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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8. 2022

알랭 기로디, <노바디즈 히어로>

일상의 테러

알랭 기로디(Alain Guiraudie), <노바디즈 히어로>(Nobody’s Hero) 

- 일상의 테러     

“지식이란 직접성을 넘어서, 자아를 넘어서 이질적인 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까지 상승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지식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은 본래 점검하기 힘든 것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

영웅: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 영웅의 사전상 의미다. 우리는 지혜와 재능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판단하여 영웅을 판가름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을 이끈 총사령관 아가멤논, 하지만 그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영웅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군을 위험으로 내몰았고, 오만방자한 성격은 끝끝내 제 목을 겨누었다. 트로이 전쟁의 진정한 영웅은 오디세우스로 평가받는다. 무력은 아가멤논, 아킬레우스만 못할지언정, 그의 지혜가 승리를 불러왔다. 신들의 눈 밖에 난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과 마찬가지로 시련에 처했지만, 그와 달리 파멸하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다. 이렇게 영웅이 등장하는 신화는 이들이 언제나 완전하지만은 않음을, 감정적이고 변덕 가득한 신들 또한 인간적인데 영웅조차도 '인간의 운명'을 어찌 벗어날 수 있겠냐며 자조한다. 오디세우스는 군의 운명, 자신의 생존을 지혜로운 책략으로 타개해나갔지만 마냥 영웅답지는 않은, 교활하고 능구렁이 같은 결국 인간이었다. 또 영웅은 혼자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아르고호 원정의 대장인 이아손, 그 또한 용을 죽이고 황금 양털을 가져오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하지만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메데이아를 배신하고,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자 영웅일 수 없는 이아손의 말로는 참담하다. 이처럼 영웅은 인간이기에 결손이 있는 존재, 그리고 조력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이러한 영웅의 상을 알랭 기로디가 탐구한다. 1964년 빌프랑슈-드-루에르그 출생의 알랭 기로디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프랑스의 현세대 감독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평가되며, 그의 색채는 브루노 뒤몽과 유사한 느낌이 있다. 언제나 범죄가 발생하고,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는 지역은 파리로부터 먼 전원 지역, 주변부이며 인물들은 항상 애욕이 들끓기 때문이다. 한편 종교와 인간성을 탐구하는 뒤몽과 달리, 기로디는 타자들의 자유와 욕망을 다룬다는 점이 다르고, 타자를 다룬다는 점은 유사하기도 하나 기로디는 젠더에 있어서 타자를 주목한다.      


최근에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밀고 나가는 기로디, 그러나 그의 초기작들에서는 초현실적인 색채가 물씬 느껴졌다.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에서는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이 명쾌히 나뉘지 않는, 뒤죽박죽 뒤섞인 카오스적인 구성을 선보였다. 또 <때가 되었다>에서는 중세와 현대가 뒤섞인, 현실에 존재한 적 없는 불명확한 시대상을 그려낸다. 한편 이러한 형식은 마냥 스타일, 형식을 위한 형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의 주인공 바질은 이성과 감성, 현실과 망상,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줄곧 오가는, 회피적인 아웃사이더다. 따분한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 망상으로 도피하고, 또 기존 질서에서 욕망을 쟁취할 수 없어 줄곧 위반한다. 정해진 하나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때가 되었다>에서 낮이 계약의 시간이라면, 밤은 본능과 약탈과 방종의 시간이다. 또 적대해야 하는 대상과 공조하기도 하는데, 낮과 밤을 함께 살며 어느 한쪽으로 매몰되지 않는 인간의 복합성, 입체성이 연출에 반영된다. 이러한 비선형적인 연출은 <도주왕>까지 일련 지속된다.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연출, 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양측 모두의 비이성적인 전개를 통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기로디의 카메라는 롱테이크과 비기교적인 카메라로 리얼리즘을 지향하고, 어떠한 과장과 탐미주의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현실 속 인간을 재현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에서는 죽음이 천연덕스럽게 등장하며, 또 장르가 무엇이든 언제나 성애로 가득하다. 특히 기로디 본인의 성적 지향을 투영한 동성애가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게이는 아니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실존적인 성 지향성을 지니는 경우가 잦다. 그들은 특정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변화한다. 독신 게이였다가 이성애, 결혼에 흥미를 느끼는 <도주왕>의 아르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또한 절대적이지 아니하고, 머물면 지겨워져 다시 그는 게이가 된다. 근작 <스테잉 버티컬>에서는 욕망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자유롭게 변화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기로디의 머물지 않는 연출과 과거의 규정을 벗어나는 인물들은 자연에 머물며, 예속되지 않는 자유를 추구한다. 

