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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8. 2021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 <어 캅 무비>

재현과 진실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Alonso Ruizpalacios), <어 캅 무비>(A Cop Movie) 

- 재현과 진실       

“너희들은 인물들을 연기하지 않았고 스스로가 그 인물들 자체였다.” -페터 한트케-

여기 일상 속의 내가 있다. 스스로 가장 익숙하고 보편적이며 편하다고 여기는 나의 모습, 이후 나는 무대에 오른다. 나는 익숙한 양식으로서 나를 포기하고, 연극을 위한 배역을 연기한다. 무대에 오르기 전의 나는 그저 관찰자, 관객이었다면, 이후의 나는 배역이 된다. 그렇다면 관객으로서의 나와 배우 및 배역으로서의 나는 과연 다른 것인가. 배역에게 요구하는 대사, 행동 양식을 일련 체화하거나 표현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역에 몰입한다 해도, 그 시선은 배역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배역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역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배역에 대한 해석은 곧 나의 관점에 따른, 나의 주관적 결과물이다. 즉 아무리 배역을 연기한다고 해도 '나'는 '나'다. 이러한 나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낯선 배역을 연기하기도 하지만,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며 익숙한 양식을 연기하기도 하며, 이렇게 이미 연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배우다. 또 애초에 연극과 현실의 차원이 엄격히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무대와 비무대의 경계는 과연 어떻게 분리되는가. 연극의 시공간과 관객의 시공간은 나뉠 수 있는가? 이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에서 쓰인 구절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이 같은 흐릿한 경계의 탐구가 이뤄진 바 있다. 이란의 전설적인 시네아스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관심이 집대성된 후기작인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배역과 실재의 관계, 원본과 복제품의 분간하기 어려운 관계가 탐색 되었다. 과연 배역을 연기하는 감정은, 배역의 감정일까, 나의 감정일까. 그것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진실과 허구라고 구분하고 싶지만, 사실은 엄격히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나에 깊이 흡착되어 있는 개념을 탐구하는 작품들, 이들을 언급한 이유는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의 신작 또한 이 같은 탐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8년 멕시코시티 태생의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는 2014년 <구에로스>로 장편 데뷔한 멕시코의 신예 감독이다. 그는 단순히 최근 데뷔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청년 감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청년 감독으로서 그는 줄곧 청년들의 심리를 탐구한다. 데뷔작 <구에로스>나 근작 <박물관 도적단>에서 주인공 청년들의 내면과 심리로 파고든다. 전자에서는 기성에 불만을 가득 품어 반항하는 자, 파업을 일으키는 자, 빈곤하여 전기나 물건을 빌려다 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후자에서는 가부장제 내에서 위압적인 아버지에게 억눌려 용변 실수를 하는 등 변변치 않은, 아직 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청년의 군상이 펼쳐진다. 그래서 이들은 변화를 꿈꾼다. <구에로스>에서의 변화는 파업과 시위이고, <박물관 도적단>에서는 약탈이다. 특히 후자에서의 기성은 단순히 부자 관계에만 얽매어있지 않고, 서구와 중남미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식민지 시절 서구의 눈으로 규정되고, 약탈당한 유물과 기성에 의해서 평가되는 청년의 처지는 서로 일맥상통하며, 그들은 이 같은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다. 한편 이러한 반동은 언제나 기성에 대한 반발로 작용하기 때문에, <구에로스> 같은 경우에는 정확한 비전,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은, 치기 어린 반항심 정도에서 그치기도 한다. <박물관 도적단>에서도 강도행각은 붙잡혀 미래는 제한된다. 여하튼 기성이 일궈놓은 길에서 줄곧 이탈하고 반항하기에, 루이즈팔라시오스의 작품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길을 개척하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띤다. <구에로스>의 경우 영화의 시작은 한 어머니가 갓난아이와 함께 정신없이 외출준비를 하는 장면이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즉흥적으로 물풍선을 떨어뜨린 토마스로 영화의 주체가 뒤바뀌고, 이후에도 우발적인 이탈, 만남에 의해 영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박물관 도적단>에서도 마찬가지로 박물관에서 탈출하여 서구의 규정에서 벗어난 유물이 무수한 다의성을 지니듯, 영화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편 청년들의 이 같은 행동의 기저에는 인정욕구가 깔려있다. <구에로스>에서 파업을 이끄는 아나는 어머니가 그리우며, <박물관 도적단>에서 윌리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서 절도를 저지른다. 즉 루이즈팔라시오스는 단언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 혼란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끄는 인물들을 그려내지만, 이들의 마음 한편에는 인정받고 안착하고 싶은 욕구가 자리해있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구에로스>처럼 사진이 찍히는 프리즈 프레임으로 멈추게 된달지, <박물관 도적단>처럼 체포되어 여정이 종료된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줄곧 부유하고 움직이는 유동적인 연출과 전개가 루이즈팔라시오스의 특징이다. 특히 숏을 상황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분절하고, 또 한 대상의 파편을 조각내어 이를 다시 조립하는 편집이 루이즈알라시오스의 장기 중 하나다.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에서 반복되는 비통일성이 오히려 통일성을 이루는 그의 연출, 그리고 고정되고 단일한 경계, 규정을 뛰어넘는 그의 탐구가 신작 <어 캅 무비>에서도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의 도입부부터 살펴보자. 감독은 지역 경찰 시 짓기 대회에서 우승한 다니엘 알라토레라는 경장의 시구를 삽입하며 작품을 시작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금씩 가까워질 사이렌의 노래, 오늘 밤 내가 저 노래의 주인공이 아니길 기도하네.” 사이렌을 소재로 삼은 시를 삽입한 것과 더불어, 영화의 도입부도 사이렌의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고 경찰차의 경광등이 번쩍거리며, 어둠을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밝히는 사이렌의 역할을 강조한다. 일단 사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에서 유래되었다. 신화에서 사이렌의 실체는 위협적인 괴물이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꾀어내어 배를 침몰시키고, 이후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사이렌의 매혹은 거짓이요, 그 이면에는 위험이라는 진실이 내재해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렌에 기원을 둔 현대의 사이렌은 유혹의 의미가 아닌, 그것의 실체인 위협이란 진실을 경고하기 위한 용도로 뒤바뀐다. 동시대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은 아름답거나 매혹적이지 않다. 시끄럽고 을씨년스러운 흉흉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비판하는 멕시코의 세태 중 하나는 경찰차의 경광등과 사이렌이 매혹적으로 뒤바뀐 상황이다.     


