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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20. 2021

홍상수, <당신얼굴 앞에서>

죽는 우리, 그럼에도 삶

홍상수(Hong Sang soo), <당신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 죽는 우리, 그럼에도 삶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떠나야만, 그 세계를 거대하게 우회해야만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모험을 너무 멀리서 찾지는 말자.” -루이 알튀세르-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예술가로 세잔을 뽑곤 한다. 20세기에 세잔을 존경한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피카소가 있고, 오늘날에는 우리가 잘 아는 홍상수 감독도 세잔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실 세잔의 작품은 쉽게 감흥이 오지 않는다. 일반적인 감상자들은 르네상스나 신고전주의의 정밀한 재현이나 바로크의 웅장한 맛을 더 선호할 것이다. 이들에 비한다면 세잔의 작품은 건조하고 밋밋해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사조의 회화는 현실의 3차원에 빚을 지고 있다. 본 사조에서 잘 그렸다는 것은 '얼마나 현실과 일치하느냐'에 비롯한다. 반면 세잔의 평가는 마냥 현실의 시각성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물론 세잔의 성취 중 하나는 바로 앞선 사조인 인상주의가 결핍했다고 평가받는 견고한 형태감, 입체감을 부활시켰다는 데 있지만, 이는 마땅히 회화다운 요소들로 보충한 것이다. 세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전 시대의 화가들이 흡사 거울과 같은 태도로 현실 속 3차원의 대상을 화폭이라는 2차원의 영역에 환영처럼 구현했다면, 세잔은 현실 속 피사체를 회화 고유의 조형 원리로 환원하고, 또 다시점을 이용하여 2차원의 캔버스 속에서 가장 적절하고 이상적인 배치로 선보였다. 즉 세잔은 필연적으로 2차원인 회화의 한계를 인정하되, 이러한 평평한 화면에 3차원에 놓인 대상의 이상적인 시각을 옮겨오는 방식으로, 다시점이라는 고유의 원리를 개발한다. 또 회화 고유의 조형 원리인 구, 원추, 원기둥으로 환원된 세잔의 초상, 정물은 현실 속 대상을 회화다운 방식으로 충실하게 그리고자 한 것이었다. 세잔은 현실의 견고한 입체감을 맹목적으로 반영하는 도구나 장치로서 회화가 아닌, 고유한 회화의 본질을 도모하였다. 외에도 세잔은 대상의 순수한 시각성에 주목하여 소재나 서사와 거리가 먼, 순수한 이미지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태도를 추구했으며, 또 그간의 회화사에서 형태를 채우는 수단으로써 ‘색’, 형태를 구축하는 수단으로서 ‘선’의 고정된 역할도 뒤집는다. 세잔의 작품에서는 색 그 자체가 대상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선이 대상의 속을 채우기도 한다.     


이렇게 세잔의 특징을 알고 나면 홍상수가 왜 그를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북촌방향>이나 <자유의 언덕>에서 영화 고유의 요소로서 마술 같은 편집을 선보인바 있는 그는 세잔처럼 영화 고유의 수단을 모색하며, 영화다운 방식으로 현실을 비추려는 것이다. 현실이 아니라 영화임을 천명하는 듯한 그의 어색하고 투박한 줌인도 마찬가지이랴. 또 홍상수 작품의 소재는 언제나 현실 속 남과 여의 관계나 젠더론에 입각하지만, 이러한 형식 때문에 ‘친숙하지만 낯선’, 흡사 세잔의 작품 같은 느낌을 주곤 한다. 친숙하고 현실과 닮아있지만 낯선 것, 그것은 홍상수의 작품 중에서도 '외국'을 다뤘을 때 강조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홍상수가 맨 처음 해외를 배경으로 촬영한 작품은 <밤과 낮>이다. 이후 외국인이 한국에 방문한 <다른 나라에서>나 <자유의 언덕>, 이를 거꾸로 뒤집은 <클레어의 카메라>,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해외로 향한 정서를 담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인트로덕션>이 있다. <밤과 낮>의 배경은 파리다. 하지만 파리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 칸, 베를린에 가서 찍은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해외의 낯설거나 이국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하다. 그 이유는 홍상수가 줌인, 클로즈업하는 것이 어디에 가도 변치 않는 나 자신, <밤과 낮>에서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의 적나라한 음부를 감상하는 것처럼, 표상의 기원인 오직 ‘자신’만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밤과 낮>에서 새롭게 재출발하고 싶어서, 또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모면하고 재출발하고자 파리로 왔지만, 여전히 자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프랑스에서 11시가 되어야지만 시작되는 일몰에 적응하기도 어렵고, 이에 파리의 시간과 '낮과 밤'을 판단하기도 어렵다. 또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는 것도 이상하고, 프랑스에 와서도 대한민국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북한 사람을 바라본다. 이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홍상수의 작품에서 해외에 간다는 것은 그 세계의 낯섦과 생경함에 온당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다른나라에서>의 세 가지 안느 모두 프랑스에서의 일이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이와 반대 구조를 취한 <클레어의 카메라>에서도 한국에서의 일을 프랑스에 수행하러 간 것이다.      


