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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28. 2023

캉탱 뒤피외,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욕망의 시간에서 모두의 시간으로

캉탱 뒤피외(Quentin Dupieux),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Incredible But True) 

- 욕망의 시간에서 모두의 시간으로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1

“인간은 오직 시간 때문에 자신이 갈망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다.” -헤르만 헤세-

시간은 언제나 일정하다. 1초, 1분, 1시간…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이 흐른다. 시간 자체는 공평한 사실 그 자체다. 그러나 인간의 주관에 따라서 똑같은 시간을 각기 달리 인식한다. 인간이 깨어 있느냐 잠드느냐, 그 시간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인간이 그 시간에 기억할만한 행위를 했는가, 아니면 여느 때처럼 지지부진하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그 자체로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 편향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하얗고 중립적인 캔버스와 같은 시간에 인간은 욕망과 주관적 흔적을 새겨간다. 개인의 욕망과 상상, 계획, 특히 예술적 공상에 따른 현실 변형, 폭력을 논하는 캉탱 뒤피외는 이제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에서 시간을 소재로 자신의 탐구를 이어간다. 1974년 파리 태생의 캉탱 뒤피외는 '미스터 와조'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프랑스의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항상 기발한 상상력과 컬트적인 색채가 번뜩인다. <광란의 타이어>에선 자동차의 부속품인 사물 타이어에 주체적인 생명을 부여한다. <이건 아니지>에선 비가 내리는 사무실 등 상식 바깥의 초현실성이 반짝이며, <디어스킨>에선 가죽 재킷을 입은 유일한 사람이 되려는 남자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주둥이들>에서는 그간 우리의 인식을 뒤흔드는 아주 거대한 파리가 나타난다. 뒤피외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반적인 통념에서는 허용되지 않은 충격적인 설정들을 꺼내놓는다. 거의 1년마다 작품을 내놓는 다작 감독인 뒤피외는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으며, 작품의 규모나 비용보다 중요한 것이 기상천외하고 풍요로운 상상력, 아이디어임을 역설한다. 본 기상천외한 설정들은 개인의 통념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거대한 세계에선 존재하는 ‘낯선 타자’를 환기한다. 나의 앎이 미약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충격적인 타자들이 등장하지만, 이기적인 편견에 갇힌 인간들은 무한한 타자들에게 협소한 욕망을 투영하며 가능성을 축소한다. 즉 뒤피외는 세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구속하는 인간의 아집과 이기심을 폭로한다.      


<광란의 타이어>와 <디어스킨>에선 자신이 원하는 표상, 목적을 위해 세계를 왜곡한다. <광란의 타이어> 속 타이어, <디어스킨>의 조르주 모두 ‘연쇄 살인마’다. 조르주는 타인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고, 이는 조르주를 마주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킵 언 아이 아웃>에서도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대화는 형식 상 존재할 뿐 교류라는 알맹이가 없다. 이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외부를 볼 수 없기 때문인지, 뒤피외의 작품에서 ‘세계에 참여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무능하다. 현실 유리적 태도와 더불어, 뒤피외의 작품에선 사물이 기존 목적을 이탈해서인지, 마찬가지로 사물처럼 목적을 부여받는 직업군들 또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목적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광란의 타이어>에서 경찰은 타이어의 테러에 무능하고, <이건 아니지>에서 소방관은 방화를 방관한다. 그들은 주관적인 시야, 공상 너머를 바라보기 어려운, 이에 진실을 직면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주둥이들>에서는 거짓말, 오해가 판을 친다. 마누와 장갭은 제 욕심을 위해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기 바쁘고, 미셸은 마누를 자기가 아는 프레드라 착각했다. 그래서 언어는 객관적인 세계를 가리키지 않고 자기폐쇄적인 표상에 갇혀 있으며, 역시나 경찰은 무능력하여 거짓말의 희생양이 된 아녜스를 잡아간다. 그래서 뒤피외는 '의심'한다. 그것도 우리가 현실이라 믿기 쉬운 예술에 대한 의심을 말이다. <광란의 타이어>에선 가상을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강조되고, <디어스킨>에서는 현실의 자신이 아닌 TV 속 자신에게 홀리는 조르주, 이에 따라 가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역전이 발생한다. <이건 아니지>에서도 현실에 무의미한, 그저 실재의 흔적이자 배설물일 뿐인 예술이라는 관점을 부각하며 <킵 언 아이 아웃>에서도 실재와 예술에서 '눈 떼지 말고' 의심할 것을 촉구한다. <주둥이들>에서도 속단하며 타인을 믿는 세실 대신, 의심하고 질문하는 세르주와 아녜스 덕분에 현실은 이기적인 공상에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이를 위해선 머릿속 프레드가 아닌 현실 속 프레드, 표상 속 도미니크가 아닌 현실 속 도미니크를 바라봐야 한다.      


