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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19. 2023

막심 나코네치니, <버터플라이 비전>

사냥감을 노리는 프레임, 꽃가루를 옮기는 프레임

막심 나코네치니(Maksym Nakonechnyi), <버터플라이 비전>(Butterfly Vision) 

- 사냥감을 노리는 프레임, 꽃가루를 옮기는 프레임     

“나는 살아 있는 죽음을 살고, 절단되고 피 흘리는 시체가 된 육신을 살고, 느려지거나 중단된 리듬을, 고통 속에 소멸된, 지워졌거나 부풀려 과장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가부장제에서 가장은 약자, 곧 여성이나 아이, 노약자를 지켜주겠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이양 받았고, 문명이 일반적으로 금기시하는 폭력을 간헐적으로 허용 받았다. 가부장제에서 남성 가장은 외부 위협을 물리친다는 명목으로 힘을 거머쥔다. 하지만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힘을 사용하기 보다는, 보호해주기로 한 약자를 지배·착취하기 위해서 무력을 남용한다. 보호받기 위해서 일련의 힘을 쪼개서 내어준 약자들은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된 폭군을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가장의 위협에 생존하기 위해서. 이러한 가부장제가 가정을 넘어 공동체, 사회, 국가 너머로 확장될 시 ‘내전’, '전쟁'이 발발한다. 약자를 지켜주겠다는 미명 하에 권력을 거머쥔 가부장제가 실제로는 약자를 지배 및 착취함을 증명하는 사건이 바로 전쟁이다. 그 전쟁이 오늘날에도 발발한다.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거대한 힘을 가진 러시아는 약한 국가와의 공존을 택하기보단, 가장 밑에 소속된 '식구'로서 우크라이나를 지배하고 통합하길 원한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도 노인이나 여성까지 끌어 모아 러시아의 군대에 대항한다. 안 그래도 가장에 의한 피해자인 약자들이, 가부장제가 발생시킨 커다란 비극을 해결해야 할 의무까지 떠안은 셈이다. 동시대에 발생한 가장 참혹한 비극 중 하나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심 나코네치니는 여성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소련의 여성들이야말로, 가부장제의 지독한 피해자임과 동시에 ‘여군’으로서 전쟁의 책임까지 짊어져야 한 역사를 겪지 않았던가, 그녀들의 눈에선 전쟁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원흉까지도 함께 비춰진다. 1990년 오데사 태생의 막심 나코네치니는 우크라이나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버터플라이 비전>으로 장편 데뷔하며, 장편을 선보이기 이전 <인비저블>이라는 단편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여선생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학생들, 여선생이 이를 불쾌해하게 된 트라우마의 경위를 추적한 극으로, 나코네치니는 장편 데뷔작에서도 남성에 의한 여성의 상흔, 트라우마를 고찰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영화-발렌틴 바스야노비치의 <아틀란티스>, <리플렉션>,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돈바스>-에선 기계 장치의 '모니터'가 프레임을 대체하고, 이를 포착하는 고정된 카메라가 만들어낸 ‘정적인 프레임’이 도드라지며, 이를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공통된 연출이 눈에 띈다. 본 연출이 특정 감독에게만 국한되었다면 개별적 특징으로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바스야노비치나 로즈니차가 보여주는, 소위 '기계적인 프레임'이 나코네치니의 작품에서도 반복진다. 본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기계적 프레임은 다음과 같다. 수색과 살생을 위한 ‘정찰기 모니터’, 선전을 위한 ‘언론사 카메라의 모니터’, 극우분자들이 찬동하는 'SNS 라이브 및 유튜브' 등이 기계적인 프레임을 형성한다. 이들을 통해서 보는 세계는 '막'이 덧씌워져 있다. 본래 인간의 동공이 날 것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면, 전쟁 중엔 특정한 거름막이 ‘검열’을 거쳐서 보여준다. 흡사 전쟁에서 충돌하는 두 이데올로기의 '당파성'에 따라서 선/악을 나누듯, 사실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가치 판단을 마친 대상만이 송출될 수 있다. 영화에서도 기계가 속한 이념에 호의적인 대상만이 프레임에 길게 노출될 수 있으며, 이념에 적대적일 경우 프레임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변모하거나, 대상을 ‘악마화’한다. 기계적인 프레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작위적인’ 산물이 역으로 인간의 존재를 좌우하고 결정하는 참극을 반영한다. 또 전쟁에서 만연한 '군수품'들이 인간을 대체하고 살해하듯,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인간을 바라보며 역으로 좌우하는 ‘비인간화’를 프레임이 반영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인간의 눈은 대상을 바라본다. 사람이 피사체에게 가하는 ‘시선’은 대상을 ‘변형시킬 힘’이 있다. 하지만 그냥 바라만 봐선 안 된다. 바라보면서 어떤 표정, 행동이 더해져야 시선은 커다란 효력을 지닌다. 해당 행위들이 덧붙여지지 않은 인간의 동공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보존하며, 시선의 영향력은 피사체가 충분히 거부하거나 튕겨낼 수 있다.      


