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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09. 2021

줄리아 듀코나우, <티탄>

대자의 욕망

줄리아 듀코나우(Julia Ducournau), <티탄>(Titane) - 대자의 욕망    

“경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험에 휩쓸려들었을 때 빠져드는 상태를 가리키며, 놀람의 계기를 제공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사에서 에로스는 언제나 적정 수준 금기시되거나 절제가 요구되었다. 태초 인류에게 정사는 분명 인간이 거세할 수 없는 동물성의 일부요 삶을 지배하는 정수였지만, 한편 이에 걸맞은 대가를 수반하였기 때문이다. 성행위에는 필연적으로 파열이 발생하고, 많은 양의 체액과 피가 쏟아져 나온다. 의학 지식이 전혀 없던 태초 인류에게 쾌락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피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 상처, 에너지의 낭비 등 모든 징후가 당대에는 곧 죽음이었으니. 성행위뿐만 아니라, 그것의 결과인 임신과 출산 또한 누군가의 죽음으로 한 생명이 태어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행위는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전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자손을 낳기 위해서 인류는 필연적으로 성행위를 해야 하고, 또 언제나 에너지를 이성을 따라 활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노동의 시간에만 성행위를 금지하거나, 또 축제를 통해 공동체가 집단으로 위반할 것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애초에 축제처럼 무수한 에너지를 흥청망청 낭비하는 것이 탄생이니, 이성적인 관점에서 한 생명은 효율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인류가 점차 진보해가면서도 성교는 결코 온전히 허용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 성교는 적절한 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와 올바른 이성이 명하는 자제력을 바탕으로, 절제된 성교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비교적 널리 찬미 된 편이었으며, 오히려 절제의 미덕 속에서 쾌락은 극대화되었다. 그러나 기원후 쾌락은 전면 금지된다. 번식에 반하는 반자연적인 성관계가 금지되었고, 부부가 서로를 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도 엄정히 금지된다. 이에 기독교 체계 내에서 쾌락을 맛본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낙인이 찍힐 각오를 단단히 하고 불온한 경계로 넘어가는 도전이었다. 또 서구에서 17세기에 이르러 성은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18세기에 이르러 다시금 위축되었는데, 인구수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떠올라, 출산율과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 성교는 오직 번식의 수단으로, 쾌락은 인류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에서 쾌락을 위한 성교를 나눈다는 것은 언제나 크든 작든 죄를 짓는 것이었다. 한편 성교나 우리의 욕망 자체가 언제나 금기를 넘고 싶어 하는 것일지 모른다. 인류학자 바타이유가 말하듯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울타리 내에서의 성행위는 질서를 뒤엎는 자유와 쾌락을 맛볼 수 없게 되므로, 단지 습관이자 의무가 되어 성교 그 자체의 본령과 맛은 잃어버리게 되므로, 금기를 상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것이 성애에 목매는 인간의 필연일지 모른다. 그리고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줄리아 듀코나우의 <티탄>도 과감하고도 파격적인 위반을 시도하여, 우리의 원초적 감각을 극대화하는 작품이다. 1983년 파리 태생의 줄리아 듀코나우는 단편 <쥬니어>와 장편 데뷔작 <로우>로 영화계를 경악에 빠뜨리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프랑스의 청년 감독이다. 그녀의 작품은 매우 과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반항적이고 저돌적인 헤비메탈과 일렉트로닉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인물들의 행위는 비관습적이어서 예측할 수 없고, 잔잔하던 연출은 어느 순간 역동적인 파도에 올라타듯 격정적으로 휘몰아친다. 이 같은 충격의 이유는 듀코나우가 탐구하는 인물들의 태도에 있다. 그들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단편 <쥬니어>는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학교를 배경으로 한 단편이다. 그들은 다툼이 잦은데, 선생이나 다른 학생들에게 제 뜻을 관철하지 않고자 반항하기 때문이다. 서로는 곧 '끈적'거리는 비밀을 품고 있는, 이에 수용 불가한 타인이라서 다툼이 잦지만, 그것까지도 용인하는 ‘사랑’을 긍정한다. 또 그녀의 작품에서는 성장, 대자성, 실존적 관점이 도드라진다. 이에 크로넨버그를 연상케 할 정도의 과격한 신체 변화가 주를 이룬다. <쥬니어>에서 흘러내려 끈적거리는 피부, <로우>에서는 발진에 의해 갈라지는 피부, 주인공들은 이전의 자신을 변태하며 재탄생한다. 인물들은 변화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식중독에 빠져, 이전의 자신을 '구토'로 게워낸다. 그리고 새로운 내가 채워진다.      


