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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8. 2022

프랑수아 오종, <피터 본 칸트>

사랑: 끌어당기기 게임

프랑수아 오종(Francois Ozon), <피터 본 칸트>(Peter von Kant) 

- 사랑: 끌어당기기 게임    

“그런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그녀에게 다다를 수 없는 나의 무능함이다.” -조르주 바타이유-

페트라 본 칸트는 저명한 디자이너다. 그녀는 현재 비서이자 연인인 마를레네와 동거한다. 페트라와 마를레네의 관계는 디자이너에게 비서이자 조수, 고용주이자 피고용인, 욕망에 있어선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다. 한때 페트라는 남자와 결혼했었다. 그러나 페트라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며 일반적인 부부 관계가 변화했다. 그녀는 여전히 의무에 최선을 다했지만, 남편은 가식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실과 거짓, 날 것과 배역이 긴장감을 일으킴에 어색하고 불편해진 결혼 관계를 청산했다. 그와 이혼한 이후 페트라는 더 진실하게, 레즈비언이라는 지향성을 숨기지 않고 산다. 그녀의 집이자 작업실 입구에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가 서로 뒤엉켜 향락을 즐기는 큰 규모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이러한 그림처럼 페트라는 자신을 흠모하는 마를레네의 사랑을 흠뻑 만끽하고, 작업실에 찾아온 카린에게 반하며 자신의 감정에도 충실하다. 사랑받는 자는 오만하다. 사랑에 홀린 것은 사랑하는 자지, 사랑받는 자가 아니다. 디자이너이자 고용주, 그리고 사랑받는 자인 페트라는 마를레네의 운명을 결정한다. 페트라가 수척하고 추레한 옷을 입고 있어도 마를레네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사랑한다. 오만방자한 사랑받는 자, 하지만 페트라가 사랑하는 자가 되자 이젠 연인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이 난다. 카린에게 첫눈에 반한 페트라는 그녀에게 옷을 선물하고, 또 그녀의 눈에 띄고자 파격적인 의상을 걸친다. 그녀와 가까워지고자 페트라는 카린과의 공통점을 찾고자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남편이 있고,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카린은 언제나 페트라에게서 멀어진다. 자신을 한사코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는 자에게 일말의 기쁨도 허용하지 않으며, 오직 봉사만 명령한다. 그럼에도 사랑받는 자의 종인 사랑하는 자는 결코 연인을 타박할 수 없다. 지탄받지 않는 방종한 사랑받는 자는 페트라의 감정 일부를 안고 달아난다. 사랑을 쏟던 연인이 부재하고 돌아오지 않음에, 사랑하는 자 페트라는 온 세상을 증오한다. 에로스와 아프로디테 그림처럼, 사랑이 세상과 삶의 전부다. 

     

이윽고 마를레네라도 붙잡는 페트라, 여전히 페트라가 디자이너요 고용주라 하더라도 이젠 사랑하는 자가 되어버렸고, 마를레네가 사랑받는 자가 되자, 매몰차게 그녀를 버린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자신의 힘을 내어주고, 사랑받는 자는 권력을 행사한다. 본 ‘사랑의 권력학’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로 탐구한 내용이다. 파스빈더는 본 작품을 페트라의 작업실과 침실을 벗어나지 않는 폐쇄되고 제한된 ‘실내극’으로 연출했고, 이를 롱테이크로 포착하여 흡사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을 냈다. 파스빈더의 본 작품을 언급한 이유는 프랑수아 오종이 본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을 리메이크하기 때문이다. 1967년 파리 태생의 프랑수아 오종은 동시대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중견 감독이다. 그는 발칙하고도 파격적인 욕망을 다루는 시네아스트로 유명한데, 여기엔 그가 존경하는 파스빈더의 영향이 포개진다. 파스빈더도 파격적인 젠더, 해방된 성, 성 정치를 탐구하였기 때문이다. 파스빈더를 존경하는 오종은 초기에도 그의 각본을 영화화하며 존경의 뜻을 표한 바 있는데, 바로 파스빈더의 각본을 영상화한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에서 말이다.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은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과 유사한 경향의 영화다. 영화 속 중년 남성 레오폴드는 페트라처럼 돈이 많고, 또 젊은 프란츠를 사랑한다. 이에 프란츠는 사랑받는 자가 된다. 늙은 레오폴드는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과 달리 젊은 프란츠를 숭배하며 많은 걸 내어준다. 그리고 프란츠는 레오폴드의 제안대로 '새로움'을 실천하여 게이가 되고 그와 동거한다. 그렇게 프란츠는 레오폴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윽고 사랑받는 자가 된 레오폴드는 그에 대한 감정이 시큰둥해진다. 젊지만 돈이 없는 프란츠는 레오폴드에게 비참하게 굴종한다. 사랑을 받게 되자 레오폴드는 바깥으로 나돌고, 한편 자신의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 프란츠는 옛 약혼자 안나와 다시 관계를 시작한다. 오종은 파스빈더가 남긴 각본을, 파스빈더 스타일대로 외부를 사진으로 대체하고, 오직 제한적인 실내만 촬영한 연극적 형식으로 영상화했다.      