가상에 홀리는 구조 속에서 <디어스킨>이나 <이건 아니지> 모두 ‘아웃사이더’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망상이 예술과 일맥상통한다. <디어스킨>에서 카메라나 자켓을 손에 쥐고 가상, 시뮬라크르, 물신화가 순환함에 참극은 비롯하고, 반면 <이건 아니지>의 '탐정'처럼 나를 벗어나 상대를 골똘히 관찰할 때 사건은 해결된다. 즉 뒤피외는 우스꽝스러운, 전혀 믿을 수 없는 예술을 지향하고,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이 현실을 침략하는 이야기를 풀어내며, 결국 감상자의 의심을 환기한다. 그리고 이번 뒤피외의 신작에선 개개인의 욕망으로 점철된 왜곡된 시간이 현실을 침략한다. 뒤피외는 과연 어떤 교란과 부조화를 보여줄까? 그간 뒤피외는 자신이 창조한 기상천외한 피조물들을 명확하고 뚜렷한 디지털로 생생하게 포착했다. 필름과 달리 디지털의 질감은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다. 뒤피외는 자신의 초현실적인 피조물들이 현실이라는 듯 디지털에 담아냈다. 뒤피외의 세계관에서 기묘한 피조물들은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만든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이기에 누구나 그 실존에 동의하게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포착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전 작들과 달리, 본 작품은 선명하지 않다. 화면이 아주 희고 탁하다. 그 이유는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주관성’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알랭과 제라르는 각각 프랑스/일본에 머물며 ‘시차’가 발생한다. 서로 다른 시간에 머물게 된 이유는 제라르가 하반신에 부착한 ‘전자 남근’을 수리하는 욕망에서 비롯했다. 즉 만인에게 통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본인만 아는 주관적인 시간에 속하며 타인과 시차가 발생한다. 뒤피외는 ‘욕망에 의한 시차’에 더해서 12시간 이후로 곧장 워프하고 3일을 젊어지게 만드는 지하실의 '구멍'을 상상한다. 구멍을 통과하는 마리는 오전 5시에서 오후 5시로 단번에 워프하는 반면, 알랭은 마리가 자리를 비운 12시간을 오롯이 체감한다. 그래서 12시간을 단번에 건너뛴 사람의 시간과 현실에서 1초씩 차근차근 먹어가는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      


