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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3. 2022

카를라 시몬, <알카라스의 여름>

살기 위한 땅, 그곳에 사는 사람들

카를라 시몬(Carla Simon), <알카라스의 여름>(Alcarras) 

- 살기 위한 땅, 그곳에 사는 사람들     

“땅은 어느 누구에도 속하지 않으나, 그 열매는 만인의 것이다.” -존 볼-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그리스 신화의 가치는 오늘날이 따라올 수 없는 풍요로움이라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외적인 일의 진행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내적 원천에서 흘러나온 변화무쌍한 환상의 세계를 신화에서 창조했다. 융에게서 환상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한때 현실적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성이 타당했고 이를 순수한 유아처럼 바라본다. 이러한 특징은 그리스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신화가 민족의 유아기적 정신생활을 보존한다. 인류의 유아기적 시절, 동서고금을 막론한 고대의 신화에서 대지는 풍요의 원천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이아는 하늘을 낳고 바다를 낳았으며,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잉태하고 출산한다. 또 요정 엘라라가 제우스의 아이를 가졌을 당시, 요정의 자궁이 감당 못할 정도로 신의 태아가 크게 자라나자, 가이아는 제우스와 엘라라의 아이인 티티오스를 대신 품었다. 땅은 절대적으로 자애롭고 풍요로운,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도 그렇다. 그녀의 관장 하에 인류는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 결실을 본다. 하지만 작금의 인류는 이러한 본원적인 시선으로 대지를 바라보는가, 아니면 불순하게 바라보는가. 땅과 그 땅의 자손들을 불순하게 여기고 규정하지 않는가. 대지는 우리에게 식량을 내어주고 주거를 제공해주는 어머니인가, 아니면 부를 증식하기 위한 수단인가. 카를라 시몬의 신작 <알카라스의 여름>에서는 계산적인 어른의 시선이 아닌, 유아적인 시선으로 대지를 바라본다. 대지는 그들에게 풍요롭고도 토실토실한 복숭아를 안겨다 주는 원천, 하지만 이러한 대지의 본질을 무시하는 자본의 물결, 외부의 압력이 카탈루냐의 땅을 덮쳐온다. 카탈루냐 중에서도 세그리아 지방의 알카라스에서 말이다.     


1986년 바르셀로나 태생의 카를라 시몬은 스페인의 청년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자전적인 유년 시절을 투영한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라는 작품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본 작품에서 그녀는 연출로 1983년의 자신을 구현한다. 거칠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현실과 유사한 형식을 구축하고, 어른들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 우러러봐야만 했던 아이의 낮은 시선을 구현한다. 이러한 연출을 바탕으로 카를라가 바라보는 것은 어린아이의 눈이 순수하게 증명하는 당대의 역사다. 프리다의 눈에 조부모들은 가톨릭을 믿고 있다. 노인들이 도시에 거주한다면, 사망한 친부모 대신 프리다를 보듬는 젊은 외삼촌과 외숙모는 전원으로 향한다. 가톨릭을 믿는 팔랑헤주의자들이 머무는 도시, 반면 68혁명에 참여한 진보주의자들이 향한 전원의 공간성을 어린아이는 설명할 순 없지만, 대신 그 사실을 가장 순수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프리다의 시선을 통해 진보적인 청년들이 팔랑헤주의자가 득실거리는 도시를 떠나 전원에서 본인들만의 도그마를 실천하고 건설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대의 청년들이 과연 기성세대, 우파를 전적으로 극복했을까? 시골 주민들의 에이즈 공포와 프리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혈육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그들 또한 기성 정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부모의 잔재가 드리워져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아이, 청년은 성장하는 사람이다, 오래된 가톨릭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노인들과 다르게. 프리다의 마음을 모르는 외삼촌과 외숙모는 마냥 프리다를 심술궂은 나쁜 아이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들을 거울처럼 비추는 프리다를 통해 스스로의 허물을 마주하고, 청년 세대는 반성하고 진보하며 프리다의 진심을 마주한다. 또 어른들에 의해서 울거나 투정 부릴 수 없는, 늙은 아이가 되어버린 프리다, 하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성숙한 가정환경을 외삼촌 일가가 가꾸며, 프리다도 감정을 내색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을 향해 도약한다. 그것이 팔랑헤주의자들이 만든 ‘집’을 반성한 진정한 청년의 ‘가정’이고, 인류가 솔직한 길이다.     

