 기억과 일치하는 순간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우리는 줄곧 허망한 겨울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아직은 우리의 기억과 오늘의 겨울이 일치하는 순간을 축복처럼 담아내는 것이리라. 영화는 우리가 마주한 첫눈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게끔, 환경을 위해 절절히 호소하는 것이랴. 설령 첫눈의 기억이 아니라 할지라도, 2025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인종차별로 불타버린 먼지 더미가 눈처럼 내려서는 안 되리. 이렇게 슈모프스카와 엔그레르트는 우크라이나 노동자의 시선에서 폴란드의 사회문제를 꼬집는다. 서서히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해가는 이기적인 인류의 초상,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자립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말이다. 또 우크라이나 노동자의 시선으로 폴란드의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 호시탐탐 우크라이나를 노리던 러시아의 야욕에 의해, 떠도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비극의 현대사를 청산하지도 못한 채 아직까지도 권력을 위해 착취당하는 형국에 놓였다. 이는 지금까지 줄곧 이어온 슈모프스카의 육체에 대한 관심으로 펼쳐진다. 온갖 기억과 아집이 축적된 우리의 육체에 의해 의식은 괴롭고, 또 회피해온 기억들이 줄곧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 우리는 쉬이 마주하지 못하는 내밀하고도 깊은 육체로 항해하여 이를 목도하고 보다 강인해져야 한다. 슈모프스카는 <바디>에서 보여준 육체와 기억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어간다. 그리고 언제나 중앙의 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원으로 시선을 넓힐 수 있어야 하며, 원이었던 이들은 불독의 탈출처럼 타인을 구성하는데 희생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하리. 슈모프스카의 그간 작품이 그랬듯 작품 전체로는 이성으로 밝힐 수 없는 신비가 가득하며, 숏 각각은 매우 감각적이고 황홀하다. 점과 원을 향해 빠져들어 가는 줌인이나, 무의식에 빛을 밝히는 조명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하지만 통찰이 다소 얕고 빈약하던 슈모프스카의 한계 또한 여전하다. 아름답게 비추지만, 깊게 비추지는 못하는 작품, 다양한 군상을 비추지만 세세하게 파고들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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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28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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