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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31. 2022

요아나 하지토마스&카릴 요에이, <메모리 박스>

기억: 자신의 증거

요아나 하지토마스&카릴 요에이(Joana Hadjithomas & Khalil Joreige), 

<메모리 박스>(Memory Box) - 기억: 자신의 증거     

“이런 수많은 순간 중에서 나는 어떤 것을 날려버리고 어떤 것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까? 없다. 단 하나도 없다. 가장 괴로운 기억일지라도 지우고 싶지 않다.” -헤르만 헤세-

승리도 패배도 없는 것, 오직 폐허만 남기고 황홀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그저 관념·기억·추상으로만 전락시키는 사건이 바로 전쟁이다. 1940~50년대에 '중동의 파리'로 일컬어지고, 서아시아 내 금융의 허브로서 경제·문화적 중심지, 요충지로 성장했던 레바논의 베이루트가 맞닥뜨린 전쟁도 그랬다. 레바논 국민들은 세련되고도 도회적인 모습으로, 또 각자의 개성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가, 이후 20세기에 프랑스령으로 뒤바뀐 레바논, 그렇게 다른 국가들의 지배 속에서 이슬람, 기독교 각각의 종교로 강제 개종당한 레바논이었기에, 풍요와 번영 속에서도 왠지 모를 갈등의 씨앗은 내재하였다. 이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여파로 레바논에 적지 않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었고, ‘이슬람 국가로서 레바논’과 ‘기독교 국가로서 레바논’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국민이 격돌하였다. 사실 레바논 국민이라는 정체성보다, 기독교도/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던 각기 다른 종교인들은 레바논을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하기 위하여 중동의 파리를 이윽고 '가버나움'(신약에서 '나훔의 마을'이라고 명명되는 지명.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아스, 야고보, 요한을 만나 제자로 삼고, 이후 빈민 및 병자들에게 기적을 행하며 아가페가 무엇인지를 가르쳤으나, 정작 가버나움의 시민들이 믿음과 회개를 실천하지 않아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의 멸망을 예언했다. 사랑 없는 땅, 재앙뿐인 땅 가버나움은 레바논의 감독 나딘 라바키가 자국의 현실을 가리키기 위한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으로 황폐화한다. 그래서 중동의 파리로서 레바논의 베이루트는 거센 눈보라를 버티지 못한 채 이제는 기억으로만 간직되고, 내전 속 어느 진영에도 찬성하지 않는 개인들은 레바논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중동의 파리의 추억을 레바논의 부부 감독, 요아나 하지토마스&카릴 요에이 콤비가 <메모리 박스>에서 조심스레 꺼내 본다.      


1969년 베이루트 태생의 요아나 하지토마스와 카릴 요에이는 레바논의 부부 영화감독이다.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 또한 넘나드는 그들의 작업은 지질학적, 고고학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그들의 작업은 아주 치밀하고도 끈질긴 '추적'이 대두된다. 그들의 추적은 현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허구에서 시작하거나, 또 레바논 내전에 의해 길이 끊긴 역사를 어떻게든 따라가려는 시도다. 그들의 대표작 <나는 보고싶다>에서는 부부 감독의 예술론을 느껴볼 수 있다. 2008년 제작된 <나는 보고싶다>는 모큐멘터리다. 영화제에 게스트로 초청되어 레바논에 방문한 까뜨린느 드뇌브는 전쟁 후 2년이 지난 2008년에 레바논의 실제 현장을 보고 싶다고 관계자들에게 부탁한다. 이후 까뜨린느는 관계자 라비와 함께 익히 잘 알려진 베이루트를 넘어서, 전쟁의 피해를 직격당한 레바논 남부의 외곽으로 향한다. 까뜨린느는 본 작품에서 특정한 배역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모큐멘터리이므로 실제 까뜨린느 드뇌브가 아니라, 감독에 의해 설정된 까뜨린느 드뇌브를 연기한다. 그렇게 설정된 까뜨린느, 진실이 아니라 여전히 허구에 가까운 까뜨린느는 불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문화가 많이 유입된 레바논 국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 까뜨린느는 현실과 유리된 안전한 가상, 창문 안쪽에 존재한다. 하지만 선망의 대상은 창문 바깥을 "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레바논의 실제 풍경을.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사이, 현실과 밀접한 픽션인 모큐멘터리에서 가상적인 까뜨린느 드뇌브는 창문을 넘어 현실을 매개한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허구에는 곧 현실의 진실이 내재해야 한다. 이는 레바논 당국의 태도와 상반된다. 까뜨린느의 여행을 따라다니는 당직자들은, 촬영할 수 있는 장소와 촬영이 불가능한 장소를 구별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레바논을 전하지 아니하고, 외부에 전시되는 가상의 레바논을 포장한다. 촬영은 마냥 자유롭지 않고 승인/미승인으로 끊기기 일쑤이며, 이에 가상이 추적하고 이어주는 현실, 진실의 길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흙길’이다. 

