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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8. 2021

카우타르 벤 하니야, <피부를 판 남자>

네 등, 내 등

카우타르 벤 하니야(Kaouther Ben Hania), 

<피부를 판 남자>(The Man Who Sold His Skin) - 네 등, 내 등     

“요컨대 오리엔탈리즘 때문에 동양은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서구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두 여름을 위해 힘겨운 노동을 감내한 것만 같다. 그들에게 여름은 휴가의 시간이다. 서구의 사람들은 모두 짐을 꾸린다. 노동이 줄곧 상기되는 유럽이란 대륙을 떠난다. 그들은 아프리카로 향한다. 한 중년 여성 무리는 아프리카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계획한다. 이들의 육체는 비대하여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부유하다. 이윽고 탄탄하고 건장하여 아름다운 육체를 자랑하는 아프리카 남성들이 해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휴가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여름은 가장 강도 높은 노동이 이뤄지는 시간이다. 그들은 중년 백인 여성들에게 ‘구매’되기 위해 해변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청년들은 상대방을 고를 수 없다. 오직 고를 수 있는 것은 돈이 많은 중년 여성들이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성’은 여전히 식민지화되고 착취된다. 아프리카의 사람들과 유럽의 사람들은 동등하지 않다. 여전히 유럽의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성을 착취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무리는 사파리에 도착한다. 역시나 부유한 이들이다. 내지인들은 이들을 극진하게 대접한다. 이들은 돈을 낸다. 그리고 내지인들은 이들의 눈이 되어 사냥감을 좇는다. 이윽고 거대한 포유동물들이 눈에 띄면 사냥을 허락한다. 코뿔소, 얼룩말, 기린 등 무수한 동물들이 백인들의 돈에 의해 수탈된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아프리카인들은 백인의 유혹을 저버릴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이 사냥한 고기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영화감독 울리히 사히들이 동시대까지도 이어지는 식민주의를 비판한 작품, <파라다이스 러브>와 <사파리>를 요약한 것이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그들의 노동력과 인권이 식민화되었고, 2차 대전 이후에는 그들의 국경선이 식민주의의 잔재로 남아있으며, 동시대에도 백인들에 의해 구획된 식민주의의 지도하에 이들은 경제적으로 포섭되어 여전히 그들의 몸, 자연, 노동력은 수탈된다. 이에 그들의 몸은 자유롭지 못하다. 여전히 백인에 의해 그 운명 좌우되고 있으니.     


