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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31. 2021

2021 Top 8

*나열 순서는 감상 및 개봉 순.


1. 피트 닥터, <소울>, 1.20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 스스로가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분명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다. 또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시금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감각할 때'이다. 느낀다는 것은 오직 산자의 특권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베이컨의 회화 세계를 비평하는 『감각의 논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느끼는, 또 회화가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을 논증하였다. 감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대상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바탕으로 ‘내 몸’의 진동을 느끼는 것이다. 감각은 세상에 있는 것,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또 비결정적이고도 우발적인 사건, 자르거나 덧붙이거나 투사할 때, 우리는 더욱 격렬한 감정을 느낀다. 특히 우발적인 '돌발 흔적' 그것은 하나의 죽음 위기다. 이에 의해 우리의 육체는 일그러지지만, 그런데도 돌발의 힘을 느끼는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감각은 이렇게 삶을 환기한다. 그리고 본 작품 <소울>에서 예찬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감각을 누리는 삶’이다. 조가 재즈 연주를 하며 그 선율이 귀를 관통해 온몸을 전율케 할 때, 그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조의 몸에 깃든 22번이 멘토링 단계에서 전혀 느끼지 못한 오감의 우발적 사건들을 민감하게 경험하며 즉흥적으로 몸에 파장을 느낄 때, 비로소 왜 탄생해야 하는지, 왜 삶을 유지해야 하는지를 자각한다. 조와 22번은 이러한 살아있는 즐거움을 미래에도 기약하고자 삶에 애착을 느낀다. 감각은 영혼 시절에 배우거나 익히 예상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예상한 것들과 육체가 어긋남을 겪는 22번의 기묘한 감각, 나의 기대를 뛰어넘는 외부의 어루만짐과 자극에 의한 신선한 즐거움, 그들은 새로움을 틔울 수 있는 '불꽃'의 가능성을 간절히 붙잡는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굳어질 때가 있다. 내 감각의 주인이 자신이 아닐 때, 어떤 목적, 사명을 추구하는 이성에 의해 감성이 도구적으로 희생될 때, 이에 자유가 억압당할 때가 그렇다. 물론 내가 상정한 사명을 추구하기 위한 희생은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삶이란 궁극 목표 내지는 운명, 사명만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하길,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의지’란, 그리스 신화 속 절대 채워지지 않는 '에리식톤의 입'과 같다. 궁극적 목표, 사명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이에 의해 규정되거나 결정,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공허하다. 사명을 이뤘는데도 조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조는 이러한 사명을 추구하며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과정이, 이에 따라 무언가를 바라고 채워내며 변화하고, 의지의 여지가 남아있을 때 행복했다. 쇼펜하우어는 소원이 충족되고 또 다른 소원으로 재빨리 이행할 수 있는 것을 행복으로 본다. 그것이 늦는다면 곧 조가 겪는 '고뇌'로 귀결되고, 소원도 충족도 없는 삶은 곧 영화 속 길 잃은 영혼들의 정체와 권태, '김빠진 동경'과 우울로 치닫는다. 영화 속 ‘이러한 경험으로 탄생한다.’라고 증명하는 출입증의 여러 개의 배지는, 하나의 불꽃을 충족한 이후에도 다른 불꽃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우친 행복이라 할 수 있으랴. 하나의 사명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은 곧 길 잃은 영혼처럼 굳어버려, 다른 의지와 목표로 나아갈 수 없으라. 그래서 우리는 꿈과 그날그날 스스로의 육신이 요구하는 다채로운 소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성취하고 또다시 갈망하는 행복을 바란다. 그 행복을 여전히 기약하고 상정할 수 있음에 조와 22번은 삶을 놓고 싶지 않다. 애틋하고 간절한 삶이란 나의 육신이 미래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랴. 이렇게 감각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삶의 가능성, 그리고 자유의 행복에 대해 말하는 본 작품은, 이를 예찬하는 감각적인 연출과 감독의 사색이 황홀한 조화를 이뤄, 올해 삶에 관해 마주한 작품 중 가장 아름답고도 경이로우며 숭고하게 느껴진 작품이었다.      


