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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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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31. 2022

2022 Top 10

*나열 순서는 감상 및 개봉 순.     


1. 파블로 라라인, <스펜서> 3.17

올해에는 비극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하반기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아테나>가 그리스 비극의 전형이었고, 연초에 감상했던 <프랑스>나 <맥베스의 비극>도 비극의 구성을 따랐다. 또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영화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레벤느망>이나 <코르사주>가 대표적이었다. 올해 만나볼 수 있었던 ‘비극’과 ‘비극적인 여성의 삶’, 그중에서도 나는 <스펜서>에게 가장 마음이 쏠렸다. <스펜서>의 비극은 내가 나일 수 없는 비극이다. 오직 왕실의 안보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 군인처럼, 소음을 줄이고 계획된 요리만 해야 하는 요리사처럼, 다이애나 스펜서도 왕가의 목적과 대중들의 시선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거짓 이미지로 대체되고, 이에 진실과 무관한 나로 살아야 하는 비극에 처한다. 왕가가 안겨다 주는 부와 인기에 굴복하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가치인 자유, 주체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제 의식도 비극이 ‘슬픈 이유’에 알맞다, 지당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선 죽거나 슬퍼야 하는 비극. 심지어 실제 다이애나의 삶처럼 불규칙한 비극이 불어 닥칠 것을 예고하는 불길한 결말도 비극의 전형이다. 라라인은 삼엄하고도 질식할 것만 같은 다이애나의 삶을 지나치리만큼 탐미적인 연출로 풀어내며, 자신에게 과한 것을 타인이 바라는 과잉 아름다움의 역겨움을 폭로한다. 이러한 <스펜서>는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 문법에도 부합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의 고대 그리스적 비극의 규범에도 부합한다. 라라인이 만들어낸 황홀한 형식, 아름다운 가상은 니체가 말하는 '꿈의 세계'를 빚어내는 아폴론적인 조각가의 원리다. 이러한 아폴론적 원리에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대립하며 비극이 만들어지는데,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비조형적인 음악이나 춤의 원천이고,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깊은 근저에서 솟아오른다. 아폴론적 원리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고 관조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필연성과 하나 되어 스스로 예술품이 되어 날아오른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필연성’에 의해 비극은 슬프다.      


반면 아폴론적 원리는 개체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자신을 인식하게 만들고 절도를 요구한다. 이러한 아폴론적 원리로 빽빽하게 가득 차서, 자연과 본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이 곧 ‘왕실’이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라는 자기 인식과 왕가라는 법도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스의 아폴론적 인간은 신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왕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 신이 된 인간은 환상이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가 아니라, 자연이자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과 괴로움에 가득 찬다.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환상에 몰입하여 두 손을 뻗는 순간, 현실의 자연과 필연성이 우리를 배신한다. 다이애나도 그랬으랴. 왕세자비라는 환상은 결코 자신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였고, 더불어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왕가의 현실은 그녀를 배반했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결연히 선택한다. 하지만 비극의 복합성은 어떤 선택이 절대적 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나 아폴론적 원리가 개체 사이에 그은 경계선 내지는 법을 파괴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기에, 아폴론적 원리가 징벌을 내린다. 다이애나는 복잡한 번뇌에 가득 차지만, 끝끝내 왕가를 저버림에 따를 대가를 감내하고 왕세자비라는 자신을 망각한다. 이후 아들들과 함께 어린아이 같은 근원적 자유로 향하며, 노래와 춤이 되어 날아오른다. 그렇게 인간임을 사랑한다. 하지만 비극은 낙천주의에 잠기지 않는다. 아폴론적 예술이 끔찍하고 귀찮은 일들에 대한 반동, 구원의 환영에 잠기는 것이자 환상의 관조라면, 비극은 환영 대신 끔찍함과 잔혹성, 죽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스펜서>의 결말은 여전히 그녀에게 휘몰아칠 죽음을 암시하며 비극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아니겠는가. 정확하고 선명한 아폴론적인 환상은 인간에게 적절치 않다. 은밀한 회의로 인한 고민, 번뇌에 가득 찬 디오니소스적 불분명한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이다. 그것이 휘몰아쳐 슬프고 잔혹한 결말을 맞이하는 인간, 인간은 그런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라라인은 사랑하게 만든다. 그의 아폴론적 원리는 허무맹랑한 인간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에 부응하여 디오니소스적 인간상을 사랑하게 만든다. 올해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훌륭하게 조화시킨 오늘날의 작품이 바로 <스펜서>였다.    

