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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04. 2022

클린트 이스트우드, <크라이 마초>

강자의 덕목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크라이 마초>(Cry Macho) - 강자의 덕목  

“양심을 지니려는 의지란, 가장 고유한 책임 있는 존재를 향해 불려나가기 위한 준비를 뜻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서부 개척 시대의 대표적인 남성상인 카우보이, 그들은 예술에서 우락부락하고 거칠며 용맹한 남성으로 제시되곤 한다. 또 아무런 제약도 없는 대초원에서 한가롭게 말을 모는, 자유의 상징으로도 그려진다. 하지만 때때로 이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대체로 목장주다. 그리고 소유하는 것이 단순히 말과 소, 가축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들은 여성도 소유한다. 포주 남성에게 돈을 지불하고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 돈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범죄도 일삼는다. 여성은 피해자지만, 피해의 응당한 몫을 여성이 받지 못한다. 여성을 소유한 남성, 즉 카우보이에게 대가를 지불한다. 윌리엄이란 이름의 어떤 카우보이는 이러한 과거를 청산했다. 사람들을 죽이고, 또 치유되지 않을 상흔을 남기는 과오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하지만 다른 카우보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로소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간 죄목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되거나, 또 살인에 따르는 양심의 쓰라린 가책으로 종적을 감추어야지만 겨우 자신의 과오를 인지했기에.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로 여기서 카우보이의 진정한 덕목은 자유를 포교하는 자다. 여성들의 지배자, 다시금 미국을 영국의 손아귀에 잡아두려는 압제자가 아니라, 이 모든 지배의 사슬을 끊어내는 해방자였다. 또 이스트우드는 우주로 향한 카우보이를 그려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카우보이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들은 하늘의 탕아였다. 제 쾌락대로 움직이고, 파괴를 일삼는 자, 이에 동료의 기회를 빼앗았던 자, 하지만 늙어서 진정 카우보이가 된 그들은 '목장주'로서 보수하는 자, 타인이 자유로울 기회를 제공하는 자, 그것을 위해 도전하는 자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스트우드에게 카우보이란 마냥 광야를, 그리고 우주를 날뛰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질주에 마땅히 책임을 지는, 울타리 안 구성원들의 자유 또한 존중하는 강자였다. 이렇게 온 생애 동안 카우보이의 삶을 통해 자전적 영화를 선보인 이스트우드가 2020년대의 길목에 또다시 카우보이 영화를 선보인다. 이제는 90세가 넘어간 카우보이, 그리고 카우보이들이 노마드로 뒤바뀌는 작금에 이스트우드는 과연 어떤 카우보이를 그려낼까.     


1930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의 대표적인 노장이자 배우이다. 그의 영화는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와 출연하지 않는 영화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에서는 제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그럼으로써 타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개인의 숭고한 여정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이 같은 경향을 그려낸 작품으로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과 <리차드 쥬얼>이 대표적이다. 한편 이스트우드 본인이 출연하고 연출하는 작품에서는 시간성이 도드라진다. 그것은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과도 같다. 자신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을 다가오게 만들거나 되돌아오거나 현재화하며, 그렇게 시간에 이스트우드 본인이 일부 투영된 캐릭터들을 아로새기며 그들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스트우드가 비본디적인 시간을 자신화하는, 바로 그 시간은 무엇인가. 