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an 17. 2022

조엘 코엔, <맥베스의 비극>

덧없고 또 덧없도다

조엘 코엔(Joel Coen), <맥베스의 비극>(The Tragedy of Macbeth) 

- 덧없고 또 덧없도다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의식을 유혹하는 본능의 탐욕과 이를 타자화하고 부정하는 인간 심리를, 실제 스코틀랜드의 왕인 막 베하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첨예하게 탐구한 비극이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지도자인 덩컨 왕의 장군이자 그의 사촌이다. 왕위에 욕심이 있고, 또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맥베스의 옆에는 부추기는 이들이 있다. 하나는 맥베스 부인이요, 다른 이들은 광야의 세 마녀다. 작품의 시대상은 11세기이다. 그 이전부터 여성은 플라톤에 의해 감성적 존재로 여겨졌고, 남성은 이성적 존재로 규정된다. 이에 감성적 존재인 여성의 탐욕이 흡사 전염병처럼 맥베스의 이성을 위협하여 파국을 맞게 되는 경고로 읽힐 수 있다. 이성적인 시간이 아폴론의 오후라면, 감성의 시간은 디오니소스의 밤이라 할 수 있는데, 맥베스의 욕망은 밤에 꿈틀대지 않던가. 더욱이 마녀 또한 비이성적인 존재, 문명이 아닌 자연에 속하는 존재다. 그래서 마녀로 상징되는 자연을 악의 속삭임으로 상정하고, 인간에게서 분리하여 면죄부를 쥐여주듯 읽힐 수도 있다. 이러한 여성, 밤, 마녀에 의한 감성적 충동은 왕위 찬탈로 이어지고, 맥베스는 기어코 왕좌에 오른다. 하지만 문명을 거스르고 자연을 선택한 자는 이후에도 끝없이 마녀의 속삭임에 의존하며 손에 피를 묻힌다. 자신의 왕위 찬탈을 두려워하는 맥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이어져 온 부친 살해를 두려워하는 전통적인 왕과 아버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한편 고전의 왕들과 달리 애초에 그는 왕위에 부적합했을지 모른다. 무력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스스로의 뜻을 여왕과 마녀에게 의존하는 정신은 나약하여, 누군가를 지배할만한 역량은 충분치 못한 인물이 맥베스다. 또한 왕좌에 앉아서 원리를 형성하는 지도자가 악덕을 실천한다면, 마땅히 그가 다스리는 왕국 내의 백성들도 이를 따라 하고 국가는 몰락하리니, 이에 맥베스의 파멸은 애초에 예고된 것일지 모른다. 삶의 의미는 어떤 권좌가 아니라 인간성이다. 비인간적인 악덕은 스스로를 신경쇠약에 빠지게 만들어 자멸시키거나, 복수가 되어 내게 폭력의 연쇄로 다가올지다.     