<인트로덕션>에서 해외의 정서는 너무나도 낯설고 두렵다. 이에 새롭게 시작하려 해도 잘 안 된다. <밤과 낮>에서 낯선 곳에 있어도 익숙한 한국인들끼리 모여든다. 불어는 들리지 않고 한국말로 가득 찬다. 익숙한 정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더 이상 이국의 낯섦을 느낄 수 없다. 더욱이 그렇게 모여든 한국인들 중에 주인공 성남과 과거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껴있다. 현재의 성남이 아닌, 10년 전 잊고 살던 성남을 소환한다. 이에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 <인트로덕션>에서도 딸을 독일로 유학 보내는 어머니는 한국인 후배를 소개해 동거하게 만든다. 그리고 유학생의 연인이 독일까지 따라온다. 이에 우리는 낯선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그저 익숙하고 친숙한 나의 표상에 안주한다. <자유의 언덕>에서 일본인 모리가 한국을 찾아온 것도 내 표상에 있어야 할 연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를 퍼즐처럼 되찾고자 방문하지 않았던가. 이에 모든 것은 내 표상이 기대하는 것, 내 욕망을 위한 목적에 포섭된다. <밤과 낮>에서 성남은 유정과 관계를 맺지만 주변인들 다수가 공통되게 그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이쯤 되면 그 서술은 객관이랴.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와 정사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란 표상에 갇힌 그는 객관의 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되돌아간다. <밤과 낮>에서 결국 한국으로, <자유의 언덕>에서 일탈했지만 결국 연인과 재회하는 등 말이다. 하지만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카메라를 통해 시선을 강조하는 것처럼 해외에서 달리 바라보는 시야, 이에 한국에서 해결되지 않던 일들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도 그렇다. 그녀 스스로도 한국에서의 나쁜 일을 떨쳐버리고자 자신감을 가졌고, 독일의 낯섦에 적극 참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망령이 뒤따라오고, 잠든 그녀를 데려간다. 우리는 익숙한 표상이란 망령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과연 어떤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가?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눈에 띄는 연출은 줌아웃이다. 그간 홍상수의 작품에서 줌인이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형식을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이에 본 작품에서 다가가는 것은 매우 드물고, 비교적 무언가로부터 멀어진다. 물론 가까이 있는 대상, 클로즈업으로부터 시작된 줌아웃은 무언가를 드러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 줌아웃에 의해 상옥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이, 또 풍경이 확장되며 지금 그녀가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지가 줌아웃으로 드러나고, 작았던 세부가 커다란 전체로 확장된다. 줌아웃은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 세계의 본 모습을 드러나게 만든다. 조금 먼발치에서 사소한 것이 아니라, 총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줌아웃의 확장이라는 의미에서 영화의 도입부가 특히나 눈에 띈다. 여동생 정옥은 잠들어있다. 꿈꾸고 있는 그녀의 숏으로 상옥의 손이 침투해온다. 이윽고 줌아웃이 사용되며 정옥의 세계는 상옥으로 확장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멀어진다. 가까이서 있던 것으로부터 저 멀리, 줌아웃이 사용되는 영화는 가까이 있는 나, 마주하고 있는 얼굴, 현재로부터 줄곧 멀어진다. 이에 우리는 현재의, 그리고 내가 바라는 나로부터, 타인이 바라는 나, 과거의 나로 멀어진다. 특히 영화의 말미에 상옥은 영화감독과 단편영화를 찍는 약속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약속은 파기된다. 줌아웃이 사용된다. 멀어진다, 그녀의 바람으로부터. 이러한 줌아웃과 더불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연출은 비일상적인 감각을 환기하는 형식이다. 영화에서는 상옥의 독백이 적극 활용된다. 하지만 그녀의 독백은 웅얼거리는 듯, 발음이 다소 불명확하게 들린다. 영화의 사운드 문제는 아니다. 현실 속 정옥이나 행인, 조카, 감독과 대화하는 상옥의 발성은 매우 정확하다. 그렇다면 독백의 불명확한, 흡사 웅얼거리는 듯한 음향은 의도된 것이랴. 이는 나 자신도 어렴풋한, 타인에게는 더욱 모호한 내면, 심리를 구현하는 형식이랴. 나에겐 어떤 생각, 마음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또 영화에서 서로가 '현재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상대방이 꿨던 꿈, 생각 등은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얼굴 너머의 내면을 마주하기란 매우 불명확한 일이다.     