물론 지극히 오종다운 키치스러움, 가벼움이 뒤섞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연출로 오종이 탐구하는 것 역시 파스빈더처럼 성 권력이다. 사랑받는 자를 갖고자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지만, 이윽고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자로 뒤바뀌면, 사랑을 쟁취한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가 되며 마음이 식는다. 중년 남성이라는 권력자는 그런 식으로 사랑받는 자가 되어 사랑하는 자들 위에 군림한다.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받는 자의 집에 갇힌다. 거기서 피조물로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고 싶어도 그의 허락 없이는 창문을 열 수도, 뛰어내릴 수도 없다. 사랑받는 사람은 점점 더 부유해지는 권력자, 반면 사랑하는 사람은 갈수록 빈자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모든 삶을 내어줌에, 빈부격차는 커진다. 사랑받는 자로 마무리되는 레오폴드가 부유한 중년 남성인 것, 반면 처음에는 사랑받는 사람이었지만 이후 사랑하는 사람으로 뒤바뀐 프란츠가 궁핍한 청년으로 설정된 것이 사랑하는 자/사랑받는 자의 경제적 속성을 ‘나이’라는 상징으로 보여준다. 사랑받는 자는 능글맞고 음흉한 중년이요, 사랑하는 자는 순진하고 무지한 청년이다. 이런 사랑은 경제적인 소비인걸까, 소유하기 전까지는 안달이 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소유한 이후에는 시들해져 역으로 소유된 사물이 나를 바라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 무용하더라도 단지 갖고 싶을 뿐인 덧없는 것… 이러한 탐구가 오종이 파스빈더의 작품을 두 번째로 영화화하는 <피터 본 칸트>에서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오종은 파스빈더의 원전을 빌려옴과 동시에, 그의 연출 일부 또한 오마주하며 경의를 표한다. 그 이유는 파스빈더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선 파스빈더의 눈동자만 강조한 붉은 포스터가 우리를, 혹은 오종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더욱이 파스빈더의 뮤즈인 한나 쉬굴라 또한 후반부에 로즈마리역으로 등장하기에, 파스빈더 사단의 응시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시선에 따른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오종은 다작을 한 파스빈더의 여러 경향 중 ‘연극성’을 빌려온다. 일단 <피터 본 칸트>의 세트장은 파스빈더의 <사계절의 상인>의 주 무대인 아파트 구조와 흡사하다. 물론 파스빈더의 <사계절의 상인>은 매우 리얼리틱하고, <피터 본 칸트>는 꾸며진 무대, 세트장 같다는 차이가 있지만, 중앙에 광장을 둘러싸고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인 구조가 <사계절의 상인>과 유사하다. 물론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처럼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피터 본 칸트를 다루는 실내극이기에, 외부는 아미르가 피터에게 공중전화에서 연락하는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건물의 배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진 않지만, 파스빈더를 연상케 하는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또 건물 구성은 <사계절의 상인>이지만, 매우 심미적이어서 현실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풍기는 본 작품의 미장센은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의 오마주다. 패션 디자이너였던 페트라는 미술관, 탐미적인 연극 무대를 일상적인 집으로 옮겨왔었고, 이러한 경향이 <피터 본 칸트>에도 이어진다. 이러한 연극적 무대에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영화 초반에는 풀숏과 롱숏을 주로 활용하여 공간에 주목하기에, '넓게 펼쳐진 무대'를 포착하는 연극적 특징이 촬영에도 반영된다. 넓게 펼쳐진 한 공간 안에서 여러 인물들이 부대끼고 충돌하며 발생하는 긴장감에 주목하던 파스빈더의 연극적 작품들처럼, 오종도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에서 그랬듯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여러 인물들이 충돌하며 드러나는 젠더·사랑의 정치를 탐구한다. 그러나 디렉팅에 있어선 파스빈더의 인물들보다는 호들갑도 심하고, 감정이 풍부한 편이다. 그것이 곧 오종의 특징이거나, 독일의 원전에 프랑스의 감독이 손을 대며 발생하는 각색이리라. 한편 이러한 와중에도 지극히 파스빈더스러운, 냉정하고도 무감한 인물인 칼이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의 디렉팅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디렉팅은 오종 자신의 것을 따르며, 오종은 형식에서 파스빈더를 곧이곧대로 따르진 않는다.      


