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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22. 2022

토마스 빈터베르그, <어나더 라운드>

소외된 중년과 소속의 음주

토마스 빈터베르그(Thomas Vinterberg),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 

- 소외된 중년과 소속의 음주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중 『갈매기』라는 작품이 있다. 본 작품의 화두는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라 할 수 있다. 배우를 꿈꾸거나 작가이기를 희망하는 주인공들의 무수한 대화가 극의 골격을 이룬다. 또 극의 서두에서는 익숙하다거나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고루한 형식으로부터, 낯설고 생경한 자극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형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내 곧 새로운 형식이든 오래된 형식이든, '각자의 자리'가 있다며 다른 작가의 영역을 존중한다. 이윽고 극의 말미에서는 새로움을 향한 집착이 서두와 비교하여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남는 것은 저절로 흘러넘치는 영혼을 옮겨낸 글쓰기, 우리의 맹목적인 삶 따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옮겨 담는 글쓰기다. 이를 위해서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 자는 삶을 비관한다. 이렇게 본 작품이 말하는 청명하고 맑게 개어 있는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에 다른 첨가물이 뒤섞여선 안 된다. 나를 탐구하던 체호프는 극의 2막에서 술과 담배는 지금의 나에 무언가를 더한, '누군가'를 만드는 도구라고 말한다. 자아는 흐리멍덩해지고, 개성은 사라지며, 나는 자기 자신을 3인칭의 '그'로 대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술은 그런 성격을 지니게 만들지 않던가. 일반적인 자아는 이성이 명석하게 깨어있는 상황에서 감성과 조화를 이루지만, 술에 의해 오직 본성이 이성을 압도한 상황의 동물적인 내가, 나라고 여겨지는 기존의 자아를 대체한다. 또 여럿이서 술을 마실 때, 술을 마심으로써 구성원의 지위를 획득하곤 한다. 하지만 술을 마셔야지만 얻을 수 있고, 술을 마시는 공동체 내에서 특별하게 행동하는 나는, 과연 진실한 나를 얼마만큼 반영하는가. 음주에서 벗어난 상태의 그는 과연 의미가 있는가? 나를 잃게 되는 술, 이는 음주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부여받은 중년 남성들의 삶을 포착하는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신작 <어나더 라운드>에서 마찬가지로 탐구하는 술과 우리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1969년 코펜하겐 출신의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덴마크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1998년 <셀레브레이션>이 대표작인 그는 본 작품에 반영된 도그마 95선언으로 유명하다. 그는 1994년 단편 데뷔한 이후, 1995년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도그마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트리에와 함께 도그마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것이 반영된 트리에의 <백치들>처럼 그의 데뷔작 <셀레브레이션>은 35mm 카메라로 촬영되고 이후 광학 처리, 보정이 적용되지 않아 매우 거친, 생생한 현실의 질감을 보여준다. 여기에 덧붙여 핸드헬드가 사용되어 아주 적나라한 리얼리즘을 선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작품 <올 어바웃 러브>에서 근 미래를 다룬 sf를 선보이며, 도그마 95에선 멀어진다. 최근 그가 감독을 맡은 <쿠르스크> 같은 작품에서도 매우 기교적이고 탐미적인 연출을 추구하며 리얼리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가 데뷔했을 당시의 색채는 2000년대 들어서 약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빈터베르그에게서 더 주목할 만한 색채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에 관한 탐구다. 데뷔작 <셀레브레이션>에서부터 빈터베르그는 가족이란 가장 작은 형태의 공동체를 탐구한다. 다수의 이득을 위해서 소수는 희생되어야 하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 이에 반하여 빈터베르그는 진실은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도그마 선언이 곧 생생한 현실을 담아내어 진실을 포착하는 리얼리즘인 것처럼, 그는 부르주아지의 위선과 권위의식을 폭로하고, 영화 자체도 진실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 이 같은 관심이 다시 종합적으로 뒤엉킨 <더 헌트>도 그렇다. <셀레브레이션>을 묘하게 뒤집는 작품이다. <셀레브레이션>에서 아동 성범죄가 은닉된 진실이라면, <더 헌트>에서는 허구다. 하지만 그 허구가 공동체에 의해 진실로 전락하는 '행동주의'를 빈터베르그는 탐구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비슷하게 행동하고, 다른 행동이나 의견을 관용하지 않게 되는 '행동주의' 개념을 주장한다. 이러한 행동주의에 의해 다수가 거짓을 말하고 광분을 띤다 해도, 다수가 곧 보편이 되고 이윽고 참으로 여겨져, 진실을 말하는 소수를 거짓으로 전락시킨다. 빈터베르그는 이 같은 군중심리에 대한 공포를 다뤘다.     