  

2.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5.5

2020년 상반기에 시작된 코로나 펜데믹은 영화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다량 변화시켰다. 제작, 촬영, 프리미어, 배급까지 모든 것은 이전과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202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코로나 펜데믹에 의한 영화 연출이나 내용의 변화가 많이 감지되었다. 역대 베를린 영화제 중 그 어느 때보다 소품들이 경쟁 부문에 다량 올랐다. 홍상수의 <인트로덕션>은 촬영에서부터 카메라까지 모든 것이 간소화되어 복고적인 느낌으로 가득했고, 라드 주드의 <배드 럭 뱅잉>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을 촬영함과 동시에, 과거에 이미 촬영된 것을 아카이빙하여, 촬영하기 어려운 현재를 과거를 빌려다가 채워내었다. 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경이롭고도 마법 같은 미장센을 선보였던 셀린 시아마는, 신작 <쁘띠 마망>에선 정반대로 영화 본연적 요소만을 이용하여 소박하지만 마술과도 같은 효과를 자아내었다. 이렇게 코로나로 인해 규모가 작아진 영화들이 경쟁 부문에 대거 올랐던 2021 베를린 영화제였지만, 오히려 열악함 속에서 자기 색채를 유지하려는 치열함과 거대 자본에 구애받지 않는 작가적 색채, 영화의 맨살이 역으로 강조되었다. 또 올해는 우연에 관한 작품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어거스트 버진>과 홍상수의 <소설가의 영화>가 이에 대표적이다. 또 상상을 탐구하는 영화도 만날 수 있었다. 미아 한센-러브의 <베르히만 아일랜드>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페트로프의 감기>, 마티유 아말릭의 <홀드 미 타이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중 작년 베를린 영화제의 여러 소품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 그리고 우연에서도 상상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이었다.     


류스케가 촬영해놓은 여러 단편 중 세 편을 뽑아서 구성한 옴니버스 영화, 본래 유리된 단편들은 우연과 상상이라는 테마로 하나로 모이고, 그렇게 하나로 모였다가도 우연한 세 편의 이야기로 나눠짐과 동시에 겹쳐지며, 하나의 작품에서는 눈에 안 띄던 것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구성에서도 우연한 만남을 긍정하는 작품, 류스케는 이를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나 상황으로 탐구함과 동시에 형식으로도 가시화한다. 일례로 1부에서는 익숙함에 안주하고 머무르며 잘 모르던 자신을 우연으로 깨우치는데, 이를 정적인 숏을 트래킹 숏으로 변환하며 보여준다. 또 2부에서는 문의 열림과 닫힘,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깝게 확대하는 줌인으로 거스를 수 없는 우연을 보여주며, 3부에서는 에스컬레이터에 놓여 고정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카메라에서 멀어지는 인물을 포착하며 당연함에서 떠나가는 우연을 표현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사실에서 멀어지는 상상에도 상응하는데, 이 또한 연출로 가시화한다. 1부에서는 눈을 감고 생성하는 이기적인 상상을 현실과 외부, 타인을 차단하고 나만을 가리키는 줌인으로, 2부에서의 편협한 상상은 닫힌 문으로, 3부에서 대상과 내게 충실한 상상은 줌인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우연, 그리고 충실한 상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몰랐던 나와 예측하지 못한 상대방으로, 이를 다다미 쇼트에 가까운 아주 또렷한 리버스숏으로 정면에서 포착한다. 꾸밈없고 왜곡 없는 순수한 얼굴, 그것이 우리가 우연과 상상을 통해 목도하고 넘어서야 하는 진실임을 역설한다. 또 상상이 비롯할 텍스트를 깊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류스케의 지론에서 책임이 묻어난다. 대상을 잘 알고서 상상할 때, 부재한 대상과 충실한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아주 풍성한 영화적 요소를 접할 수 있었던 작품, 회백색 건조한 일상에서 우연과 상상으로 많은 것을 채워내고 목격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 그렇게 많은 것을 비운 대신 풍부한 본질을 목도하는 행복함을 안겨준 작품이 바로 <우연과 상상>이었다.    