영화 초반에는 카메라가 매우 수동적으로, 또 제한적으로 움직이며 거대한 공간을 포착하는 연극성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오종은 인물의 얼굴을 커다랗게 포착하기 시작한다. 미디엄숏, 바스트숏, 클로즈업으로 점차 가까워져서 파스빈더적이지 않은, 오종스러운 풍부한 감정을 포착한다. 영화의 주인공 피터가 엄마 로즈마리와 통화하며 바라지 않는 자신을 연기하다가, 이윽고 자유분방하게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등 자신을 회복할 때, 그의 얼굴에 카메라는 밀착한다. 이후에는 피터가 아미르의 '밀당'에 화가 잔뜩 나서 격양되자 그의 감정을 '크래쉬줌'하며, 피터와 더불어 카메라까지 부각한다. 영화감독 피터는 아미르를 위해 영화를 촬영한다. 그 과정에서 아미르의 인생, 눈물, 젊음을 가까이, 크게 확대한다. 결말에서 피터는 아미르가 담긴 푸티지를 감상하며 우수에 흠뻑 젖지만 정작 현실의 아미르는 수염이 나서 변했다. 사랑하고 욕망한다, 그러나 뜨거웠던 그 순간은 지나가고 흠모했던 대상도 변한다. 그렇게 현실은 식히고 유실시킨다면, 영화는 크게 보존하고 주목한다. 즉 오종은 파스빈더의 연극적 특성을 '공간 안의 여러 인물', '인물에 우선하는 공간'으로 본다. 이러한 와중에 무대를 포착하는 구도나 거리를 포기하고, 연극에선 어려운 클로즈업이라는 영화적 구도를 택하며 '개개 인물들의 감정'을 확대한다. 이를 통해 순간적으로 나타나서 곧이어 변해버릴 감정을 보존하는 것이 연극과 차별화된 영화의 장점으로 보고, 이를 자신의 영화론으로 삼는 듯싶다. 여하간 파스빈더를 따라서 공간, 무대에 주목하던 초반부와 달리, 오종은 점차 카메라의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카메라의 움직임은 언제나 인간의 운동, 감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연극처럼 잘림이 드물던 초반부의 테이크 또한 인물들 간의 충돌하는 감정에 따라 잘림이 잦아진다. 이렇게 보면 영화는 매우 감정적이나, 항상 감정적이지만은 않다. 앞선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에서 중년들은 좋게 말하면 수완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교활하고 계산적이며 가식적이다. 본 작품에서도 중년 피터는 여우처럼 칼의 반응을 계산하여 이용해먹는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피터의 아침도 밝았다. 그러나 피터는 칼 없이는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시작할 수 없다. 칼이 블라인드를 걷어주고, 오렌지도 짜주며, 전화기를 가져다주고 각본 집필까지 대신 해주며 그의 아침을 대행한다. 그렇게 칼이 피터의 손과 발이 되어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칼이 ‘종’이요 피터가 ‘주인’이다. 칼은 피터를 흠모한다. 칼은 빼빼 말랐고 또 젊으며 피터의 집에서 일하며 돈도 받는 것 같다. 반면 피터는 뚱뚱하고 늙었지만 부유하고 명성이 있다. 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반대인 피터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칼은 언제나 자신에 대해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나의 감정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피터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고 바친다. 피터는 이를 교활하게 간파한다. 피터는 ‘사랑받는 자’, 칼은 ‘사랑하는 자’, 후자가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해가며 내어주는 그 모든 것을 전자는 오직 사랑으로 무전취식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닿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을 때 간절하고 애달픈 법이다. 그래서 피터는 아미르와 키스하는 모습을 과시적으로 노출하며, 칼의 환상에 불가능함을 가미한다. 철학자 헤겔은 결혼을 '숙취'라 표현했다. 공고하게 하나로 결합하기 전에는 결혼이나 안정적인 관계를 바라더라도, 정작 결혼하거나 안정적인 관계로 접어들면 그 사랑은 역겹고 울렁거려서 토악질 나고, 신비롭고도 환상적이던 빛깔을 잃는 법이다. 피터는 이를 잘 안다. 그래서 사랑을 전부 다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그가 쓴 각본을 찢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부정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칼을 사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남겨둔다. 칼을 파트너로 삼아 춤을 추되, 감질나게끔 아주 잠깐만 춤을 춘다. 이후 피터가 냉정함을 잃고 모든 것을 망친 영화 후반부에서 피터는 칼에게 애원한다. 비로소 모든 감정을 아미르가 아닌 칼에게 내어주지만, 칼은 처음으로 영화에서 감정을 분출한다. 피터와 시도니, 아미르의 무례함·인색함에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던 그가, 피터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도도하던 상대방이 자신을 위해 간청하고 모든 걸 다 내어주며 보잘것없어지니, 신묘하던 사랑은 시시해지다 못해 아예 식어버린다. 그 시간이 겨울밤, 눈이 잔뜩 쌓이고 찬바람이 쌩쌩 휘날리는 것처럼… 다시 초반부로 돌아가서, 피터가 칼과 춤을 추기 전에, 그는 시도니를 연기하는 이자벨 아자니가 발매한 노래를 듣는다. 인상적인 가사는 "모든 이가 사랑하는 것을 죽이네"라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가? 영화에서 피터는 인간은 혼자일 순 있어도, '함께'인 것은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또 결말에서 피터는 자신의 사랑이 '소유욕'이었음을 깨우친다. 즉 대상을 진정 배려하고 헤아리는 사랑이 아니라, 나만을 위해서 대상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 프란츠에 의한 피터가 위협을 느꼈고, 또 피터가 사랑하는 아미르를 촬영한 사진에서 소년의 몸은 언제나 결박되어 있다. 그렇게 내 사랑을 위해 상대를 숨 막히게 조인다. 또 피터가 시도니의 노래를 들으며 제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본인의 '성기', 그래서 나르시시즘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진 피터는 아미르가 부인 프리다를 만나러 가는 여행 경비를 자신이 내어주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손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제 자신의 들끓는 정욕에 휩싸여, 아미르의 농락이나 손해에 관한 냉철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외부가 아니라 자의적인 내부를 바라봄에 우매해진다. 