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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30. 2022

루카 구아다니노, <본즈 앤 올>

나를 싫어해, 나를 사랑해, 너를 욕망해, 너를 사랑해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본즈 앤 올>(Bones and All) 

- 나를 싫어해, 나를 사랑해, 너를 욕망해, 너를 사랑해   

“그들은 입으로는 부정했지만 눈 속에서는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 서로 속이고 있음을 숨기지 못하고, 다만 속이기 위해서 속이고 있는 두 가여운 자들의 모든 언쟁은 유치한 거짓말이었으며, 어리석은 언사에 불과했다.” -에밀 졸라-

그 여자는 항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그르쳤다. 그 여자가 관계를 망친 이유는 다름 아닌 ‘식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성심성의껏 돌봐주던 베이비시터를 먹어 치웠다, 씹기 어려운 백골만 골라내고. 또 여덟 살 때 그녀는 여름 캠프에 가서 매미 허물 모으는 것을 좋아한 소년, 루크와 우정을 쌓았다. 루크와 자신은 괴짜인 것, 이방인인 것이 닮았다. 구조 요원의 지시를 무시하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이윽고 그녀는 루크를 탐식한다. 그녀는 이런 자신을 이해하고 싶었다, 식인을 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저지른 사실을 부정·외면·회피했고, 소녀에겐 세상 그 어디에도 자신과 같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사마귀뿐이었다. 그런데 소녀의 진실을 부정하던 어머니가 더는 못 버티고 집을 떠났다. 이제 그녀는 항상 궁금해하던 자신의 존재 이유와 근원을 찾아 나선다. 엄마가 식인종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분명 식인종이거나 어떤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랴. 그녀는 길을 떠난다,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길, 그리고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을 만나는 길을. 이후 소녀는 아버지를 만나고, 할아버지도 만나며 자신과 유사한 소년을 만난다… 이는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소설 『본즈 앤 올』의 일부이다. 이를 언급한 이유는 루카 구아다니노가 이를 영상화하기 때문이다. 잔혹함과 동시에, 하이틴 소설 특유의 가벼움이 공존하는 원전을 구아다디노는 어떻게 영상화할까. 1971년 팔레르모 태생의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탈리아의 시네아스트다. 그의 영화는 항상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경험을 투영한 것이다. 그는 항상 이탈리아에서 아웃사이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단순히 에티오피아에서 유년기를 보낸 경험만 그를 아웃사이더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커밍아웃한 게이이기도 하기에, 이성애자 사회에서 퀴어가 겪는 경험도 영화 속 여행에 녹여낸다.      


퀴어와의 끈이 아주 느슨해 보이는 <서스페리아>조차도 아웃사이더들이 자신의 이질성을 말소하고 보편, 주류와 같아지는 과정을 거울, 모방으로써 분석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영속될 수 없는 게이의 사랑, <아이 엠 러브>와 <비거 스플래쉬>는 일반적인 사랑 너머의 잔혹함과 사악함이 여행에서 드러난다. 일단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는 계절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아이 엠 러브>에서 부르주아지들의 본성이 냉각되고 은폐된 계절이 ‘겨울’이다. 냉정한 합리적 판단이 승리하는 시간에 부르주아의 사업 얘기, 형식적인 대화 및 격식이 가득 채워진다. 이러한 와중에 ‘여름’으로 향한다. 겨우내 겹겹이 입고 있었던 가식들을, 심지어 금기까지도 벗어던지고 애욕을 전라로 노출한다. <비거 스플래쉬>에서도 배경은 여름으로 <아이 엠 러브>와 마찬가지로 사악해진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사랑은 여름 내내 진행되었고 성 지향성을 쨍한 한여름의 뙤약볕이 비추지만, 그들은 게이로서의 성 지향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통념에 의한 좌절을 겨울에 경험한다.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서스페리아>의 주된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이라는 시간성, 그리고 ‘모방’하는 거울이 가득한 공간성, 게이임을 은폐하고 좌절하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겨울처럼 <서스페리아>의 겨울 또한 거울에 과거와 거짓들이 무한 전이되는 그런 시간이다. 구아다니노의 여름은 진실, 반면 겨울에 진실은 얼어붙고 허상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러한 여름에 인간의 진실, 곧 뜨거운 본능이 농익는다. <아이 엠 러브>에서 부르주아 일가는 자신들의 이윤, 계승해야 하는 권위와 명예, 남성성과 여성성 등을 집착하고, 그들이 사는 도시 또한 고대 그리스 이상주의에 입각해있다. 하지만 이성이 강조되는 세계에서 혀를 자극하는 요리사,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 솔직함을 드러내는 베타가 균열을 일으키며, 그 틈 사이로 엠마의 욕망이 고개를 치켜세운다. 러시아인으로 태어났지만 부르주아이기 위해 이탈리아인이 되어야 했던 엠마는 러시아 음식을 먹고, 러시아 시절의 이름인 '키티쉬'를 회복한다.      