알랭은 12시간을 뛰어넘은 마리를 '오래 전에' 봤지만, 12시간을 단번에 점프한 마리는 알랭을 '방금 전에'봤다. 오늘을 사는 알랭, 내일을 사는 마리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서로가 혼탁하고 흐려서 잘 안 보인다. 즉 뒤피외의 이전 작들에 등장하는 피조물들이 그의 세계에서 나름 객관적인 대상, 주관과 무관했지만 이후 주관이 투영되는 객관이었다면,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에서는 처음부터 객관이 드물다. 시간을 워프하는 기술을 두고 알랭과 마리가 나뉘고,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잔느와 제라르 또한 시간이 각기 나뉜다. 이처럼 뒤피외는 무수한 주관성에 의해 각기 달라지는 시간을 탐구한다. 영화 도입부에선 알랭과 마리가 '이사'하여 처음으로 ‘나만의 집’, ‘우리의 집’을 갖는다. 이를 시간을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인류에 빗댄다. 시간이 흘러가듯, 알랭과 마리도 기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곳’(다른 시간)으로 이동한다. 이동하여 처음 맞닥뜨린 집은 ‘텅 비어’ 있다.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제공된 ‘빈 시간’을 각자가 주관적으로 채우고 꾸며간다. 자신들만의 시간이라는 듯 ‘커튼’으로 외부를 차단한다. 그런 시간은 아예 텅 비어서 다가오진 않는다. 이사 간 집에는 벽에 ‘빨간 페인트’가 미리 칠해져 있고, 정원엔 ‘폐차’가 덩그러니 방치돼 있으며, 지하실에는 ‘시간 워프 장치’가 있다. 떠난 누군가가 미리 채워놓은 ‘역사’가 함께 다가온다. 그래서 시간은 타인의 주관적인 과거를 품고서 현재로 다가오는 ‘중고차’에 가깝다. 이로써 어느 정도 미리 들어 차 있는 타인의 주관성과 타협해야 한다. 이때, 손때 묻은 주관성과 어떻게 타협할지, 각자의 태도도 모두 제각각이라서 서로는 하나의 시간에 전혀 다른 주관성을 채워간다. 알랭은 고물차를 폐차하려 했지만 제라르는 꽤 쓸 만하니 고쳐서 쓰라고 충고한다. 알랭은 워프 장치가 꺼림칙한 모양이지만, 마리는 회춘하고자 적극 사용한다. 이에 서로는 하나의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보고 있다.     

 

그래서 본 작품은 ‘컷’이 잦다. 마리와 알랭이 똑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시간에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하나의 테이크에 놓였다. 또 알랭과 마리가 약속한 시간에 함께 만나 공인중개사와 집을 둘러볼 때도 둘은 하나의 숏에 담겼다. 이때 그들은 모두의 시간에 참여한다. 그러나 마리가 알랭의 곁에서 떠나 12시간 워프를 하면서 양자의 숏이 나뉜다. 이후 돌아온 마리가 영생이라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자, 그녀의 뺨을 때리는 알랭과 그녀가 놓이는 숏이 각기 나뉜다. 마리와 알랭의 집들이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마리가 샤워를 했다고 믿는 손님의 인식과 달리, 마리는 자신의 워프 사실을 인지한다. 또 세 사람은 4시에 속하는 반면, 마리는 4시를 거치지 않고 새벽 5시에서 오후 5시로 단번에 뛰어넘었다. 그래서 세 사람/마리가 위치한 숏이 각기 분리된다. 즉 똑같은 시간을 각자가 주관적으로 사용하고, 이로써 서로가 전혀 다른 시간 속에 놓임에 각자가 위치한 숏이 꺾인다. 이렇게 하나의 시간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인간의 주관적인 시야, 그런데 이와 달리 ‘기계’는 객관적이다. 뒤피외는 인간과 기계를 병치하며 인간의 주관성을 반성한다. 영화의 도입부, 알랭은 게임을 하느라 바쁘다. 그 와중에 전화가 울린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의 목소리는 약속을 잊지 말라며, 서두르라고 보챈다. 게임할 때 알랭의 시야는 자신의 주관성을 따라 모니터에 갇혀있었다면, 전화벨이 울려서 주관에서 벗어나 마리와 함께하는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 참여한다. 마리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전화가 알랭이 주관성을 극복하게 만든다. 알랭이 제 주관에 머물러 있었을 땐, 가만히 앉아서 ‘부동’했다. 이후 외부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서 뿌리박힌 주관성을 일으켜 세우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인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달리 숏, 다양한 것을 한데 모아 포착하는 롱숏으로 알랭을 둘러싼 환경을 널따랗게 살펴본다. 가만히 앉아서 자기가 보고 싶은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알랭과 딴판이다.      


