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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06. 2022

알렉상드르 코베리제,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지상의 영화: 발과 장소

알렉상드르 코베리제(Alexandre Koberidze),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 - 지상의 영화: 발과 장소   

“사람은 시대와 함께 삽니다. 상황은 바뀌었고, 우리는 그것에 적응합니다. 나는 이해심이 많아요. 결국 나는 과히 늙지는 않았으니까요.” -에리히 케스트너-

우리에게 '처음'은 중요하다. '처음'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는 그 현상이나 대상, 사건에 대해 백지상태다.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처음을 마주하고 나면 백지에 무언가 그려지고 쓰인다. 그리고 처음 이후에 마주하는 경험들은 이미 쓰인, 어느 정도는 혼탁한 그 캔버스가 거름망 역할을 하여 수용된다. 무엇보다 처음 이후의 경험이 부재한다면, 그 처음의 경험은 시작이자 끝이요, 그것에 대한 우리의 통념, 인상을 좌우하고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초의 상을 두고 비교한다. 첫 아이와 비교하여 둘째, 셋째의 차이점을 구별하고, 반성해야 할 것들을 도모한다. 우리의 사랑이 부모와 닮은 대상을 찾는 이유도 이와 유사할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인간 최초의 욕망, 처음으로 성애에 눈을 뜨고 자각하게 되는 대상을 부모님이라고 밝히지 않던가. 우리는 첫사랑에 다름 아닌 부모를 기준삼아, 그 이후의 사랑을 규정한다. 그렇게 처음의 사랑을 잊지 못해 인류는 줄곧 첫사랑이 남긴 궤적을 뒤따라간다. 첫사랑의 마음이 곧 나와 일치하기를 줄곧 바란다. 나의 일상은 첫사랑이 규정한다. 심지어 풍경조차도, 첫사랑과 함께한 그 날의 기후로부터 더 혹독했는지, 아니면 더 좋았는지를 판가름한다. 인류의 일대기는 최초의 상에서 확장되어 가는, 그 기준에서 비교되고 변주되는 무수한 상의 일대기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초의 상에 대한 강박에 휩싸여 있다. 우리의 현재가 처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나 그 처음이 있었던 과거를 소환하고 더듬는, 처음으로부터 뒤바뀌어 버린 대상을 찾고 또 찾아 헤매는 그런 강박에 빠진 셈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상들의 모태가 되는 최초의 상, 조지아의 영화감독 알렉상드르 코베리제의 신작,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는 첫눈에 반한 두 연인의 기억을 다룬다. 그날의 풍경, 기억, 감각 그 모든 것은 두 연인에게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과 오늘의 그들은 바람처럼 발이 달려 사라지고 변해버렸다. 그들은 기억을 찾는 것일까, 진정 사랑하는 오늘의 대상을 찾는 것일까.     


1984년 트빌리시 태생의 알렉상드르 코베리제는 현재 조지아와 독일을 오가며 활동하는 조지아의 청년 영화감독이다. 그는 2017년 <그 여름은 다시 오지 않으리>로 장편 데뷔하였으며, 본 작품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는 그의 두 번째 장편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은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익스페리멘탈 작품을 소개하는 '영화보다 낯선' 부문에 초청됐을 만큼 전위적인 문법을 구사하였다. 또 코베리제는 인터뷰에서 20세기 조지아 영화를 대표한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위적이면서도 이오셀리아니의 동화성, 우화성이 돋보이는 작품, 일단 본 작품은 스마트폰으로 촬영되었다. 흡사 의도적으로 역겹고 조악한 효과를 내려고 값싼 디지털카메라를 선택한 최근 장 뤽 고다르의 작품과 질감은 유사하다. 하지만 고다르가 세계의 추를 비추기 위해 보잘것없는 매체를 택했다면, 코베리제는 진솔하게 '일기'를 기록할 수 있는 매체로서 친숙한 스마트폰을 택한다. 영화의 서사는 시골에서 한 청년이 오디션을 위해 도시로 상경한다. 영화에서는 이를 위해 올라타는 기차가 반복되고, 새로운 세기로 진입하는 '이동'이 강조되지만, 시골 출신의 그는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도시에 사는 심사위원들이 그를 능동적으로 알아보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합격 여부를 판가름한다. 시골 출신의 그는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하는 사람으로, 도시의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과 자고 있는 그는 편집으로 대비된다. 하지만 그는 마냥 멈춰있지 않고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능동적으로 도시를 알아간다. 더 이상 외부에 구애받지 않고,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능동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타인이 나를 기록하지 않고 스스로를 기록하는 수단으로서 스마트폰이 사용되며, 영화의 카메라는 흡사 그의 시선, 의식에 상응한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된 현재는 기록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 더 이상 현재와 같지 않다. 영화의 불명확한 질감은 기록되는 순간 왜곡되고 유실되기 시작하는 아스라한 기억과 같고, 심지어 나레이션의 주체도 이야기의 당사자인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기억과 기록의 당사자는 사라졌고 간헐적으로 나타날 뿐이며, 이를 마주하는 다른 이의 시선이 대신 전달할 뿐이기에, 그 여름의 진실에서 더더욱 멀어져 영화의 제목처럼 그 여름은 다시 오지 않으랴.      


