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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29. 2022

키라 코발렌코, <꼭 쥐었던 주먹 풀기>

증오와 속박

키라 코발렌코(Kira Kovalenko), <꼭 쥐었던 주먹 풀기>(Unclenching the Fists) 

- 증오와 속박     

“우리는 현재로부터 과거를 바라본다. 현재를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볼 수 가 없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동시대 러시아 영화의 강점 중 하나는 다양한 민족성과 거대한 지리를 고루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대다수의 영화가 파리에서 촬영되는 프랑스 영화와 아주 상반되는 태도다. (그나마 최근에는 프랑스 바깥으로 로케이션을 넓히고 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가 무르만스크로 향해 좁고 폐쇄적인 지방 자치의 실정과 부패를 고스란히 포착한 <리바이어던>도 그렇고, 20세기 내내 소련의 변방과 시베리아를 포착한 콘찰로프스키는 2012년 다시 한번 <더 포스트맨즈 화이트나이츠>로 러시아의 북부 아르한겔스크로 향했다. 또 메르쿨로바와 추포프 콤비의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 또한 미신과 전근대적인 성적 통념이 지배적인 낙후된 시베리아의 실정을 여실히 포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로컬 영화의 계보는 청년 작가들에게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바로 소쿠로프 영화학교에서 배출한 신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색채이기도 하다. 그 시작은 2017년 공개된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가까이>에서였다. 카바르디노발카르 자치공화국의 날치크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발생한 실화를 영화로 옮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라고프는 유대인과 발카르인이 각자의 생활사, 종교, 편견, 혐오를 이겨내지 못하고 혐오만 쌓여가는 제노포비아를 폭로한다. 특히나 곳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체첸인의 러시아인 학살 영상을 인서트하여 갈등과 혐오를 방조하는 세태를 매섭게 비판한다. 발라고프는 특유의 리얼리즘 문법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의 풍경을 세밀하게 포착하였으며, 이러한 민족성, 고립된 환경에서 개인들이 겪는 핍박을 갑갑하게 묘사하였다. 이렇게 발라고프의 <가까이>는 자신의 지역성을 반영하였지만, 그의 두 번째 장편인 <빈폴>에서는 리얼리즘과 더불어 탐미주의가 일련 강화되었다. 그리고 각 사례를 아카이빙할뿐 보편화하지 않던 원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달리 발라고프는 원전에 수록된 인터뷰 다수를 관통할 수 있는 여군의 보편적 요소를 길어내며 데뷔작과 다른 색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 소쿠로프 영화학교가 배출한 대표적인 감독으론 알렉산더 조로투킨이 있는데, 그는 데뷔작 <어 러시안 유스>가 베를린 영화제에 소개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조로투킨의 영화는 발라고프와 달랐다. 발라고프가 핸드헬드와 롱테이크, 비전문 배우들의 기교 없는 표현을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면, 조로투킨은 아주 형식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영화가 다루는 시기인 20세기 중반의 2차 대전에 매체를 맞물리고자, 둥근 모서리, 16mm 필름의 흐릿하고도 아스라한 질감, 그레인과 균열에 의한 거친 매체성, 무성영화 시대의 과장된 디렉팅, 영화 외부에서 음악을 끌어다 오는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형식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연출은 참혹한 전쟁을 미화하는 예술을 폭로하는 장치로도 사용된다. <어 러시안 유스>에선 20세기의 전쟁만 포착되지 아니하고, 21세기에 전쟁을 마주하고 이를 연주하는, 영화 외부에서 청각을 빌려오는 오케스트라가 교차 편집된다. 오케스트라는 전쟁의 운동감과 움직임을 바라보고, 이를 청각으로 승화하는데 이를 통해 참혹함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선전 예술이나 오락 예술을 반성한다. 영화 또한 포탄이 떨어지고, 폭탄이 터지는 폭발을 아주 심미적으로 포착하는데, 이로 인해 청년은 귀중한 아코디언을 잃고, 그의 눈은 시력을 상실한다. 조루투킨은 전쟁이 가져오는 개개인의 희생과 소외를, 이를 미화하는 결과물인 아름다운 형식과 대비시키며 폭로한다. 그리고 희생이 동반되는 현실에서 멀어진 허구적 감각과 예술이 아니라,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박한 친밀함, 즐거움을 강조한다. 이렇게 소쿠로프 영화학교가 배출한 러시아의 청년 감독들이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새로운 러시아 영화의 물결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2021년 칸 영화제에 소쿠로프 영화학교가 배출한 또 다른 신인인 키라 코발렌코의 두 번째 장편 <꼭 쥐었던 주먹 풀기>가 소개되었는데, 과연 본 작품은 소쿠로프 영화학교의 어떤 경향을 보여주고 있을까.  