이렇게 홍상수는 내면 그 자체를 선명하고 정확하게 옮겨오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불명확함을 불확실한 형식으로 구현한다. 다소 작위적으로도 들리는 독백의 음향, 그것이 바로 세잔처럼 영화 고유의 형식을 모색하려는 홍상수의 탐구가 아닐까. 영화 도입부에서 매우 투박하고 거칠게, 촌스럽게도 느껴지는 배경음악의 사용도 그렇다. 이들은 자연스럽고 매우 명확한, 일상의 감각과 시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롱테이크와 그것의 청각과 다르다. 현실과 다른 영화의 경험이란 기계에 의한 음향의 불명확함, 시각에 마음대로 침투되어 거칠게 느껴지는 청각,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렌즈 등이다. 홍상수는 이러한 영화적 요소로 현실의 삶과 죽음, 우리의 얼굴을 옮겨온다. 이렇게 옮겨진 얼굴, 하지만 우리는 다만 상대방의 얼굴만을 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다만 얼굴을, 그래서 대상의 생각, 심리, 정옥이 꾼 꿈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각자의 표상 속에 갇혀있어, 말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다. 상옥도 감상자도, 정옥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다.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꿈꾸는 그녀의 얼굴을 알 뿐. 영화의 후반부에 상옥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도 드러났지만, 그 이전 우리는 다만 추측만 가능했을 뿐이다. 허벅지나 배를 질끈 껴안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 심각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좀 뻐근한 것일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실해지는 순간은 그녀가 자신의 표상을 말로써 털어놓을 때, 그래서 얼굴은 모호하다. 얼굴을 봐도 우리는 모른다. 믿음초자연적인 절대자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 영화에서 상옥이 독백이나 대화에서 줄곧 되뇌는 단어는 ‘믿음’, 그래서 우리는 얼굴을 '믿어야' 한다. 얼굴을 통한 대상은 아는 영역이 아니다. 대상은 얼굴의 잔상만 남겨놓고 우리로부터 떠나기 일쑤다. 사진을 찍어준 행인, 떡볶이 가게를 차린 조카, 조연출 등 모두 자매와 감상자에게서 떠나간다. 그렇게 떠나가고 우리에겐 과거의 잔상만이 남아 있다. 행인의 인상이 참 좋다고, 또 조연출이 더 남아있고 싶어 했던 것 같다고 상옥은 말한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앎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한 추측, 믿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옥도 마찬가지다. 상옥과 정옥이 갑자기 찾아와서 조카의 여자 친구는 정신없이 그녀들을 응대한다. 정옥이 혼을 쏙 빼놓는 바람에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비로소 그녀들이 떠나가자 조카의 여자 친구는 길을 나서는 두 중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상만 남은 그녀들의 앞모습을 생각하리. 그 젊은 여성은 두 중년 여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감상자에게 주어진 젊은 여성의 얼굴 또한 모호하여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우리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는 얼굴, 그마저도 흘러가고 사라져버리는 현재에 다만 과거의 잔상을 회고하고 추측하며 믿을 뿐이다. 현재에 없는 것을, 단지 우리의 상상을 말이다. 그래서 영화 속 그들이 현실, 현재에 살아가고 있더라도 모호한 얼굴을 맞댄 그들은 줄곧 확실한, 내가 기억으로 쥐고 있는 과거를 불러온다. 자매인 상옥과 정옥은 조카를 아꼈던 마음, 갑자기 떠나가 버린 언니, 서로의 취향, 미국에서 삶 등 과거를 줄곧 반복한다. 그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호한, 여러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얼굴과 달리, 과거는 닫혀 있기에. 더욱이 상옥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 익숙한 것은 멀지 않은 과거인 미국에서의 삶이요, 현재의 한국에서의 삶은 매우 낯설다. 그래서 홍 감독의 그간 해외를 다룬 작품에서처럼, 이방인들은 익숙한 언어, 기억, 삶을 줄곧 소환한다. 현재가 너무나도 낯설고 모호하기에,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기 위하여, 거기에 휩쓸려가지 않고 나를 보존하기 위하여. 