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1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Dec 01. 2021

폴 버호벤, <베네데타>

신을 섬기는가, 신을 자처 하는가

폴 버호벤(Paul Verhoeven), <베네데타>(Benedetta) 

- 신을 섬기는가, 신을 자처 하는가

"수도원은 사람의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 일평생 지속돼야 하는 억압이다." -빅토르 위고-

마르키 드 사드의 『악덕의 번영』은 그것이 집필된 지 200여 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동시대까지 뻗치고 있다. 그 영향력이란 단순히 문학적 성취 및 철학적 탐구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를 시청각적으로 승화하는 영화까지 이어진다. 루이스 부뉴엘의 걸작 <세브린느>는 조세프 케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결혼 이후 존재의 무기력함을 느끼는 권태로운 여인이 매음으로 육체를 복권하고, 또한 극한으로 치닫는 매춘 및 가학적 쾌락을 경험하며 일련의 수치심과 도덕에서 해방을 느끼는 서사는 『악덕의 번영』의 영향력을 결코 배제하여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한 21세기로 넘어와서 알베르 세라의 문제작인 <리베르떼>는 인간과 동물의 다를 바 없음을 논증하였던 사드의 악덕과 정욕을 두둔하는 주장, 그리고 그것에서 인간적인 에로티즘과 동물적인 색욕을 구분하는 바타이유에 근거를 두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드와 그의 대표적인 저작 『악덕의 번영』은 여전히 동시대에도 결코 적지 않은, 파괴적인 힘을 뻗치고 있다. 이 같은 『악덕의 번영』의 주인공인 탕아 줄리엣이 탄생한 공간은 다름 아닌 팡테몽 ‘수도원’이었다. 청빈한 수도원이라는 통념과 극악무도한 악인인 줄리엣의 이미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드는 수도원이야말로 마땅히 청빈하다고 여겨질 것이기에 도덕의 감시에서 자유롭고, 이에 인간의 심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욕망이 뛰놀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라 규정한다. 감시자의 시선은 부재하고 수도원 내의 구성원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침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원칙을 논증하기 시작하였고, 바깥으로 나갈 구성원들에게는 그 마수를 뻗치지 않았지만, 내부에 매여 있는 구성원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욕망은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최근 <엘르>를 통해 20세기에 탐구하던 성에 대한 급진적인 탐구를 말년에 또다시 선보이는 폴 버호벤은 본 <베네데타>를 통해 이를 이어간다. 그는 1590년에 태어나 1661년에 사망한 실존한 수녀, 베네데타 칼리니의 삶을 스크린에 옮겨오는데, 과연 감시자의 부재에 가장 자유로운 것은 성 지향성 및 욕망일까, 아니면 돈이나 권력 등 외부 요소에 의해 굴복한 신도들일까. 193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의 폴 버호벤 감독은 흔히 할리우드에서 찍은 <토탈 리콜>이나 <로보캅>, <스타쉽 트루퍼스> 등의 장르영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장르적 색채로만 그를 규정하는 것은 버호벤의 예술성을 편협하게 축소하는 일이다. 네덜란드 시기부터 헐리우드 시기, 그리고 현재 프랑스 시기까지의 그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대단히 급진적인 육욕, 욕망에 대한 연구다. 공개된 당시에는 평단의 혹평을 받았으나, 당시에도 누벨바그의 기수 자크 리베트에게 호평받기도 했고, 최근에는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쇼걸>은 이 같은 그의 관심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한 개인의 인생은 우연이 좌우한다. 계획에 없는 히치하이크와 만남, 도박, 룸메이트와의 만남 등 즉흥적인 만남이 주인공의 인생을 좌우한다. 지고하고 고매한 이성이 세계를 좌우하지 않는다. 인세를 이루는 것은 육욕, 폭력의 힘이요, 한 개인을 이끄는 원동력은 시기와 질투다. 인간은 이성보다도 필연적으로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환락'에 홀린다. 그리고 버호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되는 계급, 가족, 시대는 매우 절망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몸'밖에 없다. 이러한 몸을 무기로 계층 이동을 꿈꾸고 이를 실현하거나, 반면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커다란 간극과 이에 따른 자멸, 배신을 버호벤은 연이어 탐구한다. 이 같은 버호벤의 색채는 그의 네덜란드 시기 작품인 <사랑을 위한 죽음>에서부터 그의 근작인 <엘르>까지 이어져 온다. 일단 헐리우드 시기나 프랑스 시기의 연출은 대단히 매끈하다. 