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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08. 2023

발렌틴 바스야노비치, <리플렉션>

인간의 반영

발렌틴 바스야노비치(Valentyn Vasyanovych), <리플렉션>(Reflection) 

- 인간의 반영     

“이렇게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가 뭐죠? 우리에게 뭐 해주실 말씀 없나요?” -이스마일 카다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문화적 유사성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끊어내고 싶은 정치적 악연도 이어졌다. 우크라이나는 분명 러시아와 독자노선을 걷는 나라였다. 하지만 20세기 소련에 속하게 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통합되었고, 이후 홀모도모르로 인해 모스크바에 착취당하거나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하는 등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중심인 러시아에 의해 식민지처럼 유린당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다시금 독자노선을 걸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내에서 동부 지역은 친러로서 합병 여론이 있는 반면, 서부 지역은 반러 노선을 취하며 독립 국가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동우크라이나에서의 여론을 명분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합병을 주장하며, 이러한 러시아의 침략에 반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친러 정부를 몰아내고자 ‘유로마이단 사태’가 발생하는 등,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러시아는 반러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친러파들을 회유하여 ‘크림반도를 합병’했으며, 이에 갈등은 ‘돈바스 전쟁’으로 치닫고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까지 확대된다. 돈바스 전쟁은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의 이분법적 격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정부군과 반군으로 나뉘어 혼란은 극에 달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에 의해 우크라이나 일부는 점령되었다. 2014년 휴전이 협정되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아 무력 충돌과 긴장감은 여전했고, 그것이 곧 오늘날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돈바스 전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 21세기 발생한 전쟁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현재까지 러시아군 5,660명, 우크라이나군 4,431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민간인 또한 3,350명가량 희생되었다. 그리고 2,768명의 우크라이나군은 반군에 포로로 잡혀가 끔찍하고 비인도적인 고문, 강간을 당했다. 무엇보다 돈바스 전쟁의 진상이 적확히 파악되기도 전에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대되어 무고한 희생자는 더더욱 늘어만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영화감독 발렌틴 바스야노비치는 돈바스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고문을 당한 군인의 경험을 영화화한다. 불법 고문을 실제로 당한 자전적인 경험을 국제적으로 알리며 러시아의 만행을 까발리는데 큰 공을 세운 스타니슬라프 아세예프가 영화에 참여하며 실상을 세세히 증언한다. 그리고 2021년 베니스 영화제에 본 작품이 프리미어 된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과거형이었지만,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본격 침공하며 본 작품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이 되어버렸다. 1971년 지토미르 태생의 발렌틴 바스야노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2013년 장편데뷔 하였으며 2019년 발표한 <아틀란티스>로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작품상을 받으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사실 장편 데뷔 이전부터 그는 국내에도 개봉한 <트라이브>의 편집 및 촬영을 도맡은 이력으로 알려져 있었다. <트라이브>에서도 도드라지는 바스야노비치의 특징 중 하나는 ‘롱테이크’다. <아틀란티스>에서 그는 원쇼트원씬으로 이뤄져 잘리지 않고 조작 및 왜곡이 가해지지 않은, 날 것의 시간을 보존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를 예측하는 본 작품은, 종전 이후에도 살인 병기임을 유지해야 하는 군인들의 실정을 현실적으로 추측한다. 또 플래시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현재만 비추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유해를 발굴하고 오염된 지역을 청소하는 등, 과거를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군인들의 PTSD를 깊게 다뤘다. 전쟁과 갈등이 종식된 이후를 상상하는 본 작품에서는 ‘평면적인 구도’가 특징이고,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방에 흡수되어 ‘영어’를 사용하는 미래를 예상한다. 바스야노비치는 패권의 지배가 러시아에서 영미로 뒤바뀌며 끝나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우크라이나 다수의 국민들이 수동적으로 지배받고, 선택권은 좁다랗고 평평할 것임을 2차원적 구도로 보여준다. 영화의 ‘아틀란티스’라는 제목은 여전히 빚에 허덕이고, 환경오염에 터전을 잃어갈 것으로 예측되는 우크라이나의 암담한 미래를 ‘반어법’으로 강조한다. 바라지만 불가능한 제목…     


