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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17. 2022

로렌조 비가스, <더 박스>

혼혈의 얼굴, 백인 아버지인가 원주민인가

로렌조 비가스(Lorenzo Vigas), <더 박스>(The Box) 

- 혼혈의 얼굴, 백인 아버지인가 원주민인가     

“이러한 삶과 타협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현실로 인정할 시기였다. 아직 의혹은 남았지만, 그것은 가능한 한 내 자신 속에 깊숙이 묻어 두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아들들은 아버지 없는 유년기를 보낸다.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는 모두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그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들이기에, 두 아들은 모두 제우스에게 찾아가는 여정을 거쳐 아버지에 필적하는 신으로 인정받는다. 반인반신의 아들들도 마찬가지다. 친모 알크메네와 양부 암피트뤼온 사이에서 길러진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열두 과업을 완수하여 제우스에게 도착하고 신으로 거듭난다. 한편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헬리오스가 아버지임을 깨달은 이후 그의 권능에 필적하길 시도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해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는다. 이러한 '신의 아들'은 이후 그리스 신화를 많은 부분 차용하고 변형시킨 성경에도 이어져, 친모와 양부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는 마찬가지로 아버지 없는 아들의 시련, 아버지에게 향하는 아들의 서사를 보여준다. 고대의 부재한 아버지, 항상 곁에 있는 어머니, 궁금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동시대까지 이어진다. 신화, 종교, 이데올로기를 거쳐서 생존해왔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아들의 시점에서 항상 남겨지고 희생하는 여성이자 어머니를 <거울>에서, 반면 위업으로 향하고자 가정을 비우고 외부로 나도는 남성-아버지가 등장하는 <잠입자>를 한 쌍처럼 연출했다. 이렇게 떠날 수 있는 아버지는 '위업'을 핑계로 비호되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단지 임신과 출산을 직접 겪는 여성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 그리고 로렌조 비가스는 이러한 '아버지 찾는 아들'의 서사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감독이다. 그에게 아버지는 위업을 위해 떠난 존재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허용된 방종으로 인해 가정에서 사라지는 존재, 아들은 그러한 존재를 항시 찾아 나선다.     


1967년 메리다 출생의 로렌조 비가스는 베네수엘라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분자생물학을 전공하였으나,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 오스왈도 비가스를 따라, 그 또한 영화감독으로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장편 데뷔작 <먼 곳으로부터>를 통해 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알렸다. 로렌조 비가스는 베네수엘라의 사회상을 곳곳에 녹여낸다. 가장 먼저 보수적인 성적 통념을 꼬집는다. 주인공 아르만도는 게이다. 비가스는 베네수엘라의 뜨거운 뙤약볕이 곳곳에 작열하는 외부 군중들의 열정을, 폐쇄적인 집에서 자위하고 간접적으로 관계 맺는 얼어붙은 아르만도의 초상과 대비한다. 외부에는 아르만도가 시선을 교환하는 에다르라는 청년 갱이 있다. 그는 이성애자처럼 보인다.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는 아르만도와 키스하고 사랑을 나눈다. 비가스는 아르만도와 에다르의 나이 차를 아버지와 아들 정도로 설정한다. 그리고 로렌조 비가스는 gv에서 베네수엘라에서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가정환경이 허다하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아르만도나 에다르가 동성을 성적으로 지향하는 취향은 부재한 아버지를 갈망하는, 또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욕망을 닮은 것이랴. 아버지를 향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말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성 지향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르만도는 감정이 없다. 언제나 이성적이다. 빈곤한 에다르에게 아버지뻘인 아르만도는 나름의 용돈과 먹을거리를 쥐어준다. 돈을 지불한 대가로 정사를 나누고, 끝끝내 아르만도가 증오하는 아버지를 살인 청부한다. 아르만도는 진정 에다르에게 감정이 있었을까. 감정은 있었지만, 사랑할 줄 모르고 받아본 적 없었던, 오직 증오와 복수심만 알고 계산하는 뒤틀린 남자는 이성적으로 어설프게 사랑을 모방한 것은 아닐까. 그가 틀니를 만드는 의치사인 것처럼, 어설프게 사랑의 원본을 모방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가 모방하는 것은 결국 아버지 아닌가. 그는 어렸을 적 성적 트라우마가 있는 것으로 암시되는데, 끝끝내 아르만도는 복수하고 싶은 아버지에게 도착하고 에다르를 시켜 그를 죽인다. 이후 에다를를 밀고하여 아들뻘인 그가 아버지뻘인 자신을 다시 증오하게 만들며, 결국 증오하는 대상을 모방한다.      