1989년 날치크 태생의 키라 코발렌코, 그녀는 동향의 친구인 칸테미르 발라고프가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의 이야기를 데뷔작에서 풀어낸 것처럼, 키라는 날치크 인근의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의 오래된 탄광 마을인 미주르(Mizur)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를 위한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코발렌코의 연출은 그녀가 참여했던 <가까이>의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가장 먼저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결합한 리얼리즘이 주축을 이룬다. 롱테이크는 현실 속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아주 유사하게 겹친다. 핸드헬드는 일반적인 인류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발걸음, 이에 따라 격양된 시선에 상응할 수 있다. 이렇게 연출이 현실을 가리키고 있지만, 형식은 현실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영화 속 포착되는 인물들의 삶은 매우 불안정하다. 몸은 다 컸지만, 정신은 여전히 가장에게 휘둘리고, 장남 아킴의 경우에는 모스크바 인근의 경제도시 로스토프로 떠났지만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세 남매가 바라는 삶이 타율에 의해 흔들리는 불안정한 심리나 상황을 보여주기에도 핸드헬드는 효과적이다. 심리적임과 동시에 리얼리즘 양식으로 포착되는 본 작품에서 처음 데뷔하는 비전문 배우들의 비기교적인 연기가 생생함을 더한다. 한편 1990년대 중반에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하는 <가까이>와 달리, 본 작품이 다루는 시대는 오늘날이다. 그런데 동시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코발렌코가 포착하는 북오세티야 탄광촌의 낙후된 지역성에 상응할 수 있고, 높다란 산맥이 가로막은 폐쇄적인 공간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도 영화의 질감이 매우 흐릿하고 거칠며 아스라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매체인 디지털로 촬영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영화는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거나, 혹은 필름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카메라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중반에 통용되었던 거칠고 다소 조악한 매체성, 이러한 필름의 질감을 선택한 이유는 21세기와 어울리지 않는 북오세티야의 암담한 실정에 상응함과 동시에, 본 작품 자체가 과거에 발목 잡힌 가족의 딜레마를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작품의 소재는 2004년 체첸 독립주의자에 의해 발생한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의 현주소다. 조르의 가족은 본 테러의 피해자요, 아이다는 직접적으로 배와 성기 부근에 큰 화상을 입었다. 본 사건으로 가장은 여전히 다 큰 성인들을 아이 취급하고 과잉보호하며 자신의 손아귀 밑에 두고, 또 딸인 아이다를 향해선 다른 남성의 손길이 미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처럼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에 시간이 멈춰버린 가족의 비극을 동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탁한 매체로 보여준다. 흡사 가족의 삶에 테러가 발생한 그 날의 먼지가 가득 껴있는 것처럼, 또 영화 도입부에서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 아이들이 폭죽을 던지고 노는 것처럼, 그날의 비극을 지속해서 상기하듯 말이다. 본 작품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러한 연출로 짚고 넘어갈 게 있다면, 바로 소쿠로프 영화학교의 경향이다. 코발렌코는 발라고프와 유사한 연출을 보이고 있지만, 조로투킨과는 아주 상반된 경향을 보인다. 본 작품의 아주 강렬한 결말이라 할지라도 소쿠로프를 연상케 하는 탐미주의가 아니라,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을 연상케 하는 일상 속에서 길어내는 소박한 아름다움에 가까우니 말이다. 이렇게 졸업생들에게서 탐미주의와 리얼리즘의 차이가 분명 존재하지만, 소쿠로프 영화학교에서 지향하는 공통된 예술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영화가 다루는 시간, 대상, 공간에 따라 연출, 매체를 조응하는 형식의 합목적성이다. 조로투킨은 그가 다루는 전쟁이나 2차 대전, 그리고 오락화된 전쟁 영화를 폭로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연출과 매체를, 코발렌코는 북오세티야라는 공간성과 과거에 붙잡힌 가족의 삶과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리얼리즘을 택했지만, 내용을 위해 연출에서 합목적성을 추구했다는 점은 양자 모두 동일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보자. 가장 먼저 코발렌코는 여성 감독으로서 정교회나 이슬람이 주축이 되는 북오세티야의 폐쇄성, 가장에게 지배되는 여성의 암담한 삶을 탐구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타멕이라는 남자가 아다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아다자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타멕, 이러한 와중에 그녀의 ‘입’은 옷에 가려져 있다. 그녀는 침묵하고, 또 주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타멕에 의해 옷이 내려가자 겨우 말하기 시작하고, 타멕의 추파에 대한 거부 의사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타멕이라는 남성에 의해 여성이 말할 수 있는 것이 규정된다. 타멕은 계속 구애한다. 초코바를 주며 자신과 사귀자며 말이다. 이런 와중에 아다자는 누군가를 계속 기다린다. 남성이 주는 자, 구애하는 자라면, 여성은 기다리고 침묵하는 자다. 이후에도 타멕은 아다자를 좌우한다. 그는 기저귀가 든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드라이브를 함께 가면 돌려주겠다며 아다자를 괴롭힌다. 이를 돌려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다자는 차에 올라탄다.  입이 막힌 여성, 이는 타멕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조르는 아다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도록 입막음하고 그녀의 뒷덜미를 거칠게 붙잡는다. 그가 충격에 의해 쓰러진 이후, 세 남매는 그를 내버려두고 파티에 간다. 하지만 거기서도 아다자는 입막음 당하고, 이후 남동생 다코와 이를 수습하여 돌아오는 와중에 아다자가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한탄도 모두 입막음된다. 아킴의 손에 의해 입은 막히고, 다코가 그녀를 붙잡음에 몸도 움직일 수 없다. 제 입과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여성은 대신 말할 수밖에 없다. 남성 조르에 의해 헤어스타일이 규정되고, 또 조르가 허락하지 않는 향수를 구입한 아다자는 동료 타이라가 빌려준 것이라 거짓말한다. 즉 타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뜻을 대신 전달한다. 아킴이 집에 오기 이전, 아다자는 타멕과 드라이브와 레이싱을 즐긴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냥 즐겁지 않다. 조르나 아킴, 다코가 그녀를 규정한 데로 외부에 노출되어야 하는데, 타멕과의 드라이브는 여기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여성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남성의 소유물’이다. 그들에 의해 꾸며진다. 발라고프의 <가까이>에서도 여성을 '입막음 된 마네킹'에 비유되지 않던가. 코발렌코가 포착하는 북오세티야의 여성도 이와 유사한 실정이다.  