     

이후 영화 말미에 까뜨린느는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레바논의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화제 파티에 참석한다. 휘황찬란하고 사치스러운 조명이 외부에 전시되는 레바논을 더더욱 포장한다. 하지만 까뜨린느는 영화제에 참석한 대상들에게 눈을 두지 않는다. 위선적인 영화제 관계자들이 아닌, 자신에게 현실을 매개해준 진실한 라비를 쳐다본다. 이렇게 가상에서 시작하여 진실, 현실로 나아가는 여정이 하지토마스와 요에이의 작업이다. 이들은 가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한편 레바논을 볼 수 없는 이유는 가상 때문만은 아니다. 일단 라비는 어렸을 때는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현재는 폐허가 된 레바논 남부의 고향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이 절망적인 디아스포라에 처함과 동시에, 디아스포라를 택하는 레바논 국민의 심리이랴. 하지만 그런데도 부부 감독은 봐야함을 역설한다.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폐허가 된 현장, 폭격당한 건물, 그 와중에도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국민의 현실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다. 또 전쟁 때문에 기억 속의 풍경으로 향하는 길은 끊긴 셈이다. 라비는 잔해만 남아있는 옛터에서 고향을 찾을 수 없고, 어떻게든 길을 추적하려 하더라도 거기에는 지뢰가 깔려서 위험하거나, 아니면 가상이 이를 방해한다. 하지만 부부 감독은 이 절망적인 어둠이 자욱한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그렇게 매끈하고 밝은 길로 재건되어, 현재에 다시 풍요로운 과거를 소환하고, 이로써 미래와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보고 싶은 진실을 추적하고, 보고 싶지 않더라도 봐야만 한다면 그 길을 어떻게든 이어가는 부부 감독은 이제 보고 싶은 기억, 이어내고 싶은 레바논의 추억을 <메모리 박스>에서 열어본다. 본 작품의 시작, 몬트리올에 눈보라가 내렸다. 이를 급하게 속보로 알리는 보도 영상이 인서트된다. 또 주인공 마이아는 친구 린과 함께 영상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다. 보도 영상과 더불어 화상 통화도 적나라하게 인서트된다. 현실을 가리키는, 예술로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매체들, 그것이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흐린다. 심지어 배역과 감독의 경계도 흐린다. 영화에서 인서트되는 일기, 사진 등은 모두 베이루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하지토마스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스테디캠을 활용한, 부드럽고 정제된 달리 숏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앞서 목도한 현실을 가리키는 푸티지, 현실의 질감과 흡사한 매체를 보고 난 이후에 너무나도 매끈한 달리 숏을 보고 있자니 가상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거친 숏들은 영화에서 아예 사라지지 않았다. 스테디캠을 이용한 달리 숏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거칠고 투박한 숏들이 드문드문 등장한다. 주인공 알렉스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사진 및 영상을 촬영한다. 사진작가가 꿈이었던 엄마 마이아의 관심 및 재능이 유전자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영화에선 현장에 참여하지 않고 관조적으로 포착하는 스테디캠을 활용한 부드러운 달리 숏과 알렉스가 스마트폰으로 조악하게, 하지만 현장감 있게 포착하는 핸드헬드 숏들이 교차된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보다 진실에 근접한다. 알렉스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회고하는 마이아, 레바논에서 몬트리올로 날아온 상자 속 기억을 들쑤시는 마이아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한다. (후자는 알렉스가 촬영한 것임이 불분명하나, 좁고 긴 화면비에 마이아의 손이 담긴,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불완전하고 흐린 숏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 숏들은 스테디캠으로 촬영된 숏과 대비를 이루는데, 스테디캠이 그녀들의 슬픔이나 고통을 애써 포장하는 장면에서 사용되며, 그 거칢을 은닉하는 부드러움과 안정이라면, 대상과 현장에 상응하는 핸드헬드는 그들이 느끼는 격정적인 정서, 충격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하지만 알렉스의 촬영만으로 영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마이아는 지금까지, 그리고 영화 내내 스테디캠이 만들어낸 안정되고 안온한 숏에 담긴다. 그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이자 알렉스의 할머니인 테타가 진실을 왜곡 및 외면하고, 이에 따라 안정적인 거짓을 보상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할머니의 거짓 환경에 딸과 손녀가 산다. 그녀는 마이아가 회고하려 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베이루트의 추억에서 악취가 난다며 굳이 생각하지 말라 억압하고, 레바논에서 도착한 '메모리 박스' 또한 열지 말라 부탁한다. 또 그녀의 남편은 전쟁에 비관하여 권총으로 자살하였고 마이아는 이를 목격하였으나, 테타는 이를 적군들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왜곡하여 영웅화된 망자의 그늘 아래서 살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성탄절, 이들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모두 안에 갇혔다. 하지만 눈보라 때문에 갇힌 것 같진 않다. 마이아와 알렉스는 외부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만큼, 격정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상자를 보려고 하지만, 테타가 이를 가로막는다. 즉 거친 진실에 의해서 갇힌 것이 아니라, 테타에 의해 갇혔다. 테타에 의해 강제로 잊고 살던 기억을 일부 떠올린 마이아는 눈이 잔뜩 쌓인 외부로 나가서 호흡하며 자신을 느끼지 않던가. 그 추위 또한 자신의 것이라는 듯, 우리는 바로 그 싸늘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기억을 상기하고 볼 수 있다, 봐야만 한다, 자신의 것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스테디캠이 위선적이었던 이유는 지금 여기에 자신을 있게 한 과거를 현재에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친 기억처럼 울퉁불퉁하지 않은, 또 과거-현재가 단절된 마이아와 달리 끊기지 않는 스테디캠은 너무나 가식적이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성탄 전야에, 갑자기 '쿵'하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테타가 만들어놓은 위선적인 평화를 깨트리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메모리 박스가 일으킨 소음이다. 지금까지 테타에 의해 마이아는 레바논의 친구 리자 하버와 연이 끊겼다. 하버 가족은 마이아를 계속 보고 싶어 했는데 테타가 이를 막았다. 마이아는 리자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테타에 의해 억압된 마이아 또한 알렉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맨 처음 기억을 살피는 것은 회고에 거부감이 없고 호기심이 가득한 알렉스다. 알렉스에게 마이아의 기억은 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이제는 메모리 박스 속 사진이나 콜라주, 일기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인, 멈추고 닫힌 과거다. 알렉스가 지니지 않은 과거는 외부, 바깥에서 현재, 나에게로 침투해오는 유형이다. 그래서 하지토마스와 요에이는 영상으로 과거를 재현하기보단, 필름 릴이나 사진 등을 인서트하여 현재와 다른 과거의 질감이 이질적으로 닥쳐오는 질감을 구현한다. 또 이를 스톱모션으로 간헐적인 움직임을 부여하여 간접 재현한다. 알렉스에게 마이아의 기억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인 허상과도 같은 것이기에, 운동성이나 생명력은 온전하지 않다. 또 마이아도 몬트리올로 이주해오며 테타에 의해 기억과 과거는 가상이나 헛것으로 전락하였기에, 한때 존재했던 삶의 운동성은 그리 쉽게 복권되지 않는다.     