이렇게 코베리제는 데뷔작에서 쓸쓸하고 외로운 도시를 버텨나가게 만들어준 사랑, 하지만 필연적인 그 끝과 영원한 고독, 적막을 어떻게 가시화할지 모색하며, 대단히 시적인 영화를 연출했다. 또 평범한 일상이 담긴 연출과 웅장한 배경음악의 조합을 통해, 볼품없는 시각이더라도 그 안에 담긴 숭고한 삶을 찬미했다. 더불어 기억, 사랑, 능동적인 기록을 모색했는데, 이러한 그의 관심이 보다 정제된 문법으로 신작에서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전작에 비한다면, 16mm 필름으로 촬영된 본 작품은 비교적 다듬어진 편이다. 하지만 코베리제는 매끈한 환상보다는, 여전히 현실·일상을 포착한다. 비전문 배우들의 비기교적인 표현과 생생한 반응에 어울리는, 흡사 그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홍상수의 형식을 연상케 하는 아마추어리즘으로 포착한다. 코베리제의 줌아웃, 줌인 또한 엉성하고 작위적인데, 그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카메라는 비교적 정지되어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주목하기보다는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에,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진작가'처럼 프레임에 담긴 피사체와 그것의 움직임에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주목을 요구한다. 그렇게 코베리제가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의 도입부에서 학교가 포착된다. 등교하는 아이들, 코베리제는 아이들의 활기, 인사, 수다, 장난에 주목한다. 한 아이의 묶지 않아서 풀어진 느슨한 운동화 끈이 눈에 띈다. 이윽고 디졸브를 이용하여 등교를 마친 학교의 정문을 포착한 숏을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이전과 연결한다. 텅 빈 공간, 카메라는 생기 없는 공간은 관심이 없다는 듯,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하지만 그곳에 한 마리 참새가 날아든다. 카메라는 다시금 줌인하여 참새를 클로즈업한다. 그가 카메라의 운동과 형식으로 주목하는 것은 역동하는 삶이자 생명이다. 등교하는 아이들은 교문에서 떠나고, 풀려 있는 운동화 끈도 언젠가 묶이게 되리, 그 느슨하고 헤이해진 느낌은 포착된 당시와 같을 수 없으리. 이처럼 또다시 날아가 버려 공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그렇기에 소중한 참새의 찰나를 포착한다.      


