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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03. 2023

웨스 앤더슨, <애스터로이드 시티>

세계가 고장 날 때 예술은 시작된다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 세계가 고장 날 때 예술은 시작된다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4

“승화만이 죽음에 대항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인간은 이미 밝혀낸 것에는 흥미를 두지 않는다. 알게 된 것을 잃거나 잊지 않는 한, 가진 것보다는 갖지 못한 것, 아는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열망한다. 이 같은 새로운 삶, 신선한 앎을 향한 열망은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자면 '의지'다. 그 의지는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인간은 의지 하나를 성취하면 더는 기존의 의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새로운 의지를 상정하고 만족하고, 또 상정하고 만족하고의 연속… 그런 ‘의지의 인간’ 몇몇은 이제 지구에는 흥미를 두지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지구에는 밝혀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신비로 가득하지만, 그것에 더는 흥미나 미련을 두지 않는 인류는 다른 행성으로, 우주로 향한다. 웨스 앤더슨의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머나먼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을 향한 매혹, 지구 너머를 지향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열망을 탐구한다. 1969년 텍사스 휴스턴 태생의 웨스 앤더슨은 미국의 영화감독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앤더슨은 특유의 독창적인 미장센과 연출로 유명한 ‘비주얼 아티스트’로 손꼽힌다. 풍요로운 파스텔톤 색감과 완벽한 대칭을 구축하고, 이를 움직임이 거의 없는 카메라로 완전무결하게 포착한다. 다만 그의 근작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피사체를 위해 화면비를 자유분방하게 늘리고, 컬러와 흑백을 오가며,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교차하는 등 그의 카메라는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의 속성을 완벽하게 승화할 수 있는 형식을 고안한다. 그의 작품에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개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대사, 배역에 집중하게끔 배우의 개성을 모조리 지워낸다. 그의 세계는 아름답지만 딱딱하고 인위적이다. 그가 재현하려는 대상, 붙잡으려는 대상이 현재에 없기 때문, 그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붙잡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는 미래를 향하지 아니하고, 그가 접하지 못한 ‘과거’, 한때 가졌었지만 유년기라서 오롯이 갖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기억’으로 향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직접적인 역사,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이름은 바꿨지만 1950~60년대의 프랑스를 직접적으로 관통한다. 또 그가 어렸을 적 즐겨 보던 일본 애니메이션과 문화에 대한 향수가 흠뻑 묻어나는 <개들의 섬>이나 실존 인물 ‘자크 쿠스토’에게 바치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등 어렸을 적 좋아했던 것을 현재에 재현하며 ‘키덜트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렇게 대상의 속성에 충실하면서도, 앤더슨이 ‘선호하는’ 과거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동시에 그의 개성을 부각한다. 조형성과 키덜트 내용 모두 다 앤더슨이 투영되어 있기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앤더슨의 작품에서는 ‘소년’이나 ‘괴짜’로 분류되는 어설프고 서투른 ‘너드’가 등장한다. <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문라이즈 킹덤>, <개들의 섬>과 같은 작품이 그러하며, <다즐링 주식회사>에서 철없는 형제들이 마찬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의 영화는 미숙한 소년들이 역경을 극복하고 성장하는데, 서사의 과정이 사멸한 것을 우여곡절을 거쳐 어떻게든 완전무결하게 복원하는 그의 형식과 맞닿아있으며, 그의 연출처럼 영화에서도 유치하거나 아기자기한 주인공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년의 개성을 간직한 채로, 정신적으로 성숙한다. 이런 관점에서 앤더슨은 성장하면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예술로써 보존하듯 보인다. 이에 그의 영화는 현실에서 불발되는, 한때 꿈꿨었던 이상을 고찰한다. <개들의 섬>에서 자유주의가 꽃피는 것, <문라이즈 킹덤>에서 사랑을 성취하는 것,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에서 각자의 장점으로 승리를 쟁취하고 젊은 시절의 로망을 되찾는 것 등이 성장하는 인간이 현실과 타협하면서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상에는 역경, 장애물, '죽음'이 도처에서 에워싸고 있다. 특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개들의 섬>에서 죽음이 만연하다. 또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복어의 맛과 죽음이 비례하는 것처럼, 앤더슨은 소멸하기에 더욱 존귀하고 아름다운 이상향을 강박적으로 붙잡는다.      