또 여성은 ‘어머니’라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뿐이다. 조르의 가정에는 어머니가 부재한다. 상처를 방치했다는 대사로 추론하면 어머니 또한 테러의 희생자일 것이다. 어머니가 부재한 환경에서 아다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이어 가사를 맡는다. 식사를 준비하거나, 하수구가 막히면 뚫는 것이 그녀의 몫이다. 지적 장애가 있는 다코는 누나를 엄마처럼 따른다. 그녀는 집에서 일하지만, 그 집을 관장할 순 없다. 하수구가 막혀있고, 또 집의 문도 조르에 의해 잠겨있다. 조르만 지닌 열쇠로 문을 열 수 있고, 그나마 막힌 하수구는 그녀가 뚫을 수 있다. 하지만 하수도로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은 조르가 원치 않는 아다자의 향수다. 또 조르가 문을 열고 차로 태워서 그녀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아버지가 허락한 직장이요, 출퇴근 또한 조르에 의해서 좌우된다. 여성의 ‘딸과 어머니’라는 역할, 가장이 여권을 소유하여 출입을 결정하는 폐쇄성에 그녀가 바라는 삶은 문틈과 하수도를 넘어 흘러나갈 수 없다. 여성은 ‘짐짝’에 가깝다. 아다자가 타멕의 차에 타고 있을 때, 그의 거친 운전에 다른 짐짝들처럼 아다자 또한 거칠게 흔들린다. 또 스스로 운전할 수 없고 옮겨주는 사람이 필요하여, 언제나 남성 아킴을 기다린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남성은 가장, 지배자를 맡는다. 그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정교회나 이슬람이 주축이 되는 북오세티야의 이념에도 기인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조르는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의 여파로 자신이 아다자를 지키지 못한 부채의식이 있다. 그래서 더욱 강한 가장이 되려는 조르에 의해 아다자는 속박된다. 또 이념은 여성 스스로 구원할 수 없게 만든다. 이념이 허용하는 여성의 구원은 오직 결혼이다. 영화 결말에 조르는 아다자에게 여권을 되돌려주지만, 그녀를 팔로 강하게 겁박해 놔주지 않으려 한다. 여권이 있어도 소용없다, 남성이 놔주지 않는다면. 여성의 수동적인 해방은 원치 않는 가장으로부터, 그녀가 원하는 가장에게로 옮겨감, 그 대상이 조르와 맞설 수 있는 강한 아킴이거나, 아예 조르의 집에서 멀어질 수 있는 타멕이거나.      