코베리제는 설령 인간이나 생물이 아니더라도 변화하는 것들, 지금 여기서 너무나 쉽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포착한다. 만개한 꽃 각각에 주목하기도 하고, 푸르기만 하던 나무에 빨간 꽃이 맺힌 것을 줌인으로 집중한다. 또 유리잔과 같은 깨지기 쉬운 것, 그렇게 기존 상태에서 변하기 쉬운 것도 포착한다. 그 짧은 순간을 세밀하고도 정교하게 프레임에 보존한다. 그 소중한 찰나에 집중을 부탁한다. 그리고 영화는 편집에 주목할법하다. 특히 도입부에 영화는 페이드아웃, 디졸브, 그리고 일반적인 컷이 연이어 등장한다. 일단 페이드아웃은 책장을 넘기는 듯한 효과를 준다. 본 작품 자체가 마치 소설의 관찰자처럼 전지적인 나레이터가 전체적인 상황,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리를 통찰하여 상황을 언어로 서술하고 묘사하는 만큼, 문학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레이션에 페이드아웃이 더해지자 더욱 책을 읽는 듯한 효과가 배가 된다. 이러한 효과와 더불어 페이드아웃의 전후로는 리자와 기오르기, 첫눈에 반한 두 연인이 이어진다. 페이드아웃에 의해 남과 여는 단절, 분리된다. 페이드아웃은 사랑하지만 확신 없는, 이에 서로가 유리된 연인의 상황을 가시화한다. 이후 두 연인의 분리된 세계를 부드럽게 중첩하는 디졸브는 서서히 서로의 교차로를 넘어가는 두 연인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랴. 하지만 이윽고 두 연인은 저주에 빠져 얼굴이 변한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활동한다. 그래서 페이드아웃은 완전한 단절, 디졸브는 겹침, 컷은 평범한 단절로 연인의 상황에 따른 편집의 합목적성이 눈에 띈다. 그리고 코베리제는 본 작품이 그저 외부에서 관조하는 수준에 머물러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영화는 공간이 한 개인의 삶에 미치는 여파를 조망한다. 그래서 인물들의 삶을 감상자도 느껴볼 수 있게끔, 서사보다도 도시의 세부와 변화를 기록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와 사랑에 빠진 연인의 삶, 저주를 간접 체험할 수 있게끔, 관객들에게 지시한다. 일례로 자고 일어나면 리자의 얼굴이 변할 것이라는 저주를 관객들이 체험하게끔, 눈을 감고 소리가 들리면 다시 뜨라는 문구를 삽입하며, 이전의 얼굴과의 단절, 낯선 저주를 인식을 넘어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나레이션이 대두된다. 하지만 나레이션은 때때로 보이스오버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나레이션과 그것이 지칭하는 숏이 응당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레이터는 리자가 울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코베리제는 리자가 우는 장면은 촬영하지 않는다. 또 포착되는 대상과 다른 이야기나 문학을 얘기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이 그럴듯하게 끼워 맞춰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철저하게 역할분담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각이 펼쳐내고 보이는 것을 청각이 굳이 서술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고유한 것을, 나레이터도 마찬가지로 고유한 것을 각자의 매체로 전달한다. 카메라는 가시화된 것을 포착할 수 있지만 비가시적인 내면, 마음, 심리는 포착할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카메라의 몫, 볼 수 없는 것은 나레이터가 서술한다. 이렇게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문학이 보충하는, 서로 다른 매체가 접촉하며 각자의 장점이 극대화된다. 이러한 연출로 코베리제는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앞서 언급한 도입부, 참새까지도 사라지고 또다시 텅 빈다. 여전히 코베리제는 땅바닥을 포착한다. 이윽고 그 자리에 두 사람의 발이 나타난다. 서로의 동선이 겹쳐 부딪힌다. 사과하고 다시 제 갈 길을 가지만, 또다시 동선이 겹친다. 머리에서의 생각과 달리 그들의 손과 발이 뒤엉킨다. 발은 장소, 방향을 잘못 들 수 있다. 머리는 기억을 보존하지만, 새의 날개는 머물거나 고정하지 않고 항상 떠난다. 그렇게 머리의 생각이나 기대와 달리, 같은 장소에서 반복해서 만나는 두 연인, 이윽고 영화는 밤이 된다. 야경이 펼쳐진다. 빛은 미약하다. 하지만 두 연인은 또다시 재회한다. 다리에서, 그들에게 서로는 빛, 그것도 동일한 빛과 같으리. 어두운 길에서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서로의 유일한 빛, 그렇게 이들은 내일 8시에 카페에서 다시 재회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이윽고 두 연인은 저주에 빠진다. 사악한 눈에 의해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뒤바뀔 것이라는 저주,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영화적 설정일까. 이러한 저주는 현실 속, 사랑의 속성과 매우 닮아있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한 파편적인 텍스트인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실재가 아닌 ‘이미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연인은 상대방을 안다고 굳게 자만하지만 현실에서 그 앎을 결코 적용할 수 없는 자다. 