<비거 스플래쉬>에서는 예술인들, 즉 감각을 다루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락스타인 마리안은 목소리를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이성적인 언어가 봉쇄되자 말초적인 감각이 파르르 깨어난다. 인간의 진실은 말이 아니라 육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거 스플래쉬>에서는 원죄, 유혹의 상징인 뱀이 주변을 어슬렁댄다. <아이 엠 러브>의 결말에서 엠마가 자신에게 솔직한 그러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처럼, 구아다니노는 <비거 스플래쉬>에서도 욕망의 이기적 속성을 지적한다.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배신하고 살해한다. 그러나 이는 해결되거나 처벌되지 않는다. 그저 묻힌다. 그러한 죄악이 인간과 세계의 거세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듯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엘리오가 자신의 성 지향성을 바라보는 시선, 진정 사랑하는 대상에게로 향하는 시선, 그리고 제 남근의 ‘솔직함’을 부각한다. 누구나 다 하는 휴가는 권태롭고 지루하다. 하지만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따라 하지 않고, 제 몸이 반응하고 느낄 때, 노동에서 벗어난 진짜 휴가가 시작된다. 그리고 겨울에 얼어붙었던 이념은 여름에 솔직하게 교정된다. 그들은 동성애가 가능했던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잡고 서로 악수한다. 동성애가 가능했지만 동등한 사랑도 아니었고 에로스도 아니었다. 그렇게 억압된 이념의 한계를 여름에 전라의 상태로 개선한다. <서스페리아>는 앞선 작품과 유사하다면 공간이 클래식하다는 것, 다른 점은 언급했듯 겨울이라는 시간이다. 여름에 나체와 욕망의 민낯을 본다면, 겨울에 이들은 진실이 아니라 외피를 본다. 구아다니노는 오디션 장면에서 춤 그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 그것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외피일 뿐인 심사평만 비춘다. <서스페리아>에서 그녀들의 혁명은 진보적인 것 같다. 하지만 겨울에 이뤄지는 혁명, 개인성을 지우는 혁명은 곧 과거의 또 다른 답습일 뿐임을 구아다니노는 비판한다. 이러한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는 ‘바꿔 입기’가 등장한다. <아이 엠 러브>에서는 엠마가 사랑하는 에두의 복식을 입고 뛰쳐나오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제목 그대로 네가 곧 나, 내가 곧 네가 되어 이름을 바꿔 부른다. 왜냐하면 그 대상으로부터 나를 확인했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스페리아>에서 수동적으로 따라 하거나 강요받는 행동, 복식은 곧 일반성에 따른 개성, 타자성의 말살임을 뒤집어서 보여준다. 이러한 구아다니노의 솔직한 사랑, 너무 솔직해서 추잡하고 잔혹하며 이질적인 사랑이 <본즈 앤 올>에서 다시 펼쳐진다. 구아다니노는 이번에도 여행을 떠난다. 이를 담아내는 본 작품은 경직된 세계에서, 살아 숨 쉬는 이질성과 타자성으로 한껏 가득 찬 세계로 이행하는 로드무비다. 그 포부를 도입부에서 드러낸다. 어떤 풍경이 특정 순간에, 특정한 누군가의 주관적인 시선에 붙잡혀 회화로 승화되었다. 카메라는 이를 포착한다. 어느 순간에 딱 멈춰서 얼어붙은 세계, 그러나 이윽고 카메라는 꾸물거리는 생물로서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의 연출은 흡사 도입부 회화의 속성처럼 고정되고 경직돼 있었다. 카메라가 가만히 멈춰서 회화적 내지는 사진적인 프레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아이 엠 러브>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처럼 보편성을 강요받은, 그럼으로써 솔직한 나 자신까지도 타자화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자신을 회화와 같은 특정 상태로 동결한다. 그러나 이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꽤 역동적인 패닝을 보여준다. 매런은 친구의 파자마 파티에 초대받는다. 이후 밤이 되었다. 아버지는 매런이 못나가게 단속을 철저히 한다. 그러나 매런은 창문을 열고 몰래 빠져나간다. 그녀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좌우, 위아래로 고개를 까딱거린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실존하는 인간이자 실존하는 세계를 가리키며, 연출의 부동과 운동은 바로 이를 가시화한다. 