이후 마리와 알랭이 이사 갈 집을 둘러본다. 이때도 달리 숏이다. 뒤피외는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의 참여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달리 숏으로 가시화한다. 이는 저녁 식사에서 ‘가만히 앉아’ 제 얘기만 쏟아내고 타인에게 이동하지 않는 네 명의 사람들과 상반되는, 대상과 시공간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전화기와 카메라가 참여하는 시간은 '현재'다. 현재엔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기계는 현재의 우발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또 현재는 앞으로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많은 것들을 짓밟고 사라지게 만든다. 기계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시간의 폭압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장총, 전자 남근, 자동차 모두 다 현재가 즈려밟고 전진하며 고장이 나고 망가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하는 것처럼, 12시간이 흘렀으면 그만큼 늙어야 하고, 지하실 아래로 뚫린 구멍을 내려가면 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이 당연함을 거슬러서 12시간이 지났는데도 3일 젊어지고, 지하실을 내려가서 '2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물들은 현재를 거스르는 ‘플래시백’으로 ‘좋았던 시간’만을 선별하여 길어온다. 마리는 당장 12시간을 건너뛰어 회춘하고 싶은지, 현재에 공인중개사가 워프 장치를 소개해준 과거를 자꾸만 회고한다. 외에도 알랭은 제라르의 '진상짓' 증거, 제라르는 기계가 멀쩡하던 시절, 마리는 새파랗게 젊었던 20대를 연거푸 플래시백한다. 그래서 영화는 흐리다. 과거는 물질이 아니라 기억으로만 존재하기에 탄탄하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에, 또 각자가 침잠한 회고를 타인이 볼 수 없기 때문에 말이다. 현재에 과거를 바라보는 인물들이 소환하는 것은 현재의 우발이 통제된 시간과 자신의 욕망이다. 이에 영화 후반부, 자기가 바라는 ‘욕망의 시간’에만 참여하려는 각 인물들의 시간을 빠르게 축약한 편집이 인상적이다. 객관적인 모든 시간 중 주관적인 시간을 선별하고 이외의 시간을 제쳐놓고 괄시함에, 내가 누리는 시간은 그만큼 압축되고 짧아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들은 '객관적인 모두의 시간'을 거부하는가? 뒤피외는 인류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상대의 눈에 혼탁한 각자의 주관적인 시간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보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 속 이기적인 사람들은 대화를 한사코 거부하기에 시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 뒤피외는 본 작품에서 대화를 '장광설'로 처리한다. 대화의 핵심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 시간 워프 장치나 전자 남근인 만큼,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준비 단계를 오래 거친다. 그러나 청중들은 장광설을 참지 못해 말을 싹둑 잘라먹고 제 주장을 설파하기 일쑤다. 제라르는 타인의 세계가 어떠했는지 관심이 없고, 자신이 전자 남근으로 대화를 주도하지 못한 것이 영 아쉽다고 불평한다. 알랭은 자기가 타임워프를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공인중개사의 말을 뚝 자른다. 외에도 대화는 '귀 따가운 잔소리'나 '접시가 깨지는 소음'이기에, 이를 듣기 싫은 인간의 ‘귀’는 영화 내내 닫혀 있다. 영화 속 공용어인 ‘불어’로 대화하더라도 불통이 만연하고, 제라르가 욕망만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을 땐 당연히 ‘일어’를 조금도 이해할 생각이 없음에 의사는 충돌한다. 또 욕망을 위해서 말을 아끼기도 한다. 마리는 나만을 위한 욕망인 시간 워프 장치를 타인에게 숨긴다. 즉 욕망에 의해 대화는 불발하고, 너와 나 모두 다 동의할만한 객관적인 시간을 합의하지 못하며, 각자는 시차가 아득히 큰 욕망의 시간에 갇힌다. 뒤피외는 이를 ‘교차 편집’으로 반영한다. 서로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 결코 맞물리거나 공존하지 않는다. 하나의 프레임에 함께 모여 있던 시절이 아득해진다. 이렇게 고립된 욕망의 시간에서 타인은 흐려서 잘 안 보이고, 오직 잘 보이는 것은 자신뿐이다. 제라르는 지독한 여성 편력을 과시한다. 잔에서 시작하여 일본인 스튜어디스, 백인 중년 여성, 흑인 여성 등 지금 연인에 만족 못하고 불륜을 반복한다. 사실 제라르는 그녀들에겐 관심조차 없다. 잔이 몇 살인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조금도 모른다. 백인 중년 여성과 교제할 땐, 침실에서 자신의 전자 남근만 조종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리비도’만 안다.      