영화의 주인공 테레사가 현장에 나간다. 이윽고 시민에게 물러서라고 경고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사이렌과 경광등이 울려 퍼지는 경찰차를 향해 다가온다.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오히려 멈춰 서거나 도망쳐야 하지만, 그들은 사이렌 주위로 다가온다. 오히려 사이렌은 과거의 신화 속 사이렌으로 뒤바뀌어 버린 듯, 시민들은 사이렌에게 매혹된다. 그것은 멕시코가 위협이 만연해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절망 속에서 사이렌이 차라리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를 보여준다. 한 산모가 출산이 임박하여 진통을 앓고 있지만, 구급차는 도착하지 않는다. 여성 경찰인 테레사가 산파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시민들이 공공으로부터 방치된 현장에서 사이렌이 울려 퍼진다는 것은 매혹되기에 충분하다. 한편 이와 더불어 경찰들이 사이렌을 신화 속 사이렌처럼 악용한다. 본 작품은 경찰 내부의 만연한 부패, 관료주의를 꼬집는 작품이다. 이들은 사이렌을 일부러 켠다. 사이렌을 켜야지만 경찰이 시민에게 법을 집행하며 뇌물을 뜯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그래서 사이렌은 진실을 경고하지도 않고, 진실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본 작품은 경찰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나, 그렇게 탐구한 경찰들은 진실에 다가서지 않고 있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지는 뇌물로 무마되고, 또 하급 경찰들 머리위에 자리하고 있는 상부의 사이렌이 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이렌은 철저히 '거짓의 매혹'으로만 작용하지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설령 사이렌이 위협이란 진실을 경고한다 한들, 영화는 아이가 문을 닫는 장면,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는 카메라를 통해, 정의와 진실로부터 차단되거나 너무나도 멀리 있는, 무기력한 경찰의 현실을 가시화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사이렌의 의미가 변질된 경찰 조직을 사명감 넘치는 테레사와 몬토야는 떠난다. 더더욱 회생의 여지는 희박하다. 그리고 사이렌 없이는 경찰이 무시당하는 환경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 테레사를 향해 남성 행인들이 비웃음처럼 보이는 인사를 건넨다. 또 나무 보호를 위해 경계선이 쳐져 있는 구역을 두고 몬토야는 시민들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사이렌 없는 경찰을 시민들은 가볍게 여긴다.      


