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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12. 2022

미켈란젤로 프라마티노, <일 부코>

인간의 의지: 끝없는 탐구욕의 보고

미켈란젤로 프라마티노(Michelangelo Frammartino), <일 부코>(The Hole) 

- 인간의 의지: 끝없는 탐구욕의 보고     

“자연으로부터 그 비밀스런 것들을 빼앗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편견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자연의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는 것뿐이다.” -마르키 드 사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불가사의한 화가다. 이는 다 빈치의 작품이 매우 모호하여 다층적인 해석으로 끝없이 뻗어나가고, 이에 하나의 해석으로 좁혀지거나 닫히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그림 자체가 상징, 해석은 둘째치고서라도 매우 신묘하다. 조각을 선호하는 미켈란젤로가 매우 명확하고 정확한 묘사를 지향했다면, 다 빈치는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명칭이 의미하는 '연기'처럼, 윤곽선과 경계선을 흐릿하고도 미묘하게 처리했다. 그래서 다 빈치의 인물들은 그들이 어떤 심리 상태인지 확답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띠고 있고, 이에 감상자에게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만 남긴다. 이와 더불어 다 빈치가 인물의 뒤편에 그려낸 풍경이 당최 어디인지, 장소의 실체가 여전히 베일에 덮여 있으므로 그를 둘러쌌던 세계가 불가사의하다. 다 빈치의 대표작인 <암굴의 성모>에 등장한 동굴과 바깥의 숲은 과연 실제 풍경인지, 아니면 다 빈치가 여러 환경을 이상적으로 취합해놓은 것인지 아직도 불분명하다. 이러한 다 빈치의 회화에 많은 영감을 준, 미지에 싸인 동굴들이 여전히 이탈리아에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감독 미켈란젤로 프라마티노는 남부 이탈리아의 한 동굴로 카메라를 돌린다. 1968년 밀라노 태생의 미켈란젤로 프라마티노는 <네 번>으로 국제영화계에서 주목받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네 번>에서 윤회를 구현하며 삶과 죽음을 심오하게 고찰했다. 영화는 한 늙은 목동을 포착하며 시작된다. 그는 지병이 있는지 영화 내내 계속 기침을 하며 약을 챙겨 먹는다. 그가 챙겨 먹는 약 중 하나는 교회에서 받아온 숯가루다. 감독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재로 만드는 희생을 환기하고, 우리는 삶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의 죽음을 먹어가며 전진한다는 철학을 보여준다. 목동이 버린 쓰레기에 개미가 모여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생명체가 죽고 연소하여 남은 찌꺼기를 취하며 우리는 산다. 그렇게 죽음을 밟아가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에 도달한다.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밟아가는 인간은 현재적인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목동의 양치기 개는 주인의 죽음을 경고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재에 관심이 없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재현하기 위한, 즉 과거에만 주목하고 침잠한다. 인간은 물질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죽음도 먹고 산다. 이에 영화에서 목동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사멸한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서 있는 우리는 현재보다 기원에 관심이 많아서, 현재의 죽음을 등한시한다. 그렇게 목동은 사망하고, 그가 기르던 염소들은 해방된다. 여러 생명체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관계 맺은 다른 존재의 자유를 구속하기도 한다. 허용과 금지를 구분하며 말이다. 그리고 염소의 자유를 제약하던 목동이 사라지자 비로소 그들은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한 생명체가 죽고 재가 되어 흙과 하나 되면, 다시금 그것을 섭취한 다른 생명체가 새끼를 잉태하고, 그 육신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변화한다. 목동의 죽음 이후 새끼 염소가 태어난다. 그것이 감독의 윤회다. 그리고 목동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더 자유롭다. 하지만 어떤 금기들은 곧 위협을 가리킨다. 새끼 염소는 그걸 모르고 풀숲에서 뛰놀다 길을 잃고, 이윽고 대지와 한 몸이 된다. 아무리 어린 생명체라 할지라도,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내내 정적으로 고요하던 카메라는 새끼 염소의 자유로운 발걸음을 핸드헬드로 뒤따라가지만, 그 끝은 결국 죽음이다. 이윽고 아기염소의 주검에서 나무가 자라나고,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활용하다 이윽고 숯이 된다. 숯을 포착하던 영화의 도입부는 숯을 포착하며 마무리되며, 새카맣게 타버리고 다시금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하는, 죽음이 마냥 악이 아니고, 삶이 마냥 선이 아닌, 양자가 양립하고 뒤섞이는 삶과 세계를 포착하며 마무리한다.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닌 영화, 그렇게 계속 순환할 영화, 이러한 본 작품을 프라마티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혼합한 양식으로 연출한다.      


