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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5. 2021

모함마드 라술로프, <사탄은 없다>

사형의 순환

모함마드 라술로프(Mohammad Rasoulof), <사탄은 없다>(There Is No Evil) 

- 사형의 순환     

“지금까지는 지배 계급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금지되어 왔는데, 사실 이는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제는 자유롭고 진실로 자연스럽고 편견 없는 예술,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확신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법이 되고 있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자유로운 행위를 현실에 옮기기 전에 심사숙고하여 판단을 내린다. 그것이 과연 내게 그리고 네게 부적격하지 않은지, 그것이 도망칠 곳 없는 저 먼 구석에 내몰린 약자와 소수자들을 공격하지는 않는지, 비난이자 인신 모독의 표현이 비판이라는 가면을 쓰고 기만하는지를 깊게 숙고해야만 한다. 약자, 소수자를 공격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폭력의 본성이다. 나와 다른 것이 일으키는 불쾌감과 이질감을 소거해버리고픈, 또한 내 손아귀로 잡을 수 있는 약자를 짓밟고자 하는 욕구란 여전히 인류가 거세하지 못한 동물의 징후이리라. 이 같은 야만의 흔적을 일단 내뱉고 나서 책임진다는 것은 사실상 무책임한 일이다. 이에 누군가의 삶이 뒤바뀐다면 그 시계 초침을 어찌 되돌릴까. 또한 용서란 타인의 몫이니 우리는 결코 그 죄 사해지지 않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부적격함의 금기란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된다. 100년이 채 가시지 않은 파시즘과 나치의 광기는 독일에서 엄히 다뤄진다. 다시금 만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위협에 빠뜨릴만한 이념에 대한 제재는 익히 합당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의 탈을 쓰고 국가가 자유 그 자체를 억압해선 안 된다. 몇몇 국가는 무소불위의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실체를 까발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사회를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표현의 자유를 고깝게 여긴다. 사회에 경고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를 미리 살처분한다. 하지만 호기로운 세계 곳곳의 몇몇 예술가들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권력의 민낯을 신랄히 고발하여, 그 행위 자체로 자유의 존귀함을 천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21세기에도 그들에 대한 탄압은 지속됐다.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러시아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대표적으로, 이들은 국가에 의해 누명을 쓰거나, 자택 구금, 영화 촬영 금지 등을 부당하게 선고받았다. 이 같은 예술가들의 비극이 끊기길, 더 이상 이를 언급할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2020년에도 권력의 폭정이 지속되기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수면위로 끌어올려야만 한다.     