그래서 경찰은 제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사이렌을 켜야 하지만, 사이렌을 켤 만한 상황이면 경찰조차도 안전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테레사의 아버지는 사이렌을 켠 상황에서 용의자에게 총알을 맞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람들을 매혹하는 경찰이기 위해서 그들은 사이렌에 노출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영화의 후반부 몬토냐처럼 경찰은 헐벗고 있는 형국이다. 그들은 만연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사이렌을 켜야 하지만, 시구처럼 사이렌이 닥쳐오지 않길 바라는 경찰의 딜레마, 영화는 이를 루이즈팔라시오스의 감각적인 연출로 승화한다. 일단 본 작품의 차원은 매우 복잡하다. 모큐멘터리, 픽션, 다큐멘터리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차원에 따라서 연출을 변화시키며, 형식으로 각 차원을 가시화한다. 일단 영화의 1장부터 3장까지는 모큐멘터리와 픽션이 혼재되어 있다. 감독은 모큐멘터리를 구성할 때, 현실을 최대한 따라 하는 연출을 선보인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도 포착되듯 본 작품에선 현실의 시간, 현실 속 경찰의 발걸음을 뒤따라가는 롱테이크가 활용된다. 감상자는 흡사 그들이 앉아 있는 운전석, 조수석에 함께 하듯, 그들의 시간을 간접 체험한다. 영화의 카메라도 그렇다. 현실이 아닌 영화임을 우선시하는 카메라라면 기교적일 수 있고, 또 예측할 수 없는 현실과 달리 정해진 각본대로 미리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그리고 현실을 따라 하는 모큐멘터리 차원에서 영화의 카메라는 수동적이다. 수동적으로 차에 우두커니 놓여 그들을 따라가는 듯이, 카메라가 현실에 봉사하는 듯 말이다. 이후 테레사가 차에서 내려서 현장으로 성큼성큼, 또 급박하게 다가서는 과정에서는 핸드헬드가 사용디며, 현실의 격렬하고도 불안한 발걸음을 상기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냥 현실임을 표방하지 않는다. 현실 속 시간을 보존하려는 영화의 의지는 무수한 현실의 시간이 겹쳐지고 중첩되는 디졸브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겹침으로 구현된다. 또 시각적으로 숏은 공간에 따라서 분절된다. 하지만 테레사나 몬토야의 나레이션, 즉 청각은 이어지며 잘리지 않는 시간을 구현하려 하지만, 공간을 초월하여 시간이 이어지리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루이즈팔라시오스는 이를 매우 탐미적으로 구현하는데, 이에 현실의 시간과 허구적인 연출·매체가 서로 공존한다. 이윽고 영화는 픽션이 중간중간 삽입된다. 일례로 테레사가 길가에서 행인을 의심하거나, 추적하는 장면을 긴장감을 유도하는 줌인, 리드미컬한 트래킹 등 스릴러 장르의 문법으로 보여준다. 또 테레사가 과거로 향해 경찰에 재직하던 아버지를 회고하는 장면은 절대 다큐멘터리일 수 없다. 이는 현재에 재구성된 과거란 픽션이다. 이러한 장면들에서는 더더욱 탐미적으로 영화의 연출이 변모하지만, 장르적이고 허구적으로 보이는 연출은 다루는 대상의 현실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감독의 논지를 설파한다. 스릴러 장르의 문법은 경찰 테레사와 범인 사이에서 촉발되는 긴장감, 의심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또 그들을 좇는 급박한 현실에서 운동감은 비롯되어야 한다. 그래서 허구적인 형식, 현실로부터 잘 다듬어진 연출임이 너무나 눈에 띄지만, 온당 허상은 아니다. 본 작품이 마냥 허구가 아닌 이유는 모큐멘터리, 픽션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곧 현실, 그들은 현실과 다큐멘터리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4장에서 1장부터 3장의 촬영 과정이 노출되고, 또 본 작품 제작을 위해서 배우들이 실제로 101일간 경찰학교에 가서 교육받은 사실이 밝혀진다. 배역과 배우는 쉽게 분리되지 않으며, 영화의 곳곳에선 바로 그 현실이 묻어난다. 경찰학교는 원주민 비율이 높다.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원주민들은 경찰이 분명 위험한 직업임을 알지만, 그런데도 돈을 벌기 위해서 경찰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율을 영화 속 경찰집단의 인종구성을 통해 구현한다. 뇌물이 만연한 것도 경찰의 사명보다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임이 우선인 지원 동기에서 비롯하리. 또 테레사와 몬토야가 수업을 받아보길, 101일간의 수업으론 방대한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는 이를 반영하듯, 범인을 추격하는 시퀀스에 등장하는 경찰의 움직임은 완전무결하지 않고 다소 어설프다. 실제 경찰들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시민들이 많다고 언급하는 것도 모큐멘터리와 픽션의 에피소드로 반영된다.      