본 작품은 ‘적외선 카메라’로 포착된 포스터와 도입부처럼, 군인들의 삶을 '체온', '불'과 연관하여 조명한다. 바스야노비치는 사람을 매장하여 살아생전의 뜨거운 체온을 차갑게 식혀 미라, 백골로 발굴되게 만드는 것이 비인도적인 전쟁임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PTSD에 시달리며 용광로에 빠져 '재'로 희생되는 운명이 군인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참혹한 현실임을 밝힌다. 또 극도로 감각을 무디게 하는 훈련에 의해 인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고통인 화상, 이에 달궈진 다리미를 갖다 대야지만 일련의 촉각, 곧 ‘삶’을 환기할 수 있는 군인들의 극단적인 비인간화를 묘사한다. 하지만 진창을 헤매는 절망 속에서도 불을 진화하여 다른 인명을 구조하고, 다시금 새로운 불꽃이 우리 육체 속에서 빠져나오는, 희망으로 뒤바뀐 불꽃을 강조하며 절망적인 미래에도 삶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바스야노비치의 카메라는 <트라이브>에서도 매우 절제하며 움직였던 것처럼, <아틀란티스>에서도 거의 멈춰있다. 군인들은 전쟁 이후에도 선택권이 그다지 주어지지 않아 극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다. 영화의 적은 트래킹이라 한들 폐허가 된 옛터를 훑고 더듬거나,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꽉 막힌 절망 속에서 유일한 해방인, 죽음으로의 다이빙을 포착할 때만 사용된다. 하지만 점차 살아있는 군인을 구출하는 트래킹으로 나아가며 삶을 포착하는 움직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도약을 손에서 끝끝내 놓지 않는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의 현실과 군인들의 비인간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실상을 상세하게 비추고, 이를 효과적이고도 창의적인 연출로 승화하는 바스야노비치는 신작 <리플렉션>에서도 돈바스 전쟁을 다룬다. 포로가 된 군인이 당한 고문을 재현하고, 그 이후 일상으로 되돌아가려하지만 PTSD에 붙잡힌 군인의 내면을 포착한다. 본 작품의 제목은 'reflection'으로 반사, 반영되는 상을 의미하는 영단어다. 해당 단어를 수행하는 대표적인 사물은 ‘거울’이다. 거울은 단지 좌우만 반전할 뿐, 그 이상을 왜곡하지 않는 수동적·객관적인 태도로 대상의 시각을 고스란히 제 몸에 반영한다.      


더욱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투영한 대상이 잘 보일 수 있게끔 배치한다. 본 ‘거울의 반사’를 바스야노비치는 연출에 도입한다. 인간에 의해 특정한 장소에 배치되거나, 아니면 벽에 걸려 가만히 고정된 거울, 반영하는 대상의 행동과 용모, 의도에 따라서 자신의 상이 결정되는 수동적인 거울처럼, 본 작품의 카메라도 거의 멈춰있다. <리플렉션>에서 달리 숏 내지는 트래킹, 그리고 줌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영화 속 줌인은 창문에 부딪힌 비둘기의 흔적을 세르히가 청소하는 숏에서 유일하게 사용되고, 외에는 롱숏, 풀숏 수준의 머나먼 거리감을 유지하기에, 거울과도 같은 카메라는 항상 무기력하게 피사체를 반영한다. 고정된 카메라로 형성된 정적인 프레임 안과 밖을 사람들은 자유롭게 오간다. 카메라는 수동적이고 피사체는 능동적이다. 피사체가 카메라 안으로 들어와야지만 거울과도 같은 정적인 카메라는 그들을 반영한다. 카메라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피사체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야 하기도 하지만, 이에 더해서 카메라 앞으로 근접해야지만 커다랗게 확대된 모습으로 감상자에게 가까울 수 있다. 그 피사체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반영한다. 즉 바스야노비치는 거울처럼 객관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스크린에 반사한다. 카메라는 피사체에게 인위적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추적하고 촬영한다면, 피사체의 행동은 카메라를 의식하며, 결국 카메라에 의해서 결정될 지다. 그런데 카메라는 가만히 있고, 피사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위해 피사체, 곧 현실은 왜곡되지 않는다. 물론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기에, 감독의 개입이 없어 보이는 연출은 감독의 인위적인 의중이다. 이로써 순도 높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순 없지만, 바스야노비치는 해당 연출을 통해 현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확실히 천명한다. 그는 영화라는 야심을 위해서 현실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위해서 차라리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움을 희생한다. 그가 사는 우크라이나를 위해서.     