  

3. 로라 완델, <플레이그라운드> 5.26

올해에도 아이 영화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길 위의 가족>,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기도> 등의 아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영화는 바로 <플레이그라운드>다. 영화는 여러 각도에서 흥미로웠다. 본 작품이 데뷔작인 벨기에의 청년 감독 로라 완델은 자국의 선배, 다르덴 형제의 방법론을 따른다. 롱테이크와 핸드헬드는 그들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선배의 그늘에 마냥 안주하지 않는다. 기존 숏을 거칠게 자르고 다음 숏을 이어붙이며, 새로운 배움이나 낯선 환경으로 진입하는 아이들의 의식을 편집으로 보여준다. 또 학교가 두려워서 알을 깨고 나오기 힘든 어린이의 심리를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외부가 흐릿하게 보이는 포커싱으로 가시화한다. 더불어 외부에 관심을 집약하는 잠복기 시기의 아이들의 의식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가정을 아예 보여주지 않고, 학교만 보여주는 구성 또한 특징이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영화는 아이들만의 세계, 어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작동하는 아이들의 법과 규칙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배워가는 것은 죽음이다. 영화의 운동감은 줄곧 아래로 향하고, 또 거친 편집으로 과거는 날카롭게 잘려 나가 단절되고 새로운 것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의 대화 내용에도 죽음이 포함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죽음을 잘 모르는 아이들, 또 외부의 법과 유리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아이들의 세계는 폭력적이다. 더욱이 어른들의 세계가 포착되지 않지만, 아이들의 규칙에 분명 어른들의 단어나 사상이 묻어있는 만큼, 아이들에게서 성인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의 세계에 개입하진 않지만, 분명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어른들의 책임을 아이들의 얼굴로 보여준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재생산되는 것은 곧 어른들의 세계다. 아랍계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보호가 적게 미치는 이스마일이 아이들의 세계에서 더 따돌림 당하는 것은 우연일까. 이에 따른 얼굴은 어른이 개입해야함을 보여준다. 영화 속 학교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숏, 왕따를 당해 노라마저도 불편한 아벨은 프레임 바깥으로 자꾸 나가며 소외되지만, 어른의 지시에 의해 둘은 어깨동무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죽음을 배워가는 아이들은 이를 막고자 자신들의 법을 정화한다. 아벨이 이스마일의 목을 조거나 비닐봉지를 씌워 호흡을 어렵게 만드는 것을 노라가 막듯, 아이들이 죽음을 자각하는 성장을 보여준다. 바라본다면 진실하게 바라보고 이를 책임질 수 있게끔 어른들은 작용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외부 세계, 하지만 이를 반영하는 아이들의 얼굴로 대신 사회를 노출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 거대한 선배의 영향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연출을 모색한 점이 빼어난 작품, 그간 어른들과의 관계와 시선에 놓여있던 아이 영화로부터 최대한 그 끈을 미약하게 만들어 아이들만의 영화를 선보였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4.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군다> 7.15

