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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8. 2021

레오 카락스, <아네트>

희극이든 비극이든 인간은 언제나 꿈을 꾼다

레오 카락스(Leos Carax), <아네트>(Annette) 

- 희극이든 비극이든 인간은 언제나 꿈을 꾼다    

“우리는 오늘 사랑하던 걸 내일이면 미워한다. 오늘 찾던 걸 내일이면 피한다. 오늘 갈망하던 걸 내일이면 두려워한다. 아니, 생각만으로 걱정에 벌벌 떤다.” -대니얼 디포-

인간의 인생 중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순간인 청춘, 하지만 혈기왕성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이윽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래서 인간은 짧지만 찬란한 아름다움을 반영구적으로 보존코자 한다. 인간의 근본 요소 일컬어지는 ‘노동’이 찬란한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죽음을 유예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행동’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고 교류하기 위함이요, ‘작업’은 유한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나름의 불멸을 시도하는 것이다. 음악도 공연도 필연적으로 진보하며 변화해버릴 이념과 삶, 추상적 관념들을 나름의 형식으로 붙잡아 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서 느끼던 생각과 표현들을 반영구적으로 붙잡는 예술만이 작업의 전부가 아니다. 번식도 인간에게는 작업의 일부다. 한때 뜨겁게 타올랐던 둘의 사랑도, 한 인간의 치열했던 삶도, 언젠가는 그 위에 차가운 얼음이 내려앉듯 푹 식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의 순간을, 그리고 나의 삶에 무한을 부여하려 한다. 바로 나의 분신에 다름 아닌 자식을 통해 말이다. 하지만 자식은 나의 무한한 지속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내가 아닌 타자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실이 자식이라면, 그 자식은 나뿐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상대방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부모를 닮았지만, 그들과 엄밀히 구분되는 개성은 부모 자식 간의 명백한 경계를 긋고 타자임을 명시한다. 그래서 번식이란 우리의 작업은 나를 반영하지만,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니다. 레오 카락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뮤지컬 영화인 <아네트>에서 다루는 예술과 사랑, 부모와 딸의 관계가 바로 이러할지 모른다. 1960년 파리 태생의 레오 카락스는 1984년 데뷔한 이래로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 영화를 보여줄 차세대 기수로 주목받았다. 비록 작품 텀이 대단히 긴 과작 감독이기 때문에, 현재까지의 장편 자체가 얼마 안 되긴 하지만 비언어적인, 이미지 그 자체에 집중한 독창적인 연출로 언제나 높게 평가받는 감독이다.     


특히 2012년 공개한 <홀리 모터스>는 그의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 남자가 ‘홀리 모터스’라는 신비로운 리무진에 타서, 아침부터 밤까지 파리 곳곳을 누빈다. 그리고 주연 배우 드니 라방은 총 아홉 명의 전혀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는데, 영화에서 각각의 인물들은 때론 유기적으로, 대체적으론 비유기적으로 변신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 남자가 맡을 수 있는 여러 인생을 보여주는 본 작품은 흡사 그리스 신화 속 스핑크스가 인생을 아침부터 밤까지로 비유한 것과 같으며, 카락스는 본 작품을 통해 삶을 보여준다. 그의 뮤즈인 드니 라방이 총 아홉 가지 배역으로 변모하는 상황은 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인생의 프리즘이자 스펙트럼이요, 특히 어떤 하나의 본질, 규정에 얽매인 즉자가 아니라, 상황과 선택 속에서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심지어 이전의 자신까지도 죽여가면서 다른 형태로 초월하는 대자, 실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홀리 모터스>의 도입부에서 영화관이 포착되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마네킹들이 즐비 되어 있듯, 본 작품은 카락스의 영화론을 천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다가, 이윽고 영화를 찍고 연기하는 것이 하나의 인생임을, 또 삶이라는 진리를 포착하지만 그것은 현실과는 다른 몽타주라는 영화 고유의 방법으로 마술처럼 승화시키는 것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카락스의 신작 <아네트>에서 <홀리 모터스>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요소는 이 같은 예술론이나 실존, 인생에 대한 관점이다. <아네트>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나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카락스는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사랑은 필연적으로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고통보다도 달콤함에, 언제나 우리는 사랑에 빠져들고 위성처럼 서성이고 맴돈다. <나쁜 피>에서 그렇다. 사랑은 하나의 친밀함, 상대방과 극도로 밀착하는 것이지만, 정사의 끝에 하나로 합쳐진 육체는 둘로 나뉘어 기필코 멀어져야 한다. 또 90년대의 에이즈 공포를 반영한 세계관에서 성교는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카락스에게서 정사, 특히 순수한 사랑에 기반을 둔 정사는 부패한 세상 속 정화의 빛이다.      