다만 영화는 마냥 현실에 종속되지 않는다. 실제 몬토야는 원주민이다. 하지만 픽션과 모큐멘터리의 몬토야는 백인으로 뒤바뀐다. 원주민이기에 겪었던 몬토야의 에피소드는 사라진다. 하지만 몬토야가 백인으로 뒤바뀜에 따라서, 원주민들보다 당파적인 이득을 보기 쉬운 인종적 이점, 그리고 멕시코 내 백인의 지위라는 다른 사실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경찰을 꿈꾸지 않았던 배우의 진실이 연기되는 몬토야의 무기력함으로 드러나지만, 그런데도 경찰이 되어가며 몬토야와 백인 경찰을 연기하는 그들의 진실이 함께 드러난다. 즉 창작자가 다루고자 하는 바에 따라서 현실은 변형될 수 있다. 그렇게 허구가 되어 가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가리키지 않는다. 루이즈팔라시오스는 다양한 진실을 가리키기 위해 몬토야에 변형을 가한다. 영화는 이러한 다큐멘터리가 중심이 된 4장을 배우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자신을 직접 촬영한 푸티지로 구성한다. 그래서 2.35:1의 화면비와 배우들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좁다랗고 긴 화면비로 각 차원은 구분된다. 옆으로 광활하고 널따란 2.35:1의 화면비는 좌우는 덜 잘릴지언정, 피사체의 위아래는 촬영하는 감독에 의해 잘려 나간다. 더욱이 타인이 촬영하고 있기에 현실 속 실재가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잘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휴대폰으로 자신이 직접 촬영한 영상은, 스스로 자신의 현실 중 잘려 나가도 무방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더욱이 촬영되기를 원치 않는 현실 속 가정폭력의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듯, 현실은 주체가 노출이나 은닉을 몸소 선택한다. 하지만 후자 또한 세로로 길쭉한 화면비이기에 옆이 잘려 나간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가. 더욱이 어찌 됐든 현실이 잘려 나간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일련 기록하되, 현실 그 자체일 수 없다. 픽션과 모큐멘터리의 촬영이 중단되어 영화의 ‘이면’인 현실이 드러나면서 양 차원은 구분되었다. 그리고 현실은 그 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면 잘라내어 드러나지 못한 이면, 포착하지 못한 이면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영화는 2.35:1의 화면비로도 다큐멘터리를 구성한다.      


