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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14. 2022

브루노 뒤몽, <프랑스>

시청각의 홍수에서 길을 잃다

브루노 뒤몽(Bruno Dumont), <프랑스>(France) - 시청각의 홍수에서 길을 잃다  

“인간과 역사에 아무런 진실도 아무런 거짓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잠, 아니 악몽일 것이다. 여기서 나를 깨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어느 한 안정적이고 평온한 부르주아지 가정이 포착된다. 이윽고 그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킬, 비디오라는 돌덩이 하나가 던져진다. 비디오는 그 가정을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에 저택에 사는 조르쥬와 안느는 불안해한다. 이들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기록하며 왜곡할 수 있는 특권층이다. 조르쥬는 TV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PD로서 편집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촬영된 사실 중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을 잘라내고 왜곡하여 시청자들에게 매개할 수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영상을 시청자는 별 의심 없이 믿게 되리. 그리고 백인이란 위치도 그렇다. 조르쥬는 어렸을 적, 부모님이 입양하기로 한 알제리 소년 마지드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유포했다. 마지드는 이에 항거하지 못한다. 작금에도 조르쥬와 흑인이 충돌했을 때, 사회적 편견에 의해 흑인이 잘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에 대한 편견과 악의적인 소문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조르쥬는 마지드에 관한 소문을 꿈속에서 현실화하여 믿는다. 그리고 백인이 조작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참회나 반성하지 않고, 그저 망각한다. 조르쥬도 그간 잊고 살았고, 그의 어머니도 굳이 기억해야 할 일도 아니거니와, 기억해봤자 좋을 게 없다며 잊으라고 종용한다. 즉 유색인종은 백인이 그들을 왜곡하고 좌지우지하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백인의 특권적 위치는 감시나 통제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인 부르주아를 감시하고 지켜보는 비디오로, 그들이 그간 자유로울 수 있었던 죄의식을 수면 위로 불러내어, 이에 따라 백인의 삶을 움직이게 만든다. 본 작품은 바로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이다. 이러한 영화 속 비디오는 극 중의 누군가가 보낸 것이 아닌, 영화 외부의 감독이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영화 속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선이 바로 감독의 것, 그리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네케는 정보의 실체를 의심하고, 생산의 특권층을 감시하는 시선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어 그럴듯하게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렇게 서두에 <히든>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브루노 뒤몽의 신작 <프랑스>도 감독의 유사한 시선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볼 수 없는 것, 애써 외면하는 것을 외부에서 목도하고, 이를 던져주는 작품, <프랑스>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뒤몽은 대중들이 보지 못하는 저널리즘의 이면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위치를 옮긴다. 1958년 프랑스 태생의 브루노 뒤몽은 기독교, 선/악을 영화적으로 일평생 탐구하는데 매진하는 감독이다. 그는 종교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본인의 사유와 그가 나고 자란 플랑드르의 삶과 풍경, 경험을 영화에 녹여낸다. 그리고 초기작과 근작의 스타일이 매우 다른 감독이기도 하다. 90년대에 뒤몽은 로베르 브레송의 적자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스타일이 바뀌는 기점인 <까미유 끌로델>까지 이어진다. 뒤몽의 카메라는 롱테이크를 활용하여 날 것에 가까운 시간을 담아냈고,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뒤몽은 이러한 자신의 영화를 두고 '본연의 형태로 되돌린다.'라는 언급을 하였는데, 이러한 말 따라 현실을 기초적인 요소로 포착하는 그의 작품은 영상 매체의 ‘포착’하고 ‘기록’하는 본원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또 브레송을 연상케 하는 건조한 디렉팅으로, 거대한 공장에 가까운 이념과 종교 내부의 톱니바퀴, 기계 장치로 전락한 차가운 인간의 군상을 즉물적으로 담아냈다. 그의 데뷔작인 <예수의 삶>이나 <휴머니티>에서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가 아닌, 대단히 볼품없는 불한당의 삶을 담아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이 만들어 그와 닮은 피조물이라면, 이러한 악한 상이 곧 그들이 바란 창조물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는 '경찰'이 자주 등장하는데, 때때로 이들은 선과 진리를 추구하려는 종교적 사명을 다하는 자들이며, <휴머니티>에선 이러한 ‘성자’의 현기증이 담겼다. 하지만 대체로 경찰 또한 불완전하고 무능력하며 악하고 태만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경찰 대신 민간인이 개입하는 <아웃사이드 사탄>, 풍자적인 <릴 퀸퀸> 시리즈가 그렇다.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를 기용한 <까미유 끌로델>에서는 종교적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악으로 가득한 세상과 그저 죽고 망각될, 동물 종인 인간을 담아냈다.     