특히나 <엘르>는 기존의 통념과 기대를 모두 빗겨나가는 파격적인 젠더와 욕망의 탐구가 주안점이 되었는데, 이 같은 불쾌감과 낯섦을 친숙하고 천연덕스러운 장르적 연출에 담아내어, 이질적인 것을 보편의 경계선 내로 포섭한 것이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한편 네덜란드 시기의 경우, 연출 자체는 지알로를 연상케 하기도 했으며, 숏 개개는 거칠고 투박하여 매우 현실적이었다. 최근 경향이 보편적이고 장르적인 문법으로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담아낸다면, 네덜란드 시기의 경우 색욕의 동물성과 야성적인 연출을 서로 맞물리게 해, 지극히 현실적인 에로스를 폭로하였다. 이러한 연출 하에 버호벤은 네덜란드 출신인 자신의 정체성을 적절히 활용하여 <사랑을 위한 죽음>에서는 꽃과 구더기를 연이어 보여주는 네덜란드 미술사의 바니타스 정물의 전통을 이어오거나, <포스맨>에서는 렘브란트의 <도축된 황소>를 오마주하며 자국의 시각적 유산을 끌어온다. 이러한 연출을 토대로 버호벤은 성애의 진실을 폭로한다. <사랑을 위한 죽음>에서는 더럽고 추잡하며 역겨운, 신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 곧 인간의 육욕이요, 그 결과물이 신생아이자 '우리'임을 폭로한다. 이러한 욕망은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자신을 타인을 통제할 수 없고, 나 또한 스스로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인데, 이는 강간 피해자라는 즉자로부터 능동적인 욕망을 주도하는 대자로의 자유분방한 변이와 실존을 보여주는 <엘르>에서도 이어진다. 이 같은 욕망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실로 유연해야 하는 것인데 <사랑을 위한 죽음>에서도, 그리고 <엘르>에서도 부모들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의 욕망에 의해 난항을 겪는다. 이러한 욕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버호벤은 기독교 비판을 신랄하게 수행한다. <사랑을 위한 죽음>에서는 성당에서 거행되는 결혼식에서 신부의 양수가 터지는, 기독교가 멀리하려 했지만 거세할 수 없는 동물적인 인간의 몸으로 급진적인 위반을 수행한다. <포스맨>에서는 기독교를 거미, 거미줄이라는 상징과 이어내는데, 언제나 남성을 유혹하고 파멸로 이끄는 이브이자 데릴라로 여겨지는 여성의 기원을 추적한다. 남성들은 이 같은 여성의 욕망을 거미줄로 여기고, 특히 그녀들이 갖지 못한 자신의 남근을 거세하리란 피해망상에 시달린다. 하지만 남근을 갖고도 다른 남근을 욕망한 것이 남성 제라르였으며, 그들의 파멸은 그녀들이 덫을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둔한 저 자신의 자멸이거나 기독교가 일으킨 망상이란 거미줄에 걸린 꼴이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을 거칠고 투박한 문법으로 스크린에 옮겨온 듯한 <포스맨>은 이후 헐리우드에서 <원초적 본능>으로 유사하게 이어진다. 본 작품에서도 버호벤이 수행하는 것은 팜므파탈이 남성을 파멸로 내몬다는 통념을 뒤집는 것으로, 오히려 그들의 파멸은 사랑에 빠진 자신들이 스스로의 욕망에 걸려 허우적대는, 마찬가지의 자멸이다. 그녀에게 홀려 수사인지 스토킹인지 분간할 수 없는 추적을 일삼는 것도, 이성과 시야가 흐트러진 것도 모두 욕망에 빠진 자신의 몫, 이성과 동물성이 뒤섞인 인간의 탓이다. 그리고 팜므파탈을 사랑하면서 팜므파탈의 복식과 행동을 따라 하는 인물들은 이내 곧 팜므파탈의 외피를 입고, 실제론 팜므파탈이 아닌 그저 따라 하는 자들이 범죄를 일삼는다. 이에 팜므파탈은 덫에 걸려 무방비 상태에 노출된 상대방을 탐식하는 이미지로 대신 굳어진다. 버호벤의 그간 작품에서는 이러한 팜므파탈을 모방하는 자들이 기독교와 밀접하다. <엘르>의 패트릭도 그렇다. 버호벤은 이러한 이미지의 기원을 추적하는 시네아스트라 할법하다. 이 중 <포스맨>에서 기독교 세계에 매몰된 제라르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열망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지배하려 하는 등, 기독교가 지나치게 터부시한 성애를 급진적으로 위반하길 바랐었는데, 이 같은 지나친 금기에 의한 과격한 위반은 <엘르>에서 기독교인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 미셸의 아버지나 그녀를 강간한 패트릭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성애를 버호벤은 <사랑을 위한 죽음>에서부터 시작된 '거울'이란 상징으로 보여주는데 거울은 우리가 보지 못한 인물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거나, 두 개로 나뉜 서로의 세계가 하나의 거울로 합치되어 가는 육체의 뒤엉킴을 가시적으로 반영한다. 이렇게 온 일생에 거쳐 성 그 자체를 탐구해온 노장은 과연 <베네데타>에선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안과 밖을 대비하는 공간성이 강조된다. 영화의 시작, 평평하게 포착되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롱숏이 비교적 매끈하고 부드러운 트래킹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닫혀있는 실내가 아니라 가능성이 열려있는 야외다. 이윽고 도적 떼가 급습해온다. 영화의 부드러운 운동감은 이윽고 급박한 트래킹으로 뒤바뀌고, 또 격렬한 핸드헬드가 첨가된다.     


