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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24. 2021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나와 타인, 언어와 마음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 

- 나와 타인, 언어와 마음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후쿠란 이름의 남자는 지금 전속 운전기사를 찾고 있다. 부탁을 받은 카센터 사장이 그에게 여성 운전기사를 추천해줬다. 그에게 여성 운전자는 보통 두 부류로 나뉘어 여겨진다. 신중하거나 난폭하거나, 대체로 여성들은 그가 보기에 전자에 속하곤 하며, 후자에 속하는 여성들은 전자를 우습게 여기며 자신의 운전 실력을 자만한다. 하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운전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일반적인 남성 운전자들과 다르다. 또 신중한 여성들의 조심스러움도, 난폭한 여성들의 과감함도 아닌, 어딘지 원활하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과연 그가 만날 여성 운전자는 어떤 성향일까, 또 아내와 사별하기 전까지 줄곧 자신이 조수석에 앉을 일은 없었는데, 만약 자리가 뒤바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 소개받은 미사키란 이름의 여성 운전기사는 뛰어나지만 과감하지 않았고, 그래서 평범했지만 어색하지도 않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미사키, 그녀 자체였다. 가후쿠는 그녀가 편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잊은 채, 차 안에서 편히 쉬고 준비할 수 있었기에 말이다. 그녀는 사별한 아내와 달랐다. 갓 태어난 딸아이가 갑작스레 돌연사한 이후, 그녀는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다지 불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의 직업처럼 부부 사이는 '배우' 관계에 가까웠다. 아이의 빈자리, 그에 따른 서로의 불편함, 이를 내색하고 싶지 않은 부부를 연기, 사별 이후에도 진심 없는 행위는 지속되었다. 그저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기억을 재현하고 싶은 성교와 일상의 연속이었으니, 어쩌면 내가 믿고 상상하고 싶은 데로 바라본 관계였으리.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견딜만한 일이다. 그리고 미사키는 그걸 가능케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솔직했고, 나 또한 그녀 앞에서는 솔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후쿠는 많은 진심을 털어놓고, 결국 나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인 『드라이브 마이 카』를 요약한 것이다. 이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일본의 떠오르는 청년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본 작품을 스크린에 옮겨오고 있기 때문이다. 1978년 나와가와현 태생의 하마구치 류스케는 201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순식간에 국제적으로 일본을 대표하게 된 시네아스트다. 그의 작품 경향은 기록,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예술론, 최근 공개한 신작의 제목처럼 '우연과 상상'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일단 그는 도호쿠 대지진 이후의 삶을 기록한 도호쿠 3부작 다큐멘터리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 같은 현실에 충실한 태도가 류스케의 픽션에도 이어지는데, 이는 <해피 아워>가 대표적이다. 류스케가 주최한 즉흥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 네 명의 비전문 배우의 삶에서 각본은 비롯한다. 이에 그들의 삶을 일련 반영하는 카메라와 비전문 배우들의 기술인지, 실제 표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연기가 현실과 절충을 이루며, 이에 진실에 충실한 픽션으로 거듭난다. 또 <해피 아워>에서 직접적으로 영화 제작에 '질료'가 되는, 기록 영상에 가까운 숏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류스케가 자신의 예술론을 탐구하는 경향은 연극 리허설과 그 결과물을 고스란히 담아낸 <친밀함>에서 나타난다. 원본이 있고, 그것을 연습하는 리허설이 있고, 최종적으로 공개된 하나의 실연이 있지만, 이것 모두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해피 아워>에서도 하나의 예술을 두고 각자의 시선에 따라 감상과 입장이 판이한 토론이 삽입되는 것처럼, 그에게 하나의 예술은 닫혀있지 않다. 그가 각본을 쓰거나 연출하는 방향도 그렇다. 최근 그가 각본을 쓰고, 구로사와 기요시가 연출한 <스파이의 아내>에서 너무나도 자명한 세트장과 달리, 서사에 있어선 줄곧 관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여지, 구멍이 도드라지곤 하였다. 이에 따라 <해피 아워>의 토론처럼 하나의 예술을 두고 상상은 무한히 증폭한다. 이렇게 '우연과 상상'으로서 그는 연출에 있어 정해진 각본으로 가기보단, 자유분방하게 침투하는 우연성과 공백에서 피어나는 상상력을 굳이 통제하지 않는다.      


