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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26. 2022

제임스 그레이, <아마겟돈 타임>

하얗다, 그러나 하얗지 않다

제임스 그레이(James Gray), <아마겟돈 타임>(Armageddon Time) 

- 하얗다, 그러나 하얗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벗어던질 수 없는 작품의 완벽함이란 이상은 의심쩍은 것이었다. 예술가들이 그러한 이상을 벗어 던지기 어려운 것은 그 전이나 후나 세계 내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불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적 진실을 자신들의 노력으로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테어도어 아도르노-

아마겟돈: 역사적으로는 이집트의 왕 느고와 유대왕국의 왕 요시야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므깃도의 언덕'을 가리킨다. 본 전투에서 요시야가 사망하며 유대 왕국은 급속도로 종말을 맞는다. 그래서 아마겟돈은 역사적으로 유대 왕국의 종말이자 파괴적 재앙을 가리킨다. 이후 역사 자체보다는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아마겟돈은 종말, 아포칼립스 등과 동의어로 쓰인다. 세상의 마지막, 선과 악의 결정적 싸움에서의 마지막 재앙, 최근에는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가리키며 근원을 뛰어넘는 의미를 부여받았다. 한편 요한은 사탄을 따르는 자들을 멸할 때, 본 아마겟돈을 인용하며 기쁨의 어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긍정적이지만 무언가를 멸한다는 것에는 다름이 없다. 여하간 본 아마겟돈을 제임스 그레이가 인용한다. 그는 레이건이 당선되고 취임한 1980년대, 본인이 10대였던 유년시절을 아마겟돈에 빗댄다. 그의 가장 사적인 영화에서 아마겟돈은 어떤 의미로 활용되고 있을까. 1969년 뉴욕 태생의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우크라이나 유대인 혈통의 이민자인 그는 혈연을 강조하는 자신의 유대적 민족성, 가족관계와 이민자로서 미국에 느끼는 심리를 필모그래피에 풍부하게 담아낸다. 일단 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민족이나 가족, 국가에 붙잡히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리틀 오데사>에서는 러시아 이민자들이 꾸린 마피아, <더 야드>에서도 마찬가지로 불법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구조가 도드라진다. 비교적 민족적인 색채가 옅어진 <투 러버스>조차도 레너드라는 개인은 가족들 사이에 끼여 개인으로서 숨이 막힌다. 그레이의 연출은 이러한 민족·가족의 단단함처럼 항상 안정적이지만, 폐쇄적인 다수의 인파와 가족 안에 위치한 개인을 품는 안정성은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도 준다. 이렇게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은 이와 상반되는 욕망을 지닌다. <리틀 오데사>에서 루벤은 아버지와 조슈아 사이에 놓여 양자를 매개하고 싶고, <더 야드>에서 레오는 더는 불법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개인에 선행하는 거대한 구조, 법, 민족성을 그레이의 나약한 인간들은 쉽게 넘어서지 못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는 가족의 법을 만드는 아버지에게 총구를 겨누지만 죽이지 못하고, 대신 죽는 것은 법을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와 자신이 만든 법 사이에 애매하게 놓인 동생 루벤이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주인공 바비는 자신의 욕망인 아마다를 포기하고, 아버지와 형이 속한 백인이란 가족에 편입될 것인지, 기존 가족인 유대계, 마피아에 속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투 러버스>에서는 가족 사업인 세탁소와 개인이 바라는 사진 작업이 충돌하고, 또 가족에 의해 용인된 연인인 산드라와 각자의 가족들에게 승인되지 않는 미셸-레너드가 충돌한다. <이민자>에서 에바는 자신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브루노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소유하지 않는 올랜도에게 끌린다. 