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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31. 2021

우베르토 파솔리니, <노웨어 스페셜>

이별과 만남

우베르토 파솔리니(Uberto Pasolini), <노웨어 스페셜>(Nowhere Special) 

- 이별과 만남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라, 노년은 날이 저물어 감에 열 내고 몸부림쳐야 한다. 빛이 꺼져 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딜런 토마스-

암흑 물질만 가득 차있는, 거대한 검은 캔버스에 다름 닌 우주에, 별들이 하나둘씩 총총 박히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로부터 서서히 무언가가 탄생하고 있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또 빛나다, 그 반짝임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별은 다시 암흑으로 되돌아간다. 아무리 찬란해도 그 빛은 부질없으랴, 하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다. 그렇게 폭발한 별의 잔해는 이윽고 다른 생명이 잉태할 수 있는 별 가루로 먼 우주를 널리 유랑하고, 그러한 별 가루에 누군가의 어두운 밤은 아침으로 깨어난다. 우리는 필연적인 죽음을 인지하고 살아간다. 다만 최후를 맞이하는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제게 주어진 온 생을 충분히 누리고 가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타인들보다 주어진 생이 짧기도 하고, 또 그 삶을 전부 누리고 가지 못하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충실하게 반짝여야만 하고, 또 필연적으로 죽을 우리가 남겨놓은 분신에게 나의 반짝임을, 별 가루를 기억되게 만들어야 하리. 그리고 아이는 부모의 분신임과 동시에 명백하게 타자다. 그 타자임을 분명하게 인지한다면, 분신이 마냥 나처럼 반짝여야 한다는 강박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 더욱이 그 분신이 온 일생에 거쳐 부모를 닮을 수도 없는 노릇, 특히나 부모가 제게 주어진 생을 충실히 누리지 못한다면, 다른 방식의 반짝임을 구현하고 떠나야 하리. 그렇게 책임을 이행해야 하리. 2021년의 끝자락에 주목해야 할 마지막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우베르토 파솔리니의 <노웨어 스페셜>이 바로 이러한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아직 반짝이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버지 존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1957년 로마 태생의 우베르토 파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영화 제작자이자, 현재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 <스틸 라이프>가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다. 흡사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연상케 하는 건조한 연출, 로이 앤더슨을 연상케 하고 영국의 기후와도 닮아있는 희멀건 색채가 특징이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연출 하에서 파솔리니는 죽음을 탐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죽음이란 <스틸 라이프>의 고정된 카메라처럼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그 사람만이 죽는 것이 아니라, 망자가 사용하고 공유하던 사물도 멈추게 되고,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기억도 정지된다. 죽음이란 망자가 일평생 베고 자던 베개의 눌린 자국이 다시 회복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추는 것, 그렇게 변형되고 떠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삶은 '다시' 할 수 있는 것이다. 해고되더라도, 이번 기차를 놓치더라도, 살아있는 메이는 돌아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이렇게 삶이란 영화의 패닝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망자에 의해 더욱 생생히 각인된다. 망자는 스스로를 소멸 시켜 자신의 마지막 행사인 장례식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모이게 만든다. 장례식에 의해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못하던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확인되고 장례식을 토대로 누군가의 뇌리에 기억된다. 이 같은 기억이 파솔리니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다. 고립사한 사람들의 최후를 정리하는 공무원 메이는 유일하게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기억은 망자가 사용하던 사물에 묻어있다. 인간이 사용하는 사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에 의해 깎이다 만 사과처럼, 고양이의 발자국처럼, 편지에 정성스레 묻은 잉크처럼, 그들의 삶이 기억되어 있다. 메이는 망자가 살아서 누비던 공간에서 기억과 행위를 일련 반복하며, 그렇게 망자는 메이를 통해 소환되며 간접적으로 살게 된다. 메이가 따라 하는 망자의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더욱이 그러한 과정에서 LP, CD 등이 메이의 귀를 간지럽히고, 핫초코와 파이, 생선구이는 혀와 코를 감미롭게 자극하니, 이러한 기억 속에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확인한다.     


