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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04. 2021

파올로 소렌티노, <신의 손>

삶: 슬픔과 기쁨, 비극과 꿈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 <신의 손>(The Hand of God) 

- 삶: 슬픔과 기쁨, 비극과 꿈     

“맙소사, 제가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가져가는지 모르실 겁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모아서 꼭꼭 뭉칠 수 있다면 금덩어리 하나는 족히 만들어질 텐데!” -안톤 체호프-

미학에서 예술을 규정하는 관점은 크게 세 갈래로 논의되어 왔다. 하나는 예술은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라는 ‘모방론’, 다른 하나는 예술은 대상의 특별한 가치를 미적으로 의미 있는 형식으로 부여한다는 ‘형식주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예술가가 어떤 감정인지를 느끼며, 화자와 청자가 서로 대화하며 소통하는, 즉 예술의 정감적 측면에 주목하는 ‘표현주의’가 있다. 표현주의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중 콜링우드의 관점이 가장 온건하다. 그는 예술의 목적이란 예술가 '스스로에 대한 앎'이라 주장한다. 예술가는 '내가 느낀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애쓰는 자다. 분명 나는 보편적인 인간상과 다른 특유하고 유일한 '나'이지만, 예술을 하기 전에 나라는 존재, 그리고 감정은 뒤죽박죽 뒤엉켜있다. 그래서 콜링우드는 미묘하게 차별화된 다양한 감정들을 개별화하는 것, 이를 통해 '특정한 성격'에 대한 지식으로 향하는 과정이 창작이라 말한다. 이러한 예술가의 언어를 감상자가 감상하고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교류, 소통, '협업'을 콜링우드는 예술의 주요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락, 계몽 등을 위해서만 예술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더불어 한 개인의 인생과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예술을 접하기도 한다. 동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난니 모레티의 영화도 그런 점에서 웅대하게 평가받지 않던가. 그는 1인 제작 시스템을 통해 언제나 자전적인, '일기 영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작자나 각본가들의 공동 작품으로서 영화가 아니라, 오직 난니 모레티 고유의 시선과 삶, 철학이 녹아들어 간 영화를 감상자는 교접한다. 그리고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또 깊이 탐구한 예술가의 자전적 작품에는 곧 인간의 웅대함과 본질이,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한 세상의 또 다른 일면이 나타난다.     