5. 안드레아 아놀드, <카우> 8.11

올해는 두 편의 동물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편 모두 다큐멘터리였고, 축사를 다뤘으며, 인간이 누리는 쾌락 이면의 불쾌한 진실을 까발렸다. 이런 점에서 서로 유사했던 작품 <군다>와 <카우>, 그러나 같지만 달랐다. <군다>는 아름다움을 박탈당한 동물, 특히 가축들에게 이를 되돌려놓는다. 그들의 희생으로 인류가 누리는 위선적이고 추악한 아름다움이 아닌, 동물들의 진정 자유로운 삶, 투쟁하는 삶을 승화하는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럼으로써 <군다>는 장애와 투쟁하고, 유한하고 불완전하여 공생하는 지구의 온 생물에 대한 헌사를 전한다. 이렇게 <군다>가 아름다웠다면, <카우>는 거칠다. 그러나 그 거칢 또한 축사 내 인류의 족쇄와 소의 의지가 충돌하는 흔들림, 균열, 반항에 상응하는, 그야말로 생생한 형식이었다. 즉 <카우>는 연출까지도 소의 생 그 자체가 되어, 인간이 자신을 내려놓고 타자의 삶에 간접 참여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영화감독의 개입은 오직 카메라, 이를 통해 동물들만 느끼게 만드는 두 작품, 이는 ‘자연 미학’을 느낄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인지적 가치나 미적 속성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설령 감상자가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감상자에게 전달되고자 하는 예술은 비교적 친절한 태도로 다가와서 무지를 앎으로 뒤바꾼다. 하지만 자연은 다르다. 흔히 자연도 예술처럼 ‘아름답다’, ‘숭고하다’ 등의 미적 경탄을 불러일으키지만, 예술 작품과 다른 점은 감상자에게 보이기 위해서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물리쳐주지 않는다. 이에 따라 우리가 직접 자연에 대해 미리 알고 접근하여 아름다움의 합목적성을 파악해야 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도 그렇다. 일반적인 배우들은 감상자의 눈을 의식하며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 쓴다. 배역의 감정이나 속성을 명료하게 풀어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자연의 산물들은 다르다. 물론 감독에 의해 촬영되고 편집되며 비교적 명료하게 다가올 순 있으나, 또 축사라는 환경이 그들을 단순화시키나, 그럼에도 미지의 부분들이 남아있다. 두 작품 모두 다 동물들의 울음을 번역하거나 설명해주지 않는다. 또 자연물들은 카메라나 영화감독, 감상자를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는다. <카우>에서 소가 카메라와 촬영감독을 의식하긴 하지만, 소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지 않고, 송아지를 돌려 달라며 자신의 감정을 절절하게 호소한다. 즉 두 작품은 인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순수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대상의 무지를 극복하려는 능동적 태도와 치열한 탐구정신을 작품으로써 자극해주었다.      


이러한 순수 이미지,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영화가 '청각적인 무언극'이라는 역설을 창출해 낼 때 위대하다고 말한다. 블로흐에게 무언극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 지금까지의 언어로 가리킬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내는 가능성, 상상력, 고유하게 개방된 아우라로 가득하다. 그래서 블로흐에게 언어로 시청각을 획일화하는 유성영화는 가능성의 말소였다. 반면 무성영화나 청각적인 무언극은 언어의 단순화 대신, 시청각적인 가능성을 증폭한다. 그것이 곧 현실과 별개의 차원에 놓이며 새로운 가능성과 타자를 보여주는 예술의 참맛 아닐까? 바로 이러한 청각적인 무언극을 두 작품에서 느꼈다. <군다>에서 소리는 분명 들려오지만, 이는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자연의 언어다. 인간의 언어는 여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가 개입되었더라면 평면적으로 단순화됐을, 자연의 복잡 미묘한 뉘앙스와 감정을 그 자체로 느낀다. 이러한 영화는 언어뿐만 아니라, 심지어 흑백영화로서 색채까지 앗아간다. 언어와 색채가 사라지면서, 이에 주목하느라 집중할 수 없었던 다른 요소들이 눈에 띈다. 영화 속 포착되는 돼지, 소, 닭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깊이 몰입한다. 또 운동감, 촬영에 주목하며, 그것으로 파생되는 비언어적인 풍부한 의미를 전달받는다. 일례로 영화의 도입에서 문밖 아래로 새끼돼지는 떨어진다. 이는 출산의 은유다. ‘어미의 자궁 밖’이 문밖으로, ‘세상 바깥’은 아래로 추락하는 틸트라는 촬영으로 나타난다. 이는 어미와 새끼돼지의 관계를 '출산'이라고 딱딱하게 명시하는 언어보다 더욱 풍부한 함의를 지닌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한 과정을 축약한 언어가 아니라, 풍부한 표현과 세세한 요인들을 느낀다. 또 다큐멘터리인 본 작품은 서사도 드물다. 그래서 서사를 위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다. 한편 <군다>와 <카우> 모두 동물들의 순수 이미지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며 발생한 서사가 앗아간다. 보고 듣고 싶은 극적인 서사를 위해서 동물이 희생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구조와 예술을 반성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위해서 현실과 타자의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자연 그 자체에의 몰입뿐만 아니라, 참신한 예술의 맛, 이를 통해 인간 중심적인 예술을 탈피하여 그간의 인간 중심적인 예술을 반성하게 해준 작품이 바로 <군다>, <카우>라 하겠다.      