한편 <까미유 끌로델>에서 전문 배우가 기용됨에 따라 리얼리즘이 불가능하게 되자, TV 시리즈 <릴 퀸퀸>이후로는 작위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며 스타일이 180도 뒤바뀐다.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에서 작위적 양식은 근친상간을 일삼는 귀족들의 인위적 법을 과장하여 폭로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릴 퀸퀸>에서는 결함과 악이 가득한 세계를 연출로 보여준다. 이러한 세계에는 구원이 없다. <까미유 끌로델>과 <잔 다르크>의 비관주의, 흡사 그것이 그리스도가 바라는 좋은 모습인 것 마냥 맹목적이고 무기력하다. 하지만 뒤몽은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휴머니티>, 그리고 <슬랙베이>에서 최소의 연민처럼 말이다. 인간성은 맹목적이거나 외부에서 찾아오지 않고, 내면의 의지를 필요로 한다. 또 뒤몽은 그리스도와 닮아있는 피조물들을 통해 악이 선으로 불리는 세태를 비판한다. <릴 퀸퀸>의 속편인 <꽥꽥과 잉여인간>에서는 세례, 수태고지를 빌려와 무능력하고 사악한 원본, 경전을 따라 하는 동시대를 풍자하고, <슬랙 베이>에서 신비체험은 있을지언정 선함이나 구원이 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러한 최근 그의 작품에서는 <슬랙 베이>에서처럼 개념화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타자들이 등장하는데, 특정 시대성과 장르성을 파괴하는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은 이 같은 뒤몽의 세계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연출로 승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카메라의 건조하고도 무감한, 그리고 객관적인 태도는 20세기나 21세기나 이어지고 있었는데, ‘영화 본연의 형태를 추구하는 연출’은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서도 뒤몽의 카메라는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체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이미지의 의미는 카메라 앞에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짐으로써 발생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포착한 숏을 잘라내고 이어낸 편집을 통해 영화의 이동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편집으로 영화는 여러 경계를 오간다.     