 

오락적이거나 포르노적인 영화에서 피사체는 감상자가 '보고 싶은 모습'에 일조한다. 이로써 감상자가 원하는 것이 잘 보인다. 반면 현실을 위한 영화에서의 현실감은 감상자의 눈을 의식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영화 속 인간의 행위나 동선은 매우 여유롭다. 피사체는 카메라와 감상자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고, 감상자는 피사체 자신들만의 모호한 표현을 접해 오리무중에 빠진다. 일례로 세르히가 납치되기 이전 집에서 무언가를 갈고 있다. 이후 그것이 LP판이라는 것이 판명나지만, 카메라로부터 그와 LP판은 멀리 있어서 행동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또 독방에 갇힌 세르히가 하얀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처음에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이후 자신의 목을 그음에 아주 날카로운 파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잘 파악할 수 없음, 대상의 정체에 대한 오리무중이 곧 현실이다. 무수한 주체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현실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 눈에 타인과 현실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감상자는 이해하고자 골똘히 그들의 행위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자나 현실에의 진지한 참여, 관심을 연출이 피력한다. 그렇게 집중해야할 곳이 우크라이나다. 하지만 그 행동들이 점차 멀리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단조로워진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협박에 의해서다. 그리고 본 작품은 총 29개의 단일 프레임 샷, 원쇼트원씬으로 2시간을 구성한다. 한편 29개의 샷으로 이뤄진 것에 비해서, 본 작품이 다루는 시간은 매우 긴 편이다. 이에 숏 사이마다의 간격이 꽤 크게 벌어져 있어 축약적이고 파편적이며 불연속적이다. 이러한 구성 또한 거울의 특성을 반영한다. 거울은 편집하지 않는다. 영화 기법으로 따지자면 롱테이크처럼 자르지 않고 고스란히 관조하며 반영할 뿐이다. 그래서 거울의 특성을 따르는 영화도 숏을 자르지 않는다.      


본 작품에서 숏의 끝은 카메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결정된다. 대상이 더 이상 카메라 앞에 놓이지 않거나 서있을 수 없을 때, 그렇게 반사되지 않을 때 대상을 비추는 카메라, 담아내는 숏의 임무가 종료된다. 그래서 영화는 '비효율적인 느림'이 특징이다. 핵심만 담은 숏만을 탄력적으로 연결하는 장르 영화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행동, 잉여적인 장면들을 모조리 삭제한다. 장르 영화는 오락성이나 쾌감에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또 숏은 시퀀스를 위해 봉사한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는 소각장이 열리고 닫히는 장면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데도 불구하고 이를 축소하지 않는다. 또 비둘기의 사체를 담을 상자를 찾으러 쓰레기장을 뒤적거리는 긴 과정도 고스란히 보존한다. 현실은 언제나 빠르지도, 또 효율적이지만도 않다. 영화는 느린 현실을 빠르게 전개하고, 비효율적인 과정들을 모조리 생략하여 효율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느리게 목적지에 도달한다. 영화와 달리 현실은 스스로 시퀀스가 되지, 시퀀스를 위해 봉사하며 잘게 잘리는 숏이 아니다. 그러한 느린 현실의 감각을 원쇼트원씬, 롱테이크로 살려내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의 태도로써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그러한 반사가 불연속적이고 듬성듬성한 이유, 피사체가 카메라 앞에 설 수 없게 된 이유, 피사체의 삶이 파편적으로 전락한 이유가 러시아의 야욕에서 비롯함을 폭로한다. 항상 멈춘 카메라는 우크라이나의 것, 반면 러시아 군인들에겐 달리 숏과 트래킹 숏이 허용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포로들을 붙잡아 구불구불 아래로 이어진 지하실로 끌고 갈 때, 그들의 지시에 의한 트래킹 숏이 발생한다. 또 러시아의 트래킹 숏은 무언가를 변형, 왜곡시키라는 지시에서 발생한다. 러시아의 트래킹 숏은 강대하고 폭압적인 힘을 반영한다. 그 지시를 받은 러시아군은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을 포박해둔다. 그렇다면 영화의 수동적인 연출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어떤 지시나 몸부림도 불가능한, 우크라이나의 무기력하고 체념적인 정지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전쟁에 의해 안드레이와 세르히는 폴리나, 올하의 곁에서 멀어지고, 이후 러시아군의 인질이 된 포로들은 고문으로 기절하여 카메라 앞에 서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즉 러시아의 납치, 고문, 살상이 더는 피사체가 카메라 앞에 보일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반영되는 삶은 도무지 매끄럽게 이어지지가 않고, 숏과 숏 사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지만, 그럼에도 바스야노비치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그렇게 기록된 바를 조금도 자르지 않으며 현실의 삶을 어떻게든 보존한다. 러시아가 멈추게 한다면, 바스야노비치는 꾸역꾸역 이어낸다. 또 비록 멈춰있을지언정 광활하게 넓은 2.39:1의 화면비를 사용하여 비추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빠짐없이 담아낸다. 이러한 연출로 이뤄진 본 작품은 총 세 파트로 나눠볼 수 있다. 전쟁을 간접적으로 접함에 비교적 평화로웠던 세르히의 나날이 1부라면, 납치되어 러시아군의 만행을 목격하는 세르히의 수난이 2부, 이윽고 다시 돌아오지만 러시아군의 겁박에 의해 침묵하는 세르히의 일상을 3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과정에서 도드라지는 상징은 바로 '창문'이다. 영화의 시작, 안드레이와 올하, 그리고 세르히는 폴리나를 모의 전투장에 데려다주고 대화를 나눈다. 의사인 세르히는 현재 병동에 중환자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를 하고, 유리창 너머로는 장난감 탄피로 학생들이 모의 전투를 즐기고 있다. 유리창 안쪽의 현실은 참혹함이 밀려들고 있는 반면 유리창 바깥, 곧 가상인 모의 전투는 아름답다. 현실의 전쟁을 반영하지 않는다. 장난감 탄피는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번들거리고, 전투는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오락만 충족시킬 뿐 전쟁에 경각심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폴리나는 가짜 탄피에 맞고 죽은 척을 하지만 유리창을 넘어오면 살아 돌아올 수 있다. 유리창 안쪽에서는 죽음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한편, 유리창 바깥에서는 죽음을 경박하게 여긴다. 이후에도 유리창 바깥과 안을 경계로 행동이 상반된다. 세르히는 병원에서 출혈이 심한 중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한다.      