타 대륙에 사는 인간의 몸까지도 식민지화하는 백인의 손아귀, 여전히 동시대에도 이어지는 식민주의의 잔재를 카우타르 벤 하니야가 <피부를 판 남자>에서 고찰한다. 1977년 시디부지드 출생의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튀니지의 영화감독이다. 데뷔 초기 그녀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일삼았다. <튀니지의 샬라>는 그녀의 자국 튀니지에 만연한 여성 혐오, 성희롱, 남성 우월주의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였다. 또 <자이네브 헤이트 더 스노우>는 튀니지에서 퀘벡으로 이주한 한 소녀의 삶을 약 6년간 치열하게 추적한 다큐멘터리로, 구조와 이에 의한 시선이 미치는 삶의 여파를 조명한 작품이었다. 이후 그녀는 2017년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현실의 시간과 동화된 형식인 롱테이크로 승화한 픽션 <미녀와 개자식들>을 내놓는다. 그녀는 <튀니지의 샬라>에서처럼 튀니지 및 이슬람 문화권에 만연한 남성우월주의, 여성 혐오를 꼬집는다. 영화의 주인공 마리암이 파티를 주선했다. 그녀는 실내의 파티장에서 여성들이 자유분방하게 몸을 들썩거리고, 치장하고, 사진을 찍고, 몸과 얼굴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에 여성들의 몸, 그리고 행동은 매우 경쾌하고 발랄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아빠에게 발각돼선 안 된다. 더욱이 여성들은 단지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싶을 뿐이나, 남성들은 그녀들의 몸을 화폐 취급 하거나 자신의 정욕을 투영한다. 본 글에서 다룰 <피부를 판 남자>에서도 서구에 의해 식민화되는 아랍인의 몸이 드러나는 것처럼, 카우타르는 바로 전작 <미녀와 개자식들>에서도 남성들의 욕망에 의해 착취되는 여성의 몸을 탐구했다. 이는 <튀니지의 샬라>에서 종교에서 기인한 제도, 구조, 이데올로기를 첨예하게 추적한 것처럼, 시스템이 문제라 진단한다. 그녀가 질서를 구축한 실내에서, 이슬람이 질서인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이후 위협, 추적당한다. 마리암은 경찰에게 강간당했다. 이후 경찰들은 본 사건을 귀찮게 여기거나, 은폐하기 급급하다. 경찰들은 중년 남성들이 주를 이루는데, 사회의 기득권인 그들이 본인들의 야욕을 우선시하며 약자들을 착취함에 범죄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마리암이 취조 받는 도중 다른 여성의 비명이 외부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또 절차와 무관하게 그녀를 협박한다. 경찰들이 집행하는 것은 정의와 법이 아니라, 불법과 악덕이다. 더불어 강간을 고발하기 위해 서류를 마련해야 하지만, 병원에서는 강간 피해자의 몸과 호소에 집중하지 않고, 텍스트로 환원된 서류를 요구한다. 그녀가 이를 제출할 수 없음에 강간은 집계조차 되지 않아 없는 셈 치부된다. 이렇게 남성의 욕망, 강간에 호의적인 제도가 여성 피해자를 무한히 양성한다. 이러한 세태에서 카우타르는 은폐하는 이들 옆에서, 그녀의 몸을 여실히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를 든 기자를 배치한다. 그녀에게 연락처를 남긴다. 부조리가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기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카메라를 든 기자가 결국 마리암을 외면했지만, 카메라를 든 카우타르는 리얼리즘을 고수하며 튀니지의 부패한 현실을 치열하게 추적한다. 이번에도 카우타르는 현실을 좇아간다. 이제는 남성의 몸, 그것을 식민화하는 이념을 추적하며 말이다. 본 작품의 시작, 아주 새하얀 풍경이 펼쳐진다. 포커싱이 정확하지 않아 그 하양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윽고 서서히 포커싱이 바로잡히며 하양의 정체가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 가벽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배경을 아무것도 없는 하양으로 비워서, 그 위에 걸릴 대상에게만 주목하게 만드는 최적의 전시환경, 더욱이 충만하게 내려오는 조명에 의해 전시되는 대상의 모든 세부가 투명하게 드러나 관객에게 매개되리. 하지만 이윽고 이와 정반대의 공간이 이어진다. 빛은 미약하고, 또 여러 오브제가 뒤섞여 영화가 '전시'할, 즉 주목할 대상과 다른 것들이 잘 구분되지 않는 공간이다. 더욱이 영화가 주목하는 인물인 샘 알리는 홀로 놓인 독방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한데 뒤엉킨 공간으로 옮겨진다. 그 공간은 바로 교도소다. 이렇게 모인 죄수들은 구분이 쉽지 않다. 이러한 각 공간은 전시/비전시, 드러냄/은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교도소는 더더욱 개인의 신원, 주체성, 자유가 드러나지 못하게끔 죄수를 수용한다.  