또 <쥬니어>, <로우>에서 <티탄>으로 이어지는 일대기도 그렇다. 주인공은 언제나 그녀의 뮤즈인 가렌스 마릴러가 분하는 '저스틴'이라는 이름을 벗어나지 않는다. <티탄>에서도 저스틴이란 이름의 중요한 조연으로 참여한다. 똑같은 배우와 배역은 새로운 작품으로 뛰어들며, 이전의 자신을 비워내는 고행을 겪고, 같은 존재가 다른 존재자를 출산한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충격적이다. 단편 <쥬니어>에서도 어머니의 그늘에 있는 가정에서의 연출과 학교에서 연출이 다르고, <로우>에서도 과잉보호 및 채식주의라는 이념을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가정과 환영회의 일환으로 피를 끼얹고 육식, 섹스를 강요하는 학교는 다르다. 새로운 환경에 진입함에 따라서 그들은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듀코나우의 인물은 좁다랗고도 편협한 세계에 갇혀있다. 프로이트의 이론 중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과 충격의 '보호막'에 관한 구절이 있다. 보통 나 자신은 이러한 보호막을 깨트리지 않을 만큼의 충격만을 본인한테 허용하는데, 외부의 충격은 보호막의 한계를 모르기에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외부의 충격은 보호막이 파괴되는 폭력이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경악’이 발생한다. 듀코나우의 세계에서 인물들의 보호막은 너무나도 약해 경악은 빈번하다. 감당할 수 있는 감정과 충격의 폭이 넓으면 외상의 후유증은 덜하나, <로우>의 저스틴은 부모님에 의해 다양한 충격을 감내할 보호막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막이 깨지면 충격의 한계선이 사라져 폭주하는데, 듀코나우가 관객들에게 안기는 두 번째 충격이 바로 보호막이 사라진 주인공들의 폭주에서 기인한다. 또 듀코나우에게 인간은 그저 살덩이, 도축된 고기, 피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미학은 흡사 프란시스 베이컨과 유사한데, 그가 인간을 도축장의 고기로 환원 시켜 살덩이이자 동물, 그 이상이 아닌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듀코나우도 합리성, 이성, 지성, 인간성 등 인류의 모든 신화를 걷어내어 그저 고기일 뿐인, 돼지와 별 다를 바 없는 욕구와 욕망에 허덕이는 인간의 본질과 마주하게 만든다.      


