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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6. 2022

산티아고 미트레, <아르헨티나, 1985년>

민주주의와 민주적 양식을 찾아서…

산티아고 미트레(Santiago Mitre), <아르헨티나, 1985년>(Argentina, 1985) 

- 민주주의와 민주적 양식을 찾아서…     

“나 자신은 선생님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학생의 학생이자 동시에 선생인 그와 같은 선생님의 학생이고 싶었다.” -페터 한트케-

1976년 아르헨티나의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자벨 페론을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가 재건 과정'이라고 허울 좋게 명명된 독재를 선포하였고,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반체제인사들을 반동분자로 낙인찍어 탄압한 정책인 '콘도르 작전'을 펼쳤다. 최소 9,000명, 최대 4만 5천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비델라에 의해 실종 및 살해되었다. 비델라 정권은 무식하게 힘만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물론 독재정 당시의 대통령인 비델라, 갈티엘리, 비노그네는 선전 정책 외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심각한 안보 및 경제 위기를 초래한 것이 사실이나, 그들의 배후에는 중남미의 사회주의 정권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뒷배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무능하고 사악하지만 그들의 죄과를 명명백백히 까발리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의 젊은 변호사들, 그리고 정의관이 투철한 청년들은 진상규명을 위해서, 1985년 당시에도 건재했던 독재자들에게 맞섰다. 산티아고 미트레의 신작, <아르헨티나, 1985년>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19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의 산티아고 미트레는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사를 장르적인 문법으로 연출하는 작업으로 유명한데, 이는 그가 각본으로 협업했던 파블로 트라페로의 영향으로 보이며, 트라페로는 미트레의 장편 데뷔작 <스튜던트>에 제작 지원도 했다. 미트레의 장편 데뷔작 <스튜던트>는 감독으로서 그의 포부를 선언한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과 주인공이 '학생'인 것처럼, 자신도 장편 데뷔하는 학생의 눈으로 영화-정치 및 현실을 탐구한다. <스튜던트>의 초반은 비전문 배우인 학생들의 생생한 반응, 행동과 전문 배우의 연기가 교차되어, 다큐멘터리-픽션의 어느 한 경계에 놓인다. 학생, 그중에서도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로크는 자신만의 표상, 신념을 갖추지 못하고 현실에 잠식된다. 그러나 학생도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감독도 성장하여 현실에 의존하던 영화는 어느새 자기만의 차원을 구축한다. 학생의 성장은 현실 참여적인 정치적 태도에서 비롯한다. 로크는 학교에 처음 등교했을 때, 정치적 양비론을 펼치고 마약을 흡입하며 '현실 유리'적 태도를 고수했다. 그가 막 입학 했을 당시 로크는 이방인처럼 소외되었고, 자신을 둘러싼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 습득에 그치는 교육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에 직접 적용하는 지혜 및 정치로 발전시키고, 손에 잡히지 않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권력을 모으고 관리한다. 헛것의 쾌락은 섹스라는 실제로 변한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학생임은 사라지고 정치인으로 전락하는데, 정치인과 다른 학생의 차이는 권력이나 조직 관리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학생으로서 배운 지혜를 신념으로 삼아 판단하고 반항하는 점이다. 로크처럼 정치적이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되, 학생의 태도로 갓 데뷔한 영화감독 미트레 또한 ‘영화다움’을 잃지 않는 것을 예술론으로 삼아 <폴리나>와 <7일간의 정상회담>을 연출한다.      