영화는 안과 밖의 속성에 따라 연출을 구분한다. 밖은 열려있는 공간, 이에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우발, 즉흥, 가능성이 내재한 공간이다. 한 작은 새가 도적에게 배설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두고 부모가 말하듯 베네데타의 신앙에 대한 재능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새가 통제되지 않는 야외라서 가능한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내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전면 통제된다. 그래서 수도원에 처음 진입한 베네데타를 포착할 때, 영화의 연출은 도적 떼의 급습만큼 역동적이지 않다. 무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얼어붙는다. 하지만 인간은 움직이기를, 내 몸에 감각이 일기를 바란다. 이는 야외의 요소가 실내로 침투하면서 비롯한다. 내부에서의 수녀들은 천편일률적인 수도복을 입고 있고, 모두가 청빈하고 순일한 일상을 기계처럼 반복한다. 이러한 와중에 매우 거칠고 야성적이며 성애에 능동적인 바르톨로메아와 그녀의 아버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침입해온다. 사건이 발생한다, 베네데타를 넘어뜨리며 영화의 연출은 다시 들썩인다, 다시금 감상자와 베네데타의 몸에 전율이 인다. 기독교라는 실내에 갇혀 있던 당대의 여성들은 이렇게 사건을 바라왔을지 모른다. 자신들이 놓인 실내로 야외의 사건이 침투하여 몸을 떨리게 해주길 바랐을 것이요, 규율을 지키기 위한 커튼을 넘어서 베네데타의 나체를 보고 싶었을 것이랴. 이러한 감각을 느끼는 것이 곧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징표이므로. 하지만 이는 나의 외부에서 사건이 발생하길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바람이기에, 베네데타의 일상은 대체로 따분하다. 그래서 그녀는 정신으로 일탈을 시도한다. 영화는 베네데타의 몸이 놓여있는 현실과 그녀의 정신이 그려내는 상상계를 줄곧 오간다. 오직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 실로 자신이 바라는, 그리스도를 애욕 하는 열망이 간접 성취된다. 그녀들이 얼어붙는, 상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타인에게 소유된 '화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이자 남편인 남성이 소유한 화폐로서 베르톨로메아는 그들에 의해 처분된다. 수녀원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장소이기에, 결혼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소유한 남성에게 지참금을 요구하며, 귀의를 허락한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법열>, 1647~52

