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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04. 2023

저스틴 커젤, <니트람>

폭력의 해빙

저스틴 커젤(Justin Kurzel), <니트람>(Nitram) - 폭력의 해빙     

“사람들은 흔히 비폭력을 가르치면서도 제도화된 폭력, 다시 말하면, 고통과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드는 생산 체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1967년 태즈메이니아 호바트에서 마틴 브라이언트라는 소년이 부모의 기대를 받으며 태어났다. 부모는 첫 아이에게 과연 무엇을 기대했을까? 확실한 건 마틴이 어떤 기대를 받았든, 이에 부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틴은 유년기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고, 청소년기에는 행동 장애 및 아스퍼거 증후군이 혼합된 상태라고 진단받았다. 의사는 부모의 노력에 따라 이를 충분히 완화하고 정상적인 사회화가 가능할 것이라 진단했으나, 부모는 단지 그를 성가시고 유별난 아이로만 생각하여 방치했다. 그렇게 부모의 기대와 손에서 벗어나 방종하게 자란 아이는 1987년 19살이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중년의 복권 상속인 헬렌 하비를 만났다. 그런데 헬렌이 마틴과 동거하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 힐자가 의문스럽게 사망했고, 헬렌도 1992년에 사망한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지만 그는 헬렌의 사망 이후 우울해했고, 1993년에는 아버지도 수상쩍게 사망했다. 소중한 사람들이 죄다 곁에서 떠나가자 마틴은 사회와 아예 등을 돌렸고, 모든 사람을 적대시했다. 이후 1996년 그는 포트 아서라는 지역을 답사한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총기를 다루기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허점을 악용하여 반자동 소총인 콜트 ar-15를 구매한다. 그리고 1996년 4월 28일부터 4월 29일까지 마틴은 유적지, 카페, 선물 가게, 주차장, 요금소, 주유소 등 포트 아서 곳곳에서 살인 및 인질극을 벌였고, 그 참혹한 참사 ‘포트 아서 학살’로 인해 35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다. 본 사건에서 마틴 브라이언트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악인이다. 하지만 오직 그만의 책임일까. 자신의 소생을 사회화해야 할 책임을 저버린 부모, 지적 장애 아동을 방치한 복지, 너무나도 안일하고 느슨했던 총기 법 또한 마찬가지로 공범이다. 법과 사회, 곧 그것을 모두 포괄하는 구조가 폭력을 일으킬 원인을 방지하고 억제하는 데 실패하면 바로 이와 같은 참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본 비극과 마틴 브라이언트의 삶을 저스틴 커젤이 <니트람>이라는 신작에서 재현한다.     