하드보일드한 남성적 작품인 <리틀 오데사>부터 <위 오운 더 나잇>까지는 어떤 아버지를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라면, 멜로인 <투 러버스>와 <이민자>에서는 가족, 공동체, 국가, 이데올로기가 허용한 욕망과 허용하지 않은 개인적 욕망의 기로를 비춘다. <투 러버스>나 <이민자> 둘 다 허용되는 것은 가족과 함께 선택한 산드라, 당대가 허용한 ‘여성을 보호해주는 남성’으로서 브루노다. <투 러버스>에서 미셸과 레너드는 서로에게 향하지만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속한 구조를 떠날 수 없고, <이민자>에서처럼 기성을 거부하여 추방 및 망명만 가능하다. 또 그의 작품에서는 항상 법을 만드는 아버지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주로 생존한다. 앞서 언급한 <리틀 오데사>도 그렇고, <더 야드>에서도 백인이 되고 싶은 윌리가 선망하는 '아버지상'인 프랭크는 건재하다. 양딸 에리카, 양아들과 같은 레오, 윌리 형제는 그에게 굴종한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아버지는 사망하지만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바비는 자유분방했던 제 삶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형이 속한 경찰의 길을 택하며, 아버지의 법은 사후에도 영향력을 과시한다.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비행사 로이는 언뜻 보기에는 자유롭고 강인한 초인이지만, 그의 삶 또한 아버지 클리포드가 규정한다. 로이는 광대한 우주가 아니라,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좁고 폐쇄적인 우주로 향한다. 우주로 향하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 그리고 종교를 빼놓을 수 없는 나약한 인간, 이러한 의존의 욕망은 소속하고 싶은 유약한 마음, 부유하고 떠도는 이방인의 처지에서 기인한다. 영화 속 존재들은 무조건 하나의 집단에 소속해야지만 생존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와 아버지라는 두 세계에 동시에 발을 걸치거나, <위 오운 더 나잇>에서처럼 십자가와 다윗의 별을 동시에 걸칠 수 없다. 민족이나 국민, 정체성에 대해 하나만 허용하는 일신교 공동체는 이교도를 탄압한다. 오직 자신을 기준으로 소속/비소속을 판가름하는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는 화합하거나 공존할 수 없으며, 둘 중 어느 하나가 죽어야지만 끝이 난다. 그래서 마피아와 경찰, 유대인 집단과 미국인 집단은 항시 충돌하며, 그 투쟁은 처음부터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소속되고 싶어 하는 존재들에 의해 촉발된다. <더 야드>에서도 다투는 것은 라틴계와 유대인이다. 그리고 소속되기 위해서 그간 소속하던 집단을 배반한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바비는 제 가족을 죽여야지만 비로소 다른 '가족'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소속하고자 하는 이방인들은 결국 온전하게 소속하지 못한 채, 집단을 위해 다투다가 희생된다. 죽지 않는 것은 아버지, 공동체 그리고 법이다. 이에 소속은 덧없는 허상으로 전락한다. <애드 아스트라>에서 아버지에게 소속되고 싶어 하는 로이, 자신의 야심에 휩싸인 클리포드는 아집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그레이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남성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민족성, 집단을 극복한 개인적 욕망, 이상향과 연결된다. <리틀 오데사>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형제가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어머니와 함께 놓인 풍경이지만, 병을 앓는 어머니는 죽고야 만다. <더 야드>에서도 어머니는 지병을 앓으며, 레오는 그녀의 뜻을 떠받들어 회개하지만 아버지, 남성의 법을 거스를 수 없다. 이러한 남성적 욕망, 법에 의해 에리카는 희생된다.      