이러한 그녀의 작품에서 ‘언니’는 <쥬니어>에서 동경의 대상이요, <로우>에서는 스승이자 거울로 제시되며, 동생 저스틴은 언제나 언니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토해내거나 피부발진이나 왁싱에 의한, 감상자가 인물을 통해 자신의 피부와 감각을 재인하며 움츠러들게 만드는 자극적인 촉각, 소의 관장이나 동물의 해부 등 그간 회피해온 충격을 선사하는데, 과연 <티탄>에서 듀코나우는 관객에게 어떤 경악을 안기게 될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에서 차체의 세부를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연출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론 전혀 관심 가지지 않았을 차체의 세부를 짧은 숏, 각각에 담아 상세히 주목한다. 듀코나우는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딱딱하지만 매끄러운 차의 감각에 주목한다. 알렉시아가 사랑에 빠질 법한 차의 감각을 클로즈업으로 구현한다. 그렇게 파편화된 차의 세부가 클로즈업으로 담긴 여러 숏이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며, 그것이 곧 도로를 질주하는 알렉시아가 타고 있는 차가 되리라. 이후 펼쳐지는 영화의 연출은 의외로 온건하다. 물론 담기는 피사체들은 <쥬니어>나 <로우>에서처럼 우리에게 불쾌감을 자극한다. 젖꼭지를 뜯는 과격한 촉각이나 감독의 여전한 피부발진, 타란티노의 스타일과는 다른 리얼리틱한 폭력의 감각 등이 말이다. 하지만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와 연출이 매우 건조하다. 영화의 카메라는 대체로 고정되어 있어 수동적이고 정적이다. 가뜩이나 영화의 초반부에는 안정적인 평면 구도로 포착되어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안정적인 연출을 배반한다. 너무나도 평온한 구도와 운동감 속에서, 교통사고라는 과격하고도 자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전까지 알렉시아와 아버지의 갈등에 서서히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었지만, 연출의 수동성과 적막에 의해 감상자는 큰 충격을 예상하지 않았으리라. 영화의 경악은 이러한 수동적이고 정적인 연출에서 발생하는 커다란 괴리, 연출의 감각을 배신하는 거대한 폭력이다. 오히려 카메라가 야단법석을 떨었다면 감상자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본 작품을 감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나 연출이 정적이고 안정적임에 감상자는 충격에 대비하지 않게 되고, 이에 따라 듀코나우가 선사하는 경악에 흠뻑 놀라게 된다.     


이후에도 영화의 연출은 유사하다. 알렉시아가 차와 성교를 나눌 때, 영화 내부의 운동감은 아주 격정적인 핸드헬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역시나 시치미 뚝 떼고 온건한 태도로 이를 포착한다. 충격을 예고하거나 함께 올라타지 않는 카메라에 의해 경악은 더욱 고조되며, 더욱이 과장하지 않는 카메라의 태도 덕에 알렉시아의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사랑을 보편의 영역으로 편입해온다. 이는 2017년 개봉한, 보편적인 문법으로 일반적인 인식과 예측에서 줄곧 빗겨나간 욕망을 천연덕스레 포착한 폴 버호벤의 <엘르>와 유사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카메라는 대체로 멈춰 있지만, 항상 정지되어 있진 않다. 영화는 알렉시아의 능동적인 선택에 주목하며 이에 걸맞은 트래킹을 선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상황, 공간에서 벗어날 때, 이에 따라 새로운 공간에 진입하며 <로우>에서처럼 기존의 나를 변태할 때 말이다. 또 영화의 전개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며, 매우 우발적이다. 본 작품을 추동하는 힘은 바로 감성과 욕망이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어떤 즉흥적인 선택을 내릴지 전망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해 전개되기에 영화 속 인물들의 선택을 이성으로 이해하기란 매우 힘겨운 일이다. 그저 느껴야 한다. 어린 알렉시아의 변덕에 의해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것도,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들었다가 살해하는 그녀의 욕망도, 모두 이성으로 이해하기에 일련 한계가 있다. 욕망을 힘으로 추동하는 작품, 그래서 영화가 다루는 소재 또한 사랑 내지는 욕망이다. 영화는 거리감으로 애욕을 구현한다. 사랑은 곧 닮아가는 것이다. 차를 사랑하는 알렉시아, 어린 시절 그녀는 줄곧 차가 내는 굉음을 따라 한다. 그것이 아버지를 불쾌하게 만든다. 이윽고 교통사고가 난 이후 차의 소재와 동일한 티타늄을 뇌에 이식받는 수술을 받게 된다. 이에 그녀의 생각은 차와 일련 닮아진다. 자신의 몸의 일부에 티타늄이 존재함에, 온 차체가 티타늄으로 뒤덮인 기계를 더더욱 사랑한다. 따라 하다가 닮게 된 그녀는 더욱 차와 옴짝달싹 달라붙게 된다.      