현실의 객관적인 기록과 허구가 공존하는 본 작품은, 마찬가지로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수행했던 키아로스타미나 콘찰로프스키의 작품세계를 연상케 한다. 목동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염소들의 움직임도 일련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염소들조차도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처럼 인간의 꾸밈·전시와 상반되는, 어떠한 연기도 없는 순수한 표현을 보여준다. 이들을 제외하면 촬영은 순수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을 이어내는 편집은 감독의 주관이 개입되어 픽션임을 숨기지 않는다. 감독은 객관적으로 촬영하고, 주관적인 편집 및 몽타주로 윤회라는 사건, 각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키아로스타미처럼 현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는 궁극적으로 진실에 귀결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인지 픽션인지 양자 중 어느 하나를 구분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는, 그것 자체로의 진실을 긍정한다. 이제 프라마티노는 남부 이탈리아의 한 미지의 동굴로 향한다. 그는 어떤 진실을 길어내고, 또 그것을 어떤 주관성으로 배치할까. 일단 본 작품은 장르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작업부터 필요하다. <일 부코>를 처음 마주하면 감상자는 곤혹에 빠진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다큐멘터리인가 픽션인가, 현실의 냉엄한 기록인가 아니면 프라마티노가 구축해놓은 가상의 세계인가. 일단 본 작품의 큰 틀은 픽션이다. 프라마티노는 1961년 북부 이탈리아의 동굴 탐사대가 남부 칼라브리아로 와서 진행한 탐험을 영상화, 즉 1961년의 사건을 2021년에 소환한다. 본 소환은 현실의 자의가 아니라, 영화를 위한 프라마티노의 의도로 발생한다. 더욱이 영화의 연출에도 본 작품이 픽션이라는 힌트가 있다. 바로 동굴 내부에 위치하여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카메라가 그렇다. 탐사대와 함께 동굴을 파헤치고, 그 과정과 정보를 기록하는 1961년의 다큐멘터리라면 탐색의 끝에 미리 가있지 못할 테다.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파헤치는 기록의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픽션은 일반적으로 이미 답, 곧 결말이 미리 각본에 완성되어 있다. 본 작품에서도 미지의 동굴 내부, 그것도 바닥에 미리 자리하고 있는 카메라는 본 작품이 1961년에 이미 완결된 사건을 재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픽션이라고 마냥 단정할 순 없는데, 본 작품에는 통제되지 않은 우발적인 현실을 수동적으로 기록한 숏이 있기 때문이다. 캠프에 고개를 쑥 내밀어 마음대로 침입하는 말을 감독이 디렉팅한 것일까, 종이를 흩날리게 하는 바람을 감독이 만들어낸 것일까, 골목에서 아이들의 솔직한 장난과 동굴 입구에서의 공놀이, 그 모든 내지인의 행위와 반응이 감독의 디렉팅에 따른 것일까. 동굴 탐험과 그것을 유비해서 보여주는 노인의 죽음이 과거의 재현, 픽션이라면, 즉흥적인 요소들은 그것이 재현되는 오늘날의 현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그래서 1961년을 소환하는 틀은 픽션이되, 그것이 소환되는 2020년대라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즉흥들은 다큐멘터리다. 그렇다면 프라마티노는 왜 1961년에 발생한 과거의 사건을 오늘날에 재현하는 것일까. 칼라브리아 동굴탐험은 다 빈치만 알고 있을 법한 비밀스런 동굴을 대상으로 했기에 탐사 대상이 베일에 싸여있기도 했지만, 이와 동시에 동굴탐사 프로젝트 자체가 비밀리에 부쳐졌다. 그래서 탐사대를 제외하고는 충족시키지 못한 인류의 호기심을 파헤치기 위해서 본 작품은 베일에 둘러싸인 1961년을 재현한다. 무엇보다 본 작품의 결말에서 동굴 탐사가 마무리되긴 하지만, 그렇게 완결됨과 동시에 곧바로 안개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죽은 목동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또 다른 미지의 호기심이 탐사대와 감상자의 귀를 자극한다. 그래서 완결되더라도 거기서 또 다른 미지가 차오르기에 우리는 '닫힌 줄 알았던 과거'를 다시 궁금해 한다. 그렇게 닫힌 줄 알았던 과거가 재현되는 시간은 2020년대다. 동굴의 시간도, 그리고 동굴 주변이 생활반경인 사람들도 2020년대에 살고 있다. 1961년에서 2020년대로 이어진 동굴은 닫히지 않았다. 항상 빗물을 받아먹는 동굴은 흘러가는 시간으로 자신을 채워내며 미완을 유지하고, 이로써 과거와 다른 오늘날의 미지를 무한히 생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동굴에 채워지는 비밀들을 알기 위해 2020년대에 또 다시 동굴탐사를 감행할 수밖에 없다. 1961년의 대상과 2020년대의 대상은 다르기에.    