즉 인간이 시선이 아무리 쏘아본다 한들, 피사체는 마음만 먹으면 항구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정찰기의 모니터가 대체한 프레임은 다르다. 릴리아가 조종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찰기 모니터는 '조준' 내지는 '살상'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프레임에 대상을 가두고, 피사체를 적발한다면 있는 그대로 놔두지 않고 '사격'을 시작한다. 전쟁 기계가 쏘아보는 시선은 ‘죽음의 불가항력’이다. 본래 과거엔 생명으로 가득 찼을 초원을 정찰기가 쏘아보자 조금의 '숨결'도, '호흡'도 감지되지 않는다. 정찰기는 가급적 생명을 보고 싶지 않다. 그는 생명이, 이로써 위협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고, 이를 위해서 생명이 있다면 죽인다. 정찰기가 보고 싶은 어떠한 위협도 없는 '황량한 풍경'을 위해서, 정찰기의 시선은 세상을 왜곡한다. 그 정찰기의 시선은 유연하기보단, 기계의 ‘삐걱거리고 뻣뻣한 틸트·패닝’이 반복된다. 자유로운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자신의 기준에 대상을 맞추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도도하다. 그 시선은 모든 인류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아군이라면 비교적 사려 깊은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런데 적군이라면 시선을 달리 한다. 적군은 우리 측에 '죽음'이라는 목적 말고는 쓸모가 없다. 생사를 결정하는 특정 진영에의 소속, 이를 인간 스스로 증언하거나 항변할 수 없다. 그 인간이 어떤 '트럭'에 탑승하고 있고, 또 그 사람이 어느 국적의 '여권'을 가졌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설령 기계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이 아니더라도, '전시'에 상응하는 영화의 카메라는 일단 대상의 소속을 확인하고자, 그 대상이 올라탄 트럭, 해당 군인의 국적을 증명하는 여권을 먼저, 위주로 쳐다본다. 인간이 트럭에서 내리더라도 카메라는 트럭 안을 좀 더 포착하고, 여권을 우선적으로 포착하느라 정작 인간의 얼굴은 등한시되어 프레임에서 잘려나간다. 여권을 들고 있는, 즉 여권에 의한 손만 포착된다.      