올해 70회를 맞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란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가 황금곰상을 수상했으나, 2015년 황금곰상을 수상한 동향감독인 자파르 파나히와 마찬가지로 시상대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란에서 리얼리즘을 선도하는 그를 정부가 결코 곱게 보지 않고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1972년 시라즈 태생의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본래에는 영화와 무관한 사회학을 전공하였지만, 이후 편집을 공부하며 영화로 전향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의 학력 덕분일까, 그의 작품에서는 이란 사회의 폐쇄성과 분리되지 않는 정치와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연출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데 감상자의 시간과 영화 속 시간을 동화시키는 롱테이크가 주를 이루고, 카메라도 보통은 고정되어 있고 기껏해야 패닝 정도에서 무빙은 그친다. 그가 포착하는 이란의 일상은 아쉬가르 파라디가 포착하는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파라디가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역동적으로 서스펜스를 추구하며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은 표피에 내재한 진실과 앎을 찾아 향해간다면, 라술로프는 수동적인 연출을 토대로 인물의 일상을 딱 떼다 놓은 것만 같은, 그저 흘러가는 일상을 포착하며 거기서 구조와 제도가 어떻게 삶에 개입하는지를 포착한다. 진실은 제도에 의해 입막음 되어 있는 듯, 암시적으로만 표출되지 결코 온당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스크린에 옮겨 담는 공간성은 대단히 딱딱하고 차가우며 삭막하다. 라술로프가 담아내는 이란의 색채는 매우 건조하여 흑백보다도 감각성이 무디다. 인물들 또한 이러한 풍경 속에 갇혀 버린 듯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이 같은 리얼리즘적 태도는 구금 이전에 자파르 파나히가 추구하던 색채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라술로프의 경우 훨씬 비관적이고, 또한 이란 영화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아이 영화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분명 현 상황을 타개하려 고군분투하지만, 그럼에도 높다란 제도에 가로막히는 무기력함과 체념은 일련의 희망을 포착하는 파나히와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라술로프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대신, 롱숏 내지는 풀숏을 필두로 한 멀찍한 거리감으로 사회를 냉엄히 진단하고 관조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또한 리얼리즘이 대두되긴 하지만 현 이란의 상황에 대한 일련의 알레고리나, 비가시적 영역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성도 사용되곤 한다. <철의 섬>에서 현실과 구분되지 않은 빈자들의 삶을 그저 멀찍하게 포착하여, 객관적인 태도로 감상자에게 현실을 전달한다. <이별>에서도 출국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인의 여정을 그저 차갑게 비추기만 할 뿐이다. 라술로프에게 카메라는 그저 비추는 도구일 뿐,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 카메라는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허구를 비출 수 있기에, 변화는 그렇게 매개된 현실을 바라보는 관객의 몫이다. 이에 라술로프의 영화는 허구로만 소비되지 않고, 이윽고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아성이 있다. 이란 당국이 경계하는 것이 바로 진실을 비추는 라술로프의 카메라다. 이렇게 현실을 비추는 라술로프의 카메라는 본 신작 <사탄은 없다>에서 이란의 어떤 치부를 들추어낼까. 일단 본 작품의 구성과 연출을 살펴보자. 본 작품은 총 네 개의 옴니버스 구성이다. 그리고 각각이 다른 연출을 띠고 있는데, 일단 첫 번째 에피소드는 사형집행관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헤쉬맛은 국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이, 그저 기계처럼 사형수들을 죽여야만 하는 수동적인 삶을 이어간다. 이에 따라서 영화의 연출도 매우 정적이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어 기껏해야 패닝이 운동감의 전부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으로서 그의 비밀은 에피소드의 말미에서야 겨우 드러나는데, 이에 따라 롱숏에서 클로즈업으로 점점 더 다가서는, 하지만 능동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음에 결코 친밀해질 수 없는 거리감이 특징이다. 또 그는 사형집행수로서 사형수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운송하는 자, 그리고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을 픽업하는 자다. 그래서 첫 번째 에피소드에선 운전사로서 헤쉬맛의 삶이 포착되며, 이에 따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에서처럼 차 안에서 대화가 주를 이루는 구성을 띤다.      


이후 두 번째 에피소드는 국가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초년병 푸야의 이야기를 다룬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헤쉬맛과 다르게 푸야는 보다 능동적으로 국가에 불복종하여 자신의 자유를 되찾고자 한다. 이에 따라 이전과 달리 영화의 카메라는 고정되거나 머물러있지 않고, 능동적으로 푸야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좇아간다. 또한 첫 번째 에피소드에 비한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영화가 다루는 시간이 비교적 짧은데, 이를 고스란히 롱테이크로 녹여낸다. 마치 푸야의 저항이 이란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듯이, 현실과 닮은 영화의 시간이 이란의 삶에 녹아내려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또한 푸야의 딜레마를 두고 다른 병사들의 무수한 의견이 격돌하는데, 이에 따라 각자의 세계가 숏으로 분절되고 나뉘는 짧은 리버스숏이 대두된다. 이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아내, 딸, 어머니의 요구에 자신을 맞춰주는, 이에 따라 그들의 세계로 녹아들며 숏이 분절되지 않았던 헤쉬맛을 포착한 카메라와 다르다. 이후 세 번째 에피소드는 사형 집행 이후 휴가를 나온 군인 자바트가 자신이 죽인 사형수의 비밀과 맞닥뜨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형의 비밀을 마주하기 전까지 자바트는 연인 나나와 목가적이고도 우아한 데이트를 즐겼는데, 이에 따라 영화의 색채는 이전과 달리 매우 풍성하고 부드럽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건조함, 침묵, 적막, 무기력함,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의 급박함, 치열함과 달리,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유유자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서 요동치는 자바트의 시선, 그리고 내면을 격렬한 핸드헬드와 급박한 트래킹으로 가시화하며, 이전의 평온한 삶에 머무를 수 없는 양심의 고발을 연출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에피소드는 라술로프의 자전적 삶이 투영된 이야기로, 그의 딸 바란 라술로프가 주인공 다르야를 연기한다. 감독이 이란에서 투쟁하는 것처럼, 본 작품의 아버지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아왔다. 이에 따라 아내와 딸을 자신의 형제와 함께 독일로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순적으로 가족과 멀어져야 하는 자신의 딜레마를 탐구한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아버지가 사형을 집행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와 유사하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연출도 운전, 그리고 차 안에서의 대화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국가가 요구한 살인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헤쉬맛의 수동성과 달리, 바흐람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요악으로 살인을 선택했다. 바흐람은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양봉'이라는 상징이 가리키는 ‘집’을 지키기 위해, 마찬가지로 ‘위협’을 상징하는 '여우'를 몸소 사살했다. 그래서 헤쉬맛의 수동적인 태도가 일상에서도 녹아들어 아내와 딸의 세계에 잠식되고 그는 타인과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숏으로 드러난 반면, 바흐람은 당시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며, 살생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다르야가 포착되는 숏에서 분리된다. 즉 첫 번째 에피소드와 네 번째 에피소드의 차이는 수동성과 능동성에 따른 숏의 분절 여부다. 이렇게 네 에피소드의 연출은 마치 그들의 각기 다른 삶을 반영하는 듯이 다르다. 하지만 사형이라는 사건, 그것을 허용하는 제도가 그들의 삶을 좌우하며 관통한다는 점에선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이들 각각은 유사한 삶이 비춰진다. 가장 먼저 수동성이다. 네 에피소드 중 가장 수동적인 인물은 바로 첫 번째 에피소드의 헤쉬맛이다. 퇴근 이후에 언제나 운전사인 그는 일이 끝난 아내, 그리고 하교하는 딸을 기다리고, 또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씻기고 식사를 준비해준다. 자신을 위한 능동적인 삶을 찾아보기 어렵다. 몸소 TV를 보는 것도 표정이나 감정이 없어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고, 이윽고 이웃이 부탁하여 새끼 고양이를 구출하러 나간다. 즉 그의 삶은 언제나 타인을 기다리고,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아내가 은행 업무를 보는 동안 거리에서 주차 시비가 붙어 불쾌해지고, 이후 아내와 언성이 높아지지만 다시 자신을 숙이고 침묵할 뿐,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이후 새벽에 그는 교도소에 출근하고, 이윽고 기계의 불빛이 요구하는 대로 사형을 집행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능동적인 판단도 선택도 없다. 그저 시키는 것을 묵묵히 따르고, 이에 따른 대가로 식료품이 든 자루를 들고 나올 뿐이다.      