본 『맥베스』는 지금까지 무수한 영화감독의 손을 거쳐 영화화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오손 웰즈의 작품이, 중후반에는 로만 폴란스키의 작품이, 21세기에는 저스틴 커젤의 작품이 저명하다. 그리고 2021년 조엘 코엔이 이를 다시 한번 스크린에 옮겨온다. 에단 코엔 없이 조엘 코엔 혼자서 각본과 감독을 맡으며 말이다. 1954년 태생의 조엘 코엔과 1957년 태생의 에단 코엔은 지금까지 흔히들 '코엔 형제'로 불리며 공동으로 각본과 감독을 맡아서 활동해왔다. 흔히들 코엔 형제의 작품은 예측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철두철미하게 수립한 계획을 현실에 치밀하게 옮기는 하이스트 영화와는 정반대다.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는 피상적으로는 하이스트 영화와 닮았더라도, 어수룩한 주인공과 계획에 침투한 우연성으로 인해, 기존 장르의 성질과 정반대로 흘러간다. 이 같은 계획의 불발은 코엔 형제의 작품 중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나 <시리어스 맨>에서 언급되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반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코엔 형제의 작품 속 계획에 적용된다. 철두철미하게 수립된 계획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성된 순간은 과거다. 그 계획이 적용될 현재와 과거에 측정한 것은 온당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특히나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언제나 빗나가는 타인의 개입과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은 계획을 망쳐놓기 일쑤다. <시리어스 맨>에서 자연과 우연은 지식이 많은 식자가 이를 현실에 반영할 수 없게끔 농락한다. 그래서 계획의 실현은 그 모든 예측이 맞아떨어졌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처럼 계획이 불발될 여지가 보이면 이를 극복하기는커녕, 처음부터 없는 셈 치부하고 마냥 줄행랑을 놓기 일쑤다. 그리고 코엔 형제의 작품에서 세계는 그리 이성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문명의 원리에서 벗어난 무법과 혼란, 즉흥 그 자체의 자연에 상응하는 안톤 쉬거가 등장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의 운동과 흐름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정작 내 눈앞에 현현할 내일, 가족이라는 등잔 밑의 현실도 측정할 수 없는 <시리어스 맨>과 같은 작품이 그렇다. 본 두 작품은 이성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본능과 자연에 관련되는 『맥베스』와 더욱 큰 연관을 지닐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하잘것없는 스스로의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일에 휘말리는 <번 애프터 리딩>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웅대한 이상을 갖고, 인간다운 이성을 추구한다고 해도, 세계는 감성과 즉흥, 우연으로 범벅되어 있다. 이 같은 작업을 코엔 형제는 배우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수행해왔다. 배우는 다만 연기하는 자다. 하지만 배우를 우상시하여 산업화하는 자본 권력은 단순히 '연기하는 사람' 이상의 탐미적이고도 신성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코엔 형제는 <번 애프터 리딩>의 브래드 피트나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및 <헤일, 시저!>의 조지 클루니 등을 통해, 지적이고도 이상적으로 신격화된 이미지로부터 망가질 수 있고, 감독에 의해 제멋대로 해석되고 다뤄질 수 있는, 그것에 따라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지위를 고찰한다. 그리고 신작 <맥베스의 비극>에서 덴젤 워싱턴을 기용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일지 모른다. 우습지는 않지만 사악하고 광기 어린 맥베스를 연기하는 덴젤 워싱턴, 젊고 정의로웠으며 이상을 추구하는 배역을 자주 맡던 배우의 상을, 한갓 사사롭고 덧없는 탐욕에 휘둘리는 상으로 뒤바꾸며 아우라의 파괴를 시도한다. 일단 영화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연출은 디지털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고전적이다. 초기 영화 시대의 둥근 모서리와 1.37:1의 좁다란 화면비, 그리고 흑백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매체성은 매우 작위적이다. 둥근 모서리의 경우 아무리 마스킹처리를 해도, 필러박스의 일부가 노출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현실의 요소인 검은 화면, 필러박스가 노출됨에 영화라는 꿈에 생생히 몰입할 수 없다. 명백히 허구임을 인지하고 감상해야 한다. 또 1.37:1의 화면비엔 공간과 세계를 풍부하게 담아낼 수 없다. 이렇게 좁은 화면비에 사람의 얼굴만 클로즈업하거나, 인물만 풀숏으로 강조하여, 그들이 놓인 공간은 인위적으로 잘려 나간다. 흡사 연극의 무대처럼 아주 좁다랗고 제한적으로 포착되어 등한시된다. 이러한 요소가 종합되어 본 작품은 매우 연극적인 분위기도 풍긴다.      