2.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아이카> 3.26

21세기에 가장 주목받는 리얼리즘 양식으론 동유럽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루마니아 뉴웨이브와 서유럽의 다르덴 형제가 보여주는 체험에 가까운 리얼리즘, 그리고 레이가다스, 페레다, 피네이로 등의 중남미 감독들이 보여주는 리얼리즘이 있다. 이 중 중남미 감독들의 리얼리즘은 특정한 로컬성, 정치성에 천착하기보단, 일상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짙기에, 정치적인 삶을 비추는 리얼리즘에 있어선 보통 루마니아 뉴웨이브와 다르덴 형제의 양식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 그 중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크리스티안 문쥬 같은 경우에는 체험의 효과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관찰자’적인 경향이 짙다. 이러한 루마니아 뉴웨이브 양식은 사회주의를 겪은 동구권 국가에서 나타나곤 하는데, 이들보다 롱테이크는 덜하지만 연출이나 태도에서 유사했던 작품으로 세르비아의 슬로단 고르보비치가 연출한 <아버지의 길>, 코소보의 블레타 바스홀리가 연출한 <하이브>를 올해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경우 인물의 그림자가 되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으며 생생히 체험하는 효과를 추구한다. 이러한 다르덴 스타일의 리얼리즘 작품도 올해 다수 감상할 수 있었는데 동향의 신예 감독 루카스 돈트의 <걸>에서부터, 본 양식을 빌려와 쿠르드의 생생함을 비추는 페릿 카라한의 <보호자>, 정치적인 그리스 영화를 보여주는 게오르기스 그리고라키스의 <디거>가 그랬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고, 올해 가장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작품은 바로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의 <아이카>였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그는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다르덴 형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다큐멘터리에서 비롯된 양식으로서 실제를 반영하는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즐겨 사용하는 것이지,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현실에 밀접한 태도를 띠는 것인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그저 우리 인식이 기대하는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생한 현실을 매개한다. 부르주아지 및 서구의 감상자들이 상상조차 못 할 중앙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처절한 삶은 충격의 연속이었으며, 드보르체보이는 단순히 파격적이고 자극적으로 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닌,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기인한 경험을 바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악순환을 상세하게 비춘다. 그것은 돈이 어머니와 아이의 삶 모든 것을 규정하는, 출산 직후에도 인간이 발걸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발걸음을 좌우하는, 자본주의에 의한 동시대의 차갑고도 살벌한 민낯이다. 또한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로써 보통 축약되고 은폐되는 출산과 그 이후의 진실을 마찬가지로 적나라하게 비춘다. 그래서 미디어에서 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묘사되는, 이에 형성되는 보편적 여성의 몸을 넘어서, 실제 출산 이후 통제 불가능한 여성의 몸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를 통해 감상자에게 불쾌감, 당혹감, 낯섦을 안기지만, 이는 단순히 영화의 자극성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한계와 맞닥뜨린 고통에 상응하며, 본 과정을 통해 되레 인식의 확장을 불러오리라. 이렇게 사포질이 되어있지 않은 이미지를 통해 우리 인식의 한계를 시험하는 적나라한 충격이 연속되는 작품이니만큼, 지금껏 보지 못한 이미지들 그 자체가 흥미로운 영화기도 했다. 묘한 하이앵글로 포착되어 위축되고 주눅 들어 보이는 아이카, 그간의 예술에서 포착된 신성하고 경건한 신생아의 이미지와 달리, 타인에 의해 이끌려가 비관적인 사물의 운명이 담긴 묘한 신생아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진화심리학에 의한다면 인간은 어린 존재들을 볼 때 맹목적으로 기분 좋아한다. 하지만 이러한 본원적 감성을 뒤트는 자본주의의 무게, 부담감, 억눌리고 위축된 듯한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 또 닭이라는 한 생물이 인간을 위해 평생 알을 낳다가 생의 최후까지 모조리 착취당하는, 닭 털 뽑히는 장면의 적나라함과 어미의 젖을 빠는 닥스훈트의 오묘하고도 기괴한 표정 등 그간의 통념을 배반하는 이미지의 감각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임과 더불어, 그간 마주하지 못한 이미지의 충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올해 가장 강렬한 작품이었다.      