 

이러한 본 작품의 연출, 일단 카메라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 트래킹숏이나 달리숏은 없다. 카메라의 운동은 기껏해야 틸트, 패닝에 그친다. 이렇게 고정된 카메라는 감상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기에 시야는 제한된다. 그런데 보이는 것 너머로, 미지의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나귀의 울음소리,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소리가 말이다. 우리는 나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심지어 나귀가 하는 말은 맞는지, 영화는 무슨 영화인지가 궁금하다. 추상적인 사운드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밝히고자 하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에 따라 카메라나 편집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째서 움직이는가, 바로 알기 위해서. 이후 영화는 이동하여 나귀의 울음소리라 추측했던 소리가, 사실 목동이 나귀의 울음을 흉내 낸 것임을 밝혀낸다. 이렇게 규명되기 전까지의 미지는 인간의 발이 묶여 있기에, 인간의 시야가 제한적이기에 발생했다. 고정된 카메라는 유한한 자신과 환경에 고정되는 인간의 처지를, 그럼에도 제한된 시야 너머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준다. 또 인간의 탐구욕은 대상을 파헤치고 보고자 하는 '주체인 나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패닝과 틸트로 동굴 내부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결국 시선의 주체인 카메라가 고정된 위치, 인간이 살아가는 초원으로 돌아온다. 틸트와 패닝의 되돌아옴, 그것은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내게로 돌아오는 의지의 방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본 작품의 카메라는 기교가 없다. 카메라는 탐사대의 움직임에 따라서만 간헐적으로 움직일 뿐이며, 탐사대가 비춘 동굴의 굴곡, 질감, 이를 가능케 한 힘을 세심하게 비출 뿐이다. 우리는 본 작품의 '구멍 너머' 이미지를 궁금해하지, 카메라가 보여주는 기교에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탐구욕, 대상의 진실에만 충실한 연출을 선보인다. 롱테이크를 통해 대상의 행동을 충실하게 붙잡고, 이를 충분히 관조할 시간을 보장한다. 그래서 본 작품이 다큐멘터리로 혼동될 만하다. 그럼에도 동굴과 목동을 매치컷하고 몽타주하는 편집을 통해, 객관적인 이미지에 감독의 각본, 이야기를 뒤섞는다. 이러한 본 작품은 분명 유성영화다. 하지만 자막은 기껏해야 칼라브리아 동굴 탐사에 관한 내용과 초반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흑백 영화의 대사를 번역하는 데 그친다. 또 사람들의 대화는 전무하고, 설령 대화하는 것처럼 보여도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며, 사람의 말 대신 바람 소리, 수탉의 울음, 나귀를 따라 하는 사람의 고함, 돼지의 비명이 대신한다. 구체적이기보단 추상적인 청각이 가득하다.      