 

또 카를라는 아이들의 행동이나 선/악이 결코 선천적으로 발원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어른들의 차별, 에이즈에 대한 공포로 프리다를 쉬쉬하는 시선이, 프리다가 외부에 불만을 품어 퉁명스럽고 심술궂게 행동하는 원인이다. 또 프리다가 담배를 피우는 척, 그리고 화장 놀이를 하는 것은 명백한 어른들의 모방이다. 아이들의 시기와 질투, 그것은 곧 거울인 아이들이 어른을 모방한 것이다. 카를라는 아이의 눈에 비친 당대의 정치, 혐오, 혈육 주의를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그 어떤 설명보다도 더 투명하게, 추상에 가깝게 이를 바라본다. 카를라에게 아이의 눈은 세상을 그 어떤 눈보다 순수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망원경, 이를 통해 자신의 부조리와 마주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현재의 아이 상태를 넘어 어른이기를 상상하는 아이들의 창조력은 현실 너머의 희망이나 꿈, 가능성을 환기한다. 그리고 최근 공개한 단편, <레터 투 마이 마더 포 마이 선>에서는 자신의 임신 경험을 영화화한다. 카를라는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가 만삭의 상태로 찍은 누드 사진을 발견한다. 이윽고 카를라는 똑같은 구도, 배경으로 어머니를 재현한다. 카를라는 탄생·번영을 위해 어머니로서 반복되는 여성을 고찰한다. 항상 기록되고 남겨진 것은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는 등 이타적이고 생산적인 가족들의 편린, 자신은 늙어가며 후손에게 젊음을 전해주는 노인들의 주름이다. 필름을 활용한 카를라는 흡사 빅토르 에리세의 환상적인 황금빛 조명에 필적하는 경이로운 미장센을 선보인다. 그러나 여성이 황홀한 어머니에만 그치는 것과 달리, 남성은 항상 항해사로 기록된다. 그래서 기록되지 않은, 어머니 이전의 여성을 '픽션'으로 승화한다. 그렇게 제 삶을 이어가다가 어머니가 되어 딸에게 제 삶을 물려주고, 그 딸은 다시 제 삶을 유희하다가 어머니가 되는, 고통스러우면서도 폭죽놀이와도 같은 임신, 출산의 숭고를 카를라는 시적으로 승화한다. 나로 살다가 땅으로서 피워내고,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다시 땅이 되어 무언가를 낳으며 ‘어머니 대지’의 속성을 환기한다. 이러한 작품 세계를 이어온 카를라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순수한 아이들의 시선, 그리고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레터 투 마이 마더 포 마이 선>에서 주목한 어머니 대지, 전원의 장소성을 다시 탐구한다.    