그리고 기억은 전염되어야 한다. 메이 혼자 망자를 기억할 수 없다. 영화의 후반에선 그조차도 우연히 사망하니, 인간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보다 많은 사람이 망자의 기억을 공유하며 그 삶을 기리고 유의미한 것을 길어내야 하리. 그리고 이러한 전염 속에서 인연은 망자를 바라보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메이를 만나고 바라보는 시선으로 확장되어, 그의 삶과 장례식 또한 유의미하게 빛나게 되리. 이러한 파솔리니는 동시대의 자본주의에 의해, 인간보다 자본이 우선시되는 세태를 비판한다. 누군가의 최후를 기리는 일이 돈 낭비로 치부되며 효율과 비효율로 평가되는, 자본만이 남고 사람이 사라진 세상을 말이다. 이 같은 파솔리니의 연출은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흡사 정물화를 연상케 하는 구도가 인상적인데, 그의 탐구와 연출은 과연 <노웨어 스페셜>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그는 이어짐보다는 변주를 택한다. <스틸 라이프>를 보고 기대했을 법한 탐미적이고 정교한 구도와 배치는 매우 드물다. 즈비그뉴 프라이즈너를 연상케 하는 서정적인 배경음악이 유일한 심미성에 가깝다. 하지만 섬세한 태도는 여전하여 파솔리니는 정교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영화는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흔들리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여기에 롱테이크가 결합하여, 현실 속 인간의 시야와 시간에 상응하는 전형적인 리얼리즘 문법을 구축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흔들리는 핸드헬드는 존의 계급이나 죽음에 상응하는 양식일 수도 있다. 파솔리니는 다소 열악한 영국 내 노동계층의 삶과 입양을 보내기 위한 제도적 절차를 생생하게 포착하며 마이클 리, 특히 켄 로치가 일궈낸 영국 작가주의 영화의 사회파적인 계보를 이어간다. 이 같은 노동계층의 삶을 가시화하기에 핸드헬드는 적절하다. 마찬가지로 노동계층 여성의 삶을 주로 포착하는 안드레아 아놀드 또한 핸드헬드를 선호하지 않았었나. 이와 동시에 본 작품은 죽음을 맞닥뜨린 한 남자가 삶을 정리하고 아들에게 새로운 삶을 건네주려는 고군분투가 그려지며, 감독의 죽음에 대한 탐구가 여전히 이어지기에 핸드헬드는 삶의 흔들림, 시한부 운명에 의해 자신의 삶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급박함과도 맞물린다.  


영화의 연출은 이렇게 죽음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선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창문에 비친 회화적인 정물, 풍경,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것은 별로 특별하지 않아 보인다. 상점에서 파는 싸구려 잡화들, 일상의 산책하는 풍경과 카페나 식당에서 먹고 마시는 모습, 평범한 고양이… 이는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소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이다. 하지만 존에게는 특별하다. 그 모든 일상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 마이클과 함께 조금 더 누리고 싶다. 그래서 이전 작으로부터 유일하게 이어지는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정교한 숏은 이 같은 일상이 너무나도 절박한 존의 시선을 가시화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아름다운 일상을 영구적으로 붙잡고 싶다. 또 영화는 때때로 마이클을 하이앵글 구도로 내려다본다. 이는 키가 큰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시화한 것이랴. 연약하고도 작은 아들에게 시선이 머물고 싶은, 심지어 결말까지도 눈이 떨어지지 않는 아버지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시점 숏이리라. 이러한 존과 마이클의 일상을 매우 근거리에서 좇아간다. 밀착해서 좇아가는 친밀한 구도는 죽음과 노동계층의 삶을 곡해하지 않고, 아주 가까이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임과 더불어, 아들과 함께 누려온 친밀하고도 익숙한 일상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존의 간절함을 가시화한 연출일 수도 있으랴. 이러한 존의 직업은 창문 청소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토록 정교한 숏이 가능했던 이유는 파솔리니의 섬세한 구도도 있지만, 창문 너머에 배치된 피사체들을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게끔 청소해놓은 존의 공이기도 하다. 그가 창문을 닦아놓으니 마네킹, 사람, 오브제는 더욱 잘 보인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이클 또한 창문에서 포착된다. 그 창문도 존이 닦아놓았기에,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의 지루함, 간절함은 감상자에게 그토록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창문 청소부인 존은 이처럼 의뢰인들의 삶뿐만 아니라, 아들의 삶 또한 선명하게 비추도록 갈고닦는 이라 할 수 있다. 창문을 닦는 것처럼 아들의 머리를 감기며 이를 잡고,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다. 그것이 곧 아버지, 부모란 존재는 자식을 위한 청소부다.      