하지만 두 공간이 동일한 점도 있다. 바로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갤러리의 큐레이터, 교도소의 간수, 그들의 손에 의해 작품과 죄수는 '수동적'으로 전시/비전시의 운명이 판가름 난다. 또 전시장에 거울이 즐비하여 실체가 구분되지 않는 것과, 익명적으로 뒤섞여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교도소의 속성 또한 서로 유사하다. 이렇게 공간, 구조에 의해 개개인의 운명이 좌우되는 경향은 카우타르의 전작 <미녀와 개자식들>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본 작품에서도 자신이 나고 자란 시리아와 이후 레바논, 벨기에, 스위스 등을 떠도는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발생하는 주체의 박탈을 카우타르는 추적한다. 이러한 영화의 연출은 이전 작처럼 리얼리즘을 지향한다. 다만 전작에서 강조되었던 롱테이크는 본 작품에서는 비교적 숏의 분절이 잦은 편집으로 치환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인물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는 동선, 아이 레벨 뷰를 통해서 체험의 효과를 여전히 유지한다. 그리고 연출은 대체로 현실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갤러리에서 작품이 전시될 때 슬로우 모션이 활용되며 현실의 시간과 달라지는 형식이 눈에 띈다. 이러한 예술, 전시는 일련의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을 연출로 보여주듯 말이다. 이렇게 전시적 속성과 대비되는 연출은 클로즈업이다. 작품이 샘의 피부임을 확인시켜주는 클로즈업, 전시된 얼굴이 아니라 영상통화하며 자유롭게 발화하는 연인들의 입, 경매장에서 포효하는 샘의 입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하며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생생한 진실을 강조한다. 이렇게 본 작품은 <미녀와 개자식들>에서도 강조된 온유하고도 몽환적인 조명처럼, 샘의 육체가 예술화될 때 사용되는 탐미주의적 경향, 즉 현실과 다른 느낌의 미장센과 리얼리틱한 연출을 대비하며 현실과 예술을 구분한다. 그리고 본 작품의 소재도 벨기에의 예술가 빔 델보예가 한 남자의 등에 문신한 것을 예술이라 선언하고 미술관에 전시한 사건이니만큼 현실에 충실하지만, 이를 카우타르의 시선에서 탐구하며 분명 영화가 뿌리내린 실화와 그녀의 예술은 마냥 같지 않다. 이렇게 빔 델보예의 사건을 바라보는 카우타르의 시선이 탐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녀와 개자식들>에서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성의 '몸'이 식민화되는 현실을 고발한 그녀는, 여전히 본 작품에서도 몸을 탐구한다. 본 작품에서는 몸이 억압받는 상황과 더불어 영혼이 줄곧 언급된다. 몸이 억압되어 있더라도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둘은 별개이지 않을까. 하지만 카우타르의 대답은 'NO'인 것처럼 보인다. 육체가 어디에 속하고, 또 어떤 상태냐에 따라 영혼은 좌우된다. 샘 알리를 유혹하는 제프리는 그 자신을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라 말한다. 파우스트는 육체보다 정신을 찬미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가 일으키는 애욕에 의해 그의 정신은, 즉 영혼은 좌우된다. 정신은 덧없음과 황망함을 느꼈지만, 육체는 어느 순간 다시금 '반짝거리는 무상함'을 향해 손짓한다. 이렇게 육체의 상태가 영혼을 좌우한다. 샘이 미술관에 감상의 목적이 아니라, 케이터링 된 음식을 먹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시리아 난민의 절박한 육체를 좌우하는 노동 현장의 열악함에서 비롯한다. 샘의 육체는 자유롭지 못하다. 한때 자유로웠다. 그가 사랑하는 아비르와 밀착하고 싶고, 사랑 고백을 하며 이를 '혁명'이라 외쳤었다. 하지만 때는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 및 내전이 일어날 당시로, 샘이 아비르에게 고백하는 순간에도 연인들은 버스 안 승객들의 눈치를 봤다. 무수한 시선이 둘러싸며 자유를 구속하는 시리아, 이윽고 자유롭게 육신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샘은 구금된다. 샘에게 자유는 과거에만 일련 가능했던 것으로 교도소로 옮겨져 자유는 박탈되고, 탈출 이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레바논으로 향한다. 그의 몸과 마음은 자국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벨기에나 스위스에 놓이는 샘은 줄곧 돌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타율이 그의 몸이 다른 곳에 있을 것을 명한다. 그리고 거기서 병아리를 감별하는 노동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랴. 영화는 이를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한다. 이전까지는 비교적 능동적인 트래킹, 특히나 그의 역동적인 발걸음에 맞춰 카메라의 무빙이 좌우됐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그의 육체가 구속되었다는 것을 가시화하는 연출이랴. 타율에 옮겨지는 샘 알리, 그리고 인간에 의해 감별되는 병아리의 고정된 운명은 별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타인에 의해 가축처럼 그저 노동하고 끌려다니는 그의 영혼은 음식을 먹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공간에서 취식하는, 육체가 영혼을 압도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몸과 영혼을 탐구한 영화는 이후 예술을 모색한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다른 예술에 등장하는 인물은 메피스토펠레스와 더불어, 피그말리온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조각가인 그는, 자신이 조소한 갈라테이아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너무 각별하여 감동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조각 갈라테이아를 인간으로 만들고, 그렇게 여인이 된 갈라테이아 또한 피그말리온을 사랑하게 만든다. 여기서 조각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이 만들어낸 사물이기에 인간에게 목적을 부여받는 다른 사물처럼, 그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목적을 부여했다면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 갈라테이아는 다르다. 만약 아프로디테가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만 그쳤다면, 그래서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피그말리온은 인간인 그녀를 단념해야만 했으리라. 만약 피그말리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갈라테이아를 붙잡았다면, 동명의 바다 요정인 갈라테이아가 그녀가 사랑하지 않은 험악한 키클롭스를 피해 달아난 운명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신화 속 피그말리온이 영화에서 언급된 이유는 본 작품 속 제프리가 흡사 피그말리온이요, 샘 알리가 갈라테이아와 유사하기 때문이랴. 제프리는 '관념이 곧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마르셸 뒤샹처럼, 또 개념미술가들처럼 자신의 번뜩이는 생각을 사물에 투영하여, 감상자들에게 제 자신의 표상과 사상을 전달하고 소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술은 일반적으로 사물이다. 제 영혼이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텅 비어있는 사물은 예술가가 느끼고 말하고자 하는 표현이 새겨지며, 자신의 영혼이 아닌 예술가의 영혼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예술에서의 표현주의적 관점이다. 그리고 예술은 감정, 영혼, 정신이 없는, 또 인간의 목적에 따라 좌우되는 사물이기에 얼마든지 예술가의 관념이 투영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체는 다르다. 케이터링 된 음식을 먹기 위해 미술관으로 향한 샘이 제일 먼저 마주한 예술작품은 인간에 의해 피부가 잔혹하게 벗겨진, 자신들의 죽음까지도 인간에게 소유된 동물 박제들이다. 동물들도 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는 정신이 있을 테지만 샘이 감별하던 병아리처럼 가축화되거나, 본 박제처럼 예술화되어 제 영혼이 아닌 다른 영혼으로 뒤바뀐다.      