1974년 걸러 태생의 저스틴 커젤은 <맥베스>로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감상자들은 <맥베스>를 볼 때 마냥 내용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여러 번 영상화가 이뤄진 작품이기에 앞선 작품들과 차이를 구분하며, 탐미적이고 몽환적이며 아스라한 커젤만의 형식에 빠져들 것이랴. 그런데 커젤에겐 <맥베스> 원전 자체도 분명 주목할 법하다. <맥베스>에선 동물로서 인간을 유혹하는 피의 관능, 자연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도드라지는데, 이러한 소재를 커젤이 항상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탐구할 폭력의 사례를 주로 실화에서 건져낸다. <니트람>과 유사한 소재인 ‘스노우 타운 살인사건’을 다룬 <스노우타운>, 실화 기반 <켈리 갱>이 그렇다. 커젤은 폭력을 구현하는 데 있어, 언제나 불쾌, 역겨움, 경각심을 부각한다.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을 상정하여 이로부터 통쾌함, 낭만, 정의감을 일깨우는 타란티노와 정반대다. 커젤의 폭력은 매우 리얼리틱하고, 그 주체들은 스스로 심판자임을 자청하나, 과연 그 심판이 정당한지, 인간이 이토록 잔혹하게 다른 인류를 살해해도 좋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불쾌하고 역겨운 폭력은 ‘제도’가 줄곧 재생산한다. <스노우타운>에서 형제들은 인근 이웃에게 성적 유린을 당한다. 어머니는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혼자선 역부족이다. 영화 내내 경찰은 찾아볼 수 없고, 결국 마초 성향을 가진 존과 이웃들을 불러서 성 범죄자를 추방한다. 즉 법과 제도가 방종하고 악행을 통제하지 않음에,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심, 악덕, 폭력이 정의로 오독되고 범람한다. 또 미혼모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환경에서 폭력적인 가부장제가 재생산된다. <스노우타운>에서 그녀 혼자 세 아들을 책임지기 버거움에 존을 불러서 폭력을 눈감았고, 호주의 아일랜드계, 빈자들에게 의적으로 불리는 네드 켈리를 다룬 <켈리 갱>에서도 마찬가지다. 네드가 폭력성을 체화한 이유는 나약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켈리에게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포기하고, 폭력적이고 우락부락한 인물에게 아들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이후 네드 또한 '계부'와 유사해지는데, 폭력성을 합리화하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척박한 환경에서 줄곧 소환되는 마초, 가장들에 의해 대물림되는 폭력의 순환을 커젤이 반복 탐구한다. 또 <켈리 갱>에서 아일랜드인에게 부당한 제도를 바로잡고 이를 항거하고자 폭력은 범람한다. 영국인들 스스로가 반성할 수 있었다면 아일랜드인들의 복수심은 충분히 가라앉았겠지만, 영국인에게 편향된 구조는 아일랜드인들의 폭력성과 복수심을 식히지 못한다. 폭력은 제도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지만, 이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커젤은 진단한다. 그 이유는 ‘군주’가 폭력으로 권좌에 오르고, 이로써 폭력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맥베스>에서 자연, 즉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본원적 욕망이 폭력을 자극하고, 국민들을 다스려야 할 군주가 이에 홀린다. 한편 <맥베스>의 매혹이 불가항력적인 자연인 것처럼, 커젤은 폭력의 감각이 일련 필연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듯하다. <스노우타운>의 정적인 카메라, 평평한 구도, 흑백에 가까운 채도에서, 폭력이 개입되니 사선 구도, 핸드 헬드, 잔디의 쨍한 색감 등으로 감각이 되살아나며 폭력에 눈을 뜬다. 즉 인간은 자극적인 폭력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구조는 이를 방치하거나, 권력자들은 이를 비호함에 커젤의 작품에서 폭력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니트람>에서는 어떤 폭력의 연대기가 이어지고, 이를 자극하고 추동하는 탐미주의를 어떻게 구현할까? 본 작품은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헨드 헬드가 주로 사용된다. 그리고 카메라가 인물을 포착할 때는 대체로 대상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흡사 그들의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듯한 친밀함을 형성한다. 이를 아이 레벨 뷰에서 촬영하여 사람의 시선이 조망하는 듯한 리얼리즘이 도드라진다. 이렇게 커젤은 핸드 헬드와 여 타 형식을 결합한 현실감 있는 연출로 니트람의 진실을 바로 곁에서 기록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한다. 이와 동시에 핸드 헬드는 매우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니트람의 내면도 가시화한다. 즉 영화의 떨림은 이중적이다. 불완전한 현실의 떨림을 모방하여 현실과의 거리를 좁힘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인물의 내면도 끄집어낸다.      