즉 베네수엘라의 아버지 없는 아들은 증오하면서도 궁금한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비로소 아버지에게 다가가면 필적한다, 가장의 폭력성을. 그 과정에서 아들에게는 다시 아버지가 사라지고,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하는 폭력의 연쇄를 남긴다. 또 아르만도는 백인 중산층이고, 에다르는 원주민이다. 인종이 결정하는 경제적 계급, 이에 따른 백인의 원주민 지배라는 구도로도 <먼 곳으로부터>를 읽을 수 있다. 안정적으로 소속하는 의치사, 반면 불법의 경계에 서며 중심부에 소속될 수 없는 갱 에다르, 그것을 이용하여 살인을 청부하는 아르만도, 이에 따라 백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원주민의 아비투스를 말이다. 에다르의 아버지가 없는 이유는 체포되는 자신과 같은 이유, 이로써 아르만도의 아버지와는 다른 이유가 아닐까. 백인에겐 다가갈 아버지가 건재하지만, 원주민에겐 다가갈 아버지가 남아있는가? 이렇게 베네수엘라의 아버지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각도에서 진단하는 로렌조 비가스, 그는 신작 <더 박스>에서 또다시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아들을 그린다. 아버지의 유해를 발굴하는 아들의 여정을 쫓아서 말이다. 비가스는 자신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오이디푸스와 같은 아들을 이번엔 멕시코에서 포착한다. 일단 도입부, 새카만 어둠 속 일정한 속도로 무언가를 가격하는 소음만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이윽고 영화의 주인공 해친이 철제 벽을 발로 차서 발생한 소리임이 밝혀진다. 비가스는 어둠을 개벽하여 소년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전히 벽이랑 발이 부딪히는 불쾌한 소음이 이어지고, 또 시각 자체도 답답하다. 왜냐하면 철제 벽으로 막힌 좁다란 공간에 쪼그리고 있어서 안 그래도 갑갑한 해친을, 비가스는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빼곡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후 타인이 호명하여 바깥 객실로 나온다.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타서 아버지의 유해가 발굴된 매장지로 향한다. 소년이 발로 더는 벽을 치지 않고 밖으로 나오게 해준 타인은 해친이 가야 할 길이 '아버지'임을 가리킨다. 이후 영화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바스트숏, 풀숏으로 확장되고, 특히 2.39:1의 널따란 화면비의 개방성이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갑갑했던 이유, 그것은 비가스의 전작처럼 아들은 자신이 닮고자 하는, 또는 닮아야 하는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에 어딘지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모호하던 그 아버지를 마주하러 감에, 흡사 알에서 깬 듯 일련 숨이 트인다. 비로소 아버지가 가리키는 바깥으로 나오고 걸으면서 말이다.     


이처럼 본 작품은 아들 해친이 아버지 구 에스테반, 현 마리오를 만나러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영화 중반에 TV에서는 무수한 실종자들이 묻힌, 또 다른 매장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된다. 유가족들은 실종자들이 살아있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죽음에 실망하고 암담해한다. 아마 해친도 그랬으랴. 실종된 아버지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답답함, 그 갑갑함이 유해 확인으로 일련 해소된다. 그러나 확신할 순 없다. 아버지 에스테반은 마리오로 이름을 바꾸고 멀쩡하게 잘살고 있고, 상자 안의 유해는 에스테반의 것이 아니라 그로 둔갑된 다른 누구의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흔들린다. 본 작품의 연출은 핸드헬드와 롱테이크의 결합을 특기할 만하다. 기계·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람의 손과 발에 의해 흔들리는 카메라, 그리고 현실의 시간과 유사한 롱테이크가 결합한 형식은 감상자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안정적이고 완벽한 환상이 아니라, 시간을 컷할 수 없고 불완전한 손과 다리가 흔들리는 객석과의 혼동을 자아낸다. 즉 현실과 아주 닮아있는 양식이다. 이와 더불어 마리오를 ‘연기’하는 에스테반을 맡은 배우 헤르난 멘도자는 미셸 프랑코의 작품에도 자주 출연하는 유명한 배우지만, 외의 배우들은 비전문 배우들로 배역과 배우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헤르난은 에스테반을 연기하고, 또 마리오를 연기하나, 해친은 그를 맡은 배우의 실제 이름과 동일하다. 그렇게 영화 속 많은 양식이 현실을 가리키지만, 핸드헬드는 현실만 가리키진 않는다. 해친의 실종된 아버지 에스테반은 유해로 나타나 죽음이 확정된 것 같았다. 해친은 그 사실을 믿었다. 그러나 에스테반의 신분증 속 사진과 똑같은 남자가 길거리를 횡단한다. 죽은 거라 확신했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이후 할머니와 함께 살던 해친은 마리오로 위장한 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즉 기존 삶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방해받는 마리오가 그를 쫓아내려 함에 해친은 더 격정적으로 흔들린다. 겨우 마리오 곁에서 안정적인 부자 관계와 삶을 회복하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보였던 마리오의 실체가 '인간 백정'이었음을 확인하고, 이에 해친의 믿음은 또다시 격동한다. 할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하여 마리오에게 향했지만, 이제 다시 마리오에게서 해친을 분리한다.     