남성에게 소유되어 있던 여성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간택되며 소유권이 양도된다. 이에 따라서 자유롭고 능동적인 활동은 불가능하다. 실내에 갇힌다는 것은 곧 그녀들을 소유한 '그', '수도원'에 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수도원에 종속된 어린 베네데타는 매우 총명하게 묘사된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한 수녀가 자신의 목조 손가락에 대해 얘기를 해준다. 베네데타는 본 이야기를 듣고 ‘묘지가 되고 싶은 것이냐’며 답하나, 수도원에선 의심과 총명함을 거둘 것을 명한다. 수도원에서는 설명도 없이, 그저 맹목적이고도 형식적으로 복장을 갈아입는다. 베네데타의 개인적 특유성이라 할 수 있는 성모상과 화관을 벗어야 한다. 이렇게 현실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음에 베네데타는 줄곧 상상계로 도피한다. 그 상상계에서 베네데타는 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매우 훤칠하게 묘사된 그리스도의 육체를 욕망한다. 이와 동시에 베네데타는 수녀로서 그리스도를 상찬한다. 이에 그녀에게 뒤섞인 기독교인의 황홀경과 무아지경, 그리고 인류의 희열과 쾌락은 구분이 어렵다. 어쩌면 신성과 애욕의 본질은 서로 같을지 모른다. 프랑스의 문호이자 이론가 바타이유는 신성과 성애의 메커니즘이 유사하다고 논증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금기를 넘어서며 성취하는 에로티즘이, 일상을 초탈하고 넘어서는 신성의 메커니즘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욕에 따른 오르가즘과 종교적 황홀경, 법열이 의학적으로 별 다를 바 없음을 밝힌다. 본 작품에서 묘사하는 것이 바로 성애와 구분되지 않는 희열과 황홀경이다. 발생하는 메커니즘도 유사하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노동을 반복하다가, 이윽고 밤에 휴식하고 정사를 나누며 오르가즘을 맛본다. 즉 반복되는 노동을 위반하며 희열을 느낀다. 본 작품에서도 그렇다. 어린 베네데타는 반복되는 낮을 '밤'에 위반하여 성모상에 기도하러 간다. 이후 성모상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베네데타를 짓누르지 않는 신비체험과 베네데타가 성모상의 유방에 입맞춤하는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일상을 위반하는 법열과 희열은 한 쌍이다. 바로크 시대의 조각가 베르니니의 걸작, <성 테레사의 법열>이 찬사도 많이 받았지만, 지나치게 에로틱하게 묘사되었다며 비난도 받은 것처럼…


또 베네데타는 성경에 기반을 둔 연극을 실연한다. 그 연극은 인류가 반복하는 노동과도 같다. 새로운 각본이 아니라 성경이란 원전을 두고 계속 지리멸렬하게 반복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와중에 신성의 감흥은 반복되는 일상의 지리멸렬함과 다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초자연적 힘이 엄습해오며 세속을 파괴하고 신성으로 넘어설 때 비로소 황홀경이 발생한다. 그래서 베네데타는 현실에서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연극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녀는 상상에 빠져든다. 상투적인 그리스도의 초상을 그려내지 않는다. 매혹적인 육체를 강조한 그리스도의 상을 그려낸다. 이에 황홀경과 오르가즘이 구분되지 않는 희열에 젖어 든다. 성을 극도로 억압했던 기독교는 황홀경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류에게 오르가즘을 일부 허용한 것인지 모른다. 이에 베네데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경탄인지 신음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베네데타가 그리스도와 교환한 심장은 곧 유방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고 베네데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책형을 당한 것처럼, 손과 발에 못에 찔린 듯한 상처를 입고 피를 질질 흘리며 그를 열망한다. 사실상 성애는 죽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지금이야 성과 죽음은 그리 가깝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학이 열악하던 시절의 인류는 성에 수반되는 월경이나 출산의 내적 폭력의 발현, 에너지의 과잉, 체액과 파열 그 자체로부터 죽음을 마주했다. 이렇게 내 몸에 힘이, 폭력이 가해지는 것이 곧 감각이자 성애의 본질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이를 억압해도 수도원의 야곱이란 수녀는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가슴의 상처로 발현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이기에 야곱은 존재 자체가 기독교로부터 위반이요, 육체에 힘이 가해지는 계시란 필연적으로 폭력일수밖에 없다. 피와 그 외의 체액, 기독교에서 불결하게 치부되고 거세하려 했던 것들, 하지만 이는 수도원에서도 필연적으로 발견되고 베네데타는 인간으로서 흥미를 거부할 수 없다. 베네데타가 십자가 책형을 몸소 체험함과 동시에 쾌감을 느끼는 것도, 기독교에 내재한 가학적인 에로티즘을 폭로하는 것이랴. 이렇게 죽음을 간접 경험 하는 것, 죽음을 느낌으로써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곧 성애다.      