이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댄서인 저스틴과 만나게 된다. <로우>에서도 언니의 이름은 알렉스였고, 동생의 이름이 저스틴이었다. 그리고 저스틴은 처음에는 이질적인 자매를 부정하다가, 이윽고 거울처럼 사랑하고 닮게 된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저스틴은 알렉시아를 흠모한다. 저스틴은 유두에 피어싱을 박았고, 알렉시아는 뇌에 티타늄이 박혀 있다. 흡사 서로의 자력에 이끌리듯, 저스틴의 피어싱에 알렉시아의 귀 부근 머리카락이 뒤엉킨다. 나와 너의 머리칼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겨우 떼어내지만, 힘으로 잡아떼느라 분리하기엔 매우 고통스럽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나와 유사한 존재에게 이기심을 쏟고, 또 고통의 표상을 보면 그 대상이 아닌 자신을 제일 먼저 돌아본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우정조차도 나의 개성과 잘 맞는, 또 나의 개성을 가진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에로스로 이어질 것이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알렉시아는 자신과 유사하다고 여기는 차를 사랑하고, 이에 자신의 몸에 금속을 박았으며, 마찬가지로 몸에 금속이 박힌 저스틴을 사랑한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비추어진 나를 사랑하고 있는 형국이기에, 상대방과 나는 찰싹 달라붙어 뒤엉킨 머리카락처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본 작품에 만연하는 것은 상대방을 진정 위하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하는 욕망이다. 일단 알렉시아의 직업은 댄서다. 춤추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몸에 솔직하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춤은 가장 솔직한 예술, 몸과 감성의 진실한 자기표현이며, 이성은 오직 일련의 통제력만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몸에서 발원하는 욕망을 댄서는 거부하기 어렵다. 영화의 후반부, 아드리안이라는 배역 이전에 알렉시아라는 몸을 가진 댄서는 춤을 거부하지 못한다. 춤이란 이성으로 연기하기 어려운 것, 음악과 상황에 따른 감성의 솔직한 자기표현, 대자로의 표출이다. 이렇게 솔직한 몸은 구애한다. 바로 차를 향해 말이다.     


본 작품에서 차는 여성형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에서도 남성들이 가득한 카센터에서 그들에 의해 좌우되는 차가 여성형으로 불리듯 말이다. 그리고 박람회의 차들과 그곳에 공연하러 온 알렉시아는 동일시된다. 알렉시아도 곧 무수한 남성들에 의해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성형인 차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듀코나우는 여성 감독으로서 여성이 느끼는 욕망의 시선을 담아낸다. 영화의 중반부, 알렉시아는 빈센트로부터 떠나가려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남성들의 과격한 언사가 두려워 다시 버스에 내려, 빈센트의 울타리 안으로 돌아간다. 남성들이 쏘아보고 희롱하는 욕망이 두렵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알렉시아를 뒤따라온 한 이름 모를 관객이 소름 끼친다. 영화는 여성이 동의하지 않은 채로 남성이 점점 좁혀오는 거리감의 공포, 후반부에 소방관들이 알렉시아를 헹가래 올려 남성이 가득한 공간에서 여성임이 탄로 날 수 있는, 수동적으로 옮겨지는 두려움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주도권을 여성의 손에 되돌려놓는다. 차는 마냥 여성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알렉시아에게 차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남성이다. 댄서인 그녀는 관객들 보기 좋으라고 춤추지 않는다. 그녀 몸의 솔직한 표현은 차에게 구애하고, 그것과 애무를 나눈다.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 차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수동적 차는 알렉시아의 구애에 의해 반응한다. 후반부에도 알렉시아가 아드리안이 된 상태에서도 그녀는 남성 소방관들이 기대하지 않은 낯설고 이질적인 춤을 춘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들에게 보기 좋은 욕망을 띠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알렉시아의 아버지가 자신이 바라지 않은 딸의 행동을 경멸하는 것도 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 딸이 차가 아니라 자신을 닮길 바라는 욕망, 이런 점에서 욕망은 나와 닮은 대상을 바란다. 알렉시아는 자신을 뒤따라온 남성이 키스를 시도하자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이내 곧 즐겼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금속 재질의 머리핀을 그의 귀에 박아버린다. 그를 거부하여 죽이고자한 것일까.      