3. 니콜라스 페레다, <파우나> 4.29

올해도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많은 영화제들이 온라인 병행을 했다. 현장에서 영화제 분위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영화제를 제외하면 국내에 상영 기회가 드물 작품들을 스크린으로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온라인으로 여유롭게 일정을 조율하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행복이었기에, 코로나 펜데믹이 끝나도 온·오프라인 병행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여하튼 작년처럼 올해도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우 대다수 작품을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주국제영화제의 몇몇 화제작들의 화두는 상상이었다. <친구들과 이방인들>이라는 작품은 얼어붙은 듯한, 흡사 신인상주의 화가 쇠라의 회화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차갑게 물질만 남은 듯한 분위기, 그것은 곧 작품 속 상대의 내면을 모른다는 것, 단지 아는 것은 물질인 육체요 정신은 모른다는 무지에 미장센은 기인하리. 그에 따른 익숙함과 낯섦, 상상과 믿음의 착각을 탐구한 영화였다. 또 <모든 곳에, 가득한 빛>에서는 인간의 시지각과 기억의 불완전함에 따른 의식을 탐구한 다큐멘터리였다. 과연 우리는 상대방과 보는 것이 같을까, 또 진정 객관적인 대상을 보는 것일까, 거기에는 상상이 첨가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상상이라는 테마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파우나>라는 작품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수확이었다. 우루과이의 문호 마리오 레브레로의 『파우나』를 느슨하게 옮겨오는 니콜라스 페레다의 <파우나>는 일단 <친구들과 이방인들>에서 '말은 잡히지 않고, 손으로 하는 것은 확실하게 잡힌다.'는 대사처럼, 말에 반영되는 허구성과 상상, 그리고 손에 반영되는 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다. 영화 속 말은 상상과 기대를 내뱉지만, 이내 곧 현실에 부합하지 않아 이내 곧 대기 중으로 흩날려 사라져간다. 이러한 말을 실종시키는 현실은 나의 바람을 배반하고,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하나, 그것 자체로 내 손에 잡힌다. 이러한 현실을 나의 상상으로 대체하려는 독단적 태도와 상상을 기대하던 인물이 현실을 맞닥뜨리며 반성하는 태도를 고찰하는데, 이를 날 것의 현실과 상응하는 아주 건조한 연출로 담아낸다.     


이러한 본 작품에서의 자신이 상상하고 기대한 허구를 현실 속 실재를 희생 시켜 대체하려는 독단적 태도, 그리고 『파우나』가 재연된 2막이 영화 속 현실의 차원과 서서히 겹쳐지는 구성을 두고, 한 북미권 평론가는 멕시코 마약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물론 본 극에서 마약은 주인공 파코가 연기하는 <나르코스>를 통해서만 언급되는 수준이기에, 주된 소재는 아니다. 그래서 그 평론가는 자신의 멕시코에 대한 앎과 기대를 <파우나>에 투영한 것이랴. 그리고 이러한 평론가의 해석은 본 작품과 잘 맞닿아있는데, <모든 곳에, 가득한 빛>을 인용하자면 ‘인간 시지각은 필연적으로 사각지대가 발생하여, 거기에 뇌가 상상한 것과 그럴듯한 것을 채워 넣는다.’ 이에 우리 감정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해석 또한 마찬가지이랴. 페레다는 현실에 충실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아무리 충실해도 감독이 보는 것과 객관적 현실에는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이 사각지대에 감독이 채워 넣는 것을 바탕으로 현실과 다른 감독만의 영화가 탄생한다. 페레다가 마주하는 『파우나』도, 극 중에서 가비노가 『파우나』를 해석하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아는 것을 '보는' 만큼, 『파우나』 그 자체와 그들이 보는 『파우나』는 다르다. 이에 페레다가 마주한 『파우나』와 가비노가 자신을 투영하는 『파우나』가 다르고, 이에 『파우나』는 그것 자체가 아니고 나의 주관성을 투영한 『파우나』가 된다. 이렇게 페레다나 가비노의 주관성이 반영된 <파우나>를 두고 우리 또한 각자의 멕시코, 페레다, 배우들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내가 반영된 <파우나>를 창출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상상한 것과 우발, 즉흥, 불완전으로 가득한 현실과의 관계를 적절한 양식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주관적이고 거짓말인 우리의 감각과 감상, 해석을 영화의 형식 그 자체로 탐구한 점이 올해 가장 흥미롭고 독창적이었던 작품이다.      