리와 만난 이후의 도로에서나 제이크와의 만남, 정신병원 등에서의 '핸드헬드'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까지 매런의 앎과 자아는 아버지의 규정으로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설리, 리, 제이크와 브래드, 엄마를 만나며, 매런은 자신과 동족에 대한 앎, 그리고 스스로의 바람을 서서히 뒤바꿔 간다. 고착화되어있던 기존의 유한한 믿음과 앎이 세차게 흔들린다. 평온하고 안정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물리적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것, 가해진다 한들 버틸만한 힘만 가해진다는 것, 반면 흔들린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경악할만한 힘이 가해진다는 것, 그렇게 기존 자신을 무너뜨리지만 그만큼 내게 무언가를 더 덧붙일 수 있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의 공간성에서 비롯한다. 구아다니노는 <아이 엠 러브>에서의 아카데믹한 도시, <서스페리아>에서 거울이 가득한 실내 등 공간성에도 적잖은 신경을 쓰는 시네아스트가 아니었던가. 일단 도입부의 공간은 학교, 그것도 길이 단 하나밖에 없는 좁고 획일화된 '복도'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저 다소곳이, 안정적으로 복도를 줌인할 뿐이다. 수직적인 공간, 그만큼 깊긴 하지만, 그 수직성의 길은 단 하나다.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러한 획일화된 수직성은 이후 설리가 점거한 어느 노파의 집, 깊진 않지만 폐쇄적인 리의 집, 설리가 침입한 매런과 리의 집에 해당한다. 그리고 타자인 이터는 이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인세에 머물며 깊게 속해야만 하는 ‘인간의 법’, 그리고 이터로서 '동족의 법'에서 말이다. 매런은 밤이면 아버지의 삼엄한 문단속 때문에 집 밖으로 쉬이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설리는 점거한 노파의 집에서 이터라는 종족성에 의거한 삶과 규율을 매런에게 강요하고, 집으로 돌아간 리가 케일라에게 강요받는 것도 가족의 바람, 그리고 '이성애자'나 ‘남성 젠더’라는 사회의 규범이다. 결말에서도 설리는 자신이 의탁한 이터라는 종족성에 의거하여 매런에게 집착하지 않던가. 이렇게 빠져나올 수 없는 법은 인간에게 편입된 동물에게도 해당된다. 설리가 손질하는 영계는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목적에만 국한되고, 리와 매런이 머무는 축사 또한 획일화, 가축화가 도드라지는 공간이다. 구아다니노는 동물을 통해 타자의 비극을 본다. 또 일반성으로서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좀 더 감성적이고 광적이며, 때로는 일반성이 외면하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광인들은 타자로 규정되어 정신병원에 갇힌다. 일반성을 위해 광인들은 빠져나갈 수 없고, 그 공간에서조차 정상인에게 해가 되지 않게끔 약을 먹이거나 팔을 절단하는 등의 조치가 영화에서 이어지지 않던가. 이렇게 닫혀 있으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고 튕겨서 돌아와 반복할 수밖에 없다. 광인은 얌전할 것이, 이터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쓸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영화는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수직적 공간에서, 평평하고 널따라며 광대한 공간으로 이행한다. 넓은 강당에서 매런은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 여러 갈래로 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도로에서 리를 만났다. 좁은 곳에서는 설리에게서 달아나기 어려웠지만 넓은 곳에선 설리를 거부하기 쉽고, 좁은 곳이라 한들 문이 열리니 리가 들어와서 함께 그를 퇴치한다. 좁은 곳이 아니라 넓은 곳에서 아빠는 매런을 포기한다. 그렇게 넓은 곳에서 인간과 이터의 혼혈이지만 인간만을 강요받고 인간의 법만 믿었던 매런은 이터임을 긍정한다. 인간, 그리고 편견으로 가득 찬 마을에서 리는 아버지 사망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익스트림 롱숏으로 펼쳐진,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과 광활한 여지를 긍정할 수 있는 대초원에서, 매런은 리를 이해한다. 그 전에 물이 찰랑거리고 유동적인, 또 탁 트인 호수에서 이들은 재회하지 않았던가. 그간 매런은 이터로서 자신을 타자화했다. 아빠는 테이프를 남기고 떠났다. 거기에는 매런의 식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매런은 이를 듣기 시작하나, 막상 식인 기록이 음송되니 재생을 중단한다. 이후 매런은 밤에 설리를 만난다. 식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매런은 이터들과 멀어져 있었다. 