그중 유년기의 자전적 이야기는 한 개인의 삶이나 예술가의 예술관을 이해하기에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수한 '처음'이 하얀 캔버스와 같은 뇌리에 각인되고 그려지는 순간, 한 개인의 인생은 이 같은 '처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추억도, 사랑도, 우상도… 난니 모레티의 이후 세대로 평가되며 동시대 이탈리아 영화를 이끄는 소렌티노도 본 신작 <신의 손>에선 자기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간 자신의 시선이 투영된 타인의 이야기, 형이상학적 탐구를 일삼던 그가, 자신의 유년기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는 어린 날의 추억과 잔상을 황홀하게 스크린에 구현한다. 1970년 나폴리 출생의 파올로 소렌티노는 동시대 이탈리아 감독 중에서도 가장 탐미적인 영화를 펼쳐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테오 가로네나 앨리스 로르와처가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하고, 피에트로 마르첼로가 이탈리아 외부의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을 계승한다면, 소렌티노는 1960년대 시기의 페데리코 펠리니, 네오리얼리즘으로부터 탐미주의로 전환한 시기의 루치노 비스콘티와 유사한 성향을 띤다. 펠리니의 휘황한 색채는 소렌티노의 쨍한 원색과 유사하고, 비스콘티의 대표작 <들고양이>에서 펼쳐진 르네상스 회화를 연상케 하는 장엄하고도 화려한 미장센은 소렌티노가 현대의 건축을 배경으로 옮겨오고 있으니 말이다. 소렌티노의 작품 경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 디보>와 <그때 그들>이 주축이 되는 전기 영화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위한 노래>, <그레이트 뷰티>, <유스> 등에서 도드라지는 형이상학적인 영화다. 전기 영화에서 그는 마냥 인물의 일대기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물론 <그때 그들>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부패를 폭로한 배우가 참여한 것처럼, 대상을 허구적으로 그려내진 않지만, 대상이 바라보는 세상보다도 소렌티노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나는 연출이 강조된다. <일 디보>에서 소렌티노는 자신이 바라보는 안드레오티에 대한 관점을, 그가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양지를 구축한 연출, 눈에 띄지 않아 중상모략을 일삼는 음지에서의 연출을 리듬과 음악의 대비를 통해서 시청각적으로 상상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그때 그들>에서는 베를루스코니의 우민화 정책을 몸소 체험하게 만드는, 내러티브나 의미가 전혀 없지만 마냥 탐미적이고 쾌락적인 1부의 연출을 통해, 감각적으로 그의 시대를 구현하여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전기 영화에선 한 인물의 삶을 문학적으로 설명하고 나열하기보단, 어떻게 삶을 감각적인 연출로 승화할지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탐구가 도드라지는 영화에서는 회오, 반성이 강조된다. 이들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하다. 세 작품 모두 그들은 성공한 부르주아로 인생에서 물질적 결핍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이들은 불만족을 느낀다. <그레이트 뷰티>에서 과연 그가 지금껏 좇아왔던 것이 무엇인지, 그 또한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가? 늙은 젭과 미술계가 맹목적으로 띄워주는 한 어린아이의 행위예술은, 곧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가 아닐까. 그 당시에도 그는 다만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일들을 했고, 그렇게 많은 것을 쌓아 올렸지만 정작 미에 대해서 답을 내릴 수 없는 허망함이 곁에 아른거린다. <아버지를 위한 노래>에서는 왕래가 끊겼던 아버지의 길을 되짚어간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고, 서로 불화가 있었지만, 서서히 그의 길을 되돌아가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유스>도 마찬가지다. 육체에 두터운 주름이 새겨진 인물들,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여전히 세상에 대해 명확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아직도 그들은 후회에 찬 선택, 실수를 반복한다. 중년, 노인들도 세상과 삶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인생의 답을 알고 현명할 거라 일컬어지는 그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삶은 허무함과 동시에 그래서 무한하다. 청춘들이 노인들을 바라보는 동경의 시선은 곧 환상이요,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하는 육체 너머의 영혼은 여전히 청년 못지않은 결함 가득하다. 소렌티노의 시각은 풍성하지만, 그것은 곧 포장이다. 그 너머는 볼 수 없음, 볼 수 없다는 것은 더불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 소렌티노 자신도 아직 많은 것을 모를 나이랴. 현재 그의 나이는 그가 영화에서 비추던 인물들의 문턱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하지만 50세가 넘어선 문턱에서 소렌티노는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돌아보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시도한다. 마라도나를 존경했고 나폴리에 살았던 10대 시절의 자신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영화의 도입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드론이 하이앵글 구도로 저 발치의 광대한 바다를 흠뻑 담아낸다. 푸르지만 어두워서 아래로는 끝이 없을 것만 같고, 드론은 앞으로 비행하지만 역시 끝, 도착지점은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질 것만 같던 바다가 끝이 나며 이윽고 육지가 포착된다. 소렌티노의 유년기가 담긴 정겹고도 슬픈 도시 나폴리, 감독은 도시의 전경을 아주 세세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태양이 뜨기 시작한다. 나폴리가 아닌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 줄곧 영화를 촬영해왔던 소렌티노, 흡사 그에게서 잊힌 기억을 드러내려는 듯이 카메라는 나폴리에 접근해가고, 또 태양은 나폴리의 중천에 떠 도시의 모든 세부를 빛으로 밝히고 드러낸다. 하지만 카메라는 다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다만 그는 과거를 회고했을 뿐이라는 듯, 여전히 그의 시선은 나폴리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듯이, 나폴리 안으로 진입하는 자동차와 달리 그는 여전히 나폴리 바깥에 놓인다는 듯 말이다. 이렇게 소렌티노는 자신의 격동적인 10대 시절이 묻어난 나폴리의 기억을 밝히고 회고하고자 한다. 이러한 회고 과정에서 연출은 군중들과 개인을 대비하는 연출, 계급 간의 삶을 색채와 미장센으로 대비하는 연출이 눈에 띈다. 대가족이 중심이 되고, 또 이웃끼리 허물없이 지내는 나폴리의 일상, 그래서 영화는 군중을 주로 포착하곤 하며, 이를 각자가 담긴 무수한 숏을 나누고 이어내는 짧고 탄력적인 시퀀스가 대두된다. 한편 영화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개인에 집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파트리시아, 이후에는 파비에의 내면을 말이다. 무수하게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제 자신을 생각할 때 영화의 연출은 비교적 느리고도 덜 잘리는 트래킹숏이 사용된다.      