하지만 기독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맛보는 희열, 아무리 생리적으로 유사하다고 한들 상스럽게 표현돼선 안 될 황홀경의 진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베네데타처럼 그 흥분이 전면에 노출되면 치료대상으로 간주되어 잠재워지고, 이를 감시하기 위한 시선이 따라다녀 규제를 가한다. 이에 독실한 베네데타의 욕망은 수동적이다. 그녀는 언제나 유혹당하는 자다. 바르톨로메아가 수도원에 들어온 이후, 그녀는 베네데타의 육체에 흥미를 느낀다. 베네데타의 나체를 보고 싶어 하고, 그녀의 성기 부근을 희롱하거나, 키스를 시도한다. 베네데타는 이를 주도하지 않는다. 언제나 당하는 자다. 욕망을 주도하는 것은 독실하지 않고, 또 아버지이자 남편에게 달아난 이후에는 자유를 추구하며 레즈비언임을 숨기지 않는 베르톨로메아다. 베네데타가 상상하거나 꿈꾸는 정신에서도 그녀는 수동적이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향한 욕망을 ‘선택’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그리스도로부터 ‘허락’ 받는다. 또 선악과를 '유혹'하는 뱀으로부터, 그리고 도적 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다. 즉 베네데타라는 여성은 수동성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가상적인 욕망도, 남성과 그리스도를 상정하여 그들로부터 허락받아야만 이를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버호벤은 <엘르>의 기조를 이어온다. <엘르>에서 마냥 남성에 의한 강간 피해자로 전락되지 않고, 여전히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과 욕망을 주도하는 미셸처럼, 여성이 주체성을 되찾는 여정을 이어간다. 베네데타는 바르톨로메아에게 마냥 좌우되지 않고 명령하여, 그녀 손의 화상을 자신이 만들어낸다. 또 꿈과 상상에서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허락받던 베네데타,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그를 서서히 닮아가 허락받지 않고 스스로 확신한다. 바르톨로메아도 베네데타를 열망하였지만, 베네데타도 마찬가지로 흥미를 느꼈다. 그녀들은 서로가 갖지 못한 것을 지니고 있고, 이에 닮고 싶었으랴. 서로의 청빈함과 자유분방함이 말이다. 사랑하는 베네데타는 베르톨로메아의 과감함을 닮아간다. 그리스도도 더욱 닮아간다. 전능한 신의 자유의지를 수동적인 자신이 사랑하며 닮고 싶었으랴. 이에 그리스도의 거대한 심장, 단순한 남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절대자'의 근엄하고도 스스로 창조하는 목소리를 닮아 간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은 규정되거나 지배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원리를 창조한다.      