사랑: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배로 느껴야 하는 것, 계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몹시도 어려운 것, 언제나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것, 이러한 지론은 <퐁네프의 연인들>로 이어진다. 사랑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언젠가 비관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우울함이 곳곳에 깔려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몰이해다. 자전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카락스의 자폐증에서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 간의 불통, 몰이해가 이별의 도화선이다. 처음에 사랑은 서로를 이해해서, 각자의 눈과 뮤즈가 될 수 있어서 시작했다. 하지만 서서히 서로의 특정 결핍을 충족할 수 없음에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이고, 사랑이 배, 즉 육체로 느껴야 하는 것이라면 그 감정의 격동과 변덕에도 쉽게 휩쓸린다. 그래서 다시 이별하지만, 그런데도 사랑을 향해 앞으로 다시 항해하리,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배를 타고 나아가는 것이 그의 지론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사랑을 대단히 감각적인 이미지로, 특히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불꽃놀이와 실제 무용 경력이 있는 줄리엣 비노쉬의 능동적 표현으로 승화시킨 바 있는데,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지각하고 느끼는 것이라는 그의 지론을 연출로 가시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사랑과 연출이 <아네트>에서 다시 한번 펼쳐진다. 영화의 시작, 감상자는 영화관이 아니라 흡사 뮤지컬, 오페라 극장의 관객석에 앉은 듯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관객에게 뮤지컬을 매너 있게 감상하는 에티켓을 텍스트로 삽입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어둠이 깔린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커튼이 올라가지 않은 채 펄럭이는 것일까, 이를 연상케 하는 붉은 색의 강렬한 이퀄라이저가 야경에 중첩된다. 그렇게 점점 더 강렬하게 지직거리는 이퀄라이저, 이윽고 음악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야경을 훤히 밝혀 세상을 드러나게 만든다. 이러한 도입부에서는 음악이란 예술을 통해 세상을 환히 밝혀내는, 예술의 역할을 환기한다. 이후에도 영화는 사람, 세계를 딱딱하고 지루한 현실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그것의 이면과 본질을 꿰뚫는 예술로 대신 보여주는 방법을 택한다. 일례로 출산의 호흡을 규칙적인 리듬과 박자로 대신 보여주고, 경찰의 심문을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어조로 승화한다.      


또 카락스는 그가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아카이빙 푸티지, 매스미디어를 패러디한 숏, 가시화된 폭풍과 꿈 등 예술로 승화된 이미지로 대신 전달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느끼기 힘든 세상의 정수를 매개한다. 다시 도입부로 돌아가서, 이후 음악을 작곡하는 스튜디오가 포착되고, <홀리 모터스>에서처럼 카락스의 얼굴이 노출된다. 그는 여전히 이번에도 자전적인, 그가 생각하는 사랑,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영화로 진솔하게 얘기한다. 이러한 스튜디오에선 카락스 혼자 작업하지 않는다. 무수한 기술, 사람들이 동원되고, 이는 영화에선 디졸브로 중첩된다. 결코 단절되고 유리된 영역이 아닌, 그것이 조화로이 겹쳐지고 이어지며 하나의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랴. 각자의 영역이 조화로이 겹쳐지며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는 것은 <아네트>라는 작품에서도 그렇다. 본질적으로 영화로서 본 작품은 스튜디오나 헨리와 앤의 서로 다른 세계를 가시화할 땐 짧은 숏들을 편집으로 탄력적으로 이어내는, 소위 영화다운 연출이 동원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뮤지컬' 영화로서, 흡사 현실에서 뮤지컬, 연극을 보듯, 숏이 나눠지지 않는 무대를 롱테이크로 여실히 구현한다. 뮤지컬이나 오페라의 배경을 연상케 하기에 작위적이지만, 충분히 숭고하고도 경이롭게 완성된 폭풍우 시퀀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각각의 세계, 심리, 사람에 상응하는 무수한 양식들이 동원되며, 이러한 다양성이 겹쳐지고 이어진 총체가 바로 <아네트>라는 혼성적인 영화다. 이러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음악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모두가 유사하게 어두운 복장을 하고. 전체는 음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이윽고 <홀리 모터스>처럼 음악, 세계라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구성원으로부터, 독립된 자아이자 정체성인 '배역'을 입기 시작한다. 그저 획일화된 전체 중 일부였던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는 이제 헨리와 앤으로 탄생한다. <홀리 모터스>에서처럼, 아니면 거대한 세트장에서 연인이란 배역을 연기하던 <퐁네프와 연인들>처럼, 인생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하나의 꿈이다.     