익숙한 나와 낯선 거주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부동산이 언급되는 것을 놓칠 수 없다. 그들이 놓인 수도권의 집값이 많이 치솟았다. 그래서 선택권은 없다. 분양권이 주어진다면 반강제로 선택하는 수밖에. 그래서 정옥은 조망이 좋은 아파트를 선택할 수 없었고, 또 상옥이 옛날에 살던 집에서 사업하는 여성은 인천에 살며 서울로 출퇴근한다. 그들은 타율에 의해 삶이 규정되었다. 상옥은 옛날에 살던 집에 가서 이곳저곳 둘러보며, 특히 뒤바뀐 게 없는 정원을 보며 회상에 잠기기도 하지만, 집 내부를 보며 '이렇게는 안 살 거야'라고 말한다. 그녀는 정옥이 요구하는 대로 아파트를 선택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그 내부에 들어가진 않을 테다. 또 타율이 작용하는 대로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바라는 대로 살고자 한다. 그녀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윽고 지현이라는 6살짜리 소녀가 나타난다. 엄마와 함께 인천으로 출퇴근하는 소녀다. 하지만 소녀는 인천으로 향하지 않고 거기서 산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상옥이 그 집에서 살던 당시와 또래다. 그렇기 때문에 상옥은 소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지는 않은가. 인천으로 향하지 않고 그 집에서 살고 있던 나의 기억을 투영하며 말이다. 현재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현재의 얼굴을 봐도 모르겠다. 두 자매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멈춰선 한 행인이 아는 상옥은 현재의 그녀가 아니라, 과거에 '배우'로 활동한 그녀의 사실이다. 그래서 현재를 파악하고자 과거를 불러온다. 이에 영화의 롱테이크는 현실 속 계속 흘러가는 시간을 보존하지만, 동시에 거꾸로 흘러가듯 하다. 모호한 현재 속에서 확실했던, 좋았던 기억을 계속 소환하는, 이에 과거의 기억, 잔상 속에 파묻혀 사는 존재, 현재의 얼굴에 계속 이를 투영하는 존재 우리, 그래서 영화는 계속 멀어진다. 현재로부터, 이러한 현재의 나로부터 말이다. 그렇게 멀어져서 타인이 포착된다. 상옥은 한 영화감독과 미팅이 있다. 상옥은 감독의 작품을 보았고, 마찬가지로 감독도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출연한 작품을 감상했다. 지나가 버린, 작품에 보존된 각자의 과거를 현재에 불러온다. 그렇게 내 얼굴은 타인이 바라보는, 단편소설 같고 또 무한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얼굴로, 현재와 나로부터 멀어져 과거와 타자의 시선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멀어지는 것은 내가 알던 것이다. 이에 확장되는 것은 내가 모르던, 타인이 나를 바라보며 알거나 믿는 것이다. 영화감독과 미팅하는 롱테이크는 이전의 롱테이트보다 매우 길다. 그리고 상옥이 연주하는 기타 음악이 깔려 청각에 집중하게 만든다. 또 줌아웃이 아니라 줌인이 활용된다. 영화감독과의 미팅은 지금까지의 연출과 다르게 흘러간다. 일단 음악, 그것은 내 귀에 확실히 박힌다. 이는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의 의도와 다르다. 우리는 본다, 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 내면, 생각을 보고자 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얼굴을 여길 수 없지만, 음악은 그 이면이 없기에 그것 자체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음악처럼 본 숏에서 감독은 그저 얼굴을 본다. 그것은 상옥의 얼굴이 닫혀있기에, 바로 그녀가 죽음을 털어놓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은 장편영화 출연을 제안하지만 상옥은 거부한다. 여러 추측이 그의 뇌리를 스쳤으랴. 이윽고 상옥은 시한부판정을 받아,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여기서 줌인이 활용된다. 줌아웃이 멀어진다면, 모호한 것이라면, 줌인은 다가가는 것, 확실한 것이다. 줌인으로 다가서는 것이 확실한, 여지가 없는 바로 죽음이다. 삶은, 그렇게 살아가는 얼굴은 여러 방면으로 열려 있기에, 그래서 모호해서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결코 확신할 수 없어서, 하지만 죽음은 닫혀 있다, 죽음은 끝이요 하나다. 이에 상옥은 장편영화를 찍을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은 지금까지 만났던, 삶을 향해 뛰어가던 다른 얼굴들과 달리, 달아나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가며 어디로 향했을지 알 수 없을 행인, 조카와의 만남은 비교적 짧았다. 