6. 요아킴 트리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8.25

청년은 제 청춘이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자신의 젊음을 사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들은 외부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다. 가장 예민하고 민감하게 들리는 것은 제 내면이 만들어낸 ‘환각 체험 속의 웅장한 환청’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청춘 율리에는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사랑한다. 자신과 유사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고, 제 육신이 변화하면 기존 연인과 이별하고 새로운 사람을 재빨리 사귄다. 그래서 청춘들을 담은 시퀀스의 ‘편집은 항상 재빠르다.’ 율리에는 한 숏에 길게 머무르지 않는다. 빨리 다음 숏으로 이어져 헤어스타일도, 직업도, 꿈도 모두 탈피한다. 한편 율리에는 꽤 만족스러움과 동시에,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인생의 조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율리에를 설명하기 위해선 '나레이션'이 동반되어야 한다. 안착하지 못하고 확신이 없는 율리에는 그래서 자신과 닮은 존재를 통해 안정감을 얻고 싶은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하고 열망한다, 청춘이 관심 있는 것은 복잡하고 거대한 외부 세상이 아니라, 오직 ‘나와 닮은 상대방’과 그를 쳐다보는 ‘자신의 눈’이다. 사랑은 거대한 세상이 포착되는 롱숏이 자신과 연인에게로 좁다랗게 축소되는 ‘줌인’, 그리고 나와 연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굳게 되는 '프리즈 프레임', '현실 유리'다. 이렇게 연인과 침실에 함께 드러눕지만 이와 동시에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그 대상과 함께 몸을 섞으니 비로소 드넓은 세상으로 확장된다, 이와 동시에 그에게서 멀어진다. 동침으로 애달팠던 나를 성취했다. 청춘은 진정 타자를 열망한 것이 아니다. 출판기념회에서의 연인이 나를 바라봐주기를, 토론회에서 연인이 나를 소외시키지 않기를, 그렇게 ‘사랑받는 나’를 바란 것이지, 진정 대상을 사랑하진 않았다. 그런 나는 눈과 귀가 멀었다. 상대방의 글을 읽고 얘기를 들어도 꽂히는 것은 내 기분과 주관이지, 객관적인 외부 대상이 아니다. ‘남과 여’는 서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빠르게 잘리고 이어내며 변화하는 자신은 괜찮지만, 재빠르게 변화하는 수니바의 세계에 에이반드가 참여하기는 싫다. 그렇게 대상에게서 멀어져 나를 바라보지만 나이를 먹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청춘이다. 나이 40이 넘어간 악셀도 절대적으로 자기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확신을 갖기 위해 사랑하고 멀어지는 것이 곧 인생이리…  

   

이는 올해 가장 솔직하고도 발칙하며 감각적인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이다. 그리고 본 작품은 감독의 청춘에 대한 담담한 고별사로도 느껴졌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요아킴 트리에 필모그래피의 시작을 알린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오슬로 3부작의 앞선 두 작품인 <리프라이즈>와 <오슬로, 8월 31일>에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악셀을 맡은 다니엘 앤더슨 리가 트리에의 페르소나였다. 그런데 감독과 뮤즈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뒤로 물러서고, 심지어 악셀은 세상을 뜬다. 감독과 뮤즈의 청춘이 담긴 오슬로 3부작은 이제 뒤안길로, 그 자리를 율리에라는 새로운 청춘에게 물려주며 인생의 한 마디의 끝을 알린다. 다니엘 앤더슨 리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율리에는 다니엘 앤더슨 리의 실제 삶을 많이 닮았다. 의학을 전공했다가 이후 음악가, 배우로 전향하고, 코로나 펜데믹 당시에는 다시 의사로서 봉사활동을 한 그의 삶이 반영되어 있는 것만 같다. 다만 그러한 청춘의 즉흥과 변덕에 이제 종언을 알리는가. 그러나 이는 단지 오슬로 3부작의 마무리, 이후 요아킴 트리에가 새로운 작품을 연출할 것이니 완전한 종결은 아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율리에가 계속 하나의 삶을 끝내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악셀 또한 완고하더라도 변화한 상황 속에서 의견을 수정하는 것처럼, 고집스럽더라도 여전히 변덕스러운 자신의 새로운 세기를 죽음으로써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글로 작품의 현란함과 다채로움을 옮겨보긴 했지만, 그 시도가 역부족일 정도로 역동적인 작품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파란만장한 연출이 줄 수 있는 다채로운 미적 경험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작품 세계를 풍요롭게 종합하고 끝마치는 집대성, 그러나 여지로 가득한 미완의 영화는 여전히 트리에의 또 다른 시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또 올해 만난 <헤어질 결심>, <리코리쉬 피자>, <파리 13구> 등의 사랑 이야기, <어거스트 버진>과 같은 청춘 이야기 중에서 약동하는 열정 그리고 이기적일 정도의 자아도취라는 본질을 가장 잘 관통한 점이 걸출했던 작품이다.     