서론에 <히든>을 언급한 이유처럼, 전능한 하이앵글, 외부의 시선으로, 내부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모조리 포착한다. 이에 영화는 허구적 산물인 시뮬라크르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현실의 경계를 줄곧 오간다. 한편 현실과 혼동되고, 현실에 모방되는 시뮬라크르에 의해 그 경계는 점차 흐릿해져 간다. 본 작품의 연기는 <슬랙베이>처럼 마냥 우악스럽거나 우스꽝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초기작처럼 아예 브레송 스타일의 즉물적 연기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초기 리얼리즘 스타일에서 현재 작위적인 스타일의 분기점에 놓인 작품인 <까미유 끌로델>의 리얼리즘과 기교의 절충을 본 작품에 다시 가져온다. 바로 전작 <잔 다르크>의 연장선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디렉팅은 자못 진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근 뒤몽이 이어오는 풍자적 성격과 단절되진 않는다. 극 중 대중들의 태도를 닭 울음소리에 빗대는 저널리스트의 오만함이랄지, 실체나 내용은 없고 오직 피상을 맹목적으로 찬미하는 허황한 대사들이 그렇다. 한 대상을 꾸미기 위한 대사는 아주 장황하지만, 거기에 내용은 없다. 오직 겉 포장뿐, 자본주의의 개념과 자선을 혼동하는 주장, 그저 이름의 차이일 뿐인 좌파와 우파의 분류가 그렇다. 그리고 본 작품 속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일단 포장된 프랑스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언급한 영화의 거리감부터 살펴보자. 일단 도입부, 프랑스는 대통령 마크롱과 인터뷰를 하러 기자회견에 방문한다. 하지만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서 과시하듯 전화를 거는 대상은 바로 아들 조조다. 그녀가 지금 통제하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대상은 바로 조조일까.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이 그리운 것일까. 이후 취재가 끝나고 사적 영역인 집으로 향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조조를 귀찮게 하지만, 그 시간은 찰나다. 짧은 순간으로도 만족한 것일까, 그녀는 취재를 위해 공항으로 향하며 카메라로부터 멀어져가고, 또 문밖을 나선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줄곧 시청률을 갈구하는 선동가가 될지, 이런 자신에게 실망하여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택할지, 갈림길에 서서 양자 사이를 줄곧 오간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오래 있지 못한다. 한때는 지하디즘을 훌륭하게 연출한 의기양양한 제 자신이 카메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교통사고를 낸 자신의 눈물을 노출하기 싫었다. 노출되고 보여주기 위한 자신을 의도하며, 프레임 바깥으로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이후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는 솔직한 제 자신의 눈물을 드러내고, 심지어 방송국의 카메라를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노출되기를 바라지 않고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길 바라는 그녀는, 대중·카메라·방송국 등 든 시선으로부터 멀어져 요양원으로 향한다. 이제는 어떠한 시선도 없는,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는 것을 바라며 은퇴한다. 하지만 은퇴조차 찰나다. 그녀는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온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현실이든 시뮬라크르든, 사적 영역이든 공적 영역이든, 절대적으로 프랑스가 원하는 것은 없다. 그때그때 원하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의 유무,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 따라 달라져 멀어지고 가까워진다. 이러한 프랑스가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경우는 그녀의 의도대로 타인에게 노출되고 있을 때다. 프랑스는 본인이 원치 않는 구도나 촬영일 경우 바깥으로 나간다. 카메라는 그녀의 의도를 포착한다. 진실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그녀는 자신이 피사체이기도 하지만, 피사체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다. 그녀는 조조, 프레드, 촬영 대상 모두를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다. 작가인 그녀의 남편 프레드의 명성도 프랑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이 암시된다. 슈슈라는 언론가가 연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대가로, 프랑스는 그녀에게 프레드와 그의 책이라는 피사체가 노출될 기회를 얻는다. 전쟁이 발생하는 중동조차도 만들어진다. 프랑스의 질문에만 답변할 수 있는 무슬림들은 자국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드러낼 수 없고, 프랑스가 ISIS 격퇴를 도와주고 있음을 확인만 해주는 수동적인 사람이 된다. 또 그녀는 통역가와 같다. 프랑스는 아랍어를 번역해주는 통역가의 해석이 영 마음에 차지 않은지, 촬영이 끝난 이후 다시 번역하자고 말한다. 연출가로서 그녀는 '자국의 대중들이 보기 좋고 듣기 좋게' 현실을 허상을 번역한다. 카메라의 현장감, 조야한 화질, 핸드헬드는 진실이 아니다. 감상자가 기대하는 것을 꾸며낸 프랑스의 위선과 가식이다.     


