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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9. 2022

토마스 M. 라이트, <더 스트레인저>

나는 누구로서 숨을 쉬는가?

토마스 M. 라이트(Thomas M. Wright), <더 스트레인저>(The Stranger) 

- 나는 누구로서 숨을 쉬는가?     

“이것은 사실 그대로 하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기록물처럼, 시간과 날짜의 순서는 정확하게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에 관한 진실은 언제나 부정확한 법이다. 최초로 근접할 수 있는 것은 혼돈 상태와 복잡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딘 고디머-

나는 타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지인, 친구, 가족 등을 만날 때, "왜 저 사람은 저런 말을 하지?"라는 생각이 물씬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는 점차 이해해간다. 대화를 더 많이 나누고, 또 그 사람이 그런 생각, 행동을 하게 된 환경, 연유를 추적하며, 내 생각은 "그럴 수도 있지"로 뒤바뀐다. 그리고 처음에는 타자의 생각이 낯설어서 부정, 배태, 배격했지만, 이내 곧 마치 내가 그 사람이 된 듯 대신 항변하기 시작한다. "그럴 만했어요!"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또 타인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비결이 '다정다감함', 곧 타자와 부대끼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던가. 한편 그렇기에 우애가 깊은 대상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사람도 호모 사피엔스는 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다정다감함을 긍정하면서도 주의해야 한다. 살인 용의자를 수사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신뢰감을 쌓은 잠입 경찰의 딜레마도 그렇다. 그 딜레마가 <더 스트레인저>에서 펼쳐진다. 이를 연출하는 1983년 멜버른 태생의 토마스 M. 라이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배우로 활동하다가, 2018년 <어큐트 미스포춘>으로 데뷔하였다. 그는 데뷔작 <어큐트 미스포춘>에서 <차퍼>를 연출한 앤드류 도미닉, <스노우타운>을 연출한 저스틴 커젤처럼 호주의 '범죄 영화', '범죄자 전기 영화'의 계보를 이었다. (물론 그것이 호주 영화의 특징인지, 아니면 국제 영화계에서 프레이밍하는 호주 영화인지, 의심은 해야 한다) <어큐트 미스포춘>은 '아담 쿨렌'이라는 호주에서 실존했던 화가이자 범죄자를 다룬 전기영화로, 커젤의 <화이트타운>에서 살벌한 사이코패스를 연기했던 다니엘 헨셜을 기용하여, 속을 읽을 수 없는 아담의 낯설고 소름끼치는 피상을 직조했다. 이렇게 도미닉, 커젤 등과 유사한 작품 색채를 이어가지만 그들과의 차이로는 과거·역사에 주목하던 선배들과 달리, 토마스는 본 작품을 현재적, 동시대적으로 확장하여 '인셀' 문제를 진단한다는 점, 또 서사에 주목하여 문학적이던 선배들과 달리 영화 매체적 실험을 시도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토마스는 시대가 오늘날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통용되던 4:3 화면비를 채택하는데, 이는 무시당하고 소외되며 이성애자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갑갑함을 느끼는 성소수자, 인정받지 못하는 인셀의 심리 내지는 시야에 상응한다. 또 자기 소외, 자기혐오에 가득 차, 내적으로 빈곤한 인셀의 모호함을, 그의 정보를 제한하는 초반부의 구성을 통해 보여준다. 토마스가 고찰하는 인셀의 특징, 일단 그들은 현재의 사회에서 번듯하게 인정받지 못함에 반사회적인 폭력, 원시적인 무력을 찬동한다. 인셀의 전형인 에릭은 죽음, 사냥, 사격 등에 경도된 아담에게서 자신이 바라던 상을 본다. 이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타인을 헐뜯거나 깎아내린다. 에릭은 기자다. 그는 아담 취재를 하기 전에 총기사고로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어머니를 취재하였는데, 비극적인 사건을 비꼬았다며 프론트에서 한 소리 들었다. 