그리고 소렌티노가 평면 구도에서 대상에게 집중하는 연출은 여전하나, 그의 휘황하고도 화려한 미장센은 북부에서 나폴리로 넘어온 부유한 이민자들, 남작 부인, 부르주아들을 포착할 때만 유일하다. 영화는 소렌티노의 그간 작품들과는 다르게 색채가 대체로 소박한 편이다. 이는 본 작품이 그가 허황한 것을 꿈꾸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랴. 현재에 다가설 수는 없지만 한때 가능했던, 아스라한 과거를 회고하고 꿈꾸는 영화이기에 그 당시의 소박함을 비교적 적확히 묘사한다. 이러한 연출의 차이처럼 소렌티노는 당시 자신이 느꼈던 각 계급에 따른 삶의 차이를 묘사한다. 영화 속 계급은 북부에서 온 이민자들과 남부의 나폴리인들로 나뉘고, 또 남작 부인과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들로 나뉘며, 이러한 요인에 따라 경제적인 차이가 눈에 띈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서 포착되는 것은 부유한 남성 프랑코와 결혼한 파비에의 이모 파트리시아다. 파트리시아는 줄곧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화려하고도 안정적인 집에서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프랑코가 가정폭력을 일삼기에, 프랑코의 부에 의해 소유되어 자신의 삶이 박탈된 맹목적인 생이기 때문이랴. 그래서 태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려야 할 아기는 탄생할 수 없고, 겨우 임신하더라도 가정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포악한 손아귀에 의해 유산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렇게 자신의 몸이 바라는 욕구에 솔직할 수 없는 삶이 곧 소렌티노가 부르주아지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들은 ‘화려한 감옥’에 살고 있다. 항상 모피를 입고 있는 한 노파는 절대로 나폴리인들의 왁자지껄한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녀는 따로 앉아서 여름에도 자신의 모피 코트를 과시하기 바쁘고, 손에 무수한 열쇠를 쥐고 있어 편히 잠들지도 못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그런데도 먹는 존재다. 흡사 이탈리아의 조각상처럼 경직된 태도로 자신을 과시하더라도, 우악스럽게 손을 써서 먹어야 하는, 그러한 육체의 즐거움에 솔직해야만 하는 존재다. 위층의 남작 부인도 마찬가지다. 소문으로는 산부인과 의사인 자신의 남편을 냉대한 냉혈한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남작 부인도 성욕을 누리면서 산다는 것이 후반부에 드러난다. 그 행위의 결과가 산부인과 의사인 그의 남편을 있게 하리니. 이처럼 소렌티노는 호사스럽고 쨍한 색채로 포착되는, 비자연적인 부, 명예, 위신을 중시하는 이들이 본원적 삶에서 멀어졌지만, 인간이란 그럼에도 이를 누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에 비해선 나폴리인들의 가정과 건축은 낙후되어 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이 스스로를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영화의 후반부에는 부를 지나치게 욕심내다가 오히려 제 자신은 교도소에 갇히는, 자기 소외와 자유의 빈곤함을 보여준다면, 나폴리인들은 외적으로는 빈곤할지언정 내적으로는 풍요롭다. 그들은 언제나 제 자신을 즐겁게 하는 농담과 장난을 끊이지 않고, 또 내 몸과 혀를 유혹하는 음식을 만끽한다. 파비에와 아버지는 자신의 하반신에서 요동치는 성욕에 솔직하고, 그들은 여름의 뙤약볕과 시원한 바닷물을 피부로 흠뻑 만끽한다. 그래서 경직된 시청각을 보여주는 부자들과 달리, 낙후되었지만 풍요로운 시청각을 보여주는, 자신의 몸에 솔직하여 감각과 경험으로 자신을 채워내는 나폴리인들은 진정한 부자다. 소렌티노가 느끼기에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다. 소렌티노의 자전적 캐릭터인 파비에는 줄곧 삶을 궁금해한다. 소년은 현재는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과거로부터 삶의 혜안을 길어오고자 하고, 성년이 되어서는 철학과에 진학하여 형이상학적인 탐구에 매진하고 싶다. 하지만 어느 기점으로 파비에는 더 이상 철학을 입에 올리지 않고, 대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기점은 부모님의 죽음이다. 사실 그 전부터 파비에의 삶에 비극은 만연해있었다. 남부러운 것 없는 자신의 평화롭고도 즐거운 가정, 하지만 아버지의 불륜이 탄로 난다. 어머니의 절규에 의해 파비에는 자신의 몸이 흔들리는 발작을 겪는다. 그의 몸은 과거의 나쁜 기억을 되새김하는 것이랴. 그것은 1980년 이르피니아 지진일 것이다. 당시 나폴리에 발생한 대지진, 최소 추산치 2,483명에서 추정치 4,900명가량이 사망한 거대한 재난이 있었고, 많은 마을이 파괴된 후유증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영화에서 파비에의 아버지가 새로운 집의 도면을 가지고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지진 이후 재건하는 나폴리인의 삶을 짐작게 한다. 여하간 파비에는 어머니의 절규를 들으며 많은 사람이 울부짖었던 당시의 흔들림, 절규가 재현되는 것이랴. 이러한 비극이 만연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파비에가 감옥에 있는 친척과 함께,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면 나눌 얘기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륜의 폭로, 율리아와의 만남의 불발, 오디션 낙마, 특별한 생일이 아니라 특별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지루하다 못해 우울한 생일, 그리고 죽음… 본 작품은 마냥 밝지만은 않다. 파비에의 생일이 황폐한 것처럼 탄생,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자 끝없는 문제의 연속이랴.      