또 맥베스와 부인이 하늘을 쳐다보는 과정에서의 조야하게 반짝이는 별은 명백히 허구임이, 사람이 만들어낸 세트장임이 강조되는데 이는 초기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였다. 이러한 세트장, 장치, 앞서 언급한 매체성이 결합하여 초기 영화 시대의 분위기를 풍긴다. 기술 발전에 의해 영화는 점점 더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을 제거해간다. 현실과 일치하는 아주 그럴듯한 환영이 되어간다. 하지만 조엘 코엔은 이러한 허구성을 다시금 되살린다.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허구성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초자연적인 신비를 드러내는 수단일 수 있을까,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시대와 연극의 시대, 그리고 초기 영화 시대의 마술이 여전히 유효함을 동시대에 증명하는 것일까. 여하간 연극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여전히 영화는 영화다. 서로 다른 공간에 놓인 인물들이 하나의 매개물을 두고 잘림 없이, 유기적이고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편집이 작품에서 강조된다. 물리적인 연극은 서로 다른 공간을 시간을 초월하여 뛰어넘을 수 없지만, 영화에선 그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붙이는 마법이 허용되니, 이를 강조하는 영화는 아예 연극임을 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흑백이다. 도입부는 아주 새카만 검정이다. 종이 울린다. 마녀의 목소리로 추측되는 나레이션이 ‘맥베스가 지거나 이겼을 때 황야에서 만나리라’ 예언한다. 그와 만나기 위해선 전쟁이 끝나 이기든 지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렇게 끝나기 위해선 무수한 죽음이 수반되리니, 죽음의 연쇄 이후에 곧 나타날 텅 빈 황야, 이러한 죽음과 황야가 검정일까, 하나의 끝으로서 말이다. 이윽고 영화는 검정 화면에서 하양으로 이어진다. 창공에 새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하양은 생명이 서서히 탄생하는 하나의 시작인 것일까. 하지만 나타나는 것이 왜 죽음을 노리는 맹금류일까. 검정도 끝이 아니고, 하양도 마냥 시작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죽음, 그 이후 맥베스와의 만남은 하나의 시작일 수 있고, 맹금류가 나타나고 영화의 중반부에 맥더프의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하양이 끝일 수도 있다.      


절대적인 죽음과 삶, 끝도 시작도 없는 검정과 하양, 이들이 뒤섞인 지상으로 카메라는 내려온다. 지상으로 내려온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지하에도, 천상에도 없는 절대성이다. 전쟁이 끝났다. 신하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승전 소식을 왕에게 알리기 위해 길을 나선다. 왕은 머물러있고, 신하는 먼 길을 걸어 왕에게로 귀환한다. 이윽고 소식을 알리고 쓰러진다.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여지도 없다. 색깔은 하양과 검정이 뒤섞여 있어 혼란스럽고 복잡하지만, 오직 ‘하나’만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는 시대다. 이에 왕의 발아래에 놓인 인류는 그림자가 된다. 맥베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왕위 찬탈 음모를 계획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왕 앞에서의 그녀는 굴종한다. 맥베스가 고심에 빠진 순간, 그의 뒤로 왕에게 아첨하고 비위를 맞춰주는 위선적인 부인의 그림자가 눈에 띈다. 왕 앞에서 이들의 행위는 ‘내’가 없다. 왕의 절대적인 명령에 따라 읊조리는 자신이 박탈된 그의 그림자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영화의 인위성,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위성은, 왕이란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법을 가시화하는 구축일까. 인간은 왕이 만들어낸 연극 무대에 놓이는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은 과연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법에만 절대적으로 구속되는가. 왕은 유능한 맥베스가 아니라, 자기 아들 컴벌랜드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선언한다. 맥베스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이해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절대적으로 수그린다. 맥베스는 그의 입에 복종한다. 그리고 왕은 자연에 굴종한다. 자신의 분신인 아들 컴벌랜드, 그에게 왕위를 넘김으로써 제 자신의 삶을 간접 이어 가리란 자연 속 번식의 법을 이성이 꺾을 수 없으리. 인간은 후자를 거스를 순 없더라도, 전자는 때로 외면한다. 낮에 깨어나 있는 인간, 왕의 눈에 띄는 인간은 법을 위반하지 않는 그림자다. 하지만 은밀한 밤에, 그림자가 드문 밤에 맥베스와 부인은 법을 위반한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음에. 하지만 그 이후 여전히 법을 알고 있는 맥베스 부인, 찬탈 이후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지 못한 맥베스 부인은 죄책감에 죽어간다. 내일의 내가 법을 위반한다. 하지만 법을 망각하지 못한 어제의 내가 스스로를 붙잡는다.      


