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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15. 2023

미야케 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세계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숭고한 투쟁

미야케 쇼(Sho Miyake),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Small, Slow but Steady) 

- 세계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숭고한 투쟁     

“말하는 존재에게 인생은 의미가 있는 삶이다. 삶은 의미의 정점까지도 구성한다. 그래서 말하는 존재가 삶의 의미를 잃게 되면, 그 인생은 쉽사리 길을 잃는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성난 황소>, <밀리언 달러 베이비>, <더 레슬러> 등 복싱, 레슬링을 다룬 영화들은 그간 우리를 감동시켰다. 해당 영화들이 감상자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의 필연적인 '육체와 정신의 투쟁'을 환기했기 때문이랴. 해당 영화와 유사한 고민을 하던 인류는 작품을 감상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나름의 위로를 받으며 통증이 무뎌진다. 유한한 육체는 자신을 보존하고자 항상 움츠려든다. 또 물리 법칙에 좌우됨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래서 육체는 장애물로 가득하다. 그런 와중에 정신은 대범하다. 육체가 무수한 제약 속에서 가능한 선택을 축소하고 또 축소하는 동안, 관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우주로, 그 우주 너머를 꿈꾼다. 제약을 모르는 정신은 천진한 어린 아이 같기도 하고, 정신을 지시받는 육체가 장애물을 뛰어넘게 만드는 용기를 부여한다. 물론 정신의 지시를 받은 육체는 실제 현장과 맞닥뜨리며 다시 위축되고, 이렇게 육체와 정신의 상반된 입장을 오고가는 투쟁이 인류의 삶 그 자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해당 영화들은 이러한 투쟁을, 그 중에서도 고양되려는 정신이 육체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며 꿈에 다가서는 투지가 부각된다. 우리는 물질적 장애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쉽지 않은 정신의 승리에 감동을 받는다. 즉 살이 찢기고 피가 철철 흐르는 해당 영화에서 포착되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정신이 다가서고자 하는 바에 도달하려는 숭고한 의지다. 육체가 거룩한 의지를 표상하는 영화의 계보를 미야케 쇼가 이어간다. 청각장애인 복서인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삶을 영화화하며 말이다. 1984년 훗카이도 태생의 미야케 쇼는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2020년 국내에 소개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로 유명하다. 미야케 쇼는 해당 작품에서 '사토리 세대'를 탐구한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급속도로 주저앉던 시대 속에서 불안에 찬 격동의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가 사토리 세대로, 미야케 쇼는 사토리 세대가 일반적인 인류의 삶과 비교해서 '뒤집어 졌다'라고 진단한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인류가 활동하는 오후가 사토리 세대에게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토리 세대에게 노동의 시간, 활동적인 시간으로서 오후가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입지를 굳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직이거나, 언제나 타인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그들은 생계를 위해서 상사, 고용주에게 굴종한다. 해당 일을 수행하는 그들의 얼굴은 '익명적'으로 가려지며, 이에 오후에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박탈당하는 사토리 세대는 유희와 일탈, 쾌락의 시간인 밤을 누빈다. 자신에게 굴욕과 박탈감을 선사하는 이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역으로 이들은 바깥으로 나가 일련의 자신을 되찾는다. 하지만 오후에 활동할 수 없는, 사회에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은 밤을 누빌 수 있는 자본조차도 넉넉지 않다. 밤을 누비더라도 그들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담배 연기’와도 같은 것을 손에 쥐었지만, 이는 ‘헛것’이기에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래서 미야케 쇼는 사토리 세대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길, 스스로 '노래'하고 존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들의 삶을 묵묵히 느리게 뒤따라가서, 매혹적인 색채와 공허한 무드로 풀어낸 미야케 쇼는 이번에도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는 청년의 초상을 감각적인 연출로 풀어낸다. 그 청년, 케이코는 세상 속에서 자아를 오롯이 실현하기엔 장애가 있다. 바로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자기 집, 자기 방에 홀로 놓일 때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존재는 온전히 포착된다. 안정적인 구도, 따스한 조명 아래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일기’를 쓰는 그녀가 완전히 포착될 수 있는 이유는 케이코만의 공간에선 청각이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듣지 못하고 대처할 수 없는 청각이 습격하지 아니하고, 그녀가 강점이 있는 시각만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 그녀의 남동생 세이지 또한 '헤드폰'을 양쪽 귀에 착용한 상태에서 작곡에 몰두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할 때 얼굴은 클로즈업된다.      