아버지에 의해서 부정되었고 정상성, 일반성을 훈련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자 이터가 보인다. 줌인으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윽고 이터와 바스트숏, 클로즈업 수준으로 가까워진다. 물론 광활한 익스트림 롱숏에서 개인은 너무나 미미하게 보인다. 그러나 좁고 폐쇄적인 공간, 여기에 더해 하나로만 국한하는 깊고 수직적인 공간에서 ‘혼혈’로서 인간은 다양한 가능성을 내비칠 수 없다. 다채로운 얼굴, 그 실존이 가능하려면 이를 허용하는 널따란 공간에 가야 한다. 이러한 공간에서 '여름'이 시작된다. 영화의 계절은 명확하진 않다. 다만 매런이 외투를 걸치는 것을 보건대,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로 추측할 수 있다. 여하튼 매런은 긴 옷을 입고 꽁꽁 싸매 자신의 맨살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살이 숨겨져 있다는 것, 그것은 살이 머무는 육체에서 비롯하는 진실을 은닉한다는 것.      


이는 ‘나’를 은닉하고 자신을 삼인칭으로 부르며 이터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설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숨기고 정상인들의 집에 몰래 잠입하여 멀쩡한 척 살아가는 그들은 모두 긴 옷을 입고, 인간의 법과 성질이나 종족의 보편성을 뒤집어쓰며 자신을 은닉한다. 그러나 매런이 만난 리는 다르다. 그는 매런이나 설리와 달리 반팔과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어서, 맨살 일부가 드러난다. 또 리는 사회가 규정한 '남성적'인 의상에 제한되지 않는다. 케일라는 리에게 옷 입은 꼴이 '게이' 같다며, 즉 여성적이라 타박하고 결말에서 리가 입은 상의도 여성의 블라우스에 가깝다. 여름옷을 즐겨 입으며 맨살을 노출하고, 또 그 의상으로 자신의 지향성이나 정체성을 드러내는 리는 노출된 살, 거기서 피어나는 진실에 솔직하다. 그리고 매런은 리를 만난 이후 서서히 몸의 일부를 노출할 수 있는 의상을 입기 시작한다. 그리고 양자 모두가 서로를 긍정한, 진정한 사랑을 이룩한 결말에서 두 남녀는 ‘전라’로 대화한다. 맨몸을 받아들이기 이전 혼혈 매런은 자신의 반쪽만 택했다. '흑인 부계'를 말이다. 소설을 영화로 옮기며 달라진 점이 여기다. 원전에서 매런은 인간 엄마에 의해 길러졌는데, 영화화된 본 작품에서 매런은 이터 엄마와 피부색이 다른 인간 아버지와 함께이다. 왜 흑인일까, 그리고 왜 아버지일까. 직접 배에 품고 낳는 어머니들과 자식이 보편적으로 함께한다. 그런데 그 일반성이 이터에게는 불가능하다. 매런의 어머니 자넬리 또한 고아였다. 이터들이 머문다고 해도 리의 사례처럼 부모자식은 적대하며 혼자된다. 이터들은 사라진다. 인간의 법에 따르기 위해서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하고, 또 인간의 법을 교란함에 도주한다. 인간에게 편입된 이터 부모는 자식을 타자화하며 아기 이터를 고아로 만들고 인간에게 떠넘기는가. 이러한 이터의 습성에 의해 일반적으로 어머니에게 남겨지는 아이의 구도가 부녀관계로 전복되는가. 또 영화 속 이터들은 모두 백인이다. 매런의 어머니, 설리, 리 모두 다 말이다. 매런만이 유일한 흑인 혼혈로서 피부가 어둡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식인하는 본성은 백색 이터의 속성이다. 순수하게 검은 이터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매런은 파자마 파티에 초대되어, 자신에게 다정한 친구의 손가락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매런은 흑인 아버지의 유전자가 아닌, 하얀 어머니의 유전자에 따라 행동했는데, 그 피해는 흑인 아버지와 흑인 매런이 입지 않던가. 원전에서는 도드라지지 않던 인종적 설정을 가미한 이유는, 식인종과 다를 바 없던 백인들이 가한 착취와 야만의 멍에를 백인들이 타자화하여 흑인들에게 덮어씌웠고 전가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실제로 경찰에 공식적으로 신고된 것은 흑인 매런의 식인, 그리고 가부장제를 거스른 ‘아들’로서 리의 살인이다. 경찰 브래드는 하얀 이터 제이크의 식인은 비호한다. 설리도 경찰에게 쫓기진 않는다. 백인, 그리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흑인과 아들이 타자화되는가. 에티오피아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구아다니노는 자전적 경험으로 각색을 시도하듯 보인다. 이렇듯 매런은 흑인 정체성이 더 강하다. 꿈에서 그녀는 흑인 아버지에게 생일을 축하받길 원하고, 또 아버지를 해칠까 봐 불안해한다. 아버지도 매런을 이터로서 타자화하여 도망치긴 했지만, 동일시되는 흑인으로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런은 다이너에서 옆자리의 흑인 소녀와 눈을 찡긋거리며 흑인으로서 유대감을 느낀다. 그래서 매런은 인간의 법에 집착한다. 