이렇게 삶에 생기를 찾아볼 수 없고, 언제나 맹목적인 헤쉬맛'들'이 양성되는 과정, 수동성의 이유가 두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드러난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푸야는 헤쉬맛에 비한다면 민감하고도 예민한 감수성이 남아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해야만 한다. 이란의 남성이라면 징집되어 사형을 집행해야지만 휴가를 나올 수 있고, 이후 전역하면서 허가증, 여권 등을 돌려받기 때문이다. 즉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기본권이 박탈된다. 제도는 사형수와 사형집행인 모두의 삶을 볼모로 삼고 있다. 물론 자신이 사형을 맡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병사에게 적지 않은 돈을 쥐여주고, 자신은 사형을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사형이라는 제도 그 자체를 뒤바꾸는 것이 아닌 만큼, 사형수는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빈곤한 자들은 더더욱 생존을 위해 부자가 요구하는 살인을 거역할 수 없으리.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형의 대가로 휴가가 주어지고, 또 그렇게 군대에서 복무하는 대가로 자바트는 나나를 위한 반지를 구매했으랴. 목욕할 수 있는 삶, 나나와 안락한 오후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모두 사형수의 죽음을 딛고 있음에 가능하다. 제도는 사형을 대가로 임금을 지불한다. 이에 따라 사형집행관들은 생존을 위해 더더욱 사형을 거부할 수 없으랴. 그리고 제도에 의한, 감정을 배제한 수동성은 생존을 위해 반복되고 내면화되어, 헤쉬맛처럼 일상에서도 기계적이고 사물화된 삶으로 이어지리. 또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푸야는 사형수에게 어떤 죄목으로 여기 왔냐며 질문하는데 그는 답하지 않는다. 그는 마땅히 죄가 아닌 것을 수행했기에 어떤 죄목인지 모르는 것이거나, 또 죄가 없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사형이 선고된 이유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드러난다. 자바트가 사형을 집행한 키반이라는 사형수는 살인이나 강도, 밀매와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 정부에 ‘불복종’한 정치범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렇게 정치 세력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면 사형이 선고되나,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도 이를 거부할 수 없고, 오히려 사형을 집행하는 대가로 임금이 지급되고 생존이 보장되니 이를 섣불리 거역할 수 없다. 시린이 '군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바트에게 질문하는데, 그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제도에 의한 수동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다르야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만수르를 따라 의사가 되어가는, 즉 부모 자식 간에 자연스레 닮아가는 수동성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바흐람이 친부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처형했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그를 거부하는 다르야의 태도를 고찰한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죽였다면, 딸은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라술로프는 자신의 딸에게 이전 세대가 필요악으로써 선택한 것들을 굳이 수동적으로 답습하지 말라고 말한다. 여우를 죽이는 것, 그리고 제도에 의해 부모와 자식이 생이별해야 하는 운명을 반복해선 안 된다. 자식이 이를 수동적으로 답습하지 않게끔 바흐람은 자신이 죄를 짊어진 것이니, 라술로프의 목표는 제도에 의한 수동성을 타개하는 것이랴. 라술로프는 이에 따른 능동적인 삶의 가능성을 엿본다. 이는 주로 여성들이 지니고 있다. 본 작품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군 복무의 여부다. 복무 이후 수동성이 내면화된 헤쉬맛이나 자바트는 저항할 줄 모른다. 헤쉬맛의 수동성은 옆에서 자신의 하루를 얘기하는 아내, 그리고 자신에게 약속을 지키라며 요구사항을 재잘거리는 딸과 더욱 대비된다. 그리고 네 번째 에피소드의 다르야는 다른 생명을 처형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며, 제도가 개인에게 사형하라고 요구하는 수동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굴하지 않는다. 이러한 여성들의 삶이 비친 이후에 남성들의 삶은 조금 달라진다. 헤쉬맛은 생계를 위해 사형을 집행하러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출근하는 도중 도로에서 잠시 멈춰 선다. 비가 내려서 시야가 흐리다. 하지만 그의 마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사형수들을 죽이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헤쉬맛의 마음은 모호하거나 오히려 후자에 쏠려있지 않을까. 그는 망설인다, 그것이 헤쉬맛의 마음이다. 딸이 자신에게 피자를 요구하는 것, 아내의 진솔한 불평불만이 '나'로 사는 것을 환기했을까. 물론 제도 내의 헤쉬맛은 집행하러 가는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제도에 물들지 않은 여성이 개혁의 불씨가 되는 것은 확실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는 더욱 강화된다. 푸야는 아직까진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으로 양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2막의 제목처럼 그녀는 푸야에게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제도에 저항하는 것, 이에 따라 나의 감수성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거부다. 제도가 좌우하는 발걸음, 수갑을 채우는 행위를 거절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아직 제도에 물들지 않은 젊은 청년들 또한 변혁의 불씨가 될 수 있으니, 순응하고 순종적으로 보이며 푸야의 말을 반대하던 한 군인이 마음을 고쳐먹고 그에게 쪽지를 건네준다. 그 쪽지가 바로 탈출할 방법이 적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도에 반하는 능동성을 잃어선 안 되리라. 세 번째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사형 집행을 요구하는 제도는 사형수가 어떤 죄목인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형수의 가족과 여성 나나, 쉬린은 그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제도에 의해 진실은 수동적으로 왜곡되고 은닉된다. 하지만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을 능동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감성과 양심도 제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죄책감과 아픔을 느껴야만 한다. 자바트가 자신이 죽인 키반의 진실을 마주하고, 자신도 자살하고 싶은 것처럼, 달콤했던 삶에서 도망치고 하는 것처럼, 떨리는 눈과 요동치는 양심이란 능동성을 거부해선 안 되리라. 이렇게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시선과 의지는 빛이다. 어둠 속에 가려있던 키반이란 사형수의 실재, 진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선처럼 본 작품의 주된 연출이 바로 빛과 어둠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 이전부터 빛과 어둠은 극을 관통하고 있었다. 일단 첫 번째 에피소드는 지하주차장에서 시작됐다.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데 롱숏으로 포착되어 보이는 것을 확신하기가 어렵다. 특히 헤쉬맛이 트렁크에 싣는 ‘자루’는 영화 내내 은닉되듯 비춰져 무엇이 들었는지 감상자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윽고 음지에 다름 아닌 지하주차장에서 양지로 나온다. 물론 여전히 그의 삶은 밝지 않다. 이윽고 양지에서 일상을 누리다 헤쉬맛은 다시 어둠으로 향한다. 교도소로 향한다, 서서히 불이 켜지고 헤쉬맛이 놓여 있는 공간은 밝다.      