이렇게 프랑스는 미디어를 조작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프레드가 프랑스의 뜻대로 감정을 통제하거나, 그녀의 요구대로 얼굴을 전시하지 않는다. 불쾌감을 대놓고 내비친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에 프레드는 프랑스와 말다툼하며 그녀의 시선, 곧 카메라에서 멀어지고, 조조도 그녀의 강요를 거부하며 멀어진다. 프랑스가 그들을 자신의 시선에 붙잡아두며 미디어인 자신은 바라지만, 그들은 원치 않는 거짓을 강요한다면, 이를 거부하며 떠나는 것이 타자의 진실이자 현실이다. 영화는 현실을 일부 조작하여 송출하는 프랑스가, 왜곡할 수 없는 타인의 진실에 집중해야 함을 줌인으로 보여준다. 불쾌함을 내비치는 프레드의 얼굴에 줌인을 사용한다. 그리고 프랑스가 교통사고를 낸 청년의 집에 방문한다. 그녀가 단지 알고 있던 것은 파편적인 사실 뿐이었지, 당분간 일을 하지 못해 생계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저널이 알려주지 않는 진실이었다. 저널은 주목을 끌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 대중들이 자극적인 보도를 원하는 의도에만 부응했다. 자신의 불찰로 인해 암담해진 한 가족의 사연에 몰입하는 프랑스의 얼굴, 그 집에 가기 직전까지는 한 카메라가 뒤따라오고 있었지만, 집의 내부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해 타인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에서 그녀는 진솔하게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이를 줌인으로 집중하고, 롱테이크로 길게 포착한다. 줌인과 롱테이크는 곧 사심 없는 진실에 집중하는 저널의 태도, 하지만 프랑스는 항상 취재대상을 향해 길게 뒤따라가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그렇다. 그녀의 시선은 기자회견장에 도착한 마크롱을 따라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관심, 수다가 우선이다. 자신의 호기심을 위해서 대통령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답변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가 사회를 맡은 프로그램에서 경제 및 사회 현안에 관한 토론이 열린다. 하지만 프랑스는 패널들의 토론이 격심해지기 전에, 적당한 수준에서 중재하고 마무리 짓는다. 프랑스는 마크롱의 답변이나 전문가들의 토의를 감상자에게 매개하지 않는다. 마크롱은 기자회견장에서 프랑스가 민주적이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다원적이기에 하나로 뜻을 모으기 어렵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단순히 여러 의견이 난립해서일까, 서로가 외부에서 난립하는 의견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닐까. 마크롱과 프랑스 사이, 토론에서의 패널들과 프랑스 사이, 양자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연출 중 하나는 차량 내부 씬이다. 차량 내부는 너무나도 선명하지만, 외부는 흐릿하고 분절적으로 보여서 스크린처럼, 내부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자신과 외부의 관계를 보여주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외부 세계에 관심이 없는 듯한 차창의 불투명성, 참여할 수 없는 허구적인 세계가 곧 외부, 내부에 갇힌 상태에서 프랑스는 바티스트를 치이는 교통사고를 내지 않던가. 프랑스가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내부에 봉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냥 보기 좋은 참여할 수 없는 세계, 실제와 괴리가 있는 세계, 자유분방하게 질문하고 표현할 수 있는 태도, 적당히 보기 좋게 정돈된 토론의 모습, 즉 감상자가 보기를 기대하는 매무새를 보여줄 뿐이다. 이에 진실을 뒤따라가지 않고, 오직 그녀의 근처에서 적당히 꾸며낸다. ISIS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격돌하는 분쟁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생생한 그들의 투쟁이 아니라, 프랑스의 구도에 담겨 특정한 포즈를 취하는, 일련의 쾌나 만족감을 불러오는 피사체가 전달된다. 