존은 마이클을 입양 보내기 위해 여러 위탁 가정에 방문한다. 그중 한 부부한테는 마음이 안 가는 것이 분명하다. 존의 마음이 가지 않는 트레버는 기차 모형을 수집하는 컬렉터다. 그가 마이클을 입양할 수 있다면, 소년이 기차를 가지고 놀아도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서를 단다. 소년이 좀 더 큰 이후에, 기차를 더럽히거나 흐트러트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이후에 가지고 놀라는 사족이다. 그는 집안을 더럽히는 게 당연한 아들을 뒤치다꺼리하고 청소하는 것이, 그렇게 청소부가 되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랴. 그의 부인도 유사해서 임신하여 제 몸이 변형되는 것을 원치 않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을 제 자신을 위한 도전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들의 의도대로 배치되고, 가만히 놓이는 기차처럼 수집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존은 최종적으로, 방문 당시 빨래를 널며 청소하고 있던 여인에게 마음이 쏠린다. 지나치게 집안이 난잡하고 혼란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이를 정돈하며 아이가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곧 부모다. 존이 떠난다면 마이클을 둘러싼 환경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와 비교한다면 질서가 무너져 난잡해지리라. 그래서 자신이 부재한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존은 부단히 청소한다. 자신이 정돈해놓은 마이클의 삶이 이어질 수 있게끔, 마이클의 질서가 이어질 수 있는 가정을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래서 존의 사후 제 삶을 혼자 이어갈 수 없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마이클은 존에 의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지, 결코 혼자서 문 열지 않는다. 아이는 혼자서 외부로 나갈 수 없다. 이후에도 존이 머리를 감겨주고, 책을 읽어주며, 밥을 챙겨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존을 기다리는 마이클이 창문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숏은 아주 거대한 헤드룸이 존재해 공허한 상태로 제시되지 않았었나. 아이에게는 텅 빈 헤드룸을 채워줄 수 있는 보호자가 필수적임을 가시화한다. 하지만 아이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각자의 결함이 있는 법이다. 홀로 마이클을 키우는 존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줄 복지, 그리고 친한 학부형이 절실하다. 그들이 아니라면 마이클은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다. 또 혼자 아이를 키우긴 하지만 요리에 능숙하지 않은 존은 마트에서 주부인 것으로 추측되는 한 임산부의 도움을 받아 베이킹파우더를 산다. 그렇게 만들어진 케이크는 존에게 부족한 결함을 채워준 모두의 공이다.      


성인인 존이 어린 마이클과 함께 신을 향해 자신을 보호해주라며 기도하는 이유란, 결코 인간은 제 혼자서 삶을 지탱할 수 없으니, 의존하고 싶은 대상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랴. 몸은 거대할지언정 여전히 나약한 어른, 그들의 결함을 아이가 채워주기도 한다.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동안 책장을 대신 넘겨주고, 소파에 앉아서 졸고 있는 존을 위해 물을 떠다 주며, 아빠가 마트에서 선택한 물건을 카트에 담는다. 존은 마이클을 마냥 아이 취급하지만, 아이는 성장해가며 아버지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공간을 채워준다. 또 입양 또한 마냥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불임 가정의 경우 그들이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부모 되기'를 마이클이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삶이란 마냥 일방적으로 도움 받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다. 수평적으로 모두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다. 그래서 존이 마이클에게 가장 중요시하는 태도도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기, 그리고 언제나 감사함을 표시하는 인사다. 특히나 이제 곧 죽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생 자체가 크나큰 결함일 수밖에 없는 존은 마이클을 돌봐주겠다는 가정들이 대단히 고마우리라. 죽음, 그것은 시들어버린 꽃이 파릇파릇한 꽃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다. 마이클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생일은 찾아온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향해가는, 다만 주어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다. 물론 죽음은 침울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마이클 때문이다. 마이클의 친모가 러시아로 떠나버린 상황 자체도 비정한데, 자신까지 떠나야 하는 것이 아들에게 너무나도 잔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존과 마이클에서 대화에서 엿보이듯, 아버지가 아들보다 늙은 것, 그래서 먼저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크게 슬퍼하지도 않고 호들갑 떨지도 않는다. 물론 조급하다. 마이클을 입양 보낼 가정을 결정한 이후 그것이 가져올 책임을 존은 수습할 수 없다. 내가 현재 내린 결정을 미래에 떠안을 수 없다는 것이 죽음이다. 영화에서 두 차례, 마이클은 아이스크림을 사고, 또 놀기 위해 앞으로 뛰어나가지만, 존은 그대로 멈춰 있다. 존이 딱정벌레를 보고 말하듯 아예 멈추고 정지하는 것이 죽음이다. 뛰어나갈 수 없음, 특히나 미래를 향해 질주하여 자신이 결정한 바를 책임질 수 없음, 그렇게 뛰어나가서 아들과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없다. 그는 음식이 안 먹힌다. 오히려 구토하며 자신이 채워냈던 것들을 게워낸다.     