또 여성은 수동적으로 그려진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바비의 연인 아마다는 발언권이 없다. 여성은 집에 놓인 존재, 운전대가 아니라 그 옆에서 남성에 의해 운송되는 존재다. <잃어버린 도시 Z>에선 남편의 이상향을 위해 니나가 꿈을 포기한다. <이민자>에서는 여성의 욕망인 올랜도가 좌절되고 그녀들이 심취한 헛것의 '마술'임이 폭로된다. 여성의 욕망은 사망하고, 살아남는 것은 그녀를 관리해주는 남편 내지는 아버지상이다. 1921년이 배경인 본 작품의 여성상은 곧 20세기 후반을 다루는 그의 작품 속 여성에게도 이어진다. 여성을 관리하는 아버지들만이 살아남았으므로. 즉 그레이의 작품 속 이방인들은 가족과 사회에의 편입을 바라지만 항상 실패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전복하고자 하지만 끝끝내 따르게 되며, 여성은 남성의 꿈으로 전락하거나 그것을 위해 희생되고, 이렇게 모두 현실에 의해 이상향이 불발한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개인의 이상이 실현된 경우도 있다. <잃어버린 도시 Z>나 <애드 아스트라>를 꼽을 수 있다. <잃어버린 도시 Z>에선 항상 떠나지 못하던 그레이의 인물이 겨우 떠난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의 시선, 공간에서 영영 멀어짐, 타인에겐 실종이나 죽음으로 여겨진다. 또 <애드 아스트라>처럼 아버지가 죽어야지만 가능한 해방이다. 그래서 그레이의 인간은 딜레마에 빠진다. 모든 것을 취할 수 없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하거나 죽일 것이냐. 그렇다면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인 1980년의 미국을 다루는 신작 <아마겟돈 타임>에서 유대인 소년 폴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 음악 소리와 풍경이 드러나다 다시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가을 녘의 바람 소리, 낙엽이 휘날리는 소리, 아이들이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후 학교가 드러난다. 시각을 제한하던 어둠에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하며 제약은 완화됐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경직된 느낌을 준다. 이유는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선 청각만큼 자유로운 소리가 오가지 못한다. 유동적이던 청각은 터클타웁 선생의 ‘규칙과 지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이제 6학년이기에 학교의 리더로서 책임감을 요구한다. 숙제를 내줄 테니 책임감 있는 태도로 이를 수행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선생이 지시한 숙제를 이행하기 위함이 아니다. 폴이 터클타웁이라는 이름에서 '칠면조'를 생각하여 숙제가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보건대, 그가 주목하는 단어는 '6학년', '리더'로서 능동성이다. 이제는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어떤 행위를 하고 이에 책임을 지기 시작할 나이, 이를 위해서 폴과 죠니 그리고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폴이 공립학교에 다닐 당시, 터클타웁의 강의는 다소 경직되어 있다. 문법이나 수학 공식, 퍼즐 수업 등 그의 교육은 '하나의 정답'을 강조한다. 그러나 폴과 죠니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선생을 따라야 한다는 하나의 법에서 이탈해서 권위자를 조롱한다. 비하하는 그림을 그려서 놀리고 반항하며, 심지어 화장실에서 대마초를 피운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나의 정답이 아닌, 각자가 자신을 자유롭게 지배하는 개개의 답, 순간순간의 답을 도출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도입부의 운동감의 대비도 눈에 띄지만, 이와 동시에 숏의 구성이나 배치도 눈여겨볼 법하다. 하나의 숏에 둘이 놓이는지, 아니면 혼자 놓이는지의 차이를 말이다. 폴과 터클타웁은 대치한다. 각각의 얼굴이 담긴 숏은 나뉜다. 이후 학급의 권력자 터클타웁이 폴을 잡아끌어 칠판 앞에 세우고 벌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터클타웁의 숏으로 폴은 이끌려오고, 폴의 숏에 터클타웁이 침범한다. 그러나 터클타웁을 따를 생각이 없는 폴은 다시 숏이 나뉜다. 선생이 등을 돌린 틈을 타 바로 그를 조롱한다. 한편 폴은 항상 혼자 놓이지만은 않는다. 터클타웁과는 분리되는 한편, 폴은 죠니와 하나의 숏에 놓인다. 그들은 쿵짝이 잘 맞는다. 둘 다 터클타웁을 넘어서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잘 몰랐고 서로 분리되어 있던 둘은 이제 하나의 숏에 동승한다. 상대방이 나와 같고, 또 나를 존중 한다면 함께한다. 그러나 너무 달라 타협할 수 없다면, 또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각자는 숏을 분리한다. 루시 이모는 설치류가 징그러운데 테드가 이를 계속 들이미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서 테드가 놓인 프레임 바깥으로 루시 이모는 이탈한다.      