미트레는 학생이 맞서는 기존 현실을 묘사한다. <폴리나>에서 주인공 폴리나는 아빠 페르난도와 언쟁을 벌인다. 사법부 판사인 페르난도는 폴리나가 박사학위를 따고 변호사가 되어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길 원하나, 폴리나는 경제 및 교육 수준이 좋지 않은 시골 학교의 정치 선생이 되어 현실을 바꿔가고자 한다. 폴리나는 오이디푸스적 태도로 페르난도의 제안을 거부한다. 페르난도의 제안이 기존 현실(가부장제와 폭력적 독재의 잔재)의 답습 내지는 세습이라면, 폴리나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여 개혁과 진보를 꿈꾼다. 여기서 젊음과 늙음, 여성과 남성은 충돌하는데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 마초주의에 찌든 시골의 젊은 불한당들이 폴리나를 강간한다.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피해자, 소유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7일간의 정상회담>은 <스튜던트>의 틀을 빌린 작품이다. <스튜던트>에서 로크는 아들이자 학생으로, 선생이자 아버지적 존재에게 휘둘린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아들, 학생 수준에 그친 아르헨티나가 <7일간의 정상회담>에서 이어진다. 미트레는 가상의 대통령들을 상정하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아르헨티나 정치, 복잡한 아메리카 내 관계망을 우회하여 비춘다. 반민주적인 인종차별 선전으로 당선된 에르난 블랑코(하양)는 노동자 부모의 아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뛰어넘지 못한 '아들'로서 항상 측근들에게 의존하는 아둔함, 아메리카 내 두 축의 거대 패권인 브라질, 미국에 휘둘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나약함은 곧 영화의 원제인 '코르디야르'(산맥), 즉 높은 곳을 버거워하는 '고산병'으로 나타나고, 대통령이라는 거대 아버지로서도, 또 딸 마리나의 아버지로서도 모두 다 어설프다. 모자란 아들은 정상 회담에 집중하지 못해 딴청을 피우고, 정상 회담 시간과 대통령의 권한을 딸을 위해 사용하는 부적절한 처세를 보인다.

그러나 미트레의 학생들은 이에 체념하지 않고 현실을 헤쳐 나간다. <폴리나>에서 몸과 정신 모두 상처를 입은 폴리나는 그런데도 누구에게나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UN 인권선언을 가르치러 복직한다.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며 수업을 듣지 않는 원주민 학생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고자 한다. 이러한 폴리나의 태도는 여성적이다. 폴리나와 연대하는 라우라는 기다리고, 그녀에게 지쳐 말실수하더라도 이내 곧 사과한다. 폴리나 또한 그간 가부장제, 마초주의의 압박 대신, 강간범들의 권리를 지켜주며 자백을 기다린다. 물론 지나치게 이상적인 폴리나의 한계, 현실적인 아버지의 정의가 충돌하지만, 그럼에도 폴리나는 자기 결정권은 누구나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는다. 폴리나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을 중단하지 않으며 복수심과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 또 아버지의 간섭을 가로막는다. 자신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요구하던 대상이 백인 안토니오였다면, 즉 폴리나의 자기 결정권에 간섭했다면 중절할 것이라 말한다. <7일간의 정상회담>에서 마리나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기억을 알고 있다. 딸은 대통령인 아버지 머리 위에 있다. 그러나 블랑코는 마리나를 통제한다.(한편 그 과정에서 <폴리나>에서 공권력으로 딸의 결정을 침해하던 페르난도의 모습이 연상된다. 가부장제 내에서 아들의 상태를 뛰어넘는 남성은 필연적으로 고압적인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관료들과 동행하지 않고 스스로 회담에 참석하거나, 미국 및 브라질과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길 시도하고, 끝끝내 주인의 종이 되는 선택이 아닌 주체적으로 우뚝 서는 선택을 한다. 투명 인간이라며 비판받던 블랑코는 투표 맨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들며 존재감을 부각하고, 이로써 우여곡절 끝에 아르헨티나라는 민주주의의 학생은 주권을 실현하며 성장한다.      