어째서 우리는 위반하는가. 도입부에서 맥베스도 왕에게 돌아간다. 귀환에는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마녀를 만난다. 왕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명령은 절대적이나, 그 사이에는 우연적인 타인과 자연이 침투한다. 마녀는 실재이기도 하고 그림자이기도 하며,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다. 또 하나이기도 하고 셋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하고 까마귀이기도 한 비 확정적인 존재다. 그리고 마녀가 맥베스를 향해 온 것이 아니다. 맥베스가 마녀가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마녀가 본능이라면 인간은 언제나 마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또 마녀를 애써 바라게 된다. 마녀는 왕보다 선행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절대성보다 우선하는 자연의 절대성이다. 왕에게 가는 길에 맥베스에게 침투한 것은 절대적인 우연이자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본성, 자연이다.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은 왕위에 오르길 바란다. 더 이상 주인을 모시고 싶지 않다. 마침 그들이 왕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왕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높은 위치라는 착각, 앞에서는 왕의 시중을 들지만, 뒤에선 하이 앵글 구도로 그를 내려다본다. 왕의 시선에 놓이지 않고, 나의 시선 아래에 그를 두고 싶다. 왕은 맥베스의 외부에서 자신에게 충성하라는 절대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절대적이고자 하는 주장과 진정한 절대성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가 전자의 절대성을 위협한다. 후자를 자극하는 요소는 술, 밤, 욕망이다. 왕이 잠든 방의 보초를 서야 할 신하들이 술에 취해 충성심을 잊었다. 신하들은 술에 의해 잠을 자고 싶은 자신의 명령에 충성한다. 지금까지 맥베스는 왕을 향해 다가서지 않았던가. 하지만 맥베스는 컨덜랜드의 책봉에 왕으로부터 멀어지고, 맥베스 부인은 왕이 아닌 편지를 향해 다가선다. 부인은 왕에게 놓여 있던 기존의 상태, 여자가 아니다. 잔인함이 가득 차고, 맥베스와의 공모로 왕관을 쓰게 될 것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한다. 왕이 머무르기를 명령하는 절대적인 기존상태를 그들은 거스른다. 인간보다 자연이 먼저고, 외부보다 내가 우선하고, 계획보다 우연이 먼저이기에, 후자들에 의해 어제의 왕궁은 내일도 같을 수 없다.      