또 테드가 폴을 계속 괴롭힌다. 그래서 폴은 테드와 함께 놓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도와줄 에스더와 할아버지가 있는 숏으로 쪼르르 달려가 형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일러바친다. 그 전에도 공립학교의 폴, 사립학교의 테드가 나뉘었다. 이후 저녁 식사를 포착한다. 유대인 가족이라는 하나의 명목으로 묶이지만, 사실 구성원들 각각은 너무나 다르다. 루시 이모는 유럽에서 나치들에게 핍박받아 투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한편, 할머니는 흑인 인종차별을 하고, 교육위원회에 도전하는 에스더는 어머니에게 치를 떤다. 모두 자기 할 말만 한다. 교육위원회에 도전하는 상대방을 응원하기는커녕, 건방지게 조롱하기 바쁘다. 이후 폴은 에스더의 대구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중식을 시키겠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쓴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또 어닝이 물을 마시다가 사레를 들렸다. 이를 두고 폴과 테드는 비웃는다. 한바탕 웃음바다가 펼쳐진 식탁에서 아이들은 사레 때문에 웃지만, 루시 이모는 나치 이야기를 듣고 웃는 것이라 착각하여 역정을 낸다. 그러다가 어닝이 폭발하자 테드는 도망간다. 이렇게 화자만 잔뜩이고 청자가 없는 시끌벅적한 상황에서 숏은 개인들 홀로 고립된다. 한편 이러한 환경에서도 폴은 제 숏에 누군가와 공존한다. 바로 할아버지다. 폴이 하교했을 때, 집은 텅 비어있었다. 집에 돈은 있지만 온기는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북적거려도 상대의 온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폴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하고, 또 저녁 식사에서는 폴이 먹고 싶은 스파게티를 건네준다. 폴의 프레임 안에 할아버지의 손이 방문한다.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폴에게 로켓, 아크릴물감 등을 선물해주고, 또 평등에 관한 같은 견해를 공유하며 하나의 숏으로 접합한다. 폴이 지지받고 싶은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다. 지금 여기에 없어서 더 불안하고 확신이 없는 이상, 이에 버팀목이 되어 주는 대상이 바로 할아버지다. 그런 할아버지가 폴의 곁에 있다. 할아버지는 폴과 숏이 분리되더라도, 리버스숏의 형태로 폴과 시선을 맞춘다. 숏이 나뉘더라도 시선을 맞추지 않거나 피하는 아버지나 선생과는 딴판이다.     


또 저녁 식사 시퀀스에서 폴의 프레임 안으로 어닝의 손이 닥쳐온다. 이는 할아버지의 손과 다르다. 어닝은 가정이 자신의 통제대로 좌우됐으면 좋겠고 아들들의 삶이 제 결정으로 흘러가길 바란다. 그래서 어닝은 폴에게 음식을 강제로 먹으라며 손을 들이민다. 이후에도 폭력으로 아들을 다스리는 어닝은 폴의 프레임 안으로 ‘매질’을 가한다. 방문과 다른 침입, 이에 폴은 아버지가 침범한 숏에서 달아난다. 아버지의 뜻은 내 뜻이 아니다.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숏을 분리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닫힌 화장실 문을 부수고 폴이 놓인 숏으로 들이닥친다. 폴이 놓인 숏과 공간은 너무나도 협소하다. 개인으로서 숨이 막힌다, 영화의 화면비가 아주 널따란 2.39:1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빽빽함은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학을 간 폴을 포착하는 시퀀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강제로 전학을 가게 된 폴, 공립학교에선 권위자에게 반항하던 폴이었지만, 사립학교에선 권위자들이 폴의 숏에 항상 침투하여 교칙과 규율을 강조한다. 또 적지 않은 학생들이 함께 부대끼는 학급에서 개인의 숏을 지킬 수 있었던 공립학교의 폴과 달리, 사립학교에선 너무나 많은 '백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토퍼와 같은 학생들은 폴이 있는 숏에 종이를 던지며 침범한다. 또 사립학교 운동장에서 죠니와 재회했지만, 그와 함께 있고 싶어도 백인들의 ‘검열’에 의해 분리가 강제된다. 백인들만의 불편한 동거가 이뤄진다. 이렇듯 개인은 고립된 숏을 극복해야 하지만, 이에 따른 공존은 상호 존중에서 비롯해야 한다. 가부장제의 폭압, 백인 중심적인 전체주의는 오히려 개인성이 담긴 숏을 훼손한다. 각자가 ‘리더’로서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종 취급하며 침범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러한 공존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죠니와도 가능하다. 도입부 이후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기에 하나의 숏에 공존한다. 죠니와 공존하고자 폴은 그에게 여행비를 지원하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도 함께 있다. 죠니가 체벌을 받아 교실 밖으로 나가더라도 폴은 뒤따라가서 죠니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다.      