즉 핸드헬드는 해친의 여정에 상응하는 흔들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롱테이크는 에스테반이 마리오로 연극을 하고, 이후 마리오가 해친에게 특정한 연기를 지시함에, 영화와 달리 컷이 없는 현실 및 무대에서 이뤄지는 '연극성'에 상응할 수 있다. 또 롱테이크가 현실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진실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모호함으로 가득 찬 현실을 픔고 있다. 비가스는 본 작품에서 35mm 필름을 사용한다. 그래서 영화의 질감은 디지털에 비한다면 불명확하다. 파블로 라라인이 <클럽>이나 <재키>, <스펜서> 등에서 보여준 아스라한 미장센과 일련 유사하다. 이와 더불어 중앙은 비교적 선명하게 포착되지만, 이외의 모서리나 하단은 포커싱이 나가서 흐릿하다. 즉 롱테이크로 담긴 숏 내에서는 명확함과 동시에 흐릿함·모호함이 공존하고, 또 영화 자체도 확고하던 클로즈업으로부터 익스트림 롱숏으로 뒤바뀐다. 에스테반이 마리오로 신분을 위장했음을 확인한 해친이 유골 상자를 반납하러 가는 초반부, 그리고 마리오의 부패한 삶을 거부하고 홀로 추운 겨울에 몸을 내던진 후반부의 해친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한다. 전자에서는 거대하여 모호한 세상 속에서 뒤집힌 진실을 추적할 해친을, 후자에서는 거짓을 선택하며 이로써 진실에서 멀어지는 해친을 보여준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세계는 무한하여 하나의 진실을 쉽게 단정할 수 없다. 특히 그 속에서 살아가는 대상들은 너무나 조그매서 대상의 진실을 확고하게 볼 수 없다. 롱테이크가 품고 있는 모호한 미장센과 진실-거짓 사이에서 헤매는 익스트림 롱숏, 즉 롱테이크의 현실성이 가리키는 것은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실제다. 영화는 광대하고 드넓은 세계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찾아 떠나는 '로드 무비'로서, 2.39:1의 광활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가 길고긴 여정의 난항을 더욱 가시화한다. 이렇게 영화는 롱테이크가 대두되는데, 그러므로 시퀀스가 하나의 테이크가 아닐 때, 잘려진 여러 개의 숏으로 구성될 때의 ‘컷’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도입부터 내내 하나의 숏으로 이뤄진 영화가 처음으로 잘린다. 바로 해친이 에스테반과 다른 사람들이 집단으로 매장된 '무덤'에 도착했을 때다. 해친의 시점, 그리고 무덤에서 해친을 바라볼 법한 구도가 잘리고 나뉜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분리된다는 듯이.     


