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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27. 2022

장이머우, <원 세컨드>

사막과 영화

장이머우(Zhang Yimou), <원 세컨드>(One Second) - 사막과 영화     

“그가 죽고 나서 이 년이 지났어도 중국은 끝장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대학은 다시 문을 열어 입시를 치렀고 농촌에서는 지주와 부농들이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농가의 살림은 넉넉해져 식량이 늘었으며 생산대의 소들도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모옌-

역사에서 예술은 언제나 사회, 정치, 종교 등 이데올로기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았고, 이를 만들고 감상하는 사람들의 철학도 반영하였다. 중국의 예술은 선불교와의 관계를 떼어놓고 이해하기 어렵다. 선불교의 교리 중 하나인 '즉시 깨달음'을 의미하는 '돈오'는 현실에서만 수행하지 않았고, 예술도 수행의 대상이 되어 단번의 일획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일품 회화로 발달하였다. 일품 회화에서 나타나는 추상성, 공허함은 곧 선불교의 ‘공 사상’을 가리킨다. 일품 회화는 이를 그리는 사람들과 감상하는 사람들이 가졌을, 모든 것으로부터 초탈한 마음가짐을 드러낸다. 또 서구에서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미를 분리하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 하지만 중국에서 미는 언제나 윤리와 깊은 연관을 맺곤 하였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유교가 태동한 이래로 더욱 강조되었는데, 예술을 창조하거나 연주하는 행위는 곧 주체의 윤리적 함양을 갈고 닦는 수행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유교 아래서의 중국 예술은 매우 교훈적이고, 윤리적으로 가치가 있어야만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도교 아래서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긍정하며, 자연과 소통하고 참여하는 태도를 지향하였는데, 예술은 이러한 자연을 옮겨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도교적 관점에서 비롯한 산수화는 다시점을 활용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연을 창조하고, 이를 그리거나 감상하는 사람들은 직접 자연으로 향하지 않아도, 산수화를 통해 약동하는 자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서구에서 단순히 사물로 치부되었던 하나의 예술 작품은 중국에서 다르게 취급되기도 했는데, 두루마리는 목적이 하나로 정해져 시간이 멈춘 사물이 아니라, 세월에 따라 변화하는 생체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며, 당대의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지향했고, 또 어떠한 구조에 놓였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과 구조는 그들이 놓인 지리, 환경 또한 반영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화를 전면 배격하는 반달리즘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선조들의 해답을 묵살하는 일이기도 하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을 진행했던 중국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사물이나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에 깃든 삶의 상실도 의미했다. 선조들이 사물을 통해 동시대까지 삶을 계시하는 예술, 그것이 전면 유실된 거대한 비극인 문화대혁명 시대의 영화를 장이머우가 <원 세컨드>를 통해 다룬다. 1950년 시안 출생의 장이머우는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이다. 홍위병 경력이 있어 문화대혁명에 적대적인 5세대 감독 천카이거와 마찬가지로, 장이머우는 당대의 크나큰 반달리즘을 맞닥뜨리며 오히려 예술에 지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고 문화대혁명을 반대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일례로 그의 데뷔작 <붉은 수수밭>의 경우 이제는 유실되어 버린 조부모 시대의 양조장을 옮겨온다. 물론 그렇게 물리적으로 재현하는 역사 중에는 매매혼도 존재하나, 그렇게 보존된 당대의 역사는 긍정뿐만 아니라 반성의 기회 또한 제공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홍등>에서는 고정된 카메라로 흡사 전시하듯 전통문화를 강박적으로 펼쳐놓는다. 그의 대표작이자 걸작으로 분류되는 <인생>, 그리고 최근 그의 작가적 색채가 다시 회복된 것으로 여겨진 <5일의 마중>에서도 문화대혁명을 전면 비판한다. <인생>에서는 모든 역사적 유산이 상실되며 자손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으로, <5일의 마중>에서도 현재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갇힌 '강박증'으로 문화대혁명의 여파를 진단한다. 이러한 와중에 <인생>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문화적 유산은 극의 결말에서 병아리들을 키우는 집이 되어, 문화대혁명이 파괴한 무수한 유산들이 인류를 보듬는 요람이었음을 주장한다. 장이머우는 이렇게 문화대혁명에 반하는, 지속해서 문화와 예술을 보존하는 경향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와 동시에 그의 작품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비극적인 삶, 특히 핍박받는 여성의 삶이다. <붉은 수수밭>은 매매혼이 성행하던 시절, 붉은 가마 안에 갇혀 볼 수 없고, 걸을 수 없는 여성의 비극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이러한 붉은 감옥이 곧 중국 전체로 확장되어 온 국민을 가두는 비극을 스크린을 가득 물들인 핏빛 폐쇄성으로 가시화한다.      


