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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12. 2022

베흐타시 사내에하&마리암 모그하담,<흰 암소의 발라드>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함께

베흐타시 사내에하(Behtash Sanaeeha)&마리암 모그하담(Maryam Moghaddam), <흰 암소의 발라드>(Ballad of a White Cow) 

-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함께     

“거짓은 거짓이 되기에는 너무나 지나친 거짓 속에 흡수된다.” -장 보드리야르-

현재 이란은 전 세계에서 사형 집행으로 가장 악명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인구수에 비례한 사형 집행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사형이 가장 많이 집행되었던 2015년에는 약 1,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2016~17년에는 약 500건씩 하향 추세를 그리다가, 최근에는 약 300건의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감소 추세라 한들, 여전히 이란의 인구수에 비례한 사형 비율은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그리고 이란은 비단 사형 비율로만 비판받지 않는다. 대다수의 국가가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찬성하였고, 이란도 그중 하나였다. 유엔의 아동 권리협약의 37조에 따르면 미성년자에 한해서는 사형이나 종신형을 내릴 수 없고, 구금조차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란은 이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고 있어서 논란을 빚는다. 더욱이 사행 집행 방식에서도 다각도에서 비판을 받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형을 집행하여 권력에 대한 선전 도구로 악용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간통죄로 사형을 선고받는 사람들은 구덩이에 온몸이 파묻힌 채, 얼굴만 나온 상태에서 돌팔매질을 당한다.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는 투석형은 2012년 이후로 폐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전히 2010년대 후반에도 집행된 것이 확인됐다. 더욱이 남성은 허리만 묻어서 탈출할 여지를 주는 반면, 여성은 목까지 묻히기에 간통을 성차별적으로 규정한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그러나 이란 사형의 문제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구의 근대화와 식민주의에 따른 반동으로 극심해진 원리주의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더욱 과거로 되돌려놓는 결과를 낳았고, 이에 따라 근대화를 거친 국가에서는 더 이상 범죄로 여겨지지 않는 행위들이, 이란에서는 여전히 범죄로 규정된다. 간통이나 동성애, 풍기문란, 신성모독 등이 이에 대표적인 예시다. 단순히 경범죄 수준에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이에 따른 처벌이 최대 사형까지 이어질 정도로 가볍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또 판사나 지도자의 재량에 따라서 판결이 이뤄지는 타지르도 논란이 되는데, 명확한 규정과 체계에 따르지 않고 가혹한 처벌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지르에 의해서 정치범, 반정부인사 등이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다.     


이러한 이란 사형의 문제점을 이란의 영화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가 <사탄은 없다>에서 당국이 생계, 노동, 생존과 사형을 결부 시켜 존속시킨다는 것을 폭로하였다.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사람은 공무원, 징병된 군인이요, 사형을 집행하지 않을 시 돈을 벌 수 없거나, 전역에 불이익을 받는다. 더욱이 사형을 결정한 권력자들은 부를 이용하여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니, 그들에 의해 살인 당하는 사람도, 살인을 집행하는 사람도 모두 피지배 세력이다. 그리고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뒤를 이어 부부 감독인 베흐타시 사내에하와 마리암 모그하담도 사형의 비극을 <흰 암소의 발라드>에서 다루고 있다. 그들은 과연 사형의 어떤 해악을 다룰까? 1980년 시라즈 태생의 베흐타시 사내에하와 1970년 테헤란 태생의 마리암 모그하담은 이란의 부부 감독이다. 이와 동시에 마리암 모그하담은 배우이기도 하다. 본 작품이 부부 감독으로서 장편 데뷔작이고, 사내에하는 2015년 <리스크 오브 애시드 레인>으로 단독 장편 데뷔한 바 있다. 본 작품에서 배우로도 참여하는 모그하담은 사내에하의 데뷔작에서도 배우로 출연하였다. <리스크 오브 애시드 레인>에서 사내에하는 이란의 사회 문제를 관통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옛 친구가 단순한 우정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깊숙한 관계임이 암시된다. 어머니의 사망 이후 친구를 찾아 떠나는 주인공의 여정을 사내에하는 매우 리얼리틱한 연출로 포착한다.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그저 현실을 관조하고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또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망 이후 남자의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나 직장에서 삭막한 동료들 간의 관계로 국한된다. 이렇게 진심은 없고 단절된 관계를 가시화하는 산성비에 의해 부식된 듯한, 혼탁한 잿빛 색채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한편 영화가 마냥 리얼리틱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남자가 여정을 떠날 때 줌아웃을 통해 카메라도 인물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는 듯한 형식이 인상적이다. 사내에하가 연출과 가리키는 것을 맞물리게끔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러한 본 작품에서는 죽음을 고찰한다.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무수한 죽음을 일으키는 전쟁, 그것은 기존상태를 파괴함과 동시에 그렇기에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전쟁은 주인공과 친구를 헤어지게, 연락이 끊어지게 만들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더 이상 아들로서 자신이 아니라, 주체적인 성인으로서 자신이 가능하게끔 만든다.     