이렇게 화면비를 모방하듯, 영화의 각 차원은 서로서로 따라 한다. 마냥 모큐멘터리와 픽션만이, 현실과 다큐멘터리를 따라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방'이 본 작품에서 경찰의 현실을 드러내는 주된 화두다. 테레사의 아침 일상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 보글보글 계란을 삶는 청각과 그 이후 이어진 손빨래 하며 강판에 옷을 빡빡 문지르는 장면의 소리는 쉬이 구분되지 않는다. 시각은 확연히 다르지만, 청각은 양자가 구분되지 않고 혼재된다. 또 본 장면 이후에는 절도범의 도둑질과 이를 마주하는 부패한 경찰이 별다르지 않다는 테레사의 진술이 이어진다. 더욱이 테레사가 아버지를 따라서 경찰을 선택했다는 사실, 몬토야 또한 형제를 따라 경찰이 되었다는 ‘모방’이 밝혀진다. 특히나 테레사는 정의로운 경찰을 바랐지만, 아버지처럼 다소 권위적이기도 하고 뇌물을 거절하지 않는 모습을 답습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또 몬토야가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뭐 하러 선크림을 바르냐며 자기 생각대로 동료에게 핀잔을 주지만, 이윽고 함께 선크림을 바르고 있다. 이들은 경찰인 가족, 이후 경찰이 되면 동료의 행동을 ‘따라’ 한다. 하지만 따라하는 모델이 모범이 되지 못한다. 특히나 그들이 모방을 거부할 수 없는 국회의원과 고위 경찰들은 더욱 방종하고 부패했다. 그들은 경찰의 본분을 모방하지 않고, 멕시코에 만연한 범법자를 모방한다. 부하들은 따라 하지 않는다면 불이익이 따른다. 이에 사명을 가진 테레사와 몬토야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악덕을 모방하며 맹목적으로 닮아가는 장면들은 있지만, 경찰과 범법자가 구분되는 장면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정의에 사명을 가져야 할 경찰조직은 관료화되어 특별한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는 타 직종과 별 다를 바 없다. 이에 급박하게 인력이 동원되어야 할 현장에 책임 있는 손길은 영영 지연된다. 또 시민들은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경찰을 마구 따라 하지만, 경찰은 그들을 제지할 수 없다. 시민들은 경찰처럼 법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테레사와 몬토야는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입 모양을 따라 하는 부부다. 지부에 가서도 몬토야는 테레사를 은밀하게 어루만진다. 몬토야의 업무 중 퀴어 퍼레이드가 포착되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 전반을 지배하는 무의식, 그 무의식을 좌우하는 사적인 본능을 공적 영역에서도 모방한다.      


하지만 그렇게 거부하기 어려운 사적인 부부의 삶을 누리더라도, 바깥에 용의자가 눈에 띄면 곧바로 부부로서 자신을 분리하고, 경찰로서의 자신을 재현한다. 하지만 경찰이 경찰을 모방하지 않고 피해자와 범법자를 재현하는 좌절, 그것이 감독이 포착하는 멕시코의 절망적인 실태다. 경찰이 범법자를 모방하게끔 방조하는 허술하고도 열악한 구조가 이를 재생산한다. 이에 경찰이고자 하는 자는 경찰일 수 없고, 경찰이어선 안 되는 자들이 경찰조직에 남으며, 부패의 모방은 가속화된다. 이렇게 루이즈팔라시오스는 다층적인 차원이 혼재된 신작을 선보인다. 감상자들은 본 작품의 현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차게 되리라. 하지만 과연 그것이 중요할까. 앞서 언급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라는 작품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을 논한다. 작품에선 영화 촬영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새빨간 꽃을 집에서 가져왔다. 이윽고 촬영이 끝나 꽃을 집으로 다시 가져가야 하지만, 죄다 똑같은 꽃들이라서 구분하기 어렵다. 꽃을 집에 가져가려는 한 소년은 ‘우리 집 꽃은 아주 빨간 꽃’이라 말하지만, 모든 꽃들이 빨갛다. 이윽고 빨간 꽃 한 개를 들고 돌아가지만, 과연 그 꽃이 내 꽃인지, 이웃의 꽃인지는 구분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 구분이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꽃이 빨갰다는 ‘진실’, 어떤 꽃을 쥐든 그 진실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쉬이 분간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던 키아로스타미는, 중요한 것은 어떤 매체든 진실을 담아야 함을 천명한다. 그리고 루이즈팔라시오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탐미적이기도 하고 때때로는 건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매혹적인 표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배역과 배우의 진실을 다각도에서 담고 표현한다는 것, 사이렌이 가로막는 모방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것이다. 이에 허상이 아닌 현실을 가리키며 경고하랴, 모방해야 한다면 매혹적인 형식에 모방할만한 것을 담아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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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108 집에서(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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