4. 잔프란코 로시, <야상곡> 5.23

올해는 다큐멘터리를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꽤 훌륭한 작품들은 챙겨볼 수 있는 해였다. 작년 못 챙겨봤던 <시티 홀>은 ‘역시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좋았다. 물론 당시 보스턴의 시장 마티 월시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고, 특히나 그 장면들이 매스컴에 송출됨을 '의식'하는 장면이기에 다소 당파적일 여지가 있다는 것이 아쉬웠을 뿐, 대상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포착하는 수동적인 카메라, 이를 주관적으로 이어내는 영화의 필연적인 편집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잔프란코로시의 <야상곡> 또한 그런 카메라의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오히려 본 작품은 감상하기 전 우려가 있었다. 지나치게 정치적인 작품들이 소재에 매몰되어, 예술 고유의 형식이나 감각, 작가 고유의 개성과 탐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으레 있듯, 선호하는 감독이긴 했지만 중동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할 때부터 정치에 지나치게 우려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일단 잔프란코로시의 카메라는 반성한다. 유럽은 아프리카나 중동의 분쟁에 대해 크나큰 책임이 있다. 그들의 시선과 편의대로, 이에 따라 주관적으로 그어버린 각국의 경계선은 현 분쟁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으니, 그들은 이들에게 객관적으로 접근하며 반성할 필요가 있다. 로시의 카메라가 그렇다. 전작들에서도 렌즈에 파리가 붙여도 이를 통제하지 않으며, 현실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포착하고자 하던 로시는 감독의 개입 없는 생생한 현실을 카메라로 포착한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흐느낌, 아버지가 부재한 아이들, 자유와 감각 없이 굳어버린 일상, 반인륜적인 아동 고문의 기억 등을 말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포착하되, 어떤 구도와 프레임에 담기느냐에 따라서 더욱 풍성해지는 행위와 대상의 의미, 감각의 결을 고찰한다. 로시는 편집 이전, 대상을 포착하는 프레이밍으로 자신의 사유를 가시화한다. 처음부터 관객의 눈을 잡아끄는 연병장을 도는 군인들의 모습이 그렇다. 한 부대가 원형 운동장을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프레임 바깥으로 그들은 사라져가고, 이윽고 다른 부대가 프레임 안으로 침투해온다. 이후 이어지는 숏은 군인이었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이다. 이에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군인들이 곧 포착할 수 없는 죽음으로 다가서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프레임 안으로 군인들이 들어오고 그렇게 양성되며 야만은 순환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로시가 구도와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중동의 비관적인 현재이자 미래이랴.     


그리고 하나의 숏은 어떤 숏의 앞/뒤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더욱 풍성해진다. 남성 군인들이 운동장을 돌고, 이후 자식 잃은 어머니들이 나타나고, 또 아버지를 잃어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된 소년과 남겨진 가족들이 이어지기에, 단순히 비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로시가 객관적인 촬영으로 포착한 것 중에서, 각별히 선별·취합하여 이어내는 것들, 또 대비하는 것들로 전쟁의 감각을 전달한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단단하고 딱딱하여 폭력을 방어할 수 있는 반면, 진정 지켜져야 할 연약한 인류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휘날리는 천막에 내밀한 피부가 노출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전쟁은 무엇을 위하는가, 로시는 이를 서로 대비되는 감각성을 이어내며 보여준다. 이동수단들이 영화에서 줄곧 반복된다. 하지만 그 이동수단들은 주체적으로 목적지로 향하는가, 아니면 전쟁에 의해 이미 목적지가 결정되어 있는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후자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도 편집으로 반복된다. 하지만 자유롭게 선택하여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시를, 적군을, 선전물을 국가가 바라보길 강제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문명을 분리하여 언어를 만들고 스스로를 보호하며, 자연의 야만성을 거세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화 속 대비되는 자연은 오히려 생명을 피우고 있지만, 문명은 말, 대화,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이렇게 로시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극복되지 못한 인간의 야만성을, 이로 인한 비극을 포착한다. 어떤 대상을 기록한다는 것은, 나를 내려두고 객관적인 그 대상에게 몰입해야 하는 일이다. 개입하지 않는 감독, 조심스러운 카메라는 객관적인 대상에 접근하는 기록의 의미를 환기하며, 그렇게 구성된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의 본령이 과연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하지만 그렇게 객관적으로 포착하더라도, 대상을 선택하는 주관성, 기록된 바를 자르고 붙이고 이어내는 편집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렇게 묻어나는 주관성을 숨기지 않되, 중동의 현실과 전쟁의 실정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주관성을 승화하려는 의지, 올해 객관과 주관의 조화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5. 라니 나데르 메소라&주앙 살라비자, <더 데드 앤드 더 아더스> 7.3