인간끼리는 해치지 않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절도, 무단 점거, 살인은 금기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반하는 자신, 그리고 반쪽짜리 동족들이 역겹다. 그러나 이터들은 인간의 법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어긴 법은 이터의 법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강제된 인간의 법이다. 흡사 영화 속 닭이나 소와 같은 가축처럼 말이다. 그리고 동물들이 그러하듯, 이터들은 이터이기 위해서 법을 위반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법이 가축들의 삶에 야만적이듯, 마찬가지로 이터들의 삶에도 부적절하다. 그들은 그들만의 법이 필요하다. 인간 경찰 브래드가 이터 제이크의 규칙을 존중하듯, 이터들은 이터의 법으로 다스려져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의 법에서 광활한 공간으로 향하며 이탈하는 본 작품은, 인간의 법에 따라 신성시된 인간의 감각에 균열을 낸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신성한 인간성을 무너뜨리고, 그저 ‘고기’로서의 살덩이로 인간을 간주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저서 『감각의 논리』에서 비평하며, 육체가 특정 기능으로 국한되어있지 않을 때 생경하고 이례적인 격렬한 진동과 파동을 느끼고, 이에 따라 ‘감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본 작품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들의 법에 타자들을 편입한다. 가축을 강제로 다스리고, 영화에선 외피만 닮았을 뿐인 이터를 닮았다는 이유로 법을 따르게 한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인간에 의해 가축이 살덩이로 전락하는 것을 합법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를 영위하며 멀쩡하다. 고기가 되거나 가축화된 동물, 멀쩡한 인간의 상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우리는 별 감각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뒤집는다. 이터들은 이터의 법과 규칙에 인간을 강제 편입시켜, 인류를 흡사 정육점의 고깃덩이로 전락시킨다. 감상자는 먹히기 위한 용도로 전락한 적이 없었던 인간의 도륙 난 육체를 보며 잔혹함에 경기를 일으키기 충분하랴. 그리고 타자화된 적이 드문 인간이란 종이 타자화되는 경험을 갖고, 법의 야만성을 경계하리라. 인간은 타자를 이해하기보다는 적으로 여겨 밀어내고 배척했다. 또 자신의 나쁜 영혼을 내게서 분리해 타인에게 전가하고 이를 퇴치했다. 그것이 곧 인간의 동물성과 야만성을 짐승에게 전가하여 가축화하고 쉽게 도축한 타자화다. 그러나 인간 또한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시되어 도축될 수 있다. 어떤 법에 강제적으로 편입되며 우리 또한 다르다는 이유로 도륙될 수 있다. 타자화하는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나고,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외부는 싫어한다. 매런은 자신에게 친밀하게 대해주는 친구를 본능적으로 먹고 싶어졌다. 매런의 마음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먹고 싶은 자신을 좋아한다. 리는 카니발에서 한 게이를 만난다. 이후 섹스를 갖는다. 그리고 "싸고 싶다"라는 저속한 대사를 외친다. 배출하고 싶은 주체도 나다. 이러한 내게 솔직해야 한다. 혼혈 매런이 사랑한 것은 아버지, 그 아버지가 속한 흑인 사회였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은 것은 모계인 이터였다. 그래서 혼혈인 매런은 어쩔 수 없이 식인하여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사랑하는 나로서 생존하기 위한,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은 다른 것들을 먹어가며 목숨을 버텨간다. 그리고 내가 배출하고 싶은 이유도 대상을 진정 헤아리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내 삶을 번식으로써 이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신을 타자화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을 적대시하는 매런은 먹는 행위가 역겨워졌다. 하지만 설리, 리, 제이크 등과 만나서 이터인 자신을 이해한다. 여전히 매런은 리와 함께 대학교 인근에서 '평범한 인간'을 연기하고 있다. 반쪽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매런은 이터로서 리의 애환을 헤아린다. 매런은 '혼혈로서 자신', 더 나아가 '그냥 나'를 사랑할 때, 동족인 리에게 마음이 끌린다. 