또 영화의 배경은 흔히 이란 영화에서 제시되는 수도 테헤란이 아니다. 외곽 지역이다. 그렇게 주변부로 내몰린 존재가 서서히 친구를 찾으러 도시로 진입한다. 이후 단절되어 있던 주인공이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렇게 관계를 맺고 서로 연대하며 각자의 문제를 돕는다. 디졸브로 이전의 삶과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하여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형식이 흥미롭다. 동성애자와 여성, 그리고 사회에서 방황하는 청년의 연대, 이란이란 구조 내에서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연대, 그렇게 주인공의 여행은 고립을 넘어서리.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의 연대는 곧 변해버린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귀결되는데, 과연 <흰 암소의 발라드>에서는 어떤 진실의 여정이 이어지고 있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이전 작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연출도 마찬가지로, 고정된 카메라로 공간과 인물을 주의 깊게 포착한다. 그것은 흡사 움직이지 않는 CCTV처럼, 영화가 조명하는 세태를 객관적으로 담아낸다. 더욱이 영화의 호흡은 비교적 느리고 길어서, 더 빠르고 탄력적인 리듬을 가진 영화들에 비한다면 잘려 나가는 부분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즉 카메라가 담아내는 현실의 시간이 비교적 덜 잘려 나간 채 보존돼 있다. 정지되어 수동적인 카메라, 한편 이러한 카메라가 움직일 때가 있는데, 바로 영화의 초점이 미나로부터 레자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다. 바바크에게 돈을 빌린 옛 친구라면서 미나를 찾아온 레자, 하지만 판사라는 그의 진실을 비춤에 영화는 트래킹과 그의 전신을 비추는 자동차 전조등을 조명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영화는 편집에 주목할 법하다. 도입부, 바바크의 최후를 보기 위해 교도소로 향한 미나를 포착하는 장면에서다. 밝은 공간이 포착된 숏, 바로 다음에 어둠으로 이어지고, 흡사 그것은 뒤바뀐다기보다 어둠에 의해 빛이 차단되는 것만 같다. 빛은 잘려 나가고, 이전과 다음은 분절적·불연속적이다. 빛은 곧 삶일까, 또 진실을 밝혀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둠은 죽음일까, 진실을 가리는 거짓일까. 누명에 의해 교도소로 가게 된 바바크의 삶이 이어지지 못하리라는 듯이, 사형에 의해 부부의 삶이 연속되지 못하리라는 듯이 빛은 어둠으로 향한다. 그리고 부부의 마지막 포옹이 이뤄지는, 닫힌 문 너머의 방을 줌 아웃으로 처리하여, 그들의 사랑이 현세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외에 영화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도, 예술로서 형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황망한 공간, 텅 빈 공간을 지속해서 포착하여 사형에 의한 공허, 이슬람 사회에서 남성이 사라져 홀로 불완전하게 놓인 여성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함께' 하나의 가정을 이루던 남편이 사라짐에 생기 잃은 집안을 차갑고 삭막한 회백색으로 구성한다. 더불어 바바크가 오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진실, 그리고 결말에서 레자의 진실을 알게 될 때, 진공 상태를 연상케 하는 청각 효과가 사용된다. 외부에서 전해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그래서 외부를 차단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형식을 바탕으로 부부 감독은 사형을 고찰한다. 도입부, 교도소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흰 암소가 포착된다. 매우 상징적인 숏, 과연 흰 암소는 무엇을 가리킬까. 영화의 주인공 미나는 우유 공장에서 일한다. 그녀는 우유를 관리하는 사람, 그리고 암소처럼 딸 비타에게 젖을 내어주는 사람이라 볼 수 있으리. 결말에서 그녀는 우유를 끓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레자의 진실을 알게 되자 독약을 타서 말이다. 하지만 독약을 넣은 우유를 끓이고 이를 마시게 하는 시퀀스는 상상으로 그친다. 생명을 내어주는 순수한 암소는 위선적인, 누군가를 죽이는 우유를 내놓지 않는다. 이러한 암소는 흰색이다. 하양은 결백을 의미하는 색채, 하지만 결백한 암소를 두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비웃는다. 이후 미나가 마지막으로 남편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향하는 숏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부 감독은 해괴한 청각을 강조한다. 바로 교도소의 다른 죄수들, 내지는 구경꾼들이 비웃는 듯한 소리를 말이다. 이란의 사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전시한다. 근대화를 거친 국가에서 신체형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도 유죄 판결, 사형 집행 과정을 아주 적나라하게 신문이 보도하거나, 광장에서 사람들이 이를 구경했다. 국가가 이를 전시한 이유는 국민들의 육체를 국가가 주무를 수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절대적인 왕권과 체제를 더욱더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란 당국은 여전히 신체형을 유지하고, 또 사형을 구경거리로 삼는다. 바바크를 착오로 사형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뜻'일 거라며 합리화한다. 사형이 올바르게 집행되었든, 실수든 그것은 신의 뜻, 거스를 수 없는 종교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선전물로 악용된다.      