해친은 지향해야 할 대상으로서 아버지가 아니라,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서 아버지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자신은 살아있고 살아야 하며, 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 말이다. 이후 해친은 상자를 전달받는다. 그리고 상자를 받은 전후로 숏이 나뉘고 그를 포착하는 구도가 뒤바뀐다. 공간을 옮기지 않았으니 굳이 컷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구도를 바꾸며 컷한 이유는 상자를 받아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소년에게 펼쳐질 삶이 '전환'될 것임을 암시하는가. 이렇게 유해를 들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소년은 그간 거주하던 멕시코시티로 향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안의 소년,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진 속 에스테반을 쏙 빼닮은 남자가 밖에 있다. 소년이 놓인 버스 안, 그리고 에스테반을 똑 닮은 남자가 있는 버스 밖이 각각의 숏으로 나뉜다. 그를 에스테반으로 알고 있는 버스 안, 반면 해친을 보지 못했으며 스스로를 마리오라 위장한 에스테반의 세계는 분리된다. 이후 버스에서 내려 해친은 에스테반이냐며 물으러 가지만 그는 자신을 마리오라며 부정한다. 본 장면에서도 리버스숏으로 숏은 나뉜다. 그리고 마리오는 소년의 호명이나 질문에서 자유로운 존재라면, 해친은 버스기사가 빨리 돌아오라는 경적, 즉 호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아버지 마리오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존재, 반면 아들은 돌아가야 하는 존재다, 기다리는 할머니에게로, 영화 말미에서는 부조리한 아버지에게로. 그럼에도 아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리오의 집으로 향한다. 해친은 엄마가 죽고 할머니와 아버지를 하릴없이 기다리며 우울한 삶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족들을 그렇게 만든 마리오의 집은 장난감 가게다. 명랑한 세계, 거기서도 해친과 마리오가 담기는 숏은 나뉜다. 그러나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마리오에게 들러붙고, 끝끝내 트럭 위에서 잠든 아버지와 깨어있는 아들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서로의 발을 '포개기'에 이른다. 이렇게 분리되어있던 부자의 영역이 하나로 포개지는 여정을 담은 작품, 그 작품을 구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여전히 건조하고 차갑다. 비가스는 장편 데뷔작 <먼 곳으로부터>에서도 선보인, 브레송적으로 말한다면 '즉물적인' 냉정한 디렉팅을 신작에서도 선보인다. 특히 해친에게 말이다. 어째서 이러한 디렉팅은 발생하는가?     


매장지 앞에서부터 다른 유가족들은 울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펑펑 운다. 상자를 받는 사무실 안에서도 여성들은 통곡한다. 그러나 해친은 울지 않는다. 이후 상자를 받았음을 알려주기 위해 할머니와 통화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반면, 해친은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영화에선 해친의 무심함이 일반적이다. 해친에게 상자를 건네주는 관료, 이후 해친이 상자를 돌려주러 오자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이 다시 가져가라 다그치는 관료에게 상자 안에 담긴 죽음은 슬퍼하거나 애달파할 일이 아니다. 죽음은 사무적이고도 기계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관료들의 업무일 뿐이다. 이러한 관료들의 세계에서 소년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후 해친과 만난 마리오는 아들을 멕시코시티로 돌려보내려 한다. 울부짖던 여성들이나 해친을 걱정하는 할머니와 달리, 따뜻한 말 한마디나 안부도 없이, 그저 돈만 손에 쥐어서 아들을 고향으로 보낸다. 아들과 유대감을 쌓은 줄 알았던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아들은 노동자가 되어 대가를 아버지에게 받는 존재, 그래서 여전히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만 감정을 '연기'할 수 있는 무심한 존재다. 내내 무감하고 냉정해 보였던 해친은 아버지가 경쟁업체 직원을 꾀어내기 위해 '덫'을 꾸민 상황에서만 엄마가 화장실에 갇혀서 다급한 척 걱정하는 감정을 ‘연기’한다. 이성을 위해서 감정을 도구화하는 세계, 특히 사랑이나 인간성조차도 돈으로 계산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무감하다. 아버지에 대한 진실과 실망, 분노를 다시 묻고 덮어서 거짓으로 살아갈 결말 이후의 해친까지도… 이러한 무감함의 이유는 아버지에게서 비롯한다. 해친은 감정적인 할머니와 성별이 다르다. 자신과 성이 똑같은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고, 소년은 그의 사랑을 모른다.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이후 아버지와 재회해도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고, 그의 진실을 부정해야 하는 부정직한 세계에서 솔직한 감정을 터놓을 수 없다. 비가스가 <더 박스>에서 꼬집는 아버지의 속성은 '위선'이다. 일단 영화는 그가 어째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는지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다만 영화 중반, 마리오는 휴식 시간과 정당한 봉급을 주장하는 원주민 소녀 로라를 살해하여 암매장한다. 부르주아의 이익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가 매장당한 것이라면, 에스테반 매장 또한 사악한 부르주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희생으로 위장된 것이랴. 진짜 노동자의 죽음을 부르주아가 빌려 쓴 것이랴.      