이후 여권을 확인하여 릴리아가 우크라이나 국적임이 확인되자 비로소 그녀를 바라본다. 우크라이나 국적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녀를 바라봤을까? 바라봤더라도 더는 존재하지 않게끔 없애버리지 않았을까? 즉 기계에 의한 프레임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시야에 상응하는 프레임이 회복되더라도, 전시에는 인간다운 시선을 회복할 수 없다. 전쟁을 지배하는 기계들을 우선해서 바라봐야 하고, 기계에 의한 인간만이 포착될 수 있다. 여권이 확인된 릴리아는 귀환한다. 이후 방송사에서 '애국자'이자 '전쟁영웅'인 릴리아를 인터뷰하고 환대하기 위해서 몰려든다. 그녀의 인터뷰는 시청자들의 '실시간 채팅'이 가능하고, 그들이 '좋아요'나 '싫어요'를 누르는, 라이브 매체의 프레임에 담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칭송하는 채팅'을 남기고, 마구 ‘좋아요’를 누르는 해당 프레임에 담기는 사람들은 대상의 진실이 어떠하든 애국자로 칭송된다. 릴리아는 실제로 전선에 뛰어들어서 정찰을 하다가 분리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가혹한 성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책임진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애국자이자 영웅임을 승인하는 프레임에 담기지 않더라도 충분히 높게 기려져야 한다. 그런데 릴리아는 포착되는 것이 피곤하고 지긋지긋하다. 전쟁에서 포착되는 것이란 곧 '죽음'이나 '기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사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그렇게 보도 프레임에 잠시 머물다가 카메라로부터 저 멀리 사라져가는 릴리아는 이내 곧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힌다. 그녀는 영웅이기에 공공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무료로 버스에 탑승하려 하지만, 승객들은 왜 그녀가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하느냐며 비아냥대고 결국 릴리아는 버스에서 내린다. 선전을 위한 프레임에 탑승하면, 불쾌하고 자극적인 질문 공세에 시달리며 당국에 일조해야 한다. 그 질문 공세가 실제 영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가짜 영웅을 만들어 내거나 영웅을 폄하할 수도 있다. 진짜 영웅이든 가짜 영웅이든 그들은 프레임에서 ‘이미지’로 머물 때 영웅이다. 반면 그 프레임을 이탈한 존재는 영웅이더라도 영웅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즉 전쟁은 실제 대결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곧 이미지의 대결이다. 희생이 폄하당한 영웅이 릴리아라면, 가짜 영웅으로 칭송되는 존재는 릴리아의 남편 토샤다. 릴리아가 말하길 토샤는 '보이 스카우트' 수준으로 국내 순찰만 돈다. 더욱이 안보를 위협하는 적군과 위험을 불사하고 싸운 것이 아니라, 숲을 순찰하며 아무 죄도 없는, 민족은 다르지만 사실상 같은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집시'를 위협하고 살해했다. 그 장면이 SNS 라이브 프레임에 담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좋아요’를 마구 누른다. 담기는 내용은 분명 비인도적인 범죄, 전쟁 범죄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좋아하는 프레임에 담겨, 범죄는 업적 이미지로 둔갑되고, 카메라에서 멀어지는 릴리아와 달리, 카메라에 달라붙어 있던 토샤 일당은 영웅으로 승격된다. 그들의 범죄는 안보나 치안을 지키는 행위와 무관한데도,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프레임에 한번 걸러져서 포착되면 애국자가 되고, 그들의 선처를 주장하는 지지자들이 법원 앞에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러한 본 작품의 전쟁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의 희생을 보이 스카우트들이 빼앗아간다는 것, 다른 하나는 범죄 행위를 숭고하고 거룩한 이미지로 포장하는 것이 전쟁의 실체라는 것. 더욱이 그녀의 임신을 수상하게 여기는 유튜버가 릴리아를 보도하며, 그녀의 임신도 당파적인 음해를 당한다. 즉 전쟁에 의한 프레임, 기계에 의한 프레임은 존재를 죽이거나 당파적으로 해석하여 진실을 훼손한다. 그래서 릴리아는 프레임 밖으로 달아난다. 전장에서는 적군의 시야, 곧 프레임 안에 노출되면 죽음이나 가혹한 성고문이 이어졌기에 포착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로 돌아왔지만, 귀환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이후에도 카메라는 대체로 정적이다. 카메라가 차 안에 가만히 고정되어 차의 움직임이 숏의 운동을 좌우한달지, 아예 움직이지 않는 집에 카메라를 우두커니 세워둘 땐 프레임은 미동조차 없다. 