잔 또한 마찬가지로, 제라르가 무엇을 하러 일본에 갔는지 관심을 두지 않고 연인을 갈아치운다. 알랭 옆집의 한 이웃은 고양이가 ‘속 뒤집는 선수’라 표현한다. 고양이가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해당 별칭을 붙였다. 그러나 고양이는 밖에 놔두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고양이가 가만히 있어주길 바라는 기대와 욕망에만 관심이 있다. 마찬가지로 마리도 워프하고 돌아오는 출구 앞에 꼭 '거울'을 놔둔다. 그들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대상’, ‘자신의 얼굴’만 보고 싶다.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하고자 높은 자리에 오른다. 제라르는 사장이다. 취미는 알랭이나 인턴 괴롭히기, 사람들에게 발화를 ‘배설’하며 감정노동 시키기, 제 볼일이 있으면 무례하게 내치기, 이기적인 존재는 높은 자리에 올라 내가 원하는 표상을 현실에 마음껏 실현하길 꿈꾼다. 그들은 돈도 벌고 싶고 높은 자리에도 오르고 싶으며 명예도 쌓고 싶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욕망이 결코 순수하지 않다. 우리는 이성적인 정신의 판단으로 이를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은 이성을 감정적이고 흥분하는 리비도가 배후에서 지배한다. 음흉한 리비도를 지배하기란 쉽지 않다. 정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기 부지기수다. 정신과 리비도는 별개이고, 결국 리비도가 정신을 압도한다. 그런데 제라르는 리비도의 근원인 남근을 기계로 바꾼다. 그간 남근이 정신을 지배하던 관계로부터, 이제 정신과 그것의 지령을 받은 손이 쥔 리모컨이 남근을 지배한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남성의 섹스 실력, 그 남성을 지배하는 변덕스런 남근이 좌우하던 섹스를, 이제 리모컨으로 원하는 체위와 자극을 선택하여 자신이 통제한다. 이런 리비도와 유사한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내가 애원하고 빌어도 묵묵히 흐를 뿐이다. 그렇게 흘러가면서 젊음과 생명을 쓸어간다. 마리의 정신은 제 몸이 젊길 바란다. 나는 젊고 싶은데, 나와 무관한 시간이 노화를 불러옴에 화가 난다. 그래서 무한히 시간여행을 한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의 시간에 다수가 참여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리는 타임 워프를 하겠다고 말하고 알랭은 설거지를 한다. 그런데 알랭이 접시를 깨트리고 짜증을 낸다. 만약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마리는 내가 원치도 않은 시간, 알랭이 망친 시간을 자신도 짊어져야 할지다. 나는 이런 시간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마리는 타임워프, 제라르는 시차가 다른 나라로 향한다. 생물로서 남근을 전자 남근으로 대체한 것처럼,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시간을 나를 위한 기계장치로서의 시간으로 뒤바꾼다. 귀찮고 껄끄러운 모두의 시간을 잘라내고, 욕망의 시간만을 취합하면 쾌락은 그야말로 농축된다. 하지만 뒤피외는 쾌락의 엑기스에는 대가가 있다고, 그것이 '화재'와 '부패'를 불러와 시간을 모조리 집어 삼킬 것이라 경고한다. 영화 속 욕망의 시간을 압축한 시퀀스가 욕망과 무관한 시간을 모조리 잘라먹는 것처럼, 욕망을 불러준 대가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빼앗는다. 불꽃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제라르에게서 주로 인다. 발열되는 총기와 전자 남근이 뜨거운 욕망을 가진 그의 상징이다. 제라르는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폭력적인 욕망을 즐긴다.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각기 다른 욕망의 시간들은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켜, 이윽고 화마로 번진다. 내게 좋은 시간을 불러오려다가, 되레 닥쳐온 불길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잡아먹는다. 제라르 외에도 공인중개사가 워프 장치의 '부작용'을 얼버무렸을 때, 알랭이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을 때, 서로 욕망이 부딪히고 마찰이 인다. 또 욕망에 탐닉하는 제라르와 마리는 '담배'를 연거푸 피운다. 지금 당장의 기분은 좋아진다. 하지만 담배는 피우는 사람의 시간을 서서히 태워간다. 12시간 워프를 다년간 진행한 마리는 마침내 용모가 20대처럼 변한다. 그런데 겉은 젊어졌지만 속은 썩어문드러져 개미가 들끓는다. 그녀의 시간이 곪은 이유는 아무리 젊어지더라도, 인간에게 허용된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알랭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옆집의 고양이도 죽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마리는 젊음이라는 욕망을 대가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무수한 시간을 내놓아야 했다.      