6.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친애하는 동지들!> 9.28

2010년대까지는 한번 영화제를 놓치면 스크린 감상 기회는 물론이거니와, 영영 사이버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작품들이 수두룩했었다. 하지만 전 세계인의 삶을 뒤바꿔놓은 코로나 펜데믹은 우리의 영화문화도 끝끝내 바꿔놓았다. 영화제는 축소 개최하거나, 온라인 병행을 하였다. 또 시대에 발맞추어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두되어 영화제에서 며칠 동안, 하루에 3~4 작품씩 광적으로 봐야만 하는, 감상의 패러다임도 뒤바꿨다. MUBI나 HULU 등 국내에 정식 서비스되지는 않지만, 우회하여 접할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향후에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 서비스를 통해 작년에 놓친 작품들을 무수히 감상했다. <배드 테일즈>, <말름크로그> 등, 2010년대였다면 영화제 소개 이후, 만날 수도 없을 작품들을 집에서 안락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로나 펜데믹이 종식된 이후에도 OTT 스트리밍 서비스의 약진이 이어진다면 과연 내게 영화제가 예전만큼이나 중요한 행사일까,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여하간 OTT 스트리밍 서비스 덕분에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놓칠 뻔한 작품들을 다수 관람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되었지만, 개인적 사정과 코로나에 대한 우려로 놓친 <친애하는 동지들!>을 챙길 수 있었다. 또 국내 영화제 중 어느 곳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놓치면 후회했을 법한 걸작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더 데드 앤드 더 아더스>다.     