클로즈업되어 프레임을 오롯이 점유한 이들은 자신으로서 '거대'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항상 프레임에 나 혼자 놓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타인의 표상과 객관적인 외부 세계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운명이다. 이후 케이코는 체육관에 가서 마코토와 '수비 훈련'한다. 케이코의 세계에 들어온 마코토의 공격을 그녀가 막아내지 못하자, 케이코는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한다. 즉 미야케 쇼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항상 나 혼자 놓일 수만은 없는 노릇, 필연적으로 타인과 부대껴야 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을 얼마만큼 사수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가?” 세계 속에 뛰어들어서 자신을 보존하는 투쟁을 연이어야 하는 삶을 부각하고자, 미야케 쇼는 ‘세계를 주목하는 롱숏’을 자주 사용한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개인은 프레임을 혼자 점유한다. 그 외에 포착되는 것은 기껏해야 ‘사물’이다. 개인은 프레임 내에서 사물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자신이 원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롱숏은 다르다. 한 얼굴을 크게 주목하는 클로즈업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포착하는 롱숏에서 인류는 작아진다. 그만큼 롱숏엔 작게 포착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부대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의도한 힘을 고스란히 반영함과 동시에 내겐 힘을 미치진 않는 사물과 달리, 타인들은 내가 예상 못한 힘을 미치기도 하고, 또 내가 타인에게 미치는 힘은 항상 내 의도대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샌드백과 달리 케이코의 경쟁 상대는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그래서 온전한 ‘나’는 롱숏에서 불발된다. 더욱이 미야케 쇼는 본 작품에서 '롱테이크'를 롱숏과 적극 결합한다. 컷이 잦은 영화는 '다른 숏'으로 옮겨 다니며 '운동'이 발생한다. 또 컷이 많은 영화에선 내가 원치 않은 숏을 벗어나 내가 원하는 다른 숏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컷이 드문 롱테이크의 운동은 여러 숏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숏 내부'에서 돌고 돈다. 그래서 숏 이동이 잦지 않은 본 작품에서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고 나를 보존하기 위해선, 다른 숏을 찾을 게 아니라, 숏 내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하지만 청각장애인 케이코는 롱숏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자신이 타인에게 전하는 말이나 표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로써 케이코는 '오해'를 사거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세계나 상대에게서 지워진다. 청각이 제한된 만큼 그녀가 몰두하는 감각은 '시각'과 '촉각'이다. 그런데 케이코 가족의 집에서 세이지는 '기타'를 연주하며 작곡, 즉 청각에 몰두한다. 이에 케이코가 체육관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롱숏에서 케이코과 세이지가 머무는 '표상'은 각기 나뉜다. 둘 사이에는 ‘선’이 그어진 듯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서로의 표상에 들를 일이 있더라도 '스쳐 지나가듯' 신속히 빠져나가며 각자의 공간, 프레임을 분리한다. 집뿐만이 아니다. 케이코는 프로 복서이긴 하지만, 복싱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호텔리어를 겸한다. 본래 케이코는 수어를 못하는 비장애인들과 소통할 땐, 그들의 '입모양'을 읽어내서 말하는 바를 파악한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은 2020~2021년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입모양을 '마스크'로 가로막는다. 그래서 케이코에게 질문하는 남성 호텔리어의 입모양과 호출 벨이 그녀의 동공에 미치지 못한다. 편의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캐셔는 ‘포인트 카드’를 언급하지만, 케이코는 직원의 입모양을 확인할 수 없어서 '결제 수단'이나 '비닐 봉투 구입' 등으로 발화를 오해한다. 이에 캐셔와 케이코 사이에는 '선'이 그어진 듯 두 세계는 넘어서지 못한다. 이후 귀가하는 와중에 어느 한 행인과 부딪힌다. 행인은 케이코가 길을 잘 보고 다니지 않는다며 모욕을 퍼붓지만, 이는 케이코의 귀에 미치지 않는다. 케이코는 그 남자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한 채, 즉 케이코의 뇌리에서 그 남자는 지워진 채로 제 갈 길을 떠난다. 이렇게 양자의 귀와 뇌리에 서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로써 케이코는 상대방, 세계와 '고립', '단절'되고 '없는 셈' 취급된다. 설령 잠시 공존한다 한들 서로를 착각하는 ‘불협화음’에 그친다.      


