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un 15. 2023

루시앵 캐스팅-테일러&베레나 파라벨, <인체해부도>

치료와 지배 사이에서

루시앵 캐스팅-테일러&베레나 파라벨

(Lucien Castaing-Taylor & Verena Paravel), 

<인체해부도>(The Fabric of the Human Body) - 치료와 지배 사이에서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168

“오늘날의 생명공학과 사이버테크놀로지는 권력구조의 산물이자 동시에 이 동일한 권력에 저항하는 가능한 집단군락이다.” -폴 B. 프레시아도-

지금까지의 시각 예술은 인간의 표피만 미적으로 승화하였다. 부드러운 살가죽 너머의 촉촉하고 질척거리며 피 비린내 나는 ‘붉은 내부’는 탐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 빈치의 정교한 인체 드로잉은 분명 피부 너머를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과학자적 기질을 생각했을 때 해당 드로잉은 미적인 승화가 아니라, 종이에 인간의 피부 너머를 과학적으로 재현한 것에 그쳤다. 또 렘브란트나 미국의 토마스 애이킨스는 해부학 수업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이 또한 ‘해부’가 그림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회화는 의뢰자들에 의해서 소재가 결정되었는데, 해부 당하는 주검은 당연히 그림을 의뢰할 수 없다. 의뢰한 사람은 의사 및 학생들로, 그 피부 너머의 붉고 꺼림칙한 육체는 식자의 전문성과 권위를 드높이는 수단이었을 뿐, 예술적인 탐구 대상은 아니었다. 이후 20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이 피부 너머를 예술로 승화했다고 볼 수 있으랴. 하지만 그 조차 순수한 인간 내부를 다루진 않았다. 베이컨은 힘에 의해 변형되고 굴곡이 생기는 감각을 다루는 화가였으니, 피 비린내 나는 붉은 색은 힘을 받아들이는 ‘샌드백’이었다. 즉 피부 너머의 살과 근육과 뼈 등은 예술 그 자체가 되기에는 지금껏 요원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캐스팅-테일러와 파라벨 콤비가 순수하게 거죽 너머의 신체를 시각 예술의 대상으로 삼는다. 1971년 스위스 뇌샤텔 출생의 프랑스 인류학자이자 영화감독인 베레나 파라벨, 1966년 리버풀 태생의 인류학자이자 영화감독인 루시앵 캐스팅-테일러는 함께 팀을 이뤄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들의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는, 실험적인 연출로 주목을 받는다. 그들은 대상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조명하는 형식까지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이로써 형식에 따라 대상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그 역학관계를 끄집어낸다. <리바이어던>에서 두 감독의 개입은 오직 편집에만 그친다. 감독들은 자동으로 촬영하는 고프로 카메라를 이용하여 바다의 파동, 바다와 인간의 관계, 조업의 역할을 드러낸다.      

토마스 애이킨스, <애그뉴 박사의 임상 강의>, 1889

<리바이어던>과 달리 <카니바>에서는 분명 감독들이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다. 또 영화의 탐구 대상인 일본의 ‘악질 식인마’, ‘이세이 사가와’와 그의 쌍둥이 형제 ‘준 사가와’에게 질문한다. 즉 대상에게 개입하지만 대상에서 발원하는 시점 숏을 유지한달지, 감독들의 자의적인 손놀림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결정되는 움직임을 가시화한달지, 감독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체험하게 해준다. 또 <카니바>에서는 무언가를 먹는 식인마 사가와를 비춘 이후, 그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지는 포커싱 아웃을 사용하여, 그의 욕망에 의해 용해되어가는 피해자들을 연출로 가시화한다. 이렇게 자신들을 내려놓고 대상에게 집중하는 파라벨과 테일러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수용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해하고 예측 불허한 '역학적 숭고'를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리바이어던>에서는 어둠 속에서 바다와 인간의 관계, 자연을 착취하는 인류의 야만성을 길어냈다면, <카니바>에서는 극단적인 사도마조히즘과 소통 불가능한 개개의 욕망 등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외면해왔던 것을 전달한다. 그것이 신작에서는 표피 너머의 불그죽죽한 살덩이다. 길어낸 숭고를 테일러와 파라벨은 매우 ‘거대’하게 보여준다. 세계의 경우에는 익스트림 롱숏, 인간의 경우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이용해서 피사체를 거인처럼 전달한다. 감독의 주관성을 내려놓고 대상에게 밀착한 카메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구성된 영화는 항상 대상과 부담스러울 만큼 가깝다. 그래서 감상자는 역겨움도 느낀다. <리바이어던>에서 피비린내가 풍겨올 듯한 해산물들의 주검이 거대하게, 또 <카니바>에서 음식물이 입가에 묻어 있는 늙고 추레한 노인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자연스러운 생리적 거부감이 샘솟는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감상자는 그들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들과 밀착할 정도로 다가서지만 <리바이어던>의 거대한 바다, 갈매기, 물고기 등과 인간은 아무리 가까워져도 이해가 불가능한 ‘비동일적’ 관계요, 차갑게 바다에서 생선들을 끌어올리고 냉혹하게 버리는 어부들과도 인간적인 감상자는 거리를 두고 싶다.     