올해 하반기에 우리는 중남미 영화들을 뜻하지 않게 많이 만날 수 있었다. 2010년대에 중남미 작가주의 영화에 인기가 시들했다면, 2020년대 들어 국내 영화계, 수입사에서 중남미 영화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에 여전히 이름만 뒤바뀐 채로 지속되는 제국주의에 의해 중남미의 거주자들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 정체성의 박탈을 탐구한 클레버 멘도자 필로의 <바쿠라우>를 만날 수 있었고, 특정 민족에 대한 보편성이나 대표성을 띠지 않은 생생하게 개별적인 후기 식민주의 영화 <자마>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본 영화들에서 강조되는 경향 중 하나가 기록과 당대의 재현인데, 이러한 중남미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가장 매혹적으로 승화된 작품이 바로 <더 데드 앤드 더 아더스>다. <더 데드 앤드 더 아더스>는 <자마>처럼 지나간 것을 복권하지도 않고, <바쿠라우>처럼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지하지도 않는다. 철저히 현재를 비추는 작품이다. 한때 권세를 떨쳤지만, 백인의 침략으로 현재에는 설 자리를 잃고, 과거에 서 있었던 크라호족의 '빈자리'만을 여실히 비춘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크라호족의 역사를 노인의 입을 빌려, 현재 기록할 수 있는 것만 청각으로 기록할 뿐이다. 그리고 백인의 삶, 도시의 삶에 줄곧 이끌리며, 고유한 전통과 문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크라호족의 현 주소를 솔직하게 비춘다. 이러한 본 작품은 비전문 배우들의 생생한 일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적인 숏과 가족의 상실로부터 성장을 도모하는 감독의 주관적 서사가 서로 절충되며,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오묘한 픽션으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픽션을 구현하면서 크라호족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구현한 마술적 리얼리즘이 흥미롭다. 외에도 크라호족의 사상에서 신적인 존재로 불리는 앵무새의 위엄을 특별히 가공하여 창조하지 않고, 앵무새의 눈 부분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하는 촬영 등, 그간 접해보지 못한 생경한 이미지가 올해 가장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더욱이 16mm 필름을 이용하여 비춰낸 크라호족이 사는 거주지의 색채와 풍광이 대단히 황홀했던 만큼, 올해 마주한 작품 중 촬영이 가장 절륜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놓쳐서 너무 아쉬웠던 작품들이 몇 있었다. <그르바비차> 이후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던 야스밀라 즈바니치가 비로소 그 작품에 필적하거나 뛰어넘었다고 평할 수 있을, 기념비적인 블록 포스터 <쿠오바디스, 아이다>가 그중 하나였다. 본 작품은 운 좋게 개봉하여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스크린에서 보지는 못한, 다만 OTT 스트리밍으로 찾아서 본 작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친애하는 동지들!>로 작년 기대했던 작품 중 기대에 부응한, 오히려 이를 뛰어넘은 노장의 매혹적인 걸작이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처럼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던 구소련, 현 러시아의 시네아스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여든이 훌쩍 지나간 작금에는 탐미적이면서도 현실에 충실한 픽션을 여럿 만들고 있다. <파라다이스>에서 그에게 처음 매혹되었고, 본 작품도 마찬가지로 그의 세계에 홀딱 반해버렸다. 빛과 어둠의 뛰어난 활용, 그것이 거짓과 진실을 비추는 방식, 20세기의 절반 동안 영화를 찍어온 감독이기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우아함과 고전미, 그리고 시베리아나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해 영화를 촬영하던 실력은 녹슬지 않아, 한 악인이 비로소 참회하고 회개하는 숭고하고도 창대한 풍경을 너무도 황홀하게 포착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소련 시기에도 국가로부터 검열당해 상영 금지를 당하더라도, 언제나 실제 인민의 삶을 여실히 비추던 콘찰로프스키는 1962년에 발생한 노보체르카스크 사건을 영화화하며, 진실을 은닉하는 공산당과 사회주의의 진실로부터 멀어져 부르주아와 닮아가는 공산당원의 삶을 고스란히 비춘다. 탐욕과 부패, 국가를 위한 삶으로부터, 비로소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을 회복하는 공산당원의 참회는 언제나 자유로운 삶,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인민들의 의지를 포착하던 콘찰로프스키의 초상들을 집대성한다. 그리고 1980년대에 20세기 초중반의 시베리아를 소환하며 당대의 소련과 시베리아의 악순환을 비추던 그의 역작 <시베리에이드>처럼, 콘찰로프스키는 <친애하는 동지들!>을 통해 동시대의 러시아를 관통하고, 여전히 진실을 통찰하는 그의 눈에 빚지지 않는다. 노장의 그윽한 고전미는 추상표현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선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처럼 망각된 우아함과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고, 여전히 날카로운 거장의 통찰력이 올해 빛났던 작품, 바로 <친애하는 동지들!>이었다.      