그의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도 다들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붙잡아서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혈안이 나있다. 앤더슨은 1960년대의 예술계와 우주에 대한 미국인의 환상을 오늘날에 소환함과 동시에, 영화 속 등장인물들도 각자가 ‘바라고 원하는 기존 상태’를 유지하려 안달이다. 이를테면, 전쟁터에서 계속 사진을 찍어 온 사진작가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도 강박적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배우 또한 연극무대를 벗어나서도 항상 분장을 하고 대사를 술술 외며 다닌다. 장학생 선발에 참가한 '영재'들은 잊기 쉬운 '옛 위인'의 이름을 반복해서 말하며 재능을 과시하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똑똑한 '영재의 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를 반박하는 다른 학부형들과 고집스럽게 다툰다. 이렇게 항상성으로 똘똘 뭉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UFO가 출현했고, 거기서 외계인이 내려온다. 영화 속 반복되는 단어, '불확실성'이 나타난 순간이다. 그 외계인이 미칠 여파는 무엇인가, 그 외계인은 과연 인류, 특히 미국인에게 어떠한 해도 미치지 않을 것인가? 그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다. 분명 세상은 흉흉해졌지만, 영화 속 공산주의 세력과 냉전을 벌이는 미국은, 어떻게든 상대 진영에 '행복하고도 완전무결한 이상향'으로서 자신을 선전하고만 싶다. 미국은 그간 공들여 유지해온 긍정적인 항상성을 어떻게든 붙잡고자 집착한다. 이렇게 영화 속 세계는 '기대하는 것', '그렇게 하기로 된 것', '본질로 여겨지는 것'들의 항상성을 위하여, 변화를 강박적으로 거스르고 부정한다. 최적의 상태, 즉 삶을 안정적이고 일정하게 유지하고 싶은 인류는 흡사 정해진 품목만을 끝없이 반복 판매하는 영화 속 '자판기'와 태도가 흡사하다. 자판기는 인간이 설정해놓은 '배역'이나 '대사'를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하는 '배우'라 할 수 있다. 연극에 참여하며 정해진 행동, 대사, 연기만 반복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가령 토지를 파는 자판기에 의해서 등장인물은 자연스레 ‘공인중개사’가 되거나 투자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항상성은 '기계의 항상성'에 의해서 좌우되기도 한다.    

  