미트레는 이를 연출로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폴리나>에서 완고한 부르주아인 페르난도에게 휘둘리는 폴리나는 그의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 롱테이크로 포착되다가, 이후 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시골로 향했을 때 아버지와 숏이 분리되고, 또 자유로이 다양하게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며 시퀀스는 여러 숏으로 구성된다. 이후 폴리나가 말하는 '보호받을 권리'를 미트레가 연출로 실현한다. <사탄 탱고>, <엘리펀트>,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처럼 하나의 시간, 그러나 각자의 시선에 따라 다른 시간을 교차편집으로 구성한다. 그럼으로써 타인의 진술, 페르난도가 무력을 동원하여 침탈한 권리(폴리나의 입장에서 설령 범죄자라도 동일해야 하는)를 회복한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는 폴리나는 이후 페르난도와 다시 대면할 때는 더는 롱테이크로 그의 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컷으로 각자의 숏을 분리하며 동등하게 마주한다. <7일간의 정상회담>에서도 '다수'에 부대끼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인 시퀀스, 중남미 정상들 다수의 얼굴이 치열하게 교차되는 시퀀스로부터, 이에 적합하지 않은 블랑코가 '소수'만 제어하는 사적인 차원으로 이탈하는 편집의 차이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스튜던트>, <폴리나>, <7일간의 정상회담> 모두 자신을 우직하게 주장하는 '반대하는 입', '꿋꿋하게 홀로 걷는 폴리나의 발', '투표하는 손'을 부각하는 연출이 흥미로웠는데 이러한 미트레의 정치 영화가 <아르헨티나, 1985년>에서 이어진다. 영화 시작 당시의 배경은 칠흑 같은 아르헨티나의 독재가 갓 막을 내린 1983년이다. 영화가 막을 올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열어젖혀진 영화의 화면비는 1.50:1이다. 1.50:1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영화의 화면비인 1.33:1과 1.88:1의 어중간한 경계에 놓이는 화면비다. 1.50:1은 35mm 필름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화면비, 또 종이 매체에 활용하는 비율이다. 그래서 35mm 필름을 주로 활용하던 시대상을 지칭하거나, 또 영화보다는 사진, 책자 등의 성질에 상응하기 위해서 1.50:1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영화의 몇몇 특성들이 1.50:1 화면비가 갖는 매체성에 부합한다. 본 작품은 피해자들의 진술이나 증거를 기록한 무수한 '종이'들을 검토, 그렇게 책장을 넘기는 작업이 주를 이루고, 파시스트들에 의해 끊긴 인과, 서사를 재건하는 과정이 뼈대를 이룬다. 그렇기에 문학적인 성질과 비슷한 1.50:1의 화면비를 선택한 것일까. 또 영화는 디지털로 촬영되긴 했지만, 필름의 희뿌연 질감과 유사한 미장센을 조성한다. 필름을 탁월하게 활용하는 칠레의 영화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더 클럽>이나 <스펜서>의 미장센과 일련 유사하다. 본 작품이 더 현실적인 질감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필름과 흡사한 매체성에 화면비가 조응하는 것일까. 그리고 파시스트 정부가 외부를 차단하여 먼지가 잔뜩 쌓인 채로 베일 속에 방치되어 있던 정보들을 투명하게 개방하고 살펴봄에, 흡사 먼지가 흩날리는 듯한 매체성을 조성하는 것일까. 또 순수하게 필름의 매체성, 그리고 1.50:1의 화면비가 주는 인상에 몰입한다면 '답답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희뿌연 느낌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모호함, 1.50:1은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고 필러박스 또한 어정쩡하게 노출된 어중간한 매체, 그것은 곧 군사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지 얼마 안 된 아르헨티나 민주주의의 미성숙함, 이도 저도 아님을 가리키는가. 군인들은 여전히 막을 내린 독재정권을 지지하며, 진실을 규명하려는 사람들을 규탄하거나 협박하는 파시즘과 민주주의 사이의 어중간한 세계, 그러한 가운데서 미트레는 ‘확실함’으로 나아간다. 바로 선명·투명함의 확실함, 민주주의적 확실함으로 말이다. 선명한 민주주의의 여명이 밝아오기 위해선 그것을 가로막는 영화 속 협박, 스토팅, 테러 등을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1983년의 아르헨티나인들은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미트레는 회고한다. 영화의 도입부, 훌리오는 차 안에 있다. '밤'이다, 그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풍경은 여전히 혼탁하다. 흐려서 많은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는 흔들림 없는, 그로써 확신이 있는 스테디캠으로 포착된다.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배경음악도 울려 퍼진다, 시청각은 감미롭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제대로 보지 않고 누리는 안락함인지 모른다. 실제로 훌리오는 영화 초반에 비델라 기소, 즉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차에서만 살 수 없기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배경음악도 사라지고 스테디캠은 왈가닥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뒤바뀐다. 그렇게 밖에 나온 훌리오는 차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여실히 확인한다. 본인이 몸소 젖으며 말이다. 사실 차 안에 있을 때, 그는 아들 하비를 시켜 딸 베로를 미행했다. 그녀가 지금 누구와 사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다. 외부가 잘 보이지 않는 차 안에서의 훌리오는 베로가 군인 집안의 아들과 사귀며, 그는 스파이일 수 있다고 오인한다. 안락함을 불러오는 것, 그것은 여전한 가부장적 독재정권의 잔재가 아닌가. 권위주의적 가장이 딸의 사생활을 파도 좋다는 것, 가장에 의해 사실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베로의 남자친구 아벨은 스파이가 아니었고, 유부남이긴 했지만 그것은 훌리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추적하고 관여하며 그를 '겁주는 것'은 민주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납치에 귀를 닫고, 가장의 권위를 누리는 습관은 여전히 달콤하다. 영화 초반 훌리오의 특징, 그는 사무실이나 퇴근 이후 서재에서 '문을 닫고' 아주 감미롭고도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취미다. 그러나 이는 문 바깥, 외부 청각을 외면하는 행위다. 헤드폰을 끼고 화장하는 베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벨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인지했었으니, 진실을 외면하고 연애를 즐기려는 회피적 태도로서 말이다. 외부에는 감당하고 짊어져야 하는 사실이 내재한다. 정의로운 검사로서 훌리오는 독재정권이 국민에게 가한 피해 규모를 진상 규명 해야만 한다. 이를 귀 따갑게 촉구하러 방문하는 브루노를 훌리오는 한사코 거부하지만, 진실은 그가 선수 치기 전에 한 박자 앞서서 미리 방문하는 법이다. 그리고 실비아는 훌리오의 방문을 ‘열어’ 비델라 재판을 맡아야 한다고 독려한다. 진실을 외면하고 심미성에 흠뻑 도취하고자 하는 그를 따갑고도 불편하게 방해한다.     