또 지하철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동성애 혐오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등, 미천한 자신을 드높이고자 타인들을 비난으로 끌어내린다. 하향평준화로 동질화, 자기를 드높인다. 토마스는 에릭이 타인에게 집중해야 하는 장면에서 반대로 멀어지는 줌아웃, 자신의 권위주의적 인격(철학자 아도르노의 개념으로 권위주의적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는 권위가 없고 사회적으로 빈곤하기 짝이 없지만, 극우 선전과 사회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에게 환상적 특성, 고대적인 위대한 자아를 부여하고, 파시즘과 힘, 남성성을 숭상한다)에 매몰될 때나 아담에게 동화될 때의 줌인을 통해, 인셀의 공격성/방어성을 대비한다. 스스로가 빈곤한 에릭은 아담을 만나며, 그에게서 자신을 반추한다.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확신하고, 폭력적인 그에게서 자신의 공격성 또한 합리화한다. 한편 아담이 에릭에게 총을 겨누고, 오토바이에서 밀쳐서 떨어트리는 등, 상대는 멀쩡한데 자신은 몸에 상처가 늘어만 간다. 상대는 즐거워하는데, 에릭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에릭은 여러 상처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반면, 아담은 기소되고 암으로 죽어간다. 그렇게 다름을 인지하고, 자신이 선망했던 폭력의 해악을 느끼며, 자신에게서 아담을 부정·분리하고, 아담에게서 반추하던 자기 폐쇄적인 상을 탈피하며 일련의 포용력과 사교성을 회복하고 현실에 참여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에서 아담이 어머니를 향한 분노,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에릭의 심리를 추적하며, 어머니를 연적으로 삼고 아버지를 흠모했을 게이의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이성애적 구조에서 해소되지 못한 것을 호모포빅한 자기혐오, 자기소외의 근원으로 진단한다. 또 회화와 전기를 통해 예술은 죽고 사라지는 것들의 기록, 되감기, 반추임을 탐구한다. 즉 <어큐트 미스포춘>에서 에릭은 자신이 선망하던 상과 유사한 타인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에릭은 온전한 타자가 아니라 나와 동일시된 타인, 즉 ‘자신으로 호도된 타인’을 자신으로 여겼던 것인데, <더 스트레인저>에서 경찰이 용의자에게 신뢰감을 쌓게 되는 경위는 과연 온전한 타자를 이해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다정다감함일까, 아니면 경찰과 용의자 간의 어떤 유사성에서 비롯할까. 일단 영화는 유사성에서 시작하진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낯섦, 불일치에서 시작한다. 도입부, 울창한 산이 포착된다. 피터 몰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산이 익스트림 롱숏으로 숭엄하게, 이와 동시에 세부는 작고도 모호하게 포착된다. 이윽고 그 산에서 익히 날법한 바람 소리, 새 소리 등과 전혀 무관한, 공구가 작동되는 소음이 울려 퍼진다. 이후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산의 일부인 '숲'으로 카메라는 좁혀 들어가고, 그 숲의 일부에서 수색하는 경찰들이 풀숏으로 포착된다. 시각은 자연, 초록, 경찰들의 수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청각은 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흡'에 관한 시적인 문장이 들려온다. 상쾌한 공기를 들여 마신 이후에 필연적으로 내뱉는 것은 새카만 공기, 그것은 호흡한 사람의 스트레스와 고민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그 누군가는 산, 숲, 경찰들이 포착되는 시각에 속하긴 하는가? 그 나레이션은 헨리의 것으로 보이기에, 시각과 일치되지 않는다. 서로 불일치하는 시청각, 그렇다면 왜 영화는 이런 구성을 취했는가. 영화를 좀 더 살펴보면 헨리에게 '잠복수사대' 일을 제안하며 그에게 접근하는, 가명을 사용하는 경찰 마크는 자식 하나가 있다. 처음에는 우리의 선입견, 편견 때문에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머리가 길고 이차 성징이 발현되지 않아 곱상하고 예쁘게 생겼다. 그것이 마크 자식의 시각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정보였다.     