설령 숏이 분리되더라도 그들은 서로의 숏에 옆태나 뒤태가 걸치거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시선을 응시한다. 대마초를 적발당해 서로 찢어질 위기에 처한 교장실에서, 그리고 컴퓨터 절도를 적발당한 영화 말미의 경찰서에서, 그들은 멀어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소중하게 붙잡고 싶다는 듯 ‘슬로우모션’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쏘아보는 어닝이나 에스더와 다르다. 이렇게 공존하지만 폴은 지하철에서 먼저 하차하는 죠니를 붙잡지 않는다. 죠니 또한 폴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쇼에 오라고 권유는 하되, 강요하진 못한다. 다른 부분은 서로 숏을 분리하며 존중한다. 또 결말에서 절도에 동참한 죠니는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짊어진다. 이로써 폴과 분리한다. 한편 개인성, 책임을 위해서만 숏을 분리하진 않는데, 흑인과 놀지 말라는 에스더의 강요와 강제 전학, 백인 편향적인 경찰, 흑인차별이 극심해지는 당대 사회 분위기에 의해서 공존하던 서로는 강제로 결별하고 나뉜다. 죠니와 함께 플로리다 여행을 꿈꿨던 폴, 그러나 그가 상상한 사진들은 모두 현실에 접합되지 않고, 영영 현실에서 멀어지고 분리된다. 그들은 왜 분리되어야 하는가. 일단 유대인 선조 세대의 이상, 그리고 1980년 당시 소년이었던 유대인 폴의 이상이 다르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인 죠니와 달리 가족의 권력과 후광을 빌리는 폴은, 자신과 다른 이상을 지지하는 어른들의 힘을 오롯이 자기만을 위해 쓸 수 없다. 조부모 세대, 그리고 부모 세대는 나치의 야만과 폭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다. 폴의 선조들은 본래 우크라이나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조상들은 유대인이란 이유로 박해받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겼다. 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 덴마크, 영국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 기나긴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할아버지는 유대인이란 이유로 교육에서 차별을 받았다. 부모 세대인 에스더와 어닝 또한 백인의 가랑이를 좇아가느라 바쁘다. 학부모회 및 교육위원회에 소속하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내려 하고, 백인 경찰의 도움을 받아 하얀 특혜를 누리며, 이를 위해서 백인들의 사립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는 것이 빠듯하다. 이들은 자식들이 자신들과 달리 ‘모든 특권’을 누리길 바란다. 유대인의 흔적을 지워 배척당하지 않길 바란다.     