그렇다면 본 극에서 배경음악이나 스테디캠의 온화함,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은, 곧 외부 진실을 외면한 폐쇄적인 내부의 허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미트레는 아름다움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실비아는 훌리오에게 재판을 독려하고 나가면서, 낮췄던 볼륨을 다시 올린다. 비델라 재판을 맡으면 스파이들의 스토킹과 군사정권에 협조했던 부역자들의 협박, 테러 공모가 뒤따른다. 분명 추하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고 몰아내어, 아름다운 볼륨은 다시 크게 울려 퍼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몰아내야 하는 대상은 훌리오 외부의 타자인, 자국민을 학살한 군인들만 해당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본인 또한 스스로 버리지 못한 비겁함, 은밀함, 사악함을 물리쳐야하리. 훌리오가 군사 정권 재판 전담팀을 꾸리기 전까지, 그는 비서 수사나와 단 둘이 일했다. 그리고 브루노를 만나기 싫은 훌리오는 수사나에게 그를 “못 오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고될 수 있다고 협박한다.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가장의 습관이 은연중에 내비치는가, 그러나 수사나는 자신은 이제 정규직이라며 쉽게 해고할 수 없다며 반박한다. 이후 훌리오는 여성이자 비서인 수사나를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동등한 눈높이에서 존중하며 이를 부탁한다. TV에서 송출되는, 시민이 뽑은 알폰신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알폰신 대통령이 전임 독재자들을 제대로 규탄하지 않고, 또 피해 규명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훌리오 가족은 대통령을 비판한다. 시민의 손으로 당선된 최초의 민주주의 대통령, 그러나 그 또한 민주적인 당당함을 갖추기엔 자질이 아직 모자란가. 그리고 알폰신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기 싫은 훌리오(혹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는 TV를 독단적으로 끈다. 그러나 다른 식구들은 TV를 더 보고 싶다며 이를 다시 켠다. 민주적인 태도는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유일무이한 권력자의 결정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      