사랑에 홀딱 빠져서 냉정함을 잃은 피터는 생일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사물을 파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에게 끌리지만, 사랑받는 사람은 연인을 밀어내고 도망치며 그 지위를 유지하는 법, 이러한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을 '자기 동일시'하기에, 멀어진 연인은 곧 나 자신과의 멀어짐, 이로써 나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즉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농락당한다. 영화 도입부의 파스빈더 포스터는 사실 피터를 연기하는 드니 메노셰의 것이라 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아미르와 결별한 이후 피터가 선글라스를 쓰고 춤추는 장면에서 메노셰와 파스빈더가 서로 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메노셰가 연기하는 피터의 시선이 칼을 지배하던 그의 집, 그런데 시선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시도니의 시선이 내려다보는 포스터가 걸려있다. 시도니는 피터의 침실을 응시하며 프란츠가 사라진 그 빈틈을 파고들어 아미르를 데려온다. '로미 슈나이더' 대신 자신을 캐스팅해달라는 듯 말이다. 그렇게 사랑에 빠져버린 피터는 자신의 시선을 잃고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며 정신을 잃는다. 이후 시도니의 포스터에 X자를 쳐서 그녀를 부정하지만, 대신 아미르의 화보 및 포스터가 곳곳에서 피터를 응시한다. 시도니에게 더는 휘둘리지 않고 배역도 내어주지 않지만, 대신 아미르에게 시달린다.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응시하며 뜯어내야 할 것을 뜯어낸다. 그렇게 타인의 이기적인 시선에 홀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점점 더 미쳐간다. 그렇게 미쳐가는 이유가 칼-피터의 관계를 설명할 때 언급한 '신비로움'에 있다. 시도니가 아미르를 처음 데려왔을 때, 아주 잠깐 럼만 들이키고 그의 집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피터는 아미르를 더 보고 싶은 호기심이 차오른다. 그간 피터는 사고로 사망한 가브리엘의 엄마, 프란츠 등 ‘백인’을 사귀었고, 또 자신의 ‘곁에 있는’ 칼을 노예로 삼고 있다. 그런데 아미르는 백인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는 머나먼 아랍인’이고, 칼과 달리 제 ‘곁에 머물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는 젊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던 프란츠는 마초적으로 피터에게 집착했다고 하는데, 나이에서도 덩치에서도 아미르는 그럴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라서 궁금한데, 영영 알 수도, 다가갈 수조차 없다. 아미르는 제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양치를 하기 전에는 키스를 허용하지 않고, 계속 붙어있는 것은 질색이라며 그를 밀어낸다. 분명 아미르는 피터를 울리면서도 웃게 만든다. 그를 쳐다볼 수 있음에 기쁘긴 기쁘다, 그러나 아미르의 육체에 손길이 닿을 수 없어서 애달프다. 그래서 즐거움은 결코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가브리엘이 아빠에게 "사랑이란 불행한데 행복한 것"이라 말한다.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손에 잡히지 않는가? 피터는 여자가 아니라 여배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아미르 또한 남자로서가 아니라 배우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랴. 사람이 아니라 배우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배우가 연기하는 아름다움, 신비, 환상에 빠진다는 얘기이랴. 그러나 배우의 연기는 헛것이요, 배우가 담긴 스크린 너머는 영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즉 사랑은 현실 너머의 미와 이상이기에 행복하고 다가서고 싶지만, 허구를 향한 발길은 헛걸음이 되어서 천상의 즐거움은 결코 도래하지 않고 반쪽짜리 행복은 불행하다. 이렇게 안 그래도 도래하지 않는 사랑을 논하는 가운데, 피터가 시도니에게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종은 “사랑이나 우정이 과연 순수한가?”라는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순수할 수 없다면 더더욱 다가설 수 없다. 내가 다가서려는 순수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고, 불순한 것에 다가서고 있었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먼저 시도니를 살펴보자. 영화 초반에 시도니와 피터는 대화하는데, 창틀이 그들을 분리한다. 시도니와 피터는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시도니는 피터를 위하는 척 궁금해하며 그 선을 넘어서 하나의 프레임에 함께 담긴다. 하지만 피터의 적나라한 얘기가 제 이익과 무관하고 심지어 기분을 불쾌하게 하기에, 다시 그의 곁에서,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지려 한다. 즉 시도니의 우정이란 제 이익과 호기심에 따른다. 이후 시도니의 코칭을 받는 아미르, 9개월간의 동거 동안 피터를 완벽하게 종으로 구슬린 아미르는 먼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피터만 들떠서 사랑한다고 쩔쩔매고, 만약 ‘키스’라는 선물을 하사한다면 피터에 의해 잡지에 실렸기에 보상 차원에서다. 아미르는 피터를 순수하게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가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부와 명성과 인기를 사랑하는가? 심지어 아미르는 피터가 자신을 돈과 명성으로 소유하게 놔두지 않는다. 어느 날 아미르는 피터를 독수공방시키고, 거대한 남근을 가진 흑인 남자와 하룻밤 즐기고 돌아와 이를 무용담처럼 떠들어댄다. 젊은 흑인 남성의 탄력적이고 우락부락한 몸매는 사랑하지만, 살이 뒤룩뒤룩찐 피터의 육체는 아미르가 사랑하지 않는다.      