프랑스의 형식에는 진실이 없다. 실제 역사에서 2차 대전 당시 집단수용소에서 카메라를 숨기고 있던 한 유대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 마구 흔들리는 '암흑 사진'을 홀로코스트의 진실로 내놓았다. 감상자는 무언가를 보고 싶겠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곧 홀로코스트의 급박함이자 유대인들의 절박함, 당대의 진실이리. 하지만 프랑스가 분쟁지로 향한 보도의 형식에 이러한 진실은 녹아드는가? 프랑스는 절대 안전하지 않은 분쟁지를 안전하다고 거짓말하고, 그녀가 촬영하기 위해서 지중해로 향하는 난민들의 배를 세워 기다리게 만들며, 촬영을 위해 방송용 배를 통제한다. 일상 속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는 프레드의 사진조차도, 현실의 프레드보다 10년이 더 늙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를 찍어준 프랑스의 악의, 못마땅한 태도가 묻어나는 것이랴. 보이는 것은 프랑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고, 볼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리고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포착될 수 없다. 미술 수업을 싫어하는 조조가 곧 진실이지만 프랑스는 아들의 삶을 따라가지 않으니, 조조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영화가 진실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매우 회의적이다. 프랑스의 곁에는 '루'라는 프로듀서가 있다. 그리고 프랑스가 언제나 주의를 두는 것은 그녀다. 마크롱의 답변이 아니라, 루가 점검해주는 대중의 반응·평가가 우선이다. 또 그녀가 출연한 프로그램의 진행자 슈슈는 왜 프랑스의 보도 영상이 그토록 자기중심적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녀만 이기적인가. 그녀의 남편 프레디도 이기적이다. 그녀가 방송에서 실수하여 낙담하는 와중에, 그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생방송에 출연하게 됐다며 좋아한다. 앞서 언급한 차랑 숏처럼, 자신은 선명하고 외부는 흐릿하다. 프랑스는 자신만을 바라다가, 바티스트 사건을 겪은 계기로 타인에게 관심을 둔다. 언론에서 은퇴하고 자선가가 되기로 한다. 봉사하는 와중, 프랑스는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슬퍼한다. 이런 프랑스를 두고 노숙인들은 자신이 더 불쌍하다며 불평한다. 행인들도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눈물을 흘리거나, 애도하는 와중에 본인들의 이기심을 위해 사진을 요청한다. 영화에선 분명 언론의 거대한 카메라 외에도, 개인의 작은 스마트폰이 취재용 카메라가 되어 프랑스를 촬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온당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주관적인 촬영, 그렇게 촬영된 바를 다시 한번 주관적으로 자르고 이어 붙이게 될 편집, 이렇게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란 종, 그들이 맡은 저널은 과연 나 자신을 뛰어넘어서 진실을 포착할 수 있을까?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프랑스는 곧 그녀와 감독의 자국 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프랑스가 관심이 있는 것은 분쟁지와 프랑스 자신의 관계 및 영향력이다. 분쟁지는 프랑스에서 유리되어 있다. 프랑스는 최우선으로 주목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포착되는 것은 프랑스다. 전쟁의 참혹한 진실 대신, 프랑스의 웅대함이 포착된다. 프랑스는 그들의 촬영을 위해 수고해준 통역가를 향해 '잘해줬다, 훌륭하다'며 전쟁이란 소재거리를 안전하게 전달해준 노고를 칭찬한다. 프랑스는 오직 프랑스를 포착하고, 프랑스가 보는 것도 오직 프랑스다. 보이는 것은 예쁘게 꾸며지고 완벽한 발성을 선보이는 프랑스의 아름다움뿐이다.      


