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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02. 2023

콤 베어리드, <말없는 소녀>

아일랜드인이 바라는 이데아를 상상하며…

콤 베어리드(Colm Bairead), <말없는 소녀>(The Quiet Girl) 

- 아일랜드인이 바라는 이데아를 상상하며…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2

“평범한 여자의 일생은 출산의 연속이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해서 서른 살이면 열다섯이나 열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많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

그 소녀는 말이 많았다. 감수성도 예민했고 표현력도 풍부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는 둔감하고 무심했다. 무언가를 풍부하게 느끼고 받아들일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소녀의 예민함에 따른 실수나 행동을 관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입을 한사코 열었으나, 그 입은 부모에 의해 '검열'된 발화만 허용되었고, 이에 소녀에겐 '비밀'이 많았다. 그런 소녀의 입을 열어서 비밀을 보듬어주는 존재가 있었나니, 바로 '가짜 부모'라 불리는, 소녀를 잠시 동안 위탁한 '킨셀라 부부'였다.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은 『맡겨진 소녀』에서 건강한 양육의 조건으로 아이의 온 존재를 배려하는 '관용', '풍부함'을 지적한다. 본 『맡겨진 소녀』를 아일랜드의 영화감독 콤 베어리드가 <말없는 소녀>로 영상화한다. 『맡겨진 소녀』에서 두드러진 키건의 핵심적인 묘사를 섬세하게 영상화함과 동시에, 베어리드는 독창적인 재해석을 가미한다. 원전에서 도드라진 '비밀로 가득한 침묵'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 '말수가 줄어든 소녀'의 의미를 탐구한다. 또 소설의 배경인 1981년의 북아일랜드 분쟁이 의미하는 잉글랜드-아일랜드 관계를 언어로 반영하며 정치적인 색채를 끼얹는다. 이를 연출하는 1981년 태생의 콤 베어리드는 영국, 아일랜드의 영화감독이다. 지금까지 그는 무수한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를 연출해왔으며, 그의 단편 <그의 아버지와 아들>, <행운>을 통해 장편에서 확장될 작가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일단 단편에서 그는 '가족의 일상'을 포착하는데, 일상 속엔 ‘정치’가 스며있고 이에 따라 식구들은 분열된다. <그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식구 간 분열은 잉글랜드-아일랜드 관계에서 기인한다. 아들 숀은 영어를 사용하고 아일랜드어를 거부하는 반면, 아버지 토마스는 아일랜드어와 문화를 고수한다. 숀은 토마스가 아닌 ‘다른 아버지’, 잉글랜드 내 기독교 체계에 편입되기를 희망한다. 아일랜드 문화를 고수하는 아버지 밑에서 숀은 항상 따돌림, 놀림,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아일랜드 주민 행렬에 숀을 동참시키지만 굴욕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베어리드는 잉글랜드에 의해서 분열된 아일랜드의 상태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토마스가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 아내의 부재를 대체해가며 발생하는 난항을 숀이 이해하며, 경쾌하고도 맑은 목소리로 ‘아일랜드어 노래’를 부른다. 숀은 잉글랜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체계 대신, 진짜 아버지인 토마스에게 되돌아가고 화해한다. <행운>은 <그의 아버지와 아들>, <말없는 소녀>에서 도드라진 청소년들의 심리, ‘두 세계 사이에 끼인’ 존재들의 성장통을 포착한 베어리드의 탐구가 담겨있다. 본 작품은 두 친구가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하고, 운 좋게 홀로 생존한 리암이라는 소년을 다룬 작품으로, <그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숀이 아버지의 기억과 그리움, 슬픔을 헤아리는 것처럼, <행운>에서 리암은 자신의 행운을 위해서 희생된 두 친구를 회고하고 상상하며 그렇게 망자와 산자는 이어진다. 또 <행운> 속 비극은 잉글랜드 소년들은 익히 가능하지만 빈곤한 아일랜드 소년들에겐 불가능했던 ‘축구 경기 관람’에서 비롯하기에, <그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잉글랜드의 관계가 간접 비춰진다. 여하간 <행운>에서도 삶/죽음, 행운/불운으로 엇갈리고 흩어진 친구들은 다시 기억, 인간성으로 이어지는데, 과연 이러한 베어리드의 관심이 <말없는 소녀>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말없는 소녀>의 주인공 코오트는 '혼혈'이다. 코오트의 어머니 메리는 아일랜드인이지만, 영어를 쓰는 아버지 댄은 잉글랜드인으로 추정된다. 각기 다른 두 민족의 결합은 자의였을까? 베어리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결합이 강제였다고, 잉글랜드에 의해서 아일랜드가 혼혈로 '전락'했을 거라고 암시한다. 코오트에겐 자매가 많다. 댄과 메리는 이들을 다 건사하기 벅차서 코오트를 아일린의 집에 보낸다. 이후 코오트가 돌아오더라도 메리는 그리 반기지 아니하고, 댄은 비아냥댄다. 가장 댄은 가정을 책임지지 않는다. 번 돈을 '경마'나 '도박', ‘유흥’에 모조리 탕진하여 생활비가 모자람에, 코오트는 학교에서 타 학생의 우유를 훔쳐 마실 정도다.    