새로운 배역을 입기 위해선 무대도 태어나야 한다. 도입부의 영화는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아직 영화가 아님을 폭로하는 창작 과정과 감독 자신이 노출된다. 영화를 시작해도 되겠느냐며 계속 되묻는다. 특히나 시작 이전의 무대에서 현실의 시간과 동화된 롱테이크가 도드라진다. 하지만 영화가 탄생하며 숏은 분절된다. 그렇게 현실로부터 떠나가 예술, 영화 고유의 세계가 탄생한다. 이렇게 영화는 탄생 이전의 개인과 세계를 음악으로 비추고, 전체로부터 개인,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분리하며 첫 번째 탄생을 포착한다. 그렇게 탄생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먼저 앤이다 그녀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사과를 먹고 있다는 점이다. 앤이 구별되지 않던 추상적인 덩어리의 일부로부터, 거기서 떨어져 나와 최초로 탄생한 여성 앤, 사과를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이브를 연상케 한다. 그녀는 이브처럼 유혹하는 자다. 리무진에 타고 있는 그녀는 창문을 열고 누군가를 바라보기를 열렬히 염원한다. 또 거울에 비친 그녀의 용모는 자신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흡사 누군가가 봐주길 원하는 듯 포징하고 있다. 거울이 그녀를 보고 있다. 하지만 헨리는 이와 상반된다. 외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즉 이브의 시야에 노출될 수 있는 존재이자, 거울을 바라보는 존재다. 이렇게 아담과 이브로 양자를 해석한다면, 앤은 헨리로부터 떼어져 나간 반쪽이다. 그렇게 서로는 분리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용맹한 존재와 리무진을 타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존재로, 그리고 서로가 갖지 못한 속성 때문일까 이들은 연인이 되어 서로에게 이끌린다. 바라봐주길 바라는 존재와 바라보는 존재, 실내에 머물며 창밖을 보는 존재와 그 시야에 들어올 야외에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이들은 모두 예술가다. 헨리는 희극인이요, 앤은 비극을 노래하는 소프라노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같지만, 서로가 하는 예술의 속성은 상이하게 다르다. 희극을 하는 헨리는 삶을 긍정한다. 인생이란 기쁘고 즐거운 것, 그렇기에 웃음을 터뜨리며 삶을 만끽한다. 그는 무대에서 내내 뛰어다니고 점프하며, 상승적이고 경쾌하게 움직인다. 더욱이 그는 객석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소통한다.      