돈과 명성으로 충족되지 않는 육체와 젊음, 그 결핍을 무한히 해소시켜주지 않으며 피터가 자신에게 쩔쩔 매달리게 만든다. 이렇게 사랑받기만 하며 이용하는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 너무 많아서 진심을 말할 때도 확신하기 어렵다. 프리다에게 향하는 아미르가 피터에게 ‘자신의 진심은 거짓말이 아니다’라고 항의하는데, 과연 그 말을 믿을 수나 있나. 사랑하는 자를 더 안달 나게 만들어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는 계획된 언어이자 연기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사랑받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본 극에선 ‘거울’이 자주 등장한다. 가장 먼저 피터는 칼과 춤추기 이전, 앞서 언급한 아자니의 노래를 들으며 거울을 응시한다. 그가 바라보는 것, 도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후 춤을 출 때도 칼은 피터의 몸을 조심스레 바라보지만, 피터는 제 시선을 거울이 있는 정면에 둔다. 칼의 시선은 피터를 향한 사랑, 반면 피터는 나르시시즘, 자기 이익의 냉정한 계산이다. 이후 피터가 거울 앞에서 함께 춤추는 대상은 칼이 아니라 아미르다. 그리고 피터가 아미르와 춤을 출 때, 그는 거울 앞에서 눈을 감는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또 현실의 아미르도 아니라, 그 너머의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듯이. 그러나 이 와중에 아미르는 눈을 뜨고 있다. 거울을 바라본다. 이렇게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른다. 나를 사랑한다, 나의 이익을 사랑한다,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대에겐 무슨 말이든 쏟아낼 수 있다! 반면 눈을 감은 피터는 나의 꿈과 망상을 사랑한다. 훗날 피터가 로즈마리에게 아미르를 향한 사랑이 집착과 소유욕임을 고백하듯, 자신이 바라는 아미르를 그려놓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의 아미르를 구속했음을 자백하듯 말이다. 이런 점에서 거울과 유사한 '유리창'의 ‘안과 밖’도 주목할법하다. 눈을 감고 내면을 상상함과 동시에, 창밖의 현실 대신 창안의 자택에 있는 사람은 망상에 갇힌다.    