     

다시 욕망으로 되돌아가서, 그에게서 욕망은 위반이다. <도주왕>에선 외판을 위해 협정과 경계를 넘고, 또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와 법을 위반하여 전자 팔찌를 차게 된 아르망이 등장한다. 위반을 통해 즐기는 욕망이 그의 자유라면, 경찰이나 보편자들은 그를 줄곧 따라다니며 구속한다. 그래서 다시 그는 위반한다. 심지어 과거의 자신, 예전에는 흥미로웠으나 현재에는 지겨워진 연인에게서 달아나며 자유를 쟁취한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호수의 이방인>은 욕망이 영화를 추동한다. 동성애자들의 비밀스런 공동체인 호수에 출입함으로써 그들이 게이임을 명시한다. 기로디는 아주 적나라하게 그들의 정사를 포착한다. 하지만 애욕과 죽음은 한 쌍이다. 호수에는 사람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메기가 존재하고, 또 수풀에선 시체를 쫓아다니는 날벌레 소리가 강조되며, 호수에서는 살인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프랭크는 호수와 풀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호수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야성적인 미셸에게 매혹된다. 그가 라미에르를 살해한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크는 미셸을 찾는다. 에로티시즘은 필연적으로 폭력이 동반되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그에 비례하여 자극과 쾌락을 자아내므로, 프랭크는 본인을 살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매혹적인 경험을 안겨다 줄 미셸을 향한 애욕을 거두지 못한다. <스테잉 버티컬>에서는 창작과 출산을 성애와 엮는다. 영화 속 만남은 언제나 대척점에서 시작된다. 양치기와 늑대, 정착과 방랑, 기독교적인 삶과 반기독교적 태도, 이성애와 동성애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기존의 자신을 깨트리고, 나와 대척점에 놓인 상대방을 향해 나아가며 아이가 탄생하고, 각본을 쓸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복상사도 등장하고, 금기시되는 성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추방되는 ‘아슬아슬하게 수직으로 서 있는’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지만, 삶으로부터 죽음, 질서로부터 금기로 위반하며 느끼는 쾌락을, 그럼으로써 실현하는 자유를 기로디의 인물들은 내려놓지 않는다.       


그래서 기로디의 존재는 외롭다.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처럼 아웃사이더, <때가 되었다>처럼 떠돌더라도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거나, <호수의 이방인>의 앙리처럼 그들은 단절된다. <도주왕>이나 <스테잉 버티컬>처럼 고립되어 쓸쓸하다. 이렇게 고립된 타자들을 다루는 그가 <노바디즈 히어로>로 돌아온다. 지질하고 살집이 있는 중년 남성이 나름의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로 <도주왕>의 구성을 이어가는 작품이라 하겠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 시작부터 기로디가 현실만 포착하겠다는 담담한 포부를 선언하듯 보인다. 영화 오프닝에서 ARTE나 CG 시네마 등 영화 제작에 도움을 준 영화사, 제작사들의 로고가 등장한다. 그런데 로고의 시각은 있는데 청각은 없다. 다른 영화에서 우리는 본 제작사 로고의 음향을 들을 수 있는데, 본 작품에서는 로고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소리를 모두 무성으로 처리한다. 이윽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오프닝 로고에서 기대한 아름다운 청각 대신, 현실 속 불규칙하고 불명확한 소음이 우리 귀를 툭툭 건드린다. 현실 속 불쾌한 소음을 인위적으로 조작한, 오프닝 로고의 환상과도 같은 소리는 기로디가 바라지 않는다. 기로디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불쾌한 소리가 흘러나올지 알 수 없는 현실의 즉흥성, 우발이다. 이러한 소리처럼 영화도 전개된다. 본 작품은 우리의 바람, 편견, 예측을 모두 비껴간다. 일례로 메데릭이 사는 아파트의 다른 거주민들처럼, 감상자들은 셀림이 원리주의 무슬림이나 테러범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는 오히려 원리주의 무슬림들에게 탄압받는 동성애자로 궤를 튼다. 또 이사도라에게 구애하고, 그녀를 위해 도주하며 제라르와 싸우는 메데릭을 동성애자라 의심하긴 어렵다. 셀림을 집에 들여놓고 서로 힐끗힐끗 쳐다봤을 때도 그저 낯섦, 의심 수준으로 생각했으나 영화 결말에 메데릭은 게이라고 커밍아웃하며, 이사도라에게만 예외였다고 말한다. 또 메데릭이 제라르를 물리치고 이사도라는 메데릭에게 향할 줄 알았으나, 그녀를 학대하고 속박하는 제라르에게 다시 향한다. 제라르에게서 언제나 달아나던 그녀의 태도와 상반되게 말이다.     