하지만 웃음이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헨리는 각 민족이 서로를 혐오하는 제노포비아에 관련된 농담을 한다. 또 그가 총기 테러로 인해 살해당한 듯한 상황을 연출한다. 비인간적이고 죽음이 만연하는 비극, 하지만 그것이 세계의 실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사람들은 웃는다. 삶의 긍정이란 추한 진실, 불쾌하고 따가운 진실에 진통제를 부과하여 어떻게든 웃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버티기 위한 웃음, 명백히 악덕인 것을 두고 폭소하는 비인간적인 웃음, 희극은 삶을 긍정하기도 하지만, 고통과 자극을 무화하여 혐오스러운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는 마약일지 모른다. 헨리가 웃음을 설명하는 구절도 그렇다. 적개심을 없애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 그렇게 삶을 버텨가며 진실과 목도하는 것이 웃음이다. 이와 달리 비극은 일단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앤은 언제나 이별, 죽음, 낙담을 노래한다. 인정하는 것은 삶의 무상성이다. 그녀는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주로 축 처져 있거나 주검을 연기한다. 그리고 객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고, 또 무대에는 열주가 가득하여 그녀는 가려 있다. 그녀의 무대에서 활기찬 삶은 보이지 않는다.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녀는 혼란을 노래한다. 그녀는 희망찬 삶을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그리고 세계를 부정한다. 그녀가 아는 것은 오직 그녀 자신의 내면, 슬픔이다. 하지만 인간적이라면 오히려 앤이 더 인간적이다. 언제나 피를 토하고, 또 붉고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욕망을 상기하는 그녀는 헨리가 부정하던 삶의 악덕을 되레 인정한다. 그녀는 인간이 소거할 수 없는 죽음과 욕망, 유한함을 웃어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똑똑히 마주하게 한다. 인간이 거세하지 못하는 인간다운 것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녀의 예술은 헨리보다 인간적이랴. 이렇게 서로가 갖지 못한 것들을 양자가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헨리는 스스로가 아직 젊다고 표현한다. 무수한 기억과 경험이 축적되고 거기서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서서히 닫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젊은 존재들은 아직 그토록 표상이 완고하지 않다. 다른 사상, 판단이 흥미로우며 이에 서로의 세계로 참여하고 싶다. 앤과 헨리의 무대는 서로 다르다. 시각적으로 숏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청각은 단절되지 않고 양자를 이어낸다. 그렇게 두 연인은 서로의 세계에 침투하고 싶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오직 서로만을 열렬히 찬미한다. 기자들이 뭐라고 요구하든 이는 들리지 않는다.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들고 흥분시키는 연인을 줌인으로 집중한다. 헬멧을 써서 타인의 요구에 불응하고, 이윽고 모든 요구에서 벗어나 둘만 놓일 수 있는 자유로운 자연으로 향하여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원초적인 육체가 요구하는 서로를 향한 갈망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를 카락스는 은은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포착한다. 이렇듯 카락스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각 상황에 시의적절하게 맞물리는 연출로 가시화한다. 이에 따라서 연출은 줄곧 뒤바뀌며 통일성과 거리가 멀지만, 줄곧 기존의 규칙을 파괴하는 비통일성이 본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 통일성이 된다. 이는 <홀리 모터스>에서 드니 라방이 각 상황, 환경에 맞추거나 개인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대자적 삶을 예찬하던 정신을, <아네트>에서 연출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변용하는 대자적 연출인 것이다. 이후에도 카락스는 연출로 이들의 사랑을 널리 예찬한다. 적나라한 정사씬과 노래가 결합한 숏은 원초적인 애욕과 사랑의 고귀함, 황홀경을 더욱 배가하고, 또 서로가 빛이 되어 어둠을 뚫고 나가는 밤거리의 질주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이미지로 여실히 보여준다. 각자의 개성적인 목소리가 하나의 화음으로 조화된 것은 두 연인이 서로가 필요한 이유를 감각 그 자체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게 확신하고 예찬했던 사랑이 서서히 저물어가기 시작한다. 앤의 표현으론 결혼까지 했지만 오히려 헨리가 멀게 느껴지고 잘 모르겠다고 한다. 헨리 또한 앤과 함께 묶인 새로운 삶의 국면이 불안하여 서성거린다. 카락스는 헨리가 불안하여 잠을 청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모습을 스텝 프린팅으로 구현하며, 잔상만이 남아 불안하고 어색한 그의 심리도 가시화한다. 이후 영화는 서서히 차갑고 어두워진다. 그래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 서로는 큰 힘이 되었다. 아네트가 새로이 태어날 불안한 국면이라도, 결혼하여 이제는 서로가 금기가 아니요 가능해져 버려서 식어버린 신비로움이자 환상일지라도, 이들은 함께 몸을 뒤섞으며 여전히 즐거워했다. 