뒤몽은 이러한 프랑스의 웅대함, 아름다움의 신화를 붕괴시킨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하늘이 포착된다. 삼색기가 펄럭인다. 천상의 프랑스, 이후 틸트를 이용해 하강하며 지상의 프랑스를 비춘다. 영화의 중반부에도 파리를 대표하는 7월 기념비가 하늘을 배경으로 포착되지만, 이번에도 카메라는 여지없이 틸트로 하강하여 추한 지상의 프랑스를 비춘다. 지상의 프랑스는 새로운 진실을 전달하지 않고, 또 프랑스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은 프랑스의 이미지에만 주목한다. 더욱이 프랑스가 지쳐서 알프스의 한 휴양지로 떠났을 때, 아펠 부인이라는 여성은 수용자로서 대중매체에 송출되는 유명인과 관광지에 대한 얘기를 쉴 틈 없이 떠든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본 휴양지에 방문했다고 말한다. 즉 이렇게 감상자가 미디어에 송출되는 바를 따라 한다면, 과연 영화 속 추하고 악한 진실은 매개될 수 있을까. 이러한 아펠 부인은 치료 대상이다. 감독은 실로 회의적이지만 마냥 그 상태에 머물러있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리고 프랑스가 결핍을 느끼는 것도 진실을 좇는 저널의 태도다. 분쟁지의 통역가는 한때 건축가였으나, 자국의 상황으로 인해 반강제로 통역가가 되었다고 밝힌다. 전쟁의 참상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밖에 없는, 선택이 강제된 환경에서 그는 오직 사명을 위해 통역가로 활동한다. 그리고 언제나 진실과 유리되어 있던 프랑스는 이에 자극을 받는다. 이후 토론에서 패널들의 답변을 끊지 않는다. 최대한 그들의 답변에 주목하며 진실에 집중한다. 은퇴한 이후에 프랑스는 알프스의 휴양지에서 샤를이라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카메라 바깥에서 손을 내밀며 프랑스를 구제해준다. TV에 송출되는 프랑스를 모른다고 말하는 그는, 흡사 가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프랑스를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현실로 인도한다. 그는 대중들이 기대하는 프랑스가 아니라, 실재 프랑스를 보고 싶다. 진실한 자신에게 집중하는 샤를에게 프랑스는 서서히 매료되어 간다. 프랑스가 보고 듣기 좋게 번역한다면, 샤를은 가사를 몰랐을 땐 웅대하고 아름다워 보였던 노래의 진실인 <세상의 종말>을 솔직하게 번역한다. 진실을 말하고 솔직하게 '보이는' 샤를을 향해 프랑스도 자신을 고백한다.   

   

하지만 샤를이 기사를 위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는 절망한다. 나의 진실은 고백할 수 있었지만, 과연 상대방의 진실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방이 내 진실을 곡해할 여지는 없는가.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다만 믿는 것인가. 프랑스의 성은 드 뫼르, ‘죽다와 부활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한때 거짓을 추구하던 자신을 죽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했으나, 샤를에 의해 진실을 추구하던 자신 또한 다시 죽인다. 이전의 자신을 죽여야지만, 또 다른 사명과 목적을 추구하는 나로 재탄생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진실 각각의 죽음 이후 프랑스는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다. 한때 화려했고 웅대하던 자신을 죽인 이후에 프랑스는 한없이 얄팍하고 경박해진다. 그녀는 분쟁지역에서 천박하게 행동하고 대담하게 거짓말을 내뱉으며, 데스크에서도 가볍게 행동한다. 두 차례의 죽음 이후 살아난 그녀는 어떤 도그마도 없이, 제 몸이 바라는 대로 살 뿐이다. 이러한 요소가 <히든>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히든> 속 조르주와 하네케가 동일시된다면, 그는 백인 식자층이 자기반성하고 스스로를 치열하게 감시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랴. 그리고 하네케의 오스트리아 국적에 집중한다면, 프랑스나 영화 내부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오스트리아나 영화 외부에서 목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들 내부에서는 줄곧 은폐되고 조작되기 때문이다. 한편 조르쥬의 아들과 마지드의 아들이 공모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그렇다면 유색인종의 수동적인 위치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시선에서 조르주의 과거와 안느의 불륜을 바라볼 수 있음을, 미래 세대가 경고하고 극복한 것이다. 어떤 해석이든 하네케는 외부나 타자의 개입으로 왜곡·은닉되었던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카메라는 그것을 치열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감독을 촬영하는 일련의 위치는 유사하나, <프랑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히든>이 잘림, 왜곡, 망각으로 탄생한 시뮬라크르의 홍수에서 진실의 발굴이 가능하다고 본다면, <프랑스>는 서서히 불가능을 외친다. 뒤몽의 카메라도 더 이상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려 하지 않고, 오묘하게 혼재된 이를 무기력하게 비출 뿐이다.      