  

빈궁한 집안을 나 몰라라 하는 댄에게 메리가 항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사와 양육이 벅차서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잊을 정도인데도 그녀는 또다시 임신했다. 그녀는 임신을 선택할 수 없는 것 같다. 오직 댄에 의해서 그녀의 임신이 결정된다. 코오트의 자매가 송아지의 임신을 논의하는 대화에서도 임신과 출산, 탄생의 ‘강제성’이 암시된다. 부푼 메리의 배는 자신의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아기가 계속 울어댐에 시간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다. 돌보기 벅찬데도 불구하고 메리를 계속 임신시키는 이유는 댄에게 자녀는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식비’를 쓴 만큼 '노동'으로 돌려받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베어리드는 잉글랜드의 오랜 아일랜드 지배와 착취가 미시적인 영역에 미친 여파를 보여준다. 잉글랜드가 남성 가장이라면 여성인 아일랜드는 그들의 지배하에 놓였고, 아일랜드는 영어를 쓰는 ‘일꾼’들을 더 많이 양성하는 역할이 강제되었다. 이는 테렌스 데이비스가 <선셋 송>에서 진단한, 임신과 출산을 멈출 수 없었던 스코틀랜드 여성의 비극을 다룬 맥락과 유사하다. 그 와중에 잉글랜드 남성은 젊은 잉글랜드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 잉글랜드의 야욕과 재미를 위해서 희생되는 아일랜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된다. 코오트는 '보이지' 않는다. 도입부,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맑고 청아하게 울어대는 새는 시야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존재감은 명확하다. 새는 자신의 종, 제 존재를 진실하고도 우렁차게 노래한다. 이윽고 새소리 사이에 '코오트'를 부르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이는 새소리와 상반된다. '코오트'라 외치는 아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코오트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코오트를 찾는 이유 또한 부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다. 새와 달리 아이들의 입은 제 것이 아니라 부모를 대리한다. 그래서 코오트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나지도 않거니와, 코오트를 호출하는 아이들을 청각으로 유추하기 어렵다. 대신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부모의 ‘불호령’이다.      


그들이 호출하는 코오트 또한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찾아 헤매는 코오트는 ‘부모에 의한 코오트’다. 그런데 코오트는 부모의 호명을 고분고분 따르는 자신이고 싶지 않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는 것처럼 부모의 호령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출에 응하지 않고 숨는다. 그렇게 숨어서 보존하는 것은 가족의 기대와 요구를 거부하는 ‘코오트 자신’이다. 그런데 이 또한 보여서는 안 된다. 눈에 띄면 제재를 당해, 주체적인 자신이 아닌 가족에 의한 코오트가 될 것이기에. 이후 코오트가 침대에 용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깨어있는 동안 의식이 봉인한 본능과 감정을, 잠든 동안 이완된 무의식이 해방시킨다. 코오트의 무의식은 깨어있는 동안 내색할 수 없었던 '두려움'과 '공포'를 악몽으로 현현한다. 깨어 있는 동안의 코오트는 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폭압적으로 태워져 끌려 다녔고, 이후에는 동의 없이 아일린과 숀의 집으로 보내졌다. 폭력적인 댄이 식구들의 행동과 표정을 모두 '얼어붙게' 만든다. 코오트는 댄의 외도를 목격했음에도 '침묵'해야 한다. 댄에 의해서 코오트는 영화 내내 두렵다. 그런 와중에 코오트의 무의식은 용변실수로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코오트를 호명하는 주체들은 솔직한 코오트를 바라지 않고, 용변실수하지 않는 코오트, 곧 두려움을 비밀로 숨기는 코오트를 바란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형식은, 양 옆이 잘려 있어서 대체로 피사체가 중앙에서 ‘항상 잘 보일 수밖에 없는’ 좁은 4:3 화면비다. 베어리드는 본 화면비에 코오트가 처한 환경을 반영한다. 일단 가족한테서 도망치는 코오트는 좁은 만큼 쉽게 꽉 채울 수 있는 화면비를 온전히 점유하지 못한다. 코오트의 얼굴이 하단, 모서리로 밀려나면서 롱숏이 되고 '헤드룸'이 부각된다. 코오트를 존중하지 않는 식구들에 의해서 소녀는 중앙에서 밀려나 ‘소외’된다. 그녀 얼굴이 프레임 바깥으로 잘려나가기도 한다.      