7. 카를라 시몬, <알카라스의 여름> 11.3

대지는 다양한 것을 낳았다. 땅의 여신 가이아는 인간과 비슷한 용모를 한 신들에서부터, 괴물의 형상을 한 신들까지, 다채로운 아이들을 낳았고 그들에게 편견 없었다. 무수한 것을 낳는 대지는 마찬가지로 그 형체가 다양했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자애롭기도 했지만, 딸 페르세포네를 잃었을 땐 세상 그 어떤 신보다 흉포해졌으며, 암말이나 노파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지녔다. 그런데 이러한 풍요로운 땅이 메말라가고, 다채로운 땅은 오늘날에 사물처럼 축소된 역할만 부여받는다. 땅은 여전히 태곳적 풍요로움을 간직하나, 인간에 의해 임의로 이름, 경계선, 소유자, 용도 등이 붙여짐에 땅은 가능성을 잃는다.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이들, 그리고 대지처럼 아이들을 낳는 여성들은 자유로운 땅, 그리고 포용력 넘치는 땅의 태곳적 모습을 간직한다.     


카를라 시몬은 바로 아이·여성들에게서 땅, 그것도 독립운동이 활발한 카탈루냐의 자유를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바라본다. 카를라의 전작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부모 세대가 적대시한 조부모 세대의 원리가 파시즘이었다면, <알카라스의 여름>의 카탈루냐인들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대기업, 거대 자본에 항거한다. 한편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부모 세대가 조부모 세대를 행동으로 반성하지 못한 것처럼, <알카라스의 여름>에선 외부 압력에 의해서 원리주의적인 가부장제가 역으로 고착화된다. 그래서 <알카라스의 여름>에서는 시대 변화 속 구두계약의 허점을 노린 토지 침략과 더불어, 가장 키메에 의해서 카탈루냐-알카라스의 가족들이 이중으로 자유를 억압당한다. 사실 본 작품의 직접적인 정치성은 복숭아 단가를 후려치는 거대 유통 업체를 대상으로 한 시위 장면에 불과하지만, 복숭아밭을 잃고 반강제로 태양열 관리자가 되어 '집'만 허용되는 카탈루냐인들에 대한 정치적 은유가 가득하다. 키메는 외부 침입에 대한 반항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 그리고 '자식들의 모습'을 강요한다. 그것이 특정 카탈루냐인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의 한계와 같다. 그러나 왜 카탈루냐는 독립하려는가, 거기서 카탈루냐인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바로 '자유', 그것을 위해서 땅에서 다채롭게 유희하고 다채롭게 실존하는 아이들, 그 자유를 포용하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태도로 독립을 염원하는 카탈루냐의 본원적 이유를 환기한다. 침탈이 일어났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 그렇지만 키메는 농부로서 고집을 부리고 소는 시름시름 앓는다, 하지만 소는 다시 일어서고, 땅은 버티며 여성은 포용하고 적응하며, 아이는 그 너머를 꿈꾸고 좌절하지 않는다. 전작에서부터 미시적 삶을 비추며 정치적 여파를 돌려 말하고, 이로써 그 영향을 체감하게 만드는 화법이 매력적이었던 카를라는 <알카라스의 여름>에서도 유사한 문법으로 이를 통찰한다. 이와 더불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가족의 의미, 대지의 본원적 가치를 환기했을 뿐만 아니라, 카탈루냐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침탈당하기 이전의 삶, 정물, 풍경을 섬세하게 기록하는 형식 또한 황홀했던 작품이 바로 <알카라스의 여름>이었다.  