그러나 속단해선 안 된다, 이윽고 영화는 우리의 판단을 배반한다. 마크는 머리가 긴 그 아이를 '아들'이라고 호명한다.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도 집중해서 다시 들으니, 높고 경쾌하긴 하지만 여아에 비한다면 둔탁하다. 즉 아이의 성별이란 진실은 시각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청각의 진실, 양자 모두를 고루 파악해야만 대상의 진실을 확보할 수 있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 후반, 피터 몰리를 기소하기 위해 대규모로 팀을 꾸린 경찰들은 긴 시간의 잠복 수사 끝에 가명 헨리로부터 피터 몰리라는 본명을 끄집어내고, 그가 범죄를 자백하게 만든다. 청각은 그의 범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시각은 모호하다. 청각이 가리키는 과거로부터 현재는 몇 년이 지났고, 보이는 것은 조악한 CCTV 화질로 포착된 흑백의 헨리뿐 증거가 없으며, 거대한 롱숏은 진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이러한 영화에는 안개, 달을 가리는 구름, 밤이라는 '은닉'하는 시간성, 상징이 대두된다. 이렇게 시각과 청각이 합치되어야만 도출되는 진실, 그런데 시각의 부재, 모호함으로 그의 죄과를 명명백백히 규명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 시각과 불일치하는 소음 등은 수사의 난항을 가시화하는 형식이다. 수사 및 진실 규명이란 시각과 청각, 현재와 과거의 불일치 속에서 양자를 일치시켜 명쾌하게 만드는 작업으로, 일치하기 전까지는 따로 노는 두 요소가 심란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렇게 불일치하여 진실에서 까마득하던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겨우 가까워진다. 물론 영화 내내 인물을 포착하는 거리는 가까웠다. 거리감은 범죄자의 특성을 행동에 옮기고 과시하면서 이에 동화되어 가는 경찰 마크가 헨리를 향한 '친밀함', '가까움'에 상응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침투되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산은 너무나 멀었다. 그 산이 가까워진다. 정체를 알 수 없던 공구 작동 소리의 근원이 현재 경찰의 손임이 밝혀지고,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밀착한다. 이렇게 시각과 불일치하는 청각이 도드라지나, 이에 더해 영화 내내 도드라지는 '녹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단 녹음은 현재의 마크가 과거 자신과 얘기한 헨리의 진술을 듣는 것처럼,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크에게 자신의 음성이 제 입에서 나오지 않고, 비디오테이프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이 녹음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다. 라일렛은 증거를 기록하기 위해 녹음기에 입을 대고 발화한다. 그러나 마크와의 차이는 녹음기의 유/무, 그리고 마크는 자신이 녹음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녹음 음성이 현실의 음성을 대체할 때는 헨리가 마크의 말을 듣지 않고 차 안에서 나왔을 때, 이후 극의 중후반부에서 헨리가 마크의 허벅다리를 만지며 성감대를 자극할 때다. 타자에 의해서 마크가 말하게 되거나, 허벅다리를 만져주는 동성애적 욕망이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야 할 때, 자신의 타자화로서 녹음 음성을 사용한다. 이때 녹음 음성은 과거, 타자에 해당하므로, 시각은 현재의 마크를 포착하더라도 시청각은 불일치하다. 그래서 영화의 불일치, 모호함을 극복하는 과제는 마크와 경찰들이 헨리의 진실을 명확하게 수사 및 규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호해져가고 스스로 불일치하는 마크라는 자신을 되찾는 일 또한 포함한다. 영화는 시각/청각의 사용도 그렇지만 또 다른 형식, 바로 편집으로 불일치의 모호하고도 낯선 느낌을 가시화하는 것이 흥미롭다. 토마스는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내용 및 서사에 의존하지 않고, 영화라는 매체로 극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주려 하는 점이 성실하다. 다시 영화 초반으로 되돌아가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산, 숲, 수색하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카메라가 포착한 대상들은 비결정적이다, 유동적이고 모호하며 파악되지 않은 상태, 많은 비밀을 품고 있다. 그런데 유동적인 장면들이 갑작스레 잘리더니, 이윽고 견고한 건물이 담긴 숏으로 연결된다. 이후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제 신원을 드러내지 않던 수색 시퀀스의 경찰들과 달리, 중앙 구도에서 정면으로 포착되어 너무나도 명확한 헨리의 얼굴이 이어진다. 또 낮은 밤과 어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편집은 매우 낯설고 감상자를 당황하게 할 것이다. 숲에서 헨리가 있는 숏으로 이어질 만한 충분한 인과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피터를 수색하는 경찰들과 헨리로 둔갑한 피터의 괴리감에 상응하는 거칠고 생경한 편집이랴.     