본 작품에서 어제의 첫사랑 기억과 오늘의 연인들은 결코 같지 않다. 리자는 팔찌나 귀걸이 등을 착용하고, 기오르기는 옷을 벗고 짐을 싼다. 그렇기에 어제의 그들과 사랑에 빠진 오늘의 그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에게 리비도의 양은 미리 주어져 정해져 있다. 자기애가 강화되면 외부로 향하는 에너지가 줄어들고, 반면 연모하면 자기애가 줄어드는 식으로 리비도의 양은 그대로되 방향이 뒤바뀐다. 작품의 연인들도 그렇다. 외부의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 리자는 의학을, 기오르기는 축구 실력을 잃었다. 이후 고민 끝에 영화감독의 연인 사진 제안에 응한 리자와 기오르기는 내가 ‘하기 싫은’ 촬영을 하고, 기오르기는 꼭 보고 싶었던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결승에 올라간 경기를 포기하며 리자를 집에 데려다준다. 그렇게 나의 자아가 선호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연인을 위하는 과정에서 연모의 대상을 닮게 된 것이 아닐까. 상대방과 약속한 장소에서, 연인을 기다리며 새로운 직업을 채워가며 말이다. 그렇게 연모의 대상으로 얼굴이 뒤바뀐 두 연인이 기대하는 어제의 서로는 이미지다. 약속 장소에 두 연인이 나왔지만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서로는 재회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하기에 책망하지 않는다. 약속 장소에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며, 상대방을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긴다. 자꾸 재회하고 심리도 유사함에, 나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운명, 하지만 사랑에 빠진 서로를 닮아가며 각자가 기대한 어제의 연인은 사라지고, 처음의 연인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맨다. 그래서 사랑은 이미지, 어제의 기억에 갇히는 것이다. 두 연인은 카페에 왔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이 머무는 카페는 소란스럽지만 두 연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영화도 연인들의 심리에 동참하게끔,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를 번역하지 않아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연인이 참여하는 것은 외부 현실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내부, 그들이 기대하는 기억 속 연인의 이미지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을 원망한다고 말한다. 세상은 그토록 충만한데, 나는 대상의 부재를 하릴없이 기다려야 하니, 세계의 행복은 잔혹하게 느껴진다. 세상의 행복은 나와 유리된 것, 연인은 오직 자신만의 행복과 슬픔에 빠져든다. 본 작품에서도 그렇다. 충만한 세계, 젊은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분명 오늘의 연인이 와있는 세계, 하지만 어제의 사랑을 기대하는 두 연인에게서 이에 부합하지 않는 오늘의 충만한 세상은 너무도 야속하다. 이들은 왜 궁핍할까. 사랑에 빠지기 이전, 두 연인은 얼굴이 아니라 사물로 말했다. 두 연인 사이에 책이 있었고, 리자는 약사, 기오르기는 축구선수이기에 직업에 어울리는 사물로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 코베리제는 약사로서 돈과 약을 교환하는 리자를 손님이 남긴 동전으로 대신 보여주고, 또 기오르기를 탈의 된 운동복으로 간접 보여줬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배려 받지 못한다. 손님은 리자에게 동전을 무례하게 툭 던지고, 기오르기가 탈의 한 운동복 또한 무성의하게 던져진다. 하지만 그 무례하고 무성의한 것들로 그들을 인식한다. 또 얼굴이 뒤바뀐 이후에 동네의 아이들은 기오르기를 찾는다. 얼굴이 뒤바뀐 그를 못 알아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기오르기는 '축구공을 빌려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축구공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기오르기가 아닌, 모르는 한 남자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고 아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에 빠져 저주에 걸린 이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 약사, 축구선수, 즉 사물 및 목적화된 자신이다. 기억 속에 빠진 두 연인, 이와 더불어 각자가 사랑에 빠져 기존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사물을 잃어버림에 서로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 사물들은 특정한 목적만 부여받는다. 사물에 의해 인간도 무한하고 다채로운 가능성이 말소되고 단 하나의 역할·목적으로 국한된다. 이는 영화에서 '얼굴'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리자는 발을 따라가다가 머리가 생각한 길을 잘못 들었다. 발은 목적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발이 아닌 얼굴을 포착하는 초반부의 카메라에서 가능성은 오직 약사, 축구선수로서의 그들로만 축소된다.      