    

8. 미켈란젤로 프라마티노, <일 부코> 11.12

우리는 왜, 어째서 예술을 감상하는가. 우리가 영화를 감상하거나 현실에서도 '영화적'이라며 감탄할 때는 주로 일상에서 벗어날 때다. 그나마 영화는 필연적으로 현실을 비추기에 현실과 타협한 상상력을 주로 보여준다면, 아예 백지에서 시작하는 회화나 만화는 비현실적이고 무한한 상상력을 매개한다. 또 영화나 조각은 질료나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이 찬미의 대상이 되곤 한다. 즉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것, 보고 느낀 것 너머를 접하고 싶어서 예술을 본다. 그것이 곧 예술의 존재 이유인 상상력이자 호기심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현실을 이탈해야지만 상상력을 만족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프라마티노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살고 죽고 변하고, 지금의 현 상태가 영원하지 않다고 바라보는 불교적 신념을 가진 프라마티노는 신작 <일 부코>에서도 너무 익숙하여 심지어 따분해 보이는 일상적 현실, 풍경을 질료로 삼아서 자신의 윤회적 철학과 예술의 본질을 환기한다. 프라마티노의 카메라는 기교가 없고, 포착하는 대상도 단순하다. 동굴, 목동, 마을, 탐사대원, 아이들, 동물… 그러나 몇몇 추상적인 이미지나 청각에 이를 규명할만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는다. 신비로워진다, 우리는 대상을 파헤치고 싶어진다. 또 처음 봤을 땐, 너무나 확실하게 시각을 규명할 수 있었던 대상이 변한다. 깨어 있다가 눈이 감기고, 살아 있다가 죽고,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무형의 상태로 살아난다. 분명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익숙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낯설어진다. 영화의 주제인 동굴탐사, 점차 동굴의 밑바닥에 닿아가고 목적지가 보이면서, 영화는 지도·삽화·앎을 출산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잡지가 불태워졌고, 기존에 알던 앎은 등한시되었으며, 알았던 대상은 시간을 채워내고 변하며 이로써 또다시 우리를 자극하니,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도 신비롭게 되돌아온 늙은 목동에 의해 깨어있어야만 한다, 영화와 내 눈은. 그렇게 이미 밝혀진 줄 알았던 대상을 더 자세히, 다른 각도와 시간에서 바라보는 것, 그 대상의 '윤회'를 긍정하는 것이 곧 그에게 예술이다. 사실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기상천외한 예술은 감상자의 현실로 전해지진 않는다. 현실과 너무 멀리 있고, 또 감상자는 모험의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프라마티노는 너무나 일상적인 재료들로 감상자에게 모험심의 재료인 의지, 호기심, 깨어있음을 자극한다. 우리는 숭고하고 기상천외한 것들에 귀를 쫑긋 기울이지 않던가.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소박하고도 구체적인 재료로 모험심과 탐구욕을 자극하는 참신한 작품, 예술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는 태곳적 상태에서 시작되었을 예술의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 이를 통해서 예술의 본질을 통찰하고, 유한한 현 상태에서 무한하게 변화하는 인간과 세계라는 진리를 깨우치는 시선이 숭엄한 작품이었다.      


9. 파얄 카파디아, <무지의 밤> 12.4 

나는 내 권리를 타인이 간섭할 때 반항한다. 우리는 권리를 외부에서 침탈할 때 거리로 뛰쳐나간다. 끓어오르는 고함을 외친다. 뜨거운 나를 드러낸다. 그렇게 실존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런 시위는 개개인의 권리를 짓밟을만한 거대한 힘을 가진 권력자들과 적대한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곡해되며 은폐될 여지도 다분하다. 이에 권력자를 대변하는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안정적인 반면, 시위의 이미지들은 불완전하고 흔들리며 파편적으로 이어진다. 카파디아가 <무지의 밤>에서 포착한 시위도 그렇다. 분명 카파디아가 추적하는, 본 작품을 구성하는 푸티지들을 남긴 ‘학생’이 속한 시위가 구체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시위의 구체성·객관적 사실에 이미지나 음성은 언제나 일치하진 않는다. 16mm 흑백 필름에 담겨서 시대적인 구체성을 가늠할 수 없는 시위 푸티지들, 그것이 학생이 참여한 시위를 대신 말하고, 또 학생이 참여한 시위가 이름 없이 시청각만 있는 푸티지를 대신 말한다. 분명 제 존재를 드러내는 시위, 그러나 보이는 얼굴에는 자신의 이름이 없고, 특정한 이름에는 그에 부합하는 시각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시위한다. 내가 ‘나’일 수 없음에, 부재한 나를 자꾸 빌려와야만 했음에. 형식이 시위의 명분을 보여준다. 카파디아는 <무지의 밤>을 파운드 푸티지, 그리고 아카이빙 푸티지로 구성한다. 푸티지와 일기,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학생, 그렇게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개인의 설움과 그녀의 사랑을, 마찬가지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구현한다. 그래서 시위는 산발적으로 뒤섞여 있다. 그러나 목표는 같다, '자유', 다수가 동일하게 이를 외친다. <무지의 밤>에서 다수는 꿈을 꾼다.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그러나 이제는 실현하고자 일어선다. 그것이 곧 꿈이면서도 현실인 영화다. 그러나 이 꿈이 좌절되는 인도이기에, 그래서 기록해야만 하는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카파디아는 고민한다. 다큐멘터리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야 할지, 매체와 장르에 대한 고심이 역력한 작품이 <무지의 밤>이다. 감독, 학생, 푸티지 모두 다 스스로를 말하지 못하는 절망, 꿈조차 꿀 수 없는 좌절, 그러나 영화의 맨살을 탐구하는 감독은 인간의 맨살도 포기하지 않는다. 빌려온 몸, 하지만 솔직한 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영화처럼 그 춤도 언젠가 실현되지 않을까. 직접성을 포기하고 빌려 말하며 일반성을 잃는 시적인 다큐멘터리,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신예 감독의 정치적, 매체적 탐구가 그 자체로는 황량하되, 이면의 정신은 정열적이고 뜨거웠던 작품이다.      