2022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카를라의 신작,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그 순수한 눈망울이 끔뻑끔뻑 바라보는 것은 바로 ‘어머니 대지’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 그중에서도 이전 작과 가장 달라진 연출부터 살펴보자.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영화의 시점은 프리다의 낮은 눈,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동공에만 국한되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은 프리다에 의해서 매개되었다. 하지만 본 작품은 다르다. 프리다의 시점에서 선형적으로 전개되던 전작과 달리, 본 작품에서는 알카라스에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시점을 교차편집으로 복잡하게 이어낸다. 이는 단편 <레터 투 마이 마더 포 마이 선>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 딸과 어머니를 교차하며 서로를 통해 자신이 망각한 것, 잃어버린 것을 반추하던 시도에서 비롯하듯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서 아이들이 보는 것과 어른들이 보는 것, 그리고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가 느껴진다. 이리스의 아빠, 키메가 바라보는 것은 당장 ‘수확의 대상’으로서 복숭아밭, 이와 동시에 할아버지가 계약서를 남기지 않아서 떠나보내야 할 복숭아밭, 그리고 본 땅에 ‘고용할 흑인 노동자’들이라면, 아이 이리스의 눈에 비치는 것은 ‘펼쳐진 것 너머 상상의 세계’다. 지금 여기에 없는 우주, 2차 대전 당시를 상상한다. 키메의 시야가 제한적이고 불가능하게 된 과거를 소환한다면, 이리스의 시선은 현실 저 너머의 가능성과 여지를 상상하며 희망적이다. 포크레인에 올라타서 솟아오른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의 시선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영화는 분명 교차편집이긴 하지만, 이로써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눈과 귀를 열고 있는 감상자에 그친다. 왜냐하면 영화 속 식구들은 말이 없거나, 입을 열더라도 독단적이거나, 귀를 닫아서 싸움이 나기 일쑤다. 분명 교차편집은 고립된 개인이 아닌, 이어지면서 구성되는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 ‘가족’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실제로도 손주들이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독단적인 키메 대신 여성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끼리 노니는 과정에서 서로 이어지는 교차편집의 당위성이 이해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살벌하게 통제하고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독단적인 태도, 카탈루냐의 가족을 분열시키는 침입에 의해, 자유가 불발된 가족은 다만 형식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영화에서 분명 하나의 집, 하나의 대지에 다수의 사람이 복작복작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인상을 풍기고, 교차편집 자체도 이들의 관계에 따른 자연스러운 이어짐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식구들 간의 감정 자체는 따습다.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모두 모인 점심 식사에서 자유롭게 일상을 얘기할 때 이들은 화기애애했고, 영화의 교차편집도 서로의 시선과 입, 그리고 귀가 교차하며 유기적으로 오고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로운 대화에 땅 얘기가 끼어든다. 할아버지는 구두 계약한 사항을 서류로 남기지 않았고, 키메는 복숭아밭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며, 나티는 그냥 땅을 팔고 태양전지판을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발화들은 마찰을 일으키고 이내 곧 입을 틀어막아 점심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그저 형식적으로 바비큐를 건넨다. 서로는 속내와 감정을 숨기고, 대신 뻣뻣하고 부정직한 얼굴로 이어질 뿐, 그 이상을 교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뻣뻣한 교차편집, 이를 비롯한 형식적인 가족 상태에 체념하지 않는다. 카를라는 연출에서 청각을 강조한다. 어찌어찌 식사를 마치고 이후 물놀이를 즐기고 실내로 들어오니, 할아버지의 손주들이 장기자랑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노래다. 장기자랑 이전, 할아버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노래를 어린 자손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주목했고, 이제는 자손들이 귀로 들은 것을 입으로 말하고 할아버지가 이에 화음을 얹으며, 여기에 감동한 다른 식구들의 귀와 눈길이 이어진다. 또 밤에 글로리아와 키메가 술에 취해 얘기를 나눈다. 이윽고 며칠이 지나 키메가 글로리아의 말을 듣지 않음에 가족 분위기는 포악해졌지만, 기타를 들고 술을 마시던 당시에는 남매 간 하하 호호 웃음꽃이 피었다. 서로의 입에 귀가 관용적이었다. 그리고 이리스와 마리오나는 잠이 깼다.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입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귀가 열려 있었고, 이를 위해서 잠에서 깨어난다.     