<더 헌트>가 2012년 칸 영화제에서 매즈 미켈슨에게 연기상을 안겼다면, 빈터베르그가 2016년 발표한 <사랑의 시대>는 트린 디어홈에게 베를린 영화제 연기상을 안긴 작품이다. 빈터베르그의 작품에서 주연들은 연기로 주목받곤 하는데, 그들이 보통 공동체 내에서 핍박받는 개인을 연기하며, 마냥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대>도 마찬가지로 덴마크에서 실제로 열풍이 불었던, 삶에 뿌리내린 사회주의의 일상적 형태인 '코하우징 운동'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 구성원들은 모든 가사를 분담하고, 공동체의 중대사는 모든 구성원의 토의 및 투표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모두가 평등해야 하지만 실상 모두의 속내는 평등과 거리가 멀고, 특히 남성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가부장제는 동등한 토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한 관심을 부여해야 하니, 부부라는 특권적 지위가 무너져 공동체를 위해 부부를 해체한다. 그리고 코하우징의 정신을 가장 신실히 실현했던 인물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되고, 오히려 제 욕망만을 좇았던 구성원들은 여전히 내부에 남는다. 과연 사회주의, 공동체는 그것의 이상을 실현하면서 유지되는가, 아니면 이기적인 개인들의 이합집산인가. 빈터베르그는 공동체의 본령에 대한 첨예한 비판, 특히 전체주의적 한계를 날카로이 꼬집는다. 그리고 '술'로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게 되는 본 작품, <어나더 라운드>에서도 빈터베르그의 탐구는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본 작품은 2.00:1의 비교적 넓은 화면비에 권태로운 중년의 일상과 술에 취한 나날을 담아낸다. 일단 도입부에선 학생들의 술 문화인 호수경기를 포착한다. 본 도입부는 이후 4명의 중년 교사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일상에서 활력을 되찾은 장면에서 사용될 연출을 예고하듯 제시한다. 일단 광란의 파티는 격정적인 핸드헬드로 포착되어, 흡사 술에 취해 몸을 주체할 수 없는 불안정한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영화의 컷은 매우 거칠고, 숏은 짧고 빠르게 잘리고 지나가며, 편집은 숏과 숏 사이에 많은 여백을 두어 듬성듬성하다. 이는 술에 의해 기억이 드문드문한, 오직 잔상밖에 생각나지 않는 음주의 의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랴.     