<홍등>에서는 일부다처제에 의한 비극을 담아낸다. 셋째 부인이 언급하는 '연극'처럼, 당대의 구조가 하나의 각본이자 개개인을 가로막는 높다란 무대라면, 그 안에서 인물들은 감정을 소거한 채로 딱딱하게 연기해야 한다. 당대는 서로가 평등하지 않을 것을 명한다. 가림막에 의해 첩과 대감이 놓인 자리와 종들이 놓인 자리가 구분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배우들은 치열한 암투를, 계모에 의해 강요된 비극적인 삶은 또다시 순환되어야 한다. <귀주 이야기>는 관리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암묵적으로 부활한 부르주아지, 권력 계급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인민들은 그들의 규정 하에 제 삶을 수그려야 한다. <인생>에서의 무대는 40년대부터 60년대를 관통하는 역사다. 내전,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역사는 극을 관통하는 '인형극'의 '무대'와도 같아, 그들이 요구하는 포로, 혁명가, 인민 등의 보편적인 상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죽는 연극이다. 연극을 따르면 자손이 사망하는, 이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수레바퀴… 그래서 장이머우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다. <붉은 수수밭>에서 야생에서 자유롭게 자라는 수수처럼, 조부모들은 자유롭게 걷고 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기성의 구조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요구에서 재빠르게 달아나거나, 또 기존의 술을 빚는 방식을 위반하여 더욱 술맛을 돋우기도 한다. <홍등>에서도 술은 반복된다. 술에 의해서 일련의 자유로운 발설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실이 까발려지면 구조에 의해 처분된다. 이를 버틸 수 없는 송련은 기존의 질서에서 또다시 벗어나는, 광인이 됨으로써 무의미한 삶을 연명한다. <귀주 이야기>와 <인생>에서는 모두 임산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구조가 요구하는 지배에 머리 조아리지 않는다. <귀주 이야기>에서는 묵묵히 제 권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반복하고, <인생>에서는 가장이나 권위에 따르지 않고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고 물려주려는 어머니의 끈질김이 도드라진다. <5일의 마중>에서도 딸은 홍위병이 되어 구조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였다면, 어머니는 이를 위반하며 남편의 자유를 배려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장이머우는 특히나 어머니들을 강조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권리, 삶, 자유를 위해 구조를 위반하는 담대함을 내내 역설한다.     


이렇게 여성의 수난을 담아내던 장이머우가 이젠 한 남성의 수난으로 초점을 옮겨간다. 바로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맞섰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노동교화소에 끌려간 한 남성이, 딸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탈출하여 고군분투하는 문화대혁명의 비극을 말이다. 영화의 시작, 익스트림 롱숏으로 생명의 수분을 모두 앗아간 황량하고도 삭막한 사막을 펼쳐낸다. 한때 살아 숨 쉬었고 촉촉했을 생명체가 닳고 닳아 한 톨의 먼지로 귀결할 여정의 끝, 그렇게 무수한 무(無)들이 모인 죽음의 공간 사구, 거기서 생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남자와 대치하는 류가녀가 사막에서 동물의 백골을 주어 그의 머리를 타격하는 것처럼, 사막에서 생산적인 행위란 불가능하다. 볼 것도 없고, 모래 먼지가 시야를 흐려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막에서 장이머우가 생각하길, 영화란 사막과 별 다를 바 없는 하얀 스크린에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무언가를 보이게 하는 기적이다. 사막은 곧 남자 및 류가녀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남자에게는 아내도 딸도 없는 자신이 곧 사막과도 같으며, 고아인 류남매의 상황 또한 사막과도 같다. 그들에게 영화는 딸을 보여주고, 또 생계를 이어가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영화의 기조는 <프랑켄슈타인>의 상영을 열렬히 기다리던 <벌집의 정령>, 영화와 극장에 대한 향수가 흠뻑 묻어난 <시네마 천국>, <스플렌도르>, <안녕, 용문객잔> 등을 이어간다. 영화를 향한 러브레터, 이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보기 위한, 익스트림 롱숏으로 펼쳐진 사막에서 영화를 보고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작은 인간의 거대한 힘을 숭고하게 담아낸다. 이러한 본 작품은 초반에는 대사가 거의 없다. 거대한 사막과 한 인간의 숭고는 그저 이미지로만 느껴야 한다. 대사나 음악이 이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후에도 남자가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류가녀의 정체와 목적은 무엇인지 등은 모두 까마득하다. 이 둘의 대치상황에서도 대사는 거의 없다. 이를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영화를 환호한 이유, 당대에는 너무나도 희소했고 신기했던 움직이는 이미지, 무성영화에 가까운 경험을 선사한다.      