젊은 시절의 이스트우드는 시간에 자신을 바라는 것을 투영한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내가 선택하기는 했지만 내가 아닌 삶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불륜을 통해, 아주 찰나 동안 내가 바라는 시간을 되찾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되찾는 시간은 찰나요, 이후에는 자신이 선택하고 현재에는 바라지 않을지언정 책임져야 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젊은 시절의 이스트우드는 책임의 시간과 욕망의 시간을 유랑하다 결국에는 전자로 되돌아온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일대기다. 되돌아가야 할 시간에 제 자신의 쾌락과 야망에 불타올랐던 남자는, 현재에 참여하지 못하고 과거에 해야 했던 일들을 속죄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노년, 현재의 이스트우드는 그의 삶 전반을 지배했던 과거의 시간과 현재 다르게 펼쳐지는 오늘날의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다. 현재의 이스트우드는 과거에 충실하지 못했던, 방종한 시간을 살아온 노인들을 상정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과거에 그랬어야 하는 자신의 선택을 불러온다. 이스트우드에게 인간은 후회하는 동물일까. 현재에 적절한 선택과 책임을 지지 못하고, 지나간 이후에야 이를 짊어지고 반성하는 존재, 그렇게 항상 뒤돌아보며 현재에 과거를 소환하는 존재…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퇴물 트레이너이자 매니저인 프랭키는 딸에 대한 후회가 있다. 그리고 그의 근작인 <라스트 미션>의 주인공 얼은 젊은 시절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왔고, 아버지로서 소임을 다하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들은 작금에라도 과거에 수행했어야 하는 시간을 되찾으며 진정으로 회개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와 매기는 트레이너와 선수 관계가 아닌, 딸과 아버지 관계로 이어지며, 결말에서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딸의 선택'을 긍정하며 과거에 발휘했어야 하는 이타심을 회복한다. 또 <라스트 미션>에서 얼은 자신을 위한 돈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돈, 그리고 자신과 야욕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진정 책임져야 하는 아내를 위한 시간을 회복한다. <그랜 토리노>에서는 퇴역군인인 월트가 등장한다. 고루하며 백인의 선민의식이 존재하는 그가 살아온 시간과 오늘날 무수한 인종과 민족이 평등하게 부대끼는 현재의 미국은 전혀 다른 판국이다. 월트는 몽족 소년인 타오와 교류하며 자신의 고루한 사상을 바꿔 나가며 과거를 살아온 자신이 현재를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편 자신이 지금까지 고수해온 ‘그랜 토리노’는 어떻게든 사수해나간다. 그랜 토리노에 깃든 전통은 곧 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끈질기게 해나가는 자유의 정신으로, 월트는 타인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사유를 유연하게 뒤바꾸고, 또 자유의 땅에 이민 온 소년에게는 그랜 토리노를 넘겨주며 자유를 전승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시간에 자신화되어야 할 자유가 곧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밀리언 달러 베이비>, <라스트 미션>의 자신의 책임으로 되돌아감과 일맥상통하리. 이렇게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줄곧 시간화하는 이스트우드는 90살이 넘은 자신이 출연한 <크라이 마초>에서 과연 어떤 시간을 새겨내고 있을까. 영화의 시작, 동이 튼다. 태양이 떠오르며 아침이 시작되는 와중에, 트럭을 탄 늙은 카우보이, 마이크도 하루를 시작한다. 어둠은 가시고 서서히 모든 것이 선명히 드러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탁 트인 광야의 해방감을 드론숏을 활용한 익스트림 롱숏으로 구현한다. 여전히 카우보이는 달린다. 단지 안장 대신 트럭에서 내릴 뿐이다. 영화는 말 대신 트럭 위에서 질주하는 자유로운 카우보이 각각의 세부를 클로즈업으로 조각조각 포착하여 이어낸다.     