결백한 흰 암소를 둘러싼 까만 옷의 사람들, 그들은 거짓말로 진실을 우롱하여 이득을 챙기는가.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재판관들, 권력자들은 거짓된 종교의 이름을 빌려 신의 행세를 한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의심’하고 ‘물음’을 건넨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그래서 불완전한 시간과 목숨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리고 인간의 판단 또한 불완전하다. 그런데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판단으로 타인의 불완전하기에 귀중한 시간과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영화는 양심으로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자의 동료 판사는 신의 뜻이라며 자신들의 실수를 무마하려 한다. 신의 뜻이라면 실수라도 그것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 된다. 하지만 니체가 양심을 두고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다'라고 논한 것처럼, 양심은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는 자신의 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양심이 레자가 미나의 곁에 있어야 함을 명령한다. 이렇게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전작과 본 작, 지속해서 이어지는 감독의 주안점이 바로 연대다. 영화는 바바크가 사형당한 이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개된다. 미나는 공장에서 레일 위에 올라간 우유를 관리하고 있다. 레일 위에 올라가 천편일률적으로 관리되고 유통되는 우유처럼, 미나의 삶도 이와 별다를 게 없다. 어머니로서 미나는 일하고, 또 비타를 등하교시킨다. 그리고 우유가 인간의 손에, 그리고 레일 위에서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라는 레일도 미나를 향해 돈을 건네며 순응을 요구한다. 신의 뜻이라며 항소하지 못하게, 레자와 같은 책임자들은 사라지고 미나와 유사한 지위에 놓인 경비원이 그녀의 질문을 대신 받는다. 재판관들과 다른 의견, 레일을 벗어날 의견이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또 우유에 값이 매겨지는 것처럼, 모든 것을 돈으로 보상한다. 바바크의 목숨값, 무고에 대한 죗값은 한 마디 사과도 없이, 그저 싸늘하게 배상금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레자 또한 신분을 숨기고 미나 곁에서 빚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내어주고, 집을 알아봐 준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생겨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나는 생산 과정에서 불량인 우유를 점검한다. 그리고 미나 또한 이슬람의 관점에서 눈에 띄는 ‘불량’이다. 신의 뜻으로 순응해야 할 것을 굳이 들춰내는 자, 그리고 미혼모로서 말이다. 전작에서처럼 죽음은 변화를 불러온다. 누군가의 부인은 미혼모가 되어버리고, 심지어 그것은 전작에서 남성으로서 비교적 주체적으로 여정을 떠나던 것과 대비되는, ‘수동적이고 강제된 변화’다. 미나는 미혼모로 전락하자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집주인의 아내가 납부 일자를 미뤄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배상금과 레자가 준 돈으로 집세를 마련하니, 집에 외간 남자를 들였다는 명목으로 돈이 있어도 퇴거당한다. 또 바바크의 동생은 비타의 양육을 문제 삼아, 미나와 수계혼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성차별적인 퇴거와 수계혼을 법이 비호한다. 그녀는 겨우 수계혼을 하지 않고, 비타에 대한 양육권을 지키며 재판에서 승리하지만 그것은 레자의 연줄, 즉 남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여성은 돈이 있어도 그녀들에게 불리한 법의 명령에 쫓겨난다. 하지만 여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레일에서 이탈한다. 신의 뜻으로 순응하라는 당국의 명령을 거부하고,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또 용서한다. 영화에서는 책임 당사자들이 신분을 숨기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살인 피해자의 아내가 미나에게 나타난다. 자신도 슬프지만, 누명을 써서 상처를 받은 미나에게 마땅한 책임을 지러 온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미나 또한 용서라고 보긴 어렵지만, 최소한 레자에 대한 복수를 그저 상상으로만 남겨둔다. 국가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 또 불완전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사람을 죽이는 레일에 올라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들은 레일에서 이탈하고 길을 떠난다. 이렇게 불완전하기에, 또 레일에서 이탈했을 때 서로 돕고자 우리는 연대한다. 레일에서 이탈하는 자는 여성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나는 여성임과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하다. 우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그녀는 해고된다. 즉 권리를 찾기 위해 레일에서 이탈하면 위험부담이 뒤따른다. 레자도 마찬가지다. 사형 선고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예 이를 외면하는 레자는, 미나 곁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여성이자 미혼모에게 정의로운 판결이 나올 수 있게끔 뒤에서 조력한다. 연대는 불완전한 판단을 보다 성숙하게 성장 시켜 준다.  