또 <해피 아워>에서 불화가 절정에 달해 이혼하려던 부부가 갑작스레 친밀해져 정사를 나눈달지, <아사코>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심리 등 개개인의 우발적인 몸과 내면 또한 그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우발성이 닫히지 않은, 풍성하고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원천이요, 이는 <해피 아워>에서처럼 익숙하고 당연했던 관계, 자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가 긍정하는 것은 닫혀있고 완결된 시간이 아닌, 상상할 수 있는 미완의 시간, 앞으로도 가능할 시간이다. <해피 아워>에서 네 명의 친구들이 행복한 시간을 결코 맞닥뜨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행복을 상상하고, 그 시간이 여전히 가능함에 기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류스케는 여전히 상상한다.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자유분방하게 상상하며 이를 능청스럽게 옮겨온다. 그리고 여기에만 갇혀있지 않은 채, 우연적이고도 즉흥적으로 다른 작품들을 접촉시켜 영화의 결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래서 여러 작품들이 접목된 본 <드라이브 마이 카>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영화라 말할 법하다. 영화의 본령으로 여겨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나 편집 등에만 집중하지 않고, 또 창작자의 유일한 독창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직 유일한 본질에 집중하던 모더니즘의 정신을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전유, 레디메이드 등의 방식으로 전복하고, 이를 통해 혼합적이거나 기존의 대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본 작품도 『드라이브 마이 카』와 다른 작품, 영화와 문학, 자신과 다른 예술가를 자유로이 전유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관점을 파생시킨다. 하지만 마냥 마구잡이로 끌어오지 않는다. 류스케는 콜라주하는 대상들 각각을 세밀히 이해한 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또 여러 작품들이 맞물리며 각각의 차이 속에서 도드라지는 가치 또한 정밀하게 바라본다. 이를 위해서 영화는 롱테이크가 도드라진다. 인용하는 여러 예술 작품들, 그리고 류스케가 구축해놓은 인물들의 삶을 실로 이해하기 위한 긴 호흡의 시간.      


이러한 연출을 지향하는 본 작품의 도입부부터 살펴보자. 가후쿠가 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낸 모양이다. 창문 너머로 동이 트고 있는 풍경이 펼쳐지고, 이윽고 그와 밤을 보낸 한 여성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짝사랑하는 한 소년의 집에 몰래 침투한 소녀의 이야기, 소년의 부재에 그의 흔적과 공기만을 흠뻑 호흡하며 추상적으로 경험하고 빠져나온 소녀의 이야기, 이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수록된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마찬가지로 포함된 『셰에라자드』다. 본 작품은 성교를 나눌 때마다 셰에라자드처럼 온갖 이야기를 해주는 한 여성을 회고하는 단편이다. 그녀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던 주인공은 무수한 세계, 삶을 향해 의식을 뻗어 나간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는 기억이 희미해지면, 한때 기억이 선명해서 들끓었던 정열도 서서히 식어가는, 기억과 욕구의 관계다. 그래서 셰에라자드가 사라지면 남자는 더 이상 삶과 정열을 확장할 수 없으랴. 이렇게 잠자리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는 여성이 본 작품에도 이어진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 그녀의 얼굴은 그늘에 감춰져 있어 비규정적이다. 얼굴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한편 타인의 이야기를 하던 『셰에라자드』와 달리, 본 작품의 그녀는 성교 직후 몸이 표현하는 솔직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낭독한다. 즉 그녀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이야기 직후 그녀는 이를 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가 가후쿠의 아내인 오토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류스케는 본 『셰에라자드』를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함축적이던 가후쿠와 아내의 관계를 상상하는 데 사용한다. 