한편 카메라는 항상 니트람이나 그의 주변인들의 삶에 밀착해있진 않는다. 때때로 카메라는 풀숏이나 롱숏으로 멀어져서 니트람에게서 사라져가는 제이미, 거대한 세상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니트람을 포착한다. 또 니트람은 서핑을 원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어머니가 무시하거나, 타인들에게 조롱받으며 좌절된다. 이로써 니트람의 눈앞에 펼쳐져 당장 뛰어가고 싶은 바다, 파도, 서핑은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된다. 이러한 연출은 세계와 동떨어진 니트람의 외로움, 고립, 실현 불가능하게 된 꿈을 거리감으로 가시화한다. 이 같은 연출에 담기는 니트람은 오직 제 기분과 쾌감만 중시하며, 눈에 직접 와닿는 자극인 '색채'를 선호한다. 이러한 언급에 걸맞게 디지털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필름을 방불케 하는, 채도는 살짝 낮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색채가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맴돈다. 필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색채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의 시대성과도 적절히 맞물린다. 당대의 영화는 언제나 필름으로 촬영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커젤은 니트람의 눈을 타격하는 몽환적인 색채를 감상자 또한 느끼게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만큼은 긍정하지 않는다. 니트람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피학뿐만 아니라,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가학에도 쾌감을 느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니트람의 가학, 곧 사격, 테러 등을 매우 먼 거리에서 포착한다. 이로써 범죄를 유희거리로 삼는 니트람의 쾌감과는 거리를 둔다. 또 본 작품은 커젤의 이전 작들처럼 폭력을 방치하는 구조 내에선 언제나 일상에 테러가 해일처럼 몰려들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래서 테러를 앞둔 니트람이 반려견들을 모두 유기하며 일상이 붕괴하는 장면을 매우 평온하고도 안정적인 구도에 담아낸다. 폭력은 예사롭게 찾아오지 않는다. 보편적이고 평범한 구도 내에서 서늘함이 일순간 찾아온다. 이제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본 작품은 유년기에 방화 사건을 일으킨 마틴 브라이언트의 푸티지로 시작된다. 커젤은 그 푸티지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성인이 된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포트 아서 학살을 일으킨 기원과 원인이 무엇인지 추적한다.      


일단 니트람이 세계와 타인에게서 배태된 까닭부터 분석한다. 이는 어머니의 훈육 문제가 크다. 어머니는 항상 니트람에게 명령한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옷을 갈아입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식사할 수 없다며 엄포를 놓는다. 또 대화의 특권은 오직 부부만 누린다. 니트람은 부모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다. 니트람은 그들을 알고 싶어 하지만, 알 수 없다. 이렇게 니트람은 식구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존재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니트람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아버지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 ‘이상한 옷’을 입고 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의아한 행색을 대화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예법을 가르쳐서 세계에 편입하기 보다는, 그냥 타박하고 내쫓는다. 이렇게 니트람은 명령만 하는 어머니에 의해서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이로써 타인과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니트람은 제이미와 라일리의 이름을 알지만 그들은 니트람의 이름을 모르고, 또 사회성이 결여된 그가 꺼림칙하기에 대화에 참여하거나, 그의 질문에 답해줄 의향이 없다. 대화에서 한사코 배제되는 니트람은 타인·공동체의 규칙과 표상에 참여할 수 없어 자신만의 규칙에 갇힌 외톨이로 전락한다. 외부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는 니트람이란 이름은 알려지지 않거나, 이름은 알려졌지만 정작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을 다들 모르기에, 영화는 투명인간으로 전락한 그를 추적한다. 제2, 제3의 니트람을 방지하기 위해서 커젤이 그를 분석해나가다 보니 니트람과 어머니만의 문제, 곧 개인의 탓으로만 전가할 수 없음이 밝혀진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약자와 타자를 배척하는 풍토에 의해서, 서핑을 못타고 이성과의 관계에 서투른 니트람은 조롱받는다. 약자이자 타자로서 니트람은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정상적이라 일컬어지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니트람은 길을 걷는 도중 벌집을 바라본다. 그는 벌집의 무수한 ‘일벌’들처럼, 군락을 이루는 건실한 구성원이 되고 싶은 것이리라. 그는 이웃의 잔디를 깎으며 돈을 벌길 원한다. 거부당하다가 겨우 잔디를 깎지만 기계도 말썽이고, 니트람의 기술도 좋지 못하다. 