하지만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불륜 소식을 접해 들은 어머니는 절규를 지르다가도 저글링을 하며 억지로 즐거워하길 원하고, 또 그 직후 마라도나가 나폴리와 계약했다는 기적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부모님의 죽음을 듣고 심란하다 못해 실감하지 못하는 와중에 우스꽝스러운 한 소년이 눈에 띄어 웃음이 난다. 본 작품 속 웃음은 유머의 부조화 이론에 근간을 둔다. 부조화 이론은 현실과 조화롭지 않고 일치하지 않으며 터무니없는 것, 기존의 범주를 위반하는 즐거움이다. 지금이야 서서히 금기시되지만 소렌티노가 회고하는 나폴리의 과거에는 비만, 절름발이, 추함, 우스꽝스러운 음성 장치 등 현실의 보편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연한 비극의 슬픈 질서를 위반하며 이들은 삶을 버텨내는 것이다. 소렌티노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나폴리인들이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밀매업자들을 좇는 경찰들의 추격이나 마라도나가 손으로 골을 놓은 와중에 친척이 경찰에게 잡혀가는 부패가 만연하고, 스트롬볼리의 누드 비치에서 일광욕하는 와중에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이러한 기존의 염세적 질서를 위반해야지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비에가 어머니의 장난에 의해 이웃의 집에 불려가서 사과하고 혼나는 불쾌한 와중에, 그들의 식탁에 놓인 간식이 눈에 띄는 것처럼, 우리의 감각이란 정반대의 상황에서 보색처럼 이끌리며 피어난다. 프랑코에 의해 풀어헤쳐 진 파트리시아의 육체나, 스스로를 미쳤다고 표현하는 파트리시아가 누드의 상태로 있을 때 파비에의 몸이 전율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애도도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장례가 끝나고 동네 아이들이 축구하는 약동하는 삶을 볼 때 파비에의 눈에 죽음의 허망함이 비춰 슬픔이란 눈물이 흐르고, 마찬가지로 마라도나로 인해 동네가 축제 분위기가 되었을 때 파비에의 누이 다니엘라는 화장실에서 나와 부모의 부재를 목도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즐거운 축제와 짜증 나는 교통체증이 한 쌍인 것처럼, 또 영화에서 반복되는 담배가 타들어 가고 죽어가며 느끼는 즐거움인 것처럼, 우리는 기존에 누리던 삶에서 벗어나거나 위반하며 생경한 감각을 맛본다. 그리고 이를 누리는 것이 삶이다. 또 기존의 것이 장애라면, 이를 극복하는 것 또한 웃음의 한 형태이자 삶의 즐거움이랴. 성대에 문제가 생겼어도 음성 장치로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파트리시아가 그것의 배터리를 빼서 바다에 던졌어도 다시 구입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부모님의 죽음에도 여전히 삶을 계속해가는 형제처럼 말이다. 이러한 일탈은 현실에서도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가상 및 허구로 도피하는 것도 삶의 한 유형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꿈이다. 파비에는 희망찬 꿈에 들떠있다. 그는 아직 성교도 못 해봤고, 담배도 피워보지 못했으며, 아직 세상을 잘 몰라 마라도나가 나폴리에 올 거란 기대를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여러 갈래로 미래를 그려보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물론 그도 여전히 새로이 집을 짓는 등 꿈을 꾸지만, 파비에처럼 왕성하게 꿈꾸지 않는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해본 나이이기 때문이다. 어린 파비에는 아직 많은 것이 새롭다. 형이 펠리니의 오디션을 보러 간 장소에 따라가서, 나폴리 너머를 접해본 적 없는 소년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마주한다. 꿈꾸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의 의식은 순수하고 여백이 가득하다. 그는 여전히 시간이, 미래가 가득 남았기에 그것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의 꿈은 언제나 현실에서 실현되진 않는다. 그래서 꿈이다. 아버지는 현실에 불가능한 것이 많다. 프랑코의 가정폭력에 의해 풀어헤쳐 진 파트리시아의 가슴을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한 금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이 아닌 예술에서 꿈을 꾼다. 소렌티노는 펠리니의 말을 인용하여 '영화는 현실의 도피처'라 말한다. 공중에 매달리고, 파비에가 열망하는 여러 미녀가 가득한 꿈은 오직 예술에서나 가능하다. 연극으로 만나는 율리아는 결코 현실에서는 범접할 수 없고, 미녀들도 사진으로만 즐비해 있으니 닿을 수 없다. 율리아를 바라지만 그녀는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고, 이모인 파트리시아는 명백한 금기이니, 파비에는 남작 부인과 정사를 나누며 금기를 상상한다. 그렇게 우리는 금기를 넘어 현실을 훼손하지 않고, 다만 상상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랴.     