타인의 말을 수용하며 태양전지판을 극단적으로 반대하던 키메의 태도가 조금은 말랑말랑하게 느슨해진다. 이러한 가능성을 위해서 서로의 귀는 각자의 발화에 열려있고 깨어있어야 한다, 침묵과 도외시 대신에 진실한 교차편집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서로를 관용하는 존중 아닐까. 다만 들었을 시에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는 키메의 지시, 할아버지에 대한 험담은 반대로 단절되어야 한다. 로제르는 강제로 장래를 규정하려는 키메의 지시에서 항상 떠나고, 마리오나는 할아버지가 험담을 들을까봐 문을 살포시 닫으며 상대를 존중한다. 영화에선 이러한 말소리, 노랫소리 외의 청각도 강조된다. 바로 도입부의 바람 소리와 날벌레 소리가 그렇다. 영화의 도입에서는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의 소리와 흩날리는 풍경을 롱숏으로 포착한다. 그 풍경은 이윽고 가족들이 이별해야 할 알카라스의 정경이다. 그리고 본 알카라스에 사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모두 핸드헬드로 포착한다. 어디서 불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 소리, 그러한 자연의 소음처럼 자유분방한 카탈루냐인들의 움직임은 이러한 청각을 시각화한 듯한 핸드헬드로 표현된다. 이를 1차적으로는 카탈루냐 외부의 개입, 2차적으로는 이에 대한 반발로 원리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는 키메에 의해 방해받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드헬드로 포착되는 카탈루냐인들은 댄서이고 농부이며, 아이들처럼 우주비행사다. 축제에서처럼 드랙퀸일 수도 있으며, 작물은 유통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유롭게 먹을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로 규정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흔들리며 유희한다. 가족과 알카라스의 복숭아밭의 이별은 자의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에는 일반적이었던 구두계약의 허점을 이용한 타율에 의한 추방이다. 이후 가족의 복숭아밭이 파괴되면 그 자리에는 태양전지판이 설치될 예정이다. 가족들은 산들산들 움직이던 복숭아밭의 나뭇가지, 나뭇잎들 대신,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태양열 패널에 의한 딱딱하고 삭막한 삶을 이어가야 할지다. 이러한 사물들이 자유로운 카탈루냐인들을 고정하여, 오직 ‘관리자’로 규정할지다. 그 이전까지 순수한 자신의 요구, 그리고 땅과 소통하며 농부가 되었던 이들은 외부에 굴종하는 사람들로 전락한다.      


이런 멈춘 사물들이 즐비하기 이전, 마리오나와 로제르는 춤을 춘다. 이리스와 파우, 페로 쌍둥이는 예상 불가능하게 이리 튀고 저리 튄다. 어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서 기어코 사고를 친다. 이러한 자유분방한 이동과 움직임을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처리한다. 태양열 패널이 설치되는 풍경은 미동이 적다. 설치될 순간만 잠시 움직이고, 그 이후에는 어떠한 미동도 없이 그저 부동할 풍경, 하지만 복숭아밭에선 항상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수확의 적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가족들과 인부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이에 따라서 핸드헬드는 더 생동감 있게 박동한다. 핸드헬드로 포착된 숏은 분명 감각적이다. 쿵쿵거리는 힘이 전달된다. 하지만 이렇게 핸드헬드가 동원돼도 본 작품의 형식은 마냥 역동적이지 않다. 핸드헬드에 카메라 워킹이 동반될 때는 역동적이지만, 대신 영화 내내 카메라는 대체로 정지해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영화는 채도와 명도가 낮아서 어둡기에 더 삭막하게 느껴진다. 알카라스의 색채 자체는 매우 다채롭다. 더욱이 16mm 내지는 35mm 필름으로 촬영된 듯한 본 작품의 매체적 특성 상, 명확하게 윤곽을 강조하기보단 다채롭고도 뿌옇게 색감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태양전지판이 가족들이 누려야 할 빛을 모조리 흡수하듯, 영화는 화사하면서도 어둡다. 더욱이 복숭아밭에서의 여름이 이제는 기억으로 전락하리라는 것을 동시대적인 디지털이 아니라, 과거에 상응하고 선명하지 않으며 투박한 필름으로 보여주듯, 영화에서는 생명력과 음산함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 전원의 삶은 분명 자유롭다. 할아버지는 구두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피뇰 아들의 집에 방문하고, 마을에 가서 대책을 강구하지만, 그곳은 자연 및 전원보다 법의 족쇄가 더 빽빽하다. 변화는 없다. 그래서 도시나 마을에 비한다면 전원의 삶이 분명 더 자유분방하다. 영화는 자연 친화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나 더 자유로운 존재인 이리스, 마리오나, 로제르의 뒷모습을 핸드헬드가 결합한 달리 숏으로 뒤따라간다.      