그래서 움직임도 움직임이지만, 하지토마스와 요에이는 인서트되는 푸티지, 매체들의 가상성 또한 굳이 숨기지 않는다. 본 작품의 일반적인 화면비는 2.35:1로 레터박스나 필러박스가 감상자에게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서트되는 필름 릴, 사진, 영상 등에서는 둥근 모서리, 좁고 작은 화면비에 의해 검은 화면이 많이 노출되어 가상임을 명시한다. 또 필름이나 사진은 그레인이 자글거리거나 훼손의 징후가 있고, 심지어 마이아의 데이트가 담긴 필름 릴은 불탄다. 왜곡되고 변하며 잊히는 기억의 속성,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가상으로 전락하는 기억의 불완전함, 유동성을 매체로 상기한다. 또 이러한 매체 안에는 '중동의 파리' 시절 베이루트의 황홀한 추억들이 스며있다. 거기서 찬란하게 뛰노는 젊은 마이아와 라자, 그리고 리자와 친구들, 그런데 이들이 속해 있는 프레임, 즉 필름 릴이 불타서 녹아내린다. 이는 국민을 담고 있던 레바논, 베이루트라는 프레임이 전쟁에 의해 불타며, 이윽고 국민의 흔적까지도 지워냈던 비극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렇게 사라진 레바논에 의해 지금은 생생한 현장성이 아니라, 파편적인 증거, 가상적인 기억의 편린에만 의존해야 하는가. 그러나 알렉스가 마이아의 기억을 엿보며 항상 사진이나 문서로 인서트되던 수동적인 기억은, 이윽고 마이아가 자신의 기억을 능동적으로 소환하며 영상으로 회고한다. 마이아에게 메모리 박스의 기억은 당시에 살아 숨 쉬고 움직였던, 지금도 마이아의 무의식에서 현재를 함께 사는 꿈틀거리는 기억이기에 얼어붙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이다. 또 이는 스테디캠으로 포착된다. 그러나 테타가 진실을 은폐하며 거짓으로 꾸며낸 안정적인 스테디캠과는 맥락이 달라 보인다. 마이아에 의한 스테디캠은 더 이상 과거를 왜곡하거나 망각하는 거짓이 아니고, 오히려 과거를 생생히 상기하여 현재의 질감과 유사하게 ‘연속하고 이어내는’ 온전한 연결으로 보인다. 마이아가 기억을 회고하고, 이후 알렉스와 함께 재건된 베이루트에 방문하는 과정에서, 마이아의 기억 속 레바논의 풍광과 현재 레바논의 풍광을 중첩하고 이어주는 부드러운 '디졸브'가 사용된다. 풍경은 분명 다르다, 변했다, 그러나 연속되고 이어지고 함께 공존한다. 또 <나는 보고싶다>에 이어서 본 극의 결말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는 ‘어둠이 자욱한 터널’, 더는 거기에 갇히지 않고 현재와 외부를 매끄럽게 이어내며 스테디캠을 회복한다.      