『셰에라자드』의 인용 파트가 끝난 이후에야 오프닝 크레딧이 펼쳐지며, 본격적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전개된다. 그리고 『셰에라자드』 파트는 비극이다. 성교 직후 오토는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나를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가후쿠는 이를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청자요,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 날 몸의 얘기를 잊은 오토는 자신의 몸을 타자화하여 생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접해 듣는다. 가후쿠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토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대신 전한다.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과거의 화목한 부부관계를 억지로 연기하는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부부는 그들 자신일 수 없다. 『셰에라자드』의 비극은 ‘내가 나일 수 없는 비극’이다. 이야기의 형식을 빌린 간접적인 고백에 얼굴은 파묻혀있고, 그마저도 타인의 이야기로 전락한다. 『셰에라자드』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전반부는 ‘타인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는 것이 동일하다. 이렇게 하나의 원전에 다른 작품들이 중첩되며, 배우가 배역을 연기하고, 그 배역이 또 다른 배역을 연기하며, 과연 무엇이 진위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작품, 이러한 본 작품의 두드러지는 연출을 살펴보자. 원전에서 가후쿠가 배우였던 것처럼, 본 작품의 가후쿠도 배우다. 그는 딸아이의 사고 이후 연극 무대에서만 활동하고 있는데, 그래서 영화도 자연스럽게 연극을 주된 소재로 다룬다. 흡사 이러한 연극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는 관객들처럼, 움직이지 않는 무대처럼, 배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배우처럼, 영화의 카메라는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 능동적인 달리나 트래킹보다는 패닝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내가 타자인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역과 내가 진정 일치될 때, 그래서 배역과 더불어 내가 움직일 때 카메라는 비로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또 가후쿠가 아내와의 연극, 그리고 『바냐 삼촌』의 연극이 끝나고 무대 의상을 벗어 던진다. 이후 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떠난다. 연극이 끝나고 나를 회복한 자를 포착하는 카메라도 실로 능동적이다. 하지만 출장이 취소되고 다시 돌아와서, 연극에 참여해야 하는 그를 비추는 카메라는 얼어붙는다. 이렇게 연기하는 그들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대체로 수동적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운동성은 무딜지언정, 영화의 관점은 입체적이다. 사실 카메라의 움직임과 더불어, 흡사 펼쳐진 연극 무대를 보듯, 영화의 구도는 대체로 평평하여 평면적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이러한 연극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한다. 관객이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배우의 연극과 관객을 함께 포착하는 구도로 말이다. 영화 속 배역과 배우의 일치는 멀리 관객석에 우두커니 앉아 텍스트를 관조하는 것을 넘어서, 능동적으로 그 '뒤'를 수색하며 참여할 때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인지, 배역으로 사는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인물들처럼, 또 오디션에서의 불쾌감이 연극의 불쾌감인지 실제로 느끼는 불쾌감인지 애매한 것처럼, 영화의 연출도 이러한 오묘한 경계성을 구현한다. 비전문배우들의 기용, 실제로 류스케가 '현실'에서 이들에게 주문하는 대본을 건조하게 낭독하는 디렉팅이 펼쳐지고, 이후 '픽션'이 이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배역과 배우는 구분되지 않은 채 일치하기 시작한다. 