이처럼 본 작품은 우리의 기대, 예측, 마땅한 인과, 오프닝 로고에서 흘러나올 만한 환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항시 질서, 규칙, 기대, 인과를 배반하고 즉흥적인 감정과 우발적인 개입으로 방향을 틀며, 기로디가 <도주왕>이나 <스테잉 버티컬>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 '생물로서의 현실'을 구현한다. 살아 숨 쉬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을 구현하는 이야기에 연출도 일조한다. 영화의 도입부, 롱숏으로 메데릭, 이사도라 각각을 포착한다. 이사도라는 매춘부고, 메데릭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지질이다. 영화 전반에 거쳐 소심한 성격이 강조되는 메데릭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그녀와 성매매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싶고, 오히려 그가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메데릭이 이사도라에게 다가가자, 롱숏은 풀숏으로 다소 명확해지고, 이들이 약속을 잡고 연락처를 교환하며 더 가까워지자 클로즈업으로 근접하다. ‘세계 속의 그들’이 아닌, ‘오직 그들 자신’으로 말이다. 이후 이사도라와 호텔에서 만나 '옷을 입은 상태의 클로즈업'을 넘어 ‘누드’로 진전한다. 그렇게 영화의 연출은 욕망으로의 솔직한 다가감, 현실에서 실현되는 환상을 보여주지만, 이러한 욕망, 누드로부터 영화는 항시 방해를 받고 멀어진다. 밖에선 경찰차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그들의 방을 제라르가 급습하며, 타인들이 이사도라와 메데릭이 머문 방문을 노크한다. 탐미적인 영화 오프닝 로고와 결별하는 현실의 소음처럼 말이다. 이렇게 나의 기대를 타인이나 외부의 법, 현실이 방해하고, 또 현실에 놓였을 땐 나의 환상이나 욕망이 활개를 치니, 양자를 계속 오가는 영화는 일정한 궤적을 밟아갈 리가 만무하다. 두 차원을 불규칙하게 오가며 정신이 없다. 이러한 방해, 침입을 영화는 연출로 구현한다. 메데릭의 시점만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그의 발걸음에 따라서 달리, 트래킹으로 뒤바뀌기도 하나, 보통의 카메라는 주로 고정되어 있어 사진, 회화처럼 멈춰있다. 이러한 프레임에 항상 누군가가 급습해온다. 그들은 주로 백인 남성이다. 제라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대신 이사도라를 감시하는 프티, 메데릭의 집에 찾아오는 이웃 및 제라르, 셀림을 체포하러 오는 백인 남성 경찰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메데릭은 제라르의 집에서, 이사도라는 제라르에게, 셀림은 지하디스트들로부터 달아난다.  


그렇게 프레임 안에 항시 급습해오는 사람들, 한편 머물러 있다가 그들의 습격에 달아나는 사람들이 대비된다. 그것이 곧 권력관계를 반영하듯 말이다. 머무는 백인 남성, 떠나는 여성 및 유색인종, 성소수자들. 이러한 침략은 일상의 테러라 말할 수 있으리. 일상에선 매춘부이자 아내로서 이사도라, 메데릭 또한 상사 플로렌스와 이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일상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닌 듯, 메데릭은 이사도라에게 순수한 사랑을 고백하고, 이사도라는 제라르의 시야에서 몇 차례 이탈하여 메데릭과 사랑을 나눈다. 이사도라가 제라르 및 고객과 돈을 받고, 또 부부간의 의무처럼 섹스를 할 때, 그녀는 기계나 인형처럼 차갑고 뻣뻣하다. 아무런 목소리도, 신음도 없다. 흡사 현실의 자신이 아닌 듯, 고객이나 제라르에 의해 거짓의 자신으로 전락한 듯 말이다. 하지만 메데릭과 관계를 나눌 때, 또 그의 집에서 셀림과 섹스를 할 때 신음은 서서히 커지다 못해 이윽고 방문 너머, 아파트 전체, 성당을 가득 채운다. 특히나 성당을 가득 채운 신음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이념, 구조, 종교를 ‘모독’할 수밖에 없는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나를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신음을 내지르는 순간, 또 메데릭이 사정하려는 순간 항상 바깥의 사이렌 소리, 제라르, 프티, 이웃 등이 들이닥친다. 이사도라와 첫 번째 관계를 나눌 때 방해한 것은 클레르몽에 발생한 테러였고 그 직후 제라르가 들이닥친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제라르가 더 침입하는데, 그에게 붙잡혀 집으로 돌아간 이사도라는 자살한 테러범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마 살만한 가치를 못 느꼈을 것이라며 말이다. 공적인 문제인 테러리즘과 사적인 문제를 서로 유비하는 기로디, 그는 양자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살만한 가치를 못 느끼게 하는 것이 양자 모두가 같다. 테러로 파괴된 삶, 일상 속 종교나 가부장제에 따라 억압당하는 삶, 이사도라와 셀림은 후자의 테러를 당하는 사람들이다. 한편 이사도라는 영화 결말에서 제라르에게 되돌아간다. 메데릭이 제라르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다시 일어서는 반면, 제라르는 쓰러져있다. 강자 제라르에게선 항시 달아나던 이사도라, 그렇게 달아나서 루저, 지질이, 약자인 메데릭, 셀림과 섹스를 나누던 이사도라는 과연 어떤 심리일까.     