이로 인한 케이코의 외로움은 비장애인과의 관계에만 그치지 않고 그녀를 승인하고 보듬어야 할 '공권력', 곧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어스름이 내리운 강변을 케이코가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를 목격한 경찰들은 혹시라도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닌지 확인 차 케이코에게 다가간다. 경찰과 케이코, 서로는 오해를 하지만 소통이 불가능하니 얽힌 매듭을 풀 수가 없다. 경찰은 수어를 쓰지도 못하거니와, 활자를 사용하기에 날이 너무 어둡다. 이윽고 경찰은 케이코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롱숏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케이코는 계속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고 소외된다. 이로써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그녀가 롱숏에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있나니, 바로 '체육관'이다. 앞서 케이코가 외로움, 소외를 느끼는 장면에서 롱테이크는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면, 숏의 길이는 잠시 머물고 금방 사라지는 아스라한 그녀의 시간에 상응했다면, 체육관에서는 꽤 긴 호흡으로 그녀가 포착된다. 체육관에 도착한 케이코, 이후 코치와 연습하는 장면 등이 말이다. 청각이 보편화된 비장애인의 세계와 달리, 체육관은 케이코가 주로 활용하는 시각과 촉각의 세계다. 수어가 불가능한 사람들과는 '문자'로 소통해야하는 케이코에게 '보드'에 할 말을 적는 체육관의 대화 방식은 아주 적합하다. 체육관의 또 다른 소통은 바로 '몸의 대화‘, 곧 촉각이다. 합의된 폭력과 촉각을 상대방에게 미치고, 그 파장을 상대가 받아들이며 소통한다. 체육관에서 상대는 때리기로, 또 상대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서로의 '싸울 마음'을 확인한다. 때릴 상대, 맞아줄 상대가 대화로 합의되며 서로는 내게 꼭 필요한,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싸울 마음을 갖추고 코치와 '콤비네이션 연습'을 하면서, 외부에서와 달리 조화로운 '리듬감'이 느껴지는, 흡사 '안무'와 같은 몸동작이 길게 포착된다. 더욱이 체육관에서는 '링'이 부각된다. 바깥으로 밀려나더라도, 떨어지지 않게끔 탄력적인 줄이 다시 선수를 '중앙'으로 데려오며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밀려나던 케이코는 비로소 제 글자와 표현이 타인에게 온전히 흡수되고, 밀려나도 다시 중앙으로 옮겨주는 링의 도움을 받아서, 드디어 롱숏에 머물고 존재한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를 존재하게 해주는 소통 방식을 연출로 가시화한다. 가장 먼저 케이코와 세이지가 소통할 때, 무성영화에서 자막을 띄우는 형식인 '인서트 타이틀'을 빌려온다. 외의 장면에서는 화면에 자막을 입히기도 하지만, 세이지와 소통할 땐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의 전달 방식을 빌려옴으로써 듣는 언어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언어'가 따로 인서트, 곧 ‘외부에서 삽입’되어야 하는,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절차’를 한 번 더 거치는 그녀의 인식 방식을 가시화한다. 또 다른 연출로는 ‘클로즈업’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에 몰두하는 세이지, 골똘히 사색하는 케이코를 클로즈업할 땐, 그들만의 세계에 침잠한 인물을 가시화하지만, 이와 동시에 들리지 않는 만큼 '시각에 집중'하는 케이코의 세계 인식 방식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케이코가 무언가를 골똘히 집중해서 바라보는 시선에 상응하는 클로즈업은 '사물', '신체 부위', ‘훈련’ 등을 담고 확대한다. 미야케 쇼는 해당 클로즈업에 언어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언어와 청각이 설명해주지 않는 부분을 풍부하고 상세한 시각으로 대신 읽게끔 만든다. 또 대상에게 밀착한 클로즈업은 상대의 몸과 딱 달라붙어서 교류하는, 물리적으로 항상 가까워야만 하는 케이코의 원초적인 소통 방식 또한 가시화한다. 이렇게 케이코가 타인, 세상을 수용하고, 또 그들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감각은 시각과 촉각이요, 미야케 쇼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그 중에서도 케이코는 촉각이 더 편하다. 