즉 선대 유대인들의 이상이란 '정착', ‘인정’이다. 자신들은 누리지 못했더라도, 분신인 자식들에겐 사립학교를 제공한다. 폴은 제 이상을 지지해주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공립학교에 남으려 했으나, 사립학교에 관한 생각만큼은 둘이 엇갈린다. 폴에게 익히 가능한 것이 사립학교라면, 할아버지에게 불가능했던 것이 사립학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폴도 나치 얘기가 오간 저녁 식사 이후 유대인 박해가 무서워졌고, 그럼으로써 어둠 속으로 잊히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상상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상'을 받고, 자기 작품을 '영구적으로 소장'하는, 항구적인 정착과 주류 백인 사회의 인정을 말이다. 가족들은 안정을 위해서 불안정한 존재 흑인을 폴에게서 분리한다. 그러나 폴은 선조 유대인들의 이상보다는, 흑인 죠니의 이상과 더 친밀하다. 그것은 ‘남들 먹는 것을 못 먹는’, 개인주의로의 해방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땡땡이를 쳤을 때, 그들은 ‘경찰’에게 쫓기는 놀이를 했다. 이들은 항상 쫓기는 기분이다. 안정을 강요하는 식구들이 바글거리는 잦은 모임, 어머니를 위해서 사립학교에서 좋았다고 거짓말하는 폴, 마찬가지로 자신의 꿈은 두 아들의 성공이라 말하는 에스더, 아들이 가족이 싫다는 얘기를 입도 뻥긋 못하게 폭력을 쓰는 어닝 등 가족에게 폴은 추적당한다. 식구를 위해서 나를 희생한다. 그들이 누리지 못한 안정과 지지가 집착으로 뒤바뀐다. 그들이 강요하는 백인 이데올로기 또한 전체주의적이긴 매한가지다. 누구나 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앉아 일방적인 연설을 다 같이 들어야 한다. 공립학교에서는 터클타웁이 ‘독창성’을 강조하는 수업도 중간에 뒤섞었다면, 사립학교에서는 ‘고갱을 모방’하고 백인이라면 응당 따라야 하는 ‘의무’를 강조한다. 위대한 미국과 백인의 성질을 재현할 뿐이다. 이러한 강요 속에서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다. 폴은 할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이 갑갑하다. 죠니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지금 여기 없고, 형은 플로리다에 있다. 지금 여기 남겨진 것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다. 가족은 족쇄다. 여기에 더해 당국은 죠니를 자꾸 위탁가정에 넘기려 한다. 흑인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에서 한 흑인 청년은 흑인이 NASA에 가는 꿈은 불가능하다고 초를 치며 흑인 공동체의 패배주의를 심어준다. 즉 죠니는 부모가 남긴 멍에, 그리고 백인 정부가 흑인을 좌지우지하고, 심지어 흑인 공동체까지 오지랖을 떠는 ‘추적’이 너무나도 숨 막힌다.      


그래서 두 친구는 반항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열을 이탈한다. 죠니는 플로리다 여행을 계획하고 마찬가지로 갑갑한 폴은 이에 동참한다. 가부장적임과 동시에 시끄럽게 잠을 깨우는 아버지에게서 떠나고 싶다. 폴 자신만의 평온한 꿈나라에, 소음을 시각으로 가시화한 핸드헬드로 침략하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다. 또 엄마의 대구 요리보다는 스파게티나 중식 등의 다른 문화로 떠나고 싶다. 정리하자면 선조 세대 유대인에게 백인은 순응의 대상이다. 그나마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라고 말하는 할아버지가 생존해있을 당시, 그의 후광과 판단 준거, 인정을 빌려오던 어닝 또한 백인 대신 ‘유대인’으로서 사유·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모두 패닉에 빠진다. 그리고 무기력한 어닝은 스스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백인과 공조하며 현실에 체념한다. 그러나 이후 세대의 유대인에게 선조 세대가 따라 하는 백인 이데올로기는 반항과 철폐의 대상이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안정과 정착은 집착이 되어 자식 세대는 되레 해방을 바란다. 한편 선조 세대 또한 백인을 '따라 하는' 처지지, 백인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상은 ‘가식’ 내지는 ‘혼란’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아직 백인이 아닌 아웃사이더이기에 에스더는 흑인을 차별하는 어머니를 질색하며 학을 뗀다. 그러나 백인이 되어야 하는 에스더는 죠니와 폴을 분리한다. 아웃사이더들이 모인 공립학교에서 폴을 빼내 '새하얀 사립학교'로 보낸다. 레이건을 지지하는 학교, '프레드 트럼프'의 학교로 말이다. 그런데 막상 레이건이 당선되니 유대인 가족은 절망한다. 백인을 바라지만 백인을 부정하고, 아웃사이더의 처지이지만 아웃사이더 또한 부정한다. 그래서 이들의 이상은 이중적이고 모순된다. 어떤 이상을 위해선 다른 이상이 불발된다. 폴에게 죠니와 놀지 말라며 다그침과 동시에, 자신의 인종차별적 언행을 감추기 위해 금세 미소를 짓는 에스더나, 자신이 누리지 못한 하얀 사립학교로 폴을 보내지만, 이와 동시에 평등을 말하는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물론 이중성과 가식은 선조 세대에만 국한된다. 이들과 달리 폴에게 이상은 비교적 명료하다.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부친살해 본능, 폴이 넘어서고자 하는 부친은 선생이자 아버지,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의 '백인 아버지들' 모두를 종합한다.     