그렇게 왕궁을 파괴하는 이들은 새로운 왕궁을 건립하는가. 운명은 가만히 있는 것이라면, 자유는 움직이며 어쩔 수 없는 잘못을 일으켜야 한다. 이렇게 왕의 운명에서는 벗어나리, 하지만 그들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자연의 운명 또한 극복한 것인가. 그렇게 왕을 위해하고 자신이 왕좌에 오르게 되니, 맥베스는 문득 두려워진다. 그는 두 개의 법 아래서 살아간다. 하나는 자연의 법 아래서의 배신자, 다른 하나는 인간의 법 아래에서 정상적으로 승계를 받은 왕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후자가 거짓이니만큼 그는 진실이 탄로 나서 인간의 법으로부터 추방당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또 왕이 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호하다. 기존 왕의 법에 의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약이 가득하다. 왕이 되었어도 그는 배신자라는 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낼 수 없고, 선대왕의 그늘 아래서 그림자로 살아간다. 여기까지의 맥베스는 낙타에서 사자로 향하는 여정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는 인간 정신의 3단계 중 2단계다. 낙타는 왕이 부여하는 무거운 짐을 이고 있는, 그렇게 타인의 짐을 지고 있기에, 제 자신은 빈곤하여 부질없는 정신 상태다. 이러한 낙타의 단계에서 맥베스와 부인은 사자의 상태, 즉 강탈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사자는 자신을 구속하는 신, 왕에게 대적하여 그들로부터 해방된다. 하지만 사자는 대적만 할 수 있고 비판만 할 수 있는 존재, 진정 해방되진 못한다. 신과 선대왕의 기존 원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사자는 단지 기존의 왕좌와 왕관을 강탈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자의 상태에서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 둘 다 인격은 분열된다. 몸은 해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선대가 만들어놓은 법 아래서 창조적으로 제정신을 펼칠 수 없다. 이에 맥베스는 왕이 자신을 위협하는 환각을 보고, 부인은 몽유병을 앓으며 의식이 잠들고 무의식이 깨어난 단계에서만 정신은 자유롭다. 니체는 이러한 사자의 단계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진무구함, 망각, 새로운 출발, 최초의 움직임에서의 창조, 선대왕의 질서를 잊고 자신의 세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를 마녀의 스승인 ‘물 위에 비친 어린아이’가 계시한다. 맥베스의 운명과 그가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부인은 여전히 사자의 단계에 머물러있지만, 맥베스는 이제 물 위에 비친 어린아이, 어쩌면 자신의 얼굴을 보며 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자신의 법을 지시하기 시작한다. 그의 법은 오직 맥베스의 왕위,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지시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맥베스 자신을 바라보지, 세계를 바라보지 않았다. 각자는 표상에 갇혀있다. 왕은 맥베스가 배신하리라는 것을 몰랐고, 맥베스가 아는 것도 도망치고 사라진 컴벌랜드와 맥더프의 상태가 끝이다. 그의 표상에서 그들이 되돌아올 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또 왕의 법은 오직 맥베스만이 거역하는 것이 아니며, 정신단계의 이행도 맥베스만의 특혜가 아니다. 종이 울리며 자정을 알리고, 그렇게 내일이 되며 낮과 밤이 뒤바뀌면, 그림자는 사라지고 실재가 나타나며 법은 위축되고 자연과 본능이 활개를 친다. 어린아이 맥베스는 창조하지만 표상에 갇혀있다, 그리고 자연 너머를 보지 못한다. 자연이 현시한 숲이 움직이고, 여성에게서 태어난 자는 그를 해하지 못할 것이란 예언, 아이는 이러한 운명에서까지 발버둥 칠 순 없다. 맥베스는 스스로의 운명을 자신이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지상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연이 부여한 운명은 벗어날 수 없다. 컨벌랜드와 맥더프가 다시 맥베스의 왕좌를 찬탈하는 과정에서도 이들은 맥베스가 들은 예언을 벗어나지 못한다. 맥베스를 몰락게 하는 예언을 답습함으로써만 그들이 바라는 찬탈은 가능하다. 물론 그 과정은 자연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숲이 움직이고, 어머니의 자궁을 해치고 태어난 아들은 반 자연적이니 말이다. 그렇게 반 자연이 사악한 자연 그 자체인 맥베스를 몰아내어 인간성을 수립하려는 것인가. 한편 그 자연은 맥베스의 눈, 즉 그의 표상에서의 반 자연이다. 숲은 위장한 병사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 것이지 실제 숲이 흔들린 게 아니다. 또 맥더프의 탄생 설화는 진실인지 위장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변치 않은 자연 위에서 위장된 반 자연, 자연이 계시한 반 자연, 반 자연도 맥베스도 자연이 계시한 운명으로부터 달아날 길 없다.      