이렇게 젠더를 고찰하는 영화는 이후 '닮음', ‘되돌아옴’을 탐구한다. 다코는 정신 연령이 아이 수준에 머물러있다. 아들인 그는 아버지를 모방한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바로 아다자를 협박하여 그녀의 곁에 머무는 장면에서 말이다. 또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의 피해자로서 테러를 일으킨 외부 세력, 즉 체첸인들을 증오하지만 그들 또한 똑같이 행동한다. 테러리스트들이 인간의 목숨을 인질로 삼고 소유하자, 이에 맞서 조르 또한 자식들의 목숨을 자신이 소유하여 보호한다. 주민들은 아킴이 로스토프로 떠난 이후에도 결국에는 되돌아올 것이라 말한다. 증오에는 증오로, 소유에는 소유로, 폐쇄성에는 폐쇄성으로 맞섬에 이들은 폐쇄적인 공포분자를 닮는다. 여성은 언제나 딸이나 어머니, 남성은 가장이 되거나 아들로 머물거나,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나 맞서거나 소유하거나. 결혼조차도 타멕이 부모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것처럼, 아다자를 해방시켜주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아비의 곁으로 돌아오는 아킴처럼 말이다. 폐쇄적인 공간은 사방이 다 막혀있어 나아가더라도 결국 되돌아와 행동은 반복된다. 그것이 보수적인 정교회, 험악한 산악 지형, 역사에 따라 외부를 경계하는 북오세티야를 함축한다. 이러한 답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숏이 있다. 영화에서는 두 차례의 매혹적인 롱숏이 등장한다. 첫 번째 롱숏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있고, 처음에는 가까이 있던 인물이 서서히 멀어진다. 가까이 있던 조르가 아다자를 붙잡으려 멀어지고, 아킴은 아다자가 떨어트린 가방에서 과거의 상흔으로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윽고 아다자가 아킴을 부르자 그는 달려가 조르를 카메라 앞으로 데려온다. 조르를 중심으로 아킴도 아다자도 모두 되돌아온다. 아버지는 그날의 비극 때문에 딸이자 아내의 분신인 아다자를 붙잡고, 아이들은 아버지로서 조르, 그리고 시대의 희생자인 조르를 저버릴 수 없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트라우마로 붙잡히고, 마찬가지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자식들도 테러의 외상으로 되돌아온다. 본 작품에서는 두 유형의 아이가 등장한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아이들이다. 아다자의 가게에서 그들은 솔직하게 사탕을 바란다. 아다자가 불순하게 아킴을 바라거나, 또 타멕이 흉터가 있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을 두려워하여 주먹을 불끈 쥐는 것과 상반된다. 아이들은 솔직하고도 명랑하게 사탕 그 자체를 바랄 뿐이고, 외부를 신경 쓰지 않고 이를 주워 먹는다.     