그것은 곧 악천후를 헤쳐나가는 일과 같다. 징병된 레자의 아들 마이삼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레자는 이에 대한 충격으로 쓰러졌고,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거센 밤에 미나는 그를 위해 길을 나선다. 비가 시야를 흐리고 천둥이 굉음을 자아내며 모든 것이 혼탁한 밤, 하지만 그 어둠에 조금이라도 빛을 쐬는 것이 바로 연대의 힘이다. 이를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 영화에서 밸런타인데이가 언급되고, 이를 통해 사랑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또 레자는 더러운 동물이라고 치부하지만 미나는 애완동물이라고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연대의 시작이다. 미나와 비타에게선 바바크의 빈자리, 그리고 레자에게는 마이삼의 빈자리가 공허하다. 이러한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우며 미나와 비타에게 레자는 소풍과 참배를 함께 할 수 있는 삼촌이 되어주고, 레자에게 미나는 고혈압으로 관리가 필요한 자신을 보필해주는 조력자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회백색 세계, 건조하고 삭막한 세계에 비로소 원색이 입혀진다. 레자에게 호감을 느낀 미나가 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 남편의 자리를 혼자서 메우느라 자신을 돌볼 틈이 없던 그녀가, 비로소 제 감정을 둘러보며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진실이 탄로 나자 유지될 수 없다. 영화는 바바크의 누명과 레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극, 이에 따라 진실이 드러나는 극으로서, 거짓과 진실의 관계를 비추는 장치를 수놓는다. 비타의 설정이 가장 대표적이다. 비타는 청각장애인이다. 미나가 임신 당시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가 장애를 얻었다고 한다. 비타는 TV와 영화를 좋아한다. 반면 현실의 학교를 싫어한다. 일과 공부, 그리고 선생님도 싫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낙제한다. 영화의 후반에 비타가 학교를 싫어하는 이유인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하지만 비타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비타는 들을 수 없기에, 미나와 레자가 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없다. 둘이 정면으로 나누는 대화에서 비타는 측면으로 몸을 틀어 이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가시화한다. 한편 미나는 아빠를, 그리고 레자의 아들에 대한 진실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죽음이란 진실을 털어놓기 두려운 미나는 거짓말을 한다. 이후 비타는 미나의 거짓말을 학교에서 똑같이 읊을 뿐이었다. 그것이 부정당하는 것 때문에 비타는 학교에 가기 싫었으랴. 그래서 죽음이 없을 수 있는 세계,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있는 세계인 TV와 영화로 점점 더 빠져들지 않았을까.     