하지만 끝끝내 환자는 숨을 거둔다. 유리창 너머의 수술실에서 시술하던 세르히는, 이제 유리창 안쪽으로 돌아온다. 그는 사람의 죽음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그의 동료는 스마트폰을 뒤적거린다. 유리창 너머로 뛰어들더라도, 다시 유리창 안쪽으로 돌아와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음에 재앙의 심각성은 크게 체감되지 않는다. 온전한 내 일이 아니다. 이후 세르히는 폴리나와 함께 자동차 극장에 간다. 거기서 영화를 보는데 이윽고 ‘폭우’가 쏟아진다. 자동차 극장의 영화는 세르히와 폴리나가 보고 싶은 것,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폭우가 방해한다. 이윽고 폴리나는 세르히에게 안드레이가 참전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세르히는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얘기를 덧붙인다. 보고 싶은 영화와 달리 듣고 싶지 않은 전쟁 소식이 바로 폭우이랴. 그러나 이 폭우 속으로 아직까진 참여하지 않는다. 폭우 또한 유리창을 넘지 못한다. 와이퍼로 거센 물줄기를 걷어내고 재개된 영화에 퐁당 빠질 뿐이다. 이후 세르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거실에서 LP를 재생하여 노래를 들으려고 한다. 거실 창문은 바깥 풍경을 매개한다. 풍경은 반짝거리는 듯 보이면서도, 붉은 조명이기 때문에 유혈사태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멀리서 본 전쟁은 마냥 비극적이지 않다. 보기 나름이다. 세르히는 그조차도 등을 돌리고, 안락한 집 안에서 노래를 들으려한다. 그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 위해서 시끄럽게 LP판을 간다. 그러나 LP판을 갈아도 재생되지 않는다. 창문 바깥을 오락적이거나 가상적인 전투로 치부하고, 몰려드는 죽음을 외면하고 있으며, 거센 악천후 또한 애써 무시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려하지만, 아름다움은 추한 진실 속에서 재생될 수 없다. ‘단단한’ 창문은 전쟁과 일상을 분리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투명한’ 창문은 참혹한 전쟁을 일상에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때 가능한 것은 오직 시끄럽고 불쾌한 소음, 그것이 시대의 진실이다.      