클로즈업의 영화라 할법한 본 작품에서, 남성에 의해 위축되고 주눅이 들어 조용한 여성의 얼굴, 서로간의 긴장감에 경직된 남성의 얼굴들은 솔직함과 거리가 멀다. 과거에 발목 잡힌 이들의 얼굴과 현재의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대비를 이룬다. 조르가 쓰러진 이후에 아다자는 동료 타이라의 집에서 하룻밤 묵는다. 그곳에는 타이라의 두 딸이 있는데, 묵는 동안 아다자의 얼굴을 화장해주고, 머리에 형형색색의 핀을 질러 치장해준다. 머리를 잘라 그녀를 감추는 아버지와 달리, 솔직한 아이들이 그녀를 치장해 놓은 게 아다자의 진짜 바람일 것이다. 사탕을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마찬가지로 드라이브 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던 아다자처럼, 또 타멕과 성교를 나눌 때 그들의 머리 위로 사탕이 떨어지는 것처럼, 두려움을 강요받은 얼굴 이면에는 욕구를 순수하게 바라는 아이의 마음이 내재해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 유형, 그것은 ‘몸만 자란’ 세 남매에 해당한다. 가장의 군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 남매, 스스로 운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 한편 가장은 비로소 자신이 말하거나 걸을 수 없어 지켜줄 수 없게 되자 아다자에게 여권을 내어준다. 폐쇄적이고 위압적인 가부장제에서 자식들은 성장이 아니라, 가장이 죽고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이러한 본 작품은 아주 미묘한 근친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가까이>의 쌍둥이 남매에게서도 등장하던 상징으로, 고립되고 폐쇄적인 민족성을 보여준다. 아킴이 대도시로 떠나도 돌아와서 정착할 것이라 말하는 주민들의 태도도 그렇고, 영화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상징인 ‘닫힌 문’도 그렇다. 조르에 의해 닫힌 문, 또 조르가 쓰러지자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지만 반응 없는 문 너머, 오직 내부에서 해결해야 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민족적 폐쇄성, 과거에 갇힌 가족의 비극이 근친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외간 남자가 아다자의 몸을 훑거나 만지는 것을 금지한다.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의 여파로 성기 부근에 상처를 입은 아다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나, 외부에서 남성과 교류할 수 없고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면, 욕망에 눈을 뜬 몸은 자연스레 내부로 향한다. 아다자는 아킴을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또 다른 가장으로 여긴다.     

 