프랑스가 취재한 분쟁지의 풍경은 조작하지 않은 진실이나, 그것을 해석하는 프레임은 거짓 내지는 주관적인 주장이다. 후자에 의해 객관적인 풍경조차도 주관적으로 오염된다. 또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가. 프랑스는 분쟁지에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전쟁이 진정 슬퍼서, 아니면 제 자신의 연출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는 프랑스가 울었다는 피상적인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난민들의 배에 올라탄 프랑스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고돼서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가, 진심으로 슬펐던 것인가, 프레임의 주관성에 의해 진실에 다가설 수 없지만, 보이는 것 이상의 진실을 판단할 능력도 우리에겐 부재한다. 우리는 진실을 알기보다는, 단지 거짓이나 주장을 사실이라 믿을 뿐이다. 영화에서 프랑스가 마지막으로 취재하는 다니엘은 남편이 20년 전에 전과가 있었고 6년간 복역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악행은 끝났고 이제는 나아질 거란 내면의 '믿음'에 갇혀 살아갔다. 이처럼 우리는 외부를 파악할 수 없다. 프랑스가 본 사건을 취재하기 전에, 프레디와 조조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들은 내부에 있고, 외부에서 차량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그들은 외부의 문제를 통제하지 못한다. 죽음으로 치닫는다. 개개인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한갓 주관적인 표상,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내부에 갇힌 우리는 외부에 무기력하다. 프랑스는 마땅히 온전하게 굴러갈 거로 생각했던 방송국의 실수, 가족의 사망을 대처할 수도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린다. 또한 프랑스 그녀 자신의 진실은 무엇인가. 드 뫼르로서 반복해서 자신을 죽이고 재탄생하는 와중에 그녀가 실로 바라는 진심은 무엇인가. 또 그녀는 이미지로 사는 것인가, 실재와 이미지는 간극이 벌어져 있는가. 그 모든 것은 모호하다. 그래서 <프랑스>의 카메라는 다만 비추고, 프랑스는 다만 살기만 할 뿐, 거짓과 진실의 판단에 회의적인 태도를 내비친다. 우리에게 영화도 그렇다. 과연 프랑스가 우리에게 노출하는 표정과 감정의 진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확언할 수 없다. 그 또한 연기인지, 아니면 진솔한 감정인지, 초반부에는 확실해 보였던 것들이 점차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드 뫼르'로서 죽고 탄생하고, 또 죽이고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결국 헐벗어야 한다. 프랑스는 이전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신을 덧입는다. 영화의 말미에 최종적으로 그녀가 입는 배역은 '가족을 잃은 비극의 여인'이다. 추하고 허무한 죽음, 하지만 영화는 흡사 장르 영화 내지는 광고영상을 연상케 하는 탐미적인 카메라 워크와 편집으로 프레드와 조조의 죽음을 연출한다. 가족의 죽음은 프랑스의 비극을 위해 아름답고도 숭고하게 승화되어야만 하는가. 죽음 자체로 포착될 수 없는가. 더욱이 가족의 죽음 이후 삶이 절망으로 치달은 프랑스가 포착된 이후, 그 비극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녀와 방송국은 '다음 장면'으로, 남편에 의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다니엘의 인터뷰를 선택한 것은 아닌가. 이에 프랑스는 지금의 이미지가 죽기 전까지는, 현재의 이미지로밖에 살 수 없으리. 한편 이와 대척점에 놓이는 이는 샤를이다. 그는 자신의 악의를 고백하고 위장을 헐벗는다. 프랑스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이라며 호소한다. 프랑스가 운전하는 와중에 샤를이 목도된다. 그는 흡사 가상의 풍경의 초상, 하지만 가상이 프랑스의 차량 내부로, 즉 사실로 프랑스의 세계에 참여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프랑스는 돌고 돌아서 제자리라고 말한다. 아무리 좋게 치장해도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악하고 추한 현재의 인간이다. 다니엘을 촬영하러 간 마을의 황폐해진 밭을 두고 프랑스는 아름답다고 말하였다. 아름다움이 진리, 선과 결부되는 것이라면, 프랑스의 미는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되지 못한다. 