여러 가능성이 있는 삶은 거기에만 안주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맞닥뜨린, 이에 끝을 앞두고 자신의 삶, 과거, 기억을 확인하고 싶은, 여러 가능성을 도모하지 않는 존재는 무한한 삶을 향해 뛰지 않는다. 이에 머물러있는 죽음을 포착하는 롱테이크는 이전보다 길다. 그리고 우리가 긍정하는 삶은 머물러있기보단 달아남, 무한함, 그래서 모호함이다. 삶은 변한다. 미국에서 온 상옥이 내내 밥을 먹다가 빵을 먹기도 하고, 이에 살이 찌기도 하고, 정옥이 과거에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꽃을 좋아하는 것처럼, 무한하게 뒤바뀔 수 있는 삶을 사랑한다. 상옥이 아파트에 굳이 들어가지 않고, 월세에 살았던 것도 붙잡히지 않는 삶을 긍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상옥은 예전에 죽으려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한 행인의 '얼굴' 그 자체를 보고 삶에 대한 열망이 차올랐다. 그 얼굴은 감상자에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얼굴처럼 분명 모호했으리, 파악할 수 없었으리, 하지만 닫히지 않은 무한함, 상옥이 말하듯 그것이 각별한 삶이다. 상옥은 영화감독과 단편영화를 찍으려 했다. 하지만 감독은 어제의 확실했던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술이 깨서 뒤바뀐 것일까, 이를 파토 낸다. 그 이전에도 감독은 어디서 만날지 약속 장소와 시간을 뒤바꾸지 않았던가.     


하지만 상옥은 웃는다. 허탈해서?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눈치다. 약속되어 닫히지 않는 것이 삶이다. 인류는 죽음이란 약속에서, 그 닫힘에서 달아날 수 없다. 반면 삶은 닫히지 않는다. 감독이 약속 장소, 시간을 뒤바꿈에 그사이에 인사동에 들릴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그늘이 자신을 뒤덮어가지만, 그런데도 아직 약속시간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게, 살아있다는 게, 다른 여지가 있다는 게 상옥은 즐거우리. 모호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가능성을 첨가할 수 있는 것. 영화의 마지막, 상옥은 깨어있고 정옥은 잠들어있다. 깨어서 물질을 마주하는 우리는 단단한, 비교적 확실한 삶을 마주한다. 하지만 잠들어서 꿈꾸는 사람들은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추상을 보며 즐거워한다. 죽음에 다가선 자는 깨어 있고, 여전히 죽음이 유예되어 살고 있는 자는 잠들어 꿈꾸고 있다. 꿈꾸는 것의 특권은 깨어난, 잠들 수 없는 사람이 곁에 있음에 더욱 고귀해진다. 이렇게 다시 한번 죽음을 탐구하는 홍상수, 그는 본 작품에서 줌아웃으로 줄곧 멀어진다. 닫힘으로부터 현재로부터 규정으로부터, 하지만 그렇게 멀어짐에 무한한 열림이, 과거와 미래가, 비규정적인 얼굴이 드러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약속된 죽음이 곁에서 아른거리며, 그렇기에 그 얼굴은 더욱 간절하다. 이제 곧 상실될 상옥이 오늘은 곁에 놓여있지 않으니, 아직 죽음을 모르고 삶이 당연한 영화감독은 상옥과의 정사를 그저 포기하지 않던가. 이렇게 영화는 죽음 곁에 있는 삶을 익숙함과 낯선 감각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삶이 익숙한 표상이라면, 죽음은 낯선 해외, 여전히 홍상수는 해외를 두려워하며 자국을, 표상을 불러오는 초상을 그려낸다. 일반적인 나레이션이나 배경음악보다 조야하고 투박하며 인위적인 느낌이 드러나는 형식, 이전의 줌인보다야 부드럽긴 하지만 그런데도 줌아웃임이 확연한 움직임,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모호함을 형식으로 드러낸다. 또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것임이, 흡사 세잔의 회화처럼 드러난다. 그리고 세잔처럼 단지 대상의 시각인 얼굴을 비춘다. 이에 보이는 것 이상을 알 수 없어 수다스럽게 알던 것을 소환한다. 그런데도 모호한 얼굴, 하지만 그런 얼굴로 살아가는 우리, 과거를 소환할 수 있고 닫혀있지 않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우리, 그것이 닫히지 않은 얼굴의 미덕이다. 아스라한 결말의 롱숏처럼, 아직 사라지지 않음에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옥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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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120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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