7. 켈리 레이카트, <퍼스트 카우> 10.16

서부극의 리듬감은 대체로 매우 급박하다. 빠른 리듬감과 짧게 컷하는 숏을 통해 피가 끓어오르는 급박한 긴장감을 구축한다. 이러한 서부 시대를 동시대에 옮겨오는 작품들의 리듬감도 대체로 빠른 편이다. 자크 오디아르의 <시스터스 브라더스>도 그랬고, 제인 캠피온의 <파워 오브 도그>도 마냥 느리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서부 시대는 빨라야만 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황금과 강을 찾아야만 했다. 서로는 살인까지도 불사하는 경쟁자다. 그리고 이러한 끓어오르는 경쟁을 긍정함과 더불어, 서부 개척 당시 희생된 원주민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그간 서부극에 짙었다. 이에 20세기 중반부터 작금까지는 수정주의 서부극이 대두되곤 하는데, 켈리 레이카트의 신작 <퍼스트 카우>는 느린 리듬감으로 빨라야만 했던 개척 시대를 반성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탐욕이라는 목적만을 보고 달려가던 서부 시대는, 곧 서사라는 목적을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유형의 영화와도 같다. 다른 곁가지를 바라볼 여유도 없다. 하지만 레이카트는 곁가지를 살핀다. 빠르게 잘라내도 될 행위들의 처음과 끝을 면밀히 포착하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단역들의 얼굴, 반응, 태도까지 세심하게 비춘다. 한 원주민 소녀가 물을 떠서 불안하게 걸어가는 모습, 백인의 집에서 일하는 원주민이 밤에 잠시나마 유희를 즐기는 모습 등, 무목적 한 숏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퍼스트 카우>는 분명 『하프 라이프』라는 소설 원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느슨하다. 다양한 가치를 둘러봐야 한다는 듯이, <퍼스트 카우>는 서사만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는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 배경이 포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포착한다. 레이카트의 작품 중 첫 번째로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된 본 작품은 자본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히려 거대 자본이어서 가능한 다양한 얼굴, 풍경, 구도를 풍요롭게 활용한다. 이렇게 서사와 무관한 무목적 한 대상들의 '시각'에 주목하기에 본 작품은 회화적으로 느껴진다. 더욱이 회화는 사진처럼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지 않고, 대상을 식별하는 특징, 구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통찰하여 ‘재현’하기 때문에, 재현이 아니라면 얻지 못했을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유작 <24 프레임>은 그간 감독이 찍었던 사진의 앞과 뒤에 움직임을 부여하여, 하나의 이미지에 연관된 본질을 회복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인 회화, 사진에 움직임이 부여되지만, 특정한 이야기를 하지 않음에 서사는 사실상 부재하거나 느슨하다. 관객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관조할 뿐, 이야기를 생각하진 않는다. <24 프레임>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본 작품도 이러한 맥락에서 회화적이기 때문이다. 레이카트가 중심인물, 서사에서 벗어나 비추는 대상들은 이렇게 순수한 시각성만이 드러난다. 또 평범하게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그 대상과 섬세하게 관계 맺어 길어낸 요소를, 1.33:1 화면비의 가장 적절한 구도에 배치하여 재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하게 '회화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외부에 구애받지 않고 대상 자체에만 집중하는 우정의 참뜻일지 모른다. 서사나 탐욕이라는 목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되면 필연적으로 희생이 뒤따른다. 하지만 어떠한 목적도 대가도 이유도 없이, 상대를 그저 지긋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우정이어야 한다. 쿠키는 킹 루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를 구조했고, 킹 루 또한 위험에 처할 위기에도 쿠키를 위해 느린 걸음을 맞춰준다. 또 백인들의 목적에 의해 바깥으로 내몰린 원주민이지만, 그런데도 다친 백인인 쿠키를 무목적 하게 도와준다. 다만 필연적인 타인의 떠나감, 그리고 돈에 의한 이별 등 인간의 관계란 우정 외부의 것, 이념, 구조 등이 침투하며 필연적으로 균열이 발생한다. 그러나 레이카트는 그럼에도 지켜야 할 최후의 우정을 역설한다. 이렇게 레이카트의 우정, 관계에 대한 지론을 서부로 옮겨온 본 작품은 빠른 서부 시대를 '느린 리듬'으로 반성하고, 또 개척이라는 목적만 바라보던 당대에 다른 가치를 바라보는, 형식으로 접근한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점이 흥미로웠다. 형식뿐만 아니라 레이카트가 그간 지속해온 우정이라는 관점이 서부 시대에 보존되고, 더욱이 대상을 무목적하고도 고요하게 관조하는 순수한 회화성으로 이를 강화하는 형식이 매혹적인, 역대 가장 훌륭한 수정주의 서부극 중 하나였다.      