  

초반부, 시도니와 피터는 각자의 연애담을 나눈다. 그들의 연인은 지금 여기에 없다. 특히 피터에겐 과거형이다. 그는 좀 더 자유롭고 진보적인, 그런 개방적인 사랑을 프란츠와 꿈꿨었다. 그런데 프란츠는 피터의 바람을 배반했다. 인간적이다 못해 마초적·야만적으로 변해 연인을 옭아맸다. 그 변함은 창밖에서 물들어가는 가을의 단풍과 유사할 것이다. 창밖의 늙어감, 변해감이 필연이지만, 창 안에 놓여 영원함이나 진보를 상상했다. 이상적이고 항구적인 사랑을 상상하던 피터 또한 변화가 그의 진실이었다. 피터는 프란츠의 야만성을 경계했지만, 정작 그가 고고하게 바라온 진보적 관계와 아미르를 향한 에로스는 불일치하다. 그렇게 변해가며 술과 마약을 들이키는 피터는 프란츠처럼 아미르에게 집착하고, 칼과 여성들에게 마초적인 힘을 과시한다. 물론 그도, 그의 사랑도 변해가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연인의 ‘변치 않음’이다. 피터의 생일 전야 시퀀스가 욕망에 갇힌 그를 단적으로 요약한다. 창밖은 차가운 겨울이다. 그것이 피터가 망상에서 깨어나 인식해야 할 자신의 진실이랴.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고 사랑에 있어 얼어붙은 상태, 그러나 피터는 독주를 연거푸 들이켜며 차가운 사실을 외면하고 초현실로 도주한다, 뜨겁게 춤을 춘다, 전화에 목을 매며 아미르를 기다린다. 뜨거운 것을 바라는 피터에게 차가운 현실, 아미르가 아닌 대상들의 업무적 호출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듯 사랑이란 현실 유리적이다. 현실과 분리된 이상을 바란다. 그래서 사랑은 현실의 내가 동경의 나로 넘어서기 위한, 나의 결핍을 충족시켜줄만한 사람, 나의 불가능을 실현해줄 사람과의 상호 ‘끌어당김’이다. 앞서 언급했듯 피터는 자국에서도, 그리고 영화계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중년이다. 육체는 매혹과 거리가 멀더라도, 경제력이나 지식에 있어서는 해박하다. 그래서 그는 안정적인 한편, 오래전부터 쌓아놓은 것만 되풀이되고 있기에 지루할 것이다. 여전히 그의 집에는 자신의 첫 작품을 함께 한 시도니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래서 이젠 오래전의 뮤즈가 아니라 신선한 뮤즈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이·성별 모두 다 파릇파릇한 아미르가 찾아온다. 아랍인인 그는 이주한 독일에서 자리를 잡길 원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부당한 해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난동을 부렸지만 복직은 불가능했고, 이후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했다. 그 후 아미르는 결혼했지만 이조차도 돈으로 좌우되었다고 회고한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 또 그는 피터의 영화를 모르고, 세상의 많은 부분에 무지하다. 그래서 피터는 제 영화와 교양, 돈을 내어주며 아미르의 결핍을 해소해주리라 유혹한다. 피터는 수학을 잘했지만 아미르는 체육을 좋아했고, 아미르가 해산물을 깔 수 없을 때 피터는 칼을 시켜 이를 해결해주며, 영화감독으로서 연기를 배우게 해준다. 또 원칙이나 법을 강조하는 피터에 비한다면, 칼은 느슨함을 선호한다. 한편 피터는 일방적으로 칼의 결핍만 채워주진 않는다. 지금까지 나열한 특성을 보건대, 그는 냉정하고 이지적이다. 그러나 시도니가 마약을 들이켤 때 피터는 한번 사양하다가, 이윽고 함께 마약을 흡입한다. 그는 감성, 쾌감, 도덕적 해이를 바란다. 아미르는 이혼하지 않고 피터와 불륜하며, 그 상태에서 이중으로 바람을 피운 사실을 호기롭게 밝히니, 피터의 바람이 아미르에게 있다. 그렇게 피터가 아미르에게 서서히 녹아들자 진보적이던 그의 욕망이 아미르에 의해 동물적인 에로스로 변한다. 이렇게 사랑이란 서로 보완하기 위해 끌어당기는 것,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특징을 ‘이데올로기’가 이용하고 있음을 오종은 까발린다. 피터의 생일이다. 딸 가브리엘, 시도니, 어머니 로즈마리가 차례로 피터 집에 방문한다. 이러한 와중에 피터는 아미르가 없다며 성을 내고 폭발한다. 이후 그는 세 여자를 자신을 쭉쭉 빨아먹는 기생충 취급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도니가 피터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소 가식적이다. 그러나 가식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성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이 경제적인 이유로 남성에게 이끌려야 함을 가부장제가 강제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 구조 속에서 돈과 명성만 많고 육체적 매력은 전혀 없는 피터, 창녀의 누드나 복식을 단지 가난한 아랍인 남성으로 뒤바꾼 아미르의 설정은 과연 우연일까? 또 그가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결혼하여 가브리엘을 낳은 것은, 여성과 남성을 강제로 끌어당기게 만드는 구조의 압력과 무관하다 말할 수 있을까? 더욱이 여성이 남성을 일방적으로 원한다는 착각을 낳는 가부장적 위계 때문에, 시도니가 피터를 두고 ‘약자에게 위선적’이라고 평가하듯, 남성은 여성을 증오한다. 정작 피터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어머니인 여성을 필요로 하듯, 남성이 여성에게 다가가는데 말이다. 그러나 오종은 피터-시도니의 관계와 같은 감독-배우, 남성-여성의 일방적 위계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본래 피터 역은 드니 메노셰가 아니라, 자비에 돌란에게 갔었다. 그리고 오종은 자비에 돌란에 맞춰 젊은 피터를 설정했고, 그가 불발되자 젊은 피터를 갈아엎어서 드니 메노셰의 나이나 풍채에 적합한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했다. 즉 피터가 상상하는 시도니와 달리, 오종의 감독-배우의 관계는 서로 끌어당기는 상호적인 사랑이다. 일방적인 위계를 오종은 몸소 캐스팅으로 반성한다. 이러한 끌어당김을 오종은 ‘색채’로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다 잘된 거야>에서도 오종은 색채를 부각하며, ‘상징적인 색’을 자신의 영상 언어로 채택한다. 피터의 집은 불그죽죽하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다 잘된 거야> 모두 다 알모도바르를 연상케 하는 '쨍한 빨강'이 도드라졌는데, 본 작품 속 피터의 집에도 알모도바르의 육감적인 빨강을 벽에 끼얹는다. 한편 이러한 가운데 피터는 항상 파란 셔츠를 입고, 또 파란 소파에 앉아있다. 차가운 피터에게 뜨거운 빨강은 ‘결여’ 내지는 ‘외면’이다. 그런데 빨간 옷을 입은 아미르가 찾아온다. 이후 아미르는 항상 빨간 배경에 놓인다. 피터가 해산물, 지식 등으로 아미르를 끌어당기던 식탁에서도, 피터와 그의 배경은 푸르지만, 아미르는 빨간 셔츠를 입고 뜨거운 배경에 위치한다. 파랑은 지상의 인류가 동경하는 하늘에 상응하는 정신적인 색채이자 명상적인 색채, 반면 빨강은 피를 가리키듯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색이다.     