언어는 비교적 명쾌하게 의미나 지칭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의 단어는 언제나 하나의 기의를 가리키는 상징이자 기표는 아니다. 오히려 다의적인 알레고리에 가깝다. 하지만 맥락 속에서 다의적인 언어는 해석의 범위가 점차 좁혀진다. 그 맥락은 전후에 오가는 또 다른 언어, 그리고 언어와 결합하는 이미지일 수 있다. 이미지도 이미지 자체로는 모호하다. 특히 본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라서 안 그래도 시야와 정보가 제한적인데, 이러한 시야에 더해 대상을 롱숏, 익스트림 롱숏으로 저 멀리서 포착한다. 그렇게 포착된 대상을 따라가지도 않음에 목적지가 어디인지, 대상에게서 너무나 멀리 있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명확하지 않고, 이에 이미지는 추상적이다. 본 추상적인 이미지에 대사, 말, 언어가 결합되면 여러 추측이 난무하던 이미지는 소수의 가능성으로 좁혀지다가, 이내 곧 하나의 결론으로 종합될 수 있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는 자연물들의 모호한 청각을 설명해줄 만한 다른 매체나 감각의 맥락이 존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모호한 이미지들에게 설명·정보를 덧붙여줄 만한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 작품은 '무성영화적인 유성영화'라 할법하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미학을 논할 때, 언제나 무언극을 칭송했다. 무언극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것을 깊이 있게 표출할 수 있다. 그는 무언극을 행동으로 혁명적 목표를 보여주는 고유하게 개방된 아우라라 주장한다. 무언극은 현실과 분명 다른 예술의 의의를 보여주며, 그래서 블로흐는 현실과 흡사한 유성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성영화가 소리 연기 대신 육체 동작을 중시하고, 소리와 관계되는 팬터마임이 되어, 청각적인 무언극이라는 역설을 창출해 낼 때 위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희망의 철학자로서 새롭게 가능할 미래, 창조성을 긍정한 블로흐는 마찬가지로 제한적이거나 닫혀있지 않고, 언제나 제 자신을 새롭게 갱신하며 출산하는 예술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매체 중 가장 추상적인 음악을 선호하였는데 무언극과 무성영화, 무성영화적인 유성영화를 긍정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전작에서나 본 작품에서나 무성영화적인 유성영화를 보여주는 프라마티노, 일단 본 작품은 이미 완결된 과거가 현재에 소환되는, 이에 과거의 맥락 속에서 현재가 좁혀지는 유성영화다. 하지만 뚫려있는 구멍은 한 순간이 완결됨과 동시에 또 다른 시간을 채워내고, 이로써 미지를 새롭게 축적함으로써 다시 ‘해석되지 않은 무성영화’가 된다. 그래서 영화는 오늘날에 다시 미지가 된 동굴의 무성영화, 과거의 완결된 사건이 현재의 여지를 좁히는 유성영화를 조합한다. 궁극적으로는 무성영화에 가깝다. 유성영화의 언어가 가리키는 의미는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로 포착된 본 작품의 도입,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굴 내부에 카메라가 위치해있다. 거기서 시간의 흐름을 담아낸다. 이윽고 낮이 되어 세상은 선명해지고, 소가 빼꼼히 동굴 아래를 내려다본다. 서로가 동등하게 마주 본다. 그리고 동등하게 궁금해하리. 동굴 아래서는 어쩌다 소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소는 내려갈 수 없는 동굴 내부가 흥미로울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서로는 무성영화, 파헤쳐지지 않는 거대한 신비다. 이윽고 이러한 거대한 신비의 정수를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여준다. 하늘, 구름, 계곡, 협곡 곳곳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한다. 거기에는 어떤 생태계가, 또 어떤 삶이 숨어있을까. 너무나 나직한 롱숏의 피사체들, 이윽고 카메라는 마을로 시선을 옮긴다. 마을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 소리가 귀를 궁금케 한다. 호기심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흑백영화로 감상자를 인도한다. 이윽고 북이탈리아의 풍경이 흑백으로 펼쳐진다. 인위적인 마천루가 하늘 높이 뻗어나간다. 남부에서는 보지 못할 풍경, 이에 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새로운 신비로움이다. 그러나 이윽고 그 신비는 사라진다. 마천루의 엘리베이터를 타면, 너무 높았기에 신비로웠던 정상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다. 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기업의 수뇌부는 마천루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간단하게 간파한다. 그들은 특정 직함, 계급으로 규정되며, 그 너머의 신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마천루, 그것을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공적인 것 너머를 가진 사적인 인간의 신비는 등한시되고, 그렇게 타인에게 드러나서 상품성을 인정받는 인간의 얼굴이 전부다.    