기계들은 오만하게 멈춰서 인간이 자신에게 맞춰서 포착될 것을 강요한다. 전장에서 기계는 자신들의 프레임에 인간을 가두고, 기계가 원하는 이미지로 인간을 뒤바꾼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마찬가지다. 귀환한 그녀에게 ‘인터뷰’를 감행하고, ‘건강검진’을 시킨다. 인터뷰 과정에서는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떠올려야만 하고, 건강검진을 받는 시퀀스에서는 릴리아의 신체가 분절되고 클로즈업되어, 사실상 국가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서 ‘도륙’ 나는 기분이다. 이후 그녀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니, 배가 불러가며 '변해가는 그녀'를 카메라가 능동적으로 포착하기 보단, 카메라를 든 사람의 기준에 맞춰서 그녀에게 '낙태'를 종용한다. 그래서 릴리아는 프레임 바깥으로 자주 이탈한다. 이에 때때로 영화는 그녀가 사라진 텅 빈 방, 인적 없는 사물만 포착한다.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크라이나는 다시 그녀를 호출할 것이요, 전쟁 중 그녀는 그 호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호출을 받은 그녀는 카메라가 포착하는 텅 빈 프레임에 나타날 것이 예고된다. 전화를 받고 인터뷰에 가야 한다. 우크라이나를 위해서 그녀는 이러저러하게 보여야만 한다. 그것이 전쟁 중 국민이 처하는 가혹한 숙명이다. 이는 영화 형식으로 따진다면 '컷'이다. 자유롭게 노닐던 릴리아를 중단하고, 국가가 원하는 릴리아를 만들어내니 말이다. 전장에서는 그 컷이 더욱 만연했다. 적군의 프레임 안에 릴리아의 정찰기가 노출되어 실탄을 맞고 비행기는 추락한다. 그리고 블랙아웃이 발생하며 숏은 연속되지 않는다. 또 영화에선 나비가 릴리아를 바라보는,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숏이 등장하는데, 해당 나비가 그녀를 바라보면 릴리아의 배는 포탄을 맞아 뚫리게 되는 등 결코 이전의 몸과 같지 않게 된다. 더불어 영화 플래시백에서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고문 장면들에서도, 그녀의 손발이 결박되거나, 잔혹한 고문으로 '의식'을 잃는 등 전쟁에선 '블랙아웃'이 만연하다. 여러 색깔과 빛깔이 만연하던 삶에 갑작스레 어둠이 내려앉아 인간은 ‘끝’을 직면한다. 기계 프레임에 담기는 피사체가 이전 형태를 잃고 '조악한 픽셀'로 왜곡되거나, 불완전한 송출로 인해서 현재 모습이 이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삶을 이어지지 않게 만든다.      


그렇다면 삶을 이어지게 만드는 일상의 형식으로 나코네치니는 '롱테이크'를 제안한다. 롱테이크는 컷이 없다. 대상의 행위가 끝날 때까지, 대상이 촬영을 원치 않을 때까지, 피사체의 진실을 생생히 포착한다. 컷이 없는 현실의 시간을 생생하게 보존한다. 릴리아는 롱테이크의 복귀를 바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일단 릴리아는 귀환하는 당시 '아웃 포커싱'으로 흐려진다. 그녀는 담배를 피워야만 한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가 이를 자꾸 간섭한다. 또 그녀는 식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그녀 얼굴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흐려진다.' 그녀가 원하는 일상의 얼굴을 아직 되찾을 수 없다. 물론 그 얼굴이 담기는 롱테이크라는 형식은 연속적이다. 그녀가 포착되든 포착되지 않은 본 작품의 롱테이크는 기계적으로 유지되어 흐름을 이어간다. 그런데 연속되는 형식에 담기는 내용은 '불연속적'이다. 릴리아는 현재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 토샤와 엄마를 자신의 집에서 돌려보낸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연속적이다. 더욱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려는 현재에 자꾸 '플래시백'이 침투하며 흐름을 자르고 어깃장을 놓는다. 릴리아는 가급적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면 평온한 일상을 회복하기 불가능하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결과가 평화롭고 싶은 현재로 이어지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원하는 얼굴은 ‘평온’이다. 사람들이 보는 릴리아의 표정, 거울에 비친 릴리아의 정면 등이 말이다. 그런 삶을 이어내고 싶다. 그러나 영화 속 토샤만 볼 수 있는 릴리아의 복부에는 ‘흉터’가 크게 남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등' 부근에도 널찍한 상처가 그어져 있다. 릴리아는 옷으로 이를 숨기려 안간힘이지만, 그녀를 이용해 선전하려는 우크라이나는 자꾸 아픈 기억을 들추고 헤집어놓는다. 그녀가 원하는 삶의 연속을 중단한다. 더욱이 공식 석상에 불려가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참혹한 과거가 자꾸만 '매치컷'된다.      