하지만 달리 숏은 그리 길지 않다. 이리스는 키메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갖고 노는 폐차를 인부들이 가져갔다고 호소하나 아버지는 이를 철회할 능력이 없고, 복숭아밭을 거니는 로제르의 발걸음을 키메는 학업에나 열중하라며 항상 방해한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이들은 멈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키메도 피뇰의 계약을 무르고 싶은 것이 사실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번 여름의 수확에 그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카메라는 멈춘다. 그러나 차갑고 고립되었던 교차 편집이 따스하게 뒤바뀌는 것처럼, 카메라도 점차 움직이기 시작한다. 키메는 나티가 태양열 사업에 동조한 것을 알고 개울 너머로 걸어가서 불만을 토로한다. 로제르 또한 키메를 말리려고 뒤따라가는데 이를 달리 숏으로 포착한다. 본래 개울 너머의 공사 현장이나 차가 진입하는 모습을 그저 무기력하게, 고정된 카메라의 패닝으로 하릴없이 바라만 보던 가족들은 설령 뒤바뀔 수 없더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시도한다. 키메는 항의하고, 나티는 변화에 적응한다. 그러한 다가섬처럼, 영화의 클로즈업이나 롱숏의 대비에도 주목할법하다. 영화 초반, 키메는 아버지의 구두계약을 다그친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은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어찌 됐든 본인이 선택한 일, 그 책임에서 달아날 수 없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는 자식들도 클로즈업된 자신들의 착잡한 얼굴에서 멀어질 수 없다. 멀어지는 것은 이리스가 폐차를 되돌려달라는 요구다. 거기서 키메는 멀어진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음에. 아이들은 거의 항상 카메라와 밀착해서 포착된다. 청소년들은 꿈과 현실의 괴리를 겪지만, 어린이들은 아직까진 자신의 꿈과 환상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떠하든 제 상상이 더 지배적이다. 하지만 키메와 나티의 불화로 이리스와 친밀한 파우, 페로 쌍둥이가 떠나간다. 그것을 롱숏으로 처리한다. 부모에 의한 원치 않은 이별, 친구들은 나의 소망으로부터 저 멀리 사라져 간다.      


이러한 연출에 담기는 카탈루냐의 알카라스 이야기, 일단 아이들은 항상 가까이 있는 존재다, 자신의 상상이나 바람에. 청소년만 되더라도 이들은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좌절한다. 하지만 이리스는 쌍둥이 파우, 페로와의 이별만 제외한다면 어떤 현실에서든 바람을 실현한다. 아이는 폐차를 우주비행선이라고 상상하고, 할아버지의 2차 대전 이야기를 소꿉놀이에 반영하며, 어른들에게 수확의 대상인 과일을 순진하게 먹거나 서리한다. 크레인은 공사용이 아니라 놀이기구로 전락한다. 그렇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현실 원리에 좌우되지 않는다. 또 어른들에게 토끼는 사냥해야 할 과수원의 귀찮은 원수라면, 이리스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수영장에 차갑게 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물, 수영장은 있는 그대로의 부드러운 감촉, 시원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정직한 감각의 공간이라면, 어른들에게 물이란 곧 농업용 ‘수로’로 국한되어 감각을 이성으로, 액체인 물을 고체로 통제하는 노동에 국한된다. 어른들에게 복숭아밭은 수확과 부의 대상, 약속한 계약은 어떻게 무르거나 뒤바꿀 수가 없다. 어른들에게 세계는 하나의 사물에게 부여된 고정된 역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카메라는 정지할 수밖에 없는가, 그런 어른들에게 향해가는 아이들조차 일순간 카메라는 따라가는 것을 멈추게 되는가, 희망이 없다는 듯. 하지만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처럼 아이는 어른을 변화시킨다. 아이들은 홀로 토끼를 위로하지 않는다. 항상 노동력으로만 평가되고, 우정의 대상이 아닌 계약의 대상인 흑인 노동자와 함께 위로한다. 흑인 노동자에게도 토끼는 귀찮은 존재일 테지만 이리스의 애도를 계기로 달리 생각한다. 떠나온 고향에서의 추모 의례를 이리스에게 전달한다. 그 과정에서 흑인 노동자가 아닌, 자유로운 국민이었던 시절을 상기하리. 또 청소년인 마리오나, 로제르가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니 성인들도 따라 들어오고, 앞서 언급한 장기자랑처럼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 귀, 입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노동, 단절을 중단하고, 당연하지 않은 유희, 이어짐을 재개한다.      