배역이냐 자신이냐, 현실이냐 픽션이냐를 구분하지 않은 채, 양자가 쏙 달라붙은 '그것 자체'가 펼쳐진다. 구분되지 않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그것 자체로 구성하는 형식처럼, 내용도 각자의 경계가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 인물들을 구축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나 자신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프롤로그라 여길법한 『셰에라자드』가 인용된 파트에서, 오토가 이야기하는 소녀는 몰래 침입한 소년의 집에 자신의 탐폰이나 속옷을 남긴다. 나의 일부를 그에게 건네준다. 그렇게 나의 일부를 잃어버린 곳에, 그의 물건 일부를 마찬가지로 채워 넣는다. 그렇게 서로는 뒤섞인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된다. 오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녀는 전생에 칠성장어였다고 한다. 칠성장어는 다른 물고기를 흡혈하는, 그래서 다른 동물의 피가 자신의 몸에 채워지는 어류다. 이러한 칠성장어처럼, 오토의 이야기를 들은 가후쿠는 이를 흡수하여 그 다음날 유튜브로 칠성장어를 찾아본다. 그리고 오토 사후, 그녀가 남긴 테이프는 가후쿠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바퀴로 매치 컷되어 이어진다. 오토 사후 2년이 지났음에도 그녀가 남긴 것을 바탕으로 가후쿠는 삶을 운전한다. 그리고 20여 년 전 잃은 딸아이와 부모의 관계도 이랬으랴. 부모는 딸아이한테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그리고 딸아이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받았으랴. 그렇게 나는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고, 타인도 오직 그만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딸아이에게 내어준 것은 아이가 떠나는 손에 쥐고 사라져버렸고, 한편 딸아이의 것인 기억은 여전히 부모의 뇌리에 남아 삶의 전반을 좌우한다. 딸과 함께 있어 행복했던 기억, 평온했던 부부 관계가 그들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으리. 가후쿠가 오래된 차종을 계속 몰고 다니는 것도 이와 연관되리라.      


칠성장어라는 전생이 현재에 흡착하며 흡혈하고 따라다니는 것처럼,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가후쿠의 운전기사 미사키 또한 어머니에 의해 조용하게 운전하는 법을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기사가 되거나 쓰레기차를 몰았다. 또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얼굴의 흉터로 남아 있고, 부모가 남긴 각인으로 그녀는 히로시마에 가게 된다. 우리는 이처럼 과거로 되돌아간다. 오토의 이야기에서의 사랑이 '첫사랑'인 것처럼,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과거만 바라봄에 현재는 희생된다. 가후쿠는 오토의 불륜을 우연히 적발한다. 하지만 가후쿠는 이를 캐물을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후쿠는 오토에게 질문하고 싶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가후쿠의 진심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재현이 우선이므로, 그래서 영화의 디렉팅은 매우 무감하다. 가후쿠나 미사키 같이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들은, 살아 숨 쉬며 변화하는 감정을 과거의 어느 한구석에 남겨 놓고 온 듯한, 텅 빈 표정만을 띤다. 그리고 부부가 거주하는 공간도 생기가 없다. 아주 차갑고 삭막한 백색, 그리고 각진 공간, 이에 서로가 단절되어 있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시화된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를 모른다. 오토가 『셰에라자드』 이야기에서 소녀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간다. 소녀가 알게 되는 소년의 진실과 반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외면, 그가 연기하는 배역은 차이가 있다. 부부 관계도 이와 같다. 서로를 마주했을 때는 상대방을 의식하느라 부부의 배역을 연기하며 자신의 진실을 은닉하지만, 상대방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상태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결국 내가 영영 알 수 없는 것, 제한적으로 알 수 있거나 추측할 뿐이므로, 부부의 진실은 미궁 속에, 상상으로만 남는다. 