이들은 신과 같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원칙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이러한 삶, <엘르>에서 미셸이 그랬고, 본 작에서 베네데타가 그렇다. 베네데타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규정한다. 타인이 그녀에게 상처 입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소 성흔을 긋는다. 영화 중반에 펠리시타와 크리스티나는 이를 목격했고, 후반에는 바르톨로메아도 확인한다. 절대자의 계시가 아니라, 스스로 몸을 규정한다. 이를 두고 절대자의 목소리가 아니라며, 허위라고 베네데타를 고발한다. 하지만 영화의 질문처럼 '과연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있는가?'. 베네데타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고 해서 그것이 베네데타의 허위인지, 신이 그녀에게 계시한 것을 행동에 옮긴 것인지 인간은 구분할 수 없으리. 다만 확실한 건 외부에 규정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몸을 창조하고, 자신이 계시하는 베네데타는 그 누구보다 ‘신’을 닮았다는 것이다. 펠리시타에게 구애받지 않고, 몸소 수녀원장의 자리에 올라 이제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실현한다. 이러한 능동성은 크리스티나에게서도 목도된다. 그녀의 어머니인 펠리시타는 베네데타의 기적이 알려지면 더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주교로 승격할 것이라며, 즉 자본에 고개 숙이며 베네데타에게 원장 자리를 위임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직접 바라본 눈을 외부에 맡기지 않고, 세태가 마냥 따르라고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의심한다. 이후 베네데타에게 지배당하지 않고자 규정에서 벗어나, 제 마지막 죽음을 자신이 결정한다. 크리스티나와 베네데타는 이렇게 서로 유사한 존재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반면 베네데타는 사람들에게 신봉되며 그들을 인도한다. 당대에 단순히 의심하는 능동적인 사람에 그쳤던 크리스티나는 죽어야만 했고, 아가페를 실천하는 베네데타는 인간 이상의 신이 되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이들조차 다스린다. 이렇게 베네데타가 신에 가까워지며 급변하는 영화는 1부와 2부를 나눌 수 있다. 1부가 베네데타의 수녀 시절을 보여주며 신성과 성애의 동일함, 기독교 아래서의 인류, 특히 여성의 수동성을 그려내며, 버호벤의 일관된 관심을 기독교라는 소재에서 급진적으로 풀어헤친다. 반면 2부는 능동적인 인간을 넘어 신이 된 베네데타를 그려내며 육화된 신의 삶, '예수의 삶'을 간접적으로 엿본다.      