레이건 행정부의 징후, 학교에서 연설하는 메리옌 트럼프는 공짜 점심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폴은 위탁을 회피하는 죠니에게 아지트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싶다. 백인 아버지들은 빈부격차를 심화하여 제 배를 불린다면, 폴은 죠니에게 무상으로 돈을 나눈다. 그래서 여행, 곧 해방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인 사립학교의 컴퓨터가 절도 대상이 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의 주장을 유린하고 반박한다. 백인들은 가난의 이유를 노력 부족이라 말하지만, 실제로 인종 및 계급 간 노력은 공평하게 평가되지 않는다. 폴과 죠니 똑같이 터클타웁을 놀린다. 그러나 죠니를 대하는 터클타웁의 태도가 훨씬 더 거칠고 징계 수위도 높다. 또 폴이 한 장난을 흑인에 대한 편견에 따라서 죠니에게 덮어씌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당한 것처럼, 흑인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쓴다. 절도는 폴과 죠니 둘 다 가담했고, 심지어 폴이 죠니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어닝이 백인 경찰과 연줄이 닿아 폴은 풀려나는 반면, 죠니는 폴의 몫까지 뒤집어쓴다. 경찰들은 폴에게는 집에 우환이 있냐며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반면, 죠니에겐 절도할 줄 알았다며 비난한다. 하얀 것들이 자신들의 책임인 절도, 대마까지 죠니에게 타자화한다. 프레드 트럼프는 백인 학생들에게 엘리트가 되는 것이 의무라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그들의 적법한 노력으로 얻은 성취인가. 노력 이상의 특혜를 주는 제도의 수혜는 아닌가. 누구나 갈 수 없고 하얀 것들만 갈 수 있는 값비싼 사립학교에서는 좋은 교육 환경이 제공되나, 누구나 갈 수 있는 공립학교의 시설은 낙후되어 있고, 운동장에서 폴이 죠니를 만날 때 '사이렌'이 울려 퍼지며 높은 곳과의 교류를 제약하는 환경에서 흑인들의 노력은 부질없지 않은가. 영화에서도 누가 더 큰 노력을 했는가. 폴도 분명 반항했다. 그러나 폴이 공립학교에서 반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가 학부모회 회장이었기 때문에, 선생이 폴에겐 죠니 마냥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폴은 이를 의식하며 행동했다. 더욱이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는 폴은 그와 대적하거나 달아나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사립학교에 가기 싫은 폴은 단호하게 주장하기보단 그저 할아버지의 입을 빌릴 뿐이다. 이후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며 갑갑한 교복이 폴의 개성을 말소하는데 그는 이를 반항하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부친 살해를 바라면서도, 이와 동시에 아버지들의 힘을 빌린 폴은 감히 그들을 전복할 수 없다. 똑같이 대마초를 피우고 절도하더라도, 부모님의 가호 아래 있는 폴은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의 상승과 사면이 가능한 반면, 혼자 있는 죠니는 유급과 추방, 분리를 겪는다. 실제로 레이건 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의 주체인 백인들이 마약을 미국에 들여왔을 때, 그 책임을 타자화하여 흑인 사회가 오롯이 짊어지게 만들며, 백인의 행위에 의해 흑인들이 더 고립되고 빈곤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폴은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백인에게 편승하는 부모덕에 엘리트 코스를 척척 밟아가고 부도덕함 또한 면피 되지만, 아무것도 없는 흑인 죠니는 제 상황을 타개하고자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치면 더 수렁에 빠진다. 하얗지만 이와 동시에 아웃사이더인 유대인은, 이상을 양자택일하기 어렵다. 하나를 택하면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 소년 폴에겐 자신을 지지해주는 두 개의 힘이 있었다. 하나는 아크릴물감과 로켓을 선물해주며 폴의 자유에 '용기'를 북돋아 준 할아버지다. 다른 한쪽에는 풍요로운 물리적 여건을 제공하는 대가로 폴을 앗아가는 부모가 있다. 