이러한 손아귀가 시리아 난민인 샘 알리에게도 뻗친다. 샘이 꾸벅꾸벅 졸며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상황에서, 깨어 있는 제프리가 그의 피부를 문신하며 자신의 의도를 그의 육체에 새긴다. 이후 샘의 등에 완성된 제프리의 예술품, 유명한 사진가를 동원해 이를 촬영한다. 그 과정에서 샘이 얼굴을 숙이고, 그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프리의 얼굴이 자리한 구도가 흥미롭다. 표현주의적인 예술과 더불어, 인간의 얼굴 또한 영혼과 내면의 통로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제 자신의 얼굴, 즉 영혼이 샘에게 없다. 제프리에 의해변형된 육체, 그에 의해 좌우된 영혼은 제프리의 얼굴이자 정신이지 샘의 것이 아니다. 그들에 의해 돈도 벌고 비자도 얻게 된 샘은 춤을 춘다. 문신이 제프리의 예술이라면, 춤은 샘의 예술이다. 그의 기쁨, 분노 등 진실한 몸과 영혼의 움직임이 춤이다. 하지만 자신의 예술, 자신의 표현, 자신의 영혼은 그가 전시되는 미술관에서 은폐된다. 한 소녀가 그의 등에 새겨진 솅겐 비자를 궁금해 해서, 샘이 이를 대답해주려 하지만, 솅겐 비자를 새긴 것은 제프리이지 샘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소녀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이렇게 육체가 변형되고, 그렇게 변형된 육체가 영혼까지 좌우하는 지배가 곧 동시대에도 이어지는, 서구가 중동에 뻗치는 식민주의라고 카우타르는 고찰한다. 영화의 배경은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 및 내전으로, 이를 촉발한 다양한 원인 중에서 서구, 특히 미국이 중동의 실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막무가내로 민주주의를 이식시키려 한 야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 샘 어머니의 다리가 폭격에 의해 절단된 것, 시리아의 국민들이 난민이 되어 자국에 놓인 가족들과 스카이프로 불완전하게 연락하는 비극이, 동시대에도 여전한 제국들과 무관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아비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샘 대신, 벨기에의 외교관인 지야드와 결혼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혼해야 하는 이유는 서구의 힘을 빌린 존재가 부유하기 때문이요, 이에 중동은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랴. 샘에게 제프리를 연결해주고자 하는 소라야는 매우 무례한 태도로 계약서를 던진다. 샘과 자신이 동등하지 않다는 듯 말이다.   