<카니바>의 카메라가 가까이서 식인마와 마조히스트를 포착한다고 한들, 대상을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다. 분명 대상에게 다가서기 위해 모든 주관성을 포기하는 두 감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수용할 수 없거나 수용하고 싶지 않은, 감상자의 공포와 자기 보존 욕동에서 발원하는 역학적 숭고를 드러내며, 필연적인 서로간의 단절과 고립을 시사한다. 이러한 그들의 작품은 순환한다. <리바이어던>에서 바다는 끝없이 내어준다. 그것을 어부와 갈매기가 받아먹고, 이윽고 인간은 쓸모없어진 생선들은 다시 바다로 내던진다. 그러나 바다는 죽음, 쓰레기라는 '끝'을 다시 '시작'으로 뒤바꾸고, 그래서 죽음과 삶도 쉽게 나눠지지 않고, 어업도 진행과 중단이 명백히 구분되지 않으며, 그렇게 바다 위의 모든 행위는 시작과 끝을 모른 채 무한히 순환한다. <카니바>에서는 욕망이다. 잇세이가 사디스트라면 준은 마조히스트로 둘은 서로의 욕망을 해소하고 끝낼 완벽할 콤비일지 모른다. 그러나 두 대상은 서로의 욕망을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외부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파라벨과 테일러는 잇세이의 포르노, 만화를 인서트하고, 그가 늘그막에도 메이드를 바라보며 욕망을 품는 저열한 시선을 포착한다. 외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해소되지 않는 욕망, 이를 끊임없이 꿈꾸기에 끝나지 않는 허기,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 탐닉이 곧 욕망임을, 그것이 잇세이가 사라져도 그가 남겨놓은 유산들이 계속 배급되고 출판됨에 악순환할 것임을 경고한다. 이렇게 피사체와 카메라를 좌우하는 불가항력에 주목하는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이제 오늘날 인류에게 불가항력으로 닥쳐온 '의료기술'의 숭고한 힘을 <인체해부도>에서 분석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진보한 의료기술은 인류의 '자유'를 위협한다. 영화의 도입부, 어두컴컴한 밤거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개 한 마리와 성인 남자가 포착된다. 이 둘이서 걷고 있는 거리가 어디인지도 모호하고, 이들이 걷는 목적 또한 오리무중이다. 우리는 대상의 신원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신원이 특정되지 않음에, 대상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상태다. 우리는 둘의 상태를 요모조모 상상해본다. 이윽고 개와 남성은 무제한적으로 펼쳐진 거리에서 어느 한 건물로 진입한다. 야외가 무제한적으로 펼쳐져있다면, 건물은 구체적인 목적을 특정하게 구획한다. 인류 또한 무제한적인 공간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면, 특정한 공간 안에선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오직 계단과 복도밖에 없는 건물의 제한적인 특성을 부각한다. 이윽고 해당 공간이 '병원'임이 드러나고, 개와 남성의 관계는 경비견과 경비원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특정 공간에 갇혀서 구체적인 상태가 되자 우리는 대상의 추상적인 모호함을 해소하여 보다 가뿐해졌지만, 한편 더는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목적에 저당 잡힌 셈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던 존재들은 이제 필시 경비견과 경비원이어야만 한다. 어둠 속에 놓였던 개, 남성과 유사한 존재들이 점차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바로 '환자'들이다. 영화에서 반복 포착되는 환자는 ‘치매’나 '노환'을 앓고 있는 노인들이나 '정신병'에 걸린 남자다. 이들은 '현재'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환자들은 소위 ‘일반인’들이 객관적으로 참여하는 외부 세계를 '이탈'한다. 이들은 물리적인 제약을 무시하고 현재와 현실의 ‘출구’를 찾아서 자신들이 '가고 싶은 시공간'이나 '되고 싶은 상태'로 빠져나간다. 즉 현재나 현실이 부여하는 구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환자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환자들은 어디에도 속하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몸소 감당하기에는 유약한 노인들이다. 또 정신병 환자는 외부에서 무슨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래서 노인들의 건강, 환자가 일으킬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 '안전'과 '건강'을 명목으로 그들을 붙잡아둔다. 정신적인 문제가 없는 환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마취'를 당하고 수술대에 올라, 자신의 육체를 의료인의 의식과 기계에 맡긴다.      