우리는 어째서 특정 기억을 연상하는가? 해당 기억이 현재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맥락이나 상황과 유사한 과거를 매치컷하는 셈이다.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이와 유사한 공간에서의 달콤한 과거를 흡사 술처럼 꺼내 마시거나, 아니면 현재에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마찬가지로 흡사한 과거를 꺼내서 해결책을 찾아본다. 다시 맞닥뜨려도 좋은 상황인지, 또 이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말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맞닥뜨린 문제가 릴리아의 일상에서 연속함에, 전쟁과 현재의 매치컷, 플래시백이 끊이지 않는다. 토샤와 주변인들은 릴리아에게 낙태를 종용한다. 정작 그녀는 임신 중단을 원치 않지만 주변에서 강요가 심하다. 그래서 그녀가 원치 않는데도 수술대로 강제로 끌려가자, 고문실로 옮겨지는 과거가 오버랩된다. 또 분리주의자들의 성고문으로 인해 그녀가 임신을 했고, 예상치 못한 배가 부풀어 오르며 '튼살'이 생긴다. 살이 튼 자국은 적군에 의해서 생긴 흉터와 매치컷된다. 과거도, 현재도, 타인의 폭력에 의해 그녀 몸이 변해간다. 출산 또한 마찬가지로 고문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시기와 매치컷된다. 그녀의 몸이 박살나고 파괴될 것이라는 듯이. 해당 기억들은 조악하게 ‘픽셀화’되어 파편적으로, 흐릿하게 포착된다. 이는 전쟁 기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기억이라는 점을 환기함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상기해야 하지만 가급적 이를 직면하고 싶지 않아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그녀의 의식에 상응한다. 그녀는 잔인한 현재 때문에 과거를 상기해야 하는 것도 싫고, 과거에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흐리게 만들어 현재로 연속하고 싶지 않다. 그런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있다. 여성 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우울증의 요소로 느리고 일정한 어조, 잦은 침묵, 복원할 수 없는 삭제, 완만화와 무기력을 나열한다.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직후,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 엄마와의 대화에서 현재에 참여하거나 연쇄할 수 없는, 부동에 가까운 몸짓과 표정에서 그녀의 우울증을 감지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의 주장에 따른 우울증은 '내게 값진 부분'을 상실하거나 외부에서 빼앗아 갈 때, 해당 '부정을 부인'하며 발생한다. 그래서 부정이라는 사실이 발생한 과거에 따른 현재에 우울증 환자는 참여하기 어렵다. 과거를 부정하면 마찬가지로 그 과거의 결과인 현재 또한 부정되기 때문, 이로써 부정된 현재에 참여하지 않는다. 릴리아는 과거를 지운다. 어쩔 수 없이 상기되지만 이를 흐리게 만든다. 이로써 충격을 상쇄하지만, 그 대가로 해당 과거에 따른 결과인 현재에 참여할 수 없다. 그 우울증은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특히 여성에게 더 깊게 동반된다고 크리스테바는 지적한다. 일단 영화 속 우울증은 1차적으로는 전쟁에 의해 발생한다. 전쟁이 그녀가 소중히 여긴 일상을 앗아갔다. 그런데 해당 전쟁이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한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 여성에게 더 불합리하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릴리아가 전장에서 싸웠다면, 토샤는 무기를 빼돌려 집에다가 은닉한다. 자신의 분노를 과시하며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릴리아에게 낙태를 종용한다. 즉 남성은 가장에게 허용한 '무기'를 여성을 지배하는데 사용한다. 정작 그 무기를 허용한 이유인 치안이나 안보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중범죄를 저지르며 사회를 흉흉하게 만든다. 국가는 정작 남성들을 프로파간다 이미지로 미화한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사회에서 여성은 안보를 책임지는데 관심이 없는 남성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며 헌신했지만, 이후 되돌아온 현실은 성고문으로 임신하게 된 그녀의 '군복', 즉 여성의 희생과 명예를 회수하려 한다. 남성 군인은 처하지 않는, 모욕적인 성기 검사나 낙태를 위해 수술대에 오른다. 토샤의 자존심을 위해서 릴리아에게 낙태를 강요했다가, 정작 그가 석방되기 위해서 릴리아의 임신을 이용한다. 전쟁에 좌우되어 우울증에 걸린 군인의 몸, 그 중에서도 여성 군인은 가부장제 내 남성 가장들의 폭거로 ‘이중 우울증’에 빠진다. 