부부의 성교 또한 매우 형식적이다. 오토가 타카츠키와 성교를 나눌 때는 역동적인 감정을 가리키는 추상적인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가후쿠와 할 때는 호흡도 표정도 그저 메말라 있을 뿐이다. 이들의 행위는 되찾을 수 없는 과거를 복원하고자 하는 부질없는 시도요, 답을 주지 않는 과거를 향해 끝없이 질문하는 공허다.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강박행위라 할 수 있다. 강박증 환자들은 외상, 과거에 실현되지 않은 행위로 인해 현재에 무의미한 특정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과거의 특정 상황에서만 적절했고 해소될 수 있었으므로, 현재에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인지할 수 없는 환자는 지속적으로 행동을 시도하고, 결코 실현되지 않음에 해소되지 않는 행동은 끝날 줄 모른다. 본 작품 속 가후쿠가 그렇다. 딸의 죽음 이후 되돌아갈 수 없는 가족의 풍경, 오토의 죽음 이후 되돌아오지 않을 그녀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전할 수 없는 그의 진심, 결코 닿을 수 없지만 이를 실현하고자 무의미한 행위를 무한히 반복한다. 이렇게 우리의 뇌리에 과거로 각인되는 것은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 또한 우리의 기억에 남아 현실을 좌우하리라. 그리고 본 작품에서도 가후쿠의 뇌리에 남아, 그의 현재를 규정하는 예술이 있다. 바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삼촌』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본 작품에서도 배우인 주인공이 연기해야 하는 각본이 바로 『바냐 삼촌』이다. 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바냐 삼촌은 은퇴한 교수를 동경함과 더불어 질투한다. 그의 현학적인 발화에 매료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바냐 삼촌은 일도 많이 하고 노력도 충분히 했는데도, 왜 노교수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불만이 있다. 그 불만은 교수의 부인 엘레나 때문이다. 바냐 삼촌은 그녀를 동경했지만, 자신의 비천한 지위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엘레나는 교수와 결혼함과 더불어, 이제 다른 식자와 불륜을 즐긴다. 그 대상인 의사 또한 현학적인 발화로 엘레나를 매혹한다. 그리고 노교수는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발화로 바냐 삼촌의 귀를 간질여 투자를 꼬드긴다. 하지만 바냐 삼촌은 이젠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노교수에게 확실하게 제 뜻을 옮기는 것도 아니다. 바냐 삼촌은 타인에게 투영하며 실현하려 했던 꿈과 이상이 무너짐에, 사명이니 혁명이니 운운하는 것들이 그저 감정에 굴복하고 이끌릴 뿐이라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한다. 이와 더불어 바냐 삼촌은 자신의 한계를 직면한다. 일평생 바라온 꿈은 허상이었고, 심지어 자신의 하잘것없는 감정과 열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무력감, 좌절감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묵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 그래야만 죽음 이후에 편히 안식을 취할 수 있나니.      


이렇게 『바냐 삼촌』은 나약한 인간이 외부에 바라왔던 모든 꿈과 욕망의 좌절, 이에 내부로 되돌아와야 함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바냐 삼촌』이 가후쿠의 곁에 남아있다. 가후쿠가 연기하고, 또 그가 디렉팅하며 본 작품 자체가 『바냐 삼촌』을 실연한다. 이러한 실연이 가능한 이유는 『바냐 삼촌』에서 내재한 삶이 곧 가후쿠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그것의 감상 이후에는 과거이자 기억이 되어 현재를 규정할지 모른다. 특히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그럴 수도 있을 보편성을 갖춘 예술은 그것이 간직한 관념과 가후쿠의 삶이 일치함을 현시한다. 이에 가후쿠는 딸과 오토가 쥐고 있던 자신의 현재, 25년간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제 삶을 되찾을 수 있나니. 이렇게 예술과 삶이 일치하자 카메라가 움직인다. 이러한 예술은 거울과도 같다. 타카츠키와 오토의 정사를 가후쿠가 거울로 간접 목도하는 것처럼, 『바냐 삼촌』은 가후쿠 자신을 대신 직면하게 해준다. 