또 그녀가 관리하는 갤러리에 백인들은 비교적 출입이 자유롭지만, 피부가 거무튀튀한 아랍인의 출입은 엄격히 관리된다. 소라야에 의해 차단되거나, 그들에게 대가를 내어주며 출입이 허락된다. 출입이 허락된다 해도 난민들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남는 음식을 처리하는 존재, 포주와 다를 바가 없는 소라야에 의해 매매되는 존재다. 샘이 말하는 영계처럼 백인들의 이데올로기에 편입되면 서구는 시리아의 구원자임을 자처한다. 비자를 허용시키고, 호텔을 잡아주며 삶을 윤기 나게 해준다. 영계에게 먹이를 주듯, 백인들도 난민에게 대가를 일부 내어준다. 하지만 여권을 소라야가 쥐고 있고, 또 그녀는 영화 속 표현인 '포주'처럼 샘을 관리한다. 그를 팔아넘기는 것은 흡사 인간을 영계 대신 팔아넘기는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지만, 스위스의 '선진적인 법'을 운운하고, 사람 대신 예술을 강조하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영화 속 샘이 놓이는 공간에서 그가 스스로 말할 기회가 과연 존재했던가. 그는 법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호소할 수 있었던가. 서구의 법은 서구에 소속된 자국민들을 중시하여, 그 바깥의 타자들을 '선진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식민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은 샘의 '등'처럼 그들이 볼 수 없고, 손이 닿지 않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사유화하는 법을 만들어내지는 않는가. 그 등을 자신들이 관리하고 화폐처럼 소유한다. 이에 영화의 도입부에서 포착되었던 교도소와 샘이 전시되는 벨기에의 전시장은 별 다를 바 없다. 문신은 강조하지만 샘을 은폐하는 조명, 작품은 전시되지만 자유로운 인간은 은폐되는 공간으로서 말이다. 그들의 몸 일부를 식민화하여 소유하고, 이에 당사자는 자신이 바라는 표현이 아닌, 그들이 요구하는 표현을 생산해야 한다. 누군가에겐 독재, 누군가에겐 예술.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다. 소라야에 의해 샘은 흡사 화폐로 전락한다. 그를 소유한 존재들이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는, 또 그들의 요구대로 쓰이고 보여야 하는 사물로 말이다. 동시대에도 여전한 식민주의는 백인의 쓸모에 따라서만 난민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다. 더욱이 백인에게 장악된 난민의 육체를 미술관에 전시하여, 이를 마주하는 아이들의 뇌리에 스테레오타입을 새겨놓는다.      


그러나 샘은 이를 거부하고 경매장에서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지른다. 이러한 자유로움을 경매장의 백인들은 테러로 여긴다. 그들에게서 중동은 언제나 그들 손아귀에서 통제되는 유순한 존재, 아니면 테러리스트로 규정할 뿐이다. 백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자유로운 중동은 없다. 이러한 자유로움이란 나를 귀속시키려는 부당한 시스템을 벗어나, 스스로 가야 할 공간을 선택함에 비롯한다. 진정으로 선진적인 법이란 자유를 더욱 널리 확장하는 법이지, 결코 식민주의 시대의 자유를 구속하는 법이 아니다. 이렇게 시스템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샘은 자신의 예술을 펼칠 수 있다. 제프리가 표현하거나 관념을 투영한 것이 아니라, 구속당한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자유를 선택하려는 샘의 피부와 삶이 투영된 예술을 말이다. 인간은 예술가여야지 예술이어선 안 된다. 이렇게 본 작품은 빔 델보예의 사건을 모티브로 서구와 시리아의 여전히 수직적인 관계를, 영혼을 좌우하는 육체의 소유를 통해 보여준다. 어쩌면 시리아의 비극은 자국과 타국, 그 어느 곳에서도 몸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영화 결말에서 ISIS에 의해 참수되는 영상을 조작해서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아, 그 누구도 쏘아보지 않아야지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씁쓸한 시선의 디아스포라다. 영화는 이러한 비극을 촉발시키고, 이후에도 식민화를 끊이지 않는 서구를 비호하는 예술을 비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예술을 펼쳐야 하리, 나의 감정과 표현을 예술에 담아야 하리, 만연한 강제혼 속에서 나의 사랑을 되찾아야 하리, 카우타르는 사랑이 곧 저항이라 말한다. 다만 샘과 아비르의 사랑이 주축이 되는 중반부부터 다소 평범한 멜로극으로 전락하여 영화가 서구와 시리아의 관계를 구축하며 만들어낸 치밀한 긴장감이 느슨해지고, 더욱이 후반부로 향하며 '반복'되는 샘의 참극 또한 극의 초반부에 촉발되었던 긴장과 충격에 비하면 다소 안일하다. 그래서 충격적인 소재를 살리지 못한 극의 촘촘함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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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218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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