즉 이들은 각자가 갖지 못한 요소를 상대방이 지니고 있다. 이후 9개월이 지나, 피터는 ‘노란 화장실’에서 포착된다. 그간 화장실에 칼을 보내서 잡일을 시켰을 피터, 그러나 이젠 자신이 화장실에서 잡일하고, 외부로 환하게 발산하며 무한히 소진하는 태양의 노랑처럼, 부산스럽게 아미르의 애정을 갈구한다. 그의 욕망은 외부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아미르가 ‘파래지며’ 냉정해진다. 더욱이 그는 빨간 배경에서 운동한다. 온색이란 점에선 똑같지만 ‘밝은’ 노랑에 비해 빨강은 어두워서 ‘내적인 운동’이 충만하다. 노란 피터가 외부로 에너지를 발산하며 내적으로 빈곤한 가운데, 내적으로 충일한 빨간 아미르가 피터의 결핍을 자극한다. 또 노란 피터는 표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정작 이에 동조해줬으면 싶은 아미르가 운동할 때 입는 나시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절망적인 ‘부동’의 회색이다. 꿈쩍도 않는 회색처럼 아미르는 피터를 위해 움직일 생각, 그에 의해서 밖으로 인도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후 아미르를 곁에서 떠나보낸 피터는 무(無), 아무것도 없는 하양, 아미르의 부재에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어머니에 의해서 다시 내면의 평정과 의식을 되찾은 피터는 푸르른 방에 놓인다. 육체에 쏠려있던 그의 관심이 다시 이성과 균형을 이룬다. 