그런 그에게 후술할 헬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관용과 기회를 베풀지 않는다. 이에 외로운 니트람은 ‘돈’으로 관계를 산다. 자신 외부의 ‘가치’를 빌려오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니트람은 무용지물이다. 약자를 배척하는 사회도 문제지만, 니트람의 어머니는 그가 사회에 참여할 수 없게끔 ‘모자라도록’ 양육했다. 외톨이로 전락한 니트람의 삶에 책임이 있는 어머니는 그간 커젤의 작품에서 등장한 강압적인 가장의 성별이 뒤바뀐 사례다. 실제로도 마틴 브라이언트는 아버지와 더 친밀했고, 그가 사망하자 병약한 정신상태는 더욱 불안해졌고 뒤틀렸다. 영화에선 아버지가 니트람과 가장 닮았기 때문에, 교감하여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고 진단한다. 제 감정과 기대, 계획을 중시하는 니트람처럼, 아버지 또한 부동산 매매 계획이 좌절되자 며칠 동안 침울해한다. 즉 니트람과 아버지는 ‘감정적’인 태도와 ‘주관성’에 집착하는 태도가 닮았다. 또 어머니는 니트람에게 장발을 자르라며 성가시게 굴지만, 아버지는 그의 장발이 괜찮다며 존중한다. 하지만 니트람을 존중해주는 유약한 아버지는 강압적인 어머니 옆에서 발언권이 없고, 결국 그녀 방식으로 니트람을 훈육한다. 육체는 이미 성인이 다 된 니트람에게 ‘유치한’ 반바지를 사주며 아이 취급하고, 그녀로부터 돌봐져야 할 대상임을 내면화시킨다. 병원에서도 치료의 주체인 아들 대신 어머니가 모든 대화, 결정을 주도한다. 본래 가부장제에서 남성이자 아버지인 가장이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과 어린 자식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요구하고, 이후 식구들을 돌보겠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폭력성과 공격성, 무력과 지배력을 긍정했었다. 일상 속에선 일반화되어 느껴지지 않던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메커니즘이, 성별이 뒤바뀌자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아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어머니에 의해, 태생부터 충동적이고 우발적이었던 니트람의 성미는 더더욱 다스려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억압에 자기 보존 욕구가 깨어나며 충동이 더 심해진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니트람이 어머니를 모방하며 타인을 도구화하는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니트람은 이웃의 수면을 고려하지 않고 시끄럽게 폭죽을 날리거나 위태로운 난폭운전을 하며 타인을 지배하려든다. 어머니는 이를 좋아한다. 아버지가 계속 침울해하자 니트람은 자신이 보기 좋게끔 그를 폭행하여 일으켜 세우는데, 어머니는 사실상 이를 방조한다. 즉 니트람은 어머니의 가부장적 태도를 가족 내에서 연습하고, 이후 사회에서 행동에 옮긴다. 이렇게 가정과 사회, 양자 모두에서 폭력이 범람하지만, 영화 내 그들이 속한 구조는 이를 통제하기에 무능력하다. 니트람은 무면허운전을 하고, 또 느슨한 총기 법에 따라 넉넉한 돈을 지급하여 무면허로 총기 소지하며, 경찰은 미적지근하게 헬렌의 교통사고를 수사하고, 니트람이 제멋대로 들이닥친 사유지의 거주자들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공권력은 눈에 띄지 않는다. 즉 법이 오롯이 집행되지 않고 있다. 사실상 무정부상태, 야만에 치달았다. 또 매스미디어에는 자극적인 폭력 사태가 만연하게 송출되고, 니트람은 이를 따라 한다. 이윽고 니트람의 테러가 발생하자 어머니는 아들이 송출되는 TV를 외면한다. 철학자 들뢰즈는 정보를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특정한 무언가를 원하는 심리에 의해서 정보가 탄생하고, 이에 정보들은 무용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런 정보들로 가득 차면 세상은 방탕해질 테니, 이를 제어할 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법을 무효화시킬 정보 또한 도처에 만연하다. 법을 무효화시키고 싶은 심리에 따른 정보를 법은 통제하지 못한다. 반면 유용한 정보들은 니트람 어머니처럼 외면한다. 이렇듯 이기적인 정보를 양성하는 구조에서 불법 총기를 파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아이들 역시 그들 옆에서 자라나는데, 그 누구도 이로 인한 참극을 책임지지 않는다. 이기적인 성미에 맞춘 정보를 제공하는 구조에서 점점 더 독단적으로 변해가는 그를 헬렌이 잠시 교화한다. 니트람이 처음 만난 그녀는 부유하기는커녕 행색이 매우 초라해 보인다. 그녀는 부를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고, 많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부양하는데 쓴다. 그녀는 봉사와 헌신으로 보람을 느끼며, 다른 생명을 이롭게 하는 이타심이 실로 유용한 것임을 커젤은 부각한다.      