그러나 마리오로 위장한 에스테반의 삶은 이와 정반대다. 가족들에게 암매장 보도로 알려진 에스테반, 그리고 마리오에게 살해당한 로라, 해친에게 살해당한 로라의 어머니는 진실이 파묻혀 드러나길 기다린다. 에스테반으로 둔갑된 유해는 상자를 열어서 본래 존재를 가리켜야 하고, 로라가 매장된 무덤 또한 마리오가 평화로운 목장으로 둔갑한 '울타리'를 넘어서 드러나야 할지다. 이와 달리 마리오는 진실을 덮는 자다. 로라의 주검을 옮기고 땅을 파서 묻는 자, 익명의 유해를 빌려서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덮는 자. 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덮고 묻는 자는 암매장당한 피해자들의 희생까지도 가로챈다. 해친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에스테반은 가련한 희생자로 알려지고, 제 이익을 방해하는 프롤레타리아를 살해하거나 경쟁 업체 직원을 납치하여 하하 호호 맹랑한 장난감 가게를 가꾼다. ‘원주민’ 여성 노동자 로라를 찾아 헤매는 로라의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마리오의 또 다른 '백인 아기'가 탄생하는 숏으로 이어지는 편집은 프롤레타리아 원주민을 착취하여 백인 부르주아가 삶을 영위하는 순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동 착취의 피해자로 둔갑한 에스테반, 이후의 마리오도 나름의 ‘위업’을 위해서 바깥을 나도는 아버지로 포장된다. 마리오는 못생겼든 다리에 장애가 있든, 자신은 공평하게 고용한다고 말한다. 또 여성이 남성보다 지능이 높다고 치켜세운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웃는다. 사람들은 진보적인 마리오에게 홀린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계약서와 노동법을 위반하여, 단지 거대한 공장의 부속품으로 원주민 노동자를 여기며 착취하는 마리오의 민낯이 이어진다. 또 여성이 남성보다 지능이 높지만, 남성이 관에 묻히면 여성의 지능은 사라진다고 말한다. 즉 여성의 지능은 남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가부장적 조건을 뒤에 덧붙인다. 겉으로는 중국 자본에 대적하는 애국심을 위해 원주민 노동자를 고용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뒤에서는 중국인들이 만드는 제품을 소비한다. 제 이익을 위해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그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마리오는 제 추악한 진실을 땅에 묻는다.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의 희생, 위업을 빌린다. 이에 마리오의 민낯을 인지하지 못하고, 또 살기 위해서 노동자가 되어야만 하는 원주민은 마리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해친 또한 마리오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여, 할머니 대신 그에게 머문다.     


해친은 아빠의 삶을 동경하고 인정을 갈구한다. 해친은 마리오가 꾸민 그의 이미지에 속아 넘어간다. 사실 그전에는 역으로 해친이 마리오에게 '아버지'임을 호명, 지시했다. 에스테반은 해친 할머니의 아들, 그리고 해친 엄마의 남편이다. 에스테반이 실종되거나 죽으면 그는 아들과 남편의 의무·책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위조한다. 더는 아들이나 남편으로서 호명되지 않는다. 호명이나 지시를 당한 사람은, 대상을 호출한 화자의 의도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러나 해친은 마리오를 따라다니며 마리오가 아니라 에스테반임을, 또 그의 아내가 ‘아들이 부르는 아버지’로 그를 호명하게 만든다. 에스테반임이 탄로 나는 것이 두려운, 또 아들이 다가와 아버지의 멍에를 지고 싶지 않은 마리오는 계속 해친을 부정한다. 그의 차에서 강제로 내리게 하는 등 말이다. 비가스 작품 속 아버지들이 떠나는 이유, 그것은 방종과 이기주의에서 비롯한다. 배에 에스테반을 품어봐서 더더욱 내 일처럼 걱정하는 할머니와 달리, 배에 해친을 품지 않은 아버지는 아들을 아낄 줄 모른다. 그럼에도 해친은 몰래 마리오를 지켜보거나 따라다닌다. 끝끝내 해친은 마리오가 아버지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지만, 아버지가 되면 이제 지시하는 쪽은 마리오다. 마리오는 해친을 범죄에 동원한다. 로라의 주검이 담긴 봉지를 옮기고 파묻을 것을 주문한다. 가부장제 내에서 아들은 그를 죽이거나 넘어서지 않는 이상 아버지의 호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해친은 자기 발과 아버지의 발이 닮음을 확인한다. 해친은 혼혈이다. 모계가 원주민, 부계가 백인이다. 혼혈인 그는 외관상으론 에스테반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러나 발이 쏙 빼닮았음을 확인한다. 발이 닮았다는 것, 그것은 그 발이 가야 할 길조차 아버지를 닮음을 의미하는가. 물론 해친은 망설였다. 백인과 닮기도 했지만 원주민과도 닮았다. 그래서 로라가 신경 쓰였고, 이에 로라의 어머니에게 딸이 죽었다고 알리지 않았을까. 공장 내부에 들어가지 않는 백인과 달리, 혼혈 소년은 공장 내부로 들어가 천편일률적인 노동을 하는 원주민 노동자들에게 로라를 묻는다. 해친은 백인과 원주민, 양자 중 어디에 서야 하나 망설인다. 해친은 일단 마리오를 부정한다. 후반부에 흥미로운 숏의 나뉨, 그것은 해친이 마리오에게 물을 뿌려서 뺨을 맞는 장면, 밤에 차 안에서 부자가 분리되는 시퀀스다.     