다만 그 시대가 오롯이 밝아오지 않았다. TV에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훌리오가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아파트의 불빛이 전부 다 켜지지 않았다. 다수가 여전히 어둡다. 독재 기간에 사라져버린 실종자들의 어둠이거나 여전히 불을 켤 수 없는 존재들… 그러나 새 시대가 밝아왔으니 이젠 빛나야 한다. 영화 속 어둠, 폐쇄성은 주로 훌리오를 향한 살해 협박, 엘리베이터를 탄 루이스의 불안, 그를 스토킹하는 남자의 성질을 가시화한다. 어둠은 보이지 않게, 볼 수 없게 만든다. 모든 시민이 보여야 마땅한 민주주의 시대에 다시 보이지 않게 만들기, 테러 협박으로 서로의 신뢰를 저하하는 것이 파시즘 정권의 어둠 전략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감시에 항의하는 실비아처럼, 비델라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어머니에게 반발하는 루이스처럼, 어둠을 몰아내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어둠은 다 똑같이 보이지 않게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그 누구도 구분할 수 없다. 이는 루이스 가문의 파티에서 정치적으로 다수가 '하나의 전체'에 찬동하며, 다른 견해를 가진 루이스를 흘겨보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용모는 다르지만 그들의 발화, 눈빛은 모두 동일하다. 동일하지 않은 것을 쫓아내어 보이지 않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빛이 풍부하다는 것은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세세하게 드러나면 개개인 간의 특유성이 더 강조되는 법이다. 그것이 곧 획일화된 전체주의에 반하는, 다양하고 무수한 개개인들이 각자의 권리를 누리는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그래서 훌리오는 권력을 세습하는 독재를 거친 중년들과 상반되는 '청년'을 모집한다. 전자가 정보를 차단했다면 후자는 정보를 개방하고, 전자가 납치와 고문이 판을 치는 고립의 시대를 열었다면, 후자는 타인들과 교류하고 현장에 방문한다. 미트레는 앞선 작품들에서 그랬듯 이러한 속성을 연출로 가시화한다. 첫 번째 재판이 열렸다. 파렴치한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을 소개한다. 미트레는 똑같은 구도에서 그들 얼굴을 포착한다. 그들은 이름과 얼굴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다 입을 맞춘 듯 똑같은 진술을 한다, 입은 그들 모두가 같다.      


이후 훌리오와 루이스가 재판 팀을 꾸리는 면접이 교차된다. 여전히 미트레의 카메라 구도는 모든 면접 대상자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면접을 보러 온 청년들의 발화는 매우 다양하다. 또 전자의 경우에는 일방적이었다. 그것을 듣는 판사나 검사와의 리버스숏, 즉 시선 교환이나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오직 그들 얼굴만, 그들 할 말만 지시하는 권위적인 특성, 그러나 후자의 청년들은 면접관들과 리버스 숏으로 상호 교류한다. 전자는 자기 말이 유일한 진리라면, 후자의 민주적 성격은 고립보다는 다양함의 소통, 공존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의 롱테이크는 분명 현실적인 양식과도 같았다. 핸드헬드와 결합된 롱테이크는 끊기지 않는 시간성에서나, 불완전한 움직임에서나, 양자 모두 현실 속 인간을 환기하였기 때문이다. 롱테이크 외 후줄근하고도 거친 매체에 담긴 당대 보도 영상도 삽입되었기에, 영화 외부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7일간의 정상회담>처럼 미트레의 연출은 리얼리즘에만 국한되지 않는, 사적 영역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역할도 갖는다. 재판 팀이 꾸려지는 과정,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판사들이 포착되는 시퀀스, 훌리오와 함께 재판 연기를 논하는 민주적인 장면들에서, 영화 초반부에서 볼 수 없던 무수한 '컷'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의 관점은 오직 훌리오 하나에 국한되었다. 베로가 스파이와 사귈 것이라 단정하는 훌리오, 수산나를 하대하는 훌리오, 또 훌리오는 스페인어를 쓰는 백인의 관점에서 원주민 경호원의 이름 '오르미가'가 '개미'에 해당한다며 비웃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장, 권위적인 검사, 스페인어를 쓰는 백인으로 대상을 획일화하는 전체주의의 잔재다. 훌리오가 최후 진술을 할 때, 한 용의자는 '절대적인 하나의 원리'에 상응하는 성경을 읽고 있다. 실제로 '더러운 전쟁'에 가톨릭이 얽혀있었다. 다양한 외부와 무관한 자신만의 하나의 옳음으로 스스로를 선처하고 회개한다.      