또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매우 선전적이다. 특히나 언어가 움직이는 이미지를 검열하고 설명하여 규정한다. 이와 달리 남자는 헤어진 딸이 출연한 중화뉴스를 보려고 한다. 그는 당의 이상, 당파성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딸의 이미지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중화뉴스의 이미지는 당대의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당은 이러한 이미지에 당의 이상과 성취, 즉 정치적 프레임을 덧씌운다. 검열에 의해 덧씌워진 텍스트는 딸의 순수 이미지를 당이 지향하는 선전으로 악용한다. 이에 반하는 <원 세컨드>의 초반, 어떠한 정치성과 언어도 개입하지 않은 순수 이미지는 검열 이전의 영화를 보여준다고 여길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도 남자와 류가녀의 대사는 없다. 무성에 가깝다. 아주 순수하게 현실이 된 부녀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순수한 이미지를 방해하는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랴. 외에 본 작품은 20세기에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과정을 아주 상세하고도 질서정연하게 수놓는다. 그리고 당대에 진실을 마주하기가 불안한 상황을 흔들림이 잦은 핸드헬드, 몰래 훔쳐보는 구도로 포착한 것이 눈에 띈다. 앞서 언급한 영화관과 필름에 대한 향수를 담은 작품에서도 상영 기사나 시네필들은 영화를 상영하고 감상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러한 행위가 어째서 이토록 중요한지는 후반부에서 논지를 설파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는 비교적 설명 없이, 맹목적으로 영화를 숭배한다. 남자는 영화를 보기 위해 노동교화소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훼손된 필름이 도착하자 마을의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이를 다 함께 세척하고 집에서 부채를 가져와 건조한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현실 속 무수한 사람의 노동력이 희생된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영화를 위해 적지 않은 물, 식수가 동원된다. 한편 류가녀에게는 다르다. 그녀에게 필름은 영화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등갓을 만들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중요하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영화는 중요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영화는 중요하지 않다. 차이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누군가는 현실에 놓인 자신을 위해서 영화가 중요하지만, 누군가는 바로 그 현실 때문에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     

 

본 작품은 허구로서 하나의 픽션 영화지만, 영화 안에서 또 다른 픽션 영화가 펼쳐진다고 여길 수 있다. 바로 남자와 류가녀가 필름을 두고 다툴 때다. 남자는 류가녀를 잡기 위해 히치하이크한 운전사에게 '저 아이가 가출한 내 딸'이라며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후 붙잡힌 류가녀는 남자를 두고 ‘아버지는 맞지만 정부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내팽개쳤고, 심지어 재산을 들고 날랐다’라고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꾸민다. 이렇게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을 카메라로 포착함에 영화 속 영화가 펼쳐진다. 이들의 이야기는 분명 거짓말이긴 하지만, 또 마냥 허구는 아니다. 남자는 홍위병과 다툰 이유로 노동교화소에 끌려갔고, 이후 아내와 이혼해서 자신의 딸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딸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들고 달아나는 류가녀는 흡사 가출한 딸처럼 보이기에 충분하다. 또 류가녀는 고아다. 류가녀가 꾸며낸 이야기는 임기응변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부모가 없는 남매의 상황, 그리고 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섞여있다. 필름통에 배급권이나 식량이 있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류가녀와 동생에게 필름은 생계를 위해 중요한데, 그것을 아버지 같은 존재가 앗아가 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 속 영화’에서, 왜 인간에게 이야기가 중요한지를 엿본다. 이야기, 스토리텔링은 현실에서 수행할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상상 속에서 문제를 풀고 전략을 짜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인생에서의 무수한 선택을 가늠해본다. 하나의 서사는 사건이 인물들에게 어떤 목적으로 기인하고, 또 어떤 인과로 흘러가는지 저비용으로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이미지다. 그러므로 사건과 인물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진척되고 변화하는지, 즉 서사를 자연스레 반영한다. 그래서 장이머우는 영화에서 서사를 가치를, 인물들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꾸며내는 과정을 통해 논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남자와 딸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고, 또 류가녀가 부모의 상황을 가늠해보는, 단순한 오락이나 쾌로만 작용하지 않고 실제 삶을 반영하여 추측해보는 수단이다.    