이러한 본 작품은 '비극'이다. 일반적으로 비극은 인간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범하기도 하지만 영웅처럼 비범하기도 하며, 인물들 간의 사건, 가차 없이 전개되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조합에 의해, 필연적이지만 파괴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황폐해진 삶을 보여준다. 영웅조차도 말이다. 비극은 여러 문제와 난관에 부딪히고 발버둥 치지만, 끝끝내 절망스럽게 마무리되며 감상자에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정서를 안긴다. 하지만 비극은 그것이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유한한 필연임을, 자연스러운 운명임을 강조한다. 본 작품도 비극으로서 계시하는 것이 바로 기존의 상태를 넘어서려고 하는 개인의 욕망, 세상의 절대적인 우연성, 진정 자유롭기 위해 표상을 스스로의 법으로 뒤덮으려는 거스르기 어려운 야욕이 아니던가. 이러한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피비린내 나는 운명으로 치닫는 우리의 삶을 비춘다. 그것은 『맥베스』의 원형이 된 11세기에도, 『맥베스』가 처음 발간된 17세기에도, 그것이 상영되고 영화화된 지금까지도 변치 않고 유효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법이리. 또 일반적인 비극의 관점과는 특유한 지점이 있는, 니체적 관점의 비극에서도 본 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힘인 아폴론적인 원리와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힘인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 조화를 이룬,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예술의 지고한 형태로 보았다. 아폴론적 원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빛의 원리, 드러냄의 원리, 설명의 원리다. 아폴론적인 문화는 조형예술이 대표적이다. 현실에 깊이 속하기보단 구성하고 관조하는 아폴론적인 원리, 하지만 지나치게 아폴론적인 원리가 득세하게 되면 그럴듯한 가상을 현실이라 착각하고 아름답게 여기게 된다.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한편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자연 자체, 본능 자체로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감성적이다. 지나친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아폴론적 원리가 밝혀낸 세계의 질서를 다시 혼란의 형태로 회귀시킬 수 있지만, 아폴론적 원리가 기만하는 가상의 아름다움이 거짓임을 폭로하고, 이 세상에 만연한 추와 죽음이 아름다움임을 현시한다. 본 작품에서 ‘더러움이 아름답다’는 대사처럼 말이다.      


니체는 아폴론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 묘사된 비극을 가장 위대한 예술로 보았는데, 본 작품도 그렇다. 언제나 변화 가능한 유동적인 액체와 변화하지 않는 견고한 건물의 대립, 이에 곡선과 직선의 팽팽한 대치, 이성과 감성의 투쟁, 영화 결말의 태양을 가리는 어둔 까마귀 떼는, 아폴론적 원리가 밝히고 만들어낸 꿈의 형상들을 디오니소스적 현실이 도취시키는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아폴론적 원리가 왕과 맥베스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인위적 법, 만들어진 환상에 상응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인간의 천성인 주인 되고자 하는 욕구에 그 경계를 파괴하고 본능의 고뇌를 보여주며 니체적 비극을 이룬다. 비극의 고뇌, 그것은 왕에겐 선하나 자신에겐 악하고, 자신에겐 선하나 왕에겐 악하기에, 절대적 선도 악도 없는 니체적 비극의 난관을 보여준다. 끝끝내 난관의 승리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챙기며, 아폴론적 원리는 이를 밝히는 연출로 작용한다. 물이 다 사라진 이후 질서정연한 건물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맥베스는 물이 말하는 파괴적 충동대로 움직이지 않던가. 밝혀진 것은 끝끝내 가리어지지 않던가. 필연적으로 디오니소스인 인간의 슬픈, 헛되고 또 헛된 운명을 조엘 코엔은 『맥베스』로부터 길어온다. 셰익스피어의 문체가 고스란히 간직되고, 초기 영화 시대의 매체가 보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조엘 코엔의 색채 또한 가득한 본 작품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우습고도 슬픈' 인간사의 원형이 될 수 있으랴. 코엔의 작품이 예나 지금이나 아폴론이고자 하는 우리네 삶에서 디오니소스적 우연성, 즉흥성, 충동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들을 선택한 왕, 감성과 이성의 투쟁 속에서 빈번히 패배하는 맥베스, 과연 이후의 컴벌랜드는 다를 수 있을까. 결단코 다르지 않겠지만, 이런 파괴적이고 잔혹한 인간조차도, 우리는 아폴론적으로 이해하고 디오니소스적으로 사랑하는 수밖에 없으리.

--------

감상일: 220117 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브루노 뒤몽, <프랑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