그 이유는 케이코가 세상을 수용할 때는 '비언어적인 시각'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세상에 자신을 표현할 때는 '수어'나 '활자'가 필요하고, 후자의 경우 제약이 많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가 청각장애인 친구들과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고 수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번역'하지 않는다. 수어를 눈으로 봄과 동시에,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기술’이 따로 필요한 ‘난감함’을 환기한다.     


그래서 수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되는 '원초적인 소통'인 촉각이 편하다. 체육관이나 링 위에서 합의된 촉각이, 설령 몸을 만지거나 부딪치지 않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눈빛’이나 ‘교감’ 등이 말이다. 특히 케이코에게 촉각은 자신을 보존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학창 시절, 비장애인 학생들은 케이코를 따돌려서 모든 것을 앗아가려 했고,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케이코가 선택한 것이 '싸움'이다. 그녀는 촉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보존했다. 거친 학창 시절을 보낸 케이코는 싸움 실력이 성장했고, 이후 복서가 돼서 제 삶이 어땠는지를 간접 표상한다.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싸움으로 자신을 보존한 청소년기를 말이다. 또 상대의 주먹을 체감하고, 자신의 주먹을 상대가 체감하도록, 그렇게 서로를 교환한다. 더욱이 직접 연습하거나 맞붙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찾아와주는 관중들이 있고, 비대면 경기로 전환됐을 시엔 '생중계'를 꼬박꼬박 시청해주는 팬들이 있다. 그들은 케이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인식하고 감격하며, 이후 그녀에게 칭찬과 격려, 고마움을 아끼지 않는다. 즉 케이코는 복싱이라는 원초적 언어로써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세상에 자신을 알린다. 그런데 눈이나 귀에 위험을 안기지 않는 타 소통 방식과 달리, 케이코가 몸으로 소통하는 방식은 매우 거칠어서 에너지 소모가 크다. 복싱에 뒤따르는 거대한 에너지는 엄마와 세이지가 찍은 '사진'에 가시화된다. 매우 격렬하게 움직이다 보니, 제대로 찍힌 사진이 손에 꼽을 정도다. 죄다 ‘아웃 포커싱’으로 흔들렸다. 사진이 복싱의 에너지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이를 직접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몸은 더한 파괴를 겪는다. 복싱이 몸에 미치는 힘은 귀와 눈에 미치는 파장과 비교를 불허하리만큼 강력하다. 경기 한 번 뛰고 나면 흉터가 남고, 어지러움과 각혈, 고열 증세가 동반된다. 그간 온전하게 포착되던 케이코의 초상이 불완전하게 깜빡거리는 조명처럼 변한다. 경기 이튿날 바로 출근한 케이코는 어지러워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고, 엄마 또한 케이코의 건강을 염려해 그만했으면 하는 눈치다. 케이코도 이 정돈데 그녀의 경기 상대는 병원에 실려 갔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 프로 복서는 생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선 프로 복서를 그만둘 수 없다. 그래서 생계에 도움이 되는 호텔리어를 겸하고, 이에 '한 가지 직업'만 갖는 사람들보다 일찍, 동트기 전 '새벽'에 일어나서, 일반적인 퇴근 시간보다 더 늦은 새까만 '야밤'에 귀가한다. 영화 속 케이코의 마지막 경기도 그렇다. 상대방이 발을 밟았다. 반칙이다. 그러나 심판은 케이코의 항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케이코가 무엇을 못마땅해 하는지 모르는 눈치다. 또 심판은 수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청각 언어를 무심하게 발화한다. 체력적으로 벅찬 상황인데 자신에게 익숙지 않은 언어까지 해석하려니 케이코는 힘이 두 배로 부친다. 