그녀는 출산할 생각이지만, '술과 담배'를 연거푸 들이켜서 ‘이중 상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해야지만 겨우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로써 릴리아가 바랐던 롱테이크의 회복도 좌절된다. 삶에서 소중한 것은 연속되지 않구 자꾸만 유실된다. 그러나 여성은 바랐던 삶을 되찾아야 한다. 전쟁 기계로 전락한 '나비'로서 여성의 진실을 되찾으며 말이다. 나비는 우아하고 매끄러운 비행으로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며 꿀을 빨아먹는다. 나비의 경쾌한 비행과 파란 하늘의 결합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자유를 환기한다. 그런데 해당 나비가 '리모컨'에 의해서 조종되어 비행이 삐걱거리고,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초월적인 하늘은 '제공권'으로서 모조리 통제 당한다. 해당 나비의 시선과 제공권에서의 인류는 '컷'된다. 나비의 자유를 통제하고 기능만 착취하는 역할을 여성 릴리아가 맡았다. 그런데 나비가 '꽃가루'를 옮기며 꽃의 번식을 돕는 곤충인 것처럼, 나비와 같은 여성도 본래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나비는 여성에 의해서, 그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결국 가부장제가 그들의 잠재력과 자유를 착취한다. 그래서 나비도, 여성도 남성에 의해 악용된 본래의 잠재력을 회복해야 한다. 본래 영화의 카메라는 릴리아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날아다니기보단 ‘전쟁’에 의해서 발걸음이 봉쇄됐고, 전쟁 중 토샤와 결혼하여 ‘가장’까지 더해져 이중으로 발이 묶였다. 병원에서 나온 릴리아를 마중 나와 집으로 데려가는 롱테이크의 달리는 그녀 발걸음이 아니라, 토샤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비로서 그녀가 자유롭게 꽃가루를 묻히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토샤 자신의 꽃가루를 묻히라고 역정을 냈다. 이로써 태아를 바라보는 '초음파 프레임'은 정찰기처럼 살상용이 될 뻔 했다. 그녀가 뱃속에 다른 남성의 아이를 계속 품고 있자 토샤는 자살로 생을 마친다. 남성은 자신의 목숨으로 여성을 협박한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릴리아는 출산을 선택한다. 전쟁과 가부장제에 의해 ‘죽고 죽이는 존재’가 되어 여성이 바라는 '창조자'로서 삶을 박탈당한 트라우마를 회복한다. 릴리아가 출산을 결정하자 토샤가 자살하기 전부터 그녀 발걸음이 이제 카메라를 규정한다.      


전쟁 기계였던 사물들, 그러나 여성들이 나비로 되돌아가 삶을 번성시키고 사회를 재구성하자 인큐베이터나 태아를 확인하는 초음파 모니터 등 ‘생명을 위한 기계’로 되돌아간다. 나비로서 수동적인 꽃의 번식을 돕는 릴리아는 아이를 낳아서 아이가 필요한 존재에게 '입양'을 보내고, 이후 다시 군대에 복귀한다. 그렇지만 살상하기 위해서 대상을 조준하고 가두는 프레임이 아니라, 생명력으로 우거진 초원을 있는 그대로 조망한다. 여성에 의한 군대는 가부장적인 군대가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해먹은 안보와 치안을 회복한다. 즉 나코네치니는 멀쩡히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왜곡하고, 특히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하는 전쟁을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은 여성성으로 반성한다. 이는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입은 그녀들이 돌려받아야 할 정당한 몫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인류의 동공과 나비의 역할, 기계의 용도를 복권할 때, 비로소 세계는 다시 생명력을 되찾을 지다. 이를 기계적 프레임과 상징적인 이미지를 활용해서 풀어내는 나코네치니, 최근 풍전등화에 놓인 우크라이나 영화계는 영화 미학을 폭넓게 실험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유미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는 사치였다. 리얼리즘을 추구하여 러시아가 앗아가고 은닉하는 전쟁의 참혹한 진실을 기록하고, 스크린 너머로 자신들의 참상을 알리는데도 부족했다. 이러한 와중 나코네치니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영화미학을 걸출하게 실험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현실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그의 강렬한 데뷔작은 우크라이나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 앞으로 기대하게 될 이름을 각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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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19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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