이윽고 학생들의 일탈을 브리핑하는 교사 회의로 넘어간다. 학생들과 달리 이들을 포착하는 연출에선 활력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주인공인 네 친구는 학교와 가정, 그 어느 곳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들이 포착되는 장면에서는 비교적 긴 호흡의 시퀀스, 이에 제법 온전한 시간이 보존된다. 그리고 음주 장면에 비하면 영화의 리듬이 비교적 느려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또 빈터베르그의 그간 작품이 그렇듯, 본 작품에서도 공동체의 소속/비소속은 여전히 주요한 탐구 소재다. 영화 속 마틴은 술에 탐닉하기 전까지는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소속하지 못한다. 이에 마틴의 얼굴만 포착되는 독립된 숏과 그와 대비되는 다수의 얼굴이 함께 담긴 숏들을 교차하여, 홀로 놓여 소외감을 풍기고 그룹에 압박을 받는 무게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서서히 그는 소속되기 시작한다, 다수가 놓인 숏에 그의 얼굴이 포함된다, 바로 음주를 통해서 말이다. 본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50대로 접어든 중년 남성들이다. 빈터베르그의 작품 <셀레브레이션>에 주연으로 참여했을 당시 30대였던 토머스 보 라센도, <더 헌트>에 출연했을 당시 40대였던 매즈 미켈슨이나 라르스 란데도 모두 50대로 접어들며 그 당시 보여준 활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불과 5년 전 작품인 <사랑의 시대>만 하더라도 육욕에 들끓는 활기가 맴돌았던 인물이지만, 작금의 시대는 더 이상 그들이 주인이 아니다. 어쩌면 영화는 감독과 배우들의 자전적 일대기로도 여겨질 수 있으랴. 그들은 본 작품에서 무기력한 교사다. 학생들의 음주 파문에 대해서도 심드렁하고, 강의도 맹목적으로, 기계적으로 읊을 뿐이다. 음악과 체육 교사는 촉각과 청각을 자극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들의 수업은 피부와 귀에 흡수되지 않고 튕겨져 나온다. 역사와 심리수업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또 역사는 오늘 날의 그들에게까지 이어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죽은 학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책임 의식도 없고, 또 마틴에게 항의하러 온 학생, 학부모들의 모습을 보건대, 오늘날의 변화한 교육 패러다임에서 뒤처진 모습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교사로 재직했으리라. 한때 성취감을 느꼈을 강의와 훈육은 더 이상 자극도 되지 못하고 이에 책임 의식도 느낄 수 없다. 수십 년간 반복되었을 똑같은 강의는 그들을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톱니바퀴에 끼인 기계장치처럼 여기기에 충분하며, 더욱이 작금의 교육 현장을 따라가지도 못해, 인간과 구성원으로서 소외감을 느낀다. 다른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마틴은 사적인 공동체인 가족에게라도 나름의 위로를 받고 싶다. 하지만 밤에 일하러 나가는 아니카와 잠깐 대화할 여유도 없고, 바쁜 그녀는 마틴이 건네는 말에 신경 써주지 못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들은 가족에게 별 관심이 없으며, 이에 식사 자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오직 음식 먹는 소리,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강조될 뿐이다. 인간은 없고 딱딱한 사물의 흔적만 남는다. 마틴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이 된 듯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의 시선에서 구성원들은 오직 저 자신만 신경 쓰지, 마틴을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는다. 가족도 젊은 날 마틴이 참여했던 공동체가 아니다. 아이들은 커서 아빠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부인과는 시시해졌다. 아이들이 커가자 가장의 뒷모습은 초라해져 가족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도 못한다. 이들은 가족과 소통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학생과 학부모가 역사 교사인 마틴에게 특정 목적을 요구하는 것이 중압감으로 다가왔으랴. 이에 비해 사적 공간인 가정에서는 어떤 이유도, 목적도, 당위성도 없이 그저 품어질 수 있어야 하리라. 하지만 이 모든 게 실패한 마틴은 외롭다. 외부의 공동체, 그리고 자신에게도 소외감을 느낀다. 또 니콜라이처럼 아버지라는 목적이 있는 가정은 또 다른 노동의 연장이요, 공적인 장소가 된다. 니콜라이는 아이들을 훈육하는 게 버겁고 피곤해 보인다. 어떤 이는 소속되고 싶어 한다면, 또 다른 이는 소속의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아버지 이전의 자신을 찾고 싶으랴. 소속되고 싶은 마틴과 친구들이 모인 저녁 약속은 나름의 출구가 될 수 있을까?     