모든 진실은 보기 좋게 왜곡되거나 잘려 나갔기에. 어쩌면 진정 아름다운 것은 거리의 한 부랑자가 난동과 행패를 부리는 영화의 피날레다. 황폐한 밭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프랑스의 통제를 벗어난, 또 유일하게 확실한 진실이므로 말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아무것도 없는 추와 악으로 되돌아왔지만, 한편 돌고 돌아서 또다시 카메라와 타인의 시선 앞에, 그리고 개인의 내면 안에 갇힐 수 있는 것 아닌가. 결말에서도 카메라, 그리고 샤를의 시선 아래 놓여 있는 프랑스, 그녀가 거리의 폭도를 보고 암담해 하고 슬퍼하는 것은 과연 진심일까 위장일까. 우리는 헐벗음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다시 옷을 입은 가상의 이미지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진실과 거짓은 뒤엉킨다. 펼쳐진 진실을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또 보여주고 싶은 대로 조작하고, 다시 헐벗더라도 다시 이미지를 입고…     


이렇게 동시대로 돌아온 브루노 뒤몽은 육화된 '프랑스'를 통해 프랑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널리 비춘다. 이는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동시대를 비추던 <릴 퀸퀸>과 <꽥꽥과 잉여인간>에서 웃음기를 소거한 것과 같으며, 이러한 사실들이 언론에 의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프랑스는 감당할 수 있는 진실만을 촬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개되는 것은 오직 잘 갖춰진 매무새다. 이에 진실은 잘려 나가고 연출되고, 거짓이 이를 연기한다. 영화의 중반부만 하더라도 저널을 다룬 일반적인 극처럼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희망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명백한 진실은 없거니와, 저널리스트와 수용자가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온전치 않으니, 과연 우리에게 매개되는 것은 과연 대상의 진실인가, 아니면 나의 믿음 및 기대인가. 더욱이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지지 않은 거짓과 진실 사이의 의지를 그저 상대적으로 오가는 것뿐이니, 필연적으로 인간인 그들은 진실을 다룰 수 있는가. 그래서 더 이상 뒤몽도 후반부에서는 답 내리지 않는다. 급박한 분쟁지에서 프랑스가 흘리는 무감하고도 건조한 눈물의 진의가 무엇인지, 영화의 결말에서 카메라 앞에 선 프랑스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파헤치지 않고, 그저 물질의 진실만을 전달한다. 더욱이 왜곡된 현실이 송출되고, 그것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과연 우리의 행동은 진실인지, 심지어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조차도 혼란에 빠져있다.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시청각의 홍수에 빠진 인류의 자화상, 이렇게 뒤몽은 언론에 관한 가장 허망하고도 회의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시뮬라크르가 생성되는 과정을 비추고, 촬영감독을 촬영하는 영화의 시선은 전능하다.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하이앵글로 보지 못할 것을 마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다만 시청각을 비출 수 있을 뿐이기에, 그것 너머의 내면, 의도를 포착할 수 없기에, 그저 보이는 것만을 비추는 영화라는 매체로 언론과 진실의 회의주의를 더욱 강조한다. 뒤몽의 사유는 여전히 깊다. 특히 프랑스가 다니엘을 취재하는 시퀀스에선 초기작의 무게감도 물씬 풍겼다. 하지만 뒤몽의 유머, 풍자, 조롱은 다소 저차원적이고 유치하다. 프랑스와 루의 꽥꽥거림, 허상으로 가득한 프랑스를 관통하지만 너무나도 직설적인 대사들, 이러한 요소가 없었더라도 충분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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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114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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