얼굴은 분명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영혼의 창구다. 그 얼굴이 박탈되고 밀려난다. 코오트의 영혼은 자신도 아니고, 가사에 시달리며 등을 돌리고 있는 메리도 아니며, 오직 폭압적인 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에 의해서 그녀의 얼굴이 안 보인다. 설령 상체를 온전히 포착했다 한들, 코오트는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린다. 정면에 표상되는 영혼을 파악할 수 없다. 또 수풀에 숨어있던 코오트의 온 몸을 감상자는 마주할 수 없었고,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코오트를 포착할 때도 카메라는 그녀의 ‘신체 일부’만을 파편적으로 포착한다. 그녀의 몸 전체가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고 식구들에 의해서 ‘토막’난다. 더욱이 영화 초반의 편집은 아주 재빨라서, 그녀의 신체나 얼굴을 포착했다한들, 빠르게 잘라내고 다른 숏을 이어 붙인다. 이로써 코오트는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코오트가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잘 보이는 코오트는 댄에게 ‘붙잡혀’ 있다. 4:3 화면비는 1.88:1이나 2.39:1 화면비에 비해서 '움직일 틈'이 없다. 피사체가 들어차면 '여백'이 남기 어렵다. 코오트가 댄에 의해 차에 실려 갈 때, 베어리드는 소녀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하여 4:3 화면비의 폐쇄성을 부각한다. 소녀는 댄에 의해서 달아날 틈도 없다는 듯이, 댄의 빽빽한 환경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듯이. 결말에서 숀에게 달려가는 코오트를 잡으려고 댄이 쫓아오는 장면에서 소녀가 처한 환경의 폐쇄성을 직감할 수 있다. 설령 익스트림 클로즈업보다는 조금 먼 클로즈업, 미디엄 숏으로 코오트를 포착한다 한들, 소녀가 놓인 환경은 아침임에도 아주 거무튀튀하고 어둡다. 환하고 따스한 시간 아침, 그러나 가장이 깨어나면서 오히려 얼어붙는다. 가장이 불러오는 어둠과 냉기 속에서 아이들은 재잘거리다가도 말을 멈춘다. 빛 아래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댄이 불러온 심연이 그녀를 에워싸 도망칠 곳은 없다. 이렇게 코오트는 잘려나가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코오트는 '말없는 소녀'로서 침묵함에,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다. 영화에선 영어와 아일랜드어가 교차된다. 메리와 코오트의 자매들은 아일랜드어가 더 편하지만 아일랜드어를 쓸 수 없다. 댄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일랜드어로 수다를 떨다가도, 가장이 깨어나니 입을 꾹 닫는다. 메리도 댄과는 영어로 소통한다. 잉글랜드에 의해서 아일랜드어를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이 다수인 환경에서 댄이 주문하는 영어를 제대로 익히고 구사할 수도 없다. 이후 코오트는 등교하여 학교에 간다. 집에서 내내 닫혀 있던 입은 학교에서 겨우 열리지만, 집에서 영어를 강요받기에 아일랜드어가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 아일랜드어를 서투르게 구사하는 코오트는 학교에서 소외되고 괴짜취급 당한다. 이렇게 영어/아일랜드어 둘 중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구사할 수 없는 코오트는 입을 닫아 자신을 표현하거나 구술하지 않는다. 코오트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왜 코오트는 들리거나 보일 수 없는가, 심지어 잉글랜드의 손아귀를 벗어나서도 왜 그녀는 존재감을 내비쳐선 안 되는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모두 다 ‘이단’을 허용하지 않는 ‘일신교’ 성공회와 가톨릭을 각기 믿는다. 덧붙여 아일랜드는 민족주의가 거센 나라이며, 역사적으로 반잉글랜드 감정이 거세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잉글랜드에 의해 혼혈로 전락한 오늘날 아일랜드인들은 그 어디서도 존재할 수 없는 '망명자'다. 잉글랜드를 축소한 댄의 '집'에서 아일랜드계는 ‘2등 시민’이다. 그렇다면 아일랜드를 압축한 '학교'로 가야겠지만, 잉글랜드계가 섞인 아일랜드인은 아일랜드만의 세계에 녹아들지 못하고 적대시된다. ‘잉글랜드에 의한 아일랜드 혼혈’은 양 세계에서 박해받는 ‘이중적인 이단성’을 가진다. 코오트는 학교든 집이든 타인이 입실할 때, 반대로 퇴실해야지만, 이후 인적이 드물어 박해받지 않는 숲으로 도주해야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영국에게 붙잡힌 아일랜드인의 운명이 유령이기도 하지만, 이와 더불어 어른들에 의해서 아이들에게 특정한 삶이 강제된다. 코오트의 자매들은 송아지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궁금해 한다. 소의 임신과 출산은 다른 황소가 새끼를 쑤셔 넣고 빼내는 것, 즉 '강제'라고 자매는 진단한다. 어른들의 강제적인 결정이 자신들이 느낀 탄생, 그 이후의 삶이다. 코오트가 부모의 손길과 시선이 미치지 않는 아일린의 집에서도, 엄마가 요구한 팬티 갈아입기, 자기 전에 음료를 마시지 않기, 소변 실수 등 부모의 지시는 아이들의 ‘초자아’에 엄격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로써 부모에 의해 아이는 자신으로 실존하지 않고, 부모의 상태로 실존하는, 그렇게 ‘자신이면서 스스로가 아닌 유령’이 된다. 아이들은 그런 환각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댄에 의한 강제적인 탄생과 삶도 그렇지만, 아이는 부모가 제 거울을 본 따 만든 '분신'과도 같기 때문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유한한 인류가 번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무한히 산다고 말한다. 