한편 가후쿠가 『바냐 삼촌』의 어떤 국면에 집중하는 것인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과연 그는 『바냐 삼촌』의 텍스트 그 자체에 몰입하는가, 아니면 대사 암기를 위해 각본을 녹음해준 오토의 음성에 관심이 있는가. 그는 오토의 질문에 답하는가, 아니면 『바냐 삼촌』의 질문에 답하는가? 영화의 초반부에 가후쿠는 오토에게 답한다. 바냐는 곧 가후쿠 자신과 같지만, 정숙한 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정해진 각본을 회피하고 무대 뒤로 숨어버린다. 그래서 줄곧 혼자 차 안에서 운전하며 오토의 질문에 반복적으로 답한다. 원망을 쏟아낸다. 현재의 가후쿠는 과거의 오토에게 답장하고 싶다. 하지만 무수히 답변을 반복해도 이는 오토에게 전달되지 않으리. 과거의 오토는 미래의 가후쿠에게 질문했고, 현재의 가후쿠는 과거의 오토에게 답장하며, 서로는 각자의 시간에 갇혀있다. 하지만 세계는 현재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에 가후쿠는 참여하지 못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후쿠의 녹내장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삽입한 이유도 이와 관련되리.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랴.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이에 현재와 어긋나고 충돌하여 균열이 발생한다. 가후쿠가 대교를 지나는 풍경이 경이로운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되고, 반면 청각은 여전히 오토에게 답변하며 과거에 속한 장면도 그렇다. 이는 흡사 보이스오버와도 같다. 현재의 시각에 과거의 청각은 적절하지 않고 계속 겉돈다. 하지만 삶이란 현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가후쿠는 연극을 위해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이에 그들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규칙’이 그들을 만든다. 오토는 어머니이자 아내라는 규칙으로 형성된 자신을 포기할 수 없음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인격이 성교 중에 튀어나온다. 이것은 그녀의 이야기 중에서 소녀가 자신이 만들어낸 규칙, 선을 넘지 않는다는 부분과 연관된다. 미사키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딸에게 모질게 대하는 자신의 규칙을 위반할 수 없음에, 어머니가 아니라 사치라는 또 다른 인격과 규칙으로 그녀에게 다가간 것은 아닐까. 이러한 규칙으로부터 전면 해방되는 것이 죽음이다. 과거와 현재, 모든 것이 합치되어 비로소 전생에서 해방된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는 오토 자신의 몸을 가리키리. 이를 가후쿠에게 얘기했지만 그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피하자 오토는 제 자신도 잊어버린 스스로의 규칙, 몸의 이야기를 돌려받지 못한다. 과거도 현재도 없는 오토는 그 이후 사망하고야 만다. 그래서 규칙은 유지되어야 하고, 서로의 규칙은 절충되어야 한다. 레지던시에선 그에게 기사를 붙여준다. 예전에 예술가가 직접 운전해서 인명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가후쿠는 이에 당황해하지만, 레지던시라는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서 룰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레지던시도, 그들이 기사로 고용한 미사키도 가후쿠가 차안에서 대본 낭송하는 규칙과 절충하고 합의한다. 그들 또한 가후쿠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에 참여하는 자는 오직 나 자신만을 고집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나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미사키가 가후쿠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보며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있을 수 있지만, 가후쿠가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은 자신이 바란 배역이 있지만, 가후쿠는 그들에게 다른 배역을 부여한다. 오디션에서 각자는 오직 자신의 배역만 연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배역을 연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연기하는 것인가. 가후쿠의 배역 재배치는 진정으로 각본과 배역에 다가서기 위한, 기존의 익숙한 자신의 포기라 할 수 있다. 나의 규칙을 유지하고, 또 상대방과 참여하는 세계의 규칙을 존중함에, 모두는 공존한다.      