 

인간의 더 많은 신비, 대상을 더 알고 싶은 욕망이 소거되는 계산적인 북이탈리아, 그래서 탐사대는 여전히 미지의 매혹이 가득 찬 미개발지인 이탈리아 남부로 향하는 것이랴. 기차역에 사람들이 도착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관의 흑백영화, 거기서 모든 신비와 가능성은 닫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일부 존재한다. 탐사대는 교회에서 불편한 잠을 청한다. 오랜 중세의 조각상들과 함께 말이다. 조각상이 보여주는 행동, 포즈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감상자에게 특정 포즈를 보여주고,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멈춰서 굳어 있는 조각상은 하나의 목적, 그 이상의 신비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 조각상을 보존하거나 수리하려는 시도도 포착된다. 조각상은 언제나 만들어진 그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하며, 변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지 않는 조각상은 과거에 완결된 본인의 목적에서 새로운 신비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 곁에서 탐사대는 잠을 청한다. 본 작품에서 어두운 밤에 잠을 청하는 것은 ‘닫힘’으로 해석된다. 잠을 자는 것은 행동과 가능성을 말소하는 행위다. 심지어 조각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잔다. 이후 탐사대가 동굴의 심연, 심장부로 내려간다. 이윽고 오늘은 더 이상 탐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탐사대가 지상과 자신을 이어내는 로프, 사다리를 흔든다. 외부에서 그것에 반응하여 내부의 탐사대를 올려줘야 한다. 그런데 외부의 사람들은 잠이 들었다. 그 흔들림을 감지하지 못한다. 가까스로 깨어나긴 하지만, 잠에서 깨지 못했다면 탐사대의 생존, 동굴 바깥으로 나올 가능성은 차단되었으랴. 또 아침에 캠프에서 대원들은 곤한 잠에 빠져 있다. 이윽고 이른 아침부터 깨어난 말이 캠프 안으로 머리를 불쑥 들이민다. 인간이 자연에 공존하는 남부 이탈리아이기에 가능한 경험, 하지만 자는 사람은 기존 자신의 인식을 뒤흔드는 무섭거나 생경하거나 재밌는 열린 경험에서 배제된다. 또 깨어나 있더라도 자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태가 있다. 바로 영화의 늙은 목동의 상태다. 그는 항상 똑같은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초원을 내려다보고, 그 길을 나귀와 동행하며, 이러한 목동의 얼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너무나도 명확하게 포착된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그는 항상 깨어있는 존재다. 그의 얼굴을 더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또 처음에는 나귀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 신비로웠지만 반복되니 시들해진다.      