그 명목을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의심'한다. 의료를 명목으로 ‘자유 포기 각서’에 서명을 시키는 것이 아니냐며 말이다. 영화의 결말, 의료인들이 파티를 즐기는 장소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외설적으로 패러디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거기엔 사람들의 나체를 묘사하였고, 남근이나 음부를 적나라하게 과장하였다. 성기를 과시하며 헐벗은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죄다 '미소'를 짓고 있다. 이들은 즐겁다. 이와 동시에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 이들의 쾌락 근처에는 항상 '해골'이 함께 그려져 죽음이 득실거린다. 당연하다, 쾌락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소모한다. 그만큼 미래로 이어질 생의 동력을 낭비하고, 즐거움을 대가로 죽음을 앞당긴다. 의료인들은 해당 벽화처럼 파티를 즐긴다. 의료인들은 분명 죽음을 유예하고 삶을 연장하는 직책을 몸소 맡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생을 길게 늘이는 의료인들이 죽음에 다가서며 쾌락을 즐긴다. 의료인들이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의료인들은 영화 내내 투덜거리며 불만이 많다. 일이 너무 많아서 지치고 피곤하다고, 미래를 염두 하면서 에너지를 비축만 하려니 삶은 불만족스럽다. 그 불만족스러웠던 삶이 비로소 에너지를 소모하고 현재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이로써 기쁨을 누리며 충만해진다. 물론 미래로의 연장을 거부하는 즐거움, 자유의 대가는 죽음을 앞당기지만, 어차피 삶은 피할 수 없는 죽음까지도 긍정해야 한다. 자유와 죽음 모두 다 누리고 긍정하는 것이 삶이다. 그런데 죽음까지 짊어지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존재들이 있나니, 바로 환자들이다. 이들은 죽음을 짊어지기보다는 죽음을 밀어내야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와 쾌락을 유예한다. 분명 현대인들은 진보된 의료기술의 수혜를 입으며 죽음을 유예하고, 더 긴 삶을 누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람을 구하고 살려야만 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노예가 됨으로써 죽지 못하는 존재, 건강을 위해서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의료기술의 마네킹’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스페인의 섹슈얼리티 철학자 폴 B. 프레시아도는 현대의 '의료 테크놀로지'가 '이분법적인 성 구분', '자본주의', '노동' 등 권력의 목적에 적합한 몸을 재생산한다고 지적하였다. 해당 주장처럼 본 작품에서도 사회의 정상적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환자가 되고, 이들은 정상인이 되고자 수술을 받거나, 이에 실패한다면 영화 내내 '격리'된다. 즉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현대인들이 능동적으로 의료기술을 활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의료계에 붙잡혀서 지배를 당하는, 그럼으로써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의료 현장의 이면을 까발린다. 이로써 의료기술과 인류의 관계를 재고한다. 그렇다면 의료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여파는 무엇이고, 또 그들은 지배할 자격이 있는가? <인체해부도>에서는 의료인들의 솔직한 모습을 기록한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의 연출은 객관적으로 현실을 기록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의 최후의 기수인 프레데릭 와이즈먼과 닮아있다. 그러나 차이를 꼽자면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피사체 주변에 위치한다. 와이즈먼은 피사체가 더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때까지 적응시킨 이후 촬영을 시작한다. 그런데 어찌됐든 카메라는 주변에 있다. 아무리 적응했다고 한들 발화나 행동은 '전시'를 의식하는, 보다 정제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가 의료인들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본 작품에서 '감춰져' 있다. 의료인들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구도에서 몰래 그들의 수다를 엿듣는다. 설령 정면을 포착한다고 한들 이들의 얼굴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거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익명적'이다. 익명이 되어 본인에게 가해질 책임이 줄어드니 발화는 솔직하고 노골적이다. 그렇게 촬영된 의료인들은 감상자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정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우직한 이성을 가진 존재, 또 내가 잘 모르는 전문성을 탑재한 이들을 신뢰한다. 이에 더해서 나를 잘 보살펴줄 이타성도 증명해주길 원한다. 그래야만 내 몸을 맡겨도 이상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포착된 의료인들은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물론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의료인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이들은 주어진 업무를 두고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묵묵히 수행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의료인의 집도 도중 예상치 못한 '출혈'이 발생하고, 이를 두고 ‘나이아가라 폭포’라며 농담을 한다. 또 환자를 위한 발화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한 발화를 내뱉고, 의식을 잃은 환자 앞에서 쑥덕거리기도 하며, 의사와 간호사는 이권을 두고 다투기도 한다. 그래서 환자를 기준으로 의료인들은 선과 악, 전문성과 허술함 모두 뒤섞인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진다. 수술대 위에 올라간 우리는 의료인에게 몸과 정신 모두 다 맡길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도 내 몸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들 또한 온전히 타인을 보살피기엔 필연적으로 이기적이고 불안정한 인간이 아닌가? 더욱이 시술이나 수술 등 행위의 주체는 분명 의료인이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와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쪽은 환자의 육체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가 의료인들을 '익명적'으로 처리하여 발생하는 여러 효과 중 하나는 신원이 노출되지 않는 그들이 책임에서 유리된다는 것, 행위에 따라 출혈이 발생하는 곳은 의료인의 '손'이나 그것이 잡고 있는 '기계'가 아니라, 행위가 닿은 환자의 속살임을 환기한다. 청각은 의료인의 발화로 가득하나, 시각은 환자의 체내를 포착한 영화의 숏도 행위와 책임의 이중적인 결합을 가시화한다. 영화 말미 파티에서 의료인은 ‘도전’한다고 말하지만, 도전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쪽은 환자다. 즉 의료 행위의 책임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에게 전가된다.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데, 행위자의 책임마저 짊어져야하니 그들에게 자유는 감히 허락되는가?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에 더해서, 기계와 환자의 관계 또한 탐구한다. 분명 테일러와 파라벨에 의해서 인간의 속살과 체내가 예술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순'하다. 체내 그 자체만을 순수하게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독립적인 신체가 아니라, '기계에 의한 체내'만 볼 수 있다. 체내는 MRI, X-레이, 초음파 촬영, 의료용 카메라 및 모니터 등 기계를 거쳐야만 포착된다. 해당 기기의 화질이나 촬영에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포착된 체내 이미지도 변한다. 우리는 사실상 ‘기술’을 감상한다. 기술 없는 체내, 곧 순수한 인체의 속내는 볼 수 없다. 인체는 거룩한 기술 선전의 수단이다. 해당 기계들은 본래 신체 기관의 용도나 목적을 뒤집는다. 일례로 '침전'되고 '퇴적'되는 신체 기관을 기계는 '갉아'낸다. '배출'하는 ‘장’에서 기계는 '삽입'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기관인 '동공', 그러나 기계에 의해서 동공은 ‘바라봐진다.’ 사정하며 정액을 배출하는 남근, 그러나 남근은 무기력하게 기계가 '삽입'되기를 기다리고, 기계에 의해서 정액 대신 피를 쏟으며 축 처진다. 이렇게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신체 기관들의 본래 운동과 정반대인, 기계에 지배되어 역전된 무시무시한 운동을 영화 내내 부각한다. 건강을 위해서 기관들의 본래 용도가 뒤집힌다. 그럼으로써 삶의 역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죽음을 긍정해야 하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부정하는 삶이자 생존이 목적이 된 삶으로, 이로써 그 삶을 가능케 하는 '의료기술에 의한 삶'으로의 역전이 말이다. 영화에선 환자들에게 인공 동공과 인공 척추를 이식한다. 인간은 기계에 의해서 서고, 또 기기에 의해서 본다. 분명 삶이 윤택해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기계에 의한 롱테이크'와 '환자들의 롱테이크'를 대비하며 삶의 역전을 암시한다. 의료 행위를 포착하는 롱테이크의 경우 의료 행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과정을 오롯이 전부 다 포착한다면, 환자를 포착하는 롱테이크는 '부수적이다.' 전자가 의료 행위 길이에 의해서 롱테이크가 좌우된다면, 후자는 그저 카메라가 비추는 곳과 롱테이크 안에 환자가 있을 뿐이다. 카메라는 '출구'를 찾는 두 환자들을 포착하다가도, 그들의 걸음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내 곧 다른 환자로 주의를 분산한다.      