앤더슨은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그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방문객들을 최대한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롱테이크를 구성하는 카메라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수평적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며, 하나의 테이크는 다양한 프레임을 품는데, 배우들은 자신이 담긴 프레임이 카메라에 노출되어야만 마치 자판기의 ‘버튼’이 눌린 것처럼 대사를 시작한다. 배우들은 연극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연극을 좌우하는 ‘각본’이나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로 인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행동을 마치 자판기처럼 규정하게 된다. 반면 카메라가 다음 프레임으로 이동해서 배우를 외면하면 자연스레 대사를 멈춘다. 프레임 바깥에서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은, 버튼이 눌리지 않은 자판기가 물품을 내어주는 것처럼 ‘규칙 위반’이다. 이러한 롱테이크는 보통 '수평적인 트래킹 숏'이나 ‘패닝’이 구성한다. 수직적인 달리 인-아웃, 줌인-아웃이 아니라, 피사체와의 '거리'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는 수평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대상과 카메라간의 ‘항상적인 관계’를 가시화한다. 그런데 자판기가 고장 난다. 계속해서 유지되던 영화의 규칙이 깨진다. 오직 물건만 내어주던 자판기, 피사체를 촬영만 하는 카메라, 두 사물에 의해서 등장인물의 일정한 항상성이 유지되었으나, 이를 기원한 기계가 고장 나며 카메라가 이동하지 않았는데도 프레임 바깥에서 소음이 침투하는 '오반응'이 발생한다. 자판기 외의 기계 또한 고장 난다. 우주를 관측하는 ‘천체 망원경’이 갑자기 인간의 제어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날뛴다. 기기가 흔들리지 않았을 때 이를 사용하는 두 청소년은 '과학자'라는 항상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망원경이 흉흉하게 흔들리며 두 남녀의 입술을 충돌시킨다. 그러더니 이들을 과학자가 아닌, '연인'으로 극에 세운다. 또 한 예로, 우기와 우드로는 ‘자동차’의 속력 등을 정교하게 계산하여 대상을 파악한다. 그러나 이들이 분석한 자동차는 곧장 고장 나며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완벽해 보이던 그들'로부터 '허술할 수도 있는 그들'을 불러온다. 이렇게 항상성을 유지하던 기계들이 고장 나면서 인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영화에선 고장 나며 항상성을 이탈할 때 즐거워진다. 그것이 디지털 시대에서 35mm 필름으로 이탈하고, 선명한 컬러의 세계를 흑백과 아스라한 파스텔톤 미장센으로 어긋나게 만들며, 실사의 세계에 3D 애니메이션이 침투하는 본 작품의 형식이다. 연출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로, 미 당국이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거부할 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관광지'가 되고, 아이들은 '그림'과 '음악'을 창작하며, 세계는 재밌게 변한다. 관계 또한 새로워지면서, 지지부진하고도 둔감하던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든다. 이렇게 항상성을 거부하며 생경한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영화 후반부, 즐겁길 원하는 등장인물들은 지겨운 항상성을 부정하며 대혼란을 불러온다. 그런데 인간은 분명 고장을 자처하면서도 모순적인 심리 한 구석은 항상성을 고집하고, 또 외부에서 수용자가 바라지 않는 항상성을 주입하며 고장을 은폐한다. 인류가 스스로의 항상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에게 항상성이란 곧 '삶의 지속'이자 '죽음 유예'이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서 인류가 바라지 않는 고장은 바로 '엄마의 사망'이다. 사망한 엄마의 유해를 두고 외할아버지와 손녀들이 다투는 것 또한 항상성과 관련한다. 외할아버지와 손녀들 각각은 유해를 어떻게 처리하고, 이로써 어떤 방식으로 고인을 기릴지 견해 차이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유지하고 싶다. 그 주장에는 '나 자신'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요, 우린 나를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싶다. 그런데 내 주장에 타인의 견해가 침입하여 반발하고,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보내고자 하는 나만의 항상성을 중단시킨다. 이렇게 항상성은 기계에 의하기도 하지만, 제 유한한 삶을 유지하려는 인류의 본성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또 미 당국은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에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간 유지해온 미국의 항상성을 위협하기 때문, 그래서 비밀을 은폐하고자 방문객들을 격리하고 그들의 입을 단속한다.     


그래서 항상성이 무너진 '현실'/어떻게든 항상성을 굳게 믿는 '신념' 사이의 간극이 까마득하게 벌어진다. 고장이 새로운 국면을 불러와도 잔존하는 항상성이 이를 밀어내니, 우리는 고장과 가까워지고 싶고, 이로써 앤더슨은 고장에서 발생하는 예술이란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라 형식으로 말한다. 기계든 인간이든 세계든, 항상성을 유지할 때 영화의 카메라는 수평적인 무빙으로 카메라-피사체 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데 항상성을 거부할 때, 영화의 카메라 워킹은 달리 인으로 변한다. 대상과 일정하게 유지되던 간극을 좁혀서 가까워진다. 달리 인으로 기차의 도착을 포착할 때,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포문을 열며 예술이 시작된다. 달리 인 뿐만 아니라 줌인으로 대상에게 밀착하거나, 거대한 대상인 UFO의 경우 줌아웃으로 멀어져서 대상의 총체를 조망한다. 자신의 항상성을 방해하는 요인을 부정하던 세계, 하지만 고장 난 항상성의 균열 사이로 틈입하는 우연과 사건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양하고 생경한 것들이 잘 보이게 되고 '이어진다.' 고장에 의해서 이어지고 재설정되는 관계는 '분할 스크린'으로도 가시화된다. 본래 서로 못마땅해 하던 사위-장인어른의 관계가 소중한 존재의 사망, 자동차 고장을 계기로 이어진다. 서로 쳐다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간극을 분할 스크린이 좁히고 맞댄다. 이러한 이어짐은 형식에만 그치지 않는다. 형식에 담기는 내용 또한 마찬가지로, 미 당국에 의해 격리되어 특정한 항상성이 강제된 방문객들은 ‘대화’를 회복한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상대를 배척했다. 하지만 미 당국에 의해서 상대와의 분리, 고립이 강제되자, 오히려 상대를 밀어내는 행위가 따분해진다. 그래서 이들은 미 당국이 원하는 항상성을 거부하고 대화를 재개한다. 관심조차 두지 않던 방문객 서로를 알아가며, 받아들이지 않던 세계와 상대를 포용한다. 미 당국이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과의 '접촉'을 금기시하니, 청소년들은 생각조차 않고 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의 친구에게 연락하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폭로한다.      