그런데 사랑이란 바로 그 머리를 배반했을 때, 직업이 아니라 인간으로 마주하며 감정을 느꼈을 때 피어나지 않던가. 그래서 발을 따라가면 보이던 사랑은, 이제 머리를 따라가 약속 장소에 도달하면 보이지 않는다. 사물성을 극복하라, 이는 사물도 마찬가지다. 사물들이 인간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자신들의 의무를 저버리고 리자에게 말을 건넬 때, 리자는 기존의 자신은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앎, 즉 자신에게 저주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는 사물이 말을 건넨 것이 아니라, 리자가 사물들의 본래 목적을 넘어서 그들을 주목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영화는 기존 관념, 사물의 목적에 게으르게 안주하지 않고, 발로 걸어가고 이탈하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이 향한 곳에서 생각을 제공한다. 영화에선 축구하는 아이들과 그들이 발로 가지고 노는 ‘공’이 반복 포착된다. 그리고 아이들의 계산과 다르게 둥근 공이 대지를 벗어나 강으로 흘러가며 영화의 1부가 끝이 나는데 발이 향한 곳, 그것도 공과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이 향한 곳에서 새로운 앎이 제공된다. 그리고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된다. 두 연인의 시작이 바로 머리가 예상치 못한 발이었다. 우리가 생각한 연인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발이 향한 그곳에서 연인을 만났고 사랑을 생각했다. 발과 더불어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대상이 바로 '다리'가 아니던가. 다리가 놓여 강이 분리시킨 두 공간은 이어졌다. 그리고 다리로 이어진 각 공간의 차이를 나레이터가 설명하는데, 다리가 놓이지 않았으면 영영 몰랐던 앎이 다리를 통해 이어진다. 그래서 영화는 이후에도 사람의 얼굴, 즉 생각하는 머리가 대신, 장소로 향하는 발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처럼 흐르고 움직이며 어딘가로 향하는 강변 풍경, 바람 소리와 흔적을 포착한다. 발로 향하는 사람들은 새롭게 도전한다. 기오르기는 리자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사람들에게 철봉 도전을 하라고 호객행위를 해야 한다. 이윽고 한 행인이 찾아온다. 철봉에 매달릴 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발이 그곳으로 향하니, 발이 향한 곳에서 철봉 매달리기를 하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머리가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발이 향한 곳에서 도전을 지시한다. 걷는 사람들만이 새롭게 경험할 수 있다.     


사진작가도 걸어 다니며 다양한 연인들을 찾아다닌다. 자신의 추상적인 계획, 관념은 발이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상세하게 채워 넣는다. 만약 발이 아니라 머리가 구체적인 연인의 모습을 정해놨으면, 사악한 눈의 저주에 빠진 리자와 기오르기처럼 영영 연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연인의 상을 발견하는 것은 그들을 찾아가는 발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 한 노인이 성가신 주전자를 빌라에서 내던져버린 낯선 것을 촬영하기 위해서도 발이 도착해야 한다. 하지만 연인은 걷지 않는다. 기오르기는 지금 여기를 등지고 잠자는 자, 리자는 방문을 모두 걸어 잠그는 자다. 그들의 발은 나아가지 않고 과거에 머문다. 하지만 그들의 뒤편 배경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강물은 여전히 흐른다. 그들의 머릿속 기억만 멈춰있다, 발에 의한 그들 자신은 변화했음에도… 이렇게 발을 강조하는 영화는 특히나 아이들의 초상에 주목한다. 발, 강물, 바람에 의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지금의 얼굴에서 성숙한 얼굴로 뛰어넘을 아이들의 모습으로 보여주듯 말이다. 1부에서 아이들은 등교하지만, 2부에서는 땡땡이를 친다. 2부의 아이들은 경비를 서는 노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무에 숨어서 안 보이다가, 이후 나무에서 뛰쳐나와 다시 보이고, 이윽고 또다시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발에 의해서 ‘안 보였다가 보이고 다시 안 보이는 것’을 보존한다. 그리고 상승의 운동감이 눈에 띈다. 특히 계단을 오르며 말이다. 걷는 우리는 기존의 상태에서 위로 오르고 또 오른다. 이러한 발이 향하는 곳은 공간이다. 그리고 사물, 발에 이어 공간이 우리를 좌우한다. 전통이 존재하는 도시, 축구 경기를 다 같이 관람하는 카페 등 공간의 역할이 개인을 규정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무성영화를 의도했다는 언급했는데, 그래서 공간에서 개인들의 대화를 무성 처리한다. 축구 경기를 보러 온 관중,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온 손님과 대화하는 리자를 포착할 때 말이다. 중요한 것은 ‘공간에 모여 있는’ 시각이라는 듯이, 이들이 대화하는 내용은 크게 중요치 않다는 듯이 말이다.      