부모가 늙고 병들어서 사망하더라도, 부모와 물질적, 정신적으로 닮은 자녀들이 후대에도 살아남고 또 번성하여, 그렇게 부모는 몇 세대를 거쳐 무한히 간접적으로 잔존하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여기에 덧붙인다. 아이는 분신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타자'라고 말이다. 부모는 단지 자신의 일부 요소를 자식을 통해서 무한히 보존하는 것뿐이지, 부모 전체를 자식에게 이식하여 무한히 살진 못한다. 부모의 일부만 지녔을 뿐, 그들과 별개의 삶을 살고 선택하는 아이는 주체적인 타자다. 특히나 코오트와 자매들은 한쪽은 부계 잉글랜드를 따를지언정, 다른 한쪽은 모계 아일랜드를 따른다. 그래서 댄과 딸들은 온전히 같을 수 없다. 그런데도 분신은 반쪽짜리 원형과 동일시된 상태다. 이렇게 오직 '하나'만을 강요하는 편협하고도 교조적인 사회를 반영하기 위해서 베어리드가 더더욱 4:3 화면비를 선택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통용된 역사적인 매체가 4:3 화면비이기에, 1980년대가 배경인 본 작품의 '시대상'을 지칭하기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당 시대상을 지칭하기 위해서 좁은 화면비를 꺼내온 <이다>, <콜드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는 다른 이유에서, 아마도 4:3 화면비가 가져다주는 갑갑함에 주목하여 자비에 돌란의 <마미>처럼 심리적·상징적인 이유로 택한 것이요, 이것이 영화의 사회적 분위기와 조응한다. 혼혈 코오트는 순혈보다 가능성이 더 많은 셈이기에, 화면비로 비유한다면 더 ‘넓어야’ 지당하다. 그러나 코오트의 가능성을 양 옆을 잘라먹은 폐쇄적인 4:3 화면비로 차단한다. 오직 '하나의 피사체'만 중앙에 놓을 수밖에 없는 일원론적 화면비로 혼혈의 이중적 정체성 중 어느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를 반영한다. 그 숨 막힐 것만 같은 화면비는 아일린의 집에서 조금 여유가 생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소녀의 얼굴은 잘 보이거니와,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하는 ‘여백’이 동시에 포착된다. 또 소녀의 얼굴을 비교적 긴 호흡으로 포착한다. 비로소 코오트의 삶이 보존되기 시작한다. 그간 코오트는 부모에 의해서 철저하게 '비밀'을 함구했다. 침묵하는 코오트는 무표정이었다. 그것이 댄의 요구사항이기에, 체념하고 따랐다. 또 오직 부모의 질문에 '답변'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일린과 숀은 코오트가 자신들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또 능동적인 아일랜드어로 발화할 수 있게끔 다정한 환경을 조성한다. 오히려 답변을 코오트를 위해서 건네준다. 숀이 'christian'이라는 단어의 ch가 '크'로 발음한다고 가르치듯, 영어 또한 배우며 코오트는 혼혈로서 풍부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코오트는 집을 떠나서도 댄이나 아일린의 '지시 사항'을 의식한다. 그들의 교육은 '부모에 의한 수동적인 자식' 곧 '잉글랜드에 의한 아일랜드인'을 '세뇌'한다. 반면 숀과 아일린은 코오트에게 주체성을 교육한다. 독립했을 때 스스로 할 수 있어야할 요리, 다림질, 머리 땋는 법 등을 가르쳐준다. 요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매운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나더라도, 소녀가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둔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또 코오트가 침대에 용변 실수를 하더라도 조급하게 다그치지 않는다. 아직까지 불안해하는 코오트 무의식의 발로가 용변 실수라면, 그 무의식이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게끔 좋은 환경을 조성해줄 뿐이다. 그럼으로써 숀과 아일린은 부모의 역할을 환기한다. 이별을 앞두고 숀과 아일린이 암소의 출산을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운 시퀀스, 곧 ‘탄생의 순간’에서 코오트는 홀로 덩그러니 남는다. 탄생이란 그런 것이다. 부모의 조력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유 의지로 독립해야 하는 것. 이후 코오트는 물을 뜨러 우물에 간다. 하지만 혼자서 물을 양동이에 한가득 담기에는 무리였다. 우물에 빠져서 몸이 차가워졌다. 이후 숀과 아일린이 이를 확인하여 그녀를 수건으로 닦아주고, 따뜻하게 몸을 데워준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독립을 지지하되, 미숙한 아이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만 조력하는 것뿐이다. 영화 속 반복되는 '달리기' 또한 마찬가지다. 댄의 집에서 코오트의 달리기는 가장의 폭압과 집착에서 달아나기 위한 행위였다면, 이후 숀과 함께한 달리기는 성장을 위한 지지이자 ‘보호’요, 숀과의 연습에 의한 코오트는 결말에서 '자력'으로 달려 ‘원하는 아버지’에게 도달하게 된다. 물론 ‘부모의 집착’과 ‘자녀를 존중하는 태도’ 사이의 균형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댄은 코오트의 짐을 아일린과 숀에게 전달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일린과 숀은 죽은 아들의 옷을 입히고, 죽은 아들이 쓰던 침대에 그녀를 눕힐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부부가 먼저 떠난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또 코오트는 '유모차'라는 어른들이 만든 틀에 갇힌 아기를 본다. '장례식'에서도 망자는 산자가 만들어놓은 관에 갇혀 있고, 산자가 입힌 수의, 손에 낀 장식 모두 다 대상을 가둔다. 보호를 명목으로 자유를 침해하는 일, 부모에 의한 아이, 일신교 국가의 국민은 곧 산자를 망자로 만드는 일, '관'에 가두는 일과 같을 테다.      