또 앤이 출산하는 와중 고통을 느끼지 않게끔, 헨리는 옆에서 줄곧 농담을 계속했다. 그렇게 자신의 분신을 낳기 위한 희생과 고통이라는 진실, 그것을 버티고 긍정하는 웃음이 조화로우며 이들은 아네트라는 결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 분신을 갖는다는 일은 지금껏 나만을 위해왔던 행동들을, 이제는 분신을 축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임신과 출산을 아이가 어머니를 죽이며 태어나는 것이라 여겼다. 아이는 어머니가 가진 무수한 양분으로 자라났고, 어머니는 쇠약해졌으며, 심지어 어머니가 출산 도중 사망하며 한 아이는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돌봐주는 아버지를 쇠진시켜가며 성인으로 성장해가며, 그렇게 성장했을 때 그를 낳아준 부모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네트>에서도 이러한 부모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헨리는 자신을 쏙 빼닮은 광대 아기를 마주하기 두려워한다. 또 이전처럼 방종하고 저돌적으로 살았다간, 아네트를 해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추구하던 성미를 포기해야지만, 그렇게 자신을 죽여야지만 아네트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 또 결혼에 의해 서로는 상실되어간다. 결혼은 둘로 나뉘어 있던 연인을 하나로 결합해 준다. 두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연인을 곧 자신이라 모방한다. 서로는 닮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 내가 사라진다. 공연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가는 와중, 앤은 짧게 잠이 든다. 그리고 짧은 단잠 속에서 무의식이 현시하는 그녀의 불안이란 바로 그녀가 헨리의 폭력성에 잠식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헨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웃기고, 불쾌한 진실이라도 그것을 웃음으로 희석하는데 재능이 있던 희극인이지만, 앤과 닮아가는 헨리의 무대는 이윽고 비극으로 뒤바뀐다. 그의 시야에는 더 이상 그가 가야할 길이 펼쳐지지 않는다. 그의 길에는 앤의 오페라가 디졸브로 겹쳐진다. 이에 그는 삶을 버티는 웃음을 무대에서 보여주지 못한다. 무상한 삶, 사랑이 식어가는 연인들의 불편한 진실만이 자리해있다. 그래서 나를 되찾기 위해서 상대방을 분리해야 한다. 그는 그녀를 죽여야 한다. 그렇게 떼어내야만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극한의 자극이 동원된다. 그녀는 극심한 간지럼을 느끼다 질식한다. 두 연인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극한의 자극이 아니고서야, 더 이상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 정도로 서로는 권태로워졌고, 결합은 질식할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상대방이 아니다. 이에 그녀는 간지럼을 느끼지만, 그는 간지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아니다. 또 자신의 삶을 잃어버림에 욕구는 무상해졌다. 웃음으로 삶을 긍정하던 헨리, 하지만 앤의 비극과 겹쳐짐에 삶을 적대하기 시작한다. 현실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에 현실 속 관객들의 웃음이 아니라, 가상의 푸티지 웃음을 바라보며 농담한다. 그는 버틸 수 없다. 다름을 확인하며 서서히 서로는 멀어진다. 아이가 태어나서 그를 위해 희생하고, 또 연인의 얼굴이 곧 나의 얼굴에 새겨져 감에, 기존의 나는 병들고 죽어간다. 나를 되찾고 싶어 하는 헨리는 앤과 소통할 생각이 없다. 이기적인 그의 표상에 갇혀있을 뿐이다. 카락스의 작품들이 으레 그랬듯, 본 작품에서도 도드라지는 요소가 바로 '불통'이다. 헨리와 앤은 식어버린 애정을 회복하기 위해 요트를 빌려 바다로 휴가를 떠난다. 이윽고 거대한 폭풍이 몰아친다. 그리고 하나에서 둘로 분리되고자 한 연인이 돌풍을 맞닥뜨린 이후의 결심은 서로 판이하다. 헨리는 자신을 되찾고자 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삶, 제 명예와 인기를 복권하고자, 술에 취해 오직 제 욕망에 집중한다. 그에게 파도는 극도로 짜릿한 기존의 위반이다. 파도를 옆에 두고 앤과 왈츠를 출 수 있다면, 자신에게 식어버린 애욕의 회복이 가능하리. 또는 그녀를 자신처럼 추락시킨다면 자신이 곧 그녀의 기준이 되리, 또 그녀가 파도 속으로 휩쓸려가 사라져버린다면 그는 온전하게 회복할 수 있을 테니 그는 금기를 넘어서고자 한다. 하지만 앤의 마음은 다르다. 앤에게 보이는 것은 아네트, 자신은 붉은 머리칼을 물려주었고, 헨리의 거대한 귀, 얼굴의 흉터를 쏙 빼닮은 분신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녀에게서 폭풍은 아네트를 위협하는 거대한 시련, 헨리와 함께 맞서 이겨내어 다시금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과제다. 하지만 표상에 갇혀있는 서로는 각자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브로서 아담에게 지배되는 원죄를 가진 앤은 헨리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제 자신만을 위한 헨리의 불통에 앤은 그렇게 희생된다.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앤과 아네트라는 타자에게 이타심을 발휘했다면, 최소한 결혼의 의무로서 그들을 저 자신의 얼굴로 여겼더라면 이러한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으랴. 하지만 헨리에게 앤은 소통의 대상도 아니었고, 겹쳐진 얼굴도 아닌, 그저 집을 장식해놓은 소유물에 불과했다. 폭군의 귀가를 기다리는 두 모녀로서 말이다. 