시대의 패자들, 그들의 권태롭고 무기력하던 육신에 술이 들어간다. 술의 탄산이 혀의 촉감을 자극하고, 과일 향이 후각을 건드리며, 달콤 쌉싸름한 맛과 벨벳 같은 식감이 미각을 자극하여 마틴의 육체는 깨어난다. 친구들은 술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좋다고 말한다. 반송장에 다름 아니었던 이들은 음주로 서서히 살아있다는 것을, 생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다. 술의 풍부한 바디감과 자극, 그것이 한 친구의 뇌리에서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된다. 이들은 모두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또 참여할 수 없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자신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학교를 가득 채운 학생들에 대한 불평이 이어진다. 이러한 그들에게 술은 삭막하고 권태로운 현실 너머에, 내가 바라고 열망하는 새로운 지평을 가상적으로 열어젖혀 준다. 상상의 세계로 도망치게 해주는 것이랴. 또 술을 마신 마틴은 잠시 동안 외부의 소음이 들려오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오직 나 자신의 내면과 의식에만 침잠해가는 법이다. 더 이상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다. 타인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이해받을 수 없거나, 나를 드러낼 수 없었던 마틴은 이제 스스로를 위로한다. 현재에 파묻혀있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회고에 빠지기도 하고, 무엇 보다 움츠려 있던 육체를 활짝 펴 능동적으로 춤을 추라고 권유받기도 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하듯 춤은 천진난만하고 자신이 무엇임을 망각하는 어린아이의 행동,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외부의 규정 및 사회적인 모방과 무관한 ‘순수한 나의 표현’이다. 술은 비로소 나의 춤을 회복하게 만든다. 얼빠지게 산보하는 자신이라 해도 충분히 용인된다. 공동체에서 실추되었던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술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마틴이 바랐던 공동체의 참여를 불러온다. 혈중알코올농도에 관한 실험을 공유하는 네 명의 친구는 서로를 이해하며 단단히 결속되고, 본인들만 공유하는 비밀로 솔직해진다. 또 술이 가져다주는 활기가 마틴에게 지적된 진부함을 물리치고 다시금 신선함을 불러온다. 이에 학생들도, 권태롭던 가족 구성원에게도 다시금 인정받으며 마틴은 공동체에 참여한다.  


지금까지의 중년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모양이다. 자신감이 없는 자신, 이에 위축된 자신을 말로 드러내지 못하며, 타인과 소통하지 못했다. 위축된 그들은 실패가 두렵다. 말을 건네는 것, 제안하는 것, 도전하는 것이 두려워 학교와 가정 모두에서 진부함이 반복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참여해서 거절당하는 것을 감당하기보다는, 그냥 소통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술이 위축된 육체를 활짝 펴게 만듦에, 마틴은 아니카와 아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건네며, 그들 또한 다시 마르틴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후반부에 유급 및 의대 진학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세바스티안이란 학생에게, 교사가 시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음주를 추천하는 시퀀스를 주목할법하다. 몸에 술이 들어가자 긴장이 완화된 학생은 시험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질문에 답변한다. ‘실패를 사랑해야 한다.’고, 술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실패하여 위축되고 이에 세상에 등 돌리는 패자들, 하지만 술이 그들을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준다. 지금까지 중년 친구들은 집과 학교를 오가는 반복적인 일상이 전부였으며, 그들이 놓인 실내는 폐쇄적이고 어둑어둑했다. 그러나 술을 마신 그들은 서서히 외부로 나아간다. 길가, 호수, 바닷가 등 드넓은 세계로 참여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긍정적인 변화는 술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술에 의해서 암막을 쳐서 학생들의 가창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축구 코치에 열의를 가질 수 있다. 술이 없다면 지금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 이에 영화 속 친구들은 서서히 술에 의존하게 되고, 음주의 빈도와 강도를 늘려간다. 한때 술이 이들에게 긍정적 여파를 미치고 활력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을 때, 이들은 음주와 본인들의 책임 사이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실험은 점점 더 과격해져 음주는 폭음으로 악화되고, 학교에서도 교사가 아닌 주정뱅이로 전락한다. 이들의 육체는 더 이상 교사나 아버지가 아니라, 오직 술을 받기 위한 몸으로 전락한다. 또 마틴은 수업할 때 강의 내용에 술을 첨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더 이상 역사 교사로서 과거의 교훈을 설파하지 않고, 오히려 술을 선전한다. 술로 인해 양질의 강의를 하던 이들은 서서히 술을 강의한다. 흡사 술에 의해 육체가 잠식된 것처럼, 그 술이 다른 육체를 갈망하듯 음주를 다른 이들에게 선교하며, 술에 절어있는 자신의 육체를 합리화한다.      