이후 그것을 퍼즐처럼 모두 맞춘 듯한 완전한 풀숏의 마이크를 포착하며 20세기 서부극의 스타일리시한 문법을 이어온다. 하지만 영화에서 포착하는 카우보이가 명성을 떨쳤던 시간은 지금이 아니다. 다시금 태양은 우중충한 구름에 가리고, 그의 집안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먼지가 자욱해 그가 사는 시간이 현재가 아니라 까마득한 과거라는 것을 가리키듯 하다. 그리고 영화는 마이크가 명성을 떨쳤던 과거를, 로데오하는 흑백 푸티지를 인서트하여 보여준다. 그것은 컬러인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유실된 흑백 과거라는 것을 지칭함과 동시에, 푸티지의 내용은 로데오하다 마이크가 미끄러지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로데오를 즐기는 흑백의 마이크일 수도 있지만 미끄러지지 않는, 즉 '실패'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마이크일수도 있다. 과연 마이크는 이러한 흑백 푸티지의 어떤 요소와 다른 현재를 만들어갈 것인가. 외에 영화는 나이가 90이 넘은 이스트우드의 발걸음에 따른 아주 느린 트래킹이 인상적이다. 경찰이 급습함에 따라서 급박한 핸드헬드와 재빨라지는 달리를 확인한다면, 영화의 운동감은 주인공의 발과 다리에 상응함을 알 수 있으리. 2010년대의 작품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느리지 않았던 이스트우드의 작품 속 운동감, 미국 영화사의 한 축을 장식해온 노장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지고 뒤처지는 것이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영화의 운동감처럼 영화의 주된 소재는 바로 회오다. 영화의 후반부에 마이크는 라포에게 늙어서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늙은 개를 데려온 부보안관의 부인한테 '늙음은 치료할 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전하지'라고 난감해하는 것처럼, 늙어서 깨닫는다고 해도 이제는 그것을 활용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마이크는 그렇게 깨달은 바를 통해 어떻게든 반성하고, 라포와 로드무비와 서부극이 뒤섞인 여행을 하며 이를 계승하는 것이랴. 그렇게 마이크가 반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늙고 허리도 다쳐 쇠약한 마이크는 아들뻘인 하워드에게 밀려나는 판국이다. 아직 젊고 창창한 하워드가 지향하는 가치는 돈이다. 그는 마이크에게 멕시코에 있는 자기 아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처음에는 아들이 그리워서 마이크에게 부탁한 줄 알았지만, 실상은 부유한 전 부인과 공동 투자한 바를 거래하려는 수작이었다. 사실상 부모의 이름으로 하워드는 납치와 몸값을 요구한다.      


하워드의 전 부인 레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라포를 소유하지, 결코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유함으로 타인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오만함에 가득 차 있다. 부유한 그녀가 마이크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그가 이를 거부하자 그녀는 흡사 당연하게 이를 승낙할 줄 알았다는 듯 분노한다. 또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쾌락이다. 사실 이혼한 부부는 닮아있다. 방종하게 쾌락을 추구하는 레타, 이러한 레타의 쾌락에서 달아나 미국에서 오직 제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하워드, 이에 아들은 방치되어 있다. 어쩌면 마이크의 젊은 날도 그렇지 않았을까. 라포는 마이크에게 하워드는 거짓말쟁이라며 분노한다. 하지만 마이크는 하워드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조금 늦은' 것이라며 변호한다. 늙은 그가 반성하는 것은 젊은 날에 책임져야 했던 선택의 몫을, ‘조금 늦게’ 늙은 작금에라도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리라. 더욱이 한때 로데오 카우보이로서 많은 명성을 쌓았을 마이크, 하지만 추락하고 나니 모든 것은 부질없고, 더욱이 떠나간 아들과 아내는 영영 되찾아 올 수도 없다. 그래서 마이크는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반성하고 지금이라도 간접적으로 책임지고자 한다. 레타는 여전히 라포를 방치해둔다. 하워드도 라포를 신경 쓰지 않고 몇 년간 미국에서 돈만 벌었다. 한편 마이크는 허리를 다치고 노쇠한 이후, 하워드의 후원으로 카우보이로서의 명맥과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레타와 하워드는 책임 있는 라포를 내버려 두지만, 하워드에게 도움받은 마이크는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껴 라포를 데려와 달라는 임무를 기꺼이 승낙한다. 