아네트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아네트는 구체관절인형처럼 묘사되지, 결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얼굴도 어색하고, 관절 마디마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아기는 필연적으로 태어나서는 ‘인형’이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그래서 부모에 의해 육신이, 관절 마디마디가 좌우되는 마리오네트다. 더욱이 자식은 부모의 타자임과 더불어 분신이다. 아네트에게 분신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머리칼, 이목구비 외에도 소프라노인 앤의 재능을 쏙 물려받았다. 또 ‘신의 유인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헨리처럼, 원숭이 인형을 들고 다닌다. 그래서 아기는 부모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독립적인 주체일 순 없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과를 물고 유혹에 빠짐으로써 헨리에게 지배당하게 된, 태어나면서부터 지게 된 원죄가 아네트를 붙잡는다. 아네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을 마주한 헨리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녀를 무대에 세운다. 헨리와 사랑이 식었을 때 앤과 욕망을 나눴던 한 지휘자는 앤의 분신으로서 아네트의 보컬을 위해 헌신하더라도, 주체적으로 무대에 서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아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착취라며 비난한다. 그의 말 따라 헨리는 순수하게 아네트를 무대에 세우지 않는다. 딸의 무대로 호의호식하고 자신의 욕망, 야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남편, 아버지에게 지배되는 원죄를 타고난 아네트는 여전히 인형이다. 언뜻 보기에는 날아오르며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비행이 아니라 헨리에 의해 연출된 연극이다. 딸의 해방은 아비에 의해 연출된 장치이리. 또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무수한 관객에게 사랑을 받지만, 거기에는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가 수반된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 아네트는 야유를 받는다. 아버지에 의해 무수한 사람에게 둘러싸인 아네트는 더더욱 인형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아이는 마냥 누군가의 분신이나,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명백하게 자유로운 타자여야 한다. 아네트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백한다. 헨리가 아네트와 지휘자를 살인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헨리의 품에서 벗어나자 아네트는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된다. 부모의 분신으로서 그들과 닮았지만, 그들에 의해 조종되는 분신은 아니다. 아무리 앤의 노래 실력을 타고났어도,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타자인 아네트의 권리다. 더욱이 자유로이 노래를 부르던 아네트의 입을 막게 된 것은, 또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마음은, 결국 헨리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노래 부르지 않는 아네트의 비극이란 곧 헨리가 자처한 것으로 그의 분신에 재현된 것이니. 더욱이 무대에 서서 불쾌한 진실을 고백하던 그의 재능은 아네트가 물려받는다. 아네트는 어둠이 가리고 있는 무언가를 밝혀내는 빛을 마주하며 노래하는 자, 곧 진실을 노래하는 자다. 이렇게 진실을 드러내는 부모의 재능을 아네트가 물려받아 그의 진실을 폭로한 것이니, 아버지는 분신의 재현을 거부해선 안 되리라. 이렇게 카락스는 <홀리 모터스>에 이어 다시 한번 사람의 일생을 스크린이란 무대에 펼쳐놓는다. 그것은 북미의 낙천적인 뮤지컬과 다른, 자크 드미의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정신과 필름 오페라 장르를 계승하며 이뤄진다. 여전히 그의 비언어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이미지라는 고유한 언어라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연출도 흥미롭다. 이러한 인생을 배역을 맡아 무대 위에 탄생한 이후, 줄곧 사과를 놓지 않는 앤의 모습을 통해, 아담과 이브 설화를 반성하고 뒤집으면서 포착한다. 남편의 야망에 의해 좌우되는 아내의 희생, 어머니의 원죄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죄를 이어받는 아네트의 비극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로 소통해야 하리라, 자유로운 우리의 관절과 입을 되찾아야 하리라. 영화의 말미에 비로소 서로를, 특히나 가장이 구성원들을 구속하던 신화는 청산되지만, 한편 영화 전체에 거쳐 자유는 내내 연출로 천명하고 있었으니, 여전히 카락스는 <홀리 모터스>에서 논하던, 능동적으로 자신을 변용하고 꿈꾸는 대자적 삶을 자유분방하고 비관습적인 연출로 예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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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28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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