그러나 망자는 스스로 미동 없는 반면, 살아있는 코오트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자꾸만 몸이 간지럽다. 제한이란 오직 그 자유를 위할 때만 허용된다. 댄의 집에서 카메라는 마냥 고정되어 움직임과 촬영에 제한만 가득했다. 그 카메라의 '호출'이나 '감시'에 코오트가 자신의 '움직임'을 끼워 맞춰 '정적'으로 머물렀다. 분명 영화 도입부에서, 코오트를 찾는 아이들 주변에서 머지않은 곳에 그녀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코오트를 볼 수 없었다. 가족들은 자신들의 기대나 요구에 맞춰 ‘있을 만한 곳의 코오트’만을 찾는다. 자신들의 기준에 코오트를 끼워 맞추는 그 거만한 고개를 조금도 까딱거리지 않음에,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짜 코오트는 가족의 눈에 영영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에 의해서 주체적인 개인의 삶이 멈춰선 안 된다. 움직이는 삶은 아일린과 숀의 집에서 복권되지만, 이는 아일린과의 동행이거나, 숀이 목적지, 시간을 재며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는 ‘제한적인 운동’이다. 숀은 코오트에게 목장을 탈출하여 물에 빠져 죽은 말 이야기를 해준다. 마냥 방종하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다. 그래서 숀은 코오트가 축사에서 사라졌을 때 한번 호통을 쳤고, 말 이야기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위험한 ‘밤’에 꺼낸다. 즉 부모들이 붙잡으면서도, 결국 그 붙잡음은 아이의 자유를 위한, 방임과 제한 사이의 균형이어야 한다. 그것은 집에 찾아온 숀의 친구들이 "얘는 누구야?"라고 물었을 때, 그 당시 코오트를 잘 모르는 숀의 잣대로 마음대로 단정하지 않고 말을 삼가는 태도, 죽은 아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코오트에게 좋은 것을 항상 고민하는 아일린의 태도다. 즉 국가에서 오직 허용되는 제한이란 ‘보호’를 위해서다. 아일린과 숀은 보호를 위해서만 그녀를 제약할 뿐, 그녀의 자유를 숨기지 않는다. 대지를 향해 다가오는 배의 불빛이 코오트라는 존재를 마음껏 빛낼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베어리드는 모든 아이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할 아일린과 숀의 집을 비추며, '아일랜드인을 박해하는 잉글랜드인의 집', '잉글랜드 혼혈을 배제하는 아일랜드 학교'를 반성한다. 지배와 아집으로 얼룩진 아일랜드를 그 누구라도 독립할 수 있는 환경으로 조심스레 정화해본다. 이에 카메라는 움직이고, 어둠 대신 빛이 가득하며, 폭압적인 가장의 징후가 느껴지는 거친 환경은 아름답게 정돈되고, 아이들은 다른 식구들과 부모 곁에 가까이, 그렇게 '비밀'은 없어진다. 그럼으로써 코오트는 서서히 입을 뗀다. 유창하게 아일랜드어를 구사하며 침묵으로 은닉하던 자신의 아일랜드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환경을 아일랜드인이 몸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댄은 집안의 '더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은 비밀이라고 아이들에게 다그친다. 잉글랜드인의 착취와 야만은 비밀이 되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한다. 실제로 댄에게는 숀과 아일린의 ‘원조’가 필요하지만, 잉글랜드 가장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빈곤함을 내색하지 못하게 입단속 한다. 메리 또한 집에 어떤 우환도 없는 것처럼, 내내 괜찮다고 일관할 뿐이다. 반면 숀과 아일린은 아이를 잃었고, 또 코오트가 댄의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엔 우물에 빠져 감기에 걸렸다. 그 사실을 비밀로 숨기지 않는 숀과 아일린에게 댄은 '전적'이 있는 그들은 부모 자격이 없다며 빈정거린다. 그렇게 아일랜드인의 부모 자격을 무시하고, 자신의 치부를 숨기는 잉글랜드인 댄은 코오트의 아버지를 자처하고 강제한다. 뒷말과 깎아내리기를 좋아하는 심술궂은 아일랜드 여성, ‘우나’의 존재 또한 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리. 