이윽고 그가 버튼을 누른다, 사형이 집행된다, 어두운 음지에 놓인 주검에서는 체액이 뚝뚝 떨어지고 최후의 움직임으로 하반신이 파르르 떨린다. 사형수들은 어둠으로 사라지지만, 헤쉬만은 그 어둠에 빚을 진 자루를 들고 빛으로 나와 양지에서의 삶을 누린다. 라술로프는 이란에서 빛, 양지에서의 삶이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고발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시작, 병사들은 자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불을 끄고 어둠이 흡사 이불처럼 그들의 육신을 덮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푸야는 이에 순응하기 싫다. 자꾸 불을 켠다. 제도가 바라는 어둠에 불을 켜는 것은 저항이다. 또 제도가 유일하게 허락하는 빛은 바로 사형 집행이다. 그렇기에 푸야는 어둠으로 숨어든다. 사형 집행과 복무를 감시하는 빛으로부터 재빠르게 어둠으로 숨어들고, 탈출 이후에도 빛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간다. 그렇게 빛이 자신을 감시하지 않는 공간으로 숨길 수밖에 없지만, 병사들의 '빛'을 끌 것을 요구하는 제도로부터 자신의 빛은 지킬 수 있으리.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형수의 진실을 밝히는 빛의 작용을 고찰하지만, 이와 더불어 무고한 정치범의 죽음을 두고 과연 따스하고도 화사한 자연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를 질문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반지를 교환하며 결혼을 약속하고, 열애와 춤의 낭만을 누리는 야만으로부터, 우리는 그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무겁고도 자욱한 구름 아래로, 그리고 밤으로 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라술로프는 답한다. 누군가의 죽음과 어둠을 대가로 빛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그 빛, 마땅히 내려놓아야 하리.마지막으로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빛은 화사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푸야처럼 네 번째 에피소드의 바흐람 일가는 도시를 떠나 외곽에서 제도에 구애되지 않은 삶, 자신의 선택에 떳떳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 삶이 떳떳한 이유는 아내의 형제를 둘이나 학살한 살인마를 처형하여 제 가족을 지켰다는 행위에 부끄럼 없으므로, 바흐람의 곁에 의사가 있는 것처럼 그 행위는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다수를 구원하고 살리는 행위였기에 말이다. 다만 누군가를 죽였기에 그 대가로 현재 그는 병에 걸려 죽어가지만, 그 죗값도 부정하지 않고 달게 받는다. 사형의 대가로 삶을 누리는 앞선 에피소드의 집행관들과 다르다. 사형을 치룬 대가는 무거운 죗값이어야 한다.      