8. 미셸 프랑코, <뉴 오더> 11.11

감독의 이전 작품이 실망스러웠을 경우, 차기작이 나왔음에도 자연스레 기대감을 내려놓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내겐 미셸 프랑코가 그랬다. <애프터 루시아>와 <크로닉>에서 원쇼트원씬을 필두로 한 개개인의 단절, 고립, 침묵을 담아낸 특유의 작가적 색채는 분명 흥미로웠으나, <에이프릴의 딸>은 소재의 파격·자극성에만 천착한 채, 그 이상의 것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의 신작 <뉴 오더>도 기대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본 작품은 내가 충분히 기대하고 봤더라도, 이에 부응했을 법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프랑코는 자신이 지금껏 비추지 않은 시간인 미래, 그리고 상세하게 파고들어 가지 않은 소재인 계급을 비추며, 이에 따른 연출의 변화를 택한다. 그의 연출은 보다 역동적으로 변모하고,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잦아진 숏의 분절, 잘림을 통해 부르주아의 위선과 프롤레타리아와의 단절을 가시화한다. 숏과 숏으로 나뉘는 그들 사이에서는, 부르주아가 노동계층에게 나름의 연민을 지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을 냉대하는 냉혹함을 편집의 이중성으로 고발한다. 또 굳게 닫힌 대문처럼 한번 잘려서 닫히면 다시 이어질 수 없는, 숏과 숏에 의해 분리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세계는 매우 대조적이다. 더욱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서도 나타나는 계층 간 복식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계급 갈등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는데, 영화가 다루는 디스토피아의 원흉이 된 분노를 충실하고도 적절하게 가시화했다. 그간 멕시코 영화에서 20세기를 대표한 시네아스트 루이스 부뉴엘의 경향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프랑코는 20세기에서부터 지금까지 극복되지 않은 계층 갈등을 본 작품의 화두로 삼으며 부뉴엘을 불러온다.     


이렇게 프랑코가 결혼식에서 보여주는 부르주아 비판이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를 연상케 하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면, 이에 따라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폭동에 참여한 프롤레타리아 비판은 우려되는 미래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프롤레타리아의 광기는 현재 존재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예측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길어온 초상이다. 영화 속 곳곳은 미래이긴 하지만, 그것은 반복되어온 역사로서 과거를 재현한다. 극심해진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부르주아가 가진 것을 약탈하려는 시위대의 태도는 흡사 러시아 내전, 사회주의 혁명을 연상케 하고, 그들에 의해 붙잡혀 수용소에 갇힌 마리안 이외의 백인, 상류층들은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은 약자였으나, 그들 또한 광기를 띠어 충분히 악인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진영논리에 빠져 고립된 상태에서 발생하고 범람하는 폭력, 불만과 분노 외의 정신성이나 도그마 없이 혼란으로 치닫는 반란의 한계를 우려한다. 과거에도 물질에만 치중하거나, 진영논리에만 빠지면, 이분법으로 치환할 수 없는 무수한 개별의 사례들을 짓밟아 혁명은 실패하고, 오히려 퇴보의 역사를 걸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봉기가 발생한 초반에 프랑코의 연출은 능동적으로 변화하였지만, 영화가 진척되며 '뉴 오더'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자 다시금 연출은 이전 작들의 정적이고 수동적인 연출로, 즉 과거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본 작품은 부뉴엘의 시선을 길어오며, 과거의 유산이 곧 현재를 명석하게 바라볼 수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반복될 수 있는 미래를 우려하며, 이를 솔직하고도 과감한 연출로 그려 넣는다. 그 과감함은 마찬가지로 올해 끓어오르는 감각을 보여준 <레 미제라블>이나 <티탄>과 같은 작품 중에서 가장 뜨거웠으며, 데일 것만 같은 불쾌함, 역겨움을 우려 및 경고하는 바에 적절히 표현한다. 더욱이 소재에만 천착하지 않고, 그의 연출 경향과 편집을 극의 내용과 적절히 맞물리게 해, 형식으로 대상을 승화한다. 날카로운 탐구 정신을 연출로 승화하고자 하는 미학적 탐구가 올해 가장 번뜩였던 작품이 바로 <뉴 오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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