한 떠돌이 개의 마음을 나레이션하는 장면, 그 강아지는 상심했다. 친구와 같이 축구 경기를 보러 가려 했는데, 친구 강아지와 자신이 향한 곳이 엇갈린다. 두 강아지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축구 경기 보는 것을 선호한다.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은 같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으니 강아지는 토라진다. 그래서 연인의 사랑도 같은 발, 같은 공간에서 비롯한다. 이데아, 운명, 천상의 관념 그것은 허상이요, 지상의 사물, 발, 공간이 우리를 규정한다. 여전히 공간은 서로를 마주하지 못하는 두 연인이 사랑하는 사이, 아는 사이임을 암시한다. 똑같은 공간에서 지속하여 발이 같은 곳을 향함에, 그리고 같은 사물인 하차푸리를 좋아함에. 하지만 이러한 공간 또한 발이 달린 셈이다. 결코 어제와 같지 않다. 도입부에서 포착된 학교의 풍경과 2부 학교의 풍경은 결코 같지 않다. 공사가 진행 중이다. 리자도 카페를 옮겼고, 기오르기와 사장도 경찰을 만나 호객행위를 하는 장소를 옮긴다. 공간이 우리를 규정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발이 공간을 마찬가지로 상호 규정한다. 이러한 발들에 의해 어제의 필연은 결코 오늘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타나지 않은 기억 속의 연인에게 발목이 잡힌 그들은 2부가 점차 지나가며 서로가 희미해진 모양새다. 한때 명확했던 기억이 흐려지고 추상화됨에 더더욱 발이 기억에 좌우되지 않는 오늘을 좌우한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태에서 코베리제는 예술의 역할을 모색한다. 영화 속 사진작가는 곧 코베리제 자신의 투영이다. 사진작가는 연인들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의도·계획은 있지만, 연인의 모습을 제 주관대로 정해놓진 않는다. 연인들 각각에 따라서 연인의 속성과 규정은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타인이 좌우한 필연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연으로 말이다. 쿠타이시의 사람들은 축구를 즐겨본다. 아르헨티나가 다른 국가 대표팀을 5:1로 이기고 있고, 경기는 몇 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레이터는 아르헨티나가 이기는 것은 필연이라고 말한다. 그 시공간에서는 여지가 없다. 필연, 운명 등은 아르헨티나의 승리처럼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반드시’를 옮겨야 한다. 예술은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얼굴이 변한 기오르기와 리자는 서로가 연인임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려 보이는 사진작가는 그들을 설득해 연인인 척 사진을 찍게 한다. 예술은 두 남녀의 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렇게 예술에 의해 옮겨지는 발에 의한 결과는 타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오르기는 카페에서 축구 경기 상영을 위해 빔프로젝터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하얀 스크린뿐만 아니라 현실 속 여러 공간도 스크린이 되어 축구 경기가 영사된다. 거기에 배경 음악까지 덧입혀져 객관적인 축구 경기와 전혀 다른 느낌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예술은 연인이 아닌 존재를 연인으로 만들게 하고, 또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공간을 달리 보게 만든다. 그렇기에 예술은 이러한 현실에 '반드시', '운명', '필연'을 옮겨와야 한다. 그래서 코베리제의 시선은 매우 섬세하다. 이러한 공간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을 납득시키려는 듯, 관객의 오늘과는 다른 그날의 도시, 그날의 사람들과 발을 아주 섬세한 풍경, 초상, 정물로 옮겨온다. 그리고 영화는 시각 매체다. 사랑에 빠져 객관적인 시각을 잃은 연인한테, 객관적인 그들의 얼굴을 보게 만든다, 빔프로젝터와 배경음악이 결합되어 왜곡·주관적인 이미지 대신에. 현실에 반영되어야 하는 예술은 그토록 확실해야만 한다. 하지만 예술은 현실의 동의어가 아니다. 코베리제의 영화는 시적이다. 