즉 카메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지 인간이 아니다. 기술 중심적 여파는 형식에 반영된다. 이렇게 의료기술에 의해서 인간의 지위가 전복되는 오늘날을 분석하는 본 작품에선 철학자 아도르노의 주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구성하겠다는 미명 하에, 자연과 분리된 문명을 세웠다. 그 시작은 자연의 양면적인 얼굴 중 잔혹함과 지배를 반성하며 주체적인 인류로 우뚝 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고 도구화하면서 자연의 '지배'를 고스란히 답습했고, 인간의 목적과 야욕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던 태도가 인간한테까지 이어져, '인류가 타 인류를 지배'하는 ‘야만’에 이르렀다. 특히 거룩한 문명의 업적으로서 인류의 삶에 빛을 밝힌다고 알려진 '계몽'을 아도르노는 ‘폭력적’이라며 반박한다. 계몽은 인간을 밝히기는커녕, 인간을 계몽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로써 인간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문명과 계몽의 야만으로 점철된 인류사에서 본래 도마 위에 올라 칼로 잘리는 것은 '동물 고기'였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는 태반이나 탯줄, 절단된 유방 등 인간의 일부가 흡사 고깃덩이처럼 도마에 오른다. 물론 그 희생은 연구를 위해, 이로써 인류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화 속 환자들의 삶은 개선이나 진보와 거리가 멀다. 삶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자유와 죽음을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환자들은 바로 그 삶을 누리지 못한다. 탈출한 환자는 다시 붙잡혀서 방에 갇힌다. 치매에 걸린 환자들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관리하는 말로 추정되는 '착하다'라는 자기 검열을 반복한다. 산모는 제 배에서 무자비하고도 잔혹하게 발생하는 제왕절개 과정을 접할 수 없다. 의료인들이 시야를 차단했기 때문이요, 오직 아이의 탄생만 볼 수 있다. 물론 충격을 경감하기 위한 결정이지만, 산모는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인이 알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조금 작아서, 즉 의료 기준에 들어맞지 않아서 인큐베이터 안에서 관리된다. 수술하는 환자는 의료인들에 의해서 마취와 깨어남이 결정된다.      