그녀는 자유롭기 위해서 일탈 및 위반하여 그들과 섹스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녀는 남성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는 여성, 즉 서구 사회 내에서 팽배한 성녀상을 일반적으로 추구한 것인지 모른다. 아웃사이더 메데릭, 첫 경험을 하지 못해서 무슬림 공동체에서 핍박받는 셀림을 구원할 때 그녀는 강한 쾌감을 느끼지만,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고객, 제라르와 관계를 맺을 때 그녀는 둔감하고 매너리즘에 빠진다. 즉 그녀는 백인이자 이성애자로서 ‘강자’를 지향하고, 구조가 바라는 ‘남성을 구원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라르가 회복된다면 다시 '테러'를 당해서 달아날 것이 자명한 그녀 최후의 선택을 과연 주체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주체적 선택은 구조의 압력을 받음에도 능동적으로 성 지향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결말에서 플로렌스가 메데릭에게 추파를 던지는 순간, 그는 커밍아웃한다. 그녀가 원하는 이성애자 메데릭이 되지 않는다. 이에 달리 보이는 씬이 있다. 테러가 일어난 클레르몽의 광장으로 향했을 때, 영화는 그의 시점 숏을 유지하는데 이리저리 행인들을 살펴보다가 '여성'에게 시선이 향하는데, 끝끝내 시선이 가는 곳은 '셀림'이다. 남성이 여성을 봐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 솔직한 성 지향성을 따른 것일까, 정신과 달리 눈은 거짓말 하지 못하는가. 셀림을 집에 들였을 때 그를 힐끗힐끗 쳐다본 것도, 사회가 요구하는 이성애자 남성에 얽매지 않는 솔직한 시선이었을까. 그의 무의식이 셀림을 급진주의자라 여기며 벌벌 떨고 신고하는 것은, 이성애자로 은폐한 자신의 민낯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는 심리인가. 사실 그 또한 '핑계'를 만들고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영화 속 백인 남성들은 상대를 규정하고 파악할 수 있는, 높은 위치의 권력자다. 제라르는 이사도라의 핸드폰에 위치 추적 앱을 설치하여 그녀를 감시한다. 경찰은 제라르의 요구인지 가정폭력 신고에 출동하지 않는다. 또 프티는 이사도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라르의 요구라며 집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온다. 동성애자인 셀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하디스트들은 그가 머무는 메데릭의 아파트에 무단 침입해 그를 구타한다. 아파트의 늙은 백인 남성들은 법에 저촉되는 총기 무장을 하고, 또 아파트에 마약을 숨긴다. 즉 백인 남성은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 위에서 법을 만들고 이를 강요한다.    