또 음주를 시작하기 이전 그들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본 음주 파문은 혈중알코올농도에 관련한 심리학 실험에 의해서 전개된다. 이에 그들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보고서에 기록되고 연구되어야 하는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한다. 적절한 양의 음주는 그들이 참여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다시금 소속하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혈중알코올농도가 짙어지며, 오히려 그들의 육신이 술에 참여하는 역전이 발생하자, 그들은 서서히 공동체에서 다시 멀어진다. 학교에서는 이들의 음주 회동이 적발되고, 가정에서는 다시 아니카와 불화를 겪고 침대에 오줌을 누는 등 어른으로서 모범이 되지 못하며,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지역사회에 폐를 끼친다. 술에 의존하게 된 대가로 오직 음주의 세계에만 참여할 수 있고, 그들이 바란 공동체에서 다시 추방된다. 무질서하고 혼란한 세계, 술이 그들의 육신을 지배하는 국면, 그들 자신을 바랐던 이들이 더 이상 제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되리. 그토록 바랐던 나 자신을 술이 지배하며 다시 잃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마틴은 위대한 지도자들도 음주를 즐겼다고 강의하며 루즈벨트와 처칠을 히틀러와 비교하며 언급하기도 하고, 또 감독은 실제로 선망의 대상인 지도자들의 음주 푸티지들을 인서트한다. 빌 클린턴,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 메르켈, 사르코지 등 유럽의 각국을 이끌었던 정상들이 술에 취해 실없이 웃거나, 휘청거리는 모습을 침투시킨다. 나약한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 한들, 의존의 대상인 술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하지만 단순한 해석보다는 픽션으로서의 영화와 현실을 기록한 푸티지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더 흥미로울 듯하다. 배우들이 자신과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어나더 라운드>는 허구요, 픽션 영화다. 하지만 100% 허구일 수는 없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비추고 포착하며 영화는 그것을 담아내는 매체, 그렇게 영화가 비추는 모든 것에는 현실에 빚이 있다. 영화는 온전하게 비출 대상까지 자립해서 만들어낼 수 없는, 나름의 결핍이 있다. 이 같은 결핍을 위해 실제 푸티지를 인서트하는 것이 흡사 본 작품 속 음주와도 같으리라.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 음주에 의존하는 행위, 그리고 비추는 도구이자 매체로서 현실의 피사체에 의존하는 영화는 서로 일맥상통할 수 있으리.      