미나와 레자의 관계가 이어지지 못한 것도 그들의 관계는 현실이 아니라 영화와 같은 달콤한 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말, 그리고 위선과 현실은 관계 맺을 수 없다. 영화에서 강조되고 반복되는 ‘닫힌 문’, 그것은 레자와 마이삼의 관계를 가시화할 때 사용된다. 마이삼은 판사라는 신분을 미나에게 털어놓지 않는, 그렇게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레자를 경멸한다. 거짓된 아버지를 향해 언제나 문을 세차게 닫는다. 그렇게 단절된 부자관계, 그래서 레자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이 전달돼도 그 이상의 정보, 아들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그의 귀로, 그를 통해 감상자의 눈과 귀에 매개되지 않는다. 거짓에서 진실이 탄로 나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던 상대방은 사라진다. 그래서 기존의 관계는 단절된다. 레자도 홀로 남고, 미나와 비타도 떠나간다. 그렇게 쓸쓸하고 비관적으로 마무리되지만, 마냥 절망적이지는 않다. 거짓을 강요하는 레일 위에서 조금씩 이탈하려고 한 서로, 바바크의 1주기 때 동행 하며 진실을 직시한 레자, 그의 진실이 까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에 살인으로 맞서지 않는 미나 때문에 말이다. 이러한 결말이 부부 감독이 비추는 현실적인 세계를 조금은 바꿀 수 있는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본 작품은 사형의 해악을 다룬다. 그것은 바로 영영 적막으로 사라져 진실을 항변할 수 없고, 또 되살아날 수 없어 삶을 돌려받을 수 없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사형의 사악함이다. 이란에서 매년 적지 않은 수가 사형으로 사망하는데, 과연 그 무수한 사람 중에서 무고한 사람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통해 말이다. 이러한 부조리와 증오로부터 우리는 관용을 건져내야 한다. 영화는 진실을 비추기도 하지만, 연대의 힘을 보여주며 이슬람이 창시되던 당시에 필요했던 정신, 바로 약자와 빈자들에게 부를 재분배하고 이를 통해 공평한 공동체를 이루려 하던 본령을 환기한다. 이렇게 두 부부 감독은 이란의 사회 문제를 직시한다. 모함마드 라술로프가 떠오르기도 하고, 또 서서히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는 아쉬가르 파라디를 연상케도 하지만, 그들만큼 치밀하거나 긴장감 넘치거나 매끄럽지 않다. 연출에서 인상적인 구석들은 보이지만 예술로서 좀 더 치밀한 형식에의 고찰이 필요했고, 더욱이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면 좀 더 삶에 녹아든 친밀함이 엿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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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212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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