헨리로 둔갑한 피터, 그는 버스에 있다. 밤에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폴을 만난다. 폴은 헨리에게 말을 붙인다. 폴은 오랜만에 살던 동네로 되돌아가서 집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이웃 크리스를 만났고 자신은 그를 알아봤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가 폴임을 부정했다. 폴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헨리에 의해 끊긴 이후 둘은 통성명하고 영화는 ‘도로의 평행선’을 포착한다. 서로 교차되거나 맞물리지 않고 달려 나가는 형국, 그것이 곧 폴의 이야기와 영화 속 수사 난항에 해당하지 않을까. 폴은 현재의 크리스를 인지하지만 크리스는 과거의 폴에게 갇혀있고, 경찰들 또한 과거 피터를 좇고 있지만 현재 피터는 헨리로 둔갑하여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이후 폴은 헨리를 불러낸다. 헨리는 폴을 잘 모른다. 헨리는 폴이 전 재산을 다 털어서 차를 샀을 거라 추측할 뿐이지 폴은 헨리에게 정보를 내어주지 않으며, 어제와 달리 오늘은 염색하고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정보를 주지 않음과 동시에, 과거의 앎을 현재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폴은 헨리가 자신에 대해 무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헨리는 폴이 불러서 나갔더니 대상이 마크로 뒤바뀌어 있다. 숲에서 헨리로 이어지는 모호한 연결은 피터가 헨리로 둔갑함에, 즉 변장한 범죄자에 의해 경찰들이 겪는 낯섦이었다. 반면 헨리가 피터임을 알아내고자 하는 경찰들은 그를 낯설게 하고 당황시켜 판단력을 저하하고 자신이 놓은 덫으로 유도한다. 그 당황함을 폴에 대한 모호함, 빛이 완연한 공간에서 어두운 공간으로의 극적 전환, 또는 그 반대 등의 '편집'으로 보여준다. 영화 초반 편집은 순차적이거나 인과적이지 않고, 또 전후가 안정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찰들에게는 피터로 연결되지 않는 헨리가 그렇고, 경찰들이 헨리가 속한 환경을 거칠게 차단하고 자신이 연출한 세계로 유도하는 이어짐이 그렇다. 헨리는 범죄자이긴 하지만, 폴이 염색한 것을 알아채고, 또 마크의 보풀을 떼어주는 등, 상대를 배려하는 세심함으로 호감을 산다. 자칫하면 경찰들이 헨리에게 말려든다. 그래서 헨리의 친화력에 말려들지 않고, 헨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하여 당황시킨 후, 본인들이 불안한 헨리에게 안정감을 주어 그의 호감을 사고 포섭한다. 헨리에게 가짜 신뢰를 주는 경찰들의 태도 또한 편집으로, 마크에게 믿음이 생겨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헨리를 차가 놓였던 흙길과 유사한 색채의 호텔로의 이어짐으로 보여준다. 헨리의 혼을 쏙 빼놓던 경찰들은, 이제 인과적인 목적지로 안내하며 불안하던 그에게 신뢰감을 산다.  