터널에는 어둠이 가득하다. 이러한 어둠이 테타에 의한 스테디캠을 위선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하나의 실마리다. 어둠은 부드러운 이어짐이 아니라, 거친 잘림·단절에 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아의 현재와 과거를 어둠이 차단한다. 영화 도입에서 테타는 알렉스에게 레바논 전통 음식을 가르쳐준다. 그 과정에서 테타는 수동적 여성성을 강요하고, 알렉스가 아랍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불평한다. 환하게 드러나고 보일 수 있는 것, 그것은 테타가 요구하는 전통뿐인가. 이후 성탄 전야를 앞두고 엄마가 언제 귀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알렉스는 마이아에게 전화를 건다. 마이아는 깜깜한 방에서 연인과 정사를 나누고 있다. 전화하는 동안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연인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쉬쉬한다. 영화 중반부에 마이아의 부모가 딸과 라자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겨, 영화관에서 적발하는 등 딸의 사랑을 방해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념이 요구하는 여성성'은 훤히 드러날 수 있지만, '자신이 바라는 여성성'은 어둠 속에 은폐된다. 그리고 메모리 박스가 도착한 것을 보고 착잡해진 마이아는 기억이 쌓여 있는 어두운 지하실에서 담배를 태운다. 알렉스는 마이아의 일기를 보고, 엄마는 자신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그녀는 애연가였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던가. 여전히 그녀는 담배를 피우지만 이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아야만 하고, 담배 피우는 그녀는 빛이 훤해 보이는 곳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빛은 이어짐이다. 알렉스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메모리 박스가 있는 지하실에 손전등을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테타와 어둠이 은폐하는 기억을 빛으로 밝혀내어, 마이아와 알렉스의 기억, 과거를 이어낸다. 테타는 여전히 과거를 어둠 속에 묻어두라고 마이아에게 요구하지만, 딸은 이를 거부하고 빛이 있는 곳으로 향해 하버 가족에게 연락한다. 한편 부모의 빛은 폭력적이다. 자식들은 어둠 속에서만 솔직할 수 있었다. 현재의 마이아도 그렇고, 마이아 몰래 메모리 박스를 뒤지는 알렉스도 그렇다. 어둠 속에서 부모에게 적발된 마이아는 라자와 멀어졌다. 또 레바논의 국민도 그랬다. 어둠 속에서 포로가 되어 속삭여야만 했고, 행동을 숨기지 않으면 그들의 삶은 솔직할 수 없었다.     