그녀의 시간이 곪은 또 다른 이유는 회춘해서 하려고 했던 ‘모델’ 꿈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모델이 되려면 타인과 협업해야 한다. 즉 그녀의 꿈은 자기만의 주관적인 시간이 아닌, 타인과 부대끼는 모두의 시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마리는 주관적 시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모두의 시간이 익숙하지 않다. 그녀는 당장 알랭과 함께 사는, 또 앞선 집주인들의 흔적이 묻어 있는 이사 온 집마저 적대감을 느끼고 파괴할 정도다. 이에 모두의 시간에서 가능한 자신의 주관이 썩고 불탄다. 그래서 뒤피외는 모두의 시간에 참여하는 알랭을 긍정한다. 제라르가 까다로운 계약을 내팽개치고 일본으로 내뺄 때, 알랭은 고객의 귀 따가운 요구를 묵묵히 참아가며 계약을 완수한다. 제라르가 자기 좋을 때만 알랭과 대화 및 통화한다면, 알랭은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이를 묵묵히 참고 받아준다. 인턴을 괴롭히기 일쑤인 제라르와 달리, 인턴이나 마리를 동정하는 알랭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객관적인 시간에 참여한다. 이런 그는 빚을 갚고 다수의 이익을 착실하게 쌓아 간다. 결말에서 알랭은 자연에서 반려견과 유유자적 낚시를 즐긴다. 그는 마리나 제라르처럼 욕망의 시간을 불러오기 위해서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모두의 시간 속에서 물고기가 다가올 자신만의 시간을 묵묵히 기다린다. 필연적으로 타인의 주관성을 묻힌 채 다가오는 시간이란 내게 전부 만족스러울 수 없다. 타인의 주관성을 지우고 또 지워서 욕망의 시간을 이룩하려다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유한한 시간은 불타고 썩어서 동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의 시간과 타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모두의 시간을 긍정하며 그 가운데서 나만의 시간을 위한 자리를 조심스레 물색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둘러싼 관점을 흥미롭게 탐구하는 뒤피외, 이를 가시화하는 편집과 위트있는 배경 음악도 인상적이다. 다만 하나의 시간에 참여하는 '모두'의 캐릭터성이 전부 충실하지 않다. 잔느의 얕은 서사가 아쉽다. 또 내용이 헐겁다. 러닝타임이 70분으로 짧았던 만큼, 조금 더 늘려서 설명을 충분히 해도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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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24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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