또 연극의 언어는 매우 다양하다. 일어, 한국어, 중국어, 수어, 연극의 실연에는 그 외의 언어까지 포함된다. 오디션에서 중국어를 쓰는 여인과 일본어를 쓰는 타카츠키의 만남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각자의 발화에만 집중한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여도, 각자의 주관이 해석한 텍스트를 연기한다. 똑같이 일어를 사용하는 파트너와 오디션을 보는 한 중년 여성은, 상대방이 마음대로 대사를 축약함에 당혹스러워한다. 혼자 연기한다면 이 배역들이 적절하리. 하지만 본 연극은 다 같이 하는 것, 결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과 연극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를 위한 것이다. 가후쿠는 배우들에게 자신의 모든 감정, 억양, 표현을 내려놓고, 아주 건조하게 텍스트를 읽게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들을 수 있게끔 명확한 발음을 요구한다. 배우들은 본 텍스트 낭독이 연기와 무관하다며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나의 주관을 최대한 내려놓고 텍스트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 텍스트를 이해하여 각본과 배역을 연기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그렇게 텍스트를 이해해야지만 그 텍스트가 내게 던지는 질문 또한 이해하여, 그것에 답하며 연기할 수 있다. 류스케의 이 같은 디렉팅은 신비평주의의 태도와 같다. 신비평주의는 작품을 둘러싼 맥락, 심지어 창작자의 삶이나 의도도 전면 배제하고, 오직 작품만을 상세히 읽는다. 그래서 오직 작품에 집중하는 비평의 방법론이다. 류스케는 이렇게 작품만을 실로 이해한 후에, 진정 내가 그 대상을 향한 적절한 반응이 파생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이해하기 전까지의 반응은 자신이 바라는 반응, 오독이나 아집에 불과하다. 그렇게 텍스트가 던지는 질문에 ‘내가 답변’함에, 비로소 배우는 그 자신과 텍스트의 규칙을 고루 합쳐 연기하게 되리. 이렇게 비참여, 오직 나만의 세계에 고립된 이들이,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선 언어를 알아야 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텍스트 낭독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교감하는 이들은 즐겁다. 또 윤수는 청각장애인인 윤아를 위해 수어를 배웠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이를 사용하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윤수는 윤아를 위해 연극을 제안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법이다.      


영화 속 질문은 두 층위다. 가후쿠가 순간 익숙해진 미사키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즉 자신을 위해 제기한 질문이 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이를 철회한다. 그리고 가후쿠가 미사키의 언어를 파악함에, 미사키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질문을 던진다. 언어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고립된 사람은 오직 나와 관련된 무언가를 가리키리. 하지만 현재의 상대방과 대화하는 언어라면 서로의 삶이라는 구체를 가리킬 수 있어야 하리. 이렇게 나의 언어에서 빠져나옴에, 비로소 가후쿠의 시야도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외부의 세계를 바라본다. 더 이상 테이프를 듣지 않고 바깥을 바라본다. 타카츠키가 운전하다 사고가 난 모양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었더라면 영영 파악할 수 없었을 세계. 이러한 대화는 상대방만을 아는 것이 아니다. 『바냐 삼촌』을 보며 자신의 삶을 간접 엿보는 것처럼, 타인과의 대화에서 내가 모르는 오토의 비밀을 파악하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갇힌 자신이 아닌, 현재의 자신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를 잘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내게 질문하는 것이기에, 답하기 위해 나를 확인하는 일이다. 일방적인 관계는 나를 잃게 된다. 타카츠키가 파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혀,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중에 따라 해석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에 나를 답변하며 타인이 일방적으로 내게 각인할 영향을 저항한다. 한편 그러한 답변은 서로 오가야만 한다. 타카츠키의 답변이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폭행이었기에, 서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도대로 상대방을 죽이게 되었다. 이렇게 질문과 답변을 통한 나의 확인, 세계에의 참여, 이에 영화 후반부에서 도드라지는 공간은 대교, 터널 등이다. 갇혀있는 그들은 빠져나온다. '오토가 죽은 날'을 고백하며 지금껏 자신이 품고 있던 과거에서 헤어 나온다. 또 대교는 단절되어 있는 섬과 섬을 연결해준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다리를 넘고 다른 사람과 이어진다. 이렇게 교류하는 것은 현재다. 과거는 과거, 지나가고 유실된 과거의 전체는 여전히 의문에 싸여있다.      