민주주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개방성을 지향하고, 그렇게 개방하는 것은 다양성, 권리다. 군사정권에 잠식되어 있던 사법부, 권위자들에게 깔아뭉개진 노동자들의 권리 등을 독립적으로 회복한다. 또 하나의 원리가 아닌 다수의 원리, 폐쇄성이 아닌 개방성에 의해 영화는 매우 무한해진다. 팀원들이 다양한 지역에 방문하여 여러 피해자들의 무수한 증언과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미트레는 많은 사람과 지역을 교차 편집한다. 개방하고 확장하는 민주주의는 곧 무한함이다. 민주주의에서 한계 없는 존재 인간, 그래서 훌리오는 젊은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자신을 서서히 바꿔간다. 영화 초반에 훌리오는 미트레의 <폴리나>나 <7일간의 정상회담>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의 전형이었다. <폴리나>에서 제 분신, 제 혈육인 딸이 아버지인 자신이 원하는 아기가 아닌, 자기가 원치 않는 강간범의 아이를 낳으려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월권을 행사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행동을 구체적으로 옮기진 않지만 베로를 감시하는 태도가 이와 같다. 반면 그의 부인 실비아는 <폴리나> 속 폴리나와 같고, 루이스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스튜던트> 속 로크와 유사하다. 아버지들이 제 권위를 세습하고자 현실과 타협한다면, 여성과 학생은 제 신념이나 지식, 정의관을 현실에서 굽히지 않는다. 살해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부당한 권위를 조롱한다. 이윽고 그들과 함께하는 훌리오는 '민주주의의 학생'이 되어 토론한다. 피해자의 진술을 존중하는 검사로서 훌리오의 원칙과 루이스의 정의로운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방향 조절이 충돌하는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간다. 또 기자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자신에게 쏠린 관심과 주목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양분한다. 젊은 사람들이 조명을 받자, 이후 그들이 접한 피해자들의 진술과 얼굴이 담긴 숏으로 연결된다. 묻혀있던 진실들이 드러난다. 영화는 재판에서 진술하는 피해자들을 포착한 숏과 이를 외부에 전달하고 매개하는 신문, TV 등을 포착한 숏을 디졸브로 포갠다. 그간 독재자들에 의해 단절되어 있던 진실들이 외부와 ‘포개지고 겹친다.’      


이후 회복되는 것은 감정이다. 2차 대전 당시와 그 이후까지 일부 국가에서 성행한 파시즘의 특징은 절대적 이성 신봉이다. 오직 계산 가능한 것, 수치화 가능한 것, 유용한 것만 남긴 채, 그렇게 이성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학살하고 소각했다. 영화 속 피해자들은 고문 현장에서 감정을 괄시했음을 폭로한다. 대표적으로 아드리아나는 납치 당시 만삭이었고, 끌려가던 순간 출산이 시작되어 고통을 호소했으나, 고문 기술자들은 아드리아나를 ‘비웃었으며’ 아드리아나의 딸은 탯줄이 달린 채로 방치됐다. 인간 존엄이 짓밟히는 ‘절망감’, ‘좌절감’, ‘수치심’을 독재 정권은 비웃었다. 연인을 잃어버린 남자의 ‘설움’, 돌아오지 않는 자녀를 한없이 기다리는 어머니의 ‘먹먹함’, 모두 다 짓밟혔다. 파시즘이 성행하던 시대에 개인들은 와해되고 고립되어 느낄 수 없었다. 상대가 어떠하든 공감할 수 없는 나는 지금 괜찮다. 그러나 성적 착취, 참혹함, 모멸을 느끼고 수용하는 주체는 내 몸이다. 분리되어있던 너와 나는 공감으로 하나 된다, 너를 내 몸으로 느끼니 더는 괜찮지 않다. 루이스의 어머니는 그간 비델라를 지지하였으나 피해자의 진술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경악과 소름’을 직접 느낌으로써 내 일처럼 여기고 연대한다. 이후 최종 변론에 물밀듯 밀려오는 것도 '감정의 홍수'다. 이성적인 법원의 '정숙하세요'라는 제지에도 막히지 않는 ‘환호와 박수’, 흘러넘치고 빛나게 된 것은 감정, 그것을 가진 인간이다. 이렇게 미트레는 독재의 밤에서 시작한 영화에 여명을 불러온다. 물론 선고가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나왔고, 썩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지만, 여전히 훌리오는 아침을 열기 위해서 항소장을 쓴다. 그렇게 여명을 불러와 비추는 것은 모든 시민의 얼굴과 그들의 감정이다. 이를 담아내는 블록 포스터 규모의 역사극이란 장르는 작년 개봉한 <쿠오바디스, 아이다>만큼이나 적절하고, 후반부 신파적 성격 또한 독재로부터 복권되어야 하는 것이 '감정'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전율을 일으킨다. 여전히 미트레에게 웅장하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오합지졸이지만 지식과 신념을 따르는 나이를 불문한 학생의 집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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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26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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