그런데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 할아버지와 영화를 보고 나오니, 그가 정강이 부근의 통증을 호소한다. 환상은 무너지고 현실, 곧 인간의 죽어야 하는 운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원에서 폴이 할아버지와 로켓을 날리는 숏 직후에, 골육종 투병하는 할아버지가 담긴 숏으로 이어진다. 하늘로 쏘아 올렸던 이상은 대지로 추락하고, 지하에 파묻힌다. 폴의 곁에 남은 힘은 자식에게 백인 엘리트를 강요하는 부모님뿐이다. 할아버지 사후에 폴은 자신이 컴퓨터 절도를 죠니에게 제안했지만 이는 실패했다. 이후 경찰서에서 돌아온 폴은 화장실에서 어닝이 계속 때려도 가족이 싫다며 구시렁대던 과거 자신과 달리, 자동차에서 어닝과 타협하며 방으로 올라가 숙제한다. 전자가 핸드헬드로 포착되며 안락함이 흔들리는 도전에 상응했다면, 후자는 크나큰 사건임에도 카메라는 조금의 미동도 없다. 유대인임을 상기시키던 할아버지 사후, 그들이 몸담은 부조리한 백인 사회에 순응하는 어닝처럼, 부모의 그림자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폴도 체념하는가.     


그러나 폴은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길 꿈꿨고, 그중에서도 칸딘스키의 '추상'을 좋아했다. 칸딘스키는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예술가가 몸담은 시대정신의 기록’, 이와 동시에 ‘미래의 모체를 제시’, 그리고 ‘작가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추상이라고 해제하였다. 이에 따른다면 추상은 내게 솔직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추상은 자유롭다. 폴과 죠니는 칸딘스키의 추상이 ‘달’로도 보이고 찡그린 얼굴이자 웃는 얼굴이라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특정한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곧 그 하나는 편견과 혐오,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랴. 우주비행사를 꿈꾼 죠니가 NASA 입사를 바란 것도 중력이 구속하는 지상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상화가와 우주비행사는 인종, 민족, 부모의 구속이란 중력에서 달아나 창공으로 향해 미래를, 그리고 자신을 그리고 싶었으리. 본 작품에서 세대별, 그리고 미국 내 위치에 따른 유대인의 딜레마를 더 첨예하게 탐구하는 그레이는, 지금까지의 작품에선 현실로 되돌아오는 좌절을 주로 그렸으나, 본 작품에서만큼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이상을 택해 영화감독이 됐기 때문일까? 타협은 지닌 것을 놓을 수 없는 아집에서 비롯한다면, 그레이의 이상은 나를 위해서라 지닌 것조차도 모두 포기할 수 있을 때 다가온다. 현실 속 아집에 의해 이중적 딜레마에 빠졌던 유대인들, 그러나 폴은 아버지가 지시한 숙제 대신 할아버지의 유령을 본다. 나약하게 패닉에 빠진 아버지와 달리 강인하게 결심한다. 엘리트가 곧 의무라 말하는 사립학교에서 줌아웃으로 멀어지고, 안락한 유대인 가정을 텅 비운다. 다시 사이렌이 울리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상과 자신을 타협하지 않는다. 오리무중에 빠진 어닝과 달리,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자각한 폴은 강해졌다. 그렇게 폴은 아마겟돈을 극복한다. 백인이고자 하는 가족들은 본인들이 소수로서 모멸당하던 유대인임을 잊었고, 그들의 후광에 기대고자 개인이 종말을 맞는다. 그러나 폴은 가족, 특히 아버지에게 역으로 재앙을 고하며 ‘내’가 된다. 단지 자신과 유대인임을 존중하고 지지해주는 할아버지만은 넘어서지 않은 채, 여전히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하며. 이러한 폴의 동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상과 현실의 딜레마를 치열하게 논하던 제임스 그레이 필모그래피의 근원적 뿌리다. 그레이의 근작이지만, 오히려 데뷔작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처음'의 영화로 본 작품의 위치를 규정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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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2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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