움직이지 않는 장소, 건물에 배치되던 카메라는 이윽고 움직이는 차 안에 배치된다. 거기에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탑승해있다. 한 군인이 지도를 본다. 아직까지는 지도를 보며 시시덕거린다. 그러나 직후 검문소 앞에서 총격전이 발생한다. 군인이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장’을 방탄유리창 너머의, 자신과 유리되어 있는 풍경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랴. 그러나 유리창이 사격에 의해 깨지고, 안전하게 보호받던 군인은 갑작스레 사망한다. 이제 유리창 안쪽을 보호해주던 방탄유리가 뚫렸다. 이렇게 1부는 유리창 바깥의 왜곡과 외면, 안락한 유리창 안쪽에 살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심리를 반영한다. 전쟁은 제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전까진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관심이 서서히 내 삶을 침략한다. 바스야노비치가 다루는 ‘방어막’과 같은 유리창, 이후 그것이 깨져서 발생하는 ‘극도의 피학적 감각’은 프로이트의 외상 이론과 관련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자극 방어막’을 형성하고, 이를 잘 아는 자신은 항상 방어막을 넘어서지 않는, 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자극만 허용한다. 유리창 안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은 외면하고, 오직 방어막이 감당할 수 있는 심미적 감각만을 허락한다. 하지만 외부의 자극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경악스러운 순간에, 수용자의 방어막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엄습해오고, 이것이 곧 ‘외상’의 기원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악은 방어막을 깨트리고, 이로써 환자는 외상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적절한 수준의 자극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그것이 <아틀란티스>에서 자신을 해할 수준의 자극을 가해야지만 흥분을 해소하는 정신장애, 용광로나 다리미를 이용한 자해 등이다. 고통스러운 충격이 가해진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감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잊어버렸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는 유리창, 곧 자극 방어막이 깨진 2부 러시아군의 기지로 옮겨졌을 때, 소스라치게 끔찍한 자극이 연이어진다.      


러시아군에 납치된 세르히는 전기 고문을 당한다. 그는 날카롭고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 이후 의사인 그는 값어치 있는 포로로서 더는 고문을 당하지 않고, 대신 러시아군이 납치한 우크라이나군의 상태를 점검하는 역할을 맡는다. 거기서 인간의 육체가 어떤 존엄도 없이 한갓 고깃덩이로 전락한, 아무렇지 않게 도륙되고 난자되는 비인간성과 마주한다. 이후 ‘드릴’로 허벅지가 뚫리는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한 안드레이와 마주한다. 안드레이의 시신은 그나마 세르히가 빼돌리지만, 그 이외의 시신은 신원도, 살아생전의 흔적도 조금도 보존하지 못한 채 불살라져 재가 된다. 그것이 전쟁의 민낯이다. 그간 유리창을 경계로 상상해온 전쟁의 풍경, 외면해온 전쟁의 진실은 모두 인간이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게끔 ‘날조’해왔다. 심지어 아이들의 모의 전투처럼 ‘즐겁게’ 상상했다. 개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전쟁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반면 국가는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고 지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은닉된 진실에 의해서 영화는 결코 밝지 않다. 내내 진실을 숨기는 ‘어둠’이 도드라진다. 바깥에서 분명 뜨거운 빨간색들이 번쩍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개인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 전쟁의 눈에 띄지 않고자 어두워진다. 또 유리창 바깥의 진실은 러시아 장교가 세르히에게 '비밀 유지 서약'을 시키는 것처럼 외부로 발설할 수 없는 것, 개인이 이를 알기 위해서 자처하고 따라가기에도 너무 위험한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전쟁을 외면하고 은닉하고자 폐쇄적인데, 한편 해당 진실을 개방할 시 또 다른 어둠과 폐쇄성이 이어진다. 러시아군의 진실은 오직 주검을 처리하기 위해서 소각장을 여는, '실존을 폐쇄하기 위한 개방'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진실하지 못하다. 거짓이자 뻣뻣한 연극이 된다. 본 작품이 자아내는 느낌 중 하나가 자연스럽지 못한, 어딘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연극성이다. 디렉팅의 한계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쉽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연극성의 의도라 여길만한 다른 요인들도 산재한다.      