실제로도 이들이 발설한 이야기와 유사하게 남자와 류가녀의 관계가 이어진다. 이들은 국수가게에서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또 류가녀는 남자에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투영하며, 결말에서 이들은 흡사 부녀처럼 재회하고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그리고 장이머우의 카메라는 현실에서 가치 있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이후 영사하여 실현한다. 이러한 서사가 촬영하고 영사할 가치가 있는 것이랴. 이와 동시에 장이머우는 영화의 가치를 여럿 논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막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영화는 무언가를 있게 만든다. 그리고 영사기사는 주민들에게 필름을 조심히 닦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영화에 선구자들의 초상이 들어있기에 훼손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영화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영화로 대변되는 예술이 중요한 인지적 가치, 교훈을 사람들에게 설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이 죽어버린, 황망하고 공허한 무의 공간인 사막에서, 영화는 사람들에게 삶이 충분히 유의미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사막에서 볼 수 없는 특유한 감각을 자극하며, 남자에게는 딸의 기억을 건드리며 말이다. 물론 그것이 부조리하고 불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장이머우가 지금껏 강조해온 가치가 구조 속에서 개인의 권리를 되찾는 것이라면, 영화 속 국가가 '선각자'라는 핑계를 대며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가치가 전체주의,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는 중요한 인지적 가치를 전달함과 더불어, 현실을 포착하는 매체다. 허구의 픽션일 수도 있지만, 현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일 수도 있다. 영화는 재현과 보존의 역할도 수반한다. 필름에 먼지가 잔뜩 끼었다. 사막에서 날아든 모래 먼지, 그것은 살아생전의 대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후 필름에 묻은 먼지를 걷어낸다. 물론 그레인이 자글거리고 음향도 훼손되었다. 하지만 사막의 모래 먼지와 달리, 필름은 찰나적으로 붙잡은 딸의 초상을 반영구적으로 재현하고 보존할 수 있다.      


이러한 영화의 인지적 가치와 재현 및 보존이라는 측면은 당대의 문화대혁명과 맞물려 더욱 대조된다. 본 작품에서는 문화대혁명의 부작용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영사기사의 아들은 어딘지 모자라다. 또 영사기사의 보조인 젊은이 양허도 일머리가 형편없다. 그래서 필름을 망가뜨리게 되는데, 그런데도 연줄을 이용해서 권력이 있는 영사기사가 되고자 한다. 마을의 젊은 불한당들은 필름을 보존하기는커녕,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전등갓을 만든다. 붉은 완장을 차고 있는 이들은 류가녀와 남자를 구분하지 못하며, 단지 당에 잘 보여서 한 자리 해먹으려는 속셈이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장이머우가, 당시 홍위병이 돼서 출세하고 이득을 누린 젊은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투영한 것이랴. <인생>에서 늙은 의사를 몰아낸 홍위병 간호사들이 식자를 대체하지 못해 산모를 끝끝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그저 당에 찬동하고 혁명을 부르짖을 뿐, 실상은 자격 없는 청년층에 의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사사로운 이기심으로 유실되어 간다. 유산과 현재를 파괴하는 그들은 선전 영화에 세뇌된다. 마을에서 완장을 찬 홍위병들은 남자를 잡은 이후, 선전 영화를 바라보며 국가가 요구하는 선구자의 모습에 충분히 일조했다며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긴다. 이는 그들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전의 많은 유산을 파괴하고, 그렇게 사막과도 같은 스크린에 국가가 대체해놓은 선전물이 문제다. 영화를 영사하는 기사의 아들은, 그가 주변에 둔 세정액을 잘못 마셔 영구적인 뇌 손상을 얻었다. 그것을 단순한 사고로만 여길 수 있을까. 문화대혁명 당시 태어난 소년의 뇌에 깃든 세뇌, 또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 개인의 뇌가 망가진, 일련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장이머우가 강조하는 것은 부조리한 가치, 거짓말을 일삼는 이념이 현실의 진실을 대체해선 안 된다는 바다.      