 

죽어가는 존은 더 이상 청소하며 쾌적하게 만들지 못한다. 한 블랙컨슈머가 존이 일을 대충 한 것처럼 치부하고, 심지어 아예 안 했다며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불평한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 죽음, 존을 이미 죽은 사람 취급했기에, 그는 고객의 창문에 계란을 던져 더럽힌다. 살아있는 사람은 삶을 정돈하지만, 죽은 사람은 멈춰버려 주변은 함께 방치되고 더럽혀지므로. 그는 더 이상 사다리를 타고 창문을 닦기 위해 올라가지 않는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마이클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추억을 만들어야 하기에 허비할 시간도 없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는 죽지만 마이클은 여전히 산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며 많은 것들을 채워낸다. 존처럼 게워내지 않는다. 마이클은 존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버지와 함께 풍경을 눈으로 먹는다. 그렇게 먹는 것은 단순히 미각과 시각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다. 처음 방문한 가정의 부부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좋았던 유년 시절을 재현하며 키울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초원에서 뛰노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었지만, 작금에는 TV, 컴퓨터, 스마트폰이 있다. 이제는 커버린 아이들, 그리고 달라진 환경, 그렇게 사멸한 유년 시절이지만 기억이 존재한다면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 앞으로는 우체국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하는 우체부의 언급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있다면 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재현하는 이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 마이클이 따라 하고 싶은 기억은 바로 존의 것들이다. 마이클은 존이 퇴근하면 항상 따라다니고, 그의 문신을 네임펜으로 자신의 팔뚝에 따라 그려보기도 하며, 그와 함께 산책하며 마주했던 건설 현장의 덤프트럭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한다. 아이는 기억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창문 청소부인 아버지의 행동도 따라 한다. 존은 입양 보낼 가정을 선택하면서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게 마이클을 존중하는 것이다. 아이의 학교, 친구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말이다. 입양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뛰쳐나가서 자신이 걸어갈 '선'을 선택하는 마이클은, 호감이 가는 위탁가정을 은근히 내비친다. 혼자 사는 여인의 집에서의 트럭 놀이를 재현하며, 입양당하는 것이 아닌 입양가고 싶은 곳을 선택한다. 존은 이러한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      