그렇게 자유를 빼앗긴 환자들은 수술대나 병실에 붙잡힌다. 수감된 인류 대신 움직이는 것은 그들을 연구하거나 치료한 바를 기록한 '보고서'로서, 인류를 반영한 '사물'이 인간 대신 이동한다. 또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땅을 뚫고 무언가를 '건설'하거나 '캐내듯', 연구와 보고서를 위해서 인류의 몸은 착취당하는 대지로 전락해, '뼈'는 깎이고 진보한 기술은 그 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인류의 살덩이는 도마 위에 오르는가? 그래서 영화에선 '망자'가 '산자'와 구분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죽음이 가까워진 환자들을 다시 삶으로 인도하고, 망자를 산자처럼 가꿔주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사후경직된 망자의 모습과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환자의 모습이 영화 내내 구분되지 않는다. 의료기술에 저당 잡힌 환자들의 목숨은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다. 의료기술의 목표를 위해 건강을 유지하고 죽음에서 유리되어 관리되므로, 그 과정에서 죽음과 밀착한 쾌락을 즐기는 의료인들과 달리 자유를, 곧 삶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 불가항력을 탐구하는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현대 사회의 의료기술이라는 불가항력, 이에 지배되는 인류를 고찰한다. 인간은 스스로 거대할 수 없고, 의료기술이 인류를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만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확대되고, 또 미세하게 바라봐질 수 있다. 의료기술은 인간을 해체하다시피 들여다보지만, 정작 의료기술을 바라보려는 인류의 동공은 제한된다. 의료기술은 인류의 시야를 방해한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제한된 시점을 넘어서 볼 수 없던 것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이는 아주 무시무시하고도 으스스하여 감상자를 공포에 빠트린다. 공포는 분명 육중하고도 음험한 미의식에 상응하는 숭고의 근원이나, 이번 작품만큼은 공포가 숭고로 승화되지 않는다. 공포의 피해가 감상자에게 직접 미치지 않을 때, 파괴적인 에너지를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숭고로 승화되는데, <인체해부도>의 공포와 불안은 감상자와 유리되어 있지 않은, 잠재된 미래에서 비롯하기에 현실과 별개라고 여기기가 어렵다. 그 에너지를 직접 맞닥뜨릴 것만 같은 공포에 자꾸 몸이 찌릿거리고 오금이 저린다. 이렇게 생생하고 밀접한 공포는 내가 직접 처해야 하는 의료기술을 향한 실제적인 의심과 반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류가 의료기술에 불가항력적으로 지배되지 않고,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

감상일: 230610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발렌틴 바스야노비치, <리플렉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