오히려 그렇게 현실을 불필요하게 왜곡할 바엔, 현실에 꼭 필요할 경우 필름을 전등갓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 영화의 초반에 폭력은 필름을 위해 사용되었다. 남자와 류가녀가 서로 필름을 빼앗기 위해서, 또 필름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은 동원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류가녀를 괴롭히는 불량배를 위해서, 또 류가녀를 자신으로 오인한 사람들을 떼어놓기 위해서, 즉 현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이미지는 필름의 무수한 숏들이 이어지고, 필름과 영사기가 이어지고, 영사기와 스크린이 이어지고, 그렇게 아버지와 딸이 이어지고, 영사기와 남자를 체포하려는 소란스러운 영화관이 ‘이어지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곧 관계다. 서로를, 차원을, 시간을 매개한다. 이별한 딸과 만나게 해주는, 즉 현실을 매개해줘야 한다. 하지만 때때로 영화가 영사하듯 보이는 것이 홍위병들이 남자를 체포하는 소동인 것처럼, 국가가 바라는 '선구자'가 영사되기도 한다. 국가가 바라는 폭력이 영사되기도 한다. 그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남자가 보고 싶은 것이 선전영화가 아니라, 딸의 순수한 현실이 담긴 중화뉴스인 것처럼 말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이전, 하얀 스크린에 인민들이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일상과 활기, 소란스러움이 그림자로 담긴다. 그것이 이후 상영될 선전 영화보다 더 자유롭고, 또 생기가 넘쳐 아름답다. 장이머우가 사랑하는 영화란 바로 현실에서 비롯한 영화다. 이제는 보지 못하는, 또 영화 속 1초처럼 너무나도 빨리 성장해서 그 모습이 사라져버릴 딸의 일순간, 즉 현실의 어느 찰나에 존재했던 진실을 붙잡고 그것을 영사하는 영화를 사랑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홍위병들에 의해 이러한 영화가 유실되는 것처럼, 삶의 진실과 현실의 가치를 역행하는 문화대혁명을 장이머우는 날카로이 비판한다. 끝끝내 남자가 소중히 간직하고자 한 필름은 사막이 먹어버렸다. 망망대해와도 같은 사막에서 작디작은 필름 조각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으리.      


하지만 불타지 않았다면,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사막 위에 모습을 드러낼 필름은 딸의 초상을 다시금 영사하리. 그래서 남자는, 그리고 장이머우는 파괴되지 않은 필름의 기쁨에 웃는 것이랴. 다른 관점으로는 시대가 뒤바뀌었다. 그가 출소한 시대에 더 이상 많은 것들은 파괴되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건설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이전 시대가 조반파와 싸웠다는 이유로 노동교화소로 보내지고, 헤어지고 쫓기는 삶이 이어지는 사막의 시대였기에 과거를 보존한 영화를 더더욱 갈망했다면, 지금은 현재에만 집중해도 과거는 유실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남자는 더 이상 필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랴. 그의 옆에는 또 다른 딸이 곁에 있으므로. 이렇게 장이머우는 사랑하는 영화를 향해 러브레터를 쓰고, 사랑하는 대상의 가치를 불태워버릴 문화대혁명이라는 배경에서 이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2019년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가 '기술상의 이유'로 초청이 취소된 작품, 취소의 명분이 꺼림칙한 작품, 장이머우가 포착하는 시대상과 영화 외적인 맥락이 절묘하게 맞물리는 작품, 어쩌면 과거와 현재는 여전히 순환되며 반복되고 있으리. 이러한 이유로 장이머우에게 열광하던 팬들에게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작품이지만, 그의 초기작만큼 번뜩이진 않는다. <귀주 이야기>만큼 시대상이나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또 <홍등>이나 <붉은 수수밭>처럼 과거를 상세하고 세밀히 보존한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분장이 진지하기는커녕 대단히 우스워 몰입을 방해한다는 점도 큰 장애 요소다. <귀주 이야기>에서 공리가 완벽하게 분한 당대의 초상과 대비를 이룬다. 더욱이 당대의 선전 영화에 대놓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는 바고, 검열을 피하기 위한 우회적 비판이 최선이었다는 것도 이해한다. 또 애초에 당대를 재현하기 위해선 선전 영화들에 상영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전 영화를 바라보는 인민들의 향수가 지나치게 아름답게 포장되었다는 것이 '이해되는 흠'으로 남는다. 첨단 기술에 빠져드는 모습을 흠모하듯 그릴 순 있었어도 내용에 있어선 몽매하게, 보다 비판적으로 그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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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127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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