이러한 즐거움 또한 비극의 가운데서 느끼는 즐거움, 희극의 변두리에서 느끼는 슬픔처럼, 명백한 반대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래서 파비에와 영화감독의 대화에서 ‘의미’나 나폴리를 중시하며 상상을 언급하는 것은, 현실에서 인과가 비롯한 상상이어야만 타당함을, 그리고 감각을 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랴. 그래서 <신의 손>에서는 그간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현실과 삶을 중시하며 현란한 감각을 펼쳐왔던 소렌티노의 작품에 따라오는 질문이 일련 해소된다. 또 그의 <신의 손>이 소렌티노에게 그토록 소중해 보이는 이유는, 영화 속 아버지가 복무하던 시절의 거리의 현재가 지금은 황폐화되어있고, 당시에 만난 여인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소렌티노는 당시의 나폴리로 돌아갈 수도 없고 되찾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재를 부정하고 저항해도 부모님의 과거, 주검을 결코 마주할 수 없는 것처럼, 소렌티노는 각별함과 고귀함, 향수라는 감정의 특유함을 과거의 속성으로부터 길어내며 정감을 강화한다. 이렇게 지나가 버린 과거, 만연한 비극과 죽음을 마주하며 우리는 삶을 더욱 각별히 여기게 되리. 또 이따금 박장대소하며 입이 크게 벌어지는, 내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며 자국을 남기는, 위반과 부조화의 감각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리. 무엇보다 양자에 의해서 더욱 절절히 느끼게 되는 삶, 그 어느 하나만을 달고 쓰다는 이유로 괄시하지 않게 되리. 그것이 바로 소렌티노와 그의 형이 누군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을 누리는 이유이리라. 죽음 속에서 내 살갗이 바닷물에 닿으며 느껴지는 소중한 ‘살아있음’, 뜨거운 뙤약볕이 내 살갗을 따갑게 만들지만 그것이 되레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짜릿함, 이를 누리고자 우리는 여름을, 그리고 삶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파비에는 여전히 어린 수도승을 마주한다. 일상을 파기할 수 있는, 꿈꿀 수 있는 즐거움을 말이다. 결말의 파비에의 표정은 미묘하다. 밝기도 하지만 우울한, 다소 오묘한 표정, 그 복잡함이 곧 삶 그 자체 아니겠는가. 파비에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나를 감싸던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것, 그 슬픔을 감내하고 누리는 것이기에. 이렇듯 그 어떤 작품보다 소렌티노의 삶을 이해하고, 그의 나폴리를 절절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지만, 동어 반복되며 감정의 각별함과 희소함이 사라지는, 짜릿한 대비가 무감해지는 후반부의 늘어짐이 아쉽다. 다시 경험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유년기는 긴 러닝타임에 담길 수 있지만, 그 향수는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찬란히 빛났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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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204 cg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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