이렇게 오종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사랑의 본질을 보색으로 가리킨다. 보색은 각자의 결핍을 조건으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피터가 바라는 사랑은 요구나 조건이 없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조건적인 사랑은 가능한가? 당장 칼을 붙잡는 피터도 아미르의 부재를 대체하리란 ‘계산’을 따른 것이 아닌가? 오종은 <피터 본 칸트>를 통해 필연적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성을 논한다. 이는 정치와 경제의 배후엔 언제나 리비도가 있다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흡사하다. 성을 위해서 정치·경제적 성공을 바라다가, 이윽고 정치·경제를 위해서 성을 이용하게 되리. 그래서 피터가 바라는 천상의 사랑은 오직 ‘물신숭배’로만 가능하다. 이지적인 영화감독 피터, 아름다운 배우 시도니, 계산적이지 않은 아미르는 오직 거대한 ‘사진’ 속에서만 유효하고, 깨어나면 정치·경제를 성과 결부시켜 경박해지니. 또 무조건적인 아미르는 필름으로 촬영된 둥근 테두리 안에서 꾸며지고 연출된, 현실의 흔적이 지워진 영화에서나 가능하니, 절대적 사랑을 위해 피터는 사진과 영상을 사랑하고, 현실의 아미르가 만나자는 연락을 거절한다. 그가 선택한 영화는 언제나 반복될 수 있지만, 영상이 반복되는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어도 피터는 아미르를 만질 수 없다. 또 붙어있을 때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정작 피터가 아미르의 점심 제안을 거절하자 소년은 못내 아쉬운 눈치다. 그렇다면 다시 현실로 향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랑은 다시 꿈틀거리지만, 움직이는 순간 정치·경제적인,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계산하는 게임으로 전락한다, 그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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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08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230307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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