10.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 <가가린> 12.22

주로 파리, 휴양지, 전원을 벗어나지 않는 프랑스 영화,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젊은 시네아스트-셀린 시아마의 <걸후드>, 래드 리의 <레 미제라블>, 합시아 헤지의 <세상의 어머니는 행복해야 마땅하다>-들은 수도도, 관광지도, 농촌도 아닌 파리 교외 '게토'로 향한다. 이민자들, 경제적 취약계층들이 모여 사는 게토로 향해서 사회적인 영화를 촬영한다. 이들 작품은 주로 리얼리즘에 충실하며 프랑스 중심부에서 주목하지 않는 주변부의 문제를 들춰낸다. 그리고 지역 내 구성원들의 이상을 실현하듯 리얼리즘에만 경도되지 않은 탐미주의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현실에 발을 걸친 리얼리즘과 예술계에 발을 걸친 탐미주의의 결합을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 콤비가 <가가린>에서 보여주었다. 본 작품은 인류의 요람으로서 대지와 거주의 가치, 그 위에서 사회적으로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환기하는데,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 점이 흥미로웠다. 오늘날의 현대사회, 그리고 영화 속 '가가린' 단지도 대체로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가가린 단지를 계기로 하나로 모이고, 가가린 단지를 위해서 '하나의 테이크'에 여러 인물이 함께 공존한다. 또 이른 아침의 희미한 달, 페이딩 되어가는 사람 등은 지우개로 형체를 지우듯 투명해진다. 그렇게 희미해지며 무언가가 더해지거나 겹칠 여지가 생긴다. 그리고 실제로 유리에게로의 방문, 공동체의 연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때, 그 여백에는 영화의 풍부한 시적인 미장센이 차오른다. 그러나 춤을 출 때는 하나의 시퀀스에 모이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숏에 배치된다. 그렇게 개인이되, 국가의 일방적인 통보와 이기주의는 경계하고, 개인의 연합으로서 공동체를 지향하여 건설적인 삶을 이룬다, 우주로 나아간다. 이렇게 연대와 연결, 소통에 따른 미덕을 풍요로운 미장센으로 보여주는 리에타르와 트로윌 콤비는 나와 타인, 법·국가와 인간만 이어내지 않는다. 과거의 푸티지를 현재로 이어내며 시간이 겹쳐지고, 그 푸티지가 가리키는 예술이 현실과 뒤섞이며, 다큐멘터리의 요소가 뒤섞인 드라마 장르는 곧 SF와 뒤섞이니, 영화 또한 여러 장르, 경계를 넘나드는 개방성을 통해 자신의 지론을 몸소 실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미덕을 아름다움으로 몸소 보여준다. 올해 미장센이 가장 풍부했음과 동시에 소박한 촬영에서도 아이디어가 번뜩였던 작품, 현실과 예술 양자 모두 충실했던 리얼리즘 극이 <가가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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