헬렌은 니트람에게 잔디 깎기 대신, 강아지를 산책시켜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을 부각한다. 또 그녀는 니트람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다. 너는 서핑을 못 한다고 단언하며 폭력과 모욕을 가르치던 엄마와 달리, 헬렌은 니트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보조한다. 그녀는 니트람에게 차를 선물해준다. 니트람 또한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초라하던 헬렌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배우가 되고 싶은 그녀에게 미국 여행을 제안한다. 니트람은 그녀 곁에서 자신과 현재 너머를 고려하는 노동, 상대의 세계에 참여하는 대화를 배우며 이타심과 사회성을 습득한다. 서로 배려하는 삶들은 윤택해진다. 하지만 헬렌과 동거하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기에, 헬렌의 존재만으로 그의 사회성이 갖춰지기엔 역부족이다. 또 충동을 조절하는 방법을 여전히 배우지 못한 니트람은 헬렌이 사망한 이후 남긴 반려동물들을 잘 보살피지도 못한다. 침실의 한 반려견은 널브러져 있고, 우리의 귓가에는 부패를 따라다니는 파리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맴돈다. 즉 방치된 반려견은 죽었다. 이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물들을 유기하며, 이기적인 니트람으로 되돌아간다. 이타적인 사람은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통증으로 상상하며 느낄 수 있다. 니트람이 유일하게 교감하던 헬렌과 아버지가 그렇다. 아버지가 부동산 매매에 실패하여 침울해하자,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과 같은 듯 대신 분노해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니트람이 자신과 동일시하던 대상들은 죽어가는 와중에, 그 자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즉 아무리 상대를 나처럼 여겨도, 타인은 나와 같지 않음을 깨닫는다. 더는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니트람은 자신만의 감정에 몰두한다. 우리의 감각은 나의 몸에 어떤 힘이 가해짐으로써 발생하지만,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감각을 제 몸에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내가 느끼지 않아도 타인처럼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 한편 타인에게 가해진 힘, 충격, 고통을 내게서 분리하여 타인과 별개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타인은 고통스럽지만, 타인과 분리된 나는 가학적인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니트람의 반응은 후자에 쏠려있는데 선천적으로도 사회성이 결여됐지만, 이를 교육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었던 어머니가 그를 방치하여 더더욱 이기적인 성미로 악화되었다. 니트람은 공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지 ‘못’한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며 타인을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에도 슬픔에 동요하지 않는,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는 어미의 태도를 닮아간다. 결말에서 아들의 참극에도 불구하고 그저 심드렁한, 저 자신을 연민하는 것인지 아들을 위해 고민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니트람은 자기 몸이 생생히 느껴지는 나체 상태를 좋아한다. 또 방화, 폭죽 등 폭력적이어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제 눈엔 즐거운 자극적인 감각을 갈구하며, 그의 충동적인 난폭운전처럼 외부를 신경 쓰지 않고 극도로 흥분하여 쾌감을 느낀다. 제 감각에만 몰두하면 타인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니트람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헬렌을 잃는다. 이후 테러를 계획한 니트람은 상점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사먹는다. 그의 혀에 가해지는 ‘달콤한 감각’과 디저트를 다 먹은 이후 시작할 테러의 ‘참혹한 감각’은 그에게 대비를 이루지 않는다. 사실상 ‘유비’로, 그는 총에 맞고 쓰러지거나 공포에 벌벌 떨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 자신의 혀가 맞닿은 달콤한 감촉처럼, 자기 눈에 전달되어올 강렬한 쾌감일 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잔혹한 쾌감을 바라진 않았다. 도입부, 하늘을 향해 폭죽을 날리는 장면이 매우 아름답다. 폭죽은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폭력에 이끌리는 니트람을 보여주는 상징일 수도 있으나, 이와 동시에 ‘하늘’이 부각된다. 그가 하늘에 주목했다면, 저 창공을 자유롭게 비행하고 불꽃놀이처럼 찬연하게 반짝이고 싶었을 희망을 꿈꿨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늘과 유사한 광활한 롱숏, 익스트림 롱숏, 드론 숏들이 연이어 이어지고, 거기서 불꽃놀이처럼 형형 빛깔의 삶을 니트람이 바랐기 때문이다.      