케이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에 화가 나서 흥분하고, 비장애인이라면 낭비하지 않았을 체력을 소진하며 패배한다. 즉 비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비일반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겐, 일반적인 세계의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체력이 필요하고, 제한 없이 꿈꾸는 정신과 달리 체력의 제약이 있는 육체는 더 쉽게 피로와 한계에 봉착한다. 더욱이 그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케이코는 이를 다 감당하기에 특별히 더 “강하지 않고 아픈 게 싫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그 평범한 육체는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SOS 신호’를 정신에게 전달한다. 물질의 위기는 케이코만 겪지 않는다. 케이코를 둘러싼 체육관이란 환경도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다. 그래서 유한한 물질인 환경에 따라서 케이코의 삶도 좌우된다. 체육관은 물질로써 보수, 유지된다. 그러나 그 물질을 조달할 힘을 점차 잃어간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대면 서비스들이 점차 힘을 잃어가는 상황, 더욱이 전통적인 스포츠의 인기가 점차 쇠퇴해감에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이 폐업 위기에 처한다. 심지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복싱 체육관’으로서 역사적인 상징성을 지니는데도 말이다. 더욱이 체육관 관장은 뇌경색과 동맥경화로 인해, 체육관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정신을 육체가 보조하지 못한다.      


관장 부부가 건강검진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서, '우측'으로 느리게 걷는 그들 옆으로 '좌측'으로 쏜살 같이 달리는 기차가 지나간다. 물질의 발전을 상징하는 쾌속열차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관장 부부는 느리기까지 하다. 속도에서 오늘날을 더는 따라갈 수 없거니와, 기차는 폭압적으로 그들을 가린다. 즉 정신이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을 뒷받침하는 유한한 육체가 서서히 제 수명을 다해가며 한계에 봉착한다. 도입부, 빛을 밝히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정작 전구가 다 닳아서 힘겹게 겨우 깜빡거리는 '가로등'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젠 육체가 정신을 결정한다. 케이코는 싸울 마음을 잃었고, 널따란 비장애인 세계에서 어떻게든 투쟁하여 자신을 표현하기 보다는, 수어로 소통이 편한 청각장애인 친구들과의 안온한 세계에 침잠한다. 링 위에선 육체로써 적극적으로 말하던 케이코는 친구들과 있을 때는 발화를 주도하기보단, 그저 ‘읽고 수용’한다. 적극적이던 정신을 무기력한 육체가 좌초시킨다. 체육관 폐업에 미안함을 느낀 관장이 케이코를 타 체육관에 고개까지 숙여가며 보내줬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코는 거리가 멀다며 물리적인 한계를 운운하고 그만두려 한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가 맞닥뜨린 물질의 한계, 장애물이 많은 세계를 매체로 가시화한다. 바로 16mm 필름이다. 미야케 쇼는 16mm 필름의 자글거리며 '물성'이 느껴지는 매체의 특징, 필름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그레인'을 극한으로 강조한다. 이로써 부각되는 것은 '거친 질감'인데, 마찬가지로 척박한 언어로 소통하는 케이코가 지칠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환경을 미장센이 가시화한다. 또한 '물질의 유한성'이 환기된다. 매체의 특징과 한계를 극한으로 강조함과 동시에, 미야케 쇼는 본 작품의 채도와 명도를 매우 낮고 흐리게 처리한다. 그래서 '변색', ‘풍화’되는 듯한 효과가 발생하고, 이로써 물질이 봉착할 수 있는 한계에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필름이라는 물질이 낡으면 시네아스트가 지향한 관념을 반영할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인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가시화한다.     