2.39:1의 널따란 화면비에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흡사 객석에서 ‘연극 무대’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영화 결말의 무대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형식이다. 또 카메라에서 가깝거나 멀리 시각은 계속 뒤바뀌지만, 사운드만은 감상자와 인물의 거리가 가깝든 멀든 항상 일정한데, 이는 시각은 멀어지더라도 사운드는 대체로 극장 내에서 균일한 연극 같다. 해당 연극성을 바스야노비치가 추구했다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비추는 리얼리즘과 상충할 수 있다. 하지만 바스야노비치는 연극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연극으로 전락한 삶이 곧 우크라이나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러시아군은 장교의 지시를 따르며 매우 질서정연하게, 흡사 ‘안무’처럼 포로를 고문한다. 전쟁이라는 ‘각본’을 따르는 군인들은 실연하는 셈이고, 그들에 의해서 세르히도 생사를 확인하는 '배역'을 맡으며, 이후 '서약'을 외우고 일상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대사'를 술술 외는 세르히는 러시아군에 의해 강제된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세르히가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간 3부의 전개는 영화 초반을 거울로 비추듯 차례차례 ‘오버랩’된다. 영화 초반부엔 전쟁을 애써 외면하거나 아예 체념적,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우크라이나인의 초상을 반영했다. 이후 세르히는 외면하던 전쟁을 분명 경험했다. 그러나 풀려난 직후에도 여전히 러시아군에 의해서 전쟁을 무시해야 하는 대본이 강제된다. 납치되기 직전 ‘차’를 타던 숏과 석방 직후 ‘버스’를 타고 교환되는 숏이 서로 조응하고, 집에서 ‘LP판’으로 음악을 들으려던 숏과 집으로 돌아와서 ‘잠이 드는’ 숏이 서로 일치하며, 자동차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숏 내지는 폴리나를 모의 전투장에 보낸 숏과 광장에서 뛰어노는 폴리나를 보는 숏이 유사성을 공유한다. 절망을 외면한 대가 또한 더욱 수동적으로 반복된다. 병원에서 환자를 살리고자 심폐소생술하던 세르히는, 생명을 다루는 태도가 비교적 능동적이었다. 이런 그가 러시아군에 납치되어 오직 죽음만 확인하는 존재, 이에 의사로서 무기력할 것이 강제된다.      


또 차에서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능동적으로 가리키던 존재는 버스에서 누군가에게 호명당하거나 운전자에 의해 도착이 결정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러시아군이 세르히에게 주문한 배역은 어떠한 특유성도 없는 러시아의 ‘꼭두각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단역’이다. 세르히는 러시아군이 안드레이에게 저지른 만행을 발설할 수 없다. 그러나 단념할 수 없는 폴리나는 계속 안드레이를 그리워한다. 또 폴리나가 세르히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어느 한 비둘기가 거실 창문에 부딪혀서 죽었다. 여전히 바깥의 죽음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폴리나는 슬퍼한다. 세르히도 이를 외면하지 않고 흔적을 닦으며, ‘삶’이 있었음을 환기한다. 바로 그 장면에서 비둘기의 죽음, 흔적에 집중하는 '줌인'이 사용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책임을 갖고 골똘히 응시해야 한다. 또 그간의 편집은 불연속적이었다. 우크라이나인이 연속하고 싶은 삶이 러시아의 침입으로 불연속하며 이전과 단절되었다. 과거를 현재에 고백할 수 없었다. 이로써 과거에 가능했던 ‘인간성’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둘기가 죽은 것을 본다,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는다. 선해야 하는 인간성에 맞춰 타당한 행동을 연속한다. 이후 비둘기의 장례를 치르는 세르히는 사후, 영혼 등의 종교적 위안을 받으며 죽음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폴리나는 그것이 한갓 망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폴리나처럼 세르히는 죽음을 애써 합리화하고 긍정적으로 믿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합리화할 것이 아니라, 죽음에 경각심을 느끼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이후 세르히는 어느 인적 없는 숲에서 조깅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형성한 수동적이고 정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던 세르히는 이제 트래킹 숏으로 포착되며 능동적으로 달려 나간다. 그렇게 수미상관, 오버랩을 이탈한다. 숲에서 핸드폰과 유심칩을 교체한 이후 은밀하게 통화하여 빼돌린 안드레이의 시신을 우크라이나로 옮기려 한다. 그렇게 러시아가 강제한 ‘비인간적인 배역’을 위반한다.      