타자가 아닌 나와 닮은 존재로서 말이다. 앞서 제이크는 리에게 말했다, "나를 사랑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고.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법은 보편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한다, 단지 같은 인류를 해하는 행위를 금기시하고. 이터의 법도 그래야 한다. 이터로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야, 내게 솔직하며 자유롭다. 그런데 이터들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삶이 무수히 다르다. 또 매런은 이터의 보편적인 법과 규칙, 성질을 강요하는 설리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즉 이터들은 인간으로부터 이터로서의 법을 구축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론 보편적인 이터가 아닌 개별적인 이터로서의 삶이 보장될 규칙을 강구해야 한다. 그 고민의 끝은 결국 사랑이다. 이터로서 리와 매런의 진실 중 하나는 피 칠갑, 살해 및 식인 이후 남겨진 손가락의 핏자국, 얼룩이다. 설리를 살해한 리와 매런은 이를 은닉하고 방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인간으로서 이터를 긍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터도 긍정해야 한다. 단순 긍정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평범하게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터들은 욕망에 이끌려 상대를 살해하고 탐식한다. 그게 싫은 리와 매런은 ‘상대도 사랑하는 이터’가 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처럼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이름으로 나를 호명할 수 있을 때, 그렇게 나를 넘어서서 타인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인간은 사랑을 경험한다.      


그리고 구아다니노의 욕망은 본 작품에서도 사랑으로 발전한다. 원전에서는 합의 없이 매런이 리를 먹는다. 그러나 영상화되며 식인은 그대로 가되, 과정을 상호 합의로 바꾼다. 매런은 리랑 친밀해졌지만 내내 먹지 않았다. 심지어 결말에서 리가 중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려서 맛있는 냄새가 그녀 코를 간질이더라도 금욕한다. 또 죽어가는 리의 본능은 생존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리는 매런에게 자신을 먹으라 한다. 먹기 싫은 매런은 리를 위해서 먹고, 살고 싶을 리는 매런을 위해서 죽는다. 나를 억누르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랴. 이후 리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앞서 제이크는 뼈를 남기는 식인과 뼈까지 다 먹는 식인은 다르다고 말했다. 왜일까, 또 식인 이후 결말에서 나신의 매런과 리가 초원에서 서로 기대고 있다, 왜 리는 보존된 모습인가. 뼈를 남기는 식인은 혀의 식감을 위해서 상대의 일부만을 편식하는 욕망이라면, 불편함을 마다하고 상대의 모든 뼈까지 다 삼킬 수 있는 행위가 연인의 전부를 긍정하는 사랑일까. 흡사 매티스를 통째로 삼켜 머리속에 보존한 제우스처럼, 다만 차이는 일방적 욕망이 아니라 서로가 바라고 헤아린 사랑이라는 점, 욕망을 거둔 사랑에 의해 서로는 보존된다. 뜨겁고 시큼하던 멜로에서,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멜로로 돌아온 구아다니노,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작품에는 타자들이 등장하고, 또 자신을 포기하고 상대와 이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있다. <경계선>과 같은 작품의 계보에 놓일 작품, 타자가 된 인간을 느끼게 만들며 법의 폭압을 반성하는 작품, 보편에서 개별로 나아가며 더더욱 타자이자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 다만 구아다니노 특유의 ‘감각성’이 턱없이 부족하다. 네브래스카에서의 숏은 꽤 아름답지만, 별 의미 없는 클로즈업의 따분한 연속과 이미지 대신 대사를 줄줄 나열하는 연출은 안일하고 게으르다. 그리고 결말을 제외하고는 원전을 조금씩 바꾼 요인들을 깊게 탐구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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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130 cg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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