즉 무엇이 항상성이냐에 따라서 고장의 유형, 예술이 되는 것은 제각각이다. 지상에서는 우주를 바라보는 한편, 지붕으로 올라갔을 땐 중력을 궁금해 하며 대지로 떨어지는 한 소년처럼. 영재임이 한때 당연했던 청소년들, 하지만 영재임을 부정 당하자, 그들은 영재로서 당국의 압박을 뚫어내고 천재성을 뽐낸다.(그리고 이번에도 업적을 이룩하는 대상은 앤더슨의 청소년들이다, 앤더슨은 청소년기에 했었어야 했던 일들을 <문라이즈 킹덤>처럼 지금이라도 성취한다.) 이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연기하는 무대 뒤편의 ‘영화 속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사람들도 다들 '별거', '불륜', '다툼' 등 상대가 내게 멀리 있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쪽지’를 건네거나 방문하고, 키스하며 애무한다. 서로가 가까워지고 당연하면 멀어지는 반면, 그렇게 멀어진 상태에서는 가까워지고 싶은 법이다. 그런데 항상성을 재설정하여 새로운 것을 불러오는 고장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하나는 고장 난 상태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당연하게 잘 아는 항상성과는 정 반대로, 고장은 해결되지 않는 찝찝한 ‘불쾌감’을 동반한다. 또 다른 맹점은 고장 난 것은 고쳐져야 한다는 것, 이로써 고장 나기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고장 나서 즐거운 세계에 항구적으로 머물 수 없다. 영화에서는 고장의 모호함을 대상의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 '의문의 부품' 등으로 처리한다. 이렇게 고장 난 기계처럼 세계가 고장 나며 발생하는 예술 또한 모호하다. 모호하다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가 ‘까마득하다는 것’, 그렇게 멀어졌을 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기에, 영화는 그 모호함을 극복하고자 거리를 좁히려 안달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웠던, 또 대상이 결코 모호하지 않았던 고장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본 작품의 편집은 애스터로이드 시티 '극본'이 집필되는 차원인 1.33:1 화면비와 흑백을 결합한 ‘영화 속 현실’, 그 극본이 실현되는 2.39:1 화면비와 컬러가 결합한 ‘영화 속 영화’를 왔다 갔다 한다. 바로 그 이유가 고장이 동반하는 모호함에 있다.      