바스야노비치는 러시아에 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조심스럽고 약소한 이상을 제안해본다. 바스야노비치가 카메라를 누비는 숲에는 ‘들개’들이 있다. 들개들은 조깅하거나 자전거 타는 하는 행인을 마구 습격한다. 들개들은 움직임, 곧 카메라의 이동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들개는 우크라이나를 습격하는 야만적인 러시아의 상징과도 같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의해 영영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길 주문한다. 세르히가 처음 그 숲에 갔을 때, 들개는 세르히 대신 자전거를 탄 남자를 습격했다. 전쟁 당시 세르히는 의사일 수 없었다. 누군가를 구하거나 치료하지 못했다. 오직 죽음을 확인하는 자로만 러시아가 강제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굳힌 운명에서 이탈하여 의사로서 자신을 반영하고, 들개에게 휩싸인 남자를 구한다. 그 남자는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이다. 들개의 위협은 러시아의 악행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서, 영어를 사용하는 서방으로 확대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랴. 하지만 그 확대를 중단하는 세르히의 저항, 일탈을 바스야노비치는 희망한다, 영화로써. 그리고 러시아에 의해서 중단된 의사로서 세르히, 인간성 대신 연속하게 된 비인간적인 방관을 다시 인간성으로 이어낸다. 물론 세르히는 완벽하게 의사로 되돌아가진 못한다. 하지만 승마를 하다가 낙마하여 다친 폴리나를 돌보고, 안드레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 이행하거나, 안드레이의 죽음을 증언하며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의 사명 일부를 다시 짊어진다. 이로써 그간 인간성을 묵살하고 그 자리에 대신 반영되던,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는 비인간적인 폭력을 몰아낸다. 바스야노비치의 인간성이란 실로 단순한 것이다. 내가 보고 들은 ‘진실’을 책임지기, 물론 그 진실을 책임지기 위해서 전쟁 중 '일반적인 비인간성'에서 일탈하여 ‘비일반적인 여정’을 떠나야 하기에 벅차지만 말이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르히는 다시 숲에서 달린다. 바스야노비치는 트래킹 숏으로 그를 추적한다. 러시아만 허용되던 능동적인 이동을 우크라이나인도 회복한다.      


그런데 들개가 다시 나타나 그를 습격한다. 하지만 인근 승마장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던 한 기수가 루틴을 이탈하여 그를 구조한다. 그렇게 비인간성을 빙글빙글 반복하던 세태를 중단하여 인간성을 회복한다. 또 영화 결말에선 발걸음 소리만 듣고 고유한 상대방을 구분하는 워크숍이 진행된다. 거기서 세르히는 대체될 수 없는 폴리나와 올하의 발걸음을 구분한다. 즉 러시아에 의해 획일화되고 단순해진 존재의 복잡하고 특유한 개성을 복원한다. 이를 포착하는 바스야노비치의 영화가 수행하는 것 또한 ‘위반’이다. 대중이 마주하고 통찰해야할 시각은 익히 기대하거나 허황된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포르노적인 이미지나, 흔히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따분하게 반복하는 통속적인 이미지여선 안 된다. 우리가 실로 직면해야 하는 이미지는 가리어지고 은폐된, 그래서 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로써 나만의 세계가 아닌 외부 세계에 참여하고, 이에 인간은 고양되리. 하지만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소비자들의 욕구와 이를 의식한 생산이 악순환을 이룬다. 바스야노비치는 그 고리를 깨트린다. 언제나 전쟁의 상흔과 약자들의 삶을 묘사하던 케테 콜비츠의 불쾌하고 어두운 판화처럼, 쿠르베의 거친 필치처럼, 로트렉의 낮고 음습한 시선처럼, ‘봐야 할 것을 보게’ 만든다. 바스야노비치가 카메라에 반영하는 현실, 순환을 깨트리고 보여주는 이미지가 바로 이런 리얼리즘 계보에 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러시아 정부가 은폐하는 참혹한 진실, 마주해야하지만 너무 끔찍하고 불쾌하여 회피하고 싶은 사실들… 고통스러운 120분간의 여정,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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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08 집에서(BFI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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