하지만 미야케 쇼는 말한다, 육체는 초인적인 의지가 다시 일으킨다고. 지친 육체에 초인적인 의지와 용기를 다시 불어넣는 계기는, 육체가 표현한 바가 타인에게 받아들여졌을 때의 ‘지지’다. 이를 뒷받침해서 육체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시 정신의 지시를 이행한다. 케이코는 관장님께 "죄송하지만 이제 쉬어야겠습니다."라고 사직서를 내려 했다. 관장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런데 관장이 케이코의 경기를 모니터링하면서 응원하고 흡족해하는 모습을 그녀가 보게 된다. 이에 케이코는 복싱을 쉬려고 했던 육체의 나약함을 단념하고, 다시 세상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정신을 일으킨다. 외에도 케이코의 '일기와 그림'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진다. 본래 활자로만 적혀 눈으로만 보던 그녀의 일기가 관장 아내의 ‘발화’, 곧 청각과 타인의 언어로 승화된다. 세이지와 그의 여자 친구 ‘하나’, 새로운 체육관의 관장 등이 수어와 복싱을 배우며 케이코와 소통해서 그녀를 알려고 할 때, 이로써 케이코가 타인에게 '의미'가 되고 '감사'한 존재가 될 때,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자신을 표출하려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케이코는 하나에게 춤을 배운다. 즉 물질과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여러 제약과 맞닥뜨리더라도 케이코는 그냥 주저앉지 않는다. 거대한 세계 속에서 작지만 강하고 단단한 자신을 일으켜, ‘질주’하고 제 자취를 남길 준비를 다시 마쳤다. 

이렇게 미야케 쇼는 사토리 세대는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비장애인들의 세계에서 좌절하고 주저앉는 장애인, 첨단 기술과 재개발의 물결 속에서 짓밟혀가는 16mm 필름과 고즈넉한 체육관 등 아날로그 매체를 조명한다. 하지만 세태에 굴하지 않는 숭고한 의지를 연이어 포착한다. 그 숭고한 의지는 '소통'에서 파생한다. 미야케 쇼는 본 작품에서 '강물'을 재차 강조한다. 관장이 케이코의 연습 장소에 방문했을 때, 경기 상대가 케이코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 너머에서 강물이 유유자적 흘러간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물이 흐르는 장면에서 케이코는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 의미가 된다. 그렇게 상대에게 의미가 될 때, 우리는 패배하고 지치더라도 다시 주체적으로 일어설 숭고한 기운을 되찾는다. 그 숭고한 의지는 미래로 연속한다. 체육관이 폐업하는 도중에 등장한 명랑한 ‘어린이’, 다시 질주할 준비를 마친 케이코 등을 비추며… 그 의지를 방해하는 유한한 물질과 고약한 세계를 허망한 체육관의 흩날리는 먼지, 늦은 귀갓길의 어두운 기찻길 등 멜랑콜리한 무드의 롱숏으로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한 와중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인물의 초상을 거친 매체 속에서 부드럽고 섬세하게 촬영한 연출이 발군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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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1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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