갑갑한 흑백 차원, 널따란 파스텔톤 차원의 사람들 모두 다 아리송하다. 어느 차원에서는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 하고, 그것을 표현한 차원에서는 해석이 긴가민가하며, 의도는 당최 무엇인지 아리까리하다.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고장 난 세계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호기심, 이에 그들은 ‘고장 나기 이전의 원형’ 내지는 ‘고쳐진 세계’인 상대 차원을 오고간다. 2.39:1의 세계에서 밝혀지지 않는 의문은 1.33:1 화면비에만 머무는, 2.39:1 화면비에서 하차한 배우만 알고 있다. 그리고 고장 난 것은 올바른 상태가 아니기에 고쳐져야만 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고장 나서 잠시 동안 사람들을 외부와 격리시켰다면, 재빨리 도시를 고치고 수정해서 격리를 해제한다. 그래서 고장 난 상태는 필연적으로 짧다. 격리 상태에서 까마득했기에 서로는 가까워졌다면, 격리가 끝나고 원상 복구된 상태에서 당연해진 가까운 서로는 다시금 멀어진다. 앤더슨이 강박적으로 붙잡는 당연하지 않은 것은 당연스레 고쳐지는 항상성이 아니라,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필연인 고장이다. 앤더슨은 고장 난 것들에게 가장 적합한 화면비, 색채, 매체 등을 고안하여, 고장을 정성스레 수놓는다. 설령 고장을 고칠 수 없더라도, 고장 난 상태가 이해되어 당연해진다면, 당연하지 않던 고장이 항상성을 부여받고 당연해져 ‘비예술’로 전락한다. 그래서 예술은 고장 난 찰나를 붙잡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항상성을 부정하고 ‘자해’해며 고장을 내야 하는 숙명에 처한다. 현실과 비교했을 때 고장 난 앤더슨의 세계는 분명 처음 마주하면 새롭다. 그러나 그 형식을 계속 보고 있자면 더는 신선하지 않게 된다. 이에 앤더슨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세계에 흠집을 낸다. 일단 1.33:1의 흑백과 2.39:1의 컬러, 곧 자신을 기준으로 어긋나있는 고장 난 세계를 반복해서 오가며 고장을 유지한다. 이조차도 뻔하게 오가다 보면 하나의 항상성이 되어 통속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1.33:1의 흑백에만 머물던 '나레이터'를 2.39:1의 컬러에 ‘실수’로 출연시킨달지(앤더슨의 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레이터, 해설가, 도슨트 등은 분명 고장 난 세계를 분석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나, 그들의 기능조차도 앤더슨은 고장 내버리며 예술을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소행성이나 UFO 등의 정체를 영영 모호한 상태로 방치시키거나, 흑백이 유지되던 1.33:1 화면비에 컬러를 수놓고, 2.39:1의 널따란 컬러 세계를 때때로 1.33:1로 좁히거나, 세계가 고장 나며 연인이 된 이들을 결말에서 갈라놓고, 영원불멸한 고장의 상태를 위해서 이를 수리할 작가 콘래드를 사망시켜버리는 방식 등으로 어떻게든 고장을 유지한다. 영화 후반부에 격언처럼 반복되는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라는 대사, 이는 예술을 위해선 잠들고 고장 나야만 하는 크나큰 '대가'를 암시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개들의 섬>까지 앤더슨은 중요한 역사, 정치를 소재로 삼았다. 그러다가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예술 그 자체를 깊게 탐구하며 고유한 형식의 발원을 탐구하던 앤더슨은 그 사유를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이어간다. 예술은 고장 났을 때 발생하는 것, 고장은 이내 곧 고쳐질 것이기에 정성스레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장이 나면 당연하고 가깝던 항상성에서 멀어지기에, 이제는 되레 항상성에 가까워지고 싶어 다가가고 또 다가간다. 반대로 고장을 부정하는 항상성에 의해서 고장에 호기심이 샘솟기도 한다. 이렇게 예술은 ‘가까워지는 것’, 한편 밀착하면 이젠 항상적으로 당연해졌다는 것, 고장이 복구되었다는 것, 이로써 고장에서 창조되는 예술이 아니게 됨으로, 예술가는 어떻게든 예술이기 위해서 완벽한 세트장에 '원폭 실험'을 일으켜 세계를 흔들거나, 고친 것을 다시 죽인다. 이렇게 예술이 엄청난 위험을 부담하며 고장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쾌'를 불러오기 때문에, 멀어졌을 때 비로소 값져지는 살갗에 닿는 '감각'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고장을 정교하게 붙잡고 싶은 시네아스트 웨스 앤더슨, 그러나 영영 붙잡아 두면 뻔해질 것을 알기에, 그는 완전무결한 세계에 이해되지 않는 ‘대혼란’을 기꺼이 불러온다. 어떻게든 세계를 고장 내기 위해서. 다만 최근의 그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괄시한다. 그럼으로써 소환되는 것은 부유한 백인들로만 빼곡한 부조리한 세계, 검정은 없는 세계, 똑똑한 아시아인의 전형성만 답습되는 세계다. 미적으로는 유의미한 회고, 그러나 “그 회고가 과연 오늘날에 조금도 악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엔 고개를 휘젓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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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628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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