이러한 영화에서 당연한 것 중 하나는 ‘사냥’이다. 앞서 도입부에서 키메는 이리스의 요구에서 멀어졌다. 이후 또 우리의 시야, 카메라에서 멀어지는 대상이 등장하는데 바로 ‘토끼’다. 농부들은 오토바이나 차를 타고 토끼를 몰아서 총으로 사냥한다. 어둠 속으로 내몰린 토끼는 앞선 경쾌한 청각과 상반되는, 총알에 맞아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갑게 몸이 굳는다. 우리가 온전하게 볼 수 있는 토끼는 농장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또 마리오나와 로제르가 키메를 위해 집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으는 '시체'의 상태다. 영화 속 알카라스 사람들도 그렇다. 일단 국가와 기업체,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도, 계약을 이용하여 그들의 땅과 노동을 갈취한다. 부당한 계약으로 가족들은 복숭아밭을 모두 내어주고 오직 집에서만 활동이 가능함에, 점점 더 몰아세워지는 토끼처럼 좁은 활동반경에서 둔탁한 움직임으로만 포착될 테다. 그렇게 갈취한 땅에 태양열 패널을 설치하기 위함일까, 이와 결탁한 유통업체는 과실 단가를 후려쳐서 농부들이 농업을 포기하게 유도한다. 그렇게 영화 속 토끼와 농부들은 어둠으로 몰아세워지고 사냥당해, 이윽고 자유롭게 알카라스를 거니는 존재가 아니라, 기업이 바라는 대로 멈춘 사물이 된다. 가만히 서서 공사 현장과 복숭아밭 파괴를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침탈은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본 작품은 스페인에서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카탈루냐의 알카라스에서 촬영되었다. 실제로도 스페인어가 아니라 카탈루냐어가 사용된다. 스페인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카탈루냐의 대지에서 살길 바라는 카탈루냐인들의 관점에서 <알카라스의 여름> 속 계약사기, 땅과 노동 갈취, 사물화, 사냥은 곧 카스티야에 의한 잠식에 상응할 수 있다. 외부에서 유입된 기업처럼, 카탈루냐 외부의 카스티야의 법과 자본이 그들의 목적을 규정하며, 이에 의한 농업 및 권리 포기는 곧 카탈루냐 정체성, 문화의 체념과 같다. 이러한 영화 속 또 다른 사냥은 바로 기성세대의 청년세대 사냥이다. 카를라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조부모 세대, 삼촌 세대의 이념이 각기 달랐고 그것이 아이에게 새겨지는 바를 고찰했듯, 본 작품에서도 부모로부터 이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영향 관계를 고찰한다.      