이렇게 폴과 마크가 모두 계획적으로 헨리에게 접근하고, 그가 피터임을 인지했다는 사실은 영화 절반이 다 지나서야 드러난다. 그리고 드러나기 전까지의 영화는 위태로웠다. 까발려지기 전까지는 헨리에게 호감이 있는 마크의 표상, 그리고 P28로 규정된 피터 몰리의 사건을 경계하는 라일렛의 세계가 서로 단절된 채로 교차 편집된다. 일단 '라일렛'이라는 이름을 헨리도 알고 있었다. 이를 마크가 궁금해하자 헨리는 예전에 일하던 곳이라 얼버무렸다. 사실은 P28을 수사하고 헨리를 심문한 경찰의 이름이 라일렛인데 말이다. 즉 감상자는 교차편집을 통해 헨리의 거짓말을 의심하고 라일렛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교차편집 된 바를 확인할 수 없는 마크는 진실을 모른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거짓말을 하는 헨리는 개신교 종파 중 '카리스마교'는 몸에 경련을 일으킨다며 이를 따라 하고, 그것을 보며 웃는 마크는 그를 '긍정'하며 헨리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다. 또한 마크가 헨리의 집에 가서 그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후 헨리가 마크에게 질문하여 마크가 음악을 듣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만, 그런데도 음악을 틀어 헨리의 의도대로 마크가 음악을 좋아하게, 즉 ‘자신처럼’ 규정한다. 이렇게 헨리만 바라보는 마크, 반면 영화에서 시청각을 고루 파악하는 진실 규명을 강조하듯, 라일렛은 헨리의 진술에만 매몰되지 않고 여러 피해자와 목격자, 현장을 교차 검토, 즉 다양한 매체, 시간을 확인하며 헨리라는 인물의 진실에 다가서며 ‘인상을 찌푸린다.’ 피해 사실을 나열하면서 울먹거린다. 즉 헨리만의 진술을 의심하고 부정하며, 하나의 주장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것을 취합해야만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선 긍정보다는 부정, 확신보다는 의심, 폐쇄성보다는 개방성이다. 그러나 마크는 헨리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그를 긍정하고 확신하며, 그의 치부를 지켜주는 폐쇄적인 환경에 매몰된다. 분명 마크는 헨리가 아니라 피터임을 알고, 그것이 잠복 수사임을 인지하지만 친밀함이 거짓을 압도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마크가 본명을 잊어버린 채로 가명을 사용하는 존재, 가명 이전을 말하지 않는 존재, 즉 자신의 근원이나 자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타인에게 휘둘릴 수 있는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크로서 범죄자 친화적인 주장을 한다.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다", "전과에도 불구하고 지켜주겠다"라며 말이다. 범죄자 친화적인 마크의 발화는 있지만, 마크 이전의 경찰, 본명으로서의 자신은 무엇을 주장하는지 영화에서 확인할 수 없다. 마크는 말뿐만 아니라 범죄자의 행동도 몸에 옮긴다. 신분을 은닉하기 위해서 차를 불태운다. 헨리처럼 포악하고 난폭하게 굴어서 앞차에서 교통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원을 노출할 수 없자 사고 현장에서 냅다 튄다. 마크가 헨리를 닮아가기 이전, 그는 아들과 함께 세안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아들은 마크의 손이 되어 이를 닦아주고, 반대로 마크는 아들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아들과 상호의존적인 존재, 그 상호의존적인 존재가 필요로 하는 손이 아들에게서 헨리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물론 그는 헨리가 위험한 인물임을 인지하고 있다. 아들과 숨바꼭질했을 때,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자 화들짝 놀라며 밤에 나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헨리는 아이 납치 및 살해 용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꿈, 솔직한 무의식은 마크가 헨리에게 의존함을 가리킨다. 가장 먼저 마크가 헨리의 제안을 거부하자, 즉 헨리를 부정하자 차가 전복되며 사고가 나는 꿈을 꾼다. 