즉 어떤 밝힘은 폭력적이다. 밝혀낸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이어내는 태도, 타자성을 일신론으로 축소하려는 자세일 때 조명은 폭압이다. 그래서 우리의 빛은 대상을 사랑하는 밝힘이자 이어짐이어야 하리. 라자가 마이아의 집 앞에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몰래 전등을 켜 깜빡거리며 자신을 알리고, 마이아도 전등으로 라자를 비춰 그를 확인한다. 이후 두 연인은 만나서 정사를 나눈다. 두 몸은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고, 각자의 촉각을 세우며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몬트리올로 향하는 배 안에서의 소등과 점등도 마찬가지다. 소등이 곧 드러나면 박해당하기 때문에 선택한 은폐라면, 점등은 드러나서 외부와 이어져도 괜찮다는 자신의 깨어남이다. 그렇게 레바논 국민들은 레바논을 등져야 했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빛 아래서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 이를 영화에선 세대론으로 진단한다. 범신론과 일신론의 차이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일신교는 자신을 중심으로 타인을 동일시한다. 자신이 믿는 하나의 원리가 옳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신교는 타자에 대한 관용이 있다. 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에, 그만큼 타자의 다름을 이해할 신들의 준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바논 전쟁을 종교적으로 요약하자면 일신교를 믿는 두 진영의 충돌이다. 테타는 그 시대, 전쟁의 산증인이다. 마이아와 알렉스 모녀는 몬트리올에서 지내며, 이제는 불어가 입에 더 익숙하다. 특히 사는 동안 내내 불어만 듣고 자라온 알렉스는 아랍어가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하리. 하지만 테타는 알렉스에게 아랍어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혀를 끌끌 차고, 마이아와 라자가 사랑할 당시에는 라자가 민병대에 몸담으며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달랐던 것이 못마땅했다. 라자가 속한 민병대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사망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이러한 자신의 믿음에 따라서 마이아와 알렉스를 통제한다. 그래서 전쟁의 당사자 조부모 세대는 선교자다. 이러한 영향에 따라 마이아는 개종당하며 자신을 부정당한 세대, 위아래로 단절하는 세대를 대표한다. 부모의 개입과 간섭, 왜곡과 부정 속에서 마이아는 자신이 사진작가를 바라왔다는 사실을 근 30여 년간 잊고 살았다.      


또 영화에서 마이아와 라자의 사랑은 각자의 분리된 프레임에 머물다가, 서로의 세계로 뛰어 들어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가상적인 스톱모션 사진에만 그쳤던 각자의 표상은 하나로 합쳐지며 영상이 되었다. 서로에게 움직임을 부여했다. 이들은 교조적이고 편협한 일신교를 지향하지 않았다. 관계는 둘이 하나로 뒤섞여 빙글빙글 회전하며 '신비로운 혼합색'을 만들었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합쳐졌던 두 남녀는 몬트리올로, 그리고 소련으로 찢어졌다. 그렇게 억압된 마이아는 알렉스에게 이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알렉스 세대는 궁금하다. 알렉스는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이다. 자아가 날로 커져만 가지만, 정작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 이로써 커지는 것은 자아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래서 의문을 자신과 닮은 마이아를 통해 해소하고 싶지만, 마이아는 이를 밝히는데 소극적이다. 그렇게 세대 간 단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역사를 알아야지 ‘자식인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는 법이고, 이를 후손에게 전해주기 위해 기억을 복기하며 ‘부모인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법이다. 알렉스는 마이아의 기억을 보며 엄마 또한 여드름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고, 친구 리자와 늘 재잘거리는 엄마의 청소년기가 자신과 별다르지 않았으며, 이렇게 어머니가 자신으로 살았던 기억을 확인하며 나름의 안정을 찾는다, 나만 별난 게 아니고 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구나. 마이아 또한 마찬가지로 알렉스에게 과거를 전해주는 과정에서 사진작가였던 자신을 되찾고, 이를 계기로 레바논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리운 옛 친구들과 재회 및 포옹하며 상대의 감촉과 온기를 느낌과 동시에, 그것을 전달받는 살아있는 나를 느낀다. 고립이 극복되어야 과거-현재는 이어지고, 타인뿐만 아니라 현재에 서 있는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기에. 그래서 알렉스는 마이아의 사진, 자료를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재촬영'하며 나의 기억으로 만든다. 이러한 기억은 남성들이 사망하고 끌려가는 전쟁으로 인해 할머니, 어머니, 딸만 남게 된 여성 공동체의 포용력에서 더더욱 가능할지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이어질 때, 알렉스의 촬영처럼 어제의 밤은 내일의 아침으로 이어지리니, 우리의 삶은 밝아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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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31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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