하지만 감독이 단순히 남자의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것 이상으로,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내는 장면을 길게 비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알렉시아가 그의 타액을 불결해하는 것처럼, 남자 또한 알렉시아의 체액과도 같은 '금속'이 그녀처럼 귀 부근에 박히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남자는 자신의 요소를 게워내지만, 알렉시아의 요소를 채워내지 못하고 사망한다. 저스틴도 마찬가지다. 알렉시아가 그녀의 유방에 달린 피어싱을 먹어버렸다. 이에 따라 유사성이 사라진 저스틴에게 마찬가지로 머리핀을 박아버리지만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알렉시아는 개의치 않는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나를 사랑하고, 욕망을 성취하고 싶었을 뿐이니 말이다. 귀 부근에 금속이 박힌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기에, 그녀의 욕망을 위해 타인들은 머리와 몸에 쇠가 박혀 사망한다. 그래서 대상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대상에 나의 어떤 요소를 투영하느냐에 달렸다. 영화의 후반부에 빈센트는 알렉시아가 아드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지만, 그의 욕망은 그저 아들을 갖는 것, 그리고 추측하길 부재한 아내의 자리를 채워줄 부부의 분신이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아드리안인지 알렉시아인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알렉시아가 아드리안과 닮아 아들 노릇을 해주면 그만이다. 이러한 빈센트는 소방관이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 욕망은 매우 뜨겁게 타오른다. 알렉시아가 차와 성교를 나눌 때 타오르는 전조등, 범죄를 은닉하기 위한 방화 등, 욕망은 곧 화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욕망에 좌우되는 인간은 소방관을 연기하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진실을 알고 있는 젊은 소방관을 죽이고, 그를 불태운다. 진실을 아는 자가 죽는다면, 알렉시아를 계속 아들이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빈센트는 아들을 지키지 못한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아들을 해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자신마저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선언한 사명보다, 살고 싶은 욕망이 우선이다. 아드리안이 살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아들의 죽음과 알렉시아를 둘러싼 모든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는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알렉시아는 아드리안이어야만 한다. 인간의 불타오르는 욕망은 꺼트릴 수 없다. 인간이 불태우는 것은 이전의 자신, 규정된 즉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망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금기를 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자, 이후에는 차, 그리고 여성, 흑인, 말미에는 빈센트와 근친에 가까운 에로틱한 관계로 이어진다. 욕망은 이렇게 외부에 봉사하지 않는다. 더 자극적이고 짜릿한 감각을 원하는 나의 몸에 봉사하고, 나의 환상을 성취한다. 하지만 욕망에는 대가가 따른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리, 하지만 알렉시아의 욕망은 상대방이 죽어서 쾌락을 맛볼 수 있다면 기꺼이 살해한다. 이에 따라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고 이를 회피하고자 알렉시아는 변신한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차를 위해서 자신이 차를 따라 하고 티타늄을 머리에 박는 변신을 보였다면, 책임이 뒤따르는 자신을 포기하고자 나를 변용한다. 이렇게 차의 세계, 그리고 사회라는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선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는 <로우>의 탐구와 유사하다. 사회에서 그녀는 살인자로, 그리고 차와 관계를 나누는 타자로 참여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다시 참여하기 위해 기존 자신을 포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트래킹이 사용된다. 트래킹의 능동적인 운동감처럼 변화는 자신의 과거가 고스란히 묻어난 머리칼을 포기하는 것, 자신이 그간 유지해온 이목구비에 폭력을 가해 변형을 주는 것, 이에 따라 각고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을 몸소 ‘선택’하는 것이다. 알렉시아가 자신의 몸에 가하는 무력처럼, 불의 고통 또한 대상을 변형시킨다. 자신의 옷가지와 집을, 아버지를, 그리고 진실을 불태워야지만 다른 진실로 대체되리. 이러한 변용을 가시화하는 듀코나우의 여전한 피부발진, 구토, 복통이 이어진다. 그녀는 외부에 의해서 규정되고 변형되는 객체가 아니다. 그녀는 능동적인 주체요, 또 세계와의 관계에 따라 존재자를 변화시키는 대자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도 알렉시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차를 흉내 내고, 제멋대로 차에 앉는다. 그렇게 상황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욕구에 충실하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선천적으로 규정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를 마냥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불태우고, 자신을 품어주는 빈센트를 아버지로 재선택하며 스스로 관계를 정립한다.      