그러나 아일린은 우나와 달리 ‘장점’을 찾고 밝히는 존재다. 코오트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숀에게 '아빠'라 부르고 싶다. 아일랜드인은 아일랜드인을 부모로 삼고 싶다. 우물의 수면에서 아일린과 함께한 코오트가 뒤집혀서 비친다, 소녀가 원하는 ‘모녀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참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듯이. 하지만 잉글랜드의 식민사관을 뒤집고 아일랜드인이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그 순간, 아일랜드는 진정 자유롭고 아름다워질 것임을 베어리드는 수려한 형식으로 대신 말한다. 그 아름다움, 소박하고 일상적이지만 아일랜드인에게 허락되지 않던 '누군가에겐 진부하지만 누군가에겐 존귀한 아름다움'을 베어리드는 순수하게 포착한다. 내용은 크게 특별해보이지 않더라도, 코오트처럼 척박함과 거칢이 일상화된 아일랜드인에겐 너무도 값진 따뜻함과 부드러움의 '순수 시지각'을 보존한다. 그래서 본 작품은 유사한 태도를 지향한 <애프터썬>이 연상되는 정교한 연출이 특징인데, 여기에 아일랜드-잉글랜드의 관계를 반영한 각색을 담아낸다. 역사와 정치가 미시적 영역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지 탁월하게 분석한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 양자 모두에서의 강점을 보여주는 장편으로 데뷔한 베어리드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아일랜드 시네아스트의 출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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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0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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