하늘이 포착된 이후 등장하는 경이로운 풍경은 ‘바다’다. 좁다란 집에서 자신을 구속하는 어머니의 환경과는 정반대로 매우 광대하다. 그 바다에서는 ‘파도’가 줄곧 몰아치는데, 거기서 니트람은 서핑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이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폭죽을 터트리다가, 이후 제지되어 분노하는 니트람을 아버지가 광활한 ‘초원’으로 데려가 진정시켜준다. 제약으로 가득한 집과 달리, 무엇이든 꿈꿔볼 수 있는 무제한적인 풍경에서 아버지는 니트람이 미래에 안락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즉 니트람은 처음에는 폭력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성장하는 삶을 희망했다. 이러한 풍경과 함께 도드라지는 것은 서핑보드, 비행기, 배, 자동차 등의 ‘운송수단’이다. 니트람은 어머니에 의해 운송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유를 바랐다. 배우자를 만나고 가정을 꾸려 자녀들을 헤아리는, 생기가 감도는 이타적이고도 유용한 삶으로 이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교육, 제도는 니트람의 꿈을 주저앉힌다. 니트람이 자신을 넘어서서 타인에게로 이동하고 관계 맺는 꿈을 불발케 한다. 로스앤젤레스 여행도 헬렌 없인 허망하다. 헬렌 대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쓸모없는 기념품들, 사격으로 터트리고 지배할 수 있는 ‘일방적인 사물’일 뿐이다. 즉 상호적인 관계는 불발하고, 어머니와 국가의 일방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는 관계만이 니트람에게 체화된다. 상호 간 충만하게 어루만지고 감싸 안는 감각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수단화할 것을 강제하는 세상에서 니트람은 ‘이기적인 말초적 쾌감’만 바랄 수 있을 뿐이다. 한때 니트람이 미래를 그려보았던 포트 아서, 하지만 타인과 함께 건설해나갈 꿈은 무산되고, 그의 손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총기'가 들려있으며, 그의 눈에 타인은 제 쾌락을 위해서 희생시켜도 좋을 사물처럼 보인다. 

그렇게 인간을 고양하는 성숙한 꿈은 사라지고, 비인간적인 구조 내에선 오직 야만과 짐승만이 남게 된다. 이렇게 커젤은 제도가 꽁꽁 억제해야 할 폭력이, 오히려 제도에 의해 스르르 녹아 일상화되는 세태를 서늘하게 경고한다. 느슨한 제도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개개인의 폭력, 부적절한 교육, 약자·소수자 혐오가 만연하다. 사각지대의 피해자들은 대화도 할 수 없고, 노동도 할 수 없으며, 작업하여 유한한 인류의 삶을 보존하거나 붙잡을 수도 없다. 그들에게 불가능이 삶이라면, 가능한 것은 죽음으로, 이에 그들은 재앙을 몰고 온다. 그래서 니트람의 포트 아서 학살의 배후에는 바로 ‘구조’라는 공범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구조는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오직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으니… 마틴 브라이언트의 삶과 포트 아서 학살의 원인을 커젤은 흥미로운 연출로 풀어낸다. <맥베스> 때 보여줬던 매혹적인 형식은 <니트람>에서도 여전하여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색감, 청각적인 부분에서는 불안정함을 고조하는 음향이 인상적이다. 다만 마틴 브라이언트의 정보 중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익히 알려진 피상적인 요소로만 각본을 구성한 태만함이 아쉽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비가시적 영역을 감독과 배우의 창의적인 시각으로 직조해낸 전기영화 <스펜서>와 유사한 미장센을 공유하는 작품, 그러나 <스펜서>와 달리 <니트람>은 마틴 브라이언트를 깊고 날카롭게 탐구하지도 못했고, 그에 관한 커젤의 시선이나 생각이 특유하거나 독창적이지도 않다. 형식은 여전히 매력적이나 영화가 다루는 대상에의 세밀한 접근이 아쉬우며, 피상적인 요소로 구성된 2시간 가까이의 러닝타임은 다소 길게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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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04 집에서(BF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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