할아버지의 실수로 온 가족이 피해를 본다. 로제르는 농부가 되길 희망하는 눈치지만, 키메는 이를 반대하며 학업에나 열중하라고 말한다. 자식들은 나고 자란 알카라스에서 가능한 것과 바라는 자신을 땅과 상호 유기적으로 고찰하는 반면, 키메는 그 알카라스를 비관하고 부정한다. 로제르가 키운 대마초는 불태워지고, 허리가 아픈 아빠를 대신하여 일한 아들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마리오나는 고모 글로리아를 위해서 춤을 추려 했지만, 아빠와 고모의 사이가 틀어져 글로리아가 집을 떠나자, 마리오나는 춤추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리스에게서 파우와 페레를 빼앗아간다. 그렇게 선대들은 이후 세대들이 할 수 있는 폭을 좁힌다. 하지만 토끼와 인간의 육체는 모두 그들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농부들이 토끼들을 사체의 상태, 복숭아를 먹을 수 없는 상태로 규정하려 해도, 토끼들은 번성해서 농부들의 규정을 무시하고 ‘귀찮게’ 한다. 이렇게 토끼 같은 대상이 바로 아이들인데, 카를라는 그 아이들의 육체에 주목한다. 마리오나는 제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스스로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꾸민다. 마리오나와 로제르는 항상 춤을 추며 제 몸이 요구하는 흥겨운 움직임에 정직하다. 이리스는 농부도 되었다가 우주비행사도 되고 언니를 따라서 댄서도 된다. 그렇게 땅, 타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제 몸의 주인을 자신으로 정립하길 멈추지 않는다. 아이들의 육체는 유연하다. 반면 키메의 육체는 뻣뻣하다. 아버지의 실수로 어찌됐든 땅에 태양전지판이 들어선다. 땅이 변한다. 그러나 키메는 변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고 싸운다. 농부임을 유지하고자 함에, 복숭아밭의 마지막 여름이 다가올수록 몸은 뻐근해진다. 농부이고자 하는 자신의 몸이 변화하는 땅에 적합하지 않다는 듯 굳어만 간다. 키메는 아이들처럼 제 기분처럼 살지만, 그 기분은 현재에 도무지 적합하지 않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아집이다. 키메는 오늘날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가부장적 태도를 고수한다. 여성의 유산 상속, 여성의 농사일 참여 모두 부정적이다. 레즈비언이고 현재는 바르셀로나에 사는 글로리아는 오빠 덕분에 왜 고향을 떠났는지 다시 알게 됐다고 말하는데, 이처럼 키메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카탈루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와 동시에 글로리아와 돌로르스는 키메가 이정도로 꼴통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키메의 가부장적인 독단은 태양열 사업 유입을 기점으로 심해지고 있다. 사업에 반발하는 키메는 카탈루냐-알카라스에서 농부였고 가장이었던 자신을 더욱 극단적으로 고수한다. 외부에서 유입된 대규모 유통 기업들이 단가를 후려치고 농부들을 카탈루냐에서 떠나게 만들어도, 그럼에도 농부임을 어떻게든 유지하며 민족성을 고수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손에서 카탈루냐의 전통이라는 '달팽이 요리'가 완성되는 것을 보라. 물론 자신은 농부를 고수하더라도, 더는 농업으로 희망이 없는 알카라스에서 로제르가 농부가 못 되게 저지한다. 이렇게 포용력이 없는 키메는 언제나 독단적으로 TV를 끄거나 가족 구성원들에게 강제하는 사람, 이러한 아버지의 독선적인 태도를 닮아가는 로제르 또한 마리오나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여자들의 립스틱을 빼앗아버리고 마음대로 가출한다. 그렇게 구속에서 해방되나, 이렇게 맞이한 방종, 타인 지배는 카를라의 지향이 아니다. 귀를 닫는 독선적 태도는 곧 영화 속 이어지지 않는 교차 편집의 원인, 로제르를 걱정하며 애타게 찾는 돌로르스와 클럽에 있는 로제르를 편집으로 이어내더라도, 영화 내에서는 서로간의 간극이 심연처럼 깊다. 가장의 독선은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내 몸의 주인인 자가 곧 타인의 몸도 주인 삼는다. 이와 달리 영화는 주인과 주인의 동등함을 요구한다. 외박한 로제르가 돌아오고 키메는 아들을 보란 듯이 무시한다, 돌로르스는 그런 철딱서니 없는 두 남자의 뺨에 따귀를 때린다. 그간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 교차 편집된 서로는 상대의 몸을 느끼지 않았다. 건조하고 딱딱한 시각만 오갔고, 그 이상의 오감을 닫았다. 하지만 키메와 로제르는 똑같이 뺨을 함께 맞으며, 서로가 아플 것이란 걸 느꼈으리. 그렇게 로제르와 키메는 그간 불참한 시위에 함께 참석하고, 로제르와 마리오나는 키메의 눈물을 보고 복수를 결심한다. 키메에게 시위는 TV 속 허상처럼 송출되었고, 그래서 제 일이 아니라는 듯이 TV를 꺼버렸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체감한 키메는 다른 농부들의 의견을 공감하고 연대하여 시위에 참석한다.      