그런데 동굴 탐사가 시작되자 그는 스르르 눈이 감기고 깨어나지 못하고, 오두막에 복귀하지 못한다. 깨어있지만 자는 것이나 다름없던 존재는, 이윽고 잠이 들면서 비로소 다른 상태를 갖게 된다. 다른 상태를 받아들이자 늙은 목동은 신비의 대상, 탐구하거나 파헤쳐야 할 대상이 된다. 동굴 탐사에서 바닥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불을 붙여서 밑으로 떨어트리는 잡지도 마찬가지다. 잡지는 무한 복제될 수 있다. 양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유한하다. 잡지가 가리키는 이미지는 대중들이 기대하고 염원하는, 극소수의 몇 가지 가능성으로 제한된다. 그런데 이러한 질적 상태를 불태운다. 그렇게 불태우며 잡지의 종이는 그것이 담은 이미지를 가리키는 역할만 갖지 않고, 자신을 불태우며 동굴을 비추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열린 태도, 그리고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 마을의 아이들은 자야 하는 밤에 깨어있다. 그들은 교회 앞에서 사람들이 뭘 하는지 궁금하고, 또 어둠에 감춰진 밤의 마을이 어떤 상태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헤드랜턴을 차고 잠들어있는 동네 곳곳을 밝히고 깨우며 밤의 새로운 모습을 만든다. 또 동굴은 구멍과 틈이 있다. 본 작품의 제목처럼 말이다. 구멍은 흡사 인간의 눈처럼 내부와 외부를 시각으로 잇는다. 그래서 동굴 내부에서 구멍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동굴의 눈에 상응하는가. 외부와 닫히지 않은 열림, 깨어있음으로서 구멍은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그 가능성은 인간의 기준에서 추상적인,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동물들, 그리고 둥근 공이다. 직선은 뻣뻣하고, 하나의 직선은 하나로 계산된다. 하지만 곡선은 다르다. 여러 형상이 될 수 있다. 하나의 곡선이라 할지라도 유연하고 구불구불한 곡선은 여러 목적지를 우회할 수 있다. 그리고 공은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그러한 공을 가지고 사람들이 동굴 앞에서 축구를 한다. 동근 공은 항상 그들의 발에 정상적으로 도착할 리는 없다. 곡선으로 이뤄진 공은 두 남자의 발이란 목적지를 이탈하여 동굴의 구멍 밑으로 떨어진다. 열려있는 동굴의 구멍은 이를 받아서 공의 새로운 길을 만들고, 또 동굴이 채울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수집한다. 구멍을 통해서 온갖 것들이 흡수되고, 비가 내리면 빗물도 받아 마신다. 그렇게 동굴은 파헤쳐졌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가능성을 잉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굴을 파헤친다. 그리고 동굴을 파헤치는 장면과 쓰러진 늙은 목동을 오두막으로 옮기고 진찰하는 시퀀스는 교차편집, 매치컷된다. 동굴 밖에서 안으로 빛을 쏘는 숏이 목동의 동공에 빛을 비추는 숏으로 이어지고, 동굴 속으로 깊숙하게 내려가는 숏이 청진기로 노인의 복부 상태를 가늠하는 숏으로의 이어진다. 왜 목동은 동굴과 함께 이어지는가. 목동은 동굴의 화신인가? 늙은 목동은 마찬가지로 억겁의 세월을 버틴 동굴과 닮아있다. 목동의 주름과 침윤된 동굴의 질감은 아주 유사하다. 또 동굴에서 고함을 외치면 메아리치는 점이, 나귀의 소리를 흡사 메아리치듯 반사하는 목동과 닮았다. 하지만 동굴과 목동이 같은 존재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단일한 상태로 놓이지 않는 늙음에 대한 신비, 하나이면서도 다양한 상태를 품고 있는 실존에 대한 신비, 바로 그 신비로운 대상에게 이끌리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신비롭다면 그것이 무생물이든 생명체든 항시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이러한 인간의 탐구욕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에서 비롯한다.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인 의지가 육체와 정신, 모두를 관장하며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의지가 곧 인간이다. 인간의 의지는 목표도 결말도 없는 강렬한 의욕 내지는 거대한 정열이며, 의욕을 바탕으로 갈구하는 대상, 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알려고 노력하기에 의지는 곧 호기심이요, 지식은 의지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에서 무한한 의지는 결코 끝나지 않고, 하나의 의지가 만족되면 거기서 또 다른 의지가 샘솟으니, 그것이 곧 인간 호기심의 근원이다. 본 작품이 바로 의지를 형상화한, 프라마티노 식의 <잃어버린 도시 Z>라 말할 수 있으랴. 의지는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대상을 갖고, 알고, 파헤치고 싶다. 그래서 사다리와 줄로 대상에게 내려가서, 다시 내게로 되돌아오고, 그 대상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환기하는 호루라기를 주기적으로 불어야 한다. 그래서 의지로 다가서면서 점차 확대되는 것은 동굴이 아니라, 동굴을 탐사하는 사람들이다. 롱숏에서 토씨처럼 보이던 사람들은 이윽고 동굴의 심연으로 침잠하며 풀숏으로 포착되니 말이다. 불붙은 종이로 바닥의 깊이를 확인한다. 이윽고 밤에 사람들이 피운 모닥불을 클로즈업으로 확대한 숏이 이어진다. 동굴을 밝히기 위해 비추었던 불은, 밤에 즐기고 생존하기 위한 나를 위한 불이었나.      