타카츠키를 통해 『셰에라자드』의 뒷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진실은 영영 상상으로만 남는다. 거기서 다시 질문이 차오름에 터널을 빠져나왔어도, 다시 터널로 들어가고, 또 영화의 카메라처럼 터널의 뒤편을 응시한다. 과거는 오직 일부만 파악할 뿐, 그 당시와 대화할 수 없기에 전면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나'일 뿐이다. 타카츠키가 밝힌 『셰에라자드』의 뒷얘기에서 소녀는 거짓으로 가득 차 불길함이 감도는 세계를 참지 못하고, 소년의 집 앞 감시카메라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했다. 이는 타카츠키가 더 이상 자신의 과오를 숨기지 않는 것,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산사태가 일어나 그녀의 집과 어머니의 기억이 묻혀 있을 고향으로 가자고 하는 것, 가후쿠가 그간 외면해온 바냐를 연기하는 것,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자극하는 흉터를 감추지 않는 마사키 등이다. 언어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요, 더 이상 과거, 기억, 고립된 세계에 갇히지 않고 세계에 참여하며 이를 드러내야 한다. 비로소 내가 참여해야 하는 세계를 톡톡히 마주할 때, 가후쿠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 ‘애도’임이 드러난다. 그렇게 오토가 죽었음을, 그녀의 비밀을 알 수 없음을 인정함에 더는 오토의 음성에 매몰되지 않는다. 가후쿠 그 자체인 『바냐 삼촌』을 회복하고 상연한다, 그것이 곧 삶이다. 영영 비밀로 묻힌 과거는 다만 상상으로 위로할 수 있을 뿐이요, 그저 해방되어야 할 전생에 불과하다. 산다는 것은 현재에 참여하는 것, 그렇기에 살고 싶은 두 남녀는 현재에 참여하고 싶다. 그 현재에 참여하기 위해선 현재에 살아있는 나를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곧 고립된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세계에의 참여를 통해 드러난다. 비로소 이렇게 살게 되었을 때 과거의 강박에서 해소된다. 영화의 결말은 미사키의 삶이다. 히로시마에서 해방되어 한국으로 향한다. 나만의 언어가 아닌, 그 세계의 언어인 한국어를 사용하며 깊이 참여한다. 과거만을 배회하던 존재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현재로 전진한다. 이러한 현재에의 참여, 그것이 곧 그와 그녀가 바랐을 스스로가 복권된 삶이었으랴. 현재의 나를 모르는 사람은 뒤로 걷는다. 계속 과거로 되돌아간다. 현실에서 멀어져 고립된 세계에 갇힌다. 그래서 현재의 나를 알아야만 한다.

      

정리하며, 영화는 기억에 갇힌 존재들의 비극을 여러 작품을 인용하며 써내려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는 모든 인용에서 벗어난다. '내 차를 운전해주는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손에도 의존하지 않은 그녀 자신이 운전하며 인용에서 벗어난다. 더욱이 가후쿠처럼 이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게 벗어나는 방법은 타인의 기억이 아닌, 나의 기억과 내가 투영된 예술로 나를 파악하는 것, 현재를 구성하는 세계,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 그렇게 서로를 궁금해하며 궁극적으로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렇게 현재의 나를 직면함에 어두운 터널에서 우리는 빠져나온다. 이렇게 타인과 나를 이해하는 여정은 결코 짧지 않다. 상대방을,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길고 긴 시간에서 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피 아워>에서 네 친구들의 삶을 고루 살피던 5시간이란 러닝타임처럼, 본 작품도 3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할애된다. 하지만 과거에 갇힌 나를 이해하는 시간으로, 이를 현재로 다시 되돌리는 시간으로 3시간은 전혀 짧지 않다. 이는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자유분방하지만 섬세하게 독해하고, 류스케의 주관대로 『셰에라자드』와 『바냐 삼촌』을 덧붙이며 수행한다. 원전에 충실하고도 주관적인 감상과 해석을 토대로 자유분방하게 소설을 영상화하는 본 작품은, 마찬가지로 『파우나』란 원작을 자유분방하게 독해하던,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소개된 <파우나>가 연상된다. 그리고 창작과정을 비추고 배역과 배우의 진실, 연극과 현실의 반응이 혼재된 탈경계성, 차 안에서 많은 대화가 오가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성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처럼 경계의 구분은 중요치 않다. 키아로스타미의 진실이 양자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그것 자체'인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그것들이 어지럽게 뒤엉킨 것이 우리의 삶 그 자체이므로, 그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고, 그들이 모두 뒤엉킨 진실을 파악해 그것으로 우리는 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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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224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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