베네데타가 수녀원장이 된 이후 수도원에는 붉은빛이 도래한다. 혜성이 나타나 부패한 세태를 경고하는 것이라며 사람들은 절망한다. 실제로도 이후 페스트가 창궐하니 그것은 참된 해석일 수 있으랴.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베네데타가 수녀원장이 되었기에, 수도원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색채가 뒤바뀐 것이랴. 능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욕망을 통제하지 않는, 이에 걸맞은 관능적인 빨강, 성애에 필연적인 피를 가리키는 빨강으로 말이다. 베네데타가 원하는 것, 그리고 ‘신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므로. 베르톨로메아는 베네데타에게 묻는다. 왜 이런 행위를 하느냐고. 베네데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녀의 행동은 무목적 하다. 하지만 어떤 것에도, 심지어 자신의 목적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그녀의 상태가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즉 오직 절대적으로 자유로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임을 실현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순간과 환경 속에서, 가장 자유로이 해야 할 것을 선택한다. 그녀가 속한 시공간이 뒤바뀌었다. 페스트가 창궐했다. 교황대사가 위치한 피렌체도 그렇고, 베네데타가 자리한 페시아도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렌체는 페스트에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 신을 섬기고 따르는 교황대사는 절대자의 '구원'을 따라 하지 못하며, 교구의 추기경은 자신도 페스트에 감염되어 신도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들은 앞서 펠리시타가 지참금을 받고 수도원에 여성들을 귀의시키는 것처럼, 정신성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신을 따르는 혹은 돈을 따르는 자다. 정신성이 부재한 교황대사는 남성 우월적인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는 데 권위를 사용한다. 그가 페시아에 도래하자 여성은 다시금 남성에게 고문당하는 피해자, 남성이 원하는 말을 자백해야 하는 수동적인 운명, 각혈하는 죽음의 길로 접어든다. 여성을 포악하게 유혹하는 뱀, 베네데타를 겁탈하고자 한 도적떼, 즉 여성을 수동화하려는 욕망들이 극의 전반부에 악마화되어 묘사된 것을 생각해보라. 반면 베네데타가 원장 자리에 오르자, 수도원의 결정은 수녀들이 내려야 한다는 크리스티나의 말이 일련 실현되는 것처럼, 베네데타는 여성을 겁박하는 악마성을 몰아냈다. 크리스티나는 이러한 악마성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기에, 베네데타는 그녀가 지옥에 가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금 성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구원을 모르는 교황대사에 의해 페시아도 페스트에 자유롭지 못하다. 서두에서 언급한 마땅히 청빈하다는 이미지에 의해, 기독교의 정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공간은 수도원이요, 인물은 공인된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반면 신은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베네데타는 교황대사와 펠리시타가 도착하기 이전, 페스트가 창궐하는 환경에서 구원을 위한 적절한 결정을 자유롭게 지시한다. 페시아를 고립시키라는 명령인데, 이로써 페시아는 페스트로부터 자유로웠고 신도들은 역병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한때 죽었던, 몸소 죽은 척을 했던 베네데타는 천국에서 인류의 미래를 목도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허위일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발설한 시간을 몸소 실현한다면 사기가 아니다. 앞서 어린 베네데타가 처음 페시아의 수도원으로 향할 때, 광장에서는 죽음을 우롱하는 연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네데타도 숙련된 배우다. 무대에서 성모를 연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대 바깥의 계시, 기적도 연극이다. 하지만 그녀는 숨이 멎음을, 그리고 구원을 실현함으로써 배우가 아닌 진실이 된다. 크리스티나와 베네데타의 차이는 이러한 거짓을 진실, 사실로 실현하였는가, 아니면 실패하였는가에서 비롯한다. 여하간 그녀는 페스트로부터 자유로울, 자신이 예지한 시간을 몸소 실현하려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베네데타가 예수라면, 교황대사는 빌라도, 그에 의해 거짓 고백하는 비교적 덜 독실한 베르톨로메아는 배신자 유다다. 방해받는 그녀는 이윽고 그리스도처럼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교황대사가 신도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것이 수동성, 체념이라면, 베네데타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구원하는 능동성, 이를 긍정하는 사랑을 전도한다. 베네데타를 사랑하는 신도들은 그녀들을 따라 교황대사의 선고를 거부하고, 능동적으로 베네데타를 구출하며, 부당한 권력의 전복에 성공한다. 최후에 베네데타를 신실히 존경하게 된 펠리시타 또한 더 이상 돈, 교황대사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의지로 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베네데타의 정신이란 단순히 제 자신만 사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타인을 지배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그들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다시금 그들의 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말하는 구원을 몸소 실현해야 하리. 이렇게 버호벤은 <엘르>에서도 매 순간 실존하며 대자로 살아가는, 신에 필적하는 미셸을 그려냈다면, 본 신작 <베네데타>에서는 예수의 삶과 정신을 직접적으로 육화하는 절대자에 필적하는 베네데타의 삶을 그려낸다. 이로써 인간과 신의 차이를 구별한다. 신으로 향하는 여정, 그 시작이 바로 사실상 동의어에 가까운 종교적 법열이자 신성 모독이다.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노동, 일상, 속세를 뛰어넘어, 신성함과 동시에 불결한, 황홀경과 희열의 세계로 빠져드는 위반이 신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다. 이렇게 타인의 구속을, 부당한 금기를 넘어서며 수동성을 극복한 자는 비로소 능동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능동적인 인간은 닮고 싶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윽고 닮아간다. 베네데타에게는 그 대상이 바르톨로메아와 그리스도다. 베네데타는 신과 닮아간다. 이러한 닮아감이란 금기, 특히 인간에게 만연한 성의 금기로부터 자유로워 오히려 본인이 원칙을 새로이 창조한다는 것, 그를 내게 육화하는 것,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려, 신의 전령이라는 지위를 빌려, 신이 바라지 않은 착취와 외면을 일삼는 가짜 신들이어선 안 된다. 몸소 신이 바라는 구원과 아가페를 실천하는 것, 이를 위해 제 몸까지도 훼손하며 자유로운 것, 언제나 자유의지로 선택하면서도 타인을 구원한다는 신념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신'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신, 실존한 베네데타 칼리니의 삶을 버호벤의 시선에서 동시대에 불러오는 작품, 그녀의 삶이 오늘날에 유효한 이유는 왜일까. 우리가 그런 신이 필요하기 때문이자, 몸소 그 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온 일생을 바쳐 성애를 탐구해온 시네아스트는 그 첫걸음이 '성의 실존'이라 답한다. <엘르>에 이어 <베네데타>까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지만 금기시된 성을 몸소 위반하고 스스로 새로운 성애를 창조하며 대자이자 신이 되는 거대한 인간의 여정, 버호벤이 온 일생에 거쳐 성애를 이야기해온 그 이유를 최근 두 작품에서 ‘사랑이면 충분하다’라고 답하고 있다. 

------------

감상일: 211201 롯데시네마에서, 211215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홍상수, <당신얼굴 앞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