이렇게 아들을 존중한다면 아이가 좋아하는 자신도 고려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 결함들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고, 또 아이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마이클이 사랑하는 것은 친부, 존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혼자 사는 여인을 선택한 이유는 마이클이 그리워하고, 또 타인과 자꾸 비교하는 어머니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존과 가장 유사한 존재이기 때문이랴. 기억이 있는 우리는 대상이 떠나가도 그와 대화할 수 있다. 존과 친한 맥도나씨는 남편과 사별했지만, 그런데도 그와 대화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50년간 함께 살아온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이랴. 마이클도 마찬가지다. 비록 아버지는 떠나더라도 그와의 기억이 충만하다면, 모든 것이 그려질 수 있는 추상적인 하늘에 아버지의 기억을 투영하며 그와 대화하리라. 존이 마이클에게 ‘하늘과 공기에 머물 것’이라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랴. 이를 위해서 존은 마이클을 위해 메모리 박스를 만든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마이클과 소통할 수 있도록. 그리고 기억이 스며있는 사물은 쓰레기가 아니다. 딱정벌레가 담긴 유리병, 아내가 남긴 장갑이 그렇다. 그리고 한 사람이 떠나가지만, 이렇게 남겨진 기억에 의해 우리는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마이클이 새로운 엄마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딱정벌레 자신은 죽으며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게 됐지만, 이를 계기로 마이클과 존의 새로운 추억과 지식을 제공하는 것처럼, 죽음은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만남, 경험을 매개한다. 물론 그렇게 만나는 대상은 언제나 타자다. 존은 쇼나를 통해 만나게 되는 위탁 가정들이 만족스럽지 않다. 이후 우스갯소리로 ‘우울한데 왜 하필 카페에 데려왔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죽어가는 자신을 계기로 새롭게 피어나는 만남은 언제나 타자이므로 나의 기대에 들어맞지 않는다. 존이 대로의 중앙선을 따라 걸어보지만 쉽게 걷지 못한다. 이는 쉽게 선을 걷던 마이클과 달리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존의 상황을 빗댄 것일 수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타인이 그려놓은 길을 자신이 걸어 나가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을 테다. 그렇게 우리는 같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조차도 같지 않다. 마냥 같다면 존은 마이클이 자신의 병균이 묻어 있는 숟가락을 쓰게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언제나 아버지의 취향과 일치한다면 마이클은 그가 사다 준 잠옷을 거부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억을 사랑하고 닮아가는 아들조차도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가장 최적의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나와 다르지만 마이클을 가장 잘 돌봐줄 대상이 누구인지, 나와 다른 마이클에게 가장 좋은 입양처가 어디인지를 말이다. 이에 마이클에게 가장 유용한 결과가 나타나리. 그의 자동차가 다른 청소부에게 구매되어 여전히 유용성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절대적인 끝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에 초원은 푸르게 만개하고, 비는 화창한 날씨의 시작이니. <스틸 라이프>에서도 누군가의 죽음은 다른 누군가의 새로운 삶, 그리고 인연의 첫 발걸음이 되지 않던가. 영화의 결말은 프리즈 프레임, 하지만 멈춘 것은 마이클을 바라보는 존의 시선이지, 마이클의 삶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마이클도 존과의 삶은 멈췄다. 더 이상 그와의 미래는 없으리. 하지만 추억으로 되새김하랴. 그리고 존이 남겨준 새로운 가정에서 또 다른 반짝이는 삶을, 쾌적하고도 선명한 삶을 살아가리. 그렇게 우리는 죽고 지나가고 멈췄지만 좋았던 것을 끊임없이 소환함과 더불어, 새로운 추억을 축적해가는 삶을 여전히 이어가며 반짝이게 되리. 이렇게 본 작품은 파솔리니의 여전한 죽음 탐구를 보여준다. <스틸 라이프>에서 장례식은, <노웨어 스페셜>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누군가의 끝이지만, 이와 동시에 새로운 누군가와 만나는 시작이기도 하니, 또한 기억과 그 사람의 추억이 각인된 사물이 있다면 대상은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서 영원하리. 이러한 탐구에 켄 로치를 연상케 하는 노동계층의 삶과 복잡하고 시간이 촉박한 제도의 절차를 그려내며 사회적인 메시지를 뒤섞는다. 물론 썩 만족스럽게 그려지는, 관용이 있는 복지제도는 로치의 시선에 비한다면 우호적이다. 그리고 카우리스마키를 연상케 하던 탐미성, 형식주의는 리얼리즘으로 변주한다. 파솔리니의 섬세한 연출은 여전히 사유에 적합하긴 하지만, 이러한 변주 속에서 <스틸 라이프>로 여겨지는 그의 개성이 일련 사라진 게 다소 아쉽다. 감독의 이름을 빼고 본다면 켄 로치 내지는 그의 제자가 만든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데도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는 파솔리니의 지론이 묻어난다. 또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하지만 아들을 남기고 떠나가기 어려운 존의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특히나 아들에게 죽음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을 절제된 표현으로 보여주는 (<미스터 존스>로 2021년의 시작을 함께 열고, <노웨어 스페셜>로 2021년의 마지막도 함께하는) 제임스 노튼의 뭉클한 연기는 본 작품을 반짝이게 만드는 고귀한 빛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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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23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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