영화는 노인들이 일련의 임무를 부여받는, 이스트우드가 배우로 참여한 21세기 작품들인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라스트 미션>과 구성이 유사하다. 이는 책임임과 동시에, 자신의 유용함과 강함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 삶을 스스로 건사하지 못하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하지만 타인에게 임무를 조달받고 그것을 수행하는 쓸모 있고 강한 존재로 다시 거듭나며 제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 라포는 자신이 키우는 수탉에게 마초, 즉 '강한 자'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러한 마초는 후반부에 아우렐리오가 총을 겨누자 마이크나 라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 강한 자는 자신을 돌봐준 라포와 마이크를 위해,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직하게 아우렐리오와 맞섰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즉 강자는 타인에게 지배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책임을 짊어지는 자다. 특히나 강자는 약자에게 책임이 있다. 다이너에 모인 무수한 마초들이, 라포가 아우렐리오한테 폭행당했다는 멍 자국을 폭로하자 그를 징벌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이크가 라포와의 여행에서 교정하는 것도 그렇다. 라포가 마초와 동등하게 관계 맺는다곤 하지만, 인간보다 작은 존재를 소유하여 투계시키던 과거와 절연한다. 또 방치되어 마냥 절도하던 마이크에게, 마르타의 가게에 머물며 받은 것에 대한 책임을 교환하는,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짊어지는 방종 아닌 자유를 가르친다. 가르침, 그것은 마이크와 라포가 종교를 소재로 대화하며 '신의 자식', '누군가의 자식'을 운운하는 것처럼, 이러한 신의 자식, 누군가의 자식은 신이나 누군가를 닮아야 하는 운명이므로. 닮아가는 과정이다. 마이크는 스스로 제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친다. 마이크는 하워드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트럭과 말이 매치 컷 되는 것처럼 그는 여전히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서 나아간 곳의 스페인어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언어만이 유일한 장애가 아니다. 여전히 여러 난관이 그를 향해 파도처럼 밀려든다. 레타의 말에 불응하자 그녀는 마이크를 납치범이라며 경찰에 신고하고 아우렐리오에게 추적을 명령한다. 이윽고 라포와 만나게 되니 그의 주변에 경찰이 따라다니고, 또 아우렐리오와 마주친다. 겨우 소년과 뜻이 맞아 국경으로 가려 하니 차량을 도둑맞는다. 부보안관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고, 하워드의 진의를 알게 되자 마이크는 고민에 휩싸인다. 하지만 타인이 자신을 붙잡고자 하는 방해, 그리고 자신이 짊어진 책임이란 장애를 마이크는 언제나 따돌리고 극복한다. 임기응변으로 아우렐리오를 물리치고, 오른 세월 무수한 존재와 상황에 직면해온 마이크는 노련한 운전 솜씨로 젊은 경관들도 따돌린다. 그렇게 타인에게 구속되지 않기 위해선, 그들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강한 존재여야 한다.      


카우보이가 꿈인 소년에게 마이크는 광야에서 강인하게 생존하는, 제 자신의 주인이 되는 ‘카우보이 되기’를 로드무비의 여정에서 가르친다. 이제 소년이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경찰을 잘 구슬려 따돌린다. 그리고 소년은 선택해야 한다. 달아나고 싶어도 레타나 하워드의 자식이므로, 끝끝내 라포가 선택하는 것은 하워드다. 그래도 마이크를 포용해준 존재로 닮기 마땅한 인물, 그리고 하워드가 놓인 공간이 카우보이라는 제 꿈을 펼칠 수 있는 텍사스이므로, 소년은 이러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마이크에 의해 충분히 짊어질 수 있게 되리라. 이와 동시에 마이크는 헤아리는 자다. 라포가 마초에게 투계를 시키는 것은 올바른 지배가 아니다. 카우보이로서 목장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덕목은 바로 헤아림이다. 성모 마리아의 사당에서 마이크와 라포가 잠을 청해도, 자애로운 절대자는 그 모든 사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카우보이 마이크는 동물들을 마냥 힘으로 다스리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야생마를 길들이는데 곤궁에 빠진 한 카우보이를 마이크가 도와준다. 그것은 말의 상처, 즉 사정을 헤아리면서, 그리고 말의 언어를 이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후에도 여러 동물과 부대끼며 살아온 그에게 마을 사람들이 가축과 반려동물의 진찰을 요구하러 온다. 