그래서 바흐람의 주변에는 언제나 빛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지금껏 다르야에게 숨겨왔지만 이제는 진실을 떳떳하게 밝힘에, 그렇게 타인과 이후의 세대에게 부끄럼 없음에, 도처에 빛은 가득하다. 라술로프가 바라는 빛이 가득한 세계가 바로 네 번째 세계가 아니겠는가. 최소한 자신은 빛이 잘 들지 않는 음지에 유폐할지언정, 그 대가로 후대에는 수동적인 삶과 어둠으로 얼룩진 삶 대신, 떳떳한 빛과 능동적 진실을 안겨주고 싶지 않겠는가. 네 개의 다른 옴니버스, 그것은 라술로프의 다채로운 표현으로 각 장의 개성이 확립되고 구획되며 고유함을 부여받는다. 이는 라술로프가 이란 당국에 저항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연출에서는 각기 다른 네 작품, 하지만 사형이라는 제도를 두고 네 개의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삶은 서로가 과거, 현재, 미래가 되며 공통되고 순환을 이룬다. 이러한 획일화를 거부하는 다채로운 표현으로 우리는 항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제목처럼 처음부터 사탄은 없다, 사탄이 되고자 한 이들은 없다. 다만 제도는 시민들에게 사형에 처하는 사탄, 사형을 내리는 사탄이 되기를 강요하니, 사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화에서 비춰지지 않는,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영악한 제도이랴. 한편 이에 순응하지 않는 자신의 딸이 연기한 다르야를 목도하며 라술로프는 미래에 희망을 품는다. 다만 첫 번째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비한다면, 세 번째, 네 번째 에피소드의 긴장감은 다소 덜하고 늘어지는 감도 없지 않아서 각 장에 편차가 있다. 더욱이 라술로프는 탁월한 사회학자에 가까웠지 키아로스타미나 파나히처럼 타고난 이야기꾼은 그간 아니었기에, 다채로운 연출을 입증하기야 하지만 살짝 어설프고 서투르며 상투적인 느낌을 피할 순 없다. 그러나 이러한 편차에도 불구하고 사형의 메커니즘을 절묘하게 통찰한 그의 매서운 시선과 당국의 압제를 뚫고 자유를 사수하려는 투철한 의지와 정신만큼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강인한 힘이 숭고하고도 매혹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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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105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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