자신을 혐오·경멸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쏙 빼닮아 연쇄살인을 일삼던 알렉시아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닮아가며 부정하던 임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태아를 사랑한다. 이렇게 알렉시아에서 아드리안이 되었고, 빈센트는 10여 년 만에 재회한 아들을 각별히 여긴다. 이에 그가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차와 방문을 잠근다. 하지만 알렉시아는 그것조차도 벗어나길 원한다. 빈센트와 머무르고 싶다면 자신이 선택해서 머무는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아들이기에 아드리안을 신이자 예수라 선언한다. 하지만 단순히 대장의 아들이라서 알렉시아는 신이자 예수가 아니다. 외부의 규율, 구조에 지배되지 않고, 스스로 일상을 뒤바꾸고 심지어 자신의 삶까지도 창조하며 철학 하는 존재이기에 알렉시아는 신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듀코나우의 여전한 신체변형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전 작품에 비한다면 본 작품의 신체변형은 일상에도 존재하는, 현실적 요인이다. 바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다. 알렉시아가 척추가 금속인 아기가 아닌, 일반적인 인간 아기를 임신했더라도, 그녀들의 배와 가슴은 부풀어 오른다. 석유가 흘러나오지 않더라도 그녀들의 가슴에선 젖이 새어 나오며 몸의 변화를 겪는다. 이전 작품들에서 ‘성인식’에 상응하는 구토와 폭식은 본 작품에서 임신 이후 아기가 채워짐에 이전 자신을 게워내는 구토, 아기의 취향에 맞춰 금속 재질을 탐식하는 폭식으로 이어진다. 또 태아는 나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연인의 편린이기도 하다. 이에 연인의 일부가 내 몸에 새겨져, 나는 연인과 닮아간다. 알렉시아는 연인의 분신인 태아가 섭취하는 것을 탐식하고, 이에 연인과 닮아간다. 또 기존의 나를 변태하는 피부발진은 곧 임신에 의한 호르몬 변화, 일반적인 임신의 튼살에 상응하는 알렉시아의 금속 재질로의 피부 변화로 나타난다. 즉 여성들은 새로운 존재가 자신의 배에 자리 잡으며 기존의 나를 포기하고 변신을 겪게 된다. 오직 자신만 사랑하는 알렉시아는 태아라는 타인이 자신의 배 안에 터를 잡은 상황이 달갑지 않았고, 이에 따른 자신의 변화 또한 낯설었다. 그래서 알렉시아는 이전의 자신을 유지하고자 낙태를 시도했지만, 이는 실패하고 이후 변신을 긍정한다. 차를 사랑하는 자신을 지속해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이랴.      