마이크는 언제나 그들의 상태, 상처를 그들의 시야에서 헤아린다. 이는 마르타의 손녀 중 한 명이 청각장애인이기에 수화를 사용하는 것과 연관되며, 또 서부극을 연상케 하는 밤의 광야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백인 마이크가 메스티소 소년인 라포를 지배하지 않고 그의 삶, 상처를 헤아리는 것과도 연관된다. 마이크가 늘그막에 겨우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또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무수한 존재와 부대끼며 버텨온 노인의 지혜란, 바로 상대방을 헤아리며 공존하는 정신이랴. 그래서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은 공존한다. 마르타와 마이크, 양자 모두는 배우자와 자식을 잃었기에 서로의 결핍과 회한을 누구보다도 서로가 충족해줄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마냥 나를 위한 쾌락의 대상으로 타인을 삼지 않는다. 경찰, 부보안관, 아우렐리오 모두가 마이크와 라포를 쳐다보는 와중에, 나 하나 좋자고 마르타를 위태롭게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그들은 떠난다. 마르타와 머물고 싶은 바람, 하지만 그것을 이행한다면 책임질 수 없는 후폭풍이 다가올 것이기에. 이는 감당할 수 없는 방종, 카우보이의 자유는 방종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랜 토리노>에서 늙은 존재가 젊은 소년에게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르친 자유, 늘그막에 깨달은 그 정신을 <크라이 마초>에서도 계승한다.     


최근 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은 저물어갔다. 당장 공개된 지 얼마 안 된 <파워 오브 도그>만 하더라도 카우보이이자 농장주 필은 죽음에 처했어야 했으니. 하지만 그것은 시대의 종언이 아니다. 카우보이로 대변되는 '남성 되기', 그리고 '자유'가 타인을 향한 '지배욕'이자 '방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우보이라는 시대상의 죽음이 아니라, 방종과 타인을 지배하려는 야욕에 의해 끊임없이 먹고 먹히는 살육의 투기장에서의 죽음이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잡아먹히다 보면 계승할 수 있는 것이 없으리, 하지만 이스트우드의 카우보이와 마초는 여전히 생존한다. 그에게 마초는 강한 자, 이는 약자를 보호해줄 수 있는 강한 자임과 동시에 자신을 지배하는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 또 카우보이가 추구하는 자유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타인의 자유에 관용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초는 아직 죽지 않는다. 하워드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겨우 연명하던 마이크는, 결말에선 소년으로부터 수탉 마초를 받는다. 소년은 마초가 되기 위해서 더 성장해야 하는 존재이므로, 제 자신도 버거운 소년은 아직 강한 자인 수탉과 동등하게 공존하기엔 모자라므로. 반면 강한 자에서 쇠약한 노인으로 쇠퇴한 마이크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오롯이 수행하며 다시 마초임을 인정받는다. 이렇게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마초는 여전히 울부짖으며 세상 속에 제 자신의 존재를 우렁차게 증명한다. 여전히 이스트우드의 지론과 매끈한 연출이 녹슬지 않았음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 그의 쇠약해진 발걸음과 쇳소리에서도 여전히 강직한 노인의 자유와 지혜, 그리고 인간의 숭고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지만, 마냥 긍정적으로 평할 순 없다. 그것은 이스트우드의 지난 작품들과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반성하는 노인이 임무를 조달받고 국경을 넘고, 이를 수행하며 방종하던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고 책임을 짊어지고, 이를 통해 타인을 헤아리는 영화는 앞서 언급한 이스트우드의 21세기 자전적인 영화들에서 줄곧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었다. 노장의 우직함, 하지만 단단한 뚝심 속에서도 새로움과 신선함을 보여줄 수 있는 여지가 분명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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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104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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