다시 음주로 넘어가서, 이들의 음주는 터부를 넘어서는 과감한 일탈이자 도전이다. 도입부로 되돌아가서 음주하는 학생들은 동성끼리 자유분방하게 키스하고, 낯선 할머니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술은 우리에게 대책 없는 용기를 불러와, 현실의 금기를 넘어서게 한다. 또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 내 몸이 진정으로 바라는 행위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활용되면 다행이랴. 하지만 지하철 보안요원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처럼 이들은 현실의 규범을 거스른다. 학생들끼리의 규칙은 공유하며 소속감을 느끼지만, 그들 외부의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그들의 규칙, 술의 법은 바깥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똑같은 강의를 지리멸렬하게 반복했을 교사들이, 수레바퀴와도 같은 루틴을 일탈하여 시선을 달리하게 되자, 네 교사의 모든 수업에 활기가 띤다. 일상의 위반은 곧 탁월한 영감, 창의성으로 연결된다. 또 가족에게 말 붙이기 어렵던 마틴은 그들에게 카누 여행을 제안하고 과감하게 실행을 옮기는 등, 소심함은 비범함으로 일탈한다. 하지만 이들의 음주가 외부에 드러나면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다. 학교나 가정에서 밝혀졌을 때 이들이 제지당하는 것을 보라. 심지어 학교, 가정, 그리고 나로부터 추방되는 토뮈는 끝끝내 삶에서의 추방, 죽음에 이르지 않던가. 그렇기 때문에 나를 드러내고 싶다면 언제나 진실해야 하랴. 내 몸에 술이 가득 차게 되면, 더 이상 진실한 나라고 부를 수 없다. 물론 영화는 술이 불가항력이라고 외친다. 직접적으로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를 넣기도 하고, 학생들의 음주 금지에 대해 교사들이 회의적으로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라고 반문하는 것도 그렇고, 영화 안에서든 밖에서든 지위가 어떻든 누구나 다 술을 마신다는 인서트도 그렇다. 술이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면, 그것은 토뮈가 마르틴과 아니카를 이어주고, 또 결말에서 댄서인 마르틴과 관객들을 이어주는 수단이어야만 한다. 나의 몸을 스스로가 통제하며 춤출 수 있는 도구,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졸업을 축하하는 장치가 되어야만 하리. 이에 적절한 수준, 순간에 멈춰야만 한다. 영화의 결말은 프리즈 프레임, 멈춰서는 순간은 마르틴이 바다에 빠지기 직전이다. 바다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게 춤추고 세상에 참여하고 소통할 정도로의 균형을 유지해야하리.      


과정에 술이 지나치게 개입되면 그것은 나의 공이 아니라 술의 공이니, 우리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수준의 술, 그리고 외부를 사랑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균형을 이뤄야 하랴. 술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또 세계와 이어지며 타인을, 아니카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수단이 되리. 이렇게 영화는 중년과 술을 탐구한다. 빈터베르그의 작품 속에서 교육에 열의도 있었고, 혈기왕성하여 육욕에 들끓던 인물들은 이제는 시대에서 밀려나고 노숙해져 서서히 패자가 되어만 간다. 단순히 배역뿐만이 아니라 실제 중년으로 접어드는 배우, 감독 또한 그럴지 모른다. 모든 공동체의 이방인이 된 것만 같고, 스스로가 자신이 아닌 것만 같다. 이렇게 자존감이 없는 상황에서 술이 서로를 결속시켜주고, 용감무쌍함을 불러일으켜 나를 회복한다. 영화는 음주의 미덕을 나름 긍정한다.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음주는 공동체에 다시금 참여하게 해주고, 지도자들의 인서트도 나약한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기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함을, 이를 위한 도구가 결말에서처럼 위풍당당하고 찬란한 나를 회복시켜주는 술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지나친 음주는, 나의 혈관 곳곳에 빼곡히 알코올이 침투하면 더 이상 나의 의지란 존재하지 않고, 술의 지배가 시작된다. 영화는 이를 편집을 통한 리듬, 속도감으로 대비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빈터베르그의 공동체 탐구도 이어진다. 스스로의 열망과 의지가 있더라도, 자존감 낮은 인류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아니카와 결별했을 당시의 마틴이 그렇다. 이를 토미가 연결해 준다. 다시금 그녀와 재결합할 수 있을 거란 담대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술 없이도 타인과 공동체에 의해, 헤어진 부부는 서로의 마음에 확신을 갖고 다시 연락을 시작한다. 이렇게 공동체도 술도, 언제나 실패하는 인간을 사랑하고 연결해주고 인정하는 역할만을 가져야 한다. 최근 <사랑의 시대>가 다소 심심했고,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나 <쿠르스크> 같은 북미 영화에선 개성이 흐릿해져, 전성기에서 멀어진 것으로 평가받던 빈터베르그, 하지만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크루들을 캐스팅하여 중년과 술, 공동체를 진솔하게 탐구하고, 이를 매력적인 연출로 풀어낸 그는, 영화 속 아저씨들처럼 당당하고 주체적인 재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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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12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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