이렇게 본 작품에서는 여성의 임신과 더불어, 번식의 의미를 고찰한다. 빈센트는 늙었다. 약물을 주입하며 지속해서 젊은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지만, 이미 노쇠한 육체는 죽음의 그늘이 서서히 뒤덮이고 있다. 그래서 빈센트는 아드리안이라는 존재보다도, 자신의 분신이자 이어지는 삶인 '아들'에 집착한 것이랴. 아드리안은 이미 죽었다. 소방관들이 진화를 훈련하는 장면에서, 빈센트는 한 소년이 화마에서 도망치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환영을 목도한다. 그의 아내는 아들의 죽음을 분명 인지하고 있다. 아드리안은 분명 죽었지만 이를 실종이라 여기며, 유전자 검사를 거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돌아온 아들이 아드리안이 아니라는 진실을 무시할 수 있었을 테다. 빈센트는 돌아온 아드리안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 짧게 머리를 자르고, 수염이 나게 만들며, 소방관으로 훈련시켜 자신처럼 만든다. 그렇게 빈센트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존한다. 그리고 한 노파의 구조요청에 의해 방문한 집에서도 어머니인 노파와 그녀의 아들은 구분되지 않는다. 아들의 호흡이 멎음에, 노파도 호흡이 멎는다. 자식은 곧 부모의 분신이다. 이에 따라 알렉시아는 자신이 닮아야 하지만 닮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집에 불을 질렀으랴. 이러한 점에서 자식은 부모로부터 달아나는, 닮았지만 마냥 분신이 아닌 대자이자 타자다. 그렇기에 노파를 다시 호흡하게 만들어 타자인 서로를 분리한다. 또 부모는 이들을 욕망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 알렉시아는 친부모를 불태우고, 알렉시아가 낳은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과 배를 찢고 나온다. 자식들은 부모를 그들 자신으로 여기지 않기에 이들을 훼손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부모는 사랑한다. 빈센트 또한 아들이 아드리안이 아니라, 알렉시아라는 딸이더라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알렉시아는 자신과 닮은 분신이지만 명백한 타자인 아기를 출산하며 숨을 거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수반되는 무력과 불, 그것은 곧 새로운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한 진통과 출산의 고통과도 같다. 그렇게 부모는 자식을 열렬히 사랑하며, 이를 위해서 화형에 가까운 고통을 인내하며 자신을 희생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드리안이 아닌 알렉시아가 낳은 이질적인 손주를 기꺼이 사랑한다. 영화는 그 거룩한 사랑으로의 전환과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함을 신실한 배경음악으로 승화하며 극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듀코나우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긍정한다. 진정 그 대상을 사랑하는 나는 그를 위해서 기존의 나를 포기할 수 있다. 나의 몸에 금속판을 새기며 그의 세계에 참여한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타인을 나의 세계를 위해 변형시킨다. 그것이 곧 사랑과 욕망의 차이이랴. 이러한 사랑과 욕망에 따라 사람은 변신한다. 그리고 변신은 영화의 특별하지 않은 카메라처럼,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 여성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알렉시아가 무수한 사람을 살해하면서까지 자신의 임신을 유지하려는 '낭비'의 명분을 자기 보존으로 진단한다. 자기를 보존하고 싶은 욕구는 곧 무수한 타인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다. 심지어 나 자신이 죽더라도 말이다. 아드리안을 되찾은 빈센트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생명위협과 분신자살, 그리고 자신의 배가 갈라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출산을 감행하는 알렉시아의 태도가 그렇다. 그렇게 나는 재탄생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나', 기존의 나로부터 타자인 나다. 자식은 부재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 내지는 젊은 부모의 삶을 마냥 답습할 필요가 없다. 자궁을 찢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이러한 타자를 욕망하지 말고 사랑하랴, 단편 <쥬니어>에서의 사랑이란 곧 <티탄>의 부모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로우>의 결말에서 아버지는 저스틴에게 자신의 피부발진을 고백하고, 딸들의 비극이 자신으로부터 이어진 것을 참담해 하지 않았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티탄>에서는 타자임을, 부모의 분신으로부터 대자로의 변용을 말한다. 이렇게 제약 가득한 세상에서 영화로의 위반을 시도하는 파격적인 작품, 하지만 피부발진이나 구토라는 과격함, 발칙함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자 경악의 충격은 이전보다 덜하다. 또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이유는 그저 피상적인 무관심, 단절, 강요 등으로만 제시된다. 이에 따라 영화의 초반부는 <로우>와 달리 반항의 명분이 덜해 오직 원초적 자극만 남아있다. 감정에 집중한 작품이니만큼, <로우>에서처럼 이러한 감정을 일으키는 환경과 구조를 더욱 면밀히 구성해야만 했다. 여성의 도처에 자리한 변신, 욕망을 탐구하여 삶에 더 밀접해진 점은 흥미로우나, <로우>에 비한다면 다소 안일하다. 여전한 감독의 작가주의적 끈기와 함께 그것의 안일함과 통속화, 즉 명암이 함께 공존하는 다소 아쉬운 범작, 그녀에게 황금종려상은 조금은 일렀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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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20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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