이후 항상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더 이상 농부일 수 없는 자신이 슬픈 걸까, 아니면 파괴될 복숭아밭이나 농부가 되고 싶은 아들의 미래가? 물론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음에 그 속내를 온당 가늠할 수 없지만, 눈물은 외부의 무언가가 매개되고 수용되어야만 흘릴 수 있는 자극으로, 비로소 키메는 외부와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카를라는 전원에 침투하는 거대 자본에 의한 고립, 세대 간의 단절로부터 ‘연결’을 회복한다. 그 연결이란 곧 아이들의 상상과 같다. 아이들은 현실, 그리고 나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것을 나 너머의 타인과 현실 너머로 확장한다. 수확에 사용할 상자를 기지로 사용하고, 칙칙한 현실을 복숭아를 빻아서 만든 물감으로 색칠하며, 자스민이나 포카혼타스가 된다. 청소년인 마리오나와 키메 또한 어른들의 요구에 등을 돌리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한다. 특히 키메의 요구에 염증이 난 로제르가 클럽에 가서 춤을 추는 모습이 ‘비규정적’으로 흔들리며 포착되는 것을 보라. 아이들은 카탈루냐인들의 민족성을 배타적으로 고수하는 독립이 아니라, 카탈루냐에서 뭐든 가능한 비규정적인 상태의 자유를 보여준다. 그렇게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표현함과 동시에,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할아버지가 지겹도록 얘기하는 2차 대전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손주들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피뇰 일가가 자신들을 구해준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게 배신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듣고 또 들으며 할아버지의 기억을 현재의 자신, 그리고 미래로 이어낸다. 할아버지의 삶은 부정되지 않고 아이들을 통해서도 살게 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내어 ‘친구를 위해서 노래’한다. 이를 위한 포용력은 여성에게서 도드라진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토끼 같은 이리스의 장난, 재잘거림, 리코더 연주 등을 모두 중단시키려는 독단적인 키메와 달리, 돌로르스는 아이들이 어떠하든 모두 포용한다. 마리오나가 아이스크림을 두 개씩 먹더라도 상대를 인내한다. 또 나티는 키메의 시선에서 배신자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와 동시에 변화하는 땅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사람이요, 글로리아는 키메에게 화해를 종용하며 그가 태양전지판을 다시 달게 만든다. 여성들은 땅처럼 자애롭고도 강인하게 품는다.     


이렇게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카를라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처럼 아이들을 통해서 반성을, <레터 투 마이 마더 포 선>에서처럼 상대방을 배에 품고 포용하는 여성성을 강조하며 카탈루냐의 진정한 자유를 논한다. 단절은 곧 들을 수 없는 것, 이리스가 토끼 사체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지만 반응이 없는 것과 같다. 단절은 곧 거대 자본과 전원, 또 세대 간으로 확장되었다. 죽은 것에 다름 아니던 서로, 그러나 이들은 연결된다. 서로에게서의 '멀어짐'은 중단되고, 연대하는 그들은 가까워져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이들은 이제 결말에서 복숭아밭의 파괴라는 똑같은 곳에 시선을 응집하며 하나로 모인다. 물론 그 이후 크레딧이 올라가는 영화의 결말은 롱숏, 사랑하던 복숭아밭과의 작별이다, 집만 보존된 허망한 풍경…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시위와 복수, 그 모든 저항은 여파가 적다. 하지만 영화 내내 사냥당해도 번식을 멈추지 않고, 자본주의적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토끼처럼, 사냥당하는 전원의 사람들 또한 연대하고 토끼처럼 귀찮게 군다면 그들의 자유로운 삶은 절대 중단되지 않으리. 기업이 복숭아밭을 에워싸더라도, 또 카스티야로부터 침탈당하더라도, 최후의 카탈루냐는 끝끝내 남게 되리. 카탈루냐의 농부가 되길 바라고, 순수하게 땅과 관계를 맺는 아이들로부터 희망은 분명 존재하리. 이러한 관계가 영화 바깥 감상자의 시야까지 전이될 수 있다면, 연결과 존중으로 비롯할 자유는 마냥 불가능한 것은 아니랴. 카를라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변해가는 알카라스의 삶을 기록한다. 교차편집이라는 신선한 시도가 카를라의 또 다른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리고 외부가 유입됨에 따라서 원리주의적으로 전통을 고수하게 되는, 이로써 양자 중 어느 것도 긍정할 수 없게 되는 카탈루냐 내 침탈과 민족주의적 딜레마를 '가족'을 비추며 첨예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외부에 침탈당하는 가족, 가장에 의해 획일화되는 가족, 그 어느 것도 긍정하지 않는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처럼 외부에 침탈당하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외부와 닮아가는, 그 독선적 태도를 다시 한번 반성한다. 이로써 자유로운 서로를 이해하는 연합으로서 가족,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적인 대지, 그 양자를 복권할 독립을 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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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03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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