그리고 아내를 잃은 조르 또한 아다자를 단순히 딸로만 여기지 않는다. 아내의 분신으로서 아다자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눈치다. 조르는 그가 잃어버린 아내가 투영된 아다자만을 표상에 갇힌 채로 바라보지, 외부의 객관적 세계에서 인식하지 못한다. 또 외부에서 다른 여성들과 교류하기에 한계가 있는 다코 또한 아다자와 지나치게 친밀하다.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엄마와 닮은 누이의 곁에서 함께 살을 맞대고 자고 싶어 한다. 아킴에게 아다자는 아버지와 투쟁하여 해방시켜야 할 대상이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쟁취하고 싶어 하듯,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맡고 있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종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이가 사회에 참여하고 의식이 확립되어감에 본 콤플렉스는 해소되지만, 아버지에 의해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닫혀있어 사회에 참여할 수 없는 남매들은 근친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수 없다. 또 내부에서 성애를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외부에서의 사랑이 자연스러워 마땅할 구도가 아다자에게선 뒤바뀐다. 타멕과 성교를 나눌 때 오히려 주먹을 불끈 쥐고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아킴과의 친밀함이 되레 더 자연스럽다. 조르는 자식들이 외부로 향했을 때 벌을 내린다. 이에 죄책감은 근친이 아니라, 외부에서 타멕과 사랑할 때 느끼게 된다. 형제들과 아버지가 탄 차가 그들이 성교를 나누는 가게 앞에 등장하자 황급히 문을 잠근다. 자연스러운 사랑이 오히려 부끄럽다. 드러난 곳에서 형제들과의 친밀함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닫힌 것, 머물러 있는 것, 폐쇄적인 것은 곪는다. 아킴은 하루 빨리 아다자의 흉터를 치료하려 한다. 의사라는 외부 남성의 손조차도 불신하는 조르, 이에 따라 내부의 남자들만 바라보게 만드는 근친, 방치된 흉터가 아다자를 시한부 인생으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악순환에 붙잡혀선 안 된다. 영화의 두 번째 인상적인 롱숏, 아다자는 조르를 엎고 가는 아킴을 뒤따라가지 않고, 타멕이 안에 있는데 문을 잠가버린 가게로 향한다. 그리고 문을 열어서 그와 재회하고, 더 이상 카메라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타멕과 함께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그녀는 가족들이 자신을 쏘아보며 규정하는 시선에서 멀어지지만, 타멕의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아야하니, 다시금 시선에 의해 운명은 좌우되고 귀속된다. 단지 조르에서 아킴, 타멕으로 이어지는 가장이 타멕의 부모님으로 뒤바뀌는 답습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 여권과 열쇠를 얻은 남매는 뿔뿔이 흩어진다. 다코는 집으로 향하고, 아킴과 아다자는 도시로 향한다. 그녀의 수술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본 장면의 연출은 기존의 핸드헬드보다 더 거칠게 흔들리고, 안정적인 롱테이크의 이어짐은 불완전하게 깜빡거린다. 영화의 안정적인 카메라가 아니라, 아다자와 아킴 옆으로 지나가는 결혼 피로연 행렬의 홈비디오가 남매를 행복하게 긍정하며 촬영한다. 진정한 자유는 치열하게 구속하는 시선에서, 느슨하게 흩날리는 시선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아빠의 냄새가 그들의 옷깃에 묻어있지만 드라이브로 인해 바람에 흩날려가 자신들의 체취를 회복하리. 아버지의 소유물로만 여겨졌던 자식들은 바람과도 같이 흐트러지고 흩날리는 연출에서 비로소 자유를 되찾으리. 실존은 타인에게 붙잡혀 규정된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게 변화하고 흩날릴 힘이니, 그간 ‘주먹 쥐고’ 꽉 붙잡고 있던 가방을 비로소 놓아버림에 그녀는 흉터에 새살이 돋을 미래로 도약하리. 이렇게 코발렌코는 최근 다양한 민족과 지리의 삶을 포착하는 러시아 영화의 경향과 매체와 연출을 적절하게 대상, 공간, 시간에 맞물리는 소쿠로프 영화학교의 예술관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북오세티야에서 발생한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의 여파, 증오하는 대상과의 유사성, 폐쇄적인 민족성, 특히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고찰한다. 이를 가로막힌 입, 닫힌 문, 은밀한 근친 은유로 보여준다. 충분히 매혹적이지만, 다만 <가까이>와 지나치게 유사하다. 연출이야 닮을 수 있지만, 근친이나 여성의 입을 가로막는 손아귀 등은 <가까이>에서도 등장하였으며, 아버지가 쓰러진 당시 파티장에 가서 춤추는 장면도 민족성과 고정된 젠더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가까이>의 몸부림과 유사하다. 맥락은 다르지만 폐쇄적인 민족과 지역에서 벗어나고,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결말도 그렇다. 그래서 발라고프와의 유사성이 본 작품을 마냥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나, 근친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과감하게 뒤섞는 탐구나 연출 자체는 꽤 준수하여 코발렌코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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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29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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