본 장면에서 해친은 마리오가 아닌 원주민 어머니 편에 선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곁에 있지 않던 에스테반을 원망하고, 특히 지금 만삭의 아내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그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다시 부자는 하나의 숏에 놓인다. 해친이 마리오에게 기대고, 마리오는 해친을 안아준다. 마리오는 해친에게 목장을 보여준다. 공장에서 로라에 대한 단서를 찾는 해친과의 접촉에 눈치를 보는 노동자들, 로라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노동자들을 보며 해친이 마리오를 선택한 이유를 반추할 수 있다. 원주민 노동자들이 실직이나 임금 때문에 침묵하듯, 해친 또한 아버지의 부에 굴복하여, 모계 원주민성을 부정한다. 할머니에게 형식적인 말로 안부를 전하고, 마리오의 지시와 무관하게 로라의 어머니를 협박하며, 이에 불응하자 그녀를 살해한다. 원주민 모계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오리무중이던 해친은, 부유한 백인 부계라는 확고한 방향을 설정하며 부유해지는가. 그러나 절반은 원주민인 해친은 원주민을 죽이며 백인 아기를 낳는 마리오의 부유한 삶을 혐오한다. 그의 차에서 뛰어 내린다. 마리오는 해친을 끝까지 쫓아가지도 않는다. 차가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친다. 혼자인 해친은 얼어붙는다. 이후 구조되고, 매장지에 들러 상자를 되찾아 멕시코시티로 돌아간다. 해친은 녹았지만 온전히 녹지 않았다. 살아있는 에스테반에 대한 진실은 동결한 채로, 그 진실을 덮어두는 상자를 들고 멕시코시티로 돌아간다. 이렇게 비가스는 두 번째 장편에서 아버지 없는 혼혈아의 딜레마를 탐구한다. 주로 남겨지고 버림당하는 원주민 여성, 반면 떠나는 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동경할 아버지가 없다. 이후 아버지를 찾더라도 피의 절반은 원주민인 아들에게 백인 아버지의 원주민 착취는 부조리하다. 영화 중반 해친은 꿈을 꾼다. 로라의 무덤 위에 코요테가 죽었고 개미가 들끓는다. 단독 생활하는 포식자 코요테가 혼자 부유한 백인이라면, 무수한 군집을 이루는 개미들이 원주민 노동자들인가. 그러나 해친은 어디에 놓이는가. 코요테도 주검을 파먹는 개미도 아닌, 죽어서 어느 양측에 놓일 수 없는 주검 상태가 아닌가. 자본주의에서 무기력한 모계를 외면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자신까지 착취하는 백인 부계를 지향할 수 없다. 끝끝내 해친은 모계로 향한다. 모성에서 이타심과 눈물, 그리고 정의로움 있나니. 다만 혼혈인 아들은 아버지의 진실을 폭로할 수도 없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늘 시름겨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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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17 집에서 (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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