  

이러한 남성들의 요구에 여성들은 테러를 당한다. 이사도라는 제라르에게 달아나기 위해서 ‘부르카’를 입는데, 매스컴에 전폭적으로 보도되는 이슬람공포증과 그들의 여성혐오는, 과연 프랑스 일상에 만연한 가부장제의 테러와 얼마나 다른가, 무슬림 여성과 백인 여성은 인권에 큰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가운데서 메데릭은 셀림을 내쫓아야 하나 고민이 든다. 이웃들이 복도에 모여 메데릭과 셀림을 두고 토론하는데, 한편 여성들은 남자들의 맨스플레인과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알라위의 부인, 메데릭의 옆집 여성은 셀림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파트 복도의 조명은 계속 ‘깜빡’거리는 것일까, 여성들이 남성들의 말에 ‘포용력’으로 반기를 들고, 이에 셀림은 ‘빛 아래서 존재할 수 있거나, 어둠으로 존재할 수 없거나’의 갈림길에 서는가. 그런데도 특권적인 백인 남성의 권력, 이는 이성애자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메데릭의 상사인 플로렌스는 사업을 계기로 계속 그에게 원치 않는 성관계를 요구한다. 주로 백인 남성이 자본을 독점하여 ‘고객’이 되지만, 여성 또한 자본이 많다면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또 남성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메데릭 또한 자신의 ‘집’이 있고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며 셀림의 SNS, 방문 기록을 살피고 통제할 수 있다. 메데릭은 이사도라와 셀림의 흩어진 파편들을 수집한다. 이로써 이사도라는 가정폭력을 당했고, 셀림은 ISIS일 것이란 추측을 한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경찰에 신고하여 셀림을 체포하게 만든다. 이후 그가 증거불충분으로 결백이 입증되었음에도, 셀림을 계속 불안해한다. 메데릭의 불안 및 추측과 그들의 실제 삶은 다르다. 이사도라는 제라르에게서 아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일탈을 바란 것인지 모른다. 또 셀림은 이슬람 공동체에 속할지, 동성애자인 자신을 선택할지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권력자 남성은 인간의 복잡 미묘한 총체 대신, 보고 싶은 모습이나 편견을 그들에게 투영한다. 그들이 판단은 꿈이다. 무의식이 셀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꿈과 무의식은 솔직하나, 동시에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나 <도주왕>에서처럼 어찌 됐든 가상이다. 항상 조깅하거나 달리면서 대상에게 직접 향하는 메데릭, 기로디는 선입견, 편견이 팽배한 오늘날에 직접 달려가서 만날 것을 촉구한다.     


권력자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프레임 안에 급습해온다. 반면 약자들은 주로 머물러있다. 이사도라는 남성의 간택을 기다리고, 셀림도 처음엔 메데릭의 프레임에 급습해왔으나 이후에는 미리 와서 기다린다. 기다리며 머무르는 그들을 급습하는 사람이 바로 백인 남성이다. 메데릭에게는 항시 방문해오는 플로렌스가 그렇다. 이는 이성애 권력을 보여주는 것일까, 모든 타인이 이성애자일거라 단정하는 강력한 편견을 말이다. 이러한 급습에서 이사도라, 셀림은 항시 빠져나가고, 이후에는 노동법을 위반하고 제라르에게 협박당한 샬린도 메데릭과 함께 빠져나간다. 빈궁한 약자들은 메데릭의 집에 모이지만, 이사도라는 제라르에게 향한다. 그 선택이 구조 내 보편자와 타자를 가른다. 구조에 속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집을 가진 이성애자와 달리,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빠져나가며 연대’해야 한다. 구조에서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곡해 당하는 사람들끼리, 본래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연대를 갖춰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성적인 포용력이다. 그렇게 기로디는 여전히 <스테잉 버티컬>에서처럼 보편적인 구조 내에서 타자로서 사선으로 불안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포착하고, <도주왕>에서처럼 욕망을 구원하는 사적인 영웅을 담아낸다. 이토록 지질한 영웅이 어디 또 있으랴, 하지만 영웅은 단순히 멋있고 이상적인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용맹함과 선함을 실제 현실에 옮기는 존재다. 기로디의 영웅은 머물기보단 빠져나가며 자유를 몸소 실천하고, 공권력이나 구조에 의존하려는 유혹 속에서도 다가오는 샬린을 뿌리치지 않는 연대의 미덕을 보여준다. 거대 이념, 국가의 테러와 그것이 미시적으로 뿌리내린 사적인 테러의 연속, 그 가운데서 존재가 부정당하는 이들의 실존을 다시 보장하는 것이 기로디의 영웅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을 위해서 기로디는 여전히 성 해방, 에로티즘을 외친다. 기로디의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이라면 이상적인 작품, 하지만 초기작들로부터 <호수의 이방인>까지 이어졌던 파격성은 다소 부족하다. 그가 추구하는 위반의 에로티즘을 느끼기 어렵다. 자유분방하지만 <스테잉 버티컬>부터 위반의 짜릿함이 느껴지지 않는 과감성이 아쉽게 느껴지는 기로디의 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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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08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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