헨리를 부정하면 마크 자신도 죽는다. 이후 또 다른 꿈에서 마크가 경찰로서 감방에 넣어버린다고 겁을 주는데, 헨리가 이를 두고 호통을 친다. 헨리의 호통에 압도된, 경찰로서의 자신이 부정된 헨리는 깨어난다. 그러나 헨리와 자기 얼굴이 반반 뒤섞인 자신을 거울로 마주한다. 꿈에서 깨어났어도 또다시 솔직한 꿈을 꾼다, 자신과 헨리가 뒤섞여 있는 상태의. 헨리 또한 숨을 쉬기 어려울 때(헨리로 살다가 피터임이 까발려짐에 헨리로서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호흡법을 알려주는 마크를 통해 안정을 되찾으며 마크로써, 그리고 마크로서 산다. 즉 마크는 수사임을 인지하면서도 서로가 옴짝달싹 달라붙어있는 친화력 때문에 헨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마크는 헨리와 만나기 이전 자신을 잃고 잊어버렸다. 토마스는 <어큐트 미스포춘>에서도 그랬듯 줌아웃/줌인을 절묘하게 사용한다. 줌아웃은 심리상담을 받는 마크가 제 자신을 은폐하며 방어적 태도를 고수할 때, 헨리의 방에서 멀어질 때 사용된다. 내게서 멀어진다, 피터가 까발려지면서 헨리가 멀어지자 이윽고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반면 줌인은 헨리가 아닌, 피터 몰리가 인쇄되는 현장에서 사용된다. 용의자 피터의 혐의에 가까워지면, 헨리에게 동화되어 있던 마크는 멀어진다. 이후 마크는 헨리가 도주 위험이 있다는 소식을 차 안에서 듣는다. 몹시 흔들리는 차 안에서 그는 이중, 삼중으로 분열되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는 헨리에게서 멀어지며 발생할 자아분열인가, 경찰로서 본분과 마크로서의 우정 사이의 딜레마를 표현하는 연출인가. 헨리의 자백을 들으며 증거가 사라져서 잘됐다고 말하는 마크는 진심일까 거짓말일까. 도로를 포착하던 숏은 영화에서 한 차례 더 등장한다. 그러나 이제는 평행선이 아니라 차로변경을 유도하는 곡선이다. 폴과 악수한 헨리가 차로를 틀어서 경찰의 표상으로 진입하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타자로서 평행하던 둘은 하나로 뒤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마크는 진심으로 범죄를 재현하는 헨리를 포용하는가. 마크는 헨리와 만나기 이전, 마크 이전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가. 영화 막바지에 마크를 포착하는 형식은 디졸브다. 이전 숏이 다음 숏과 깔끔히 절단되지 않고, 포개지고 중첩되어 합성된다. 그렇게 덧씌워지며 변질된 상태에서 마크 혼자만 순수했던 상태를 복원할 수 있는가. 피터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천문학적 규모의 인력이 동원되는데, 마크에겐 자신의 진실을 복원할 그 시도가 감히 허용되는가. 그래서 토마스는 하나의 희망과 하나의 절망을 남긴다. 하나의 희망은 난감할 수밖에 없는 모호함, 불일치 속에서 끝끝내 진실에 ‘손을 드는’ 수색이 가능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영화 결말처럼 '숨을 쉬면서' 살고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자의적, 타의적 친밀함 속에서 스스로는 자신으로 사는지, 타자로 사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이에 다만 체념하고 숨만 쉴 뿐이라는 좌절을 말이다. 영화에선 나의 기대와 현실, 타자가 구분됨을 보여줄 때 '유리'가 깨지지 않던가, 아들과 존에게서 말이다. 그러나 결말에서 마크의 유리잔은 온전하게 보존된다. 그 유리잔은 타자를 보존하는가 아니면 나를 보존하는가. 신뢰와 우정을 얻는 과정에서 나를 잃지 말지어니. 이렇게 토마스는 두 번째 장편에서도 실화 범죄 영화를 선보이고, 친밀함의 부작용을 탐구한다. 비밀에 상응하는 낯설고 투박한 편집은 강점이나, 이러한 연출이 옅어지는 중후반부의 평탄함이 아쉽다. 그럼에도 그의 탁월한 영화 매체적 탐구는, 실화에 마냥 의존할 뿐인 동향의 선배 도미닉이나 커젤을 이미 넘어선 듯 보이며, 앞으로의 영화에 기대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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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29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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