보통 시는 은유적이고 모호한 것, 운율 규칙에 따라 가락을 형성하는 단어들의 연쇄로 규정된다. 한편 시는 영국의 철학자 말콤 버드의 주장처럼, '완벽한 바꿔 쓰기가 불가능한 매체'다. 일반적인 언어의 문법, 현실의 질서와 다른, 작가와 개인의 고유한 문법을 확립하여 이를 통해 소통하는 매개체다. 이런 의미에서 코베리제의 영화는 시적이다. 묘목, CCTV, 배수구, 바람에게서 대화를 생각해내는 것이 과연 코베리제 이외의 작가에게 바꿔 쓰기가 가능한 것일까. 또 강변의 카페에서 낚싯줄을 빌리는 한 행인은, 당연히 이를 가지고 낚시를 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사물의 일반적 규칙, 목적이지만, 기존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사람들의 발을 걸리게 만드는 장난에 활용한다. 그의 영화 속 현실에서 연인이 아니게 된 리자와 기오르기의 관계를 뒤집어 서로의 얼굴을 보게 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현실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만든다.      


이렇듯 코베리제의 예술은 규정된 사물을 해체하여 달리 보기, 이를 통해 기존의 걸음을 달리하기, 이로써 고유한 개인의 생각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코베리제는 사랑을 그저 평범하게, 기존의 규정대로 말하지 않는다. 바꿔 쓰기가 불가능한 그만의 문법으로 돌려 말한다. 내용뿐만이 아니다. 이제껏 겨우 두 작품의 장편을 선보인 청년 감독이지만, 코베리제 특유의 소박한 아마추어리즘, 리얼리즘과 결합한 동화적인 문법은 벌써부터 그의 개성이 뚜렷하다. 그는 당시에는 필연이었던 인물들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사물, 도시를 정교하게 옮겨온다. 본 작품에서 결말은 프리즈 프레임으로 얼어붙음에 더 이상 발은 달리지 않는다. 멈춰버린 과거, 그 당시에는 사랑이 필연이었다. 오늘날에는 같지 않을 그 필연, 코베리제가 환기하는 것은 ‘천상의 관념’이나 ‘처음의 기억’은 이후 지상의 발이 향할 사물, 장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베리제는 천상에서, 또 기억으로 규정되는 운명의 우리가 아니라, 지상의 발로 좌우되는 우연의 우리, 우연이 필연인 우리를 바라본다. 그래서 러닝타임도 감독의 계획에서 벗어난 채 계속 늘어난다. 두 주인공들이 걸어 다니며 바라보는 것에 따라서,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쿠타이시가 보여주는 과거, 현재의 다채로움, 즉흥을 발로 옮겨 다니며 촬영하고 보존하는 영화는 길어진다. 그 발이 보여준 이미지들은 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 속 나레이터는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심지어 주인공들의 심리까지도. 나레이터는 리자와 기오르기의 사랑 이야기라는 뼈대를 갖춘 감독의 시선, 그리고 입에 상응하리라. 그러나 그 전지적인 존재는 영화에 발로 개입하지 못하고, 결말에서는 이해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지상에서 유리된 하늘의 존재는 이해하지도 뒤바꾸지도 못한다. 지상으로 내려와야지만 낯설고 생경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니. 그래서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라는 국내 제목에서 '바람이 분다'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의로 덧붙인 제목이나,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코베리제는 하늘에서 불변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발이 달려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람의 필연을 바라보며, 발이 달린 사물이 새롭게 현시하는 시를 쓰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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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206 집에서(MUBI 스트리밍), 22101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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