이러한 의지는 갖고 나면 곧 흥미가 떨어진다. 나는 기존에 내가 가진 것들을 등한시하며, 의지가 가리키는 더 먼 곳으로 나아간다. 이에 내가 가졌던, 초원에 놔두고 온 동굴을 파헤쳐 도출한 정보들은 바람에 흩날린다. 이렇게 도외시하며 기존 의지를 잃고 잊으므로, 우리는 당시엔 당연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1961년의 미지를 재탐사하는 것일지 모른다. 또 이미 충족된 의지인 잡지는 다른 의지의 형태로 불태워져야지만 새로운 의지에 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의지로 동굴 밑바닥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생명의 원천인 물이 있다. 하나의 의지의 최종 목표는 다름 아닌 창조일지 모른다. 인간의 의지는 성과 연관한다. 그래서 동굴로 향하는 의지의 과정을 담아낸 본 작품은, 성의 과정이라는 은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 탐사대는 깊고 어두우며 굽이치는 동굴 깊이 진입하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그렇게 파헤치고 또 파헤친 막다른 골목에서 물을 발견하고 되돌아와, 그 결과를 지도와 삽화로 남기며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왜 인간은 의지를 지향하는가, 그것은 새롭게 밝히고 창조하기 위해서, 그런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의지로 향한다. 태어난 지 몇 년 채 지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헤드랜턴을 끼고 밤에 자신들의 호기심이란 의지를 지향하는 것을 보라. 이렇게 프라마티노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죽으면서 살고, 죽으면서 의지에 근접한다. 그렇게 의지가 끝난 인간은 또 다른 의지로 향하고, 의지의 여정을 마무리한 인간은 이제 다른 존재로 변환한다. 목동은 망자가 되고 또 '물안개'와 같은 존재로 변환되어, 남겨진 사람들의 ‘신비로움’이란 또 다른 의지를 자극하니, 이렇게 1961년의 탐사는 온전히 완결되거나 사멸하지 않고 2020년대로 달리 다가온다. 탐사대이자 의사인 우리는 의지를 지향함으로써 밝히고 만들고 창조하며, 그렇게 죽어서도 보존한다. 여전히 죽어서도 이어지는 삶을 고찰하는 프라마티노, <일 부코>에서의 죽으면서도 사는 삶은 죽어서 모든 게 닫히더라도 미약하게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과 물, 그럼으로써 차오르는 또 다른 가능성과 의지다. 이러한 모험을 무성영화적인 유